01여행과산행길

산성길15(남옹성1, 21/05/05, 불망비-남문-남옹성-시구문-남단사-공예관, For A Few Dollars More / Ennio Morricone)

이름없는풀뿌리 2021. 5. 13. 13:16
요즈음 – 산성길15(남옹성) – 하늘에서 내리는 별들과 비 바람 구름 땅에서 피어나는 꽃들과 풀 나무 동물 한군데 모아 담으려 입을 벌린 함지박 배달9218/개천5919/단기4354/서기2021/05/05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남옹성 (1) 검단산을 바라보는 커다란 펀치볼 같은 남옹성은 고원의 선선한 바람 따라 사시사철 야생화 寶庫인양 차곡차곡 담으려는 함지박이다. (2) 남장대 치에 앉아있으면 함지박 아래 세상의 올망졸망한 마을과 봉우리와 산 실루엣이 동양화를 그린다. 배달9218/개천5919/단기4354/서기2021/05/05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0) 남옹성 1) 산성길 초입 땅비싸리 2) 민들레 3) 개화 준비하는 노루발 4) 애기나리의 아름다움 5) 쇠별꽃(암술 5개, 별꽃은 3개) 6) 산성터널 언덕의 산사나무꽃 7) 지화문 8) 비밀의 장소에 처녀치마는 잘 계시고... 9) 둥굴레 10) 조개나물 11) 덩굴별꽃 싹으로 추정 12) 비밀의 장소에 잘 계신 할미꽃 13) 제2남옹성에서 14) 백선 15) 졸방제비꽃 16) 남장대 성벽의 붉은병꽃 17) 제11암문 야생화 군락지의 벌깨덩굴 18) 제11암문 야생화 군락지의 풀솜대 19) 제11암문 야생화 군락지의 족두리풀꽃 20) 제11암문 야생화 군락지의 노루귀 21) 한양 삼십리누리길 옆의 괴불나무 22) 아직 보수중인 제1남옹성 남옹성(南甕城) 이야기 원성 외 3개의 성으로 이뤄진 남한산성의 남격대는 검단산의 옛 지명이며 망월봉은 봉암(蜂岩, 벌봉)의 옛 지명이다. 남한산성은 인조2년(1624년)에서 4년(1626년)까지 대대적으로 수축하였다. 이로부터 정확히 10년 후 병자호란이 일어나 강화도로 피난하려던 인조는 타이밍을 놓쳐 청군에 길이 막혀 남한산성에 입성하여 45일의 항전을 시작하는데 인조 15년(1637년) 1월 1일자 실록을 보면 『청나라 한이 탄천에 진을 쳤다고 하다 청나라 한(汗)이 모든 군사를 모아 탄천(炭川)에 진을 쳤는데 30만 명이라고 하였다. 황산(黃傘)을 펴고 성의 동쪽 망월봉(望月峯)에 올라 성 안을 내려다 보았다. (虜汗合諸軍, 結陣于炭川, 號三十萬, 張黃傘, 登城東望月峯, 俯瞰城中)』 라 하였는데 훗날 봉암성을 쌓은 벌봉일대가 청군의 점령지였음을 알 수 있다 하겠다. 인조 15년(1637년) 1월 19일 자 실록에는 『오랑캐가 성 안에 대포를 쏘다 오랑캐가 성 안에 대포를 쏘았는데, 대포의 탄환이 거위알만했으며 더러 맞아서 죽은 자가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虜放大砲於城中, 砲丸大如鵝卵, 或有中死者, 人皆駭懼)』 라 하였는데 처음 겪는 홍이포의 위력에 공포감은 극에 달하였슴을 알 수 있다. 또한 인조 15년(1637년) 1월 24일 자 실록을 보면 『남성에 육박한 적을 격퇴시키다 적이 대포(大砲)를 남격대(南格臺) 망월봉(望月峯) 아래에서 발사하였는데, 포탄이 행궁(行宮)으로 날아와 떨어지자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피하였다. 적병이 남성(南城)에 육박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격퇴시켰다. (賊放大砲於南格臺、望月峯下, 砲丸飛落行宮, 人皆辟易。 賊兵進逼南城, 我軍擊却之)』 라 하였는데 임금님이 계신 행궁까지 포탄이 떨어지고 남장대 근처까지 진격한 적군을 열악한 화력을 지녔지만 구굉이 지휘하는 조선군이 용감하게 격퇴하였음을 알 수 있다. 1846년(헌종 12) 광주부윤 겸 수어사이던 홍경모(洪敬謨)가 편찬한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는 이때의 상황이 더욱 생생히 그려져 있다. 『청인이 대포를 망월봉과 남성(南城) 맞은편 봉우리에 설치하고 쏘기 시작하였다. 적이 또 대포 10여대를 남격대 밖에 설치하였는데 포의 이름을 호준 또는 홍이포라 하였다. 탄환이 큰 것은 사발만하고 작은 것도 거위알만한데 수 십리나 날 수 있었다. 매양 행궁을 향해 쏘기를 종일 그치지 않았다. 사창(司倉)에 떨어진 것은 기와집을 세겹이나 뚫고 땅속으로 한 자 남짓이나 박혔다. (淸人設大砲於望月峰及南城對峰放之.... 敵又設大砲十餘於南隔臺外 砲名虎? 紅夷砲 丸大如沙碗小比鵝卵能飛數十里 每向行宮而放之終日不絶 落於司倉瓦家貫穿三重入地尺許連中)』 라 하였음을 보아 홍이포(紅夷砲)가 병자호란의 승패를 크게 좌우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겠다. 그런데 일찍이 명에 사신으로 갔던 정두원의 건의를 받아 들였다면 청보다도 먼저 홍이포를 확보할 수도 있었으니 아쉽다 하겠다. 그런 결정적인 홍이포 전쟁을 치루고도 조선에서 홍이포 시제품을 만들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100년 후인데 그마저도 대량으로 주조하여 실전에 배치된 기록은 없다. 각설하고 청나라 군대가 자리잡고 대포를 쏜 장소가 지금 외성 3곳이 있는 검단산, 한봉, 벌봉(蜂岩)이었던 것이다. 남한산성 성안에서 가장 높은 곳이 수어장대가 있는 청량산으로 483m임에 반하여 검단산 520m, 한봉 418m, 벌봉 515m이니 성밖 고봉 3곳에 홍이포란 대포를 설치하고 임금이 계신 행궁을 내려다보며 대포를 쏘아대니 그 공포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때 겪었던 남한산성 방어 구조적 취약점을 보강한 것이 옹성(甕城: 성의 한 부분을 길게 빼내어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옆에서 공격할 수 있게 한 돌출부)을 강화한 것이다. 호란(胡亂)의 수모를 겪은 조선은 그 때의 공포심으로 호란이 종료되자마자 인조 16년(1638년)으로 추정되는 해에 신속히 지대가 낮아 방어의 어려움을 겪었던 남쪽 성벽에 3개의 옹성을 축성하였다. 본래 남한산성에는 북쪽 연주봉에 축성했던 옹성만 있었다. 지금도 남한산성 일주를 하다 보면 3개의 옹성이 남쪽에 몰려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옹성이 축성되었는데 한봉에서의 공격에 대비한 바로 장경사 앞에 있는 장경사신지옹성(長慶寺新地甕城)이다. o o o For A Few Dollars More / Ennio Morricone o o 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