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누가 감히 삼봉(三峯)을 하륜과 비교하는가?(17/12/20)

이름없는풀뿌리 2021. 6. 7. 10:42

(((三峰이란 호가 한때 도담 삼봉에서 유래되었다고 알려졌으나 현재는 삼각산이 정설이다))) 누가 감히 삼봉(三峯)을 하륜과 비교하는가?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다. 그러기에 애당초 패배자는 그의 행적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평가받기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인지도 모른다. 조선을 실질적으로 디자인한 삼봉 정도전과 디자인된 조선에 인테리어를 가한 하륜, 당시에는 패배자였던 삼봉과 제1차, 제2차 왕자의 난으로 승리자였던 하륜, 그러기에 삼봉은 假墓로만 남아있고, 하륜은 實墓로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역사의 라이벌로 비교하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재의 승리자는 삼봉이고 패배자는 하륜 아닐까? 이방원의 일개 책사에 불과했던 하륜을 조선을 기획한 삼봉에 비교한다는 자체가 비둘기를 봉황에 비유하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다. 그럼에도 하륜과의 공통점을 찾아본다면 1) 5살 차이인 그와는 안향-이제현-이색을 잇는 이색 문하의 동문으로 포은과 함께 친명파에 속했으나 하륜은 최초에 혁명에 가담하지는 않았다. 2) 그러므로 그들은 이상적인 불교를 배척하고 현실적인 유교, 성리학을 지향하였다. 3) 그들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삼봉은 고려왕조와 스승 이색, 이숭인을 배반하고 하륜은 포은, 삼봉등 그의 동지들을 배반할 정도로 비정함이 있었다. 4) 삼봉이 혁명에 성공하기 전, 유배생활을 전전하다 이성계를 스스로 찾아갔고, 하륜도 외톨이 생활을 전전하다 민제를 통해 이방원을 스스로 찾아갔다. 하지만 삼봉이 혁명에 성공하고 조선의 기초를 설계하는 찬란한 나날을 보낼 때 하륜은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삼봉을 척살(刺殺)하기 전까지 지방을 전전해야했다. 5) 계룡산 신도안 천도(遷都)를 반대하고 한양 천도를 주장하였다. 단 삼봉이 백악(白岳)을 주산으로, 하륜은 무악(毋岳)을 주산으로 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다른 점은 1) 삼봉이 외가(외조모가 노비출신이라는 설에 시달림) 문제로 출신이 애매한 반면, 하륜은 본가는 물론 처가까지 대대로 지방 대토호였으며 당시 실권자 이인임의 조카사위로 고려의 권문세족 출신이다. 그리하여 삼봉이 신분철폐를 주장한 반면 하륜은 신분제 질서를 유지하려 했다. 2) 삼봉이 애당초 역성혁명을 꿈꾸고 이성계를 부추겨 혁명의 정당성을 모색한 반면 하륜은 최초에는 정몽주등과 더불어 역성혁명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리하여 고려 왕조의 멸망시 낙향하였지만 삼봉, 권근의 권고로 새 왕조에 참여하게 된다. 3) 삼봉이 유교적 민본주의의 宰相정치를 지향한 반면 하륜은 중앙집권적 王道 정치를 지향하여 거사후 6조 직계제로 바꾸었다. 4) 삼봉이 요동정벌을 계획할 정도로 자주성이 강한 반면 하륜은 명(明)에 대하여 실리적인 사대 외교와 통혼정책까지 추구하였다. 5) 삼봉과 하륜의 사상은 둘 다 성리학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삼봉이 수도 설계, 성벽 건설, 헌법 기초, 각종 제도 도입 등 조선의 總論을 설계했다면 하륜은 속육전 편찬, 각종 제도 보완, 전지 측량등 조선의 各論적인 부분을 보완했는데 운하 건설 주장, 신문고 설치, 저화유통등이 대표적 제도라 할 것이다. 주저하는 이성계를 끊임없이 설득하여 새 왕조를 개창하고 새 왕조의 수도를 정하고, 스스로 건설하고, 그 지명과 건물에 일일이 명칭을 부여하고, 무엇보다도 새 왕조의 헌법(憲法)의 초안(草案)을 기안했고 조선 500년 내내 그의 이름을 거명하는 것조차 금기시하던 때 임금도 하늘인 백성을 배반하면 바꿀 수 있음을 경국대전에 명시하고 역적으로 몰리면 삼족을 멸하던 시절, 정도전 사후 동생 정도복과 매제 황유정은 연좌되지 않고 계속 관직생활을 하였고, 아들 정진은 정적 하륜이 건재하던 1411년 조영무, 안경공 등의 건의로 복직하여 판 나주목사로 기용되었고 세종 때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렀고 또한 정도전의 증손인 정문형은 세조 때 좌익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고 관직은 우의정에 이르렀을 정도로 자신의 형제, 아들, 증손까지 끄떡없이 고위 관직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조선의 뼈대를 세운 그에 대하여 누구도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억지로 대역죄인이라 하였으되 자손들이 살아가는데 지장없게 하고 벼슬까지 부여한 것을 보면 암묵적으로 그의 지대한 功에 대하여 시비할 수 없었다는 방증아니겠는가? 조선 개창 일등공신 삼봉이 이색과 정몽주를 핍박한 것을 나타내기 위해 삼봉사후 혁명파에 반대한 이색, 정몽주의 충절에 대하여 선양하는 내용이 실록 곳곳에 나타나는데 이는 조선의 모순이자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겠다. 조선에게 삼봉은 그야말로 종두자국같이 떨어버릴 수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신숙주는 말하길 “그가 죽은 것은 운수소관이지만 건국공로에 있어 그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다“고 평하였다고 한다. 일찍이 정도전(鄭道傳)은 스스로 『한(漢)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장량(張良)을 등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 고조를 이용한 것이다』라고 하였다지만 새나라의 개창, 헌법 작성, 도성 설계, 병법서 저작, 의학서 저작, 궁중 제례약 작곡 등등 거의 神의 경지가 아니고서는 이룰 수 없는 것들을 아주 짧은 시간(1392-1398)에 발표하였다는 것은 어쩌면 혁명(1392년)이전 이미 써 놓고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발표하였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을 정도이다. 그러한 면에서 그가 얼마나 평소에 철저히 준비된 혁명가요, 법학자요, 의학자요, 군사전략가요, 건축가요, 예술가요, 음악가였는지 알 수 있으며 그럴진대 대몽골의 뼈대를 세운 야율초재도, 책사 장량도 절대 그에 미치지는 못한다 할 것인데 책사 하륜 정도를 삼봉에 비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본다.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지만 삼봉의 원대한 뜻 앞에서 이런 상상을 해 본다. 몽골의 야율초재가 징기스칸 사후 툴루이와 오고타이의 왕위 계승 문제를 원만히 해결했듯이 만약 삼봉이 나이 어린 방석과 야망가 방원을 잘 조율하여 순차적으로 왕위를 잇게 하고 하륜과 알력하지 않고 협조하여 조선을 왕권 중심의 6조 직계제가 아닌 오늘날 독일, 일본의 수상 중심인 재상 정치 체제를 발전시켜 갔다면 민주주의 본산 서구보다도 훨씬 앞서서 세계 중심국가가 되지는 않았을까? 그의 뜻대로 요동정벌을 잘 추진했더라면 무주공산(無主空山)이었던 간도 지방, 연해주 지방이 우리 영토가 되어 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 36년, 남북 분단도 없는 세계 중심국가로 우뚝 서 있지는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배달9214/개천5914/단기4350/서기2017/12/20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삼봉이 태조, 태종, 세조까지 재상으로 근무하였다면 이런 영토가 되지 않았을까?))) 정도전(鄭道傳) 정도전(鄭道傳, 1342년~ 1398년 10월 6일(음력 8월 26일))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자 혁명가(革命家)이다.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峯),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정도전은 선향과 본가가 있는 경상북도 영주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형부상서 정운경이고, 어머니는 영주 우씨 산원 우연의 딸 이다. 과거 급제 후 성균관 등에 있으면서 성리학을 장려하였고, 외교적으로는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명나라와의 외교론을 주장하다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였으며 1383년 이성계를 만나 정사를 논하다가 역성혁명론자가 되었다. 이후 정몽주, 이성계 등과 함께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추대했다가 1392년 조선 건국을 주도하여 개국공신 1등관에 녹훈되었다. 관직은 판삼사사를 거쳐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영의정부사에 추증되었으며, '봉화백'(奉化伯)에 봉작되었다.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이자 최고 권력자였던 그는 조선의 이념적 바탕을 마련하고 모든 체제를 정비하여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져놓았으며, 한양 시내의 전각과 거리의 이름을 직접 지었다고 한다. 제1차 요동 정벌(1388년 음력 6월)과 제2차 요동 정벌(1392년)에 반대하였으나 요동을 정벌할 계획을 세워 명나라와 외교 마찰을 빚었고, 공신과 왕자들이 사적으로 보유한 사병을 혁파하려다가 갈등한다. 그 뒤 신덕왕후 강씨 소생 방석 등을 세자로 추대하였으며 요동 정벌을 계획하여 명나라 태조 주원장과 갈등하던 중, 이방원이 정변을 일으킨 뒤 1398년 8월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의 군사들에게 피살되었다. 성리학 이념을 보급하였으며, 그는 안향-백이정-이제현의 학통을 계승한 목은 이색의 문하생이자 정몽주, 권근의 동문으로, 나중에 정몽주, 길재의 문하생들에 의해 폄하되었다. 조선사회에 성리학을 정착, 국교화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신덕왕후 강씨와 함께 세자 책봉에 공을 들였던 정도전은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조정에서 철저히 배격되었다. 태종은 그를 역적으로 만든 뒤 정몽주를 추상하였으며, 이후 그는 포은 정몽주와 달리 역적으로 매도되어 오다가 고종 때 복권되었다. (((고려 성리학의 비조 안향))) 생애 초반 출생과 가계 삼봉 정도전은 1342년 아버지 형부상서 정운경(鄭云敬)과 어머니 영주 우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년대는 명확하지 않아 1342년설과 1337년설이 혼재하며, 경상북도 영주에서 출생하여 양주 삼각산에서 성장하였다고 전해진다. 아버지 정운경은 중앙에서 벼슬하여 형부상서에 이르렀다. 유년기 이색 정도전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독서를 좋아하였다. 정도전이 유년을 보낸 곳은 영주와 양주 삼각산이다. 정도전 아버지 정운경이 중앙으로 관직을 옮김에 따라 개경으로 이주했다. 그의 아버지 정운경은 이곡과 나이를 잊은 두터운 친교가 있었기 때문에 이곡의 아들 이색과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정도전은 그 뒤 성균관에서 대사성이자 성균박사 이색을 만나 성리학에 대해 한층 심도있게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안향을 계승한 이제현))) 수학과 소년기 포은 정몽주와는 이색의 같은 문하이자 학문적 친구이고 동지였다가 이념의 차이로 인해 갈라져 그와 역적이 된다. 유년기 그는 가학과 풍기 진중길의 사위 최림을 통해 기초학문을 배우고, 개경으로 올라와 이제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360년 진사시에 급제한 후 성균관에 입학하여 이색과 교류하면서 그는 성리학적 이념과 사상을 심층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외에도 맹자의 성선설과 역성혁명론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부패한 사회의 현실을 보면서 맹자의 성선설에는 다소 회의적인 견해를 품게 되었다. 이때 그와 함께 공부했던 이들로는 포은 정몽주, 박의중, 윤소종, 이존오, 김구용(金九容), 김제안(金齊顔), 박의중, 설장수(偰長壽), 박상충 및 5년 연하의 이숭인과 하륜, 10년 연하의 권근 등이 있었는데 모두 당대 최고의 문인들이었다. 정도전은 성균관에서 경사(經史)를 강론하였는데 특히 문장과 성리학에 능하였다. (((안향-이제현을 계승한 이색 : 삼봉도 하륜도 그의 제자였다.))) 대사성인 이색은 이제현과 백이정, 권보, 안향 등의 학통을 계승했는데, 이제현은 백이정의 문인이자 권보의 사위로 28살 때 원나라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와 성리학을 이루었다. 그의 학문은 이색으로 이어졌다. 정몽주, 이숭인, 권근 등 고려 말의 대표적 성리학자들은 대부분 이색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물들이다. 당시 그는 권문세족들의 전횡 못지않게 불교는 국가 경제를 저해하고 민생을 황폐하게 하는 해악으로 보게 되었다. 이는 사원경제의 팽창과 타락, 백성이 불교에 귀의함으로 인한 조세수입의 궁핍과 부역의 징발 부재로 나타난 국가경영 존립의 위기에서 출발한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삶조차 기약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사후 세계를 논한다는 것은 공허한 생각이라는 공자의 의견에 강하게 동조하게 된다. 이후 불교가 국가에 미치는 해악에 대한 비판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만년에 《불씨잡변》으로 집성하게 되었다. 특히 정도전은 동문수학한 동료들 중 정몽주와 마음이 맞아, 그가 말한 부패한 사회를 개혁하고 권문세족으로부터 농민들을 해방시켜야 된다는 사상에 정몽주는 깊이 감격, 공조하였다. 이후 정몽주와는 오랜 친구로, 청소년기 때부터 권문세족과 외척의 발호로 부패한 고려 사회를 성리학적 이상향으로 개혁해야 된다는 사상을 품고 사상적, 정치적 동지로서 협력하였으나 뒤에 조선개국과 관련하여 정적으로서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포은 정몽주 - 이색의 동문중 삼봉과 제일 친했다.))) 관료 생활과 정치 활동 과거 급제와 관료 생활 초기 공민왕 때인 1360년(공민왕 9년) 성균시(成均試)에 급제한 데 이어 2년 뒤1362년 문과 동진사로 급제하여 1363년 관직에 나갔다. 그해 충주사록(忠州司錄)을 거쳐 전교시주부(典敎寺主簿)·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지냈다. 그 뒤 성균관에서 정몽주와 함께 명륜당에서 유학을 강론하며 유생들을 길러냈고, 성균관박사, 태상박사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출세를 하였다. 그러나 그의 벼슬살이는 순탄하지 않았다. 공민왕이 신돈을 기용하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삼각산 옛집으로 낙향해서 은둔생활을 하였으며, 아버지 정운경와 어머니 영주우씨가 1월과 12월에 연이어 작고하여 영주에서 3년간 여묘살이를 하며 학문연구와 교육에 힘썼다. 당시 관료들과 지식인들은 백일탈상이 일반적인 관행이었으나, 그는 주자가례에 따라 3년상을 봉행 실천하였다. 1369년 가을, 부모의 3년상을 마치고 삼각산 옛집으로 돌아왔고 이듬해 12월, 관직에 복귀하였다. 신돈의 죽음과 성균관 강학 성균관 경내 1370년 성균관을 중영하고 그해 목은 이색이 대사성이 되자, 박상충 박의중 김구용 등 벗들의 천거로 성균관박사가 되었다. 성균관의 박사로 있으면서 포은 정몽주 등 교관과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하였다. 다시 70년 예조정랑 겸 성균·태상박사(禮曹正郞兼成均太常博士)가 되어 전선(銓選)을 관장하였다. 1371년 태상박사에 임명되고, 다시 예의정랑이 되어 태상박사를 겸임했다. 신돈의 무모한 전횡에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잠시 삼각산 옛집으로 낙향하였다가, 신돈이 제거된 뒤에 정도전은 등용되었다. 1374년(공민왕 24) 환관 최만생과 홍륜 등에게 공민왕이 살해되면서 친명파에 속했던 정도전은 다시 정치적 위기를 겪었다. 그때 정국은 친원파(親元派)와 친명파(親明派)가 대결하고 있었다. 이때 그는 성균관에서 성리학을 강학하면서 한편으로는 정몽주 등과 함께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돈독히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후 그는 공민왕의 부패와 타락을 옹호하거나 묵인하는 권문세족이 왕의 눈과 귀를 가린다며 비판을 가하였다. 1374년 공민왕이 홍륜 등에 의해 암살당하자 그는 이 사실을 명나라에 고할 것을 주장하였다가 이인임 등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관직 생활과 권문세족과의 갈등 친원파, 권문세족과의 갈등 이때 그는 부와 권력을 독점한 권문세족들로부터 전답 등의 농토는 실제로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 부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권문세족들의 분노를 샀다. 또한 그는 사원경제의 팽창과 문란이 정치 경제 사회의 폐해가 극심함으로 불교의 배척을 주장하였다. 1375년(우왕 1년) 성균관사예·지제교가 되었다. 동년 원나라 사신이 왔을 때 원나라의 사신을 맞아들이는 문제로 조정에서는 신흥사대부와 권신들 간에 대립이 일어났다. 이인임과 지윤 등은 사신을 맞아들이자고 한 반면, 정도전을 비롯한 신흥사대부(신진사대부)들은 이에 반대했다. 그러나 이인임 등은 그들의 주장을 물리치고 북원 사신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이인임은 정도전을 영접사로 임명해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정도전은 사신영접을 거부했다. 이런 와중에 북원 사신을 맞이할 영접사로 지목된 인물은 정도전이었다. 이에 정도전은 “사신의 머리를 베든지, 그렇지 않으면 묶어서 명나라로 보내버리겠다.”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인임·경복흥(慶復興) 등이 원나라와의 이중 통교를 주장하고 원나라 사신이 명나라를 치기 위한 합동작전을 고려 조정에 제의해 오자, 정도전은 이를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정도전은 이인임·경부흥 등의 권신의 진노를 사 나주의 속현인 회진현(會津縣) 거평부곡(居平部曲)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그는 성리학 관련 서적을 연구하며 동리 청년자제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귀양길에 곤장까지 맞을 뻔하였으나 때마침 일어난 석기의 난 때문에 경황이 없어 장형은 당하지 않았다. 유배와 학문 연구 유배살이 중 그는 온갖 인신비방에 시달렸다. 그가 낙마하자 사방에서 그에 대한 비방이 끊이지 않았다. 그는 그런 비방은 소인배들의 짓이라며 씁슬하게 넘겼다. 그러나 그를 원망하는 아내의 편지를 받게 되었다. “ 당신은 평소 부지런히 독서에만 몰두하여 아침에 밥이 끓든 죽이 끓든 간섭하지 않아 집안에는 한 섬의 쌀도 없었습니다. 방에 가득한 아이들은 끼니 때마다 배고프다고 울고 날이 찰 때는 춥다고 울부짖었습니다. 제가 살림을 맡아 그때그때 수단을 내어 꾸려가면서도 당신이 열심히 공부하시니 언젠가는 입신양명하여 집안의 영광을 가져오리라고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영광은커녕 국법에 저촉되어 이름을 더럽히고 몸은 남쪽 변방에 귀양 가서 가문이 망하였습니다. 이에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현인, 군자의 삶이란 진실로 이런 것입니까?“ — 아내의 편지 “ 당신의 말이 모두 맞소. 예전의 내 친구들은 형제들보다 정이 더 깊었는데 내가 이 지경이 되자 뜬구름처럼 흩어졌소. 이는 그들이 원래 세로써 맺어졌지 은으로 맺어지지않은 까닭이기에 나는 원망하지도 않소. 하지만 부부는 한번 맺어지면 죽을 때까지 고칠 수 없는 것이니 당신이 나를 질책하는 것은 나를 사랑해서이지 미워해서는 아닐 것으로 나는 믿소. 또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과 같으니 당신이 집을 근심하고 내가 나라를 걱정하는 것이 무엇이 다르겠소? 나는 오직 나의 뜻에 충실할 뿐이오. 성패와 영욕과 득실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오. 내가 무엇을 근심하겠소?” — 정도전의 답장 정도전은 아내를 원망하지 않았다. 정도전은 아내에게 대의에 대해 말하지도 않았다. 다만 자신의 뜻대로 나아가면 하늘이 돌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버린 친구들에 대한 애증은 이미 정리된 감정이었다. 배소에 있는 그에게 꾸준히 안부를 묻고 편지서신을 보내며 위로하는 친구는 정몽주 등 소수였다. 역성 혁명 준비 석방과 교육 활동 1377년에 유배에서 풀려나 4년간 선향 영주와 안동, 제천, 원주 등을 유랑하며 지냈다. 그 뒤 1381년 가을 거주가 완화되자 삼각산 옛집으로 돌아왔고 1382년 초려(草廬)를 짓고 '삼봉재'(三峯齋)라 이름하고 학문과 교육에 힘썼다. 그러나 권문세족들은 정도전을 위험인물로 보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전국에서 많은 재생들이 운집하여 교육의 즐거움을 향유하였으나 그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이곳 출신 재상이 삼봉재를 헐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생들을 이끌고 부평부사 정의에 의탁하여 부평부 남촌(南村)으로 이사하여 후생 교육사업을 재기 하였으나 이곳 역시 재상 왕모(王某)가 별장을 짓는다고 학숙을 폐쇄하였다. 계속되는 멸시와 박해로 다시 경기도 김포로 옮겨야 했다. 유배와 유랑 살이를 통하여 향민(鄕民)과 사우(士友)에게 걸식하기도 하고 스스로 밭갈이도 했다. 이때 그는 가난과 기근으로 죽어가는 백성들과 그들을 수탈하는 권문세족의 횡포와 사원경제의 팽창으로 국가경영의 존폐위기 상황을 직면하고 일대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성계의 활동 영역))) 이성계와의 만남(1383년) 1383년 가을, 정도전은 드디어 비장의 결심을 하고 함길도 함흥에 있는 동북면도지휘사(都指揮使) 이성계를 찾아갔다. 한때 이성계와 함께 왜구와 여진족을 토벌하는데 함께 출정했던 정몽주로부터 그의 명성을 듣고, 외적의 침략을 물리쳐 고려의 새로운 영웅으로 떠오른 이성계를 만나기 위해 함흥으로 직접 찾아간 것이다. 그는 이성계와의 오랜 대화로 세상사를 논하다가 그와 인연을 맺었다. 정도전은 부패한 관료로 인한 피폐한 백성들을 구제하고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는 길은 오직 혁명 밖에 대안이 없다고 결론짓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이성계의 군사력이 절실하였던 것이다. 당시 조우에서 정도전은 이성계 휘하의 정예 군대와 일사불란한 지휘통솔에 감탄을 금치 못했고, 이성계 또한 정도전의 심오한 학문과 원대한 국가경영에 대한 경술에 감탄해 마지 않았다. 정도전은 이성계 휘하의 동북면 군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군령을 엄하게 지킬 뿐 아니라 무기들 또한 잘 정비되어 있으며 훈련에도 열심히 임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훌륭하다고 칭찬하며 “이 정도의 군대라면 무슨 일인들 성공시키지 못하겠습니까?”라고 넌지시 떠보았다. 평생 전쟁터를 누벼 온 이성계가 정도전의 말뜻을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으나, 무슨 뜻이냐며 모르겠다는 듯이 반문하였다. 이에 정도전은 동남방의 왜구를 소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개혁 정치와 정변 기도 이성계와 역성혁명 정도전은 그날 밤 이성계와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날 정도전은 군영 앞에 서 있는 오래된 소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그 위에 이성계를 위해 시 한 수를 지었다. “ 蒼茫歲月一株松 / 아득한 세월 속에 한 그루 소나무여 生長靑山幾萬重 / 청산에서 자람은 어찌 만 배나 중하지 않으랴만. 好在他年相見否 / 좋았던 시절에 서로 만나지 못하였으니 人間俯仰便陳蹤 / 세상을 굽어보고 우러러보아도 묵은 흔적뿐이구나. ” — 정도전, 《제함영송수》(題咸營松樹) 이 시에서 정도전은 이성계를 늙은 소나무에 비유하고 있는데, 앞으로 때가 되면 이성계는 천명(天命)에 따라 세상을 구원하러 나서야 하며, 자신과 손잡고 큰일을 하여 위대한 역사적 과업을 남기게 될 것이라는 자신의 속마음을 은근히 드러내었다. 이성계는 개혁을 주장하는 정도전 등에게 협력하기로 하고 지원을 약속했다. 그의 인물됨됨이에 매료된 정도전은 그의 막료가 되었고 이후 역성혁명까지도 논의하게 되었으며 이 일을 계기로 정도전은 이성계의 참모로서 큰 야망을 품게 되었다. 1384년 가을 전교시부령(典校侍副令)으로 복직과 동시에 성절사(聖節使) 포은 정몽주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가서 양국간 첨예한 외교적 갈등을 해소하고, 우왕의 승습(承襲)과 공민왕의 시호를 받아 귀국하였다. 1385년 귀국 후 성균관 제주(祭酒)와 지제교를 거쳐 86년 외보를 요청 남양부사(南陽府使)로 도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부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그 뒤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위화도 회군과 권력 장악(1388년 음력 6월) 1388년 음력 6월 제1차 요동 정벌에 출정한 이성계 등이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게 되자 밀직부사로 승진하여 조준, 남은, 윤소종 등과 함께 이성계의 우익이 되어 전제(田制) 개혁에 착수, 조세 제도와 토지 제도를 개혁하였다. 이는 개인이 함부로 토지를 사유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권문세족들이 보유한 토지를 몰수하고 새 정권을 창출하는 데 필요한 자금 확보는 물론, 백성들의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그는 전국의 토지를 국가에 귀속시킨 뒤 인구수에 따라 토지를 분배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스승인 이색과 친구인 정몽주 등과 의견이 달라지면서 서서히 멀리하게 되었다. 이어 우왕의 장인인 최영, 이인임, 염흥방, 조민수 등 구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아 나갔다. 같은 해, 우왕을 내쫓고, 이색의 주장으로 창왕을 세웠고, 이때 우왕의 측근인 최영 일파를 제거하였다. 정변과 공양왕 추대 1389년 음력 11월 여주로 유배된 폐주 우왕이 자신을 찾아온 김저(金佇)와 정득후(鄭得厚)에게 보검을 주며 곽충보(郭忠輔)와 함께 이성계를 제거하라는 밀명을 내린 음모사실이 곽충보의 고변으로 발각되었다. 이에 이성계는 우왕을 서인으로 강등시켜 강화도로 유배시켜 버렸다. 정도전은 이성계, 조준, 남은 등과 함께 뜻을 같이해 창왕을 신돈의 자손이라는 구실로 폐위시키고, 폐가입진이라는 명분을 구실로 공양왕을 추대하고 공신이 되었으며 최영 등을 죽이고 실권을 잡았다. 이때 그는 우왕과 창왕 부자가 왕씨가 아니라는 주장을 했으나 이에 대해 조선의 양식있는 신료들과 선비들은 이를 조선왕조의 조작으로 보았고 현대 학계에서도 조선왕조의 조작으로 보고 있다. 이성계, 조준 등과 함께 공양왕을 추대한 공으로 그는 봉화현 충의군(忠義君)에 봉군된 뒤 수충논도좌명공신(輸忠論道佐命功臣)에 책록되고 공신전 100결과 노비 10명을 하사받았다. 이후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었다. 1390년(공양왕 2년) 경연지사(經延知事)에 올랐다. 그 해 1390년 이성계가 명나라를 치려 한다고 명나라 주원장에게 밀고하는 윤이 이초 사건이 발생하자, 성절사 겸 변무사(聖節使兼辨誣使)로 명나라에 가서 윤이·이초의 주장이 무고임을 밝히고 돌아왔다. 곧 동판도평의사사사 겸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귀양 1391년에 이성계는 삼군도총제부를 만들고 군대를 장악하였고, 정도전은 삼군도총제부 우군도총제의 자리를 맡았다. 이어 불교 배척의 기치를 들고 척불(斥佛) 상소를 올려 권문세족들을 불교도로 몰아 제거한 뒤, 성균관 학생들과 함께 외세를 빌어 국내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윤이, 이초 사건의 배후인 이색과 우현보(禹玄寶) 등을 신우(辛禑)·신창(辛昌) 옹립의 죄를 물어 처단할 것을 상소했다. 그러나 정도전과 신진사대부 역시 창왕 등의 옹립에 가담했었고, 이를 부담스럽게 여긴 공양왕은 처음에는 거절하였다. 정도전은 거듭 이색, 우현보를 처단할 것을 극력 피력하였다. 그해 9월 평양부윤에 임명되었으나 정몽주 등은 그를 제거할 목적으로 사간원과 사헌부의 간관들을 사주하여 그가 "가풍(家風)이 부정(不正)하고, 파계(派系)가 불명함에도 큰 벼슬을 받아 조정을 어지럽히고 있다"라고 탄핵케 하여 봉화로 유배당하였다. 정몽주가 정도전을 탄핵한 실제 목적은 이성계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몽주의 탄핵 내용을 접한 그는 정몽주에게 극심한 반감을 품게 된다. 이어 나주로 배소가 옮겨졌으며 두 아들은 삭탈관직당해 평민이 되었다. 이때 정몽주는 김진양을 사주하여 사죄로 다스릴 것을 상소하여 그를 처형하라고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공양왕이 이를 듣지 않았다. 그가 유배되자 정몽주는 그를 처형해야 된다고 강력 상소하였지만 공양왕의 반대로 1392년(공양왕 4년) 봄 귀양에서 풀려나 고향 영주로 돌아갔다. 1392년 3월 초 이성계가 해주의 사냥터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자 이성계 세력을 제거하려는 정몽주 등에 의해 "천지(賤地)에서 기신(起身)하여 당사(堂司)의 자리를 도둑질했고, 천근(賤根)을 감추기 위해 본주(本主)를 제거하려고 모함했다"라는 탄핵을 받고 보주(甫州)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해 4월10일, 이방원, 조영규 등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격살함으로써, 고려 왕조를 지지하는 세력은 구심점을 잃고 와해되었다. 그 뒤 6월 10일 유배에서 풀려나 개경으로 소환되어 복직하였다. (((1911년 촬영된 영흥(함흥) 준원전 태조 어진))) (((1915년 촬영된 전주 경기전 태조 어진))) (((1872년 모사된 전주 경기전 태조 어진))) 역성혁명과 조선 건국 조선의 건국(1392년) 6월 정도전은 비로소 소환되어 정치 일선에 나서서 새왕조 창업을 위한 정지 작업을 단행하여 7월 17일 공양왕의 선양을 이끌어 내어 이성계를 임금으로 추대하여 새 왕조 조선을 건국하였다. 조선 왕조가 건국되자 정도전은 왕명을 받아 새로운 왕조의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17조의 〈편민사목〉(便民事目)을 지어 발표하였다. 또한 조선 건국을 반대한 정적 등 반대파를 일소하였다. 조선을 건국하는 데 일등 공신이 된 정도전은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겸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등의 군국의 요직을 겸함으로써 권력을 손에 쥐어 조선의 핵심 실세가 되어 행정, 군사, 외교, 교육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전반적인 문물 제도와 정책의 대부분을 직접 정비해 나갔다. 조선의 첫번째 임금으로 태조로 즉위한 이성계는 나랏일을 모두 정도전에게 맡겼다. 그리하여 정도전은 명실상부한 조선의 2인자가 되었으며, 건국 사업에 크게 이바지하여 새 나라의 문물 제도와 국책의 대부분을 결정하였다. 즉 한양 천도 당시 궁궐과 종묘의 위치 및 도성(都城)의 기지를 정하고, 각 궁전 및 궁문의 칭호, 도성의 4대문과 4소문 및 성안 52방(坊)의 이름 등을 제정하였다. 국정 방안 수립과 병권 장악 이후 태조의 교지(敎旨)를 지어 새 왕조의 국정방향을 제시했고, 개국공신 1등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 문하시랑찬성사 겸 판의흥삼군부사로 동판도평의사사사·판호조사·겸판상서사사·보문각대학사·지경연예문관춘추관사 겸 의흥친군위절제사를 겸직하여 정권과 병권을 모두 장악했다. 7월 20일 도평의사사사 겸 상서사사(尙瑞司事)가 되었다. 7월 28일 좌명공신(佐命功臣)에 녹훈되고 문하시랑찬성사 의흥친군위 절제사(門下侍郞贊成事義興親軍衛節制使)에 임명된 뒤 봉화군(奉化君)에 봉군되었다. (((태조 이성계))) 새 왕조를 연 태조 이성계는 즉위 한 달 만에 수도를 옮길 결심을 했다. 처음에는 나라 이름도 고치지 않고 수도도 그대로 개경으로 할 생각이었으나 무슨 까닭에서인지 천도를 결심, 후보지를 고르기 시작했다. 맨먼저 후보지로 지목된 곳은 계룡산이었다. 이성계는 곧바로 궁궐터를 닦기 시작했다. 그런데 계룡산 천도에 반대하는 상소가 올라왔다. '너무 협소하여 백성들이 들어가 살기 어렵고, 토지가 비옥하지 못하여 교통이 불편하고 금강이 멀어 백성들이 고생한다'는 이유였다. 계룡산에 대한 반대 상소가 올라가자 정도전 등도 계룡산으로의 천도를 반대하여 태조는 새로운 길지를 선정하게 하였다. 1392년 10월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은사 겸 계품사로 명나라에 가서 조선 건국의 당위성을 호소하고 승인받아왔다. 12월에는,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가 되었다. 1393년(태조 2년) 7월 다시 문하시랑찬성사로 동북면도안무사가 되어 변방으로 나가 여진족을 토벌, 회유하고 되돌아왔으며, 한성으로 되돌아온 뒤 〈문덕곡 文德曲〉·〈몽금척 夢金尺〉·〈수보록 受寶錄〉 등의 악사(樂詞) 3편을 지어 왕에게 창업의 쉽지 않음과 수성(守成)의 어려움을 반성하게 하는데 쓰이는 자료로 삼도록 권고하였다. 1393년 9월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10월 관습도감판사(慣習都監判事)를 거쳐 1394년(태조 3년) 1월 판의흥삼군부사로 병권을 장악하여 병제개혁에 대한 상소를 올리고, 3월 경상·전라·양광 삼도 도총제사가 되어 지방의 병권까지 장악하였다. 체제와 관제의 정비 정도전은 조선이 갖춰야 할 정부 형태와 조세 제도는 물론 법률 제도의 바탕을 만들었으며,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나라의 통치 이념으로 확립시켰다. 또한 정도전은 수도 천도를 결정하고 수도 이전을 단행하였다. 조선의 건국 직후부터 그는 《조선경국전》을 편찬해 새로운 법제도의 틀을 닦았으며, 도읍을 옮겨 새 왕조의 면모를 높일 것을 계획하였으며, 경세문감을 저술하여 재상, 대간, 수령, 무관의 직책을 확립했다. 또한 명나라의 공물 요구가 거세지자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군량미 확보, 진법 훈련, 사병 혁파 등을 적극 주장, 추진해 병권 집중운동을 펼쳐나간다. 또한 노비 해방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병제(兵制)를 대폭 개혁하여 진법(陳法)·진도(陳圖)를 지어 장병을 훈련하고, 1397년(태조 6)에 동북면 도선무순찰사(東北面都宣撫巡察使)가 되어 지금의 경원(慶源 : 함경북도) 지방에 가서 성보(城堡)를 수리하고 주·군과 역참을 획정하였다. 정도전은 고려 말 배불론(排佛論)의 주동자로 불교를 대체할 사상으로 유교 성리학을 지목했다. 그는 유교로써 문교(文敎)를 통일하고자 하여 주자학으로 미신이라 여겨지는 불교와 노자교(老子敎), 무속 등을 압도하고자 유감없이 공격을 가하였다. 불교의 자비는 친함과 안면이 있음에 따라 차별이 있고, 불교는 인류 자연의 성정에 위배하여 사회 조직을 파괴하는 것이며, 석가가 인세(人世)를 이탈하여 자립자영코자 아니하였음은 타력에 따라 기생코자 한 것이고 특히 선종과 같은 것은 인심을 현혹하는 마종(魔宗)이라고까지 비판하였으나 아무도 이에 응대하는 불교인이 없었던 유학의 대가였다. 또한 그는 유교를 전파하고자 조선 왕조의 제도와 예악(禮樂)의 기본구조를 세운 《조선경국전》· 부병제(府兵制)의 폐단을 논한《대부병시위지제》(歷代府兵侍衛之制)의 편찬을 시작하였다. 한양 천도(1394년 11월 21일) 경복궁 근정전 1392년 8월부터 그는 새 도읍지 건설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는데, 이는 고려의 구신과 세족이 도사리고 있는 개경은 신왕조의 정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1394년 8월부터 개경을 떠나 새로운 도읍 건설을 추진하여, 한양을 새 왕조의 도읍지로 정하였다. 한양을 조선의 새 수도로 결정한 것은 한양의 도시 설계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경복궁 자리도 정도전이 잡은 것이라고 한다. 무학대사는 지금의 인왕산을 주산으로 궁궐을 세워야 한다고 했으나 정도전은 반대하였다. 그는 무학대사가 추천한 위치는 동향이며 터가 너무좁아 왕도로 적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결국 정도전의 뜻대로 경복궁이 현재의 자리에 세워지게 되었다. 한성부의 각 궁궐과 전각, 문의 이름을 짓고 도로 수도의 행정분할도 결정했다. 1394년 한양 천도의 지도와 감독을 병행하면서 새 사회에 걸맞은 사상으로 유교 성리학을 정식 국교로 채택할 것을 주청하였으며, 그해에 〈심기리편〉(心氣理篇)을 지어 불교·도교를 비판하고 유교가 실천 덕목을 중심으로 하는 인본주의 사상이라고 주장했다. 태조의 허락 아래 종묘와 사직, 궁궐의 터 등이 들어설 자리를 정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궁궐 및 각 전각의 이름은 모두 정도전이 손수 지었다. 그는 전각과 거리의 이름을 지을 때 유교적 덕목이 나타나도록 근정(勤政), 인정(仁政) 등의 단어를 사용했다. 또한 한성의 4대문과 4소문의 첫 이름과 현판을 짓기도 했다. 그 밖에도 종묘의 제례법과 음악도 정도전이 제정한 것이었다. 특히 〈몽금척〉(夢金尺), 〈수보록〉(受寶籙), 〈문덕곡〉(文德曲) 등 수많은 악장을 지어 태조의 공덕을 찬양하였는데, 이악장은 조선조 5백 년간 궁중에서 연주되었다. 조선 건국(1392년) 이후 정권 투쟁 세자 책봉 문제 세자를 누구로 임명하느냐는 문제에 관해서 당초의 의론은 "시절이 태평하면 적장자를 세우고, 난세에는 공이 많은 왕자를 세워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신덕왕후 강씨는 자신의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하기를 간절히 소원하였고, 태조 이성계 역시 방석을 총애하여서 배극렴을 비롯한 대소신료들은 태조의 의중에 따라 여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태조의 전처 한씨 소생 아들 중 다섯째 인 이방원은 정치적 야심이 가장 컸던 탓에 이 일로 격분하였다. 또한 다른 전처 한씨 소생의 왕자들도 자신들을 배제하고, 후처인 강씨의 아들 막내 방석이 왕세자가 된 것에 대해 모두 분개하였다. 이것이 훗날 제1차 왕자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 태조가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정도전은 바로 세자시강원이사(世子侍講院貳師)의 한사람이 되어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했다. 국방력 강화와 명나라와의 갈등 1395년 1월 정총(鄭摠) 등과 함께 《고려국사》(高麗國史)를 편찬하였다. 조선 창업에 성공한 정도전은 세자책봉에 이은 새나라 문물과 제도정비에 착수했다. 6월에는 국가의 통치규범인《조선경국전》,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제왕들의 치적을 담은 《경제문감》, 《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 등의 편찬을 주도하여 새로운 치국의 대요와 관제 등 모든 제도와 문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경제문감》과 《경제문감별집》에는 정치제도·재상·대관(臺官)·간관(諫官)· 부병제도·감사(監司) 등의 업무와 인사 행정 및 실무를 논하였다. 이어 국방력 강화와 고구려 고토수복을 위한 공병제도를 도입 군의 통수권을 국가에 귀속 시키기 위한 사병을 혁파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일방적인 정도전의 정책에 대해 태조는 그의 상소를 수용하는 것을 머뭇거렸고, 점차 반발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1395년 3월에는 다시 판삼사사로 복직했다. 1395년 일부 반발 세력에 의한 국가기밀 누설로 인하여 갈 길 바쁜 조선은 명나라와 외교적 분쟁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신흥국 조선의 일신을 경계하였던 명나라의 황제 주원장은 조선의 정조표전(正朝表箋) 문구에 명나라를 모독하는 글귀가 있다는 걸 문제삼아 태조에게 정도전을 자신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태조는 정도전은 병에 걸렸다거나 나이가 많다거나 하는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명나라의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계속해서 그의 소환을 요구하였고, 이를 무마하기 위한 조처로 문하시랑찬성사를 비롯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동북면도선무찰리사로 체직되었다. 한성부의 도시 정비 천도가 확정, 단행될 무렵 그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1394년부터 2년간 그는 한성부의 도시 정리를 추진했다. 1395년(태조 4년)에는 도성축조도감이라는 관청을 설치, 성을 쌓기 위한 기초측량을 하게 했으며, 총책임자는 정도전이 되었다. 1396년부터 성곽을 쌓기 시작 1년여 만에 완성했다. 백악산 꼭대기를 기점으로 하여 동쪽으로 한성부 시내를 돌아 백악에 이르는 성곽은 총길이 5만 9천 5백 자, 그 중 토성이 4만 3백여 자, 석성이 1만 9천 2백 자, 높이 40자 2치로 정도전은 이 수치를 정확히 계산, 파악했으며, 공사기간은 여름과 겨울로 농번기를 피해 2기로 나누어 공사를 벌였다. 공사는 2년만에 완공되었다. 생애 후반 이방원과의 갈등 정도전은 자타가 공인하는 해동의 장량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자신과 이성계의 관계를 한 고조 유방과 그의 참모 장량에 비유하였는데, 한 고조가 장량을 이용한 게 아니라 거꾸로 장량이 한 고조를 이용했다는 말을 꼭 덧붙였다. 이 말은 한 고조가 장량을 이용해 한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 고조를 내세워 자신이 원하는 제국을 건설했다는 뜻으로, 자신 또한 태조를 내세워 자신이 원하는 새로운 왕조를 건설한 것이며, 조선 건국의 실질적인 기획자가 곧 자신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주장은 포은 정몽주 등을 제거한 이방원을 비롯한 왕자들의 반발을 초래하게 되었다. 정도전은 임금은 세습되는 직책이라 어리석고 멍청한 임금이 나올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정도전은 어린 세자 방석을 교육시켜 재상이 중심이 되는 왕도 정치(재상 정치)의 실현을 꿈꾸었지만, 왕권과 자신의 입지가 약화되는 것을 두려워한 이방원은 후일 사병을 이끌고 내습하여 그를 처형하고 더불어 세자 방석도 살해하였다. 요동 정벌 계획 1392년 건국 직후부터 그는 요동 정벌(1392)을 계획한다. 1396년 요동 정벌의 방안으로 그는 그때까지 각 지역의 왕실측근과 개국공신들이 사적으로 보유하던 사병을 모두 혁파하여 국가의 정규군으로 개편하자는 사병 혁파를 단행하였다. 그러자 사병을 중심으로 정변을 세우려고 계획한 이방원은 고려유신 그룹을 규합하여 노골적으로 반감을 품고 역습의 기회를 품게 되었다. 동시에 이방원은 정도전을 제거하기 위하여 명나라로 가는 사신 하륜, 설장수 등을 비롯한, 반감을 품은 인사들을 사주하여 은밀히 정도전이 요동 정벌을 획책하려 한다고 밀고하였다. 1396년(태조 5년) 3월 과거 고시관(科擧考試官)에 임명되어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해 5월 조유인(曹由仁), 이치 등 33인을 선발하였다. 1396년 7월 27일 봉화백에 봉작되었다. 1397년(태조 6년) 3월 상서사 판사(尙瑞司判事)로 공동 상서사판사인 조준과 함께 내관과 궁녀의 작호와 품계를 정하여 올렸다. 1397년 명나라의 사은사가 가지고 온 자문(咨文)에서 명나라는 그를 '조선의 화(禍)의 근원'이라고 지적했다. 동시에 조선 조정에 정도전을 해임하고 요동 정벌을 중단하라고 경고했다. 요동 정벌을 목적으로 왕족들과 여러 호족으로부터 몰수한 사병들을 새로 신설한 의흥삼군부에 병합한 뒤 그가 지은 진도(陳圖)에 따라 대대적인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정도전의 개혁과 요동 정벌 준비는 같은 개국공신인 조준 등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끝내 그와 결별하게 되고 만다. 요동 정벌 계획 실패 그해 4월 요동공벌 계획을 명나라에 누설한 설장수와 권근의 문책을 요구하였으나, 불문율로 부치고 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6월 정도전은 확보한 병력으로 남은과 함께 양주목장에서 대대적인 진도(陣圖) 훈련을 하면서 이성계에게 출병을 요청하였는데, 이때 조준의 강력한 반대로 실행하지 못했다. 그해 12월, 다시 동북면도선무순찰사가 되어 주군(州郡)의 구획을 확정하고 성보(城堡)를 수리했으며, 비밀리에 사람을 파견하여 평안도, 함경도 일대의 인구 수와 군관(軍官) 수를 점검하고 되돌아왔다. 그해 10월 가례 도감(嘉禮都監) 제조에 임명되었다. 1398년초 그는 왕에게 상무정신을 함양할 것을 건의하고 병법과 진법 훈련을 강화하면서 요동 정벌의 준비를 마무리한다. 바로 그는 태조에게 절제사를 혁파하여 관군(官軍)으로 합치고, 사병을 모두 압수하며, 왕자와 공신들이 나누어 맡고 있던 군사지휘권을 박탈하게 하고, 개인이 거느린 사병 집단을 국가에 귀속시킬 것을 건의하였다. 정변과 최후 1398년(태조 7) 음력 8월 그는 명나라 황제 주원장이 자신의 아들들을 변방으로 보낸 것을 인용하여 이방원은 전라도로, 이방번은 동북면으로 보내야 된다고 건의하여 태조의 승인을 얻었다. 그러나 이방원은 파견을 거부하고 민무구, 민무휼 등과 함께 정도전 암살을 기도하였다. 10월 6일(음력 8월 26일) 정도전은 송현에 있던 남은의 첩의 집에서 남은, 심효생, 이직 등을 만나 술을 마셨다. 그가 남은의 집에서 술을 마신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방원은 즉시 소수의 결사대를 이끌고 남은의 첩의 집으로 향한다. 정도전은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이방석을 세자로 세운 일로 인해, 이방원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이방원은 그가 한씨 소생의 모든 왕자들을 궁으로 불러 들인 후에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을 죽일 계략을 세웠다고 누명을 뒤집어 씌워 살해하였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는 목이 베인채 발견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방석의 세자 책봉은 정도전이 아니라 태조 이성계가 한 일이고, 정도전이 왕자들을 암살하려 한 계략의 실체는 사실무근 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최후에 이르러 정도전은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승자에 입장에서 이방원이 비열한 인물로 폄하한 것이다. 또 《삼봉집》에는 그가 이방원의 칼에 맞기 직전 자신의 삶의 최후를 정리하는 '자조(自嘲)’라는 시를 남겨 영웅호걸다운 면모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 操存省察兩加功 / 조존과 성찰 두 곳에 온통 공을 들여서 不負聖賢黃卷中 / 책 속에 담긴 성현의 말씀 저버리지 않았다네. 三十年來勤苦業 / 삼십 년 긴 세월 고난 속에 쌓아 놓은 사업 松亭一醉竟成空 / 송현방 정자 술 한 잔에 그만 허사가 되었구나. ” — 정도전, 《자조》(自嘲) 정도전의 두 아들 정영과 정유(鄭游) 그리고 조카 정담(鄭澹)은 아버지를 구하러 달려가다가 살해되고, 얼마 뒤 조카 정기(鄭淇)는 큰아버지와 사촌들의 죽음 소식을 듣고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맏아들 정진은 당시 태조의 안변군 석왕사 삼성재(三聖齋)발원을 위한 밀접 수행 중이었으므로 해를 당하지 않고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다. 사후 평가 정도전의 묘의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 봉화정씨 을류보에 경기도 광주(廣州) 사리현(士里峴)에 있다는 기록이 있고, 유형원(1622-1673)의 ‘동국여지지(東國輿之地)’ 과천현조에는 현동북 18리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에 그의 가묘가 있다. 반발했던 조준은 그가 죽자 정몽주가 정도전의 음해로 죽었다며 복권을 상소하였다. 조준의 상소는 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태종 때 가서 받아들여져 정몽주는 충절의 상징으로 추상되어 영의정부사에 추증되었다. 정도전 사후 동생 정도복과 매제 황유정은 연좌되지 않고 계속 관직생활을 할 수 있었고, 아들 정진은 1411년 조영무, 안경공 등의 건의로 복직하여 판 나주목사로 기용되었고 세종 때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또한 정도전의 증손인 정문형은 세조 때 좌익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고 관직은 우의정에 이르렀다. 태종 이방원은 그를 폄하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정몽주를 현창하였는데, 이는 태종의 아들 세종이 정몽주의 제자 권우의 문인이었고, 세조 때 사림파가 관직에 진출하면서 충절의 상징으로 성역화되었다. 동시에 정몽주의 라이벌인 그는 불이익, 폄하의 대상이 되었다. 후대에 이르러 그는 오히려 두 왕조를 섬긴 변절자로 또는 단지 처세에 능한 모사가로 인식되었다. 신숙주는 그가 죽은 것은 운수소관이지만 건국공로에 있어 그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다고 평하였다. 그는 조선의 개국공신이었고, 한성부의 각 전각과 궁궐의 이름을 지은 인물이다. 그러나 사림에 의해 비판을 받았는데, 이는 그대로 수용되었다. 그에 대한 비판이나 부정적 견해가 일반화된 데에는 그가 죽은 후 정적들의 대거 복귀로 이색, 정몽주의 정치적 승계자인 고려 유신그룹과 사림파와 정몽주를 충신의 표본으로 현창함으로써 정도전을 격하하려는 이방원의 의도가 있기는 했지만 반드시 그런 의도만으로 정도전이 부정적 평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정도전은 성정이 과격하고 온후함이 없어, 빼어난 재주에 비해 덕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남인 실학자 성호 이익은 자신의 저서 《성호사설》에서 정도전을 일컬어 '죽을 만한 일을 한 위인'이라고 비판했다. 선조 때 정여립의 난의 가담자 중 도피자의 이름을 알수 없자, 관청에서는 도피자의 이름을 일부러 삼봉이라 지어 그를 조롱하였다. 광해군 당시 허균이 그의 시문을 애호하였다는 이유로 허균은 역모로 몰려 사형당한다. 그는 정조 때 가서야 정조가 그의 저서인 《삼봉집》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서서히 복권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정조는 빠진 글들을 수집하고 편차를 재구성하여 수정 《삼봉집》을 간행하였다. 서인 성리학자로 정도전과 마찬가지로 군신공치의 이상을 견지했던 송시열마저 정도전을 언급할 때는 반드시 그 이름 앞에 '간신'이라는 말을 붙였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정도전에게 가장 적대감을 표시한 인물은 송시열이었다. (고종의 복훈교지) 1865년(고종 2년) 9월 대비 조씨의 건의로 다시 공신 칭호를 돌려받았다. 1865년 고종은 경복궁을 중건하고 그 설계자인 정도전의 공을 인정해 그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으며 문헌(文憲)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뒤 고종은 후손들이사는 경기 양성현(안성군공도면, 평택시진위면)에 사당을 건립하였다. 고종은 정도전의 조선 건국과 제도와 법령 마련, 체제 정비 등의 치적을 기려 유종공종(儒宗功宗) 현판을 특필하여 하사하였다. 사당은 1986년 4월 경기도유형문화재 132호로 지정되었다. 불천지위(不遷之位)에 추대되었고, 그의 묘소가 실전되어 1872년(고종 8년) 왕명에 의해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1872년 개국공신으로 공식 복권되고 이듬해 관직과 작위가 회복되었다. 1873년(고종 10) 남인 인사들에 의해 이현일, 윤휴, 한효순, 목내선, 정인홍, 정도전 등을 복권해야 된다는 신원 상소가 올려졌다. 이에 면암 최익현과 중암 김평묵은 강하게 반발하였고 복권을 막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고종은 정도전 복권을 강행하였는데, 이는 정도전이 조선왕조건국에 끼친 공로를 추앙하여 복권을 한 것으로, 기존의 조선왕조에서 복권이 된 사람들인 김종서, 황보인, 이개, 성삼문 등 사육신, 남이의 옥사에 희생된 남이, 기묘사화 때 희생된 기묘명헌의 사람 중 한 사람인 정암 조광조 등의 경우와 다른 점이다. 현대 1960년대 박정희 정부에서는 정몽주를 충절의 상징으로 추상함으로써 다시 그에 대한 폄하가 시도되었으나 1970년대 이후 재평가 여론이 나타났다. 2003년 삼봉 정도전 기념사업회가 출범하였다. 2003년11월, 2007년12월 정도전 재평가와 그의 학문연구를 위한 삼봉학 학술회의가 열렸다. 정도전의 신권정치(臣權政治, 재상중심의 정치)가 독일식 총리제, 영국식 수상제, 스위스식 집정부제와 같은 정권들을 통하여 경제개혁, 토지개혁으로 이어졌듯이 토지공동체와 같은 정책으로 땅의 제 역할이 회복될 수 있는 정도전의 정전제는 조봉암의 농지개혁의 바탕이 되었으며, 한국판 토지 뉴딜(New Deal)정책이었다는 평가다. 정도전의 묘가 경기도 과천현 10리 동쪽에 있다는 전설과 소문을 근거로 과천 일대의 야산을 탐사한 결과 목이 잘린 시신이 발견되었다. 시신과 함께 많은 양의 고급 조선백자가 함께 발견되었다. 정도전 사당에는 그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가족 관계 본가 봉화 정씨(奉化 鄭氏) 증조부 : 비서랑 동정 정영찬(秘書郞同正 鄭英粲) 조부 : 검교 군기감 정균(檢校軍器監 鄭均) 아버지 : 형부상서 정운경(刑部尙書 鄭云敬, 1305년 ~ 1366년) 외조부 : 영주우씨 산원(散員) 우연(禹淵) 어머니 : 증 정경부인 영주 우씨(贈 貞敬夫人 榮州 禹氏) 누이 : 봉화 정씨 매부 : 황유정(黃有定, 1343년 ~ 1421년) 동생 : 정도존(鄭道存, ? ~ 1398) 동생 : 정도복(鄭道復, 1351년 ~ 1435년) 부인: 경숙택주 경주 최씨(慶淑宅主 慶州 崔氏) 장남 : 형조판서 증 우찬성 희절공 정진(刑曹判書 贈 右贊成 僖節公 鄭津, 1361년 ~ 1427년) 손자 : 정래(鄭來) 손자 : 정속(鄭束) 차남 : 정영(鄭泳 ? ~ 1398년) 아들 : 정유(鄭游 ? ~ 1398년) 처가 경주 최씨(慶州 崔氏) 장인 : 찬성(贊城) 최습(崔濕) 대인 관계 스승과의 관계 기초학문은 풍기의 최림에게 수학하였고, 개성으로 올라와 이제현의 문하와 국학 성균관에서 수학한 관학파 이다. 정도전이 등장한 작품 드라마 《개국》(KBS, 1983년~1983년, 배우:김흥기) 《추동궁 마마》(MBC, 1983년~1983년, 배우:이호재) 《용의 눈물》(KBS, 1996년~1998년, 배우:김흥기) 《대풍수》(SBS, 2012년~2013년, 배우:백승현) 《정도전 (드라마)》(KBS, 2014년~2014년, 배우:조재현, 강이석) 《육룡이 나르샤》(SBS, 2015년~2015년, 배우:김명민) 영화 《해적》(2014년, 배우: 안내상) 《순수의 시대》(2015년, 배우: 이재용) 주요 저작 저서 《삼봉집》(三峯集)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경제문감》(經濟文鑑) 《경제의론》(經濟議論) 《불씨잡변》(佛氏雜辨) 《심문천답》(心問天答) 《심기리》(心氣理) 《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 《진맥도결》(診脈圖結) 《고려국사》(高麗國史) 37권 《상명태일제산법》(上明太日諸算法) 《진법》(陣法) 편저와 역서 《고려국사》 (공저)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작품 《오행진출기도》(五行陣出寄圖) 《태을72국도》(太乙七十二局圖) 《강무도》(講武圖) 〈궁수분곡〉(窮獸奮曲) 〈납씨가〉(納氏歌) 〈정동방곡〉(靖東方曲) 〈문덕곡〉(文德曲) 〈신도가〉(新都歌) 등. 사상과 신념 “재상의 나라”를 꿈꾸었던 정도전은 훌륭한 재상을 선택하여 그 재상에게 정치의 실권을 부여하여 위로는 임금을 받들어 올바르게 인도하고, 아래로는 신하들을 통괄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중책을 부여하자고 주장하였다. 즉, 정도전은 임금은 단지 상징적인 존재로만 머물고 나라의 모든 일은 신하들이 회의를 거쳐 결정하는 나라를 이상적인 나라로 생각하고 있었다. 태조 때의 정치는 태조와 그의 신임을 받은 정도전 등 소수의 재상이 이루었다. 한편 조선은 각 지역에 관리를 파견하여 “중앙집권 관료국가”가 되었다. 이것은 이전까지 지방 세력을 인정하는 봉건국가와는 비교되는 정체였다. 경제론 그의 경세론(經世論)은 《조선경국전》(1394)· 《경제문감》(1395)·《경제문감별집》 등에 제시되어 있다. 조선왕조의 통치규범을 종합적으로 제시한 조선경국전은 각국과 각 시대의 법령과 규정을 참고한 것이 주목된다. 《주례 周禮》에서 재상중심의 권력체계와 과거제도, 병농일치적인 군사제도의 정신을 빌려오고, 한당(漢唐)의 제도에서 부병제(府兵制)·군현제(郡縣制, 守令制)· 부세제(賦稅制)·서리제(胥吏制)의 장점을 받아들이고 있다. 외국의 사례로는 명나라로부터는 《대명률 大明律》을 빌려왔다. 그는 여말에 나라가 가난하고 민생이 피폐하였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하여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토지균분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그 해결책으로서 민구수(民口數)에 따른 토지재분배와 공전제(公田制) 및 10분의 1세의 확립, 공(工)·상(商)·염(鹽)·광(鑛)·산장(山場)·수량(水梁)의 국가경영을 실현시키려고 하였다. 그의 경세론은 자작농의 광범한 창출과 산업의 공영을 통해서 부국강병을 달성하고, 능력에 토대를 둔 사 위주의 관료정치를 구현하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의 개혁안은 상당부분이 법제로서 제도화되었지만 그가 계획한 모든 계획 중 일부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정치론과 인재 채용 《경제문감》은 재상·감사·대간·수령·무관의 직책을 차례로 논하고, 《경제문감별집》에서는 군주의 도리를 밝혔다.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에는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 교체될 수 있다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긍정하였으며, 실제로 혁명이론에 입각하여 왕조교체를 수행하였다. 그는 성리학적 왕도 정치와 패도 정치의 사례를 제시한 후, 패도 정치를 하는 군주는 역성혁명이나 기타 수단에 의해 폐위될 수 있음을 경고하였다. 또한 군자와 소인의 존재를 역설하여 군왕은 군자들을 등용하여 올바른 정치를 수행해나가야 된다고 봤다. 그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정치제도는 재상을 최고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인 관료지배체제이며, 그 통치권이 백성을 위하여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본사상을 강조하였다. 이는 일종의 내각에 의한 정국운영론으로, 그의 재상 중심, 신권 중심의 정치이론은 후일 이방원 집권 후 폐지되었다가, 다시 세종과 문종의 연이은 죽음 이후 김종서, 황보인 등에 의해 부활된다. 이를 의정부 서사제라 한다. 그는 사농공상의 직업분화를 긍정하고, 사를 지배층으로 생각하였으나, 사의 직업은 도덕가·철학자·기술학자·교육자·무인 등의 역할을 겸비해야 하고 사에서 능력위주로 관리가 충원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불교 배척과 비판 그는 불씨잡변을 지어 숭유억불정책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평등 사상 그의 사상 중에는 적서(嫡庶)나 양천(良賤)과 같이 혈통에 의한 신분차별을 주장하지 않은 것이 주목된다. 그는 유배생활을 전전하며 목격한 노비와 하층민의 참상에 분노했고 이것이 곧 역성혁명의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사농공상에 따른 신분 차별을 당연하게 여겼다는 점에서 일정 부분 한계를 갖고 있다. 논란과 의혹 세자 택군 일찍이 배극렴, 조준 등과 '시대가 태평하면 적자(장남)를 세우고 세상이 어지러우면 공이 있는 자를 세워야 한다'고 태조 이성계에게 주청한 바 있다. 오해 이방원이 집권후 역적으로 처리되어있다가 한참이 지난후에야 충신으로 처리되었다. 관련 다큐 2011년 1월 16일 KBS1TV 《학자의 고향 - 삼봉 정도전 편, 1부 정도전, '하늘을 버리고 백성을 선택하다'》 2011년 1월 23일 KBS1TV 《학자의 고향 - 삼봉 정도전 편, 2부 정도전, '조선을 디자인하다'》 (((도담 삼봉))) 정도전의 호 ‘삼봉’이 단양팔경의 하나인 도담삼봉에서 유래한 것인가? 최근 한국고전번역원이 한국고전선집 첫 번째 권으로 펴낸 『삼봉집』을 읽다가 시선이 멈추었다. ‘삼봉에 올라[登三峰憶京都故舊]’라는 시에서였다. 역자인 심경호 교수는 이 시의 주석에서 삼봉을 서울의 삼각산(三角山)으로 풀이한 뒤 정도전의 호 ‘삼봉’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밝혔다. 많은 이들은 정도전의 호 ‘삼봉’이 단양팔경의 하나인 도담삼봉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갑자기 의문이 일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알고 있는 도담삼봉설은 잘못되었단 말인가.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도담삼봉을 치면, 백과사전이나 단양군청의 소개글 등에서는 하나같이 정도전이 젊은 시절 도담삼봉에서 노닐었으며 호를 삼봉이라고 지을 정도로 그곳에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정도전의 출생지가 현재의 단양읍 도전리이며 심지어 도담삼봉의 정자도 정도전이 세웠다는 얘기까지 전하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전신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1991년 펴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도 예외는 아니다. 사전의 ‘정도전’ 항목을 보면 “(정도전의) 선향은 경상북도 영주이며, 출생지는 충청도 단양 삼봉(三峰)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 글을 쓴 이는 정도전 연구의 권위자인 한영우 교수인데, 그는 학계에 정도전을 본격 소개한 『정도전 사상의 연구』(서울대출판부, 1973)에서 ‘도담삼봉설’을 제기했다. 그는 이 책에서 정도전 출생과 관련한 전설을 소개하면서, “아이를 길에서 얻었다 해서 이름을 도전(道傳)이라 하고, 부모가 인연을 맺은 곳이 삼봉이므로 호를 삼봉(三峰)이라고 지었다.”라고 썼다. 한 교수는 민족문화추진회(한국고전번역원 전신)가 펴낸 『국역삼봉집』(솔출판사, 1997)의 해제에서도 같은 주장을 폈다. 이러한 한 교수의 설은 그간 학계 뿐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정설이 되다시피 했다. 신용호 전 공주대 교수가 ‘선대 사류의 자ㆍ호ㆍ시호 연구’라는 논문 (『한국인의 자ㆍ호 연구』, 계명문화사, 1990에 수록)에서 정도전의 삼봉은 단양의 도담삼봉에서 호를 취한 것이라고 쓴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후 ‘삼봉’이라는 호의 유래는 도담삼봉으로 사실상 굳어졌다. 이 대목에서 ‘삼봉’이라는 호에 대해 따져볼 필요성이 제기된다. 호를 짓는 법칙 중의 하나는 자신이 생활하고 있거나 인연이 있는 지명을 호로 삼는 ‘소처이호(所處以號)’이다. 이 작호(作號) 법칙에 비추어 본다면 도담삼봉이나 서울의 삼각산 모두 ‘삼봉’의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정도전의 삼봉은 도담삼봉일까, 삼각산일까. 아니면 둘 다일까. 이를 판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정도전의 글을 살피는 일이다. 정도전은 삼봉이라는 호에 대해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삼봉집』에서 ‘삼봉’의 유래를 밝힌 문장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삼봉’의 지명이나 위치를 가늠해볼 수 있는 시를 여러 편 남겼다. 첫 번째는 이 글 서두에서 인용한 ‘삼봉에 올라’라는 시이다.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홀로 있다가 먼 그리움 일어나 삼봉 마루에 올라서 북쪽으로 송악산 바라보니 검은 구름 높게 떠 있다 그 아래 벗님 있어 밤낮으로 어울려 놀았지 端居興遠思陟彼三峰頭松山西北望峨峨玄雲浮故人在其下日夕相追遊(하략) 정도전이 경도(개경)의 옛 친구를 추억하는 이 시에 인용한 삼봉은 ‘서북쪽으로 송악산 바라보이는’ 곳이다. 개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의미이다. 또 이 시에는 ‘공(정도전)이 부모상을 당해 경상도 영주에 살면서 3년 복제를 마치고 1369년에 삼봉의 옛집으로 돌아왔다’는 주석이 있어 삼봉이 영주에서는 멀리 떨어진 곳임을 추론케 한다. ‘삼봉으로 돌아올 적에 약재 김구용이 전송해 보현원까지 오다 [還三峰若齋金九容送至普賢院]’라는 시에도 삼봉이 보인다. 이 시를 지을 무렵, 정도전은 장기간 집을 떠나 있었는데, 오랜 방랑을 끝내고 삼봉의 옛집에 돌아올 때 친구 김구용이 보현원(普賢院)까지 전송한 일을 읊은 시다. 보현원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경기도 장단에서 남쪽으로 25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설명되어 있다. 현재의 파주 임진강변쯤으로 추정되는데, 역사적으로는 고려 의종 때 국왕의 보현원 행차를 틈타 정중부 등이 무신란을 일으킨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 삼봉은 파주 인근의 지명임을 알 수 있다. 또 ‘산중(山中)’이라는 오언율시에는 삼봉 아래 정도전의 옛집 풍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하찮은 나의 터전 삼봉 아래라 돌아와 송계의 가을을 맞네 집안이 가난하니 병 수양에 방해롭고 마음이 고요하니 근심 잊기 족하구려 대나무를 가꾸자고 길 돌려 내고 산이 예뻐 작은 누를 일으켰다오 이웃 중이 찾아와 글자 물으며 해가 다 지도록 머물러 있네 弊業三峰下歸來松桂秋家貧妨養疾心靜定忘憂護竹開迂徑憐山起小樓隣僧來問字盡日爲相留 찬찬히 읽어보면 정도전의 삶터는 산봉우리 아래 소나무와 대나무가 자라는 깊은 산중이다. 강물이 휘감아 도는 도담 삼봉하고는 거리가 멀다. 이밖에 『삼봉집』에 수록된 ‘이사[移家]’라는 시를 보면 ‘오년에 세번이나 집을 옮겼다’는 구절이 보이는데, 이곳에도 예의 ‘삼봉’이 등장한다. 이 시에는 특이하게도 다음과 같은 문집 편찬자의 주석이 붙어 있다. “공이 삼봉재(三峰齋)에서 글을 강론하자 사방의 학자들이 많이 따랐다. 이때에 향인으로 재상(宰相)이 된 자가 미워하여 재옥(齋屋)을 철거하자, 공은 제생(諸生)들을 데리고 부평부사(富平府使) 정의(鄭義)에게 가서 의지하여 부(府)의 남촌에 살았는데, 전임 재상 왕모(王某)가 그 땅을 자기 별장으로 만들려고 또 재옥을 철거하여 공은 또 김포(金浦)로 거처를 옮겼다. 임술년(1382)” 삼봉재에 살던 정도전이 한 권력자가 집을 철거하자 부평으로 이사갔다가 그곳에서도 여의치 않자 다시 김포로 옮겼다는 내용이다. 문제는 삼봉재의 위치를 단양으로 보느냐, 삼각산으로 보느냐인데, 임시 거처를 찾아 전전했던 당시 상황을 미루어본다면 부평이나 김포 인근인 삼각산이 옳을 듯하다. 종합하면, ‘삼봉’은 개경을 조망할 수 있는 높은 산이며, 파주 임진강에서도 멀지 않은 곳이다. 또 삼봉을 중심으로 오 년 동안 세 번의 이사를 했는데, 그가 머물렀던 곳은 삼봉, 부평, 김포로 한강 주변 지역들이다. 이렇게 본다면 ‘삼봉’은 삼각산, 즉 오늘의 북한산을 지칭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북한산은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의 세 봉우리로 이뤄졌다 해서 예부터 삼각산으로 불렸다. ‘삼봉’으로 약칭되기도 했는데, 이 같은 사례는 목은 이색의 글에서도 확인된다. 정도전의 스승으로 학문과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색은 17세 되던 해 삼각산에서 학업을 연마한 적이 있다. 이런 인연 때문인지, 그의 문집 『목은집』에는 ‘삼각산(三角山)을 바라보며’라는 시가 실려 있다. 이 시에는 ‘삼봉이 태초 때부터 깎여 나왔는데[三峰削出太初時]’라는 구절이 보인다. 삼각산과 삼봉이 함께 쓰였다는 증거다. 정도전의 문집에 나타난 ‘삼봉’은 단양의 도담삼봉이 아닌 삼각산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당연히 『삼봉집』에 도담삼봉이나 단양이라는 지명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정도전의 호 ‘삼봉’이 도담삼봉과는 거리가 있음을 말해준다. 이 때문인지 처음 ‘도담삼봉설’을 제기하였던 한영우 교수는 나중에 자신의 견해를 수정했다. 한 교수는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지식산업사, 1999)에서 정도전 출생과 호에 관련한 전설이 사실과 다른 것 같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삼봉이라는 호는 단양의 삼봉에서 차명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의 옛집인 개경 부근의 삼각산에서 차명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발짝 물러났다. 한영우 교수는 기록이 아닌 단양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정도전의 출생지와 ‘삼봉’이라는 자호의 유래를 도담삼봉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문집을 살펴보면 그러한 주장이 근거가 없음이 드러난다. 전설은 전설일 뿐이다. 정도전의 호 ‘삼봉’은 삼각산(북한산)으로 보는 게 옳다. 정도전은 자신의 옛집이 있던 북한산에서 호를 취하였고, ‘삼봉재’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했다. 오랫동안 삼각산 아래에 살았던 정도전은 삼각산과 한강의 지리를 훤히 꿰뚫었을 것이다. 조선이 개국한 지 3년도 되지 않아 개경에서 삼각산 아래의 한양으로 천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러고 보니 삼각산을 지칭하는 ‘삼봉’이라는 호는 ‘조선 왕조의 설계자’라는 정도전의 이미지와도 잘 어울린다. 三峰, 정도전의 호는 삼각산에서 따왔다 정 성 삼 우리에게는 전통적인 작호법(作號法)이 있다. 호(號)는 자신이 짓기도 하고 스승이나 부모 또는 친구가 지어주기도 한다. 자신의 호를 직접 짓는 경우에는 태어난 곳이나, 특별한 인연이 있는 지역이나, 가지고 있는 물건 가운데 좋아하는 것이나,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 고려말 신진유학자· 정치가로서 5백년 조선왕조창업의 기틀을 닦았던 정도전(鄭道傳)의 호가 삼봉(三峰)이다. 정도전은 자신의 호에 대한 글을 남기지 않아서, 三峰 호의 유래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정도전의 출생과 호에 대해 국가기관에서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 를 알아보았다. 정도전의 출생지는 단양읍 도전리이고, 호는 도담삼봉에서 유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도전을 사학계에 본격적으로 소개한 한영우교수(서울대)가 1973년 「정도전사상연구」를 펴냈는데, 이 책에서 정도전의 출생과 三峰 호와 관련한 구전자료를 소개하면서 정도전의 출생지가 단양읍 도전리이고, 호는 이곳 도담삼봉에서 따왔다고 하였다. 또 1997년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낸 「국역삼봉문집」해제 글에서도 같은 주장을 하였다. 그래서 한영우교수의 “정도전이 외조모가 천출이라는 가계(家系)와 함께 단양출신이고 호는 도담삼봉에서 유래했다.”는 학설이 사학계와 일반인들에게 정설화되어 있었다. 단양지방에서 구전되고 있는 전설을 요약해 보고자 한다. “어느날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이 단양도담삼봉이 있는 마을 앞을 지나다가 관상을 보는 사람이 정운경에게 당신은 10년 뒤에 이곳 마을 여성과 혼인을 하면 장차 이 나라의 재상이 될 것”이라고 했다. 정운경은 관상가의 말대로 10년후 도담삼봉이 있는 도전리 마을 여성과 혼인하면서 아이를 얻었는데, 이 아이가 정도전이라고 했다. 정운경은 도담삼봉이 있는 마을 앞을 지나다가 관상가의 말대로 아이를 얻었다고 하여 도전(道傳)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단양읍 도전리 마을 이름은 한자로 도전(道田)이라고 쓴다. 정운경은 관상가의 예언대로 형부상서, 오늘날 법무부장관의 벼슬을 지냈다. 출생지는 봉화정씨 족보에 정도전에게 두 아우가 있고, 정도전이 쓴 아버지 정운경행장에는 영주가 고향이라고 했다. 영주 2동에 있는 정운경의 생가로 알려진 삼판서고택(三判書古宅)의 유래를 보면 정도전이 영주출신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삼판서고택은 “판서가 세 사람 나왔다.”는 뜻이다. 이 집에서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이 태어나서 형부상서를 지냈고, 정운경은 이 집을 사위 황유정에게 물려주었는데 공조판서를 했다. 황유정도 사위 김소량에게 집을 물려주었는데, 그의 아들 김담이 이조판서에 오르자 ‘三判書古宅’이란 표석을 세웠다고 한다. 이 집에서 판서급 인사가 5명 배출되었고, 문과 8명, 무과 1명, 소과 2명 등의 선비들이 태어났다고 한다. 이러한 문헌을 봐서는 정도전의 출생지가 영주라는데 이론(異論)이 없을 것 같다. 三峰은 “세 봉우리의 산”이란 뜻인데 삼각산의 정식 명칭이 아닌 별칭으로 사용된 이름이다. 요즘 정도전이 자기 아버지가 도담삼봉이 있는 마을에서 어머니를 만난 것을 생각하여 호를 지었다고 하는 단양지역의 전설을 바탕으로 정설화된 도담삼봉호유래설을 부정하고 새로운 삼각산삼봉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래서 한영우교수도 1999년 10월 출간한 「왕도(王都)의 설계자 정도전」에서 정도전의 출생은 물론이고, 이름과 호에 관련된 구전설화나 이야기가 과장되었거나 진실과 거짓이 함께 섞여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정도전의 문집에 나오는 시에 三峰이란 시어가 여러 번 나온다. 이 시에 나오는 三峰은 모두 도담삼봉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이다. 여기서 三峰은 현재 서울 북한산의 옛 이름인 삼각산(三角山)을 가리킨다. 삼각산이 백운대·인수봉·만경대 세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어서 三峰은 삼각산의 또다른 이름이다. 정도전이 삼각산 三峰과 인연이 있는 것은 1375년 서른세살 때 고려조정으로부터 원(元)나라 사신을 영접하라는 명을 받고, 이를 거부하다가 파직당하여 나주 회진에서 4년간 유배생활을 마치고도 개경(개성)으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그는 개경금족령으로 돌아갈 수 없어서, 부평·김포·한강 삼각산(북한산) 주변지역에서 세 번 이사하면서 5년간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았다고 한다. 이 시기에 정도전은 부패한 고려사회를 개혁하여 유학(儒學)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국가를 건설하려는 꿈을 키워나갔다. 고려 말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는 도선의 십팔자위왕설(十八子爲王說)이 나돌고 있던 때이다. 정도전의 문집에 ‘三峰’이란 제목으로 쓴 시를 감상해 보자. 三峰이 도담삼봉인지, 아니면 삼각산삼봉을 가리키는 것인지 유념하자. “홀로 옛 그리움에 젖어 三峰마루에 오르면 서북쪽 송악산이 바라보이고 검은구름 높게 떠 있다. 그 아래에서 벗들과 함께 밤낮으로 어울려 놀았지.” 이 시는 정도전이 개경에 있을 때 벗들과 어울려 함께 놀았던 추억을 읊은 것이다. 개경은 고려의 도읍지, 지금의 개성이다. 이 시에 나오는 三峰 곧, 삼각산(북한산)은 개경에서 그리 멀지 아니한 곳에 위치해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정도전의 호는 도담삼봉에서 따온 것이 아니고 삼각산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는 것이다. ‘산중(山中)’이란 시 한 편을 더 보자. “하찮은 나의 삶의 터전은 三峰 아래라서 돌아와 산중에서 가을을 맞네. 집안이 가난하여 병든 몸 돌볼 길없고 마음 고요하니 근심을 잊게 되는구나. 대나무를 가꾸고자 길을 돌려내고 산이 예뻐 작은 정자 세웠다오. 이웃 스님이 찾아와 글자 물으며 해가 다 지나도록 머물러 있네.” 이 시는 정도전이 한해에 부모상을 연이어 당하고 영주에서 3년 시묘살이를 마친 후 자기가 살던 三峰, 三角山 생활 터전으로 돌아와 사는 집 주변 풍경을 읊은 것이다. 이 시에서도 三峰은 삼각산, 지금의 북한산으로 개경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므로 정도전의 호, 도담삼봉설과는 관계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외 문집에 나오는 三峰이란 시어는 모두 삼각산 三峰을 가리킨다. 정도전의 호를 삼각산 三峰에서 따왔다고하면 이곳에서 야인생활을 하는 동안 조선창업을 설계하고 도읍지를 한양(漢陽)으로 옮긴 혁명가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도전은 어떤 사람인가? 정도전은 이성계가 조민수와 함께 1398년 위화도회군에 성공하자, 정도전은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 대사성에 오르면서 정치력을 발휘해나갔다. 정도전은 1392년 4월 목은 이색문하에서 동문수학했던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피살되자 공양왕을 퇴위시키고, 그해 7월 이성계가 개국군주(開國君主)로 추대되고 고려왕으로 즉위하였다. 새왕조의 기틀이 갖추어지자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으로 고치고 한양(漢陽)으로 도읍지를 옮겼다. 그는 경복궁(景福宮) 궁궐·전각 대부분과 한양8개 도성문(都城門) 이름을 직접 짓고, 조선왕조 법전편찬의 기초가 된 「조선경국전」을 편찬하였다. 경복궁을 둘러보면 정도전이 꿈꿔온 유학의 이상적인 정치실현의 장이라는 느낌이 든다. 정도전은 자신이 조선창업에 크게 기여했다는 말을 자주 술자리에서 했다고 한다. “한(漢)나라 고조 유방이 장자방(장량)을 발탁하여 한나라를 창업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유방에게 왕위를 열어주었다.”고 했다. 이 말은 정도전 자신이 이성계에게 왕위를 얼어주었다고 한 것이다. 이성계 태조도 1395년 10월 20일 경복궁 낙성식 연회장에서 정 도전에게 하사한 “유종공종(儒宗功宗)”이란 편액을 통해 이성계도 정도전이 유학도 으뜸이고 조선창업에도 공이 으뜸이라고 화답하였다. 정도전은 고려말 난세를 고민한 진보적인 사고(思考)를 가진 신진유학자·정치가로서 백성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왕도정치의 시작이라고 한 민본사상(民本思想)을 최우선으로 하고, 임금에게 휘둘리지 않는 검정된 재상(宰相)중심의 신권정치(臣權政治) 실현을 목표로 하는 정치철학은 왕권도전으로 인식하고 있는 이방원에 의해 묵살되고, 제1차왕자난 때 피살되면서 만고역적으로 몰렸다가 고종 때 대원군에 의해 복권되고 문헌(文憲)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정도전의 “백성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왕도 정치의 시작”이라는 민본사상은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으로 이어져 우리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임금이 되어 광화문 광장에 국난극복의 영웅 이순신장군과 함께 우리 앞에 우뚝 서 있다. 민본사상은 박근혜대통령의 “국민이 행복한 나라를 건설”한다는 국정목표와 국민을 위하는 정치적 인식이 서로 같다고 할 수 있다. 역사는 후세사람들에게 자신이 살아가는 모습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라는 점에서, 6백년전의 정도전의 민본정치사상이 21세기 대한민국 정치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할 것이다. 정도전(鄭道傳)은 서얼(庶孼)출신인가 쥐쥐스타 2012.07.19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1392년 7월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조선(朝鮮)을 건국하고 새 나라의 문물제도와 국책의 대부분을 결정하였다. 그의 정치철학은 재상(宰相)을 중심으로 분화된 신권정치(臣權政治)를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사병(私兵)을 혁파하는 등 왕족의 세력을 적극 견제하여 그들로부터 불만을 사 1398년 8월 25일 제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李芳遠;太宗)에게 참수되었다. 죽은 후 까지도 태종으로부터 극도로 미움을 받아 서출(庶出)로 폄하되고 서출은 절대로 벼슬길에 나올 수 없도록 한다. 정도전의 출생지는 여러 설이 있는데 첫째로 단양설로 단양우씨(丹陽禹氏) 역동 우탁(禹倬 1263∼1342(원종 4∼충혜왕 복위 3) 고려말 유학자)의 노비(奴婢) 소녀와 정운경(鄭云敬 1305∼1366 (충렬왕 31∼공민왕 15))의 노상(路上) 정사(情事)로 태어났다는 것이고, 두 번째 그의 아버지 고향 영주(榮洲)에서 태어났다는 설, 세 번째 본관과 같이 봉화(奉化)에서 태어났다는 설, 네 번째 양주골 삼각산(三角山-837m)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있다. 정도전은 양주고을 삼각산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였다고 보여 진다. 그 첫 번째 이유로 그의 아버지가 1320년(高麗 忠肅王 7)경 부터 삼각산에서 살았었다. 그의 아버지 정운경이 등과전(1326년) 외숙 안분의 추천으로 개성에서 공부하다가 청년시절 삼각산에 정착하여 윤안지(尹安之)와 더불어 학문을 연마한 사실이 있다. 두 번째 정도전이 시련 속에 있을 때와 정국에 회의가 들 때마다 이곳에 와서 살거나 그리워하며 시로 읊었던 흔적이 있다. 1365년 공민왕(恭愍王 1330∼1374 (충숙왕 17∼공민왕 23). 고려 제31대 왕(1351∼1374))이 신돈(辛旽 ?∼1371(?∼공민왕 20))을 발탁하여 신돈이 정국을 전횡 할 때 삼각산 옛 집으로 돌아와 원유가로 시국을 풍자한바 있고, 1369년 7월 아버지와 어머니의 상기(喪期)를 영주의 선영 에서 마치고 이곳으로 돌아와 관계진출을 모색하였으며, 1382년 어렵고 힘든 객지를 유랑하다가 역시 이곳으로 돌아와 삼봉재(三峰齋)를 짓고 후생을 훈도한 사실이 있으며, 그의 시 수편에서 삼각산 아래 나의 터전이라든가 삼각산 옛집을 회상하는 심정을 표현하였다. 이것은 곧 그가 삼각산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도전이 천출로 알려진 단양 출생설은 1410년 태조실록(太祖實錄-1410년 정월부터 하륜·유관·정이오·변계량 등이 주재하는 가운데 조말생(趙末生)·권훈(權壎)· 윤회(尹淮)·신장(申檣)·우승범(禹承範)·이심(李審) 등이 편찬에 착수, 1413년 3월 완성)편찬이후 날조된 기록이다. 1410년 태조실록편찬당시 하륜, 변계량이 최고 책임자이지만 편수자의 중요한 역할을 한 자 중에 우홍수의 아들 우승범(禹承範)이 있다는 사실이다. 우선 정도전이 쓴 아버지 정운경의 행장((行狀) 죽은 사람의 생전 이력과 업적을 적은 글)을 살펴보면 그의 아버지 정운경(1305~1366)은 조실모하여 이모가에 자라다가 외숙 안분의 도움으로 학문의 길에 들었고 영주의 명문 선비들인 안향(安珦 1243∼1306(고종 30∼충렬왕 32) 호는 회헌(晦軒) 한국 최초의 주자학자)을 비롯한 안축, 외숙 안분과 같은 순흥안씨(順興安氏)가 외가였으며, 그들 안씨들의 외가인 영주의 토성(土姓) 영천 우씨(榮川 禹氏)를 아내로 맞아 혼인하였다. 정도전이 출생할 즈음(1337~1342) 아버지 정운경은 상주와 개경에서 재직하고 있었다. 이것은 정도전이 양주 삼각산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또 이때 정운경은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이거나 홍복도감 판관(判官-6품이상)이라는 중견관리로 직책이 율법을 관장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율사였다. 그는 공공의 이익과 원칙이 몸에 밴 강직하면서도 사욕에 담박한 성격에 도덕을 겸비한 선비였던 것이다. 그런데 단양에 떠도는 속설에는 정운경은 사리사욕에 능하고, 매우 부도덕하고 무책임한 사람으로 표현 하였다. 1337년~1342년경 정운경이 낭인(浪人)의 처지로 어느 날 비를 피해 원두막을 찾았다가, 혹은 수수단을 놓고 새를 쫓는, 우탁의 노비 소녀를 만나 겁탈한 다음 그저 성씨만 알려주고 무책임하게 떠났다가 몇 년 후 아들(정도전)이 3~4살 혹은 10살이 되어 그것도 우연히 길에서 만나 얘기 도중 부자(父子)관계를 확인 하였다는 것이다. 노비 처녀를 만났다고 할 당시 정운경은 이미 통례문지후이거나 홍복도감 판관으로 재직하고 있었고, 또 역동 우탁(1262~1342)은 정도전이 태어날 당시(1342년) 안동부 예안에 거주하여 이미 75세로 고령이거나 사망한 사람이었다. 단양과 우역동의 거주사실이 부합되지 않는다. 고로 우탁의 노비 소녀를 운운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단양 출생설이 전파된 배경을 살펴보면 1398년 8월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공신들을 살해한 배후에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방원은 자신의 정치적 욕구에 걸림돌이 되는 공신들을 제거함에 있어, 그중에 정도전을 이성계의 최측근으로서 제거 일순위로 꼽았다. 그리하여 수하의 몇몇 사병을 동원하여 한밤중에 기습하여 무참히 죽였다. 이와 같이 자신이 저지른 역모 사건을 합리화 또는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첫째 죽은 자를 역모로 몰아붙이는 것이고, 둘째 출신을 폄하하여 천출(賤出)로 만드는 것이며, 셋째 정도전에게 원한이 있는 세력을 가까이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방원은 실제로 세 가지를 모두 병행하였다. 아버지 이성계의 실각을 계기로 조선개창과 관련한 정도전과 반대 입장에 있었던 고려 유신들을 거의 수용하였다. 1408년 태조 사망 후 이방원은 하륜(河崙 1347∼1416(충목왕 3∼태종 16)), 변계량(卞季良 1369∼1430(고려 공민왕 18∼조선 세종 12)), 우홍수의 아들 우승범(禹承範) 등에게 지시하여 태조실록을 편찬도록 하였고, 정도전에 관한 기사는 일일이 점검하였다. 그들은 이방원의 의도대로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충숙왕 15∼태조 5)), 우현보(禹玄寶 1333∼1400(충숙왕 복위 2∼정종 2), 이숭인(陶隱 李崇仁 1349∼1392(충정왕 1∼태조 1))을 우호적으로 기술하여 옹호하였고, 정몽주(圃隱 鄭夢周 1337∼1392(충숙왕 복위 6∼공양왕 4))를 충신의 표본으로 설정하였다. 한편 정도전은 그 많은 업적과 공훈에도 불구하고 역적과 천출로 기술한 것이다. 따라서 단양의 속설은 태조실록과 고려사 편찬에 참여 하였던 고려 구신(舊臣)들이 세간에 유포한 것으로 생각되며, 특히 우현보의 손자 우승범 형제들이 세간의 소문을 더욱 윤색하여 단양지방에 퍼드린 것이다. 왜냐하면 우현보는 정도전과 고려말 1391년 9월 이후 정치적으로 첨예한 대립 관계에 있었고, 조선 개창 후 현보의 세 아들 우홍수(禹洪壽 1355(공민왕 4)∼1392(태조 1)), 우홍득(禹洪得 ?∼1392(태조 1)), 우홍명(禹洪命 ?-1392)을 정도전이 원한을 가지고 죽였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죽은 이유는 이성계가 명(明)을 침공하려 한다고 명에 고자질한 이른바 윤이(尹彛)·이초(李初)의 난(1390년(고려 공양왕 2))과 김저(金佇 ?∼1389(?∼공양왕 1))의 사건 즉 우왕(禑王 1364 ∼1389(공민왕 13∼공양왕 1). 고려 제32대 왕(1375∼88)) 복위운동과 연루된 것이고, 보다 더 큰 이유는 조선개창 반대운동에 적극 가담하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단양의 속설이 나돌게 된 배경에는 이방원의 의도가 깔려있고, 우현보의 자손들이 세상에 유포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정도전은 공리와 원칙을 존숭하는 강직하고 청렴한 선비 아버지 정운경과 영주의 토성 영주 우씨 어머니 사이에 양주 삼각산 옛집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지금까지 억울하게 누명쓴 그의 출신이 서출이라는 설은 잘못된 것이다. 족보가 부른 참화 - 정도전·하륜 서얼 드러날까 '연안 차씨 멸문'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면서 신흥 명문가가 생기는가 하면 멸문의 화를 입은 집안도 있다. 개성 왕씨를 비롯해 이 집안과 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연안 차씨(延安 車氏)가 대표적이다. 연안 차씨 차원부는 고려 말 정몽주, 이색 등과 함께 명성을 떨친 성리학의 대가로 요동정벌을 떠나는 이성계가 찾아와 조언을 구하자 중국 정벌의 부당함을 언급해 위화도 회군의 명분을 주었고 조선이 창건된 뒤에는 태조의 공신 책봉을 거절하고 은둔한 인물이다. 차원부는 '왕자의 난'(1398년) 때 피살되고 가족은 물론 친척까지 주살되고 차원부가 은둔하면서 만든 연안 차씨 족보 판본까지 불살라지는 등 멸문의 화를 입는데 사가(史家)들은 이방원의 오판과 하륜(河崙)의 음모가 부른 참화라고 해석한다. 그런 배경에는 연안 차씨 족보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도 있다. 연안 차씨 족보는 안동 권씨의 '성화보'와 문화 류씨의 '가정보'보다 앞선 우리나라 족보의 효시로 평가받는데 족보에는 차씨 문중과 혼맥을 형성한 다른 집안의 서얼까지 상세하게 기록돼 있었다. 족보에 따르면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鄭道傳), 조영규(趙英珪), 함부림(咸傅霖), 그리고 태종 이방원의 집권을 도운 하륜이 모두 서얼 출신이다. 정도전은 차 씨 집안의 사위인 우연(禹淵)의 첩이 낳은 딸의 아들이고, 조영규는 차운혁(車云革, 차원부의 조카)의 이복누이의 남편이고, 함부림은 차원부의 이복남동생의 사위이고, 하륜은 차씨 집안 사위인 강승유(姜承裕)의 첩이 낳은 딸의 아들이었다. 연안 차씨 종친회 차기탁 부회장은 "우리 족보에 악감정을 품은 하륜 등이 왕자의 난을 빌미로 차원부 할아버지의 일족을 살해하고, 해주 신광사에 보관된 족보 판본까지 불살라버린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연안 차씨 족보에는 정도전, 하륜, 조영규, 함부림 등 4인이 원흉으로 기술돼 있다. 차원부의 죽음에 가장 분노한 사람은 태조 이성계였고 이방원 세력은 급히 차원부의 명예를 회복시켜주려 했다. 세종과 문종을 거쳐 단종에 이르러서야 그 한 맺힌 사연을 기록한 '설원기(雪寃記)'를 펴내게 됐다. 차원부설원기에 대한 논의 -차문 홈페이지의 글을 보고- - 2014. 7. 15. 류주환 목차 1. 들어가는 말 2. 논의의 대상은 “설원기” 3. “설원기”의 저자 4. 평가절하 5. 연안이라는 지명 6. “대동운부군옥” 7. 4얼 문제 8. 4얼의 진짜 정체 9. 하륜 10. 서얼금고법 11. 설원기는 위서(僞書)를 넘어선 악서(惡書) 12. 두문동 72현 문제 13. 맺는 말 1. 들어가는 말 얼마 전 연차 공식 홈페이지(http://www.cha.or.kr/)를 들어가려 했더니 계약 연장을 하지 않아서 닫혔다는 메시지가 나오면서 들어가지지 않았다. 그러다 최근 다시 시도해 보았더니 이번에는 들어가졌다. 이렇게한 이유는“문화류씨–뿌리 깊은 버드나무”카페 (http://cafe.daum.net/moonwharyu)에 지난 5월 28일에서 6월 11일 사이에 몇 차례에 걸쳐 차천로의 혼인관계를 상세히 분석하는 글들이 올라왔는데 혹시 차문에서 반응이 있었는지 궁금해서였다. 연차 사이트에는 그에 관한 반응은 없었다. (참고로 필자 개인의 메일로 반응을 보내온 분들은 두 분 계셔서 답장으로 상황을 상세히 설명해 드렸다.) (*위 카페에는 누구나 가입하고 글을 올릴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의견 개진을 적극 환영합니다. 여기에는 당연히 연안차씨 분들도 해당됩니다. 어떤 의견이 있으면 카페에 글을 올려 주십시오.) 연차 사이트에는 대신 3월 26일에서 5월 25일에 걸쳐 chky100이라는 닉네임이 쓴 8편의 “차원부설원기”(이하 “설원기”) 관련 글이 올라 있었다. chky100은 작년에 우연히 류차문제를 알게 되어 상세한 내막도 모른 채 무작정 류문과 필자를 비난해 왔던 적이 있다. 이번에는 공부를 하고 여러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보였다. 일단 이런 글이 차문 사이트에 여럿 올라 있다는 것만으로도 바람직한 일로 생각한다.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는 문제를 풀어야 할 책임이 있는 자가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면 반성은커녕 문제해결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논의의 대상은 “설원기” 필자는 가능한 한 논의를 “설원기”에 집중하고자 한다. 문중간의 다툼이나 이견으로 비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설원기”는 문중사(史)를 떠나서 엄밀한 역사의 문제이다. 그럼에도 chky100처럼 전후의 맥락을 잘 알지 못하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하나가 있다. 그것은 문화류씨 문중에서 “설원기”에 대한 적극적인 문제제기를 시작한 이유를 알고는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차문에서 대대적으로 문화류씨 시조를 부인하였기 때문이다. 자기 할아버지를 부인 당하는 일을 그냥 넘어갈 자가 있다면 과연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성씨유래비, 대동보, 홈페이지, 단행본, 종보 등을 통해 전방위적으로 자행되었던 그 만인공노할 행위에 대해 지금은 사과하였다 하나, 여전히 동일한 모독의 표현들이 존재하며 사과도 한 것인지 안 한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는 수년간의 피와 땀으로 행한 엄밀한 역사 고찰을 통해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은 류문을 chky100 같은 이는 ‘사이비종교’라는 말을 써서 비하하거나 마치 억지를 부리며 부정을 위한 부정을 하고 있는 듯이 호도하고 있다. 일단 “설원기”가 기둥을 이루고 있는 류차동원설을 받아들여도 류문은 차문의 아버지 집안이다. 몇십 년 전에 본관을 막론하고 모든 류씨와 차씨들을 대상으로 ‘차류대종회’가 결성되면서 몇몇 사람들이 사실을 잘못 파악해서 차씨가 형님집안으로 오인하였고, 그것이 단체 이름에까지 반영이 되었다. 위서이자 악서인 “설원기”의 가장 중요한 대목조차 알지 못하고 저지른 행위라 생각된다. 지금은 당연한 역사적 귀결로 그 ‘차류대종회’가 해체되어 있다. 과연 “설원기”와 류차동원설이 역사적 진실일 가능성이 단 몇 퍼센트라도 있다면 류문이 그것을 부인할 이유가 조금도 없을 것이다. 이런 당연한 논리적 맥락을 무시하고 누군가가 엄밀한 역사적 고찰을 통해 종래의 가문사를 부정했다고 해서 무조건 그 고찰의 주체들을 비난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더구나 그 주체 속에는 여러 역사학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3. “설원기”의 저자 “차원부설원기”는 기본적으로 서문, 기(記), 그리고 응제시의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설원기”에는 기(記)의 저자는 박팽년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필자는 저자가 박팽년일 수 없는 증거를 여럿 제시했다. 그런데 chky100은 자신의 글(#248)에서 박팽년이 記를 쓸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chky100이 과연 “설원기”를 제대로 읽어보고 필자의 논리를 최소한이라도 살펴보았는지 의심이 간다. 그는 ‘당시 형조참판으로 있던 박팽년은 ...’ 운운하며 설명을 이어간다. 과연 記의 말미에는 박팽년의 이름과 날짜도 명확히 주어져 있으며 직책도 ‘형조참판’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記의 저자가 박팽년일 수 없는 가장 직접적인 증거인 것이다. 왕에게 바친다는 그 글에 적힌 그 시점에 박팽년은 형조참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미 “설원기”에서 저자를 위조하면서 어떤 연유로 박팽년을 형조참판이라고 했는지에 대한 고찰도 상세하게 개진하였다. 그런 치명적인 증거를 간과하고 지엽적인 논의를 아무리 장황하게 제시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4. 평가절하 역사를 고찰한 주체들에 대한 비난은 대개 일정한 패턴을 이루고 있다. 바로 그들이 소수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chky100의 글(#249)을 보면 조선시대 18세기 초에 “몽예집”에서 남극관이 “설원기”를 더러운 위작으로 비판한 것을 평가절하 하고 있다. 현재 소설이나 영화에 대해 사람들이 호불호에 따라 평점을 줄 때 좋은 작품에도 낮은 점수를 주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남극관이 낮은 점수를 준 것일 뿐이며, 거의 모든 사람들이 높은 점수를 준 “설원기”에 그만이 낮은 점수를 준 것은 남극관의 정신에 문제가 있어서 그렇다고 말을 한다. 하지만 과연 “설원기”가 소설이나 영화 같은 것인가. 이것은 역사적 사실의 문제이다. 1+1을 9,999명의 사람들이 3이라 할 때 단 한 사람이 2라고 했고 그것이 정말 사실이라 밝혀졌다고 하자. 그런데도 그 사람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매도한다면 그것이 제대로 된 사회일까. 정의와 불의는 상대적일 수 있다. 그러나 여기는 그런 문제도 아니다. 남의 이름을 거짓으로 저자로 끌어들여 없는 사실, 없는 행적을 만들어낸 날조에 대한 문제이다. 그래서 ‘어린아이라도 진실을 말하면 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설원기는 소설이라 해도 추악한 소설이다. 차원부라는 인물의 행적을 날조하기 위해 4얼을 날조하여 그들을 한없이 흉악한 인물들로 조작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추가로 논한다.) 그리고 남극관은 “설원기”에대해 ‘추잡, 조악, 사실을 속이고 기망함’등의 표현을썼다. chky는 “설원기”의 ‘번역본’을 보면 비루하거나 ‘교만’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것은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여기서 ‘교만’이라는 말은 다소 주관성이 들어가는 용어인데, 박은정의 논문에서도 남극관도 이런 적절치 않은 용어를 쓰지 않았다. ‘교망’(矯妄, 사실을 속이고 기망함)이 맞는 말이다.) 남극관이 비판한 것은 “설원기”의 위작의도와 거짓된 이야기를 만들어서 가문을 위대하게 만들고자 한 행위의 추악함을 말하는 것이다. “설원기”는 수준 높은 한문으로 쓰여 있다. 그것이 조선의 학자들도 “설원기”의 실체를 간파하지 못하게 만든 주 원인 중 하나이다. 그러나 과연 그렇다고 “설원기”가 비루하고 추악하지 않다고 해야만 하는 것인가? 덧붙일 점은, 어떤 사안을 비평할 때는 그 사안에만 집중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폭넓게 살펴보아야 할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비난하는 일은 삼가야 하며, 가능한 한 구체적이고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여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남극관(1689~1714)은 26세로 요절한 아까운 인물인데, 그의 독서력과 명철함은 짧지만 귀중한 “몽예집(夢囈集)”을 탄생시켰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조규환의 해제에 “문집에는 卷頭의 「自敍」에 이어 권1(乾)에는 「送春用唐人韻」 등 詩 79수와 「狂伯贊」 등 雜著 11편이 권2(坤)에는 잡저로 「謝施子」가 수록되어 있는데, 분량상 매우 소략하지만 과학사, 어․문학사, 서지학 등의 연구에 참고할만한 주요한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다.” 라고 평하고 있다. 남극관이 설원기를 비루한 위작이라고 평한 “제차원부설원기(題車原頫雪寃記)” 뒤의 네 번째 글이 “단거일기(端居日記)”인데 임진년(1712) 7월 1일부터 30일까지 한 달 간의 독서일기이다. 약 23편의 작품들이 언급되어 있어 그의 방대한 독서량과 독서의 깊이를 짐작하게 한다. 이런 것을 보고도 과연 남극관이 오로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남 잘되는 것을 시기하여’ “설원기”를 비판한 것으로 생각되는지 궁금하다. 5. 연안이라는 지명 “설원기”는 조선 중기의 지식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냈음을 곳곳에서 노정(露呈)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위에 지적한 박팽년의 관직을 형조참판으로 꾸민 것인데, 연안이라는 지명의 언급도 좋은 예이다. 그러나 상세한 논의는 이미 다른 곳에서 했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반복하지는 않으려 한다. 다만, chky100이 “우리가 보통 글을 쓸 때 글을 쓸 시점으로 표현하는 것이 상식이다.” 라고 말한 점에 대해서만 지적하고자 한다. 이 말 자체로는 타당하다. 하지만 그것은 “설원기”의 본문을 보지 않았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한 말이다. 바로 “설원기”에서 연안은 고려태조 왕건이 내린 관향으로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양(漢陽)김씨는 현재의 서울을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라는 말은 가능하다. 하지만 주체와 시대가 명기되어, 예를 들어 “세종대왕이 김모에게 서울을 관향으로 삼게 했다.”고 묘사한다면 전혀 시대착오적인 묘사가 된다. 바로 그런 점을 지적한 것이다. (*한양김씨는 실제가 아니라 가상하여 언급한 것임.) 나아가서 원래 효생인지 효전인지 이름도 혼동되는 인물은 “설원기”에서 비로소 정착된 인물이다. 대승공 류차달의 아들이었다고 하니 류효생 또는 류효전이었다가 차씨 성으로 바뀐 것으로 묘사되는데, 역사에 전혀 아무런 자취도 없던 그가 조선 중기에 만들어진 “설원기”에서 갑자기 대승공의 맏아들도 등장하고, 게다가 대승공의 공적으로 고려시대 금석문에도 밝혀져 온 것을 그의 공적으로 둔갑시키고, 또한 대승공과 비교할 수 없이 큰 상을 받은 인물로 그려진 것 자체가 날조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묘사의 한 구절로 등장하는 연안의 지명 문제는 아주 지엽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설원기”는 차원부의 계통을 만들어내면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연안은 그 조작을 한 눈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시이기 때문에 지적한 것일 뿐이다. 6. “대동운부군옥” “설원기”는 문헌에 최초로 등장한 것이 1583년으로 확인된다. 이 사실은 설원기의 진짜 저자와 위작 동기와 배경 같은 사항들뿐만 아니라 “설원기”의 전개 양상에 대해서도 논하는 데 중요하다. “설원기”는 특히 조선 최초의 백과사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이하 “군옥”)에 자료 중 하나로 들어가서 “설원기”의 내용이 다루어진 항목이 수십 개에 이를 정도이다. “군옥”에는 여러 오류가 들어 있지만 필자는 바로 “설원기”가 들어갔다는 사실이 “군옥”의 최대 흠결이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chky100은 자신의 글(#250)에서 “군옥”에 대한 해제를 옮기면서 그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 물론 “군옥”은 참으로 가치 있는 저술이며 권문해의 필생의 역작이며 그 아들 권별에까지 그 영향이 이어졌다. 그런데 chky100은 그런 가치를 오로지 “문화류문에서는 전쟁의 혼란을 틈타 설원기를 지어내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으니 가소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 제시하고 있다. 혹시 그런 분이 있다면 전후 맥락을 알지 못하고 하는 발언일 따름이다. “군옥”은 “설원기”가 이미 임진왜란 전에 세상에 퍼졌으며, 현재의 “설원기” 판본들과 “군옥”에 인용된 구절을 비교해보면 “설원기”의 텍스트가 계속 변했음을 증명하고 있으며(이것은 또 “설원기”가 왕명(王命) 으로 지어진 것으로 조작하고 있는데 그것이 사실일 수 없음을 증명함), 문절(文節)이라는 차원부의 시호가 이때 이미 나라에서 내린 것으로 조작되어 퍼져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국보 “일성록”과 정조대왕이 증명하듯, 차원부의 시호는 나라에서 내린 적이 없다.) 비록 “설원기”가 “군옥”의 큰 흠결이지만 그로 인하여 중요한 사실들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긍정적인 역할도 하고 있다. chky100은 “군옥”과 “설원기”에 대해 상세히 살핀 필자의 글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단순한 생각만으로 비난 아닌 비난을 위해 “군옥”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군옥”의 한자 群玉을 한결같이 群獄이라고 쓰고 있는데, “군옥”을 실제로 하나라도 살펴보고 논한 것인지 알 수 없다. 필자는 “군옥”의 차원부와 설원기 관련 구절 전부를 검토했음을 밝힌다. 7. 4얼 문제 “설원기”에서 가장 핵심을 이루는 배경은 바로 얼자(孽子=서자)와 적자(嫡子)이다. “설원기”의 논조는 이렇다. “고려의 절신이며 조선 건국의 공신인 위대한 인물 차원부는 적자이다. 그런데 차원부가 족보를 만들면서 정도전, 함부림, 조영규, 하륜이 자기 집안의 얼자라는 것을 밝혀서 그들이 차원부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가, 왕자의 난을 기화로 차원부와 그 일당 70여명을 죽여 버렸다. 이 얼마나 억울한 원한이랴. 그러니 차원부를 설원해야 하고 그 자손들도 높이 들어 써야 한다.” 이 네 사람이 소위 ‘4얼’이며, 그래서 제목도 “차원부설원기”인 것이다. 그런데 실상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설원기”는 하륜 관련에 대해서만 구체적이며 거의 모든 사항이 아주 모호하다. 예를 들어 차원부 관련 사건 묘사에는 심지어 그 흔한 갑자, 을축, ... 하는 간지년도도 태조 몇 년 하는 왕대년도 표시도 없다. 왕자의 난과 4얼 중 가장 흉악한 인물로 그려져 있는 하륜의 행위에 대해 묘사할 때조차 그렇다. (그 후의 사건들에 대해서는 몇 개 있음.) 이 모호함은 4얼의 묘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선 “설원기”는 그들이 어떤 관계로 차문의 서얼인지 명기하지 않았다. 단, 정도전에 대해서는 정몽주의 첩손주사위(서얼사위)이고 정몽주는 차원부의 종제(從弟)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차원부를 죽였다는 대목에서는 거의 대부분 하륜이 저지른 일로 묘사하고 있다. “설원기”의 序와 記뿐만 아니라 응제시 가운데 20여 수의 주석에서도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4얼일까. 4얼을 등장시키는 “설원기”의 모호한 표현들을 정리해 보면 대략 이런 식이다. “정도전과 조영규가 화(禍)의 기틀을 조성하였고, 후에 함부림과 하륜이 난(亂)을 빗어내었다.” 참고로, 이들의 사망년도는 정도전은 왕자의 난 때인 1398년, 조영규는 1395년, 함부림은 1410년, 하륜은 1416년이다. 하륜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의 역할은 전혀 구체적이지 못하다. 대략 고려 말에 임견미와 염흥방이 제거되면서 차씨 가문도 제거되었고(‘적족(赤族)’이라는 표현이 쓰임), 조선 초에는 차원부와 일당(70여명이라 함)도 제거되었다고 하며, 아마도 앞의 적족 사건에는 정도전, 조영규가 관여했고 (“설원기”의 다른 곳에서는 조준, 조반이 일으킨 것으로 묘사되어 있음) 뒤의 차원부 살해에는 함부림과 하륜, 특히 하륜이 관여한 것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들 ‘4얼’이 차원부 집안을 몰락시킨 동기는, “설원기”에 따르면 오로지 차원부가 자신들이 서얼 출신임을 족보에 기록했다는 것이다. “설원기”에서 차씨 집안과 차원부의 몰락에 대한 혼란스럽고 모호한 사건 묘사는 뒤로 갈수록 4얼과 차원부, 특히 하륜과 차원부 사이의 일로 단순화된다. “피(彼)는 조영규, 정도전, 함부림, 하륜 등이고, 차(此)는 차원부 등이다.” 전자는 서얼들이고 후자는 적자(嫡子)이다. 관련 묘사에 따르면, 정도전 ․ 조영규는 ‘모함’했으며(陰陷), 함부림은 사사로이 시기했고(私忌), 하륜은 탄압하였다. 또한, ‘가문의 서얼들이 꾸민 무함(誣陷)에 빠짐’, ‘서얼들이 적자(嫡子)를 능멸하는 불의’, ‘이들은 사사로이 왕인(王人, 차원부를 지칭)을 죽임’ 등의 표현도 사용된다. 이와 더불어 성삼문이 지었다고 조작된 응제시에는 차원부 죽음이 4얼(四孽生)에 의한 것임을 묘사하고 있고, 역시 정인지가 지었다고 조작된 응제시에도 ‘그때의 간신(奸臣)들’[時奸]이 저지른 일로 묘사하면서, 그 주석에 이들이 4얼임을 명기하고 있다. (한문은 단수, 복수가 모호하게 나오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는 확실히 복수의 4얼로 명기되는 경우만을 인용하였다.) 정리하자면, “설원기”에서 차원부의 죽음은 대개 하륜의 행위로 묘사되지만, 대강 4얼의 행위로 묘사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륜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구체성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고려말에 이성계와 최영 등에 의해 대표적인 간신이라 하여 임견미와 염흥방이 제거될 때 1000여명에 이르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에 함께 처형되었다. 이때 차씨 가문이 포함되었는지는 역사에서 확인되지 않는데, 만일 그랬다 해도 간신의 일당으로 처형된 것일 터인데, 그 동기를 전적으로 개인의 원한으로만 돌리는 것은 역사를 올바로 보는 태도가 아니다. 이러한 “설원기”의 4얼에 대한 묘사는 다른 문헌에서 재생산되면서 더 확실해진다. 위에 논한 “대동운부군옥”에서는 ‘정도전, 하륜 등이 꾸민 함정에 빠져서 문중이 몰살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차식의 신도비”에서도 ‘4얼이 참소하여 차원부 등이 죽임을 당했다’고 되어 있으며, “연려실기술”에서는 ‘하륜이 모함하여 정도전, 함부림, 조영규와 더불어 추살(椎殺, 몽둥이로 때려죽임)했다’고 하며, 심지어 “문헌비고”에는 정도전만이 차원부를 죽인 자로 등장한다. 물론 하륜만이 언급되는 경우도 여럿이 있다. 이들은 ‘정도전, 조영규, 함부림, 하륜은 차씨 가문의 서얼로서 자신들의 출신을 밝힌 족보를 만든 차원부를 원망하여 죽였다.’는 차원부 죽음에 대한 일반적인 묘사를 가능하게 한다. 이를 비판해 보면 우선 족보 운운 자체가 우리나라의 족보사에 비추어보면 근거 없는 이야기이고, “설원기”에서도 정도전, 조영규, 함부림은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실정이며, 더구나 이들이 차씨 가문의 서얼이라는 객관적인 증거도 없으며, 더 심각하게는 근본적으로 그들이 서얼이라는 증거 자체가 없다. “설원기”에서도 서얼들이 차원부를 죽였다는 묘사가 있는데, 이때 하륜을 제외한 세 사람(정, 조, 함)이 차원부가 죽었다는 1398년이 아니라 고려말의 차문 적족(赤族)에서만 역할을 한 것으로 해석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설원기” 자체가 차원부의 죽음과 4얼을 연관시키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그들은 자신들이 얼자라고 밝혔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출신 집안(차문)을 모두 멸족시킨 이해할 수 없는 인물들이 되기 때문이다. 곧, 그들이 차원부의 죽음에 직접 혹은 간접으로라도 관여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럴 경우는 정도전은 왕자의 난 때 이미 죽었으니 그 후에 죽었다는 차원부의 죽음에 관여할 수 없고, 더욱이 정도전은 태조의 충신이었으며 “설원기”에서는 차원부도 태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은 것으로 묘사되어 있기에 정도전이 차원부를 죽음에 관여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 된다. 조영규는 1395년에 죽었으니 더더욱 차원부의 죽음에 관여할 수 없다. 게다가 조영규에 대해서는 “조준과 조영규는 전에 부름을 받은 가운데 지난날을 뉘우치며 먼저 차원부의 죽음을 말하였다.”(필사본)고 명기되어 있어 이미 1395년에 죽은 조영규가 1398년에 죽었다는 차원부의 죽음의 억울함을 임금에게 아뢰는,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 장면이 나온다. (혹시나 해서 후대의 本을 살펴보니 조영규(趙英珪)는 조영무(趙英茂, ?~1414년)로 바뀌어져 있었다. 이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것을 받아들인다면 “설원기”가 왕명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왕명을 참칭해서 만들어 자기 입맛에 맞게 마구 변형시킨 위작이란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대개 “설원기”의 정체가 이런 것이다. 그리고 珪자는 茂자와 혼동될 여지도 없다.) 그래서 필자는 “설원기”를 이미 죽은 사람들(정도전, 조영규)이 산 사람(차원부)을 죽이는 ‘유령들의 놀이터’라고 표현하고 있다. “설원기” 자체에도 대세를 이루고 있는 하륜이 차원부를 죽였다는 묘사만 보면 이것은 비논리적인 궤변일 것이다. 하지만 설원기의 다른 묘사들과 그에 입각한 여러 문헌의 것을 포괄하여 전체적으로 보면 결코 궤변으로 볼 수 없다. 더구나 조영규에 대한 묘사를 보면 더욱 그러하다. “설원기”의 수법 중 하나는 이미 언급했듯 차원부의 일을 어렵고 모호하게 표현하고 나서 태종 이후의 인물들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등장시켜서 마치 전자도 후자처럼 구체적인 일로 생각하게 만드는 착시현상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차원부라는 인물이 실제 무슨 일인가 큰일을 한 것처럼 설명했지만, 차원부 자체가 역사적 실체가 없는 인물이라는 더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그의 급제와 벼슬과 행적은 모두 “설원기”에서 비로소 나온 것이며, “설원기” 이전의 문헌에는 전무하다. 정몽주와 같은 위대한 고려의 충신이고, 조선 건국에 지대한 공을 세웠고 이성계(태조)와 이방원(태종)에게 친구요 아버지 같은 인물로 묘사되는 자가 어떻게 역사에 아무런 자취를 남기지 않다가 “설원기”에서만 폭발적으로 묘사될 수 있을까. “설원기”의 날조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며, 대개 “설원기”에서 처음 나온 묘사들은 모두 믿을 수 없는 역사조작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설원기” 외적으로는 ‘문절’이라는 차원부의 시호가 날조임은 국보 “일성록”에서 증명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상세하게 한 것은 chky100이 그의 글(#251)에서 필자가 “설원기”를 ‘유령들의 놀이터’라 묘사한 것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설원기”에서 4얼 문제가 “설원기”의 정체를 파악하는 핵심 중 하나임을 간파하고 이미 상세히논했으며 단행본 “대호하루”(태극출판사, 2012)에도 정리해 놓았다. 8. 4얼의 진짜 정체 예전 족보에서는 서자인 경우 명기되는 일이 많았다. 신분이 절대적인 시대에 적서는 하늘과 땅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태여 적서를 구별해 놓지 않은 문헌에서는 추가적인 묘사가 있기 전에는 적서의 구별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고 어떤 문헌에서 사실을 왜곡해서 어떤 사람이 서얼출신이라고 꾸며 주장해 놓으면 그것을 반박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대저 사람을 모함하고 부정적인 딱지를 붙이기는 쉬워도 그것에서 벗어나게 만들기는 어려운 법이다. “설원기”의 이른바 ‘4얼’의 경우는 “설원기” 자체가 위작이므로 ‘4얼’이 실제 얼자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이에 대해 살펴보았다. ‘4얼’ 가운데 조영규(?~1395)는 신창(新昌)조씨라 하고 그 본관의 시조라고도 하는데, 고려말~조선초에 활약한 무신이며, 가계가 불분명하다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하 “한문민사전”)은 그가 연안차씨 차견질(車堅質, 차원부의 동생으로 나옴)의 첩의 딸을 아내로 삼았다고만 되어 있고, 여기서도 조영규 자신이 얼자라는 말은 없다. 다만 그가 ‘일반 평민출신으로 추측된다.’ 고 한다. 그런데 이 “한민문사전”의 조영규 항목의 집필자는 한영우로서, 그는 정도전의 출신을 설명하면서 “설원기”의 이본인 “차문절공유사”, 그것도 그곳에 실린 후대의 부록, 또 그중에서도 해당 문중에서 제시한 계보를 마치 모두 사실인양 사료로 사용하여 전혀 사실이 아닌 설명을 전개하였다. 이는 크게 비판받아야 마땅한 일이라 여겨진다. 이런 실정인데 “설원기”는 그를 “차문의 얼자”로 묘사하고 있다. 표현만 보면 차문의 얼서(孼壻)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러나 18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차문절공유사”의 계보를 신뢰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 조영규는 이것 이외에 논할 자료가 없다. 함부림(咸傅霖, 1360~1410)은 고려말~조선초의 문신이며, 강릉(江陵)함씨이다. 그는 고려 때 문과에 급제, 벼슬길에 올랐고, 조선조에 들어 대제학과 형조판서까지 역임했다. 그런데 한영우의 자료(“차문절공유사”의 계보)에 따르면 함부림은 차원부의 동생 차견질의 첩의 손녀사위이다. 조영규는 차견질의 첩의 사위이고 함부림은 첩의 손녀사위(곧, 첩의 아들이 낳은 딸과 결혼)라는 것이다. 그러나 조영규에 대한 묘사보다 함부림에 대한 묘사에는 더욱 문제가 많다. 우선 함부림은 검교중추원학사(檢校中樞院學士) 함승경(咸承慶)의 아들이며, 문과에 급제한 인물이다. 서얼이 차별을 받았다면 왜 서녀(庶孫女)인 차씨 여자와 결혼을 했을까. 더구나 그의 부인은 정경부인(貞敬夫人) 한양조씨(漢陽趙氏)와 정경부인 연안이씨(延安李氏)로 나와 있다. 함부림은 그 졸기(卒記)가 실록에 태종 10년 12월 1일 기사로 주어져 있는데, 두 아들 함우공(咸禹功)과 함우치(咸禹治)가 명시되어 있다. 함우공은 태종 14년의 식년시에 급제했고, 문화류씨의 먼 외손이고 문화류씨 가정보에도 나온다. 그곳에 그의 벼슬은 승(丞)으로 나와 있고, 자녀로 사위만 하나 나오는데 부사(府使) 정신석(鄭臣碩)이다. 함우공의 장인은 박강생(朴剛生)인데, 그 딸이 세종의 후궁 귀인박씨(貴人朴氏)였다. 함우치 또한 졸기가 실록의 성종 10년 5월 29일자에 나오는데, 그는 문음(門蔭)으로 관직에 나갔고, 대사헌, 관찰사, 형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그는 아버지와 같은 동원군(東原君)에 봉해졌다. 과연 함부림이 차씨 서얼 여자와 결혼하여 차씨 집안의 얼서(孽壻)일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가? 하륜은 어떨까. 한영우의 가계도(“차문절공유사”의 계통)에는 하륜의 외할머니가 차씨의 서녀로 나온다. 하륜의 아버지는 하윤린(河允潾)이고 하윤린의 장인이 강승유(姜承裕)인데 강승유의 아내가 차씨 집안의 서녀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묘사는 하윤린의 신도비를 보면 날조임을 알 수 있다. 그 신도비는 변계량(卞季良, 1369~1430)이 지었으며 조선 태종 16년(1416)에 세워져서 지금도 내려오고 있다. 변계량은 “계유년(1333)에 고을의 장자(長者)인 증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 강승유(姜承裕) 공이 공(하윤린)에게 말하기를, ‘선대에서 나라에 공이 있는 자는 그 후손이 반드시 창성하게 된다.’ 하고, 자기의 딸을 공의 아내로 삼게 했다. 찬성공은 성품이 엄격했는데, 공이 아버지처럼 섬겼다. .... 정해년(1347) 봄에 부인 강씨(姜氏)가 길몽을 꾸고 난 뒤에 임신하여 겨울 12월에 아들을 낳았으니, 지금의 정승공(政丞公, 하륜)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실록에는 태종 16년 4월 17일에 이 신도비 관련 기사가 나오는데, 하륜이 변계량에게 위촉하여 신도비명을 짓게 하고, 박희중에게 글씨를 쓰게 했는데, 태종임금에게 그 사실을 아뢴다. 태종은 “내가 경의 세계(世系)를 자세하게 알고 있다.” 고 화답하고, 변계량과 박희중에게 좋은 관직을 내려달라는 하륜의 청을 흔쾌히 들어주고 있다. 하륜이 서얼의 출신이라면 도저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또한 하륜의 어머니, 곧 하윤린의 부인 진주강씨는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에 봉해졌는데 (하륜의 부인 성산이씨도 같은 칭호를 받았음) 대개 하륜이 높은 벼슬을 했기 때문이지만, 천한 출신이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특히 하륜이 보좌하여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태종은 서얼금고법을 시행하여 첩의 자손은 벼슬에 제한을 두고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금하였는데 이 법이 제정된 것이 하륜의 생전이었다. 태종은 세자였던 방석을 제친 명분을 찾고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여 왕가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적서의 차별을 적극 도입했다. 그리고 이이화에 따르면 하륜은 이자춘(李子春,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의 첩의 자손은 현직에 등용하지 말라고 주장하였다 한다. (“한국의 파벌”, 어문각, 1983) 태조와 그 아들인 태종을 정통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상으로 미루어 보면 “설원기”에서 최고의 악역으로 꾸며져 등장하는 하륜은 비천한 출신이 아닐 가능성은 충분하다. 마지막으로 정도전은 조선의 기틀을 세운 인물이다. 정도전은 상당히 여러 곳에서 비천한 출신으로 묘사되고 있고 그런 논의가 이미 조선왕조실록과 “고려사”에 실려 있다. 더욱이 최근 수십 년 동안 마치 그것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인 양 널리 퍼졌다. 그렇게 된 데에는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정도전 연구를 한 역사학자 한영우의 역할이 컸다. 그는 실록과 “고려사”, 행장 등의 몇 가지 자료를 근거로 결론을 내렸다. 그 자료에는 단양지방의 전설과 “차문절공유사”(이하 “유사”)도 포함된다. 특히 그의 역작 “정도전 사상의 연구”(1983)에서 류차달에서 차송우로 이어지고 차원부와 주변 일가로 이어지는 계보를 그리고 정도전을 포함한 ‘4얼’을 모두 그 계보에 연결시켜 놓았다. 그러나 이것은 불행하게도 “유사”의 내용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인 잘못된 결과이다. 어떤 집안의 계보이건 역사적 사료로 쓰기 위해서는 그 신빙성에 대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것은 계보뿐만 아니라 여하한 문헌이나 사료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족보의 발달사를 보면 족보의 기록이 전반적으로 꾸며지고 부풀려져 온 것을 볼 수 있어 그 기록의 객관성이 반드시 담보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설원기”에서 가장 확실히 조작이라고 파악되는 것이 바로 그 안에 들어 있는 계보의 혼인관계 조작이며, 10여대의 혼인관계가 거의 모두 조작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따라서 한영우의 계보는 근본부터 무너진다. 더구나 “유사”의 내용이 실록이나 “고려사” 등에 논의된 내용과 합치되기 어려운데 한영우의 계보는 억지로 그들을 연결시켰다. 역시 위서인 “유사”의 내용을 실록이나 “고려사”만큼 신뢰한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차문절공유사”는 “차원부설원기”의 이본 중 하나이고, 문절이라는 근거 없는 시호를 제목으로 버젓이 쓰고 있어 그것만으로도 제대로 된 역사사료로 볼 여지는 없다. 왕명으로 만들어져 왕에게 바쳐졌다고 스스로 주장하고 있는 문헌에 이본이 여러 종류로 난무하는 것 또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단양지방의 전설이라는 것도 언제 생겼는지도 모르고 신빙성은 더구나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록과 “고려사”와 정도전의 글 등을 상호대조하여 판단해야 한다. 여기서 따로 논의하지 않아도 이미 그런 논의가 다른 사람에 의해 상세히 이루어져 있음을 지적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듯하다. 그 중 하나가 “정도전 출생의 진실과 허구”(정병철, 퍼플, 2013)인데 기존의 여러 연구들을 종합한 것이며, 그 전에 “삼봉 정도전의 건국철학” (김용옥, 통나무, 도올문집 4, 2004)에도 간략하지만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어져 있다. 김용옥은 실록의 관련 기사를 자세하게 분석한 후에 정도전이 쓴 아버지 정운경의 행장의 구절을 대비시킨 다음,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정도전을 이름도 모르는 승려가 사노(私奴)의 부인과 간통하여 난딸의 외손자로 휘모는 것은 아무래도 석연치 않다. 리얼리티에 근접된 역사 기술로 간주되기 어렵다.” (위 책, p.18) 이런 분석과 논의에서 “유사”의 계보가 끼어들 틈은 없다. 추가적으로, “설원기” 이외에는 함부림, 조영규, 하륜이 서얼출신이라는 증거는 없다는 중요한 사실도 지적되어야 한다. 정도전의 경우는 태종에게 제거되고 난 후 그의 가치가 부인되는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그가 서얼출신인 것으로 그려진 묘사도 존재했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또한 대개 서얼 관련 논란의 경우에도 본인 자신이 서얼 출신이 아니고 부인이 그럴 경우 이(利)를 탐하였다는 비난을 듣기도 했지만 (곧, 재물 때문에 부잣집 혹은 사대부의 서녀들과 혼인했다는 뜻), 부인의 출신 때문에 남자가 사회적으로 영향을 받지는 않아야 한다는 의견이 컸음도 주목할 가치가 있다. 9. 하륜 이상의 내용에 비추어 보면 “설원기”의 ‘4얼’은 근본적으로 ‘얼자’로 등장시킨 것부터가 조작이다. 따라서 얼자와 적자(嫡子)의 대비를 통해 후자를 높이려 했던 “설원기”는 정상을 비천한 비정상으로 바꾸는 비열한 수단을 통해 목적달성을 꾀한 것이어서 추악하기 이를 데 없다. 오직 내가 잘 되기 위해 주위 사람들을 속이는 것도 모자라서 비참한 나락으로 빠뜨리는 모함을 한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여기서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이면 정도전, 함부림, 조영규, 하륜이 선택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우선 정도전은 태종 이후로 조선의 왕조의 보존에 오히려 조선 건국에 찬동하지 않은 정몽주의 절의가 정도전의 신권(臣權)과 개혁 사상보다 유리하다고 느껴 오랫동안 역적으로 남아 있다가 겨우 고종 때 복권되었다. 따라서 조선 중기에 “설원기”의 위작자가 그를 끌어들여 흉악한 인물로 묘사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을 것이다. 반면에 함부림과 조영규는 짐작하기 어렵다. 후손이 영달하지 못해 미약했거나 후손이 끊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두 사람에 대해서는 추가 고찰이 요구된다. 하륜의 경우는 일견 미스터리이다. 하륜 자신이 큰 세력을 떨쳤으며 그의 진양(진주)하씨 집안도 작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원기”의 위작자는 하륜을 최대의 악역으로 등장시키면서 아주 흉악한 인물로 묘사했는데, 그의 후손이나 집안이 그것을 보고 사실이 아님을 지적하며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하씨 집안에서는 그런 일이 있었다. 대표적인 분이 조선 후기 유학자인 하진현(1776~1846)인데, 그는 “차록변무(車錄辨誣)”와 몇 편의 관련 글을 지었다. “차록변무”에서는 ‘하륜이 차씨 집안의 서얼이고 그 사실을 밝힌 차원부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 차원부와 그 일족을 몰살시켰다.’고 한 “설원기”의 묘사가 사실이 아님을 조목조목 변증하는 등 “설원기”의 문제점들을 논리적으로 파헤치고 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러한 문제제기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설원기”의 序가 하위지의 작품이 아니라는 영조 때의 저명한 문신 홍계희(1703~1771)의 강력한 지적도 있었는데, 이 또한 널리 퍼지지 못했다. 그가 죽은 후인 1777년(정조 1년)에 홍계희 집안은 정조시해미수 사건으로 인해 대대적으로 처형되었고 홍계희도 역적으로 올랐으며, 또한 홍계희 자신도 권력을 좇았다 하여 사림(士林)의 배척을 받았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이런 사실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정사(正史)에서 하륜 관련한 서자 논란은 하륜 자신이 아니라 손자 대에서 나왔다. 실록 태종 16년(1416) 11월 6일의 하륜 졸기(卒記)에는 그의 자식으로 하구(河久)와 세 명의 서자 하장(河長), 하연(河延), 하영(河永)이 있다고 나와 있다. 하구는 아버지 하륜이 사망한 후 1년쯤 있다가 병으로 죽었는데, 하구의 외아들이 하복생(河福生)이었다. 그런데 하복생은 하구가 본처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해 감찰 김음(金音)의 딸과 다시 혼인하여 낳은 자식이었다. 게다가 김음은 지방 수령으로 있을 때 장물죄의 비리를 범한 ‘장리(贓吏)’였다. 세종은 재위 14년(1432)에 그가 공신(하륜)의 손자이지만, 첩자(妾子)라 하여 과거에 볼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하복생은 벼슬을 제수 받고 선공 부정(繕工副正)(세종 20년), 군자 판사(軍資判事)(세종 30년) 등을 역임하였다. 그때마다 그가 첩의 소생이라 하여 사헌부에서 반대하였으나 세종은 듣지 않았다. 아버지 태종을 도와 보위에 오르게 한 공신을 결코 소홀히 대할 수 없어서였다. 그리고 이런 식의 논란은 하복생의 손녀의 사위인 권경희(權景禧)에게서도 일어났다. 그가 성종 10년(1479)에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이었는데, 대간(臺諫)에서 하복생이 첩자(妾子)라 하여 권경희를 그 자리에 둘 수 없다고 주장하였고, 성종은 그에 따랐다. 그러나 그 다음해 성종은 권경희를 공조좌랑에 임명했고, 사헌부에서 같은 논리로 임명에 반대했다. 성종은 신하들에게 이 건에 대해 논의하라고 명하여 구체적인 의견들이 개진되었다. 그 결과 성종은 ‘벼슬 제한은 서얼 자손 자신들에 적용하는 것이지 그들의 사위들에게 적용하는 것이 아니므로 벼슬 임명에 문제가 없다. 하지만 하구가 전처와 후처를 두어 흠결 이 있으니 대간·정조·홍문관·춘추관 외에는 임용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에 따랐다. 하복생에 관한 논란은 성종 13년(1482)에 마무리된다. 하복생의 외손 김인령(金引齡)이 ‘아내를 두고 또 아내를 취(娶)한 것이 즉시 발각되지 않았다가 본인이 죽은뒤에 자손(子孫)이 적자(嫡子)를 다투는 자는 먼저 난 자를 적자로삼는다.’는 조선의 법률을 들어 하복생을 적자(嫡子)로 간주해 달라고 요청한 것을 성종이 받아들인 것이다. 하륜의 문집인 “호정집”(호정은 하륜의 호) 부록에는 간략한 하륜의 세계(世系)가 붙어 있는데, 하륜의 손자로 하복생 한 명과 증손자로 하후(河厚) 한 명만이 올라 있고, 그 이하는 비어 있다. 그리고 하륜의 항목에 “증손 현감 하후(河厚) 이후에 자손이 전하지 않는다. 영종(英宗, 영조) 갑오년(1774)에 방계 13대손 하한통(河漢通)을 특별히 [문충공(하륜)의] 제사를 받들도록 허락했고, 정종(正宗, 정조) 기미년(1799)에 [임금이] 직접 사제문을 지어 제사를 내렸다.”고 밝혀져 있다. 실질적으로 하륜의 대가 끊겼다는 말로 해석된다. 결국 “설원기”가 하륜을 대담하게 왜곡하여 등장시킨 이유는 그 위작자가 하륜의 후손에 게서 불거졌던 서자 논란과 직계 후손이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10. 서얼금고법 고(故)이수건 교수는 자신의 논문에서 “설원기”에서 4얼을 등장시킨 것은 오히려 16세기 중엽의 조작임을 보여준다고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chky100은 그의 글(#252)에서 이것이 엉터리라고 주장한다. 서얼금고법이 1415년에 시행되었고, 려말선초에도 서얼차별이 심하였다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이수건 교수의 논문을 언급하면서도 그것을 읽어보지도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으며, 만일 읽었다면 제대로 읽지 않은 것이다. 논문에서는 일방적인 주장을 지양하고 근거와 논리를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결론을 도출해 낸다. 이수건 교수 논문의 관련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른바 車門의 外裔四孼 문제는, 여말선초의 권문세족 가운데는 내외조상의 세계에 서얼로 간주되는 인물이 많았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16세기중엽 이후의 시대적 관념으로 여말선초를 보았기 때문에 그러한 내용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태종 13년(1413) 妻妾分拺과 서얼차대법이 제정되기 전까지의 고려후기 내지 선초에는 서얼의 혐의를 받는 자가 많았다. 황희의 모계(10)를 비롯한 명공․ 거족에도 賤系가 섞여 있었다(11).” (10) 황희의 출신성분은 『세종실록』 권40, 10년 6월 병오 및 『 단종실록』 권2, 즉위년 7월 을미조 참조. (11) 李義旼, 辛旽, 鄭道傳 등의 모계가 천계란 이유를 들어 곧 일반 천계 출신과 동일 선상에서 논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물론 賤者隨母法에 의하면 의당 그 소생들은 賤隸가 되기 마련이나 父쪽의 신분적 배경과 권력으로 얼마든지 면천되었을 뿐만 아니라 부계의 위세와 본인의 능력으로 출세하는 자가 많았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무신정권이래 조선초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며, 권귀가문에서 많은 처첩을 거느린 결과 婢妾所生으로 고관요직에 오른 자가 많았다. 출처: 이수건, 이수환, “조선시대 신분사 관련 자료조작”, 대구사학 86집 (2007. 2.) 여기서 정도전의 경우는 모계가 천계(賤系)라는 주장을 일단 그대로 받아들이고도 문제가 없음을 언급하고 있다. 황희의 경우는 태조 때부터 세종 때까지 중신으로 활약했으며 특히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한 인물이다. 그는 판강릉부사(判江陵府事) 황군서(黃君瑞)의 얼자(孽子)였다고 하며, 위의 주석 10번에 언급된 세종 10년(1428) 6월 25일 기사에 사관(이호문, 李好問)이 그의 비리를 상세하고 신랄하게 논하고 있다. 그 비리에는 뇌물, 매관매직, 간통, 음험함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단종 즉위년(1452) 7월 4일 기사에는 세종실록을 편찬함에 있어 앞의 기사의 진위와 처리에 대해 신하들 사이에 논의한 것이 나온다. 정인지, 황보인, 김종서 등 여러 대신들이 황희가 얼자임은 사실이라 인정하면서도 나머지 일은 아무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일이라고 지적하면서 오히려 황희를 칭송하고 이호문의 성품이 망령되고 조급하여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삭제해야 한다거나 삭제해도 무방하다는 의견과 함께 한번 삭제하기 시작하면 악용될 소지가 있고 ‘하나라도 불가함이 있으면 삭제하지 않아야 한다’는 엄중한 의견도 개진되고 있다. 이 기사에는 결론은 명기되어 있지 않지만 앞서 살펴본 바대로 현재의 실록에는 황희에 대한 사관의 논의를 그대로 싣고 있다. “설원기”에 중요한 모티브로 이용되는 얼자와 적자의 대비는 극명하다. 그리고 그것이 일어난 시기는 모두 왕자의 난(1398년)과 그 이전의 려말선초이다. 여기서 ‘려말선초’는 일반적으로 그 범위를 모호하게 지칭하는 말이지만 최소한 여기서 ‘선초’는 서얼금고법이 등장한 태종 15년(1415년)이나 16년(1416년) 혹은 경국대전(경국대전)이 완성된 성종 이후를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얼자에 대한 저항은 고려 때에도 조선 때에도 있었다. 예를 들어 최충헌(1149~1219)은 차약송(?~1219)의 두 아들 모두 기생첩이 난 자식이라 싫어하여 벼슬을 7품 이하로 제한하고 맏아들은 학적을 삭제하게 했다고 “고려사”는 말하고 있다. 하지만 세종 때에도 얼자인 황희가 최상의 지위에 있었던 것을 포함한 여러 예를 보면 려말선초에는 적서의 구분은 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명확하지 않은 측면도 보이고 있다. 백보 양보하더라도 최소한 누가(A) 누구(B)를 얼자라고 족보 같은 곳에 적어 놓았다 하여 B가 A를 죽이고 나아가서 A의 집안을 멸족시킬 정도의 분위기는 아니었다. 게다가 B와 A가 같은 집안이었다면 대체 B는 자신의 집안마저 멸족시켰다는 말인가. 11. 설원기는 위서(僞書)를 넘어선 악서(惡書) 설원기는 단순한 위서(僞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날조된 사실을 널리 유포하고 잘못된 관념을 전파하여 역사와 사회에 나쁜 영향을 끼진 악서(惡書)이다. 이수건 교수의 논문에는 다음과 같은 관련 구절이 등장한다. “이 『차원부설원기』는 편찬 내지 간행․반포된 뒤에 조선후기 각 문중들이 그 기재 내용을 당시의 역사사실로 확신하고 조상유래와 족보편찬에 중요한 사실로 전재, 인용한데서 한국의 성관 의식과 족보 편찬에 있어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조선후기 조상들의 전기․狀碣文 작성과 족보편찬에 있어 온갖 조작과 협잡이 동원된 것도 그 연원을 추적해 보면 『차원부설원기』와 관련있는 것들이 많다.” 그런데 chky100은 이것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고 지적하며 “설원기”에 대해 부정을 위한 부정을 하고 있다고 강변한다. 역시 논문을 읽었다고 하면서 말을 이어가고 있지만 직접 논문을 읽어보지 않았거나 엄밀하게 살펴보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위 인용의 마지막은 실제 “그 연원을 추적해 보면 『차원부설원기』와 관련있는 것들이 많다(8).”라고 하여 주석이 달려 있다. 그 주석은 다음과 같다. “(8) 여기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이수건, 「조선시대 身分史 관련 자료의 비판」『고문서연구』14 (고문서학회, 1998), pp. 15-25 참조.” 논문에서는 지면의 제약과 설득력 있는 논리 전개를 위해 이전에 이미 상세히 논의된 사항이 있으면 그것을 다시 직접 거론하지 않고 이전 연구결과를 참조시키는 일이 흔히 일어난다. 여기 인용된 논문에서는 “설원기”가 嶺南士林(영남사림)에 의해 널리 소개되고 읽혀졌다고 기술하며, 그것이 어떤 문헌에서 다루어졌는지를 과거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상세히 살피고 있다. 실제 이 1998년의 논문은 2007년의 논문에 상당부분 전재(轉載)되고 있어 그 모체라 할 만하다. 2007년의 논문은 이수건 교수의 사후에 제자에 의해 정리된 것임을 고려하면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설원기”는 차원부라는 실재여부도 명확하지 않은 인물의 역사적 행적을 극도로 날조해서 그를 정몽주와 같은 반열의 고려절신(節臣)에 조선건국의 최대공신(功臣)으로 조작하였고, 그 안에 수십 명의 인물들을 등장시켰다. 이런 것들이 퍼져나가면서 각종 문헌에 사실인양 들어갔으며 해당 인물들 관련 각종 문집에 그 인물의 일화 내지는 저작으로 소개가 되었고, 그것이 다시 “설원기”의 유사집록 혹은 부록으로 묶이는 확대재생산을 거듭해 왔다. “설원기”에서 비롯된 꾸며진 가문사(史)에는 19세기 전반에 위조된 강남보(江南譜)까지 더해져서 전설의 인물인 황제(黃帝)에까지 이어지는 계보가 조작되어 나왔고, 이것에 입각한 묘사는 각종 족보 및 문중 관련 문헌은 물론 “증보문헌비고”와 같은 공간물(公刊物)에도 들어갔다. 현재는 근자에 수년간의 역사 정립 노력에 의해 진실이 퍼져가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인터넷과 각종 문헌에 만연되어 있고, 심지어 백과사전류에도 사실인 양 들어 있다. 과연 이 모든 것의 시초는 “차원부설원기”가 아니고 무엇이랴. “설원기”는 해당 가문의 역사를 세운 문헌이다. 그곳에서 비로소 시조의 자출(自出)과 행적이 묘사되었으며 차원부까지 이어지는 여러 대의 조상들의 위대함이 세워졌으며 차원부는 최고의 인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chky100은 필자와 문화류문이 아무런 근거 없이 악의로만 “설원기”를 부정하고 있다고 강변하며, 위의 인용이 증거가 없이 제시되었다고 하여 좋은 예로 간주하고 있다. 하지만 근거는 엄밀하게 제시되어 있고, chky100은 제시되어있는 그것을 파악하지 못했거나 보았어도 애써 무시하고 있는 것일 따름이다. “설원기” 자체를 제외하고 “설원기”에 진실이 있다고 증명하는 것이 있다면 제시해 보기 바란다. 필자는 이 제시를 10여년을 기다려왔다. “설원기”에 묘사된 사건들이나 그곳에서 비롯된 가문의 계보(원파록)가 사실이라면 필자나 류문이나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하나라도 있을 수 있겠는가. 류문에서 원파록을 폐기한 것은 오히려 가문의 역사를 수천 년에서 1000여년으로 축소하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욱이 수백 년 동안 조상들도 믿어온 일을 후손으로서 지금 폐한다는 어려움도 있었다. 결국 다년간 살피고 또 살펴도 원파록은 역사적 사실이 아님을 깨닫고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길이었다. 이것이 과연 가문을 드러내기 위한 수작이란 말인가. 오히려 정도전을 중심으로 “설원기”를 고찰한 김난옥 박사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설원기는 사실과 상당한 거리가 있는 위작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 결국 배타적 가문의식의 확대를 넘어서 심각한 왜곡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것을 쉽게 표현하자면 가문 부풀리기가 너무 심해져서 가문사의 위조에까지 이르렀다는 말이다. 자기 집안을 중시하고 때로는 미화하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면 아무런 가치가 없고 오히려 사회악이 된다 할 것이다. chky100은 그의 글(#255)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문화류문에서는 차원부설원기의 흔적을 지우거나 위서로 몰지 않으면 그들의 뿌리가 차문에서 나온 사실을 지울 수 없으니 처절할 정도로 애를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안을 잘못 보아도 이렇게 잘못 보기도 어려울 것이다. 과연 해당 가문을 세우는 기초가 되고 있는 그 “설원기”를 읽어 보았는지도 궁금한 발언이다. “설원기”의 본문인 記는 들어가는 말을 한 다음 본격적인 이야기의 시작을 이렇게 하고 있다. “사간원 좌정언 차원부는 문성인 류차달의 첫째 아들 대광지백 효전의 후손이다.” (司諫院左正言車原頫文城人柳車達第一子大匡之伯孝全之後也). 여기를 보면 누가 누구의 아들인가? “설원기”의 조작된 계보 설명을 따르더라도 100년 이상을 류씨로 지냈다. 바로 아버지(대승공)도 류씨였다. 그런데 아들이 공을 세워 그 상으로 임금이 차씨를 쓰라고 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문화류씨는 계속 자손만대까지 이어졌다. 이때 과연 차씨가 류씨의 뿌리인가 아니면 류씨가 차씨의 뿌리인가. 좁은 소견에 그 이야기에서 류씨가 되기 전에 조상들이 차씨였다고 주장하는 것 때문에 문류가 연차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한다면 어린아이 수준의 판단력이다. 원숭이에서 인간이 나온 것이 아니고 원숭이와 인간의 공통 조상에서 갈라져 나온 것일 따름이다. 차씨-문화류씨-연안차씨인 것이지 연안차씨-문화류씨-연안차씨가 아닌 것이다. 이런 묘사에 따르면 문류가 이전에 곧 그 뿌리가 ‘차씨’였다는 말은 맞는다. 그러나 문류가 이전에 곧 그 뿌리가 ‘연안차씨’였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오해가 없도록, 이곳의 류씨와 차씨의 관계 묘사들은 모두 역사적 사실이 아님을 다시 지적한다.) “설원기”는 정확히 그렇게 묘사하고 있다. 곧 류효전이 공을 세워 성과 관향을 받아 연안차씨가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물러난 차문의 집행부에서는 몇 인물이 류문의 뿌리에서 차문이 나왔음을 깨닫고 어떻게든 그 아버지 대승공 류차달을 차씨로 만들려고 몇 년 동안 혈안이었다. 18세기 이후에나 만들어졌을 대승공의 초명(初名)이라는 海까지 동원해서 대승공 류차달을 성이 車에 이름이 海인 ‘車海’로 둔갑시키려 애썼던 것이다. 그렇게 집안을 부풀리려는 또 하나의 노력이 오히려 “설원기”의 정체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는 역풍을 맞았고 그 결과 가문사의 뿌리는 송두리째 그 바람에 뽑히고 있는 것이다. 그 덕분에 필자도 “설원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렇게 역사 살리기에 일조하고 있으니 과연 천우신조가 아니겠는가. 12. 두문동 72현 문제 chky100은 그의 글(#251)에 덧붙인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두문동 72현 사건도 차원부 한 사람을 부정하기 위해 조작된 사건이라고 하니 나머지 71현의 후손들의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것은 필자의 주장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한 심한 왜곡의 말이다. 물론 두문동 72현은 그 명단 안에 행적이 조작된 차원부가 들어 있는 것만으로도 큰 흠결을 갖는다. 그리고 두문동 72현의 명단에는 현재 100명도 넘는 인물들이 들어가 있다. 그중에는 차원부처럼 행적이 문제되는 인물들도 몇 사람 들어 있지만 대부분은 개개인의 전반적인 행적 자체는 대개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두문동 72현은 그 자체로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데, 문제의 핵심은 바로 그 명칭 자체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문동 72현과 “설원기”는 둘 다 충절의 숭상이 중요한 배경이 되고 있다. 조선은 태조를 지나자마자 정도전의 정신보다 정몽주의 충절이 숭상되기 시작했다. 정도전은 조선 건국에 적극 헌신한 인물이고 정몽주는 조선 건국에 반대하다 살해당한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정몽주의 충절은 성리학적인 국가통치 철학의 상징이었고, 그것은 두문동 72현의 관념으로 확대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두문동 72현이란 무엇일까. 바로 “조선 건국 초기에 새 왕조 섬기기를 거부하여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은 고려의 72 유신(遺臣)”이다. 여기에 이들이 나오기를 바라서 불을 질렀는데 나오지 않고 타죽었다는 말이나 이들을 조선 조정에서 회유하였으나 듣지 않자 장살(杖殺)을 감행했다는 말이 전설처럼 붙는다. 하지만 실제로 두문동 자체와 관련되어 이름을 전하는 이는 몇 명에 불과하다. 이들을 높이 평가하는 작업이 영조~정조 년간에 크게 펼쳐졌다. 조선을 배척한 이들인데도 다만 충절의 요소만을 강조한 것이다. 예를 들어 그 72현 중에는 선죽교에서 죽은 정몽주와 선산에 낙향하여 세종이 즉위하던 해인 1419년에 죽은 길재도 포함된다. 이들이 두문동이 있는 당시 수도인 개성 지역에서 살면서 벼슬을 했다는 것 말고는 두문동과 관련이 없다. 특히 두문동 고사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고려의 절신들을 두문동의 고사와 관련이 있건 없건 골라서 묶어 놓은 것이 두문동 72현의 실체이다. 여러 집안에서 고려말에 살았던 조상들의 행적이 희미하면 ‘두문동에 들어갔다.’라고 하여 고려 절신으로 둔갑 내지는 미화시키거나 나중에 다른 곳에서 죽은 것이 확실하면 ‘두문동에 들어갔다가 후에 어디로 갔다.’는 식으로 포장하는 일이 발생했다. 조선에서 ‘고려’를 포함한 전왕조와 연관되는 명칭을 쓸 수 없고 두문동 고사의 상징을 활용해 그것을 명칭으로 적극 사용했을 것이다. 또한 두문동의 명칭은 백성들에게 ‘너희들도 지금 왕조(조선)에 충성하라.’는 단순한 메시지를 넘어서 ‘너희들도 조선이 망해도 불타 죽을 정도로 충성하라.’라는 극적인 메시지를 상징적으로 전달한 것이었다. 물론 ‘나’의 큰 외연(外延)인 나라와 민족이 없으면 나의 가치도 사라지기 때문에 충절은 절대적으로 귀한 가치이다. 필자가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은 충절 자체가 아니라 명칭의 함의와 그 내용이 다르다는 점이며, 특히 그 내용에 다수의 거짓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두문동 고사는 그것대로 존중하고 고려 절신은 또 그것대로 존중하는 것이 마땅하며 두문동 72현이라는 명칭이 꾸며진 행적들을 끌어안아서 포장해주는 포장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은 ‘고려 절신’과 같은 좋은 명칭을 쓰는 것을 막을 이유가 없다. 그 ‘두문동 72현’ 가운데는 행적이 조작되었다고 주장되는 인물이 몇 명 들어 있다. 차원부 하나만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두문동 72현’이라는 적절치 않은 명칭을 폐기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필자는 이미 차원부가 두문동 72현 중 하나로 둔갑한 사실을 고찰하여 (“대호하루” 4-4장.) “설원기”의 모호한 행적 묘사에 살이 덧붙여지고 또 덧붙여진 과정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이것만으로도 두문동 72현이란 것은 다시 살펴야 할 가치가 있다 하겠다. 13. 맺는 말 chky100이 필자에 대해 간혹 근거 없는 비난을 하기도 하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지만, 필자의 글과 주장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 비평하는 것은 적극 환영한다. 누구나 어떤 표현을 할 때 항상 앞뒤를 모두 설명하여 뉘앙스까지 모두 문제가 없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다보면 거두절미하고 제시한 표현이 문제가 있어 보이거나 때로는 감정적으로 반감을 살 수도 있다. 필자도 조심하긴 하지만 제한된 능력의 사람인지라 실수를 드러낼 때도 필경 있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해와 아량을 바라마지 않는다. 필자는 결코 차씨 개개인에 대해 무슨 말을 하지 않는다. 가능한 한 집안을 포함한 개인적인 차원을 떠나서 전적으로 역사적 진실인가 거짓인가의 문제로 접근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런 면에서 차문에 의한 류문의 시조 찬탈 시도 혹은 시조 모독은 후손으로서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기에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무엇이 역사적인 진실인가에 입각해서 오직 논리와 근거로만 임했음을 자부한다. 몇 가지 문제가 제기된 덕분에 오래간만에 “설원기”에 대해 여러 가지를 다시 정리를 할 기회를 가졌다. 차문의 한 사람에 의해 제기된 사항들에 대해 답변하는 형식이기 때문에 내용도 다소 치우치고, 전후 상황을 아는 분들에게는 대부분 레코드를 틀어놓듯이 이미 한 이야기를 또 반복하는 수준일 것이다. 하지만 4얼에 대한 고찰 같은 부분은 새로운 내용을 추가한 것이다. 또 그 과정에서 정도전 선생에 대해 더 깊게 이해를 할 수 있었고, 함부림 선생의 경우 해당 집안과 연락이 닿는 수확도 있었다. 아직도 조영규 선생의 집안은 찾을 수 없는데, 후손이 있다면 필자에게 연락해 주길 바란다. 그리고 만일 chky100이 이 글을 본다면 필자의 단행본 “대호하루”를 보내 줄 수 있는 주소를 알려주었으면 한다. 전에도 보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설사 읽고 싶지 않더라도 최소한 전후 맥락이나 필자의 주장을 알지도 못하고 필자를 비난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주제에 관해서 각각 다른 사이트에서 자신과 관련된 사람들을 향해서만 발언하는 듯한 현재의 분위기는 요즘의 인터넷 발달에 비추어 보면 상당히 아쉬운 일이다. 특히 명백히 상대방을 향해서 때로는 개인적인 비난까지 포함하는 글을 쓰면서 그 상대방이 그 글에 직접 반응하고 토론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 하겠다. 서로 대화할 수 있는 사이트에서 발언하는 것이 떳떳한 일일 것이다. 이를 위해 이 글 첫 부분에 언급한 “문화류씨 – 뿌리 깊은 버드나무” 카페(http://cafe.daum.net/moonwharyu)에서 토론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 이곳은 누구나 가입할 수 있고 비방과 선전 글이 아닌 어떤 글이고 게재할 수 있게 열려 있다. 이것이 꺼려진다면 어떤 다른 사이트를 제안해 주어도 좋고, 필요하면 새로 사이트를 개설할 수도 있다. 부디 솔직하고 활발한 논의가 전개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2014년 7월 15일 彩霞 류주환 정운경(廉義 , 鄭云敬) (1305년,충렬왕 31 ∼ 1366년,공민왕 15) 고려 후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봉화(奉化). 봉화현 호장 정공미(鄭公美)의 증손이다.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정균(鄭均)의 아들이며, 조선 개국공신인 정도전(鄭道傳)의 아버지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이모집에서 자랐다. 어려서 영주(榮州)와 복주(福州: 안동)의 향교에서 수학한 뒤 개경에 올라와 십이도(十二徒)와 교유하며 이곡(李穀) 등과 사귀었다. 1326년(충숙왕 13)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어 1330년 문과에 급제해 이듬해 상주목 사록으로 나갔다. 이후 전교교감(典校校勘)·주부(注簿)·도평의녹사(都評議錄事)·삼사도사(三司都事)·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전의주부(典儀注簿)·홍복도감(弘福都監)의 판관을 거쳐 1343년(충혜왕 복위 4)에 밀성군지사(密城郡知事)가 되었다.당시 재상 조영휘(趙永暉)가 밀성인에게 대여했던 포(布)의 징수를 종용했으나 이를 묵살하였다. 다음 해 복주목의 판관에 전임되어서도 정실에 기울지 않으며 송사(訟事)를 잘 처리하였다. 삼사판관을 거쳐 서운부정(書雲副正)이 되어 1346년 하정사(賀正使)의 서장관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그 뒤 성균사예·보문각지제교(寶文閣知製敎)를 지냈다. 1348년(충목왕 4) 양광도안렴사(楊廣道按廉使), 이듬해 교주도안렴사(交州道按廉使) 등을 거쳐 1352년(충정왕 3) 전법총랑(典法摠郎)에 이르렀다. 1353년 전교시판사(典校寺判事)로 전주목사로 나가 치적을 쌓았다. 1356년(공민왕 5) 병부시랑에 올라 무반의 전선(銓選: 인사행정)을 관장하였다. 1357년 비서감보문각직학사(秘書監寶文閣直學士)로 옮겨 강릉도(江陵道)와 삭방도(朔方道)의 존무사(存撫使)로 파견되어 백성을 안찰하였다. 1358년 지형부사(知刑部事), 1359년 형부상서에 특별히 제수되었다. 1363년 검교밀직제학(檢校密直提學)에 제수되었다. 1365년 병이 들어 사퇴하고 영주에 돌아와 이듬해 별세하였다. 사시(私諡)는 염의(廉義)이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삼봉집(三峰集)』『동문선(東文選)』 『정도전사상의 연구』(한영우, 한국문화연구소, 1973) 정진(鄭津, 1361년 ~ 1427년)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정치인으로 시호는 희절공(僖節公)이며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의 아들이다. 고려 말에 관직에 올라 사재감령, 전농감령 등을 거쳐 조선 건국 후 개국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1398년(태조 7년) 아버지 정도전이 요동 정벌 계획 중 태종 이방원에게 피살되자 수군 병력으로 충군되었으나 조준, 권근 등의 건의로 복직하여 자헌대부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사후 의정부우찬성에 증직되었으며, 아버지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을 최초로 간행하였다. 경기도 출신으로 본관은 봉화. 생애 생애 초기 정진은 1361년 정도전과 경숙택주 경주최씨의 네 아들 중 첫째 아들로 개경(현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관직에 올라 1382년 낭장(郞將)이 되고 이후 사재감령, 전농감령 등을 지냈다. 공양왕 즉위 후 1391년 정몽주(鄭夢周) 등 온건파가 역성혁명파를 탄핵할 때 탄핵을 받고 아버지 정도전과 함께 파직당하고 유배되었다. 조선 건국 1392년 7월 조선왕조가 건국 개국원종공신에 녹훈되고 공신의 적자로 외직을 자청하여 연안부사(延安府使)가 되었다. 연안부사 재직 시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1393년 판사재감사를 지내고, 1396년(태조 5년) 승정원도승지로 승진했다. 이후 외직인 경흥부윤(慶興府尹)·영원주목사 등으로 나갔다가 공조전서와 형조의 전서를 역임하였다. 원주목사로 재직 중 아버지 정도전의 삼봉집 초본을 간행하였다. 제1차 왕자의 난과 충군 1398년 중추원부사(中樞院副事)로 있을 때, 이방원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아버지 정도전이 남은, 심효생과 함께 이방원에게 살해당하고 동생 두 명도 살해당하였으나, 그는 태조를 수행하여 삼성재(三聖齋) 방문 길을 수행하여 안변군 석왕사에 체류 중이라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하였다. 정도전의 네 아들 중 유일하게 목숨을 건졌으나 정진은 병력으로 충군(充軍)되어 전라도수군으로 충군 징용되었다. 이후 조준과 권근 등이 그의 복직을 주청하였고, 이후 1407년 다시 복직하였다. 그 해 좌의정 성석린(成石璘)의 천거로 판나주목판사(判羅州牧事)로 부임했다. 생애 후반 1416년(태종 16년) 인령부윤(仁寧府尹)이 되고, 1417년 판안동대도호부사가 되었다. 그 뒤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세종 즉위후 1419년(세종 1년) 충청도도관찰사로 부임했다. 이후 자헌대부로 승진, 1419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에 제수되었고, 1420년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 연경에 다녀오기도 했다. 1421년 판한성부사로 부임하였고, 1422년까지 판한성부사를 역임하였다. 그 뒤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1423년 공조판서가 되었다가, 개성부의 유후(留後)로 부임했다. 1425년 형조판서가 되었다. 형조판서 재임 중 1427년(세종 9년)에 병사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67세였다. 사후 당시 세종대왕은 각별히 애도의 뜻을 표하여 3일간 조회를 정지하였고, 친히 제문을 지어 내렸다. 바로 증(贈) 의정부우찬성(議政府右讚成)에 추증되고 희절(僖節)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사후 경북 영주의 모현사(慕賢祠)에 배향되었으며, 평택의 희절사(僖節祠)에 제향되었다. 가족 관계 본가 봉화 정씨(奉化 鄭氏) 조부 : 형부상서 정운경(刑部尙書 鄭云敬, 1305 ~ 1366) 조모 : 산원(散員) 우연(禹淵)의 딸 증 정경부인 영주 우씨(贈 貞敬夫人 榮州 禹氏) 고모 : 봉화 정씨 고모부 : 공조판서 황유정(工曹判書 黃有定 , 1343 ~ ?) 숙부 : 정도존(鄭道尊) 숙부 : 정도복(鄭道復, 1351 ~ 1435, 호는 일봉(逸峯)) 한성판윤(漢城判尹) 사촌동생 : 정담(鄭澹) 사촌동생 : 정기(鄭淇) 아버지 : 정도전(鄭道傳, 1337년 ~ 1398년) 외조부 : 찬성(贊城) 최습(崔濕) 어머니 : 경숙택주 경주 최씨(慶淑宅主 慶州 崔氏) 동생 : 정영(鄭泳) 동생 : 정유(鄭遊) 부인 : 정부인 연일 성씨(正夫人 延日 成氏) 아들 : 정래(鄭來) 아들 : 정속(鄭束, 稷山縣監 역임, 사후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 손자 : 정문형(鄭文炯, (1427∼1501)] ) 의정부 우의정, 자는 명숙(明叔), 호는 야수(野叟), 시호는 양경(良敬), 세조대 청백리(淸白吏) 정진(鄭津) 이야기 [최종인 칼럼-삼봉 정도전의 아들] 최종인 서울문화사학회 전문위원 2016.12.06 2016년 8월 25일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정도전과 동아시아 신질서 구축』이라는 주제로 삼봉국제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조선왕조의 설계자로 칭송되는 삼봉 정도전의 국가경영에 관해 한·미·일·중 4개국 학자들이 참여한 학술대회로 부문별로 나누어 발표된 내용이 관심자들의 뜨거운 주목을 받았다. 새로운 국가의 신질서를 구축할 설계는 했으되 군권(君權)과 신권(臣權)간의 충돌이 야기한 권력투쟁에서 이방원에 의해 무참히 제거되어 그 포부를 펼치지는 못했으나 역사무대에서 사라졌던 삼봉의 경세(經世) 구상이 600년이 지난 오늘날 다시 세인의 관심을 받으며 연구의 대상이 된 것이다. 정도전의 족적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것인지는 당시 그의 직함에 그대로 드러난다. 태조 이성계의 절대적 신임 하에 국가경영의 최고 책임자로서 개국공신이며 1품의 숭록대부의 위상을 갖고, 최고 정책기구의 수장인 판도평의사사, 인사행정을 총괄하는 판상서사사, 수문전의 태학사, 왕을 교육시키고 역사를 편찬하는 지경연예문춘추관사, 최고 군사책임자인 판의흥삼군부사, 세자교육을 담당하는 세자이사 등 막강한 권력을 손 안에 쥐고 건국 초기의 각종 제도와 국정의 미래 향방을 견인하는 막중한 지위에 있었다. 이러한 정권 창출의 실력자가 정변으로 사라졌음에도 목숨을 부지해 살아남은 아들이 바로 정진(鄭津)이다. 곤욕의 시절을 넘어 고려 말 역성혁명이 있기 전 권신들에 의해 정도전이 아들과 함께 탄핵을 받고 삭직이 된 적이 있다.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아버지 삼봉과 아우들이 죽임을 당하는 불행을 겪었으나, 정진은 마침 태조대왕이 안변의 석왕사에서 선조를 제향하는 삼성재를 봉행할 때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태조에서 정종으로 왕위가 바뀌고, 비로소 이방원이 등극하여 완전히 정국을 장악했다지만 아직도 불안했던 모양이다. 이미 주동자가 제거된 1차 왕자의 난 때를 떠올리는 무리들이 간관 권숙을 사주하여 난적(정도전·남은)의 뿌리를 뽑아야한다는 음해를 하므로 정진은 전라도 수군에 충군되고 만다. 따라서 모든 직첩이 회수되고 사실상 유배나 다름없는 8년여의 모진 세월을 겪게 되었다. 1411년에는 목은 이색의 신도비문을 중국에서 받아온 것이 국체와 관련된다 하여 이를 조사하는 과정에 하륜의 간계에 의해 불똥이 부친(삼봉)에게 향하여 관작이 회수되고 자손이 폐서인되자 죄 없이 또 다시 관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염정(廉正)한 관료활동 고려 말 우왕 6년(1380)에 양촌 권근이 주관한 성균시에 합격하여 낭장으로 시작하여 사재령이 되었다가 영주지주사를 거쳐 전농시정으로 있을 때 모함을 받아 삭직되었다. 조선이 개국되자 막강한 실세 권력자의 아들임에도 스스로 지방관인 연안부사에 부임하였을 때, 사람들이 ‘훈가(勳家)의 자제이니 교만하고 자부심이 많아서 서무(庶務)는 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오히려 겸손하여 자신을 억제하고 정사에 부지런하니 고을사람들이 탄복하여 칭송하였다고 한다. 태조1년(1393)에 판사재감사가 되고 공조전서가 되었다가 형조전서로 옮겨졌다. 이때 아내가 그 남편을 죽이고 첩에게 덮어 쉬우는 살인유기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아내로부터 자복을 받아내어 공정한 옥사를 처결한 일이 왕조실록에 소개되어 있다. 이어 원종공신으로 도승지를 지내고, 경흥부윤으로 승진하였다가 원주목사가 되었고 이듬해 중추원부사로 임명되었는데, 그때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서 관직이 삭탈되고 전라도 수군에 충군되어 장기간 관직을 떠나 고난의 시절을 보내게 된다. 태종7년(1407) 좌정승 성석린의 천거로 판나주목사에 기용된 이후, 판공주목사가 되었는데 목은 이색의 신도비 문제로 또 다시 관계를 떠났다가 1416년 인녕부윤으로 돌아와 성심으로 정종을 모시고 다음 해 판안동대도호부사로 나갔다. 세종1년(1419)에는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그해 겨울 판한성부사에 제수되었다. 다음해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한양 천도이후 처음으로 청계천 준설작업을 시행하였고 수문을 넓히고 돌다리를 건설하는 등 치수에 업적을 남겼다. 이어 평안도관찰사를 지내다 다시 판한성부사를 역임하고 공조판서가 되었다가 개성유후사 유후, 군자감제조를 거쳐 형조판서가 되었다. 형조를 맡으면서 세종대왕의 장인 심온이 태종 때 죽은 후 소헌왕후의 친정어머니인 안씨가 천안(賤案)에 올라있음을 풀어주도록 진언하였고, 이에 임금이 노루 한 마리를 하사하는 아름다운 일화가 남아 있다. 희절공 정진의 졸기 형조판서 정진의 부고를 듣고, 세종은 각별한 애도의 뜻으로 3일간 조회를 멈추며 부의와 함께 손수 치제문을 지었고, 의정부 우찬성을 추증하며 봉상시에서 올리는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않고 친히 희절(僖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조심하여 두려워함을 희(僖)라 하고, 청렴을 좋아하여 스스로 억제함을 절(節)이라 한다” 는 시호의 의미로 보아 그의 평생에 일관된 정신이 돋보이며 임금이 내린 제문(祭文)의 그 절절함을 옮겨본다. “몸을 바쳐 신하가 됨에 ~ ~, 생각하건대 경은 천성이 곧고 순수하며 품행이 온화하고 근신한지라 맑고 깨끗함으로 몸을 지키고, 청렴하고 조용하여 외화가 없었도다. ~ ~ 내직과 외임을 두루 맡으면서 밤낮으로 정성을 다하고, 형조에서 옥사를 판결할 때 반드시 원통함이 없게 하여 나라가 모범되게 안정에 이르도록 하였으니 ~ ~ ~ 어찌 갑자기 병사하여 나에게 서러운 회포를 무겁게 하는고. ~ ~ 슬프다. 인명은 비록 운수에 매이어서 길고 짧은 수한을 어찌할 수 없으나, 은전은 어찌 생사에 차별하랴. 조문하고 위로하는 예의를 마땅히 베푸노라.” <자료협조 : 봉화정씨 문헌공파종회 정진수 총무이사, 정광순 홍보위원장> 신숙주(申叔舟)가 평가한 정도전(鄭道傳) - 삼봉집후서(後序) 일찍이 보건대 옛날 영웅,호걸로 세상에 공을 세운 자는 그 끝을 보전하지 못하는 일이 많다. 혹시 가득하면 덜리고 차면 이지러지는 이치로서 화를 스스로 불러들이기도 했고, 또한 운수 소관으로 스스로 벗어나지 못한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큰 공을 세운 자는 반드시 큰 복을 누리게 마련이다. 만약 그 자신에게 미치지 못했다면 그 후손에게 돌아가게 된다. 베푼 것이 있으면 반드시 소득이 있는 것은 진실로 천도(天道)이기 때문이다. 삼봉(정도전)선생은 천자(天資)가 뇌락(磊落. 마음이 활달하여 구애되지 않는 모습) 괴위(魁偉. 얼굴이 위대하게 생김)하여 실로 왕좌(王佐.왕도 정치를 보좌하는 일)의 재주를 지녔던 분이었다. 고려 말엽에 나라의 운수가 종말로 치달려 전국이 물 끓듯 하니 백성은 도탄에 빠져 허덕이므로 우리 태조(太祖)께서 시국의 간란(艱難)을 민망히 여기어, 동으로 정벌하고 서로 토죄하여 큰 어려움을 물리쳤는데 선생은 손수 일곡(日轂.日은 왕자의 상징하는데 太祖를 보필했다는 뜻)을 이끌어 온 누리를 밝혀 우리 동방의 억조창생(億兆蒼生)을 건지셨던 것이다. 개국 초기를 당하여 무릇 큰 정책에 있어서는 다 선생이 찬정(贊定)한 것으로서 당시 영웅,호걸이 일시에 일어나 구름이 용을 따르듯 하였으나 선생과 더불어 견줄 자가 없었다. 비록 종말의 차질은 있었다 할지라도 공에 견주어 허물이 족히 덮혀질 수 있었겠지만 역시 운수 소관으로서 옛날 호걸들이 벗어나지 못한 것과 같은 이치일까? 나의 동년(同年. 과거에 함께 급제한 사람) 경상도관찰사 정군(鄭君.정문형)은 公의 증손(曾孫)이 되는데, 일찍이 선생이 끝까지 복을 누리지 못한 것을 원통히 여겨 무릇 선업(先業)을 계술(繼述)하고 조상의 허물을 덮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 힘을 다하지 않은 바가 없었으며, 또 선생의 시문(詩文), 잡저(雜著)를 찬집(撰集)하여 장차 판각에 붙일 양으로 서간을 보내어 나에게 서문을 명한 것이다. 선생이 시문에 있어서는 진실로 여사(餘事)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시의 고담(高澹),웅위(雄偉)함과 문의 통창(通暢),변박(辯博)함은 또한 그 학문과 포부의 만에 하나나마 엿볼수 있는 것이다. 하물며 선유(先儒)로서 목은(牧隱.이색),포은(圃隱.정몽주),양촌(陽村.권근) 같은 제공(諸公)이 모두 추앙하고 탄복하여 마지못함에 있어서랴. 정군은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운로(雲路. 벼슬길)에 드날렸고 지금은 간의(諫議)의 직으로 경상도 안렴(按廉)으로 나갔으니, 간의는 낮은 계급이요 경상은 큰 도(道)라 그대는 아직 귀밑이 청청한데 금대(金帶)를 허리에 띠고 남비(攬轡. 고삐를 잡는다는 뜻으로 처음으로 벼슬하여 천하를 맑게 해보겠다는 비유)를 쥐게 되었으니 영광이 역시 지극하다 하겠다. 이야말로 선생의 남긴 복을 장차 군으로 하여금 누리게 하자는 것이 아니겠는가. 천도는 베푼 자에게 준다는 이치를 징험할 수 있거니와, 국가의 공로에 대한 보답도 여기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른바 선업을 계승하고 조상의 허물을 덮는 일이 어찌 이에 그칠 따름이겠는가? 군은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선생의 휘(諱)는 도전(道傳)이요 자(字)는 종지(宗之)이다. 군(君)의 이름은 문형(文炯)이고 자는 야수(野臾)이다. 성화(成化) 원년(元年) 을유(乙酉.1465년) 어느날. 수충협책정난동덕좌익공신(輸忠協策靖難同德佐翼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의정부사 영예문춘추관사 세자사(領議政府事領藝文春秋館事世子師)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 신숙주(申叔舟)는 삼가 쓰다. (끝)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상)정도전이 꿈꾼 나라 기사입력 2014-03-12 09:33 삼봉 정도전은 단순한 책사로 조선을 개국한 것이 아니라 군주(이성계)를 이용해서 자신이 꿈꾸는 나라를 만들려고 했다.  ①“(1383년)정도전이 이성계를 따라 동북면을 방문했다. (이성계) 정예부대의 호령과 군령이 자못 엄숙한 것을 보고 이성계에게 비밀리에 말했다.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은들 못하겠습니까.(美哉此軍 何事不可濟)’ 이성계가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정도전이 딴청을 피우며 말했다. ‘동남쪽 왜구를 칠 때를 이르는 말입니다.”  ②“조선이 개국할 즈음, 정도전은 왕왕 취중에 슬며시 말했다. ‘한 고조가 장자방(장량)을 쓴 것이 아니네. 장자방이 곧 고조를 쓴 것 뿐이라네. (不是漢高用子房 子房乃用漢高)’라고…. 무릇 임금(태조 이성계)을 위해 모든 일을 도모했으니 마침내 큰 공업을 이뤘다. 참으로 상등의 공훈을 이뤘다.(凡可以贊襄者 靡不謀之 卒成大業 誠爲上功)”  ■정도전의 부음기사에 담긴 것은  ①②, 두 인용문 모두 <태조실록> 1398년 8월26일자에 기록된 삼봉 정도전의 졸기(卒記), 즉 부음기사(Obituary)이다. 이날 새벽 정도전을 비롯, 남은·심효생·박위·유만수 등은 정안군(이방원)을 포함, 여러 정실 왕자들의 시해를 도모했다는 죄로 참형을 당했다. 태조 이성계에 의해 세자로 옹립됐던 이방석과 방번 등도 피살됐다. 이를 ‘제1차 왕자의 난’이라 한다. 정도전 일파는 ‘왕자들을 살해하려 한’ 죄로 참형을 당했으니 대역죄인에 해당된다. 대역죄인의 졸기인만큼 그의 죄상을 낱낱이 고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이상하다. <실록>의 이 ‘천인공노할 대역죄인의 부음기사’는 비교적 객관적인 평가를 담고 있다. 물론 “도량이 좁고 시기가 많았으며, 보복하기를 좋아했고, 이색을 스승으로 삼고, 정몽주·이숭인 등과 친구가 됐으나 조준 등과 친하려고 세 사람을 참소했다”는 부정적인 내용도 담고 있다. 그러나 그 정도면 애교가 아닐까. 대역죄인의 부음기사치고는 매우 관대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부음기사는 되레 정도전에게 매우 긍정적인 단서를 남긴다. 즉 정도전의 사후, 최초의 기록인 이 ‘졸기’는 정도전과 정도전의 생애를 가장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장자방(장량)이 한 고조(유방)를 기용한 것 뿐” 우선 ①의 기사를 보자. 정도전이 조선개국 전, 동북면을 지키던 이성계를 방문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도전은 이성계가 새 왕조를 개창할 그릇이 되는 지를 탐색하려 한 것이 아닌가. 그 자리에서 정도전은 이성계 군대의 엄정한 군기와 군세를 보고 “이런 군대라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냐”고 운을 뗐다. ‘역성혁명을 할 만한 기세’라고 만족감을 드러낸 것이다. 이성계는 이 질문에 ‘무슨 말이냐’고 되묻고, 정도전도 딴청을 피웠다. 그러나 ①의 실록 기사는 두 사람이 새 왕조 개국을 위한 운명적인 만남을 생생한 필치로 전하고 있는 것이다. ②는 더욱 흥미로운 기록이다. 정도전은 조선 개국 뒤 술자리 때마다 취중진담의 형식을 빌어 ‘한고조(유방)와 장자방(장량)’의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정도전이 언급한 장자방, 즉 장량이 누구인가. 장량은 항우를 물리치고 한나라를 개창한 한 고조 유방의 둘도 없는 책사였다. 지금 이 순간도 ‘책사의 전범’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한고조는 훗날 “군영 안에서 계책을 세워 천리 밖의 승부를 결정짓는 일만큼은 나(유방)도 장량만 못하다”(<사기> ‘유후세가’)고 인정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정도전은 술자리에서 큰 일 날 소리를 해대고 있다. ‘한 고조 유방이 장자방을 기용한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유방을 이용해서 제국(한나라)을 개창했다’는 것이 아닌가. 두 말 할 것 없이 한고조는 태조 이성계, 장자방은 정도전 자신이다. 그러니까 정도전은 자신이 꿈꾸는 새 왕조를 개창하려고, 이성계를 기용했다는 이야기를 술자리 때마다 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춘추대의’에 반하는, 즉 역심을 한껏 드러낸 대역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실록>은 정도전이 취중에 말했다는 ‘한고조와 장자방’ 이야기를 아주 담담하게 팩트만 담아 전하고 있다. 정도전 일파를 죽인 태종이 <태조실록>을 편찬했는데, 정도전의 역심을 이토록 담담한 필치로 쓸 수 있을까. <실록>은 더 나아가 “태조(이성계)와 함께 조선개국에 모든 힘을 쏟은 정도전이야말로 ‘참으로(誠)’ 상등의 공훈을 세웠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참으로(誠)’라는 표현을 쓸 정도였다면, ‘진심’이 듬뿍 담겨있는 평가가 아닐 수 없다. 결국 정도전의 목을 벤 태종마저도 그를 ‘조선의 개창자였음’을 솔직하게 인정했다는 이야기다. ■군주가 아니라 한낱 사내를 죽인 것이다. 사실 삼봉 정도전의 젊은 날은 당대의 여느 사대부와 다르지 않았다. 백성을 군자가 가르쳐야 할 어리석인 대상으로 여겼으니까. 정도전이 다섯살 연상의 정몽주에게 보낸 편지를 보자. “백성들은 어리석어 취할 것과 버릴 것을 모릅니다. 백성들은 뛰어난 자를 믿고 복종할 줄 알았지, 도가 바르고 나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정도전은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풀”이라면서 “따라서 바람이 불면 풀이 반드시 눕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정도전의 삶은 부친·모친상으로 인한 3년 여의 낙향(1366~69)과, 부원파 이인임의 미움으로 인한 9년 여의 긴 유배 및 유랑(1375~84)으로 완전히 바뀐다. 먼저 ‘절친’이었던 포은 정몽주가 건네준 <맹자>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정도전은 <맹자>를 하루에 한 장 혹은 반 장씩 차근차근 정독했다. 아마도 맹자를 읽음으로써 역성혁명의 꿈을 키웠을 것이다. 정도전이 ‘꽂힌’ 맹자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맹자> ‘양혜왕 하’일 것이다. 무엇이냐. 제나라 선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탕왕(상나라 성군)이 하나라 걸왕을 내쫓고, 주 무왕이 상나라 주왕을 죽였는데 그렇습니까.”(제 선왕) “기록에 있습니다.”(맹자) “신하가 군주를 죽여도 됩니까.”(제 선왕) “어짊과 올바름을 해치는 자는 ‘사내’에 불과합니다. 주 무왕이 ‘한낱 사내’(상 주왕을 뜻함)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죽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맹자) 그러니까 주나라 창업주인 무왕(기원전 1046~1043년)은 ‘어짊과 올바름을 해친 한낱 사내’인 상(은)의 폭군인 주왕을 죽였다는 것이다. 이는 곧 역성혁명을 옹호하는 무시무시한 ‘맹자의 말씀’이다. 또 <맹자> ‘이루’는 “걸주(桀紂·폭군의 상징인 하 걸왕과 상 주왕을 뜻함)가 천하를 잃은 것은 백성을 잃은 것”이라 했다. “백성을 잃은 것은 그 마음을 잃은 것과 같다. 백성을 얻으면 천하를 얻은 것이다. 그 백성을 얻는 데도 도가 있으니 그 마음을 얻으면 백성을 얻은 것이다.” 그는 조선개국 후 펴낸 <조선경국전>에서 이와 같이 말했다. “임금의 지위는 존귀한 것이다. 하지만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백성은 복종한다. 하나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백성은 임금을 버린다.”(<조선경국전> ‘정보위·正寶位’)   삼봉이 이인임 일파의 미움을 받아 전라도 나주 거평부곡에 유배를 떠났다. 정도전은 유배지에서 비참한 백성들의 현실을 깨달았다. ■질타당한 선비의식 9년 간의 유배 및 유랑생활에서 마주친 백성들의 비참한 삶도 정도전의 혁명의식을 깨웠다. 바야흐로 홍건적의 난과 왜구의 침입 등의 외우와 권문세족의 토지겸병 등 내환으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있던 시기였다. “물푸레 나무(水靑木)로 만든 회초리로 농민을 압박, 토지를 빼앗기에 혈안이 돼 토지 하나에 주인만 7~8명이었다. 가난한 사람은 송곳 꽂을 땅도 없었다. 반면 방방곡곡이 홍건적의 난과 왜구 침략으로 싸움터가 됐다.”(<고려사절요> 등) 유배지(나주 회진현 거평부곡)에서 만난 백성들은 ‘교화해야 할 어리석은 자들’이 아니었다. 농사를 짓고 꼬박꼬박 세금을 내는 것을 천직으로 여긴, 가난하지만 순박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질곡의 하루하루를 보내던 백성들은 정도전에게 ‘탁상공론하는 유학자들의 허위의식’을 사정없이 일깨워주었다. 정도전의 <금남야인>이란 글을 보자. 어떤 야인(野人)이 “선비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고 묻자 선비의 몸종이 선비를 위해 대신 대답한다. “우리 선비님은 천문·지리·음양·복서에도 능통하고 오륜 윤리에 통달하고 역사와 성리철학에도 조예가 깊은 분입니다. 후진을 가르치고 책을 쓰고 의리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진정한 유학자임을 자부하는 선비입니다.” 그러자 야인은 슬쩍 비웃으면서 단칼로 정리한다. “그 말은 사치입니다. 너무 과장이 아닙니까. 실상도 없으면서 허울만 있으면 귀신도 미워할 겁니다. 선생은 위태롭군요. 화가 나에게까지 미칠까 두렵네요.”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하고 있는 선비의 허위의식을 사납게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문일까. 이숭인과 정몽주 등이 유배 중이나 유배가 풀렸을 때 임금을 향한 ‘연군시(戀君詩)’를 남겼지만, 정도전은 일절 쓰지 않았다. 백성에게 배웠는데 왜 임금에게 고마워한다는 말인가. ■이성계를 만난 날 정도전은 맨처음 인용한 대로 유랑 중 도지휘사로 동북지방 국토방위 책임자였던 이성계를 만나 혁명의 감(感)을 잡았다. 이 때가 1383년(우왕 9년)이었다. 정도전의 나이 42살이었고 이성계의 나이 49살이었다. 정도전은 이듬해(1384년) 여름 함주(함흥)를 찾았다. 아마도 이때는 ‘이성계의 장자방’으로서 본격적인 혁명모의를 시작했다고 봐야 한다. 1392년 7월 17일, 드디어 조선이 개국되자 정도전은 새왕조의 실질적인 설계자가 됐다. 그의 직책은 어마어마 했다. 1품인 숭록대부에다 봉화백이라는 작위는 덤이었다. 문하시랑찬성사(시중 다음 직책), 동판도평의사사사(최고정책결정기구 수장), 판호조사(국가경제 총괄), 판상서사사 (인사행정 총괄), 보문각대학사(문한의 총책임자), 지경연예문춘추관사 (역사편찬과 국왕 교육책임), 의흥친군위 절제사(태조 이성계의 친병 두번째 책임자)…. 그러니까 모든 정책을 결정하고 인사행정을 도맡으며, 국가재정·군사지휘권· 왕의 교육과 교서작성·역사편찬 등 전 분야를 총괄하는 직분을 감당해낸 것이다. 정도전은 원래 ‘백성은 풀잎같아서 바람이 불면 부는대로 쓰러지는’나약한 존재이며, 따라서 가르쳐야 할 존재라고 여겼지만 유배생활을 통해 민초의 만만치 않은 힘을 깨달았다. ■혁명공약 쓴 정도전 그의 지위는 7월28일 발표한 이른바 17조의 ‘편민사목(便民事目)’이 발표됨으로써 구체화했다. 이것은 일종의 혁명정부의 공약같은 것이었다. 정도전의 연구자인 한영우 교수(서울대)는 이 편민사목 편찬을 두고 “정도전이 조선왕조의 설계자임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종묘사직의 제도. 왕씨 처리 문제, 과거제도 정비. 국가재정의 수입과 지출, 군대진휼, 과전법의 준수, 공물 감면 등 혁명개혁공약을 만천하에 공포했다. 특히 정도전은 이색·이숭인·우현보·설장수 등 56명을 반혁명 세력으로 간주하고 엄중한 처벌을 언급했다. 물론 이들은 태조의 감면으로 극형을 면했다. 그러나 이색의 아들 이종학과 우현보의 세 아들 우홍수·홍득·홍명 등 8명은 유배 도중 곤장 70대를 맞고 사망했다. <태조실록>은 우현보 세아들의 죽음을 특별히 언급하면서 “이는 정도전과 우현보 가문의 오랜 원한 때문에 빚어진 비극”이라고 언급했다. 무슨 말인가. 여기에는 정도전을 둘러싼 출생의 비밀이 담겨있다. 즉 정도전의 외할머니가 ‘문제’였다. 정도전의 외할머니는 김진이라는 승려가 자신의 종의 아내와 사통해서 낳은 아이였던 것이다. 그런데 김진이라는 승려는 우현보의 자손과 인척관계였다. 따라서 우현보의 자손들은 정도전의 ‘천한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정도전의 ‘출생의 비밀’ 그런데 정도전이 과거에 급제, 처음으로 벼슬길에 오를 때 대간(사간원)에서 고신(신분증)을 선뜻 내주지 않았다. 이 때 정도전은 우현보의 자손들이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퍼뜨려 그렇게 됐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정도전이 훗날 우현보의 세 아들을 모함해서 개인감정으로‘치사하게’복수했다는 것이다. 사실 정도전으로서는 ‘천출(賤出)’이라는 것 때문에 무진 구설수에 시달려왔다. 예컨대 고려 공양왕 말기인 1392년 4월, 간관 김진양 등은 정도전을 탄핵하면서 다음과 같이 폄훼했다. “정도전은 미천한 신분으로서 몸을 일으켜 당사(堂司)에 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때문에 그 미천한 근본을 덮고자 본주(本主)를 제거하려고 하는데, 홀로 일을 할 수 없으므로 참소로 죄를 얽어 만들어 많은 사람을 연좌시켰습니다.”(<고려사절요> 공양왕 2년조) 여기서 말하는‘본주’, 즉 본주인은 우현보 가문을 일컫는다. 정도전의 ‘출생 컴플렉스’가 대단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거꾸로 이같은 출생의 한계 때문에 명문가 출신인 정몽주 등과 달리 세상을 완전히 갈아엎는 혁명가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계속)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하)정도전이 꿈꾼 나라 기사입력 2014-03-12 09:42 통치규범을 육전으로 나누었는데, 국가형성의 기본을 논한 규범체계서였다. <조선경국전>은 막 개국한 조선왕조의 헌법이었으며, 훗날 <경국대전> 편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어쨌든 정도전은 그야말로 새 왕조 설계를 위해 ‘만기친람’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한 일을 일별만 하더라도 과연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려사>를 편찬했으며, 사은사로 명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왔다. 동북면 도안무사가 되어 함길도를 안정시키고 돌아왔다. 여진족을 회유하고 행정구역을 정리하려던 것이었다. 태조는 그런 정도전을 두고 “경(정도전)의 공이 (고려 때 동북 9성을 경영한) 윤관보다 낫다”고 치하했다. (<태조실록> 1398년 3월30일)  ■정도전의 예능감 그 뿐인가. 악곡까지 만들었다. 즉 문덕곡(文德曲·이성계의 문덕을 찬양), 몽금척(夢金尺·신으로부터 금척을 받았음을 찬양), 수보록(受寶錄·태조 즉위전에 받았다는 참서), 납씨곡(納氏曲·몽고의 나하추를 격퇴한 것을 찬양), 궁수분곡(窮獸奔曲·왜구 격파의 공로를 찬양), 정동방곡(靖東方曲·위화도 회군을 찬양) 등 6개 악사를 지어 왕에게 바친 것이다. 정도전이 작사·작곡·편곡한 이 6곡은 춤으로 형상화됐다. 종묘와 조정의 각종 행사 때 연주돼 궁중무용으로 자리잡았다. 참 재주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하늘은 정도전에게 음악가의 재능까지 선사한 것이다. 그는 또 한의학에도 천착, <진맥도지(診脈圖誌)>까지 펴냈다. 의사는 맥을 짚는데 착오가 없어야 한다면서 여러 학자들의 설을 참고해서 그림을 곁들여 요점을 정리한 것이다. 대체 정도전의 ‘능력의 끝’은 어디까지였을까. ■병법에 군사훈련까지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오행진출기도>와 <강무도>, <사시수수도(四時蒐狩圖)> 등 병서를 지어 태조에게 바쳤다는 점이다. 이것은 요동정벌을 위한 준비작업이었다. 정도전은 각 절제사들이 보유하고 있던 군인 가운데 무략이 뛰어난 자들을 골라 ‘진도(陣圖)’를 가르쳤다. 자신이 제작한 ‘진도’를 펴놓고 일종의 제식훈련을 펼친 것이다. 이것은 사병 성격의 군대를 정도전 자신이 직접 장악, 장차 요동정벌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1394년, 정도전은 중앙군 최고책임자인 판의홍삼군부사가 됐다. 사실상 군통수권자가 된 것이다. 이성계의 친병인 의흥친군위도 이 기구에 통합됐다. 그러나 정도전의 병권장악은 순조롭지 않았다. 정안군(태종) 등 여러 왕자와 종친, 그리고 절제사들이 저마다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도전과 절제사들이 철갑을 입고 군대깃발에 제사를 지내는 제독 행사를 치렀다. 이 행사에 참석하지 못한 절제사들의 수하들에게 태형이 집행됐다.” (<태조실록> 1394년 1월28일) “절제사와 군사들에게 진도를 익히도록 강요하고 사졸들을 매질하니 이를 원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태조실록> 1398년 윤5월29일) 정도전은 특히 1394년 2월29일 왕자들과 종친들, 그리고 공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사병들을 혁파하는 것을 골자로 한 군제개혁안을 관철시켰다. 사실 제대로 된 나라라면 모든 군통수권이 국왕 한사람에게 모여야 하는게 옳았다. 때문에 정도전의 군제개혁안은 당연한 과업이었다. 정도전의 만기친람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정도전은 한양도성을 설계했고, 한양을 구획하고 거리와 마을의 이름까지 지었다. ■요동정벌의 야망 또 누누이 강조하지만 이 군제개혁안이야말로 정도전이 외쳐온 ‘요동정벌’을 위한 선행조건이었다. 예컨대 “고구려의 옛 강토를 회복하고자 한 고려 태조의 정책을 웅장하고 원대한 계략(宏規遠略)”이라고 칭송했다. 더불어 고구려 유민이 세운 발해의 유민을 포섭한 태조의 조처를 ‘매우 어질고 은혜로운(沈仁厚澤) 정책이었다’고 숭상했다. (<삼봉집> 중 ‘경제문감별집’ ‘군도君道·고려국 태조 高麗國太祖) 정도전의 요동정벌 의지는 확고했다. 예컨대 1397년(태조 6년) 정도전은 측근인 남은과 결탁해서 태조 임금에게 결연한 의지를 표명한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동명왕의 옛 강토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태종실록> 1405년 6월27일) 남은의 상소가 끊임없이 이어지자 태조는 “과연 그래도 되는 것이냐”고 정도전에게 물었다. 그 때 정도전은 “예전에도 외이(外夷)가 중원에서 임금이 된 적이 있지 않느냐”고 요동정벌을 촉구했다. 정도전은 요나라와 금나라, 원나라 등 이른바 이민족의 나라가 중국 중원을 점령한 일을 거론하면서 요동정벌의 정당성을 말한 것이다. 하지만 정도전의 군제개혁안과 요동정벌 계획은 극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예컨대 정도전의 편에 선 대사헌 성석용이 정도전의 <진도>를 익히지 않은 모든 지휘관의 처벌을 강력히 주청한 일이 일어났다.(1398년 8월9일) 당시 절제사를 비롯한 군부 지도자들의 면면을 보면 정안군(태종)을 비롯한 여러 왕자들과 종친들, 그리고 개국공신들이었다. 그들의 반발이 극심했다. 그러자 태조는 “정안군(태종) 등 왕자 및 종친들과 이지란 등 개국공신들은 사면하라”는 명을 내림으로써 이들의 반발을 무마했다. 여기에 병상에 누워있던 개국공신 조준은 태조 임금을 알현하고 ‘요동정벌 불가론’을 조목조목 따졌다. “(고려말 조선초의) 잦은 부역으로 백성들이 지쳤고, 신생 명나라의 국력이 틈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인데 군사를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정도전의 야망은 전방위적인 반발에 부딪혀 좌절되고 만다. ■도성설계에, 동네이름까지 이밖에도 새 왕조의 기틀을 잡기 위한 정도전의 ‘만기친람’은 혀를 찰만 했다. 1394년 <조선경국전>의 편찬은 그의 혁혁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통치규범을 육전으로 나누었는데, 국가형성의 기본을 논한 규범체계서였다. <조선경국전>은 막 개국한 조선왕조의 헌법이었으며, 훗날 <경국대전> 편찬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 <역대부병시위지제>라는 군제개혁안을 그래픽을 곁들여 편찬, 임금에게 바쳤다. 얼마나 병법에 해박했으면 그림까지 그려 설명할 정도였을까.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이 뿐인가. 정도전은 한양 신도읍지 건설사업의 총책임자가 되어 도성건설의 청사진을 설계한다. 한양의 종묘·사직·궁궐·관아·시전·도로의 터를 정하고 그 도면까지 그려 태조 임금에게 바쳤다. 새 도읍의 토목공사가 시작되자 <신도가>라는 노래까지 지어 공역자들의 피로를 덜어주고 흥을 돋우어 주었다. “~앞은 한강수여, 뒤는 삼각산이여, 덕중하신 강산 좋으매 만세 누리소서.” 경복궁과 근정전, 사정전, 교태전,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등 궁궐 및 전각의 이름과 융문루·영추문·건춘문·신무문 등 궐문의 이름을 지은 것도 정도전이었다. 지금도 상당 부분 남아있는 한양도성을 쌓은 것도 정도전이었다. 그는 직접 백악산(북악산), 인왕산, 목멱산(남산), 낙타산(낙산)에 올라 거리를 실축하고 17㎞가 넘는 도성을 설계했다. 오행의 예에 따라 숭례문·흥인지문, 돈의문, 소지문(숙정문) 등 4대문과 소의문, 창의문, 혜화문·광희문 등 4소문의 이름도 지었다. 서울의 중심에 위치한 종로의 종각은 오행의 신(信)에 해당됐다. 한양은 이로/써 인의예지신 등 오덕을 갖춘 도시의 상징을 띠게 됐다. 신도시 한양의 행정구획을 정리하고 구역의 이름을 짓은 것도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은 한양을 동·서·남·북·중 5부로 나누고 그것을 다시 수십개의 방(坊)으로 구획하고 이름을 정했다. 예컨대 연희·덕성·인창·광통·낙선·적선·가회·안국·명통·장통·서린 등의 이름이 정도전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냥 지은 게 아니었다. 인의예지신와 덕(德)·선(善) 등 유교의 덕목을 담은 명칭이었다. 정도전은 완성된 한양의 모습을 찬미하는 6언절구의 <신도팔경시>를 지었다.(1398년 4월 26일) ■ 신도가(新都歌) 조선 초기에 정도전(鄭道傳)이 지은 송도가(頌禱歌). 가사는 『악장가사』에 실려 있다. 창작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한양으로 천도한 태조 2년(1393)에서 태조 3년 사이로 추정된다. 내용은 신도읍(漢陽)의 형승(形勝)과 그 미성(美盛)함을 노래하고, 조선 태조의 성수(聖壽) 만년을 빈 것이다. 형식은 고려가요와 비슷한 3음보격으로 되어 있다. 전대절(前大節)과 후소절(後小節)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 아으 다롱다리’라는 여음이 전후절을 구분해 주는 구실을 하고 있다. 행 구분과 음보 구분이 가능하다. 그런데 제1행의 끝구인 ‘올히여’를 ‘올히’로 끝맺고 ‘여’자(字)는 다음 어구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즉 ‘여’를 ‘디위예’로 붙여 세 번째 어구를 ‘여디위예’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려사』 악지(樂志) 속악조(俗樂條) 중에 「양주곡(楊州曲)」이 나오는데, 「신도가」의 시형이 여요형(麗謠形)이면서 가사 가운데 “잣다온뎌 당금경 잣다온뎌”와 “아으 다롱다리”를 삽입한 것으로 보아 「양주곡」의 악곡에 맞추어 지었을 것으로 보는 설도 있다. 이 「신도가」는 순우리말로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고려가요의 형식을 취하면서 조선 초기의 시가에 흔히 쓰이는 ‘∼이샷다’·‘∼이여’·‘∼ㄴ뎌’·‘∼쇼셔’ 등의 감탄어구를 지닌 대표적인 송도가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천도 직후에 지어진 것인 만큼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지 못하고, 천도의 벅찬 기쁨을 직설적이고 포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신도읍 한양의 경개(景槪)는 1398년에 정도전이 지은 「신도팔경시(新都八景詩)」에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 신도팔경시(新都八景詩) 신도 팔경의 시를 올리다[進新都八景詩] 기전산하(畿甸山河) 기름지고 걸도다 천 리의 기전 / 沃饒畿甸千里 안팎의 산과 물은 백이(百二)로구려 / 表裏山河百二 덕교에다 형세마저 아울렀으니 / 德敎得兼形勢 역년은 천 세기를 기약하도다 / 歷年可卜千紀 도성궁원(都城宮苑) 성은 높아 천 길의 철옹이고 / 城高鐵甕千尋 구름 둘렀어라 봉래 오색(蓬萊五色)이 / 雲繞蓬萊五色 연년이 상원에는 앵화 가득하고 / 年年上苑鶯花 세세로 도성 사람 놀며 즐기네 / 歲歲都人遊樂 열서성공(列署星拱) 열서는 우뚝하게 서로 마주서서 / 列署岧嶤相向 마치 별이 북두칠성을 끼고 있는 듯 / 有如星拱北辰 새벽달에 한길 거리 물과 같으니 / 月曉官街如水 명가(鳴珂)는 먼지 하나 일지 않누나 / 鳴珂不動纖塵 제방기포(諸坊碁布) 제택은 구름 위로 우뚝이 솟고 / 第宅凌雲屹立 여염은 땅에 가득 서로 연달았네 / 閭閻撲地相連 아침과 저녁에 연화 잇달아 / 朝朝暮暮煙火 한 시대는 번화롭고 태평하다오 / 一代繁華晏然 동문교장(東門敎場) 북소리 두둥둥 땅을 흔들고 / 鐘鼓轟轟動地 깃발은 나풀나풀 공중에 이었네 / 旌旗旆旆連空 만 마리 말 한결같이 굽을 맞추니 / 萬馬周旋如一 몰아서 전장에 나갈 만하다 / 驅之可以卽戎 서강조박(西江漕泊) 사방 물건 서강으로 폭주해 오니 / 四方輻湊西江 거센 파도를 끌어가네 / 拖以龍驤萬斛 여보게 썩어 가는 창고의 곡식 보소 / 淸看紅腐千倉 정치란 의식의 풍족에 있네 / 爲政在於足食 남도행인(南渡行人) 남도라 넘실넘실 물이 흐르나 / 南渡之水淊淊 사방의 나그네들 줄지어 오네 / 行人四至鑣鑣 늙은이 쉬고 젊은 자 짐지고 / 老者休少者負 앞뒤로 호응하며 노래 부르네 / 謳歌前後相酬 북교목마(北郊牧馬) 숫돌같이 평평한 북녘들 바라보니 / 瞻彼北郊如砥 봄이 와서 풀 성하고 물맛도 다네 / 春來草茂泉甘 만 마리 말 구름처럼 뭉쳐 있으니 / 萬馬雲屯鵲厲 목인은 서쪽 남쪽 가리질 않네 / 牧人隨意西南 『삼봉집』권1, 「육언절구」 진신도팔경시 1) 산하(山河)의 험고(險固)함을 말한 것이다. 『사기(史記)』에 “진(秦)나라는 땅이 험고하여 2만 명만 있으면 족히 제후(諸侯)의 백만 군사를 당할 수 있다” 하였다. 2) 봉래궁(蓬萊宮)은 당(唐)나라 대명궁(大明宮)인데, 여기서는 우리 궁궐에 비유하여 쓴 것. “천자(天子)의 정궁(正宮)이어서 그 뒤에는 항상 오색의 서운(瑞雲)이 떠 있다” 하였다. 3) 말굴레의 장식품이라고도 하고 또는 악기라고도 한다. 進新都八景詩 畿甸山河 沃饒畿甸千里, 表裏山河百二, 德敎得兼形勢, 歷年可卜千紀. 都城宮苑 城高鐵甕千尋, 雲繞蓬萊五色, 年年上苑鶯花, 歲歲都人遊樂. 列署星拱 列署岧嶢相向, 有如星拱北辰, 月曉官街如水, 鳴珂不動纖塵. 諸坊棋布 第宅凌雲屹立, 閭閻撲地相連, 朝朝暮暮煙火, 一代繁華晏然. 東門敎場 鐘鼓轟轟動地, 旌旗旆旆連空, 萬馬周旋如一, 驅之可以卽戎. 西江漕泊 四方輻凑西江, 拖以龍驤萬斛, 請看紅腐千倉, 爲政在於足食. 南渡行人 南渡之水滔滔, 行人四至鑣鑣, 老者休少者負, 謳歌前後相酬. 北郊牧馬 瞻彼北郊如砥, 春來草茂泉甘, 萬馬雲屯鵲厲, 牧人隨意西南. 『三峯集』卷1, 「六言絶句」 進新都八景詩 이 사료는 조선 건국 초 서울로 도읍을 옮긴 뒤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 새로운 왕도의 환경과 자신의 감정을 6언 절구로 노래한 것이다. 정도전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는 격동의 시기에 역사의 중심에서 새 왕조를 설계한 인물로, 서울로 도읍을 정한 뒤 도성의 면모를 갖추어 가는 과정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한 사례로 경복궁을 짓고 그 건물의 명칭을 짓는 데도 정도전이 유교의 이념을 참작하여 하나하나 이름을 손수 짓고 이를 임금에게 허락받아 확정하였다. 위의 시는 모두 8수로 이루어져 있다. 시의 내용을 보면 하나같이 경쾌하고 새로운 왕조에 대한 자신감이 내포되어 있다. 시의 내용은 산하(山河)•궁성(宮城)•관서(官署)•시가(市街) 등과 사방(四方)의 중요 대상물을 주제로 삼아 정도전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위정(爲政)이란 먹을 것을 풍족히 하는 데 있다’는 표현은 관료이면서 문인으로서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조선은 1393년(태조 2년) 도읍지를 한양으로 정하고 1394년(태조 3년)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여 새 수도의 도시 계획을 구상하였고, 그해 11월 마침내 한양으로 천도하였다. 천도하는 데는 풍수지리설을 많이 참작하였다. 그리고 1395년(태조 4년) 6월에 한양부를 한성부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한성은 궁궐을 중심으로 ‘좌묘우사, 전조후시(左廟右社, 前朝後市)’의 원칙으로 도읍을 건설하였다. 가장 먼저 서쪽에 사직을 완공하고 궁궐을 세운 뒤, 그 동쪽에 종묘를 완성하였다. 광화문 앞에는 육조관서를 배치하여 관아가(官衙街)로 하고, 한양의 방위를 튼튼히 하기 위해 북악산과 낙산•남산•인왕산을 잇는 약 17㎞의 성벽을 쌓았다. 도성의 행정구역은 동•서•남•북•중부의 오부(五部)를 두고 그 밑에 52방(坊)을 두었다. 이 시는 이렇게 정비된 서울의 모습을 시로 노래한 것이다. ■최고의 불교비판서 새왕조 개창을 향한 그의 정력은 <불씨잡변> 저술에서도 엿볼 수 있다. 1398년(윤 5월16일) 개국공신 권근이 쓴 <불씨잡변> 서문을 보자. “무인년(1398년) 여름(4~5월) 선생(정도전)은 병 때문에 며칠 쉬고 있는 사이 이 글을 만들어 나(권근)에게 보이며 말했다. ‘불씨(부처)의 해독은 사람을 금수로 만들어 인류를 멸망시킬 것이니~ 울분을 억제할 수 없이 이 글을 짓는 것입니다.’라고….”정도전은 더 나아가 “불교를 깨뜨릴 수 있다면 죽더라도 마음을 놓을 수 있다”고 토로했다. 그런데 이 <불씨잡변>은 동양 역사에서 가장 수준높은 불교비판서로 알려져 있다. 또한 성리학을 조선왕조의 국교로 정착시킨 저술로 인정받고 있다. 놀라운 일이다. 몸이 아파 쉬고 있는 사이에도 나라를 위한 정도전의 노심초사를 읽을 수 있다. 그보다 이 짧은 기간동안 이렇게 깊이 있는 저술을 완성할 수 있었다니…. 그의 내공에 감탄사가 절로 나올 뿐이다. ■군주의 권한은 딱 두가지 뿐 그러나 정도전의 사상 가운데 으뜸은 역시 ‘재상 중심’의 신권(臣權) 정치였다. 1394년 <조선경국전>을, 1395년엔 그것을 보완한 <경제문감>을 지었다. 여기서 정도전 정치사상의 핵심인 ‘재상중심의 권력구조’ 의견이 구체적으로 나온다. 그런데 그의 주장은 너무 혁명적이다. “인주(人主·군주)의 실제 권한은 딱 두가지다. 하나는 재상을 선택·임명하는 권한이다.(人主之職 在擇一相) 다른 하나의 권한은 한 사람의 재상과 정사를 의논하는 것이다.(人主之職 在論一相)” (<조선경국전> ‘상·치전·재상연표’ <경제문감> ‘상·재상’) 여기서도 주안점이 있다. 군주는 국사에 관계된 큰 문제만 협의할 뿐, 그밖의 자질구레한 일들은 재상이 모두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사의 주도권은 군주가 아니라 재상에게 있다는 것이다. 정도전은 왜 재상에게 사실상의 권한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왕의 자질은 어둡고 현명하고 강하고 약함이 한결 같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아름다운 점은 따르고 나쁜 점은 바로잡으며, 왕이 대중의 영역에 들어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상(相·재상)이라 합니다. 도와서 바로잡는다는 것입니다.”(<조선경국전> ‘상·치전총서’) 이게 무슨 소리인가. 군주의 실권은 원래 미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왕위는 세습된다 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즉 왕이 현명하면 물론 좋지만 반드시 그렇지 않더라도 재상만 훌륭하다면 괜찮다는 것이다.(<조선경국전> ‘상·치전·재상연표’) ■군주는 사유재산도 없어야 한다 정도전은 이와함께 군주는 사유재산을 가져서도 안된다고 단언했다. 군주의 사유재산권은 측근들을 먹여살리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그 경우 왕의 측근세력은 권세와 농간을 부려 만사의 폐단이 이로 말미암아 야기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군주는 관념상으로 가장 많은 부의 소유자이긴 하지만 국가의 경비지출에 의해 생계를 지탱해야 하는 일종의 월급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재상은 군주가 필요로 하는 일체의 경비를 장악해서 군주가 사치와 낭비가 없도록 엄격히 통제해야 하는 존재다.(<조선경국전> ‘상·치전·재상연표’) 그래서인가. <경제문감>은 “천하의 교령(敎令)과 정화(政化)는 모두 재상의 직책에서 나온다”(재상지직·宰相之職)고 했다. 따라서 군주는 재상을 대할 때 반드시 ‘예모(禮貌)’ 즉 ‘예를 갖춘 얼굴’로 대해야 하며 함부로 언동해서도 안된다. 그러니까 재상은 인사권과 군사권, 재정관할권, 작상(爵賞)형벌권 등 움켜쥔다는 것이다. (<경제문감> ‘상 재상지직’) ■정도전이 꿈꾼 세상 정도전이 재상정치를 논하면서 전범으로 삼는 ‘재상’들이 있다. 상나라 탕왕과 주나라 성왕을 도와 왕조를 반석 위에 세운 이윤(요리사 출신의 재상)과, 주공(성왕의 삼촌이자 섭정 재상)이다. 물론 한나라의 소하·조참·주발·진평과 당나라의 방현령·두여회·요숭 등도 명재상이긴 하다. 하지만 정도전은 자기 몸을 수양하고 임금을 바로 잡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다는 것이다.(<경제문감> ‘상·재상 상업’) 정리해보면 미련하고 똑똑한 군주가 둘쭉날쭉할 수밖에 없는 세습군주로는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할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천하만민 가운데 뽑은 선비로 현인집단을 형성하고, 그 현인집단 가운데 선발된 관료를 중심으로한 관료정치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관료정치를 이끌어가는 구심점은 천하만민의 영재 가운데 선택된 재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도전의 천려일실 1398년 8월26일, 정도전은 자신의 집(종로구청 자리)과 가까운 남은의 첩 집(송현방)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불의의 습격을 받아 참수 당한다. 당시의 <실록>은 정도전은 죽기 전, “예전에 공(정안군)이 나를 살렸는데, 이번에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과연 그랬을까. 한영우 교수는 정도전이 죽기 전에 읊었다는 ‘자조(自嘲)’의 시를 보면 혁명가의 기개가 엿보인다고 주장한다. “조심하고 조심하여 공력을 다해 살면서(操存省察兩加功) 책속에 담긴 성현의 말씀 저버리지 않았네(不負聖賢黃卷中), 삼십년 긴 세월 고난 속에 쌓아온 사업(三十年來勤苦業) 송현방 정자 한 잔 술에 그만 허사가 되었네.(松亭一醉竟成空)”(<삼봉집>) 새왕조 건설을 위해 눈 코 뜰새 없이 움직이던 중 그만 순간 방심해서 술 한잔 마시다가 천려일실, 변을 당했음을 슬퍼하고 있었던 것이다. 송현방은 바로 남은의 첩 집을 가리킨다. ■목만 발굴된 유골의 정체 정도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에서 몸통없이 목만 남은 유골이 발굴됐다. 재상의 나라를 꿈꾸던 정도전은 태종 이방원에 의해 참수되는 비운을 겪었다. 지난 1989년 3월, 서울 서초동 우면산 자락에서 삼봉 정도전의 것으로 보이는 무덤이 발굴됐다. 발굴 묘는 <동국여지지> ‘과천현’편과 봉화정씨족보에서 정도전 선생의 묘로 추정한 바로 그 곳이었다. 봉화 정씨 종택이 그동안 이 묘소를 관리해왔다. 그런데 발굴결과 몸통은 없고, 머리만 남은 피장자의 유해가 발견됐다. 이와함께 상당히 정제된 조선초기의 백자가 함께 수습됐다. 무덤을 발굴한 한양대박물관은 “무덤의 지체로 보아 상당한 신분의 피장자였음이 분명하다”면서 “삼봉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다. 특히 정도전이 “정안군이 정도전의 참수를 명했다(令斬之)”는 실록의 기사(1398년 8월26일)가 눈에 띄는 대목이다. 아마도 어떤 뜻깊은 이가 그의 잘린 목을 수습해서 정성스럽게 묻어두었을 것이다. 조선을 설계한 위대한 혁명가이자 사상가이자 정치가인 정도전의 최후는 이렇게 비참했다. 돌이켜보면 아쉬운 점이 있다. ■장자방과 다른 점 정도전은 ‘조선을 개국한 장자방’을 자처했지만, 끝까지 장자방의 길을 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장자방의 경우를 보자. 한 고조(유방)가 한나라를 개국한 뒤 정부인(여후)의 아들(태자)을 폐하고 총애하던 후궁(척부인)의 아들을 새 태자로 옹립하려 했다. 그 때 장자방은 정부인을 위해 선묘한 계책을 내어 장자(여후의 아들)의 계승원칙을 지켜냈다. 반면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가 정실이 아닌 후실(신덕왕후 강씨)의 어린 아들(방석)을 세자로 세우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도리어 세자(방석)의 스승이 되어 미움을 자초했다. 또 하나, 장자방은 한나라가 개국되자 “이제 세속의 일은 떨쳐버리고자 한다”고 선언한 뒤 적송자(전설상의 신인)의 삶을 좇아 유유자적했다. 이 또한 정도전과는 다른 모습이다. 조선 개국 후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만기친람’하며 초인의 능력을 발휘했던 정도전과는…. ■‘그 분과 견줄수 있는 영웅호걸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다. 정도전이 있었기에 역사는 뒤바뀌었다는 것이다. 그가 뿌린 씨앗은 조선왕조 500년은 물론, 지금 이 순간까지 꽃을 피우고 있다는 것이다. 1465년(세조 11년), 영의정 신숙주는 정도전의 손자 정문형의 부탁을 받아 <삼봉집>의 후서를 써주면서 이렇게 평했다. “개국 초 나라의 큰 규모는 모두 선생이 만들었으며, 당시 영웅호걸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지만 그 분(정도전)과 비교할 만한 이가 없었다.” 태조 이성계는 1395년 10월29일 낙성된 경복궁에서 연회를 베풀며 삼봉 정도전에게 네 글자를 대서특필해 선물했다. ‘유종공종(儒宗功宗)’. 즉 ‘유학도 으뜸이요, 나라를 세운 공도 으뜸’이라는 글자였다. 핵심을 찌르는 당대의 평가다. 물론 삼봉의 속내는 달랐을 것이다. 이성계(한고조 유방)가 정도전(장자방)을 기용한 것이 아니라 정도전이 이성계를 기용한 것이라고….(끝) 정도전, 조준, 권근의 관계 세 분의 공통점은 조선건국에 공헌하였고 사상적 기반은 성리학에 기초한 불교배척 입니다. 혁명 이 후에는 이들의 차이점이 두드러지게 된다. 특이한 것은 조준의 경우 역관집안의 후손이고 좀 늦게 출사를 했으며 당시의 거유인 이색과 친분도 없는 편이다. 이 분은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한 시점부터 몇년간 줄기차게 전제개혁과 다른 여러가지 경제문제 사회문제에 관여하였다. 그의 관제 및 사회개혁안은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에 반영 되었다고 본다. 위화도 회군이후 조선건국에 아주 지대한 공적이 있다. 하지만 이후는 정도전에 밀려 있는것 같다. 정도전은 그의 신분적 한계를 넘기위해 이성계에게 찾아가서 역성혁명에 가담하였다. 그는 조선의 건국에 불꽃같은 빛을 발하였지만 그 빛은 수명이 짧았다. 그 시발점은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표전문제였다고 생각된다. 갓 출범한 조선에서 명나라에 표(表-상국에 올리는 글)에 광(光) 글자가 포함이 되어 있었는데 당시 명에서는 금지어였다. 주원장이 어린시절 머리 깍고 중 노릇하며 빌어 먹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光 자는 자신을 놀리고 비하하는 글이라 하여 사용 금지어였다. 당시 표전은 정탁, 정총, 권근이 작성했는데 명 태조는 정도전을 압송하라고 명했고 조선은 정도전을 퇴직시키고 병을 칭하여 권근이 대신 갔다. 화가 난 태조는 권근에게 24개의 시를 즉석에서 짓게하고 권근의 시는 다 통과하여 상을 받았다. 이 표전문을 계기로 명료하게 세사람의 노선이 달라진다. 조준은 권력에서 소외되어 있어 이방원과 가까워 지고 정도전은 요동정벌을 꾀하여 사병혁파, 진법훈련등을 진두지휘하게 된다. 권근은 표전문제 해결로 미미했던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민본정치, 왕도정치를 향해 나아가던 정도전이 이성계의 막내아들을 세자로 옹립하여 왕도정치를 지향하던 이방원과 척을 지게 되었고 결정적으로 요동정벌을 위해 사병혁파를 하는 것에 반발, 위기를 느낀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키게 된다. 조준은 요동정벌을 강하게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고 이방원의 편에 서게 된다. 권근은 학문적으로 이색의 총애를 받았지만 조선의 건국이후 입지가 약하던 시기에 표전문제때 요동정벌이 아닌 화의를 주장했고 또 사신으로 가서 그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게 되어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후 권근은 변계량이라는 제자를 가르쳐 조선 성리학의 체계를 세우게 된다. 정도전은 문관으로서 뿐만 아니라 무관으로서의 실력도 출중하여 조선의 성리학 뿐만 아니라 군사, 외교, 역사, 경제등 다방면으로 조선왕조의 토대를 구축하게 된다. 영주 삼판서 고택-정도전 생가 이 고택은(현재는 2008년 건립) 고려 말에서부터 조선 초까지 세 분의 판서가 살았던 집이라 해서 이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이 집의 첫번째 주인은 고려 공민왕 때 형부상서(조선시대에는 형조판서)를 지낸 정운경(鄭云敬 1305~1366)이다. 정운경은 사위인 황유정(1343~?)에게 물려주었는데, 황유정은 공조판서를 지냈다. 황유정 역시 사위인 김소량(1384~1449)에게 이 집을 물려주었고, 김소량의 아들인 김담(1416~1464)은 이조판서에 올랐다. 이 때부터 김담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가며 이 집에서 살았다. 이 삼판서 고택에서는 위에 언급한 세 판서 외에도, 조선 개국의 일등 공신인 정도전이 태어나기도 했는데, 정도전은 정운경의 장남이다. 조선시대에 이 집에서 배출된 인물을 살펴보면, 정승1명, 판서급4명, 성균관대사성1명, 참판1명, 홍문관교리 1명, 지방관9명 등이다. 이 고택은 원래 지금의 영주동 431번지인 구성공원 남쪽에 자리잡고 수 백년을 이어오다가 1961년 대홍수 때 기울어졌고, 몇 년 후 철거되었다. 그 후, 2008년 10월 영주 시민들이 뜻을 모아 지금의 자리에 복원되어 선비의 고장 영주를 상징하는 명소 중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다. 정도전은 왜 이 집을 물려 받지 못했을까? 이 삼판서 고택의 첫번째 주인이었던 정운경은, 훗날? 그가 세상을 떠나자 지인과 제자들이 " 청렴하고 의롭다"는 염의(廉義)라는 사시(私諡, 나라가 아닌 개인이 올리는 시호)를 지어 올릴 만큼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그는 슬하에 아들 셋을 두었는데, 큰 아들은 도전(道傳), 즉 도를 전한다는 뜻이고, 둘째 아들은 도존(道存), 도를 보존한다는 의미이며, 셋째 아들은 도복(道復), 도를 되살린다는 의미이다. 여기서의 " 도 道 "란, 성현의 도 즉, 유학(儒學)이다. 어린 시절 정도전은, 개경으로 간 아버지를 따라가서 당대의 거유 이제현에게도 배웠다. 그리고 당대 최고 명문 학자였던 목은 이색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아버지 정운경과 이색의 아버지 이곡이 나이를 뛰어 넘은 친구였기 때문이다. 이 때 정도전은 정몽주 이숭인 이존오 등 여러 동문을 벗하게 되었고, 학문은 날로 깊어졌다. 스승인 이색은 정도전을 일러 " 군자로 존경한다" 고 하였고, 다섯살 위인 정몽주는 " 안목이 뛰어나다" 고 평하였다. 정도전은 23세 되던 해, 홍건적의 난으로 안동으로 몽진했던 공민왕이 귀경하던 도중, 청원에서 치른 과거에서 급제함으로써 아버지의 뒤를 이어 관리로 등용되었다. 그는 25세(1366)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해 고향인 영주로 돌아왔다. 한 달이 넘게 부친의 산소 자리를 찾아 헤맸으나 좋은 자리를 얻지 못하던 어느 날, 한 자나 되는 눈이 내렸다. 그런데, 지금의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 한 곳에 한 점의 눈도 없는 자리가 발견되었다. 그는 그 자리가 상서로운 자리라고 여겨 그 곳에 부친의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 같은 해 그믐달에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정도전은 부모의 산소 옆에? 여막을 치고 앞뒤 3년간을 시묘살이를 마쳤다. 그 당시 관리나 선비들은 부모상을 당했을 때, 대개 100일 만에 탈상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훗날 왕이 교서를 내려 " 부모의 상에 성인의 예절을 잘 지켰다" 고 칭송할 정도였다. 정도전이 시묘살이를 하던 자리에는 훗날 "문천서당"이 지어졌고, 오늘날까지 그를 기리고 있다. 정도전에게도 아킬레스건은 있었다. 외조모가 노비의 자식이었다는 반상(班常)의 약점이 오래도록 따라 다닌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약점이 오히려 정도전으로 하여금 좌우을 돌아보지 않고, 마치 화살처럼 일직선으로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를 추구하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사실 정도전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 창건의 중신 중에는 출생에 비밀을 갖고 있는 인물이 많았다. 이를테면 역시 개국공신이며, 태종(이방원)때의 중신인 하륜도 서얼 출신이었다. 하륜은 그 뒤 태조 7년에 자객을 보내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폭로한 자의 일족을 자그만치 70여 명이나 살해하였고, 족보도 모조리 불태워버릴 정도였다. 개국공신인 조온의 어머니도 이자춘의 비첩녀였고, 이화의 어머니도 이자춘의 비첩이었다. 또한 훗날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암살한 조영규도 서얼 출신이었다. 이렇듯 개국공신 중에는 출신에 문제가 있는 인물이 많았다. 이는 역으로 이들이 당해야 하는 신분상의 불이익 때문에 고려왕조에 대하여 불만이 가장 많았고 개혁에 대한 의지도 컸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1375년, 날로 국세가 기울어 가던 원나라는 주원장이 세운 신흥 명나라를 협공하는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고려를 방문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정몽주와 정도전 그리고 이숭인과 권근 등 신진 유학자들이 들고 일어나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하지만 당시 실권자이며 친원파였던 이인임 일파는 그 의견들을 묵살하고 끝내 원나라 사신을 불러들였다. 이에 정도전 등은 아예 업무를 보지 않으면서까지 크게 반발하였다. 이인임은 당장 보복에 나서 주동자인 정몽주와 정도전을 따로따로 유배시켜 버렸다. 정도전이 유배된 곳은 멀리 전라도 나주의 회진현에 있는 천민부락이었다. 정도전은 그곳에서 3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다. 이런 저런 역경을 이겨내며, 마침내 조선의 개국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정도전은 자신이 오랫동안 구상해온 국가와 정치·사회·민생·법률 체제에 관한 설계도를 실천에 옮긴다. 그는 한양을 새로운 도성으로 정하고 새 수도를 건설하는 총책임자가 되었다. 경복궁을 짓고, 역사의 교훈을 담은 "고려사"를 쓰고, 법의 기초가 될 " 조선경국대전"을 지었다. 고려 말 백성들에게 신진사대부였던 이성계를 부각시킨 전제(田制)개혁안을 만든 것도 그였다. 이성계의 막료에서 조선건국의 주역이 되고 통치법전인 조선경국전을 편찬하였다. 이는 조선의 개국이념이자 강령이며 정도전의 정치철학이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조선왕조의 합당성과 왕업의 지침을 명시하였으며, 전통적 관제에 따라 관할 사무를 분장하였으니 비로소 이(吏), 호(戶), 예(禮), 병(兵), 형(刑), 공(工)의 육조를 확정하게 되었다. 또한 한양천도의 기본계획은 물론 근정전, 경복궁, 교태전 등의 이름을 지어 왕권교체의 타당성을 부여하였다. 또한, 세자의 스승으로서 세자에게 맹자를 가르쳤으며, 사병을 혁파하고 자주 국가의 위상을 확립하기 위해 요동 정벌을 계획했다. 정도전에게 있어서 조선이라는 나라, 태조 이성계는, 왕도정치와 민본주의라는 가치관과 설계를 실천하기 위한 도구였는지 모른다. 1398년,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조화를 꾀해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왕도정치를 구현하려는 정도전과, 왕권은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다는 이방원이 정면으로 충돌하여 " 제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이 일어난다. 이 때 정도전은 두 아들 및 동생 도존과 함께 죽임을 당한다. 맏아들 정진은 이성계를 수행한 까닭에 화를 면했으나, 후에 군졸로 끌려간다. 셋째 동생 도복은 목숨을 건진데다가, 훗날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한성부 판윤(오늘날의 서울 시장)에까지 올랐다. 정도복은 낙향 후 삼판서 고택으로 돌아가지 않고, 아버지 정운경의 산소가 있는 이산면에서 만년을 보냈다. 이런 저런 일이 지난 후, 삼판서 고택은 정운경의 사위인 황유정에게 물려졌다. 태조는 즉위 초 정도전에게 팔도사람을 평하라고 한 일이 있다. 정도전은 경기도는 경중미인(鏡中美人), 강원도는 암하노불(巖下老佛), 충청도는 청풍명월(淸風明月), 전라도는 풍전세류(風前細柳), 경상도는 송죽대절(松竹大節), 황해도는 춘파투석(春波投石), 평안도는 산림맹호(山林猛虎)이라고 평하였다. 비교적 좋은 말인 듯 하나 지역약점을 부각시킨 평가였다. 정도전은 이상하게도 태조의 출신지인 함경도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태조는 아무런 말이라도 괜찮으니 해보라고 재촉했다. 정도전은 함경도는 "이전투구(泥田鬪狗)"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태조의 안색이 변했는데 이를 눈치 챈 정도전이 "그러하오나 함경도는 또한 석전경우(石田耕牛)입니다"라고 하자 낯빛을 고쳤다고 한다. 함경도 사람은 진창에 뒤엉켜 싸우는 개와 같은 면도 있지만, 자갈밭을 가는 소처럼 강인한 면도 있다는 말이다. 정도전이 지은 전각과 문루의 이름 중에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종묘의 대문을 창엽문(蒼葉門)이라고 한 것이다. 한자는 표의문자로 글자를 풀어서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창엽문의 창(蒼)자를 풀어보면 ++, 八, 君의 합자로 스물여덟 임금이라는 뜻이 된다. 또 엽(葉)자를 풀면 ++, 世, 十, 八로 이십팔 세(世)의 뜻이 된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세자빈 이방자 여사의 위패가 봉안됨으로서 28위의 임금 (왕위에는 오르지 않았지만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을 포함)으로, 28세로 조선왕조의 세계(世系)는 끝난 셈이다. 그렇다면 정도전은 6백여 년 전에 이를 예측하였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정도전은 뛰어난 식견에도 불구하고 태자책봉 문제로 천수를 누리지 못했다. 태조 5년 신덕왕후의 장례식이 끝나고 열흘 뒤 이방원은 입궐하여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물론 태자를 도왔던 정도전, 남은, 심효생도 희생된다. 정도전이 어린 태자의 편에 섰던 이유는 태조가 아직 강건하고 굳세어 아무도 그의 뜻을 거역하지 못할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450여 년이 지난 고종 2년(1865),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경복궁을 처음 설계하고 지은 정도전의 공로를 되살려, 정도전에게 " 문헌(文憲)"이라는 시호를 내림으로써 정도전은 역사에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삼봉 정도전(三峰 鄭道傳)의 시. 一樹梨花照眼明 일수이화조안명 한 그루 배꽃은 눈부시게 밝은데 數聲啼鳥弄新晴 수성제조롱신청 지저귀는 산새는 봄볕을 희롱하네 幽人獨坐心無事 유인독좌심무사 숨어 사는 이 아무 생각없이 홀로 앉아 閒看庭除草自生 한간정제초자생 뜨락에 절로 돋아난 풀만을 한가로이 바라보네 삼판서 고택의 두번째 주인이었던 미균 황유정(米? 黃有定)作) 偶携藜杖出柴扉 우휴려장출시비 우연히 명아주 지팡이 짚고 사립문을 나서니 四月淸和燕燕飛 사월청화연연비 4월의 화창한 날씨에 제베들이 쌍쌍이 날고 乘興往尋金氏子 승흥생왕김씨자 이에 시흥이 솟구쳐 김씨 집에 찾아가 보니 薔薇一朶秀疎籬 장미일타수소리 장미꽃 한 송이 빼어나게 피어 있네 하륜(河崙) 하륜(河崙, 1348년 1월 22일(1347년 음력 12월 22일)~1416년 11월 24일(음력 11월 6일))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대림(大臨) 또는 중림(仲臨), 호는 호정(浩亭)이다. 아버지는 부사 하윤린(河允麟)이며, 권문세족인 이인임의 조카 사위이다. 이인복, 이색의 문인이다. 고려 말 정몽주, 남은, 권근 등과 함께 신진사대부를 형성했고, 처음에는 역성혁명에 반대하다가 1392년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참여했다. 정도전과 함께 한양 천도를 적극 주장했고, 1393년 정도전이 쓴 표전문이 불손하다는 이유로 홍무제가 문책하자 직접 명나라에 가서 사태를 해결하였다. 1398년 충청도 도관찰사로서 제1차 왕자의 난 당시 정안대군 이방원을 도왔다.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 당시에도 이방원을 도왔다. 태종 즉위 후 좌명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1416년 관직에서 은퇴 후 객사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생애 생애 초기 출생과 소년기 초정 하륜은 1347년(고려 충목왕 3년) 순흥부사(順興府使)를 지낸 하윤린(河允潾)과 진주강씨(晉州姜氏)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하공진의 후손으로, 하식(河湜)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식목녹사(拭目錄事)를 지낸 하시원(河恃源)이다. 어머니 진주강씨는 증 찬성사 강승유(姜承裕)의 딸이다. 초은 이인복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뒤이어 목은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선배인 정도전, 정몽주, 조준 등을 만나게 되었다. 이때 하륜은 10년 연상인 정몽주를 무척 어려워했으나 정도전은 나이를 따지지 않고 그와 가깝게 지냈다. 또한 후에 정몽주의 문하생 중의 한사람인 권근과도 가깝게 지냈다. 1360년(공민왕 9년)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합격, 국자감의 유생이 되었다. 과거 급제와 관료 생활 초반 1365년(공민왕 14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당시 시험관이기도 했던 스승 이인복은 하륜의 사람됨이 큰것을 보고 아우 이인미(李仁美)의 딸과 결혼시켰다. 또한 당시의 동지공거 중의 한사람은 그의 스승이었던 이색이었다. 1367년(공민왕 16년) 춘추관 검열(檢閱)ㆍ공봉(供奉)이 되었고, 1368년(공민왕 17년) 감찰규정(監察糾正)에 시보(試補)되었으며, 이듬해 감찰규정으로, 그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신돈의 문객인 양전부사(量田副使)의 비행을 탄핵했고, 신돈의 권력이 지나치게 비대해짐을 들어 신돈을 공박하다가 지영주군사로 좌천되고 신돈에 의해 파직 되었다. 1371년(공민왕 20년) 신돈이 사형당하자 복직되어 다시 지영주군사가 되었으며, 이때에 영주목(榮州牧)을 잘 다스려 안렴사 김주(金湊)는 그의 치적을 가장 높이 평가하여 보고했다. 이어서 고공좌랑(考功佐郞)을 거쳐 판도좌랑(版圖佐郞)으로서 교주(交州)ㆍ강릉도찰방(江陵道察訪)이 되었다. 정치 활동과 관료 생활 권문세족과 결탁 그는 스승 이인복이 동생인 이인임과 친하지 않은 것과 달리, 이인임과 가깝게 지내면서 그의 심복이 되었다. 또한 임견미, 염흥방 등과도 가깝게 지냈는데 하륜은 이인임의 측근 중에서도 유난히 문신을 싫어하던 임견미에게 임기응변의 술수를 간언하기도 했고, 비상한 지혜를 인정받기도 했다. 폐륜은 하륜처럼이라는 말이 나왔다. 1374년(공민왕 23년) 제릉서령(諸陵署令),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그는 이색의 문하에서도 수학한 바 있어 이 연고로 공민왕 말년부터는 신진사대부와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이후 전리정랑(典理正郎)·전교서부령 지제교(典校署副令知製敎)· 전의감부령(典儀監副令)·전법서총랑(典法署摠郎)·보문각직제학· 판도서총랑(版圖署摠郎) 등을 거쳐 교주도안렴사(交州道按廉使)로 나갔다가 다시 되돌아와 전리총랑(典理摠郎), 전교서령(典校署令)을 지내고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했으나 1380년(우왕 6년)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뒤 신진사대부와 가깝게 지내면서 이인임과 다소 멀어졌지만 훗날 1388년에 이인임이 죽었을 때에 전의부에서 그 시호를 황무(荒繆)라고 하여 악시(惡諡)를 올리자 시호를 올리는 담당자에게 항의를 하기도 했다. 신진사대부 활동 1380년 어머니 진주강씨의 상을 당해 사직하였다. 1383년 아머니의 3년 상을 마친 뒤 복직, 사간원우부대언, 우대언, 전리판서, 밀직제학을 역임했다. 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퇴청 후에는 별도의 서실을 열고 문하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1385년에 명나라의 사신 주탁(周卓) 등을 서북면에서 영접하는 일을 맡았다. 1388년 벼슬이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에 이르러 1388년(우왕 14) 최영의 요동 공격을 실현 불가능한 일이라며 비판, 적극 반대하다가 양주(襄州:지금의 양양군)로 유배되었다. 그해 여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이 제거되자 복직, 관작을 회복했다. 그 해 가을 영흥군 왕환(永興君王環)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왔을 때 그가 가짜라고 공격하였다가, 역공격을 받고 오히려 광주, 울주 등지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윤이 이초의 변이 일어났을 때 복직하였고, 1391년(공양왕 3)에 전라도도순찰사가 되었다. 그는 스승인 이색이나 동문인 정몽주, 이숭인, 권근, 길재 등과 함께 정치적 입장을 같이함으로써 초기에는 조선 왕조 건국에 반대했다. 그러나 정도전 등의 권고로 권근 등과 함께 조선의 건국에 참여하였다. 조선 건국에 참여 역성 혁명에 참여 1392년(고려 공양왕 4년) 7월초 고려가 멸망하자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했다. 그러나 1392년(조선 태조 1년) 7월 이성계가 즉위한 뒤 경기좌우도관찰사(京畿左右道觀察使)로 기용되어 관직에 나갔다. 이때 경기도의 부역제도를 개편, 전국적으로 실시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393년(태조 2) 경기도도관찰사로 기용되었을 때 수도 천도 논의가 나오자, 정도전과 함께 계룡산 건도역사(建都役事)의 부당함을 역설하여 마침내 중지케 했다. 이어 정도전과 함께 한양 천도를 적극 주장하였다. 1393년(태조 2년) 무악으로의 천도를 강력 주장하였지만 실현되지 못했고 1394년(태조 3) 중추원첨서사(中樞院簽書事)에 전보되었다. 그는 관료생활 중에도 퇴청 후 틈틈이 문인들을 길러냈는데 그의 문인 중에선 세종 때의 명재상 중 한 사람인 윤회 등이 배출되기도 했다. 1395년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그러나 특별히 3년상을 마치지 못했으나 곧 기복(起復)되어 복직했다. 정도전과의 갈등 1396년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로 복직했다가 예문춘추관학사로 있을 때 당시 명나라 홍무제가 표사(表辭)와 표전물이 불손하다는 이유로 시비가 일어나 표사 글을 지은 정도전을 소환하자, 그는 명나라의 요구대로 정도전을 보내자고 주장하고, 스스로 명나라에 들어가 정도전을 대신하여 해명하였다. 그러나 정도전은 명나라에 가기를 거부했고, 결국 그는 표전문 작성에 연루된 권근, 정탁, 노인도(盧仁度) 등을 데리고 갔다. 홍무제가 정도전이 오지 않은 이유를 추궁하자 그는 '정도전이 당시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서 올수 없다'며 해명하였다. 그러나 이때 데려갔던 권근, 노인도, 정탁은 억류되고 그 혼자 돌아왔다. 1396년(태조 5) 한성부윤으로 계품사(計稟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표전문 작성의 전말을 상세히 보고함으로써 홍무제의 오해를 풀어 해명에 성공했다. 그 후에도 명나라에 자주 왕래하여 외교에 공이 컸다. 그러나 표전문 문제가 제기될 때 명나라의 요구대로 정도전을 보내자고 했다가 정도전의 미움을 받아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 좌천되었는데, 그 때 항왜(降倭)를 도망치게 했다 하여 정도전파 사람의 탄핵을 받고 파면, 수원부에 안치되었다가 얼마 뒤 복직, 충청도도순찰사가 되었다. 이방원의 측근 사람의 관상을 잘 보던 하륜은 처음에 정안대군 이방원을 보고서 장차 크게 될 인물인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정안대군의 장인 민제를 만나서 간청하기를 '내가 사람의 관상을 많이 보았으나 공의 둘째 사위만한 인물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한번 그를 만나보기를 원합니다.'고 했다. 민제는 사위 이방원에게 하륜이 꼭 한번 보려 하니 한번 그를 만나보도록 하라며 만남을 주선해 주었다. 그의 부탁으로 민제를 통해 정안대군을 만나게 됐고 이후 그의 심복이 되었다. 당시 여러 왕자 가운데 공을 세웠다고 자부했고 야망이 크고, 머리가 뛰어났던 이방원은 왕위에 오르고자 하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하륜은 정안대군의 야심을 간파했고 그의 측근이 되었다. 이후 하륜은 제1차 왕자의 난과 제2차 왕자의 난 당시 이방원의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하륜은 두 차례 왕자의 난을 실질적으로 계획하고 지휘했다. 제1차 왕자의 난 당시 정도전이 남은의 첩의 집에서 술을 마신다는 정보를 입수, 정도전과 남은, 심효생 등을 불시에 습격하여 죽이고, 세자 이방석과 이방번을 제거했다. 1차, 2차 왕자의 난 1398년(태조 7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충청도 도관찰사로서 충청도 병력을 이끌고 한성부에 이르러 이방원을 도와 의안대군, 무안대군 형제를 제거하고, 정도전 일파를 숙청하는 데 공을 세웠다. 태조가 양위하고 정종이 즉위하자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태종)을 도운 공로로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어 정사공신 1등에 오르고 진산군(晉山君)에 피봉되었으며 1399년 우정승(右政丞)이 되었다. 그해 5월 명나라 홍무제가 죽자 홍무제의 국상에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로 가서 조문하는 한편 정종의 왕위승습(王位承襲)을 승인받고 귀국하였고, 문하부참찬사에 오르고 다시 문하찬성사 의흥삼군부 판사(義興三軍府判事)겸 판상서사사를 거쳐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으로 승진, 진산백(晉山伯)에 진봉되었다.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 때에도 이방원을 도왔고, 이방원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그의 최측근이자 권력의 실세가 되었다. 제2차 왕자의 난 당시 그는 박포 일당의 거병 계획을 미리 파악한 뒤 선수를 쳐서 회안대군 이방간,맹종 부자와 박포를 체포, 박포일파를 죽이고 회안대군부자를 유배시켰다. 정안대군의 측근 세자가 된 정안대군은 아버지 태조 이성계를 찾아가 인정받으려 했고, 무학대사 등의 간곡한 건의로 제1차, 제2차 왕자의 난 이후 함흥에 가서 머물던 태조 이성계는 한성부로 돌아오게 되었다. 태조가 한성으로 환궁하던 날 정안대군은 살꽂이 다리까지 마중을 나가서 부왕을 맞이했다. 하륜은 정안대군을 말렸으나 듣지 않았고, 하륜은 정안대군에게 '태상왕(太上王, 태조 이성계)의 노기가 아직 풀리지 아니했을 터이니, 막사 차일(遮日, 천막)의 중간 기둥을 굵은 나무이되 수령이 오래되고 조밀한 나무로 만들라'고 건의하였다. 정안대군은 하륜의 말대로 아름드리 큰 나무를 준비하여 차일의 대들보를 세웠다. 환궁한 태조 이성계가 아들 정안대군을 보자마자 노기충천하여 활을 잡고 마중 나오는 정안대군을 향하여 화살을 쏘았다. 나오던 정안대군은 황급히 천막의 대들보 뒤로 몸을 피하여 그 위기를 모면하였고 날아온 화살은 차일의 기둥에 꽂혔다. 이는 후에 '살꽂이'라는 이름,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정안대군이 아버지 태조의 환영연회에 참석할 때에도 대신 내관에게 곤룡포를 입혀 보내라고 진언하였다. 정종 내외가 술잔을 올린 뒤 정안대군의 세자 곤룡포를 입은 내관이 태조에게 술을 따라 올릴 때 태조는 뒤에 숨겨둔 철퇴를 내리쳤고 내관은 그자리에서 즉사하였다. 이후 태조는 '모두가 하늘의 뜻이다'하고 단념했다 한다. 생애 후반 태종 즉위 이후 체제 개혁과 제도 개편 1400년 정안대군이 태종으로 즉위하자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좌명공신 1등(佐命功臣 一等)에 책록되었다. 그는 태종에게 스스로 창업과 수성의 방책으로 '변통'(變通)을 제시하였다. 그에 의하면 학문은 하나의 목표를 제시하는 것이고, 그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은 변화하는 현실에 맞추어 그때그때 달라져야 한다고 보았다. 1401년(태종 1년) 관직을 사임했다. 다시 복귀, 영삼사사(領三司事)로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 시험을 주관하고, 관제를 개혁하였다. 그리고 영사평부사 겸 판호조사(領司評府事兼判戶曹事)로서 저화(楮貨)의 유통을 건의하였다. 태종 즉위 직후 그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정치제도를 개편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6조 직계제(六曹直啓制)를 도입하여 각 판서들의 권한을 강화하고 왕에게 업무를 직접 보고할 것을 주청하여 성사시켰으며, 재상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였다. 시장에서의 화폐유통의 필요성을 주장하여 저화를 발행하게하고 재정의확충을 도모하였다. 또한 좌주문생제의 혁파나 호패법의 실시, 신문고의 설치등을 성사시켰다. 한편 하륜 자신이 지지한 정책의 방향과는 달리 태종이나 다른 주변 인물들과의 사적 관계에 의해 행동하는 경우가 많아서 인사 청탁을 많이 받는다거나 정책을 공론화하기보다는 태종과의 밀담으로 추진해 나간다는 비판을 샀다. 1401년(태종 1년) 자신의 문하생인 윤회가 과거에 급제했다. 하륜은 학문에 뛰어나면서도 호탕한 성품이었던 윤회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외교 활동, 역사서 편수 1402년(태종 2년)에 문하좌정승(左政丞)이 되었고 판승추부사를 겸임, 바로 의정부좌정승 판이조사 (議政府左政丞判吏曹事)로서 명나라 영락제의 즉위를 축하하는 등극사(登極使)로 가서 조선 왕조의 정식 승인을 표하는 고명인장(誥命印章)과 태종의 책봉 고명을 받아왔으며, 이첨과 함께 《동국사략》(東國史略)을 편수하였다. 그는 사서에도 관심을 갖고 삼국사략 등을 지었으며, 동국사략 등의 편찬에 적극 참여하고, 역사서도 편수하였다. 그러나 그의 저서들 중 상당수는 임진왜란과 병자, 정묘호란 등을 거치면서 대부분 인멸되었다.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를 회복하고 더욱 돈독하게 하기 위해 하륜은 계속 사신으로 남경을 다녀오는 등 명과의 관계를 다지는 데에 주력했다. 그의 사대는 단순히 명의 정통성을 인정한다는 명분적인 측면이 아니라 안보라는 실질적인 이유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고려가 원의 부마국이 된 것을 현명한 처사였다고 평하며 명과의 국혼을 지지하여 국혼을 적극 주장하였으나, 태종이 이를 적극 거부하여 성사되지 못했다. 1402년 권근, 이첨과 함께 《삼국사략》(三國史略)을 편찬하였으며, 1405년에는 좌정승 세자사(世子師)가 되고, 1406년 중시독권관(重試讀券官)이 되어 변계량 등 10인을 뽑았다. 1409년(태종 9년)에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이 되었다. 1409년 영의정부사로 군정을 개정했고, 영춘추관사로 《태조실록》의 편찬을 지휘했다. 은퇴와 최후 그는 태종의 최측근 인사이자 책사의 한사람으로, 사사로운 인사 청탁을 많이 받고 통진 고양포(高陽浦)의 간척지 200여 섬 지기를 개인 농장으로 착복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나 공신이라 하여 용서되었다. 1412년 다시 좌의정부사가 되었다가 1414년(태종 14) 영의정부사에 재임명되었다. 1416년(태종 16년) 노환을 이유로 치사(致仕)하였다. 치사를 청하자 태종은 극구 만류하며 허락하지 않았으나, 고집을 꺾지않고 나이가많고 병이 들었음을 이유로 거듭치사를 청하여 허락받고 물러났다. 태종은 친히 교서를 써서 진주의 전세 100결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하륜은 성상께서 주신 것을 어찌 감히 사사로이 쓸 수 있겠는가 하며 따로 향사당(鄕射堂)을 지어 교서를 모셔두고 전세는 동리 노인들을 위해 쓰게 하였다. 이때 향사당에는 태종이 직접 친필로 벽오당(碧梧堂)이라는 현판을 써서 내려주었다. 바로 진산부원군에 임명되어 왕명을 받아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능침을 순찰하기 위하여 함길도에 가서 봉심하고 그해 11월 6일 한성으로 되돌아오던 도중에 정평군 관아에서 죽었다. 저서에 《호정집》(浩亭集), 《삼국사략》등이 있고, 가사인 도인송도지곡, 수명명 등이 있다. 작품으로는 스승 이색의 묘지명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사후 하륜은 사후 태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태종은 그를 자신의 장자방이라 했으며, 후대에 하륜은 한나라의 장자방, 송나라의 치규(稚圭)에 흔히 비유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이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변통도 가능하며 때에 따라서는 변절이나 권모술수로 보일 수 있는 수단까지도 불사하여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하륜의 문인인 윤회가 쓴 졸기나 행장에는 우왕 말년부터 공양왕 시절 무렵의 부정적인 행적들은 대부분 생략하기도 했다. 하륜의 묘는 진양군(현 진주시) 미천면의 오방동 (현, 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 오방리 산 166)에 위치하며, 진주성 내 영남포정사 왼편으로 1970년대 세운 출생지비가 있다. 그의 묘소 주변에는 할아버지 하시원, 할머니 진주정씨, 아버지 하윤린, 어머니 진주강씨의 묘가 함께 소재해 있으며 이들 묘역은 1977년 12월 28일 경상남도기념물 제41로 지정되었다. 함양 경충재, 함양 부조묘 등에 제향되었다. 함양군병곡면도천리에 있는 사당 경충재는 후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제486호로 지정되었다. 불천지위의 은전을 받았으며, 경상남도 함양군에는 그의 부조묘가 세워졌다. 경상남도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 441번지에 있는 하륜의 부조묘는 2004년 7월 1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56호로 지정되었다. 저서 음양(陰陽)·의술·성경(星經)·지리(地理) 등에도 정통하였고 일찍 《태조실록》 15권을 찬수하였다. 《호정집》(浩亭集) 《삼국사략》(三國史略) 《동국약운》(東國略韻) 공저 《동국사략》(東國史略) 《태조실록》(太祖實錄) 작품 이색 묘지명 도인송도지곡(都人頌禱之曲) 수명명(受明命) (1402) 성덕가(聖德歌) (1402) 사상과 신념 시문에 능하였고, 이색, 이인복에게 배운 성리학 학문 외에도 음양, 의술, 풍수 지리에 두루 능하였다. 또한 역사와 고전에 밝았고, 예악(禮樂)과 제도에 능통하여 개국 직후 대명외교에 차질이 없도록 하였다. 서자 차별 건의 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자 적서, 구분의 문제는 여러 신하들에 의하여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하륜의 주장이다. 하륜은 이자춘의 첩의 자손은 현직에 등용치 말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재혼한 여자의 아들과 손자도 과거 시험에 응시하지 못하게 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 일로 의안대군 이화, 이천우, 이양우 등의 눈총을 받았지만 태종이 그를 적극 비호하였다. 이자춘은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이며 태종의 할아버지이다. 이 주장의 저의는 방원이 방석을 몰아낸 반란을 합법화시키고, 첩의 아들인 이성계를 정통으로 끌어들이려는 데에 있었다. 이성계는 후처의 자손이었으나, 그 때에 정처의 자식으로 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이성계에게는 이자춘의 전처의 아들인 이원계라는 형이 있었고, 또한 이화(李和)라는 배다른 동생이 있었다. 이원계의 아들인 양우가 태종을 비방한 불공 사건이 있자, 이를 빌미로 하륜은 이런 주장을 한 것이다. 그 후 서선(徐選)은 1415년(태종 15년) 종친과 각 품관의 서얼은 현직에 두지 말라고 공의를 내세워 이의 채택을 보았다. 이것이 서얼 금고의 연원이 되었고,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을수 없는 가혹한 신분 제약의 실마리가 되었던 것이다. 서얼금고를 주장하던 태종은 서선등의 공의를 빌미로 서자들의 관직 진출 금지령을 내린다. 그 뒤 서얼 금고령과 적서 차별제도는 성종 때 가서 세부조항을 성종이 직접 지어 반포함으로써, 재가녀(재혼 여성) 자손 금고령과 함께 하나의 규정으로 정착된다. 불교 비판 그는 불교와 도가 사상, 무속 등에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불교와 무속 등이 민심을 현혹하고 사람들을 속인다고 질타하였다. 현실 세계의 일도 완벽하게 알아맞추지 못하면서 사람들을 혹세무민한다는 것이고, 사후세계라는 개념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기망한다는 것이었다. 태종이 "내가 불교를 좋아하는 것은 다른 이들이 불교에 미혹되는 것과 다르다. 그러나 불교에서 사람들에게 화복을 미리 알려준다는 것이 잘못인가?"라고 묻자 그는 "불교는 미래의 볼 수 없는 일을 가지고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의연하게 일에 대처하는 것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는 성인이 이치에 맞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似而非)고 미워하는 바입니다. 화복으로 말하면, 과거 불타가 살아있을 때 일족을 도살하는 자가 매우 많았는데 불타는 왜 미리 알려주어 화를 면하게 하지 않았는지요? 화복에 관한 불타의 설이 그름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라며 반박하였다. 하륜은 미래의 일을 미리 알 수 없음을 들어 불교를 비판하였다. 부처가 생존할 당시에도 자신의 일가족을 도살하는 자가 있는 등 불상사가 적지 않았는데 부처가 신통하다면 어찌 그것을 미리 일러주어 화를 면하게 하지 못했느냐며 부처가 미래의 일을 예측할 수 없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불교나 무속 등이 앞으로 닥칠 일의 이해득실을 미리 계산하여 처신하려는 공리주의적 입장을 비판하고, 인간 본연의 입장에 따라 매사에 일이 닥치면 의연하게 선을 지향하여 나아갈 것을 역설하였다. 그는 정도전과 함께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불교비판 이론가의 한사람이었다. 그의 불교 비판은 불교의 사회적 폐단이나 반사회성에 대한 비판을 넘어 이론적인 비판으로 진보하기 시작하였다. 왕권 강화책 그는 정사의 안정을 위해서는 강력한 왕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태종 즉위 직후부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정치제도를 개편하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왕권의 강화를 위해서 6조의 대신들이 재상을 거쳐서 왕에게 결재받지 않고 왕이 직접 6조 대신들에게 직접 결재를 받음으로서 6조 대신들의 권한을 높이는 한편 사장되는 시무안에 대해 왕이 직접 결정하게 하였다. 그는 6조의 정무 결재를 왕이 직접 맡을 것을 건의하는 한편, 6조 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시행하여 문하성과 의정부의 정승들보다 약화된 각 판서들의 권한을 강화하고, 업무를 왕에게 보고하게 만들었으며 또한 재상의 권한을 축소하였다. 왕권 강화를 위해 그는 임금이 백성들의 고충을 직접 들을 수 있는 언로를 마련해야 된다고 보았다. 이로써 6부 대신이나 지방관의 전횡이나 권한을 견제할 수 있는 하나의 수단과 장치를 마련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그는 신문고를 설치하게 하여 왕이 백성의 의견을 수렴할 것을 건의하였고, 태종은 이를 적극 수용하였다. 또한 그는 시장에서의 물물교환보다는 일정한 화폐를 사용케 할 것을 주장, 태종에게 저화(楮貨)의 발행을 건의하여 성사시킨다. 이기론과 본성, 기질성 그는 이(理)와 인간의 본성을 하나라고 보았으며 인간의 본성은 선량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저서 호정집에서 그는 '본성(性)이란 천리가 마음에 있는 것이다. 인의예지신이 그 이름이다.'라고 하여 인간의 본성을 '인의예지신'으로 보았다. 그에 의하면 '하늘에 있으면 이치(理)가 되고, 사람에게 있으면 본성이 되지만, 실은 하나이다.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은 그 본체이고, 감응하여 마침내 통하는 것은 그 작용이다. 측은·수오·사양·시비는 작용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다. 밖으로 드러난 것을 보고서 그 안에 본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이른바 본연지성이다. '라는 것이다. 그는 이와 인간의 본성을 같은 개념으로 파악하였다. 그는 맹자의 성선설에서 한발 더 나아가 사람마다 각기 받은 기질이 다르다고 파악하였다. 하늘에서 부여받은 바가 똑같지 않으므로, 우둔하고 현명하고 강하고 약함의 차이가 있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기질지성이라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맹자의 성선설은 본래의 성품이고, 순자의 성악설 등은 기질의 성품으로 규정하였다. '맹자는 본성이 선하다고 하였는데, 이는 궁극적인 본원에 대해 말한 것이고 기질지성은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순자는 사람의 본성이 악하다고 하고, 양웅은 선악이 뒤섞여 있다고 하고, 한유는 본성에 세 등급(三品)이 있다고 하였다. 이는 다 기질지성에 대한 말이고 본연지성은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무릇 본연지성은 요순과 보통 사람이 똑같고, 기질지성은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학문에 힘써서 기질을 변화시키면 본연지성이 드러나게 된다. 예를 들면 밝은 구슬이 맑은 물 속에 있으면 밝고 탁한 물 속에 있으면 흐린데, 흐린 물을 걸러서 맑게 하면 맑은 물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후대의 이기론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는 '그 밝음은 밖에서 구할 수 없고 그 흐림은 고유한 것이 아니며, 단지 걸러내는 데 달렸을 뿐이다. 자연스런 본성에 따르는 것이 도이고, 이 도를 행하여 마음에 얻은 것이 덕이다. 성(性) 자의 뜻을 밝게 알 수 있으면 본성을 알 수 있고 도와 덕을 알 수 있다. 밝게 알기 때문에 바르게 행한다. 밝게 알지 못하면서 행동이 어긋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고 하였다. 평가 하륜은 시문에 능했고 음양·의술·경전·지리에도 정통했다. 가족 관계 본가 진주 하씨(晉州 河氏) 조부 : 식목녹사 증 하시원(式目錄事 贈 晉康府院君 河侍源, ? - 1360년) 조모 : 정균(鄭均)의 딸 증 정경부인 진양 정씨(贈 貞敬夫人 晉州 鄭氏) 아버지 : 순흥부사 증 진양부원군 하윤린(順興府使 贈 晉陽府院君 河允潾, ? - 1394년) 외조부 : 검교예빈경 강승유(檢校禮賓卿 姜承裕) 어머니 : 증 진한국대부인 진주 강씨(贈 辰韓國大夫人 晋州 姜氏, ? - 1380년) 부인 : 이인미의 딸 진한국대부인 성주 이씨(辰韓國大夫人 星州 李氏) 장남 : 좌군도총제 하구(左軍都摠制 河久, 1380년 - 1417년) 장녀 : 홍섭(洪涉)과 혼인 차녀 : 이승간(李承幹, 1416년 - 1417년)과 혼인 처가 성주 이씨(星州 李氏) 처증조부 : 정당문학 성산군 이조년(政堂文學 星山君 李兆年, 1269년 - 1343년) 처조부 : 성산군 경원공 이포(星山君 敬元公 李褒, ? - 1373년) 처백부 : 안흥부원군 이인복(安興府院君 李仁復, 1308년 - 1374년) 처백부 : 이인임(李仁任) 장인 : 예의판서 이인미(禮儀判書 李仁美) 하륜이 등장한 작품 드라마《추동궁 마마》(KBS, 1983년, 배우: 신충식) 《용의 눈물》(KBS, 1996년 ~ 1998년, 배우: 임혁) 《대왕 세종》(KBS, 2008년, 배우: 최종원) 《정도전》(KBS, 2014년, 배우: 이광기) 《육룡이 나르샤》(SBS, 2015년 ~ 2016년, 배우: 조희봉) 영화《순수의 시대》(2015년, 배우: 김구택) 평가 인품이 중후, 침착, 대범하였다. 그러나 사사로운 인사 청탁과 국유지 착복 등에 대한 비판도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그가 차원부와 그 일가족을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죽였다며 이를 비판하였다. 기타 시 제광주청풍루 (題廣州淸風樓) / 광주 청풍루에 제하다 少年曾此一看花 (소년증차일간화) / 젊어 여기서 꽃을 한 번 보았는데 老大今來感慨加 (로대금래감개다) / 늙어서 지금 오니 감개가 무량하구나 歲月不留人換盡 (세월불류인환진) / 세월은 머물지 않아 사람은 다 바뀌었는데 眼前風物尙繁華 (안전풍물상번화) / 눈앞의 풍물들은 오히려 번화하기만 하구나 신봉승 선생이 들려주는 정도전 하륜 이야기 1980년대 방송가를 석권한 바 있는 드라마 조선왕조실록의 작가인 신봉승 선생을 최근 만날 기회를 가졌다. 현재 예술원 회원인 신 선생은 조선왕조에 대한 상당한 권위이다. 신선생은 최근의 드라마 <정도전>을 호평하며 정도전 등에 대한 개인적인 평을 말해주었다. 다음은 신 선생과 가진 한담의 주요 내용. 글 | 우태영 조선뉴스프레스 인터넷뉴스부장 필자의 다른 기사 - 드라마 ‘정도전’에 대한 평가는 “지난 10년 동안에 나온 역사 드라마 가운데 최고이다. 사실에 부합하며 재미있다. 매우 건전한 드라마이다. 나는 요즘 이 드라마만 본다.” - 정도전은 어떤 인물인가 “조선 왕조 5백년 중에서 가장 진취적이며 지식인으로서는 최고 수준이다. 그가 갖고 있던 학문의 크기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 예를 들면? “이성계가 경복궁을 완공한 후 전각의 이름을 지어야 했다. 그 많은 전각의 이름을 정도전이 다 지었다.” - 또 다른 예는?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에 꼭 기억할만한 글귀가 있다. ‘도끼를 든 자를 여름 산에 넣지 말고 그물코가 작은 그물을 가진 자는 냇물에 넣지 말라’는 문장이다. 치어를 잡지 말고 나무를 베지 말라는 것이다. 6백년 전에 자연보호의 필요성을 명확하게 언급한 대목이다. 그 학문의 깊이는 지금의 사람으로서도 형언하기 어렵다.” - 정도전은 개국공신이기고 하지만 태종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다. “만일 정도전이 방석이 편에 서지 않고 이방원 편에 섰다면 본인은 물론 손자까지도 영의정을 지냈을 것이다. 그는 정치적으로 줄을 잘못 섰다. 아무리 지식이 있어도 줄을 잘못 서면 망한다.” - 얼마나 망했나? “정도전은 살해당한 후 고종 때까지 5백년 간 조선에서는 누구도 삼봉 정도전을 거론할 수 없었다. 충청도 어느 고을의 원이 봉우리 세 개가 잘 내다 보이는 방이 있는 집에 살았다. 하루는 친구가 찾아와 ”자네 삼봉과 마주 앉았군“하고 농담을 건내자, 그 고을 원은 놀라서 집을 헐어버렸다. 이처럼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도 금지되었다.” - 그러면 언제 ‘복권’됐나? “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했는데 지도를 보니까 전각에 이름이 다 있었다. 그 많은 전각에 이름이 다 있는 것을 확인하고 너무 놀라서 누가 이름 지은거냐 하고 물으니 정도전이라는 답을 들었다. 그래서 대원군이 정도전의 무덤이라도 찾아서 제사지내고 전각 이름은 그대로 붙이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광화문, 근정전, 교태전, 사전정 등의 이름이 우리에게도 전해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당시에도 정도전의 무덤은 찾지 못했다. 이전까지 4백년 간 정도전의 이름은 거론조차 되지 못했다.” - 정도전이 줄을 잘못 섰다는 이야기는? “이성계는 둘째 부인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둘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 첫째 부인의 소생이자 조선 건국의 실질적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방원(태종)이 이에 반발한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래서 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석과 정도전을 모두 죽였다. 방원은 특히 정도전은 직접 죽였다.” - 정도전은 왜 실력자인 방원 편에 서지 않았는가? “내가 일평생 가졌던 의문이다. 해석이 잘 안된다. 이성계가 조선 건국에 가장 중심적인 인물인 방원을 제치고 열두살짜리 방석을 왕으로 만들려고 한 것은 참으로 추측하기 어렵다. 정도전이 당시에 살아 있는 권력 실세에 접근했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권력의 실세는 방원보다도 신덕왕후 아니었을까 하는 점이다.” - 방원보다도 신덕왕후가 실세였나? “이 대목을 이해하려면 지금 사람들은 당시의 가족제도를 이해해야 한다. 고려말 사대부들은 부인을 두 명 두었다. 고향에 두는 향처와 수도에 두는 경처이다. 둘은 평등하다. 누구도 지금의 후처같은 개념이 아니다. 이성계는 향처인 신의왕후(神懿王后 ) 한씨 부인과의 사이에 큰 아들 방우, 방원 등 여섯 아들을 두었다. 경처인 신덕왕후 사이에는 방석 등 아들 둘을 두었다. 이성계는 처음에는 한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큰 아들 방우에게 양위하려 하였다. 그런데 조선이 건국되기 3개월 전에 한씨 부인이 포천에서 사망하였다. 그리고 방우는 아버지의 조선 건국에 반발하여 왕위 계승을 거부하고 떠났다. 그럴 경우 승계의 순위는 무너진다. 그 다음인 방원이 왕위를 이어 받는 게 아니다. 이성계는 살아 있는 경처인 신덕왕후의 둘째 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정도전은 살아 있는 권력인 신덕왕후 편에 줄을 섰을 것으로 추측해 본다.” - 둘째 부인 신덕왕후가 권력의 실세라 해도 이성계의 뒷받침이 없었으면 어렵지 않았을까? “이성계의 신덕왕후에 대한 사랑은 매우 각별하였다. 신덕왕후가 사망하자 이성계는 정동의 옛 경기여고 자리에 신덕왕후 무덤을 쓰게 하였다. 당시에는 경복궁 누각에서도 보이는 자리였다. 이성계가 경복궁에서 신덕왕후의 무덤을 바라보고 그리워했다는 말이 되겠지” - 이방원은 신덕왕후를 싫어했나? “이성계가 사망하자 이방원은 신덕왕후 무덤에 있던 석물들을 모두 들어냈다. 그리고 그 석물들로 청계천이 시작되는 현재의 동아일보 앞에 해정교를 지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전부 신덕왕후의 무덤에 있던 석물들을 밟고 가게 하였다.” - 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켰나? “신덕왕후가 사망하자 방원은 제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무사들을 동원하여 방석을 죽이고, 정도전은 이성계가 보는 앞에서 직접 죽였다. 그리고 스스로 왕좌에 올랐다.” - 선생이 집필한 대하드라마 조산왕조실록에 정도전이 나오는 부분은? “조선왕조실록의 첫 부분이 ‘추동궁 마마’이다. 추동궁은 개경의 한 동네이고, 추동궁 마마는 이방원의 부인을 지칭했다.” - 선생이 쓰신 드라마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정도전은 어느 정도 나오나 “드라마 ‘추동궁 마마’는 조선왕조 건국의 주역을 이방원으로 설정했다. 이 드라마 이전까지는 한국의 역사학계에서나 국민들의 머릿속에서나 태종 이방원은 그냥 하나의 왕에 불과했다. 그런데 내 드라마가 이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나는 실록 등 고증한 자료들, 즉 사실에 입각하여 태종의 성격과 행적을 재구성했다. 우리 역사학계에서 태종을 사람으로 만든 장본인은 바로 나다. 태종은 어떤 면에서는 이성계보다도 더 조선 건국의 주역이다. 내 드라마의 주인공은 태종이었다. 정도전은 단역으로 나왔다.” - 정도전을 좀 더 비중있게 다를 수도 있었을 텐데... “정도전을 좀 더 쓰고 싶었다. 정도전의 자료는 삼봉집뿐이었다. 실록이나 삼봉집이나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어렵다. 실록을 열심히 읽어가며 태종에 인간의 모습을 입힌 것도 대단한 일이라고 자부한다.” - 이방원과 정도전의 관계는? "이방원은 하륜(河崙, 1347 ~ 1416)의 소개로 정도전을 알게 된다. 정도전이 없는 조선 건국은 생각하기 어렵다. 조선의 근간을 이룬 법전이 경국대전이다. 이는 성종 때 완성되었지만 초본은 정도전이 작성하였다. 이방원 같은 인물이 요즘 말로 하면 쿠데타를 하고 나라를 세우는 데에는 천재적인 이론가가 필요하다. 정도전은 바로 그 역할을 한 사람이다.“ - 정도전을 알아본 하륜도 더 대단한 인물 아닌가? “조선 왕조 초기에는 하륜만한 명물이 없다. 우선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했는데 개경 사람들이 인정을 안했다. 그래서 천도하려 했다. 처음에는 계룡산 신도안으로 수도를 이전하려고 전국의 석수장이 대장장이를 불러 기본공사를 시작했다. 이 때 하륜이 그곳은 물이 없어 도읍이 될 수 없다고 간언하여 공사가 중단되었다. 하륜은 한양이 적당한 곳이라 해서 서강 주변, 현재의 서강대 홍익대 자리에 터를 잡았다. 나중에 무악대사가 도읍은 한강 부근으로 해야 한다고 해서 경복궁으로 되었다. 하륜도 대학자였다. 대학자들은 관상도 잘 본다. 하륜이 이방원의 장인 민씨에게 사위를 데려와 보라고 해서 만난 일이 있다. 즉각 제왕지상임을 알아보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방원의 목숨을 두 번씩이나 구해준 사람도 하륜이었다. 이방원이 방석을 죽이고 왕이 되자 이성계는 상심하여 함흥으로 갔다. 방원이 왕위에 올랐지만 아버지가 함흥에 가 있으니 왕 노릇을 제대로 하기 어려웠다. 귀환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내면 다 활로 쏴 죽였다. 그래서 한번 가면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두고 함흥차사라는 말이 나왔다. 이성계는 태종의 간청에 따라 귀환하긴 했다. 그러나 그는 도중에 태종을 죽이려고 하였다. 처음에는 마중나온 태종을 활로 쏴 죽이려 하였다. 이 때 하륜이 태종에게 천막 기둥을 굵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옆에 있으라고 간언하였다. 이성계가 멀리서 태종을 겨냥하고 활을 쏘았는데 화살은 이방원의 옆에 세워진 굵은 기둥에 박혔다. 아버지의 화살을 겨우 피하게 된 것이다. 그 다음 잔치가 벌어졌는데 방원이 술잔을 올리는 순서였다. 하륜은 술잔은 내시가 올려도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내시가 이성계에게 술잔을 올리자, 이성계는 품안에서 철퇴를 꺼내 잔칫상을 내리쳤다. 방원이 술잔을 올릴 때 쳐죽이려 준비한 철퇴였다. 그런데 내시가 술잔을 올리자 죽이지 못했던 것이다. 이성계는 “네 놈은 하늘이 넨 명(命)이다”라고 탄식하였다.“ - 수양대군이 집권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던 한명회와 정도전을 비교한다면... “한명회의 스승인 유방선(柳方善)은 ‘내 제자들 가운데에는 서거정, 한명회, 권람이 으뜸’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남겼다. 한명회는 책사 이미지가 강하다. 반면에 정도전은 학자이다. 정치인으로서는 한명회가 예감을 가지고 정치를 했다면, 정도전은 논리를 가지거 정치를 했다고나 할까...” - 정도전의 최후에 대해 아쉬운 점은 “정도전이 이방원의 편에 섰다면 손자까지도 영의정을 했을 것이다. 정치인은 항상 줄을 잘 서야 한다.”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을 통해 오늘의 한국을 읽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조선경국전>, 정도전 지음, 한영우 옮김, 올재클래식스(2012) KBS에서 주말에 방송하는 사극 <정도전>을 재미있게 보고 있다. 오래간만에 만나는 정통사극인데다가, 한때 나의 로망이었던 정도전을 다룬 드라마여서 첫 회부터 본방 사수하고 있다 (내가 첫 회부터 드라마를 본방 사수하는 건 아주 드문 일이다). ‘정도전’을 다룬 드라마여서 보기 시작했는데, 요즘은 ‘정도전’은 보이지 않고 권신 ‘이인임’만 보이고 있다. 전에 드라마 <선덕여왕>을 할 때에는 “<선덕여왕>이라고 쓰고 <여걸 미실>이라고 읽는다”는 말이 돌았었다. <정도전>은 “<정도전>이라고 쓰고 <간웅 이인임>이라고 읽는다”라고 해야 할 판이다. 지난 주 일요일 이인임 역을 맡은 배우 박영규씨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좋아했다. <정도전>을 보면서 고려말의 역사와 정도전의 삶과 사상을 반추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도전의 전기로는 조유식의 <정도전을 위한 변명>을 오래 전에 읽은 적이 있었고, 한동안은 정도전 관련 논문들도 많이 찾아서 읽었다. 근래 드라마의 인기를 타고 정도전을 다룬 전기와 소설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그런 데 눈길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꺼내든 책이 재작년에 올재클래식스에서 나온 <조선경국전>이었다. <조선경국전>은 쉽게 말해서 조선의 헌법 초안(草案)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이 자신이 생각하는 나라의 모습과 제도를 이 안에 담았다. 정도전을 얘기할 때는 반드시 등장하는, 그의 대표적인 저서다. 솔직히 <조선경국전>을 처음 몇 장 읽으면서 느낀 감정은 ‘실망감’이었다. ‘정도전의 정치철학과 경륜을 담은 명저’라고 알고 있었는데, 무미건조했다. 제도에 대한 설명은 중국 주나라 이래 역대 왕조의 제도들과 고려의 제도, 그리고 개국 초 아직 정비가 끝나지 않은 조선의 제도를 풀이하는 데 그친 것 같았다. 간혹 드러나는 민본주의 정치철학도 <맹자> 등 유가(儒家)의 사상을 반복하는 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법률의 초안이라는 것이 재미 있어봐야 얼마나 재미있겠는가? 그래도 책을 읽어나가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재미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정도전의 정치철학, 고려말 권문세가의 횡포와 민생 파탄, 그리고 오늘날에도 유효한 국가운영의 원리 등이 군데군데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예컨대 “총재(冢宰. 재상)가 훌륭한 사람이 등용되면 육전(六典)이 잘 거행되고 모든 직책이 잘 수행된다. 그러므로 인주(人主)의 직책은 한 사람의 재상과 정사를 의논하는 것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 대목에서는 후일 태종 이방원과 갈등을 빚다가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재상중심체제에 대한 정도전의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토지제도가 붕괴되면서 호강자(豪强者)가 남의 토지를 겸병하여 부자는 밭고랑이 서로 줄을 잇댈 만큼 토지가 많아지고 가난한 자는 송곳 꽂을 땅도 갖지 못하게 되어 부자의 땅을 차경(借耕)하게 되었다.... 국가에서는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하고서 그 이득을 차지하지 못하니 백성은 더욱 곤궁해지고 나라는 더욱 가난해졌다” “토지제도의 문란이 더욱 심해지면서 세력가들은 서로 토지를 빼앗아서, 한 사람이 경작하는 토지의 주인이 혹은 7,8명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상하가 서로 이(利)를 다투고, 일어나 힘을 다투면서 서로 빼앗으니 화란이 이에 따라 일어나게 되고, 마침내는 나라가 망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라고 한 대목은 드라마 <정도전>에서도 많이 그려진, 고려말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여기서 ‘양극화’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경제민주화’의 논리를 찾을 지도 모르겠다. “임금이나 재상은 수많은 사람들이 다투어 관리가 되려는 마음을 이겨내지 못하여, 저 사람에게서 벼슬을 빼앗아 이 사람에게 주고, 아침에 벼슬을 주었다가 저녁에 파직하는 등 헛되이 구차하고 고식적인 방법으로 계책을 삼는 데 여가가 없으니 재지 기간이 오래되고 안 되었는지는 따질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비록 현명하고 지혜로운 인사가 있다 하더라도 어찌 자신의 재주를 마음껏 펴서 일의 공적을 세울 수가 있겠는가?”라고 한 대목도 눈길을 끈다. 1987년 소위 민주화 이후 되풀이 되어 온, 대선 캠프 관련자들을 공기업 등에 낙하산 인사로 내려 보내는 일, 1년이 멀다하고 장관을 갈아 치는 일 등이 오버랩되지 않는가? “통치자가 백성으로부터 수취하는 것이 큰 만큼 통치자가 자기를 부양해 주는 백성에 대한 보답도 또한 무거운 것이다”라는 대목은 참 인상적이다. 한 마디로 정부나 정치인들은 납세자인 국민 귀한 줄 알고, 거두어간 세금을 제대로 쓰고, 그에 상응하는 서비스를 국민에게 제공해줘야 한다는 얘기다. 600여년전 봉건정치가도 알았던 이원리를 지금의 위정자들은 얼마나 마음에 새기고 있을까? “현자로서 천록(天祿)을 타먹는 자는 마땅히 천직을 잘 수행할 것을 생각해야 옳은 일이며, 천록만 타 먹고 일을 게을리 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라는 말은 공무원, 정치인들 월급값 하라는 얘기다. “국용(國用)을 쓰는 데 있어서 반드시 양입위출(量入爲出. 수입을 기초로 하여 지출을 행함)의 원칙을 지켜서 헛되이 소비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라고 한 대목은 나라빚 지지 말고 균형재정을 달성해야 한다는 요구다. 나라빚 1000조원 시대에 새삼 가슴에 와 닿는 얘기 아닌가? “의창(義倉)의 곡식을 출납할 때에는 급한 사람만을 구제하여 부유한 사람이 혜택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하며, 사실을 확실하게 하여 원액(元額)을 축나지 않게 함으로써 이 좋은 법이 무너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라는 말은 복지제도 운영의 대원칙을 제시하는 것으로 읽힌다. 경제적 능력을 갖춘 사람들까지도 나랏돈 들여 복지혜택을 제공하는 ‘보편적 복지’보다는 꼭 필요한 사람에게 한정하는 ‘선택적 복지’가 바람직하고, 부정하게 복지혜택을 받은 이가 없도록 하며, 과도한 복지로 인해 재정에 부담이 가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해석되지 않는가? 사실 고려말 조선초의 정치상황을 다시 이해하게 되면서 내가 품고 있던 정도전에 대한 로망은 많이 사라졌다. 예컨대 정도전이 주장했던 재상중심체제라는 것이 과연 당시 조선의 현실에 적실한 것이었을까? 정도전을 제거한 태종이 군권(君權) 우위의 체제를 수립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후일 결국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가 됐다. 하지만 당시 조선에게 필요한 것은 절대군주제를 통해 국력을 조직화하고 근대국가로 나가는 것 아니었을까? 정도전에 대한 높은 평가는, 군부 출신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권위주의정권에 대한 국사학계의 반감의 소산은 아니었을까? 특히 정도전이 구상했던 재상중심체제를 의원내각제에 비견하는 것은 억지와 무지의 소산 아닐까?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나의 관심은 정도전에서 현실주의 정치인 태종 이방원에게로 옮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도전은 여전히 매력적인 인물로 내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것은 시대의 모순에 대한 그의 치열한 고민에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고민에 그치지 않고 그는 결국 이성계의 무력과 결탁해 역성혁명이라는 비상수단을 통해 그 시대의 숙제를 풀어냈다. 우리는 언필칭 민주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말끝마다 ‘국민’을 앞세우는 이 시대의 정치인들 가운데, 정도전처럼 치열하게 사는 이가 있는가? 신문 정치면만 펼치면 답답한 오늘, 그래서 정도전이 가슴에 와 닿는다. 그래서 주말이면 나는 <정도전>을 본다. 비록 조재현이 연기하는 ‘386세대 같은 정도전’ 은 별로지만 말이다. (((삼봉 정도전))) 조선왕조 창업의 숙명적 맞수 정도전과 하륜 역사인물 재조명 (신동아 97. 11) 태조 이성계를 도왔던 정도전. 태종 이방원을 도왔던 하륜. 이 두 사람은 고려시대 유학자 이색의 문하생이면서도 끝내 목숨까지 빼앗는 정적이 되었다. 이들의 출신 배경과 학문,그리고 개혁정책을 재조명한다. 金 九 鎭 홍익대 교수·동양사 ----------------------------------------------------------- 일찍이 정도전(鄭道傳)은 『한(漢)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장량(張良)을 등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 고조를 이용한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한나라를 세울 때에 일등공신 장량이 유방을 만나서 항우(項羽)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한 고사를 인용하여, 나라를 창업할 때에는 임금이 신하를 발탁해서 쓸 수도 있으나, 신하가 오히려 임금이 될 만한 사람을 찾아서 같이 나라를 세울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정도전은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 왕조를 세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만약 정도전이란 인물이 없었다면, 이성계는 결코 조선 왕조를 세우지 못했을 것이다. 정도전은 공민왕이 살아 있을 때까지는 자기의 힘으로 쓰러져가는 고려왕조를 일으켜 세우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다. 그러나 공민왕이 돌아간 뒤에 자기의 주장을 펴다가, 도리어 실권자 이인임(李仁任) 등의 미움을 사서 9년 동안 전라도 나주와 경상도 영주·단양 등지에서 유배, 혹은 유랑생활을 했다.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초라한 초가에서 살기도 하고, 가난한 농부에게서 밥을 얻어 먹기도 하고, 손수 쟁기를 잡고 밭을 갈기도 했다. 이처럼 어려운 생활을 할 때에 아내 최씨와 정도전이 주고받은 편지가 『삼봉집(三峰集)』의 「가난(家難)」에 실려 있다. 이 편지를 보면, 당시 정도전의 생활이 얼마나 어렵고, 또 터무니 없는 구설수에 올랐는지를 알 수 있다. 아내 최씨는 이렇게 불평했다. 『당신은 평상시에 부지런히 글을 읽느라고 아침에 밥이 끓는지 저녁에 죽이 끓는지를 알지도 못하시니, 집안 형편이 어려워 곳간이 텅 비어서 한 톨의 식량도 없었습니다. 방 안에 가득한 아이들이 춥다고 보채고 배고프다고 울었으나, 제가 끼니를 도맡아서 그때 그때 꾸려나가면서도, 오직 당신이 독실하게 공부하여 뒷날에 입신양명(立身揚名)하시면, 처자(妻子)들을 남이 우러러 보도록 만들고, 가문의 영광을 가져오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끝내 나라의 법을 어겨서 이름이 욕되고 행적이 깎이어, 몸은 남쪽 지방에 귀양가서 지독한 풍토병을 앓으시고, 형제들은 쓰러져 가문(家門)이 여지없이 망하니,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 것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현인(賢人), 군자(君子)라는 것이 진실로 이러한 것입니까?』 정도전이 아내에게 답장을 쓰기를, 『당신의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나에게 친구들이 있어서 그 정의가 형제보다 나았으나, 내가 패망한 것을 보고서 그들은 뜬구름처럼 흩어져버렸습니다. 그들이 나를 걱정하지 않는 것은 본래 권력으로 맺어진 것이지 은의로 맺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부부의 도리는 한번 맺어지면 일생토록 변하지 않는 것이니, 당신이 나를 원망하는 것은 나를 사랑해서이지, 미워해서가 아닐 것입니다. 또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과 같은데, 이러한 이치는 쓸데없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이 천성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당신이 집안을 걱정하는 것과 내가 나라를 근심하는 것이 어찌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각기 자기가 맡은 직분을 다할 뿐입니다. 사람의 성공과 실패, 이익과 손해, 영예와 치욕, 그리고 잘하고 못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지, 사람에게 달린 것이 아닌데, 그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라고 했다. 이 편지를 보면, 당시 정도전이 얼마나 가난에 쪼들리고, 또 홀로 낙담하고 절망했던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이성계 찾아간 정도전 그러나 나이 40대가 되자, 정도전은 가만히 앉아서 현실에 절망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자기의 운명을 개척해 나갔다. 그가 42세가 되던 1383년(우왕 9년) 가을에 정도전은 함주(함흥)에 있던 동북면 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이성계(李成桂)의 군영(軍營)을 찾아갔다. 말하자면 자신의 힘만으로는 개혁에 한계성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에, 당시 왜구를 소탕하여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받던 이성계의 힘을 빌려서 나라를 개혁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성계의 군영으로 찾아간 정도전은 이성계 군영의 지휘 체계가 엄격하고, 군사 조직이 질서정연한 것을 보고, 매우 감탄했다. 『참으로 훌륭합니다. 이만한 군대를 가지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하니, 이성계는 『그게 무슨 말인가?』 하고 물었다. 정도전은 짐짓 핑계대기를 『이만한 군대라면 동남방의 근심거리인 왜구를 물리칠 수 있다는 뜻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때 그는 군영 앞에 서 있는 늙은 소나무 한 그루를 보고, 이성계에게 시를 한 수 지어서 바치겠다고 청했다. 그는 즉석에서 나무를 하얗게 깎아서 그 위에 시를 썼다. 『아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 [滄茫歲月一株松] 몇 만겹 푸른 산 속에 자랐도다. [生長靑山幾萬重] 잘 있다가 다음해에 서로 만나 볼 수 있을는지? [好在他年相見否] 인간세상 굽어보다가 곧 큰 발자취를 남기리니[人間俯仰便陳踵]』 이 시는 이성계를 늙은 소나무에 비유하여 읊은 것이다. 앞으로 때가 되면, 이성계는 천명(天命)에 따라 인간 세상을 구원하러 나서야 하며, 또 자기와 손을 잡고 큰 일을 하여 인간 세상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길 것이라고 은근히 부추기고 있다. 1383년(우왕 9년) 8월에 정도전은 「변방을 편안하게 하는 방책(安邊之策)」이라 하여 국방에 관한 문제를 이성계에게 건의했다고 하는데, 정도전이 함주의 군영을 찾아갔던 까닭은 이러한 자신의 아이디어를 이성계에게 진언(進言)하기 위한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때 이성계는 정도전이 제시한 계책을 기꺼이 받아들인 것 같다. 그 이듬해인 1384년(우왕 10년) 여름에 정도전은 이성계의 막료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정도전은 이성계와 인간관계를 돈독하게 맺게 되었으며, 이 때부터 정도전은 이성계를 섬겨서 그가 죽을 때까지 변함없는 충성을 다했다. 당시 정도전은 자기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막강한 군사의 힘이라는 보호막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모시고 큰 일을 도모할 사람으로서 이성계라는 인물을 선택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조선왕조의 창업을 위하여 한쪽은 지략으로써, 한쪽은 군사의 힘으로써 서로 협력했던 것이다. 풍수지리 밝았던 하륜 하륜(河倫)은 1365년(공민왕 14년) 겨우 19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했다. 그러나 1368년(공민왕 17년)에 감찰 규정(監察糾正)이 되어, 당시의 집권자 신돈(辛旽)의 문객(門客)을 규탄하다가 신돈의 미움을 받아 파직됐다. 이때 그의 외삼촌 강회백(姜淮伯)이 위로하기를, 『너는 장래에 재상이 될만한 인물이니, 결코 시골에 묻혀서 살지는 않을 것이다』고 했다. 그가 42세가 되던 1388년(우왕 14년)에 최영(崔塋)이 철령위(鐵嶺衛) 문제로 군사를 일으켜 명(明)나라 요동(遼東)을 정벌하려고 했다. 하륜은 이를 반대하다가 양주(襄州)로 귀양을 갔다. 그러나 이성계 일파에 의한 위화도(威化島) 회군(回軍)이 성공하자 그는 곧 귀양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우왕(禑王)이 폐위되고 그의 아들 창왕(昌王)이 옹립된 직후인 1388년(창왕 1년) 여흥(여주)에 유폐되었던 우왕은 김저(金佇) 일파와 모의하여 이성계를 암살하려고 계획했다. 이 사건이 발각되자 하륜은 이색(李穡) 이숭인(李崇仁) 권근(權近) 등과 같이 우왕을 지지하는 유학자 일파로 간주되어 또 유배를 당했다. 이처럼 하륜은 고려 말엽의 유학자로서 이색 정몽주(鄭夢周) 정도전 등과 함께 친명파(親明派)에 속했으나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 일파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그가 46세가 되던 1392년에 조선이 건국되었는데 이때부터 정도전이 권력을 잡고 전성기를 누렸으나 하륜은 언제나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나서 지방의 관찰사와 부사 같은 한직에 머물렀다. 그는 조선왕조를 세우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정도전 남은(南誾) 등의 개국공신파에게 견제당하여, 중앙정계에서 자기의 역량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현실의 어려움을 타파하기 위하여 하륜은 풍수지리학을 통해서 여러번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하륜은 이색의 문생(門生)으로서 정도전과 함께 정통 유학을 공부한 사람이었으나,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과 관상학(觀相學) 등의 잡설(雜說)에도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불교와 도참설(圖讖說)을 배척하고 정통 유학의 이론만을 고집하던 정도전과 다른 점이었다. 당시 정통 유학자들은 이러한 잡설을 배격했다. 그러나 하륜은 이러한 잡설에까지 정통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의 사상은 고루한 유학자와는 달리 현실성과 다양성을 지녔다고 할 수도 있다. 1393년(태조 2년) 3월에 나라에서 계룡산(鷄龍山)으로 천도(遷都)하려고 하자, 하륜은 계룡산의 형세를 비운(悲運)이 닥쳐올 흉한 땅이라고 주장하여 천도 계획을 중지시켰다. 이리하여 하륜은 풍수학에 일가견이 있는 인물로 인정을 받아 권력의 핵심에 접근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하륜은 다시 한양(漢陽)의 무악(毋岳)이 지리설에 맞는 길지(吉地)라고 추천하고 이곳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주장했으나, 실권자 정도전과 조준(趙浚) 등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무악(毋岳)은 지금 서울의 신촌 일대를 말한다. 하륜은 끝까지 무악이 가장 좋은 명당이라고 주장했으나, 그를 지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려 인종(仁宗) 때에 묘청(妙淸)이 서경(西京, 평양)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다가 김부식(金富軾) 등 유학자들의 반대로 좌절된 것과 같았다. 중 묘청은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으나 당시의 하륜은 그러한 힘도 없었다. 아마 이러한 좌절이 그로 하여금 정안대군(靖安大君) 이방원(李芳遠)에게 접근하게 만들었던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이방원 만남 간청한 하륜 하륜과 이방원의 만남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하륜은 사람의 관상을 잘 보았기 때문에, 처음에 이방원을 보고서 장차 크게 될 인물인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방원의 장인 민제(閔霽)를 만나서 간청하기를 『내가 사람의 관상을 많이 보았으나 공의 둘째 사위만한 인물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한번 그를 만나보기를 원합니다』고 했다. 민제는 사위 이방원에게 권유하기를 『하륜이라는 사람이 대군을 꼭 한번 뵙고자 하니, 한번 그를 만나보도록 하시오』라고 했다. 이리하여 이방원과 하륜의 만남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가 사실이라면 이것은 하륜이 이방원을 만나보기 위해서 꾸며낸 계략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당시 여러 왕자 가운데 가장 야망이 크고, 머리가 뛰어났던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리라는 것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도전과 하륜은 이렇듯 출세의 기회를 포착하는 데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 또 두 사람에게는 남들보다 뛰어난 아이디어도 있었다. 만약 하륜의 지모(智謀)가 없었더라면 이방원은 왕위에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륜은 두 차례 왕자의 난을 실질적으로 계획하고 지휘한 인물이다.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서 정도전과 남은 일당을 불의에 습격하여 죽이고, 세자 이방번과 이방석을 제거했다. 또 제2차 왕자의 난에서도 박포(朴苞) 일당을 죽이고, 회안대군(懷安大君) 이방간(李芳幹) 부자를 유배시켰다. 이방원을 왕위에 올리기 위한 준비 작업이 그의 손에 의하여 추진되었던 것이다. 옛날부터 전해 오는 속설(俗說)에도 하륜은 살꽂이(箭串) 다리에서 태종 이방원의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제1, 2차 왕자의 난 이후 함흥에 가서 머물던 태조 이성계가 무학(無學) 대사 등의 간곡한 건의에 따라 서울로 돌아오던 날 일어났던 사건이었다. 태종 이방원은 살꽂이 다리까지 마중을 나가서 부왕을 맞이했다. 이때 하륜이 태종에게 건의하기를 『태상왕(太上王, 태조 이성계)의 노기가 아직 풀리지 아니했을 터이니, 막사 차일(遮日, 천막)의 중간지주(支柱)를 아주 굵은 나무로 만들도록 하소서』라고 했다. 태종 이방원은 하륜의 말대로 아름드리 큰 나무로 차일 지주를 세웠다. 태조 이성계가 아들 태종을 보자마자 노기충천하여 활을 잡고 마중 나오는 아들을 향하여 화살을 쏘았다. 태종은 황급히 차일의 지주 뒤로 몸을 피하여 그 위기를 넘기고, 날아온 화살은 차일의 지주에 꽂혔다. 이것을 본 태조는 크게 웃으면서 『모두가 하늘의 뜻이다』 하고 단념했다. 지금 남아 있는「살꽂이」라는 이름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정몽주와 절친했던 정도전 고려 말에 태어난 정몽주(1337∼1392년) 정도전(1342∼1398년) 하륜(1347∼1416년) 세 사람의 출생연도를 보면 나이가 각기 5년씩 차이가 난다. 이색의 문하에서 공부할 때에 정도전보다 5년 선배였던 정몽주는 정도전을 항상 동생처럼 이끌어 주고, 성리학의 심오한 세계를 깨우쳐 주었다. 하륜도 이색의 문생(門生)이었는데, 정몽주와는 10년의 나이 차이가 있었으므로 정몽주를 무척 어려워 했다. 하륜은 원래 정도전과는 친숙하지 않았던 것 같고 오히려 권근(1352∼1409년)과 가까이 지냈는데, 하륜은 권근보다 나이가 다섯살 위였다. 정몽주가 1392년에 비명에 죽고 조선왕조가 개국되자 정도전의 전성시대가 열리게 되었으며, 1398년에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정도전이 비명 횡사하자 하륜의 전성시대가 오게 되었다. 정도전은 자가 종지(宗之)이고 본관이 경상도 봉화(奉化)인데, 아버지 정운경(鄭云敬)과 어머니 우씨(禹氏) 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연도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으나, 태조 5년(1396년)에 그의 나이 55세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출생연도는 1342년이 틀림없다. 당시 본가는 영주(榮州)에 있었지만 그는 외가가 있던 단양(丹陽) 삼봉(三峰)에서 태어났다. 그러므로서 그의 호가 삼봉이 됐으며, 그의 유저로서 『삼봉집(三峰集)』이 남아 있다. 그의 아버지 정운경은 고려 말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3품의 형부상서·밀직제학(密直提學) 등의 벼슬을 지냈다. 정운경은 이색의 아버지 이곡(李穀)과 가까운 사이였으므로, 정도전은 어려서부터 유명한 유학자 이색의 문하에 들어가서 성리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그 문하의 젊은 유학자들과 교우할 수가 있었다. 정도전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머리가 명석했다고 한다.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 이숭인(李崇仁) 이존오(李存吾) 김구용(金九容) 김제안(金齊顔) 박의중(朴宜中) 윤소종(尹紹宗) 등과 친구가 되어 쉬지 않고 유학을 공부하여 높은 학식을 쌓아나갔다. 당시 이색의 문하에서 정도전의 위치를 보면 경학에서는 정몽주 권근 등과 비길 만큼 심오한 경지에 도달했으며, 문장에서는 이숭인 등과 앞뒤를 다툴 만큼 내용이 호방하고 글이 유려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문장이 제일이라고 추켜올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숭인과의 경쟁의식이 조선왕조가 건국된 뒤에 그를 참혹하게 죽이는 원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1362년(공민왕 11년) 10월, 약관 21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1363년(공민왕 12년)에 충주사록(忠州司錄)에 임명되고, 1364년(공민왕 13년)에 전교주부(典校主簿)에 제수되고, 1365년(공민왕 14년)에 통례문(通禮門) 지후(祗侯)에 전보되었다. 그의 나이 25세가 되던 1366년(공민왕 15년)에 부친상과 모친상을 연달아 당하여 고향 영주에 내려가서 3년동안 여묘(廬墓)살이를 하면서 부모의 무덤을 지켰다. 그후 그의 나이 29세가 되던 1370년(공민왕 19년) 여름에 성균관(成均館) 박사(博士)에 임명되어 비로소 마음에 맞는 벼슬을 얻게 되었다. 그때 이색이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을 겸임하고, 김구용 정몽주 박상충(朴尙衷) 박의중 이숭인 등이 교관(敎官)을 맡았는데, 이들이 정도전을 추천하여 박사에 선임되었다고 한다. 정도전은 매일 명륜당(明倫堂)에 나가 앉아서 유생(儒生)들에게 경서를 강의하고 토론하여 배우는 사람들로 하여금 성리학의 심오한 원리를 스스로 깨닫게 했다. 이때부터 고려의 성리학이 비로소 크게 발전하게 됐다고 한다. 정도전과 정몽주의 절친한 교우관계를 나타내는 일화가 하나 있다. 정몽주가 정도전에게 『맹자(孟子)』 한권을 선물로 주었는데, 정도전은 매일 그 『맹자』를 한장씩, 혹은 반장씩 읽고 철저히 연구하여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평상시에 정도전은 정몽주를 존경하고 그의 학풍을 추종했다. 후일 정몽주가 죽은 후에, 정도전은 그의 유학체계를 조선왕조에 계승시키려고 노력했으며, 가끔씩 자기만이 정몽주의 심오한 유학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려 말의 혼란기에 나라와 백성을 구원하는 방법을 둘러싸고 서로 의견을 달리하면서 정도전과 정몽주의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정몽주는 유학의 보수파로서 정통 본류를 형성하여 고려왕조를 지키려고 애썼고, 정도전은 유학의 좌파로서 개혁을 추진하여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고 노력했다. 또 정도전의 혈통 문제를 시비하는 과정에 우현보(禹玄寶)와 이숭인, 김진양 등과도 사이가 극도로 나빠졌다. 당시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하던 젊은 유학자들은 대개 고려 말엽 권문세가의 자제들이었다. 그러나 정도전은 그의 어머니 우씨(禹氏)가 우현보의 집안이었는데 그 혈통에 천인의 피가 섞였다는 사실을 우현보의 세 아들 우홍수(禹洪壽)등이 세상에 퍼뜨렸다. 집안 혈통이 미천하다고 하여 정도전은 동문수학하던 젊은 유학자들로부터 멸시와 냉대를 받았다. 정도전이 새로운 관직에 임명될 때마다 사헌부의 관리들은 임명장에 서경(署經, 서명)하기를 거부하고 정도전을 괴롭혔다. 이러한 시비로 말미암아 정도전은 이색 문하의 다정했던 친구들과도 거리가 멀어졌다. 그 결과 고민을 거듭하던 정도전은 신흥 군벌인 이성계의 군영을 찾아가서 그의 막료로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되었던 것이다. 친명(親明) 주장하다 유배 당해 고려 말에 정도전의 일관된 주장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친명정책(親明政策)을 고수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우왕 창왕의 왕위계승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이색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한 젊은 유학자들은 몽고의 원(元)나라를 배척하고 중국의 명(明)나라와 가까이 하는 공민왕(恭愍王)의 배원정책과 친명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공민왕이 죽고 난 다음 정권을 잡은 이인임 경복흥(慶復興) 등이 친원정책을 취하자 정몽주를 비롯한 젊은 신진 유학자들은 이에 반대했다. 1375년(우왕 1년)에 몽고 본토로 쫓겨간 북원(北元)의 사신을 맞아들이는 문제로 인하여 정도전은 배원정책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다가 친원파 이인임 등의 미움을 사서 전라도 나주군 회진현(會津縣) 거평부곡(居平部曲)으로 귀양갔다. 이때 정도전의 나이 34세였다. 그는 이곳에서 3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는데, 소박한 농민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농촌의 비참한 생활을 체험했다. 거평의 사람들은 매일같이 술과 음식을 가지고 와서 정도전을 위로했고, 그가 거처할 초가를 짓는 일도 도와주었다. 정도전은 그 농민들의 온정에 감격했을 뿐만 아니라, 뜻밖에도 농민들이 유식한 데 놀랐다고 회고했다. 그가 36세 되던 1377년(우왕 3년)에 귀양지가 고향땅으로 옮겨져서 영주와 단양의 삼봉 사이를 오가면서 4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 뒤에 거주지 제한이 풀려서 서울 삼각산 아래 초가를 짓고 「삼봉재(三峰齎)」라고 이름하고 제자들을 가르쳤고, 또 다시 부평의 남촌(南村)으로 거처를 옮겨 후학을 가르쳤다. 이처럼 정도전은 친명정책을 주장하다가 친원파의 미움을 사서 9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면서 30대를 보내고 40대를 맞았다. 1388년(우왕 14년)에 위화도 회군에 성공하여 이성계 일파가 우왕을 축출하고 최영 등의 친원파를 숙청하게 되자 정도전은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다. 위화도 회군에는 정도전이 직접 관여한 것 같지는 않다. 우왕을 몰아내고 창왕을 세울 때에 정도전과 윤소종은 창왕을 세우는 것을 반대하고, 왕씨 중에서 다른 사람을 골라서 왕으로 세울 것을 주장했다. 그들이 신돈의 피를 받았고, 고려 왕씨의 혈통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화도 회군 때에 좌군 도통사(左軍都統使)로서 이성계에게 협력한 조민수(曺敏修)가 창왕을 세울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리하여 당시 명망이 높은 대유학자 이색에게 그 의견을 물었는데, 이색은 그의 제자 정도전과 윤소종의 주장을 묵살하고 『마땅히 전왕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고 판정했다. 목은(牧隱) 이색 같은 사람이 『우왕 창왕이 공민왕의 후손이다』라고 단정한 것을 보면 정도전과 윤소종이 『그들은 왕씨가 아니고 신씨이다』라고 주장한 것은 날조된 논리임에 틀림없다. 고려말 위기 모면한 정도전 그러나 1388년(창왕 1년) 11월에 정도전의 주장에 의하여 이성계 심덕부(沈德符) 지용기(池湧奇) 정몽주 등이 흥국사(興國寺)에 모여서 의논하기를 『우왕과 창왕은 왕씨가 아니므로 마땅히 가짜 왕씨를 폐지하고 진짜 왕씨를 임금으로 세워야 한다』 하고 창왕을 강화도로 추방하고 공양왕(恭讓王)을 맞아들였다. 이리하여 정도전의 계획대로 고려의 왕실이 혈통문제로 말미암아 점차 권위를 잃어가고, 그 대신 새로운 왕조의 창업을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도전의 주장은 나중에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할 때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씨왕조 건국을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우왕과 창왕을 신씨(辛氏)로 몰아붙여서 세가(世家)의 고려 제왕(諸王)에서 제외하여 열전(列傳)에 편입했던 것이다. 1392년(공양왕 4년) 3월에 이성계가 해주(海州)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져서 중상을 입었다. 이성계가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정몽주 김진양(金震陽) 등 유학자들은 『이성계가 지금 말에서 떨어져 위독하니 마땅히 먼저 그 오른팔인 조준과 정도전 등을 제거한 다음이라야 이성계 제거를 도모할 수가 있다』 하고, 대사헌 강회백(姜淮伯) 등에게 정도전 등을 처형하도록 상소하게 했다. 간관(諫官) 김진양도 공양왕에게 아뢰기를 『옛날 사람들이 말하기를 「풀을 뽑을 때에는 뿌리까지 뽑지 않으면 결국 다시 싹이 나오며, 악(惡)을 없앨 때에는 그 근본을 없애지 않으면 그 악은 더 자란다」고 했습니다. 조준과 정도전은 악의 뿌리이고, 남은과 윤소종 등은 악의 뿌리를 북돋워서 덩굴로 자라게 하는 사람들입니다』라면서, 정도전 남은 조준 윤소종 등을 처형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공양왕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먼저 남은 등을 심문한 다음에 조준과 정도전이 관련이 있으면 그때에 가서 그들을 아울러 심문하는 것이 좋겠다고 대답했다. 이리하여 정도전은 위기를 모면하여 보주(예천)에 귀양가는 데에 그쳤다. 정몽주 등이 이성계 일파를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셈이다. 그 직후 정몽주는 이방원 일파에 의해 선죽교(善竹橋)에서 살해 당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1392년 7월에 정도전, 남은, 조준 등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마침내 조선왕조를 건국하게 되었다. 이때에 그의 나이가 51세였다. 정도전은 1등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서 봉화백(奉化伯)에 봉해졌다. 그는 개국공신 중 태조 이성계로부터 가장 높은 신임을 받았던 사람으로서, 문하시랑 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도평의사사 판사(都評議使司 判事) 호조(戶曹)판사 등의 문관직과 의흥친군위 절제사(義興親軍衛 節制使)와 같은 무관직을 아울러 맡아서 실권을 잡았다. 조선 도읍 정한 정도전 1394년(태조 3년) 10월에 서울을 한양으로 옮길 때에 정도전은 하륜의 주장을 물리치고 도성이 들어설 자리를 오늘날 서울의 4대문 안으로 정했다. 그 다음해 10월에 새 서울 한양의 궁궐과 종묘가 완성되자, 정도전이 새로 지은 궁전과 누각 이름을 붙였다. 오늘날도 사용되는 경복궁(景福宮) 사정전(思政殿) 근정전(勤政殿) 등의 이름은 그 당시에 정도전이 지은 것이다. 또 도성(都城)이 완성되자 동서남북의 크고 작은 성문 이름도 모두 정도전이 지었는데,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 동대문은 흥인문(興仁門),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북대문은 숙청문(肅淸門)이라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도성 안 5부(部) 49방(坊)의 이름도 모두 그가 지었다. 이처럼 조선왕조 창업 당시에 크고 작은 일들은 모두 정도전의 손을 거쳐 이루어졌다. 1393년(태조 2년) 7월에 정도전은 동북면 도안무사(東北面都安撫使)가 되어 동북면(함경도) 일대에 살던 토착 여진족을 조선의 편호(編戶)로 편입시켜 우리 백성으로 동화시켰으며, 1397년(태조 6년) 12월에 동북면 도선무사(東北面都宣撫使)로 나가서 동북 지방의 성보(城堡)를 수축하고 주군(州郡)의 경계를 정했다. 고려 때에는 여진족이 동북면 일대에 내려와서 농경생활을 했다. 이성계는 함주(함흥)의 대토호로서 그 세력이 동북면 일대 여러 여진족을 통솔할 만큼 막강했다. 이성계는 길주(吉州) 출신인 여진족 대토호 이지란(李之蘭, 퉁두란)과 손을 잡고 동북면 일대 여러 여진족이 조선의 판도 안에 들어오게 했다. 이리하여 조선이 건국하자 정도전을 도안무사로 보내 토착 여진족을 조선의 호적에 올리고, 그들에게 농토를 주어 농사를 짓도록 생존권을 보장해 주었으며 우리나라 백성들과 여진족의 혼인을 장려했다. 4년 뒤에 정도전은 다시 도선무사로 나가서 동북면의 주(州) 군(郡) 현(縣)의 구획을 정하고 성(城)과 보(堡)를 쌓아 함경도 일대의 땅을 우리나라의 국토로 완전히 편입하는 작업을 했다. 후일 세종시대에 김종서(金宗瑞)가 개척한 6진(鎭)의 땅은 수복하지 못한 두만강 하류 일부 지역이었던 것이다. 1396년(태조 5년)부터 1398년(태조 7년) 정도전이 죽을 때까지 중국의 명(明)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조선에서 보낸 외교 문서를 트집삼아 정도전을 중국으로 압송하라고 강요했다. 이리하여 정도전의 입지가 정부 안에서 아주 어려워졌고, 이 틈을 타서 정적들은 그를 제거할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일찍이 정도전은 사신으로 명나라에 세 번이나 갔다 온 적이 있었다. 1384년(우왕 10년) 여름에 정몽주가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갈 적에 정도전은 서장관(書狀官)으로 수행했는데, 당시 명나라 수도였던 남경(南京)에서 명 태조를 만나 우왕의 왕위 계승을 허락받고 공민왕의 시호를 받았다. 제1차 왕자의 난 1390년(공양왕 2년) 6월에 정도전은 「정당문학」으로서 성절사가 되어 명 태조를 만나서, 윤이(尹彛)·이초(李初)가 이성계를 명나라에 고발한 사건을 변명했다. 정도전은 명 태조에게 황제의 사신을 조선에 보내 이 사실을 직접 조사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때는 위화도 회군 직후였으므로 명 태조는 요동 정벌군을 돌이킨 이성계를 두둔했고 주원장은 정도전을 위로하기를 『윤이와 이초가 그대 나라의 국사를 어지럽히려고 하는 것을 알고 짐은 처음부터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벌써 그들의 죄를 다스렸으니 그대 나라에서 다시 무엇을 근심하겠는가?』라고 했다. 이리하여 윤이·이초의 무고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또 조선이 건국한 직후인 1392년(태조 1년) 겨울에 정도전은 하정사(賀正使)로서 명나라에 가서 명 태조를 만나 하례를 드렸다. 이처럼 명 태조는 정도전을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었으므로 정도전의 사람됨을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면 1396년에 명 태조 주원장이 조선에서 보낸 외교문서를 트집잡아 그 문서를 작성한 자로 정도전을 지목하여 명나라로 압송하도록 강요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첫째는 여진족의 송환 문제 등 양국의 다섯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조선이 명나라의 요구에 따르지 않고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며, 둘째는 조선왕조의 실권자인 정도전을 강제로 압송하여 그를 볼모로 잡아두고 조선을 협박하려는 야비한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중국으로 오가던 외교문서는 황제에게 보내는 표문(表文)과 황태자에게 보내는 전문(箋文)의 두 종류가 있었는데 그 표전문에 명나라를 모욕하는 내용과 경박한 문투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표전문 사건」이라고 부른다. 실제 문제의 표문을 지은 사람은 정탁(鄭擢)이었고, 교정한 사람은 정총(鄭摠)과 권근이었다. 그러므로 정도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으나 명나라에서는 정도전을 「화(禍)의 근원」이라고까지 몰아붙이면서 중국으로 송환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처럼 명 태조의 무리한 압력을 받은 태조 이성계는 『그가 나를 어린아이로 아는가?』 하고 크게 화를 냈다. 조선에서는 이러한 치욕을 참다 못하여 명나라의 요동(遼東)을 정벌할 계획을 추진하게 되었다. 정도전은 진도(陣圖)를 만들어 지휘관과 각 도의 군사를 훈련시키고 지방의 성보(城堡)를 축성하고 군량미를 저축했다. 그러나 요동을 정벌하는 것은 사실상 무리한 일이었다. 일찍이 최영의 요동 출병에 반대하여 위화도 회군을 감행한 태조 이성계가 아니었던가? 그가 다시 요동을 정벌한다는 것은 조선왕조에 반대하던 절의파(節義派)를 설득하기에는 명분이 약했다. 항상 정도전의 독주에 반감을 가졌던 조준은 『새로 창업한 나라로서 명분이 없는 군사를 가볍게 일으키는 것은 매우 옳지 않습니다』라며 반대했다. 이리하여 요동을 정벌하는 계획은 일단 중지되었다. 1397년(태조 6년)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정총, 김약항(金若恒), 노인도(盧仁度) 세 사람이 명 태조의 노여움을 사서 명나라에서 형벌을 받고 무참하게 죽은 사건까지 일어났다. 그해 3월에 예문관 학사 권근 등이 자진해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자기가 표전문을 지은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표전문 내용을 해명하는 한편, 여러 편의 시를 지어 명 태조의 환심을 사고 중국에 문명(文名)을 크게 떨치기도 했다. 그러나 양국 사이에 정도전의 송환 여부는 표전문 사건을 해결하는 중대한 문제로 남게 되었다. 정도전 반대파인 이방원 일파는 표전문 사건으로 양국 관계가 악화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하륜은 정도전을 중국으로 송환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명나라와 악화된 관계를 우호적으로 개선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이방원 일파가 정도전, 남은 등을 제거하기 위하여 거사한 것이 바로 제1차 왕자의 난이었다. 제1차 왕자의 난은 단순히 세자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라기보다는 대명관계를 개선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혁명파의 실권자끼리 벌인 세력다툼이었다. 1398년(태조 7년) 8월에 이방원 일파의 하륜과 이숙번이 동원한 군사들의 갑작스런 습격을 받고, 정도전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자기 집에서 붙잡혀 무참히 죽었다. 그때 정도전의 나이 57세였다. 그와 함께 화를 당한 사람은 남은 심효생(沈孝生), 박위(朴威)등이었고, 정도전의 두 아들도 같이 참변을 당했다. 하륜은 고려대토호 출신 하륜은 진주(晉州)출신으로서 자가 대림(大臨)이고 호가 호정(浩亭), 시호가 문충공(文忠公)이었다. 그는 1357년(충목왕 3년)에 아버지 하윤린(河允麟)과 어머니 강씨(姜氏) 사이에 태어났다. 하윤린은 진주 하씨로서 지숙주군사(知肅州郡事), 순흥부사(順興府使)를 지냈고, 종2품의 봉익대부(奉翊大夫)에까지 올랐다. 하륜의 외가는 진주 강씨로서 진주의 토착세력이었는데 그의 외삼촌 강회백은 고려 말에 대사헌을 지냈다. 하륜의 친가와 외가는 모두 진주의 대토호(大土豪)로서 고려 때에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벼슬한 사람도 있었다. 하륜은 어릴 때부터 남달리 영민하여 10세에 서당에 나가서 글을 배우고, 14세에 이미 감시(監試)에 합격하여 정식으로 진주 향교에 입학했다. 그는 진주 향교에서 수학한지 5년만인 1365년(공민왕 14년)에 갓 19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때 과거의 좌주(座主)는 이색과 이인복(李仁復) 두사람이었다. 과거를 볼 때에 시험관을 좌주라고 하고 과거의 응시생을 문생(門生)이라 하여 평생토록 문생은 좌주를 스승으로 섬기고 좌주는 문생을 문하생으로 돌보았다. 하륜과 이색은 이러한 관계에 있었으므로 하륜은 이색의 문생으로 이색 문하의 젊은 유학자 정몽주, 박상충, 김구용, 이숭인, 박의중 등과 교유했다. 또 자기보다 5년 아래인 권근과도 깊은 교우 관계를 맺었고, 이색과 이인복 두사람을 평생토록 스승으로 섬겼다. 하륜의 『호정집(浩亭集)』을 보면, 『이숭인이 이색, 정몽주 두 선생과 이집(李集)을 초대하여 조그만 술자리를 베풀고 그 앞에 화분에 심은 매화를 갖다 놓고 매화에 대한 시(詩)의 연구(聯句)를 지었는데, 나도 또한 그 말석에 앉아서 그분들이 지은 훌륭한 문장의 시구를 듣게 되었다. (중략) 얼마 안가서 이집이 병으로 돌아갔고 그 뒤에 10여년 사이에 정몽주, 이숭인이 연달아 세상을 떠났고, 이색 선생 또한 세상을 떠나갔으므로 나만 홀로 남게 되었다. 지금 와서 그들과 같이 교우하던 즐거운 때를 생각하면 아득하기가 마치 꿈속의 일과 같다. 아아! 이 슬픔을 어찌 이길 수가 있겠는가?』라고 했다. 이 글로 미루어 보면, 후일 발간된 이색, 정몽주, 이집, 김구용의 유고집에 하륜이 서문을 쓸 정도로 가까이 지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색의 유학 사상은 정몽주, 이숭인 등이 고려왕조에 충절을 지키다가 죽음으로써 단절된 것이 아니라, 정도전, 하륜, 권근 등에 의하여 조선왕조의 정통 유학으로 계승되었던 것이다. 계룡산 도읍 반대한 하륜 좌주 이인복은 하륜의 사람됨을 보고 그 아우 이인미(李仁美)의 딸과 혼인케 해 조카 사위로 삼았다. 하륜의 처가는 성주 이씨로서 이인복의 조부는 이조년(李兆年)이었다. 이조년의 손자 중에 이인임과 같은 권신(權臣)이 나오면서 성주 이씨는 고려 말에 극성기를 맞이했다. 하륜의 나이 21세가 되던 1367년(공민왕 16년)에 처음으로 춘추관에 임명되었고, 1369년 (공민왕 18년)에 감찰 규정이 되었다. 25세가 되던 1371년 (공민왕 20년)에 지영주군사(知榮州郡事)로 나가서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므로, 안렴사 김주(金湊)가 그의 치적을 제일 높이 평가하여 보고한 결과, 1372년(공민왕 21년)에 중앙에 소환되어 고공 좌랑(考功佐郞)에 임명되었다. 그뒤에 그의 나이 29세가 되던 1375년(우왕 1년)에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고, 1377년(우왕 3년)에 전법 총랑(典法摠郞)이 되었다. 그의 나이 33세가 되던 1379년(우왕 5년)에 3품의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드디어 당상관으로 승진했다. 그 뒤에 36세가 되던 1382년(우왕 8년)에 우부대언(右副代言)이 되고, 1384년 (우왕 10년)에 밀직제학이 되었다. 하륜의 나이 42세가 되던 1388년(우왕 14년) 최영이 요동정벌을 단행할 때에 하륜은 이를 극력 반대하다가 양주로 쫓겨났다. 이리하여 4년동안 양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 성공한 후 소환되어, 45세가 되던 1391년(공양왕 3년)에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 조선 개국 후인 1393년(태조 2년)에 경기좌도 관찰사(京畿左道 觀察使)로 전임되고, 51세가 되던 1397년 (태조 6년)에 계림부사(鷄林府使)가 되고, 1398년 (태조 7년)에 충청도 도관찰사(忠淸道都觀察使)로 임용되었다. 이처럼 하륜은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날 때까지 거의 중앙정계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지방 수령관으로 떠돌아다녔다. 1393년(태조 2년) 12월에 하륜이 반대하지 않았다면 충청도 계룡산이 새로운 도읍지로 결정될 뻔했다. 태조 이성계는 무학(無學) 대사를 데리고 계룡산의 지세를 직접 살펴본 다음에 이곳으로 천도하기로 결정하고, 그 터를 닦는 공사가 이미 시작되었다. 그로나 하륜은 태조에게 상언(上言)하기를 『도읍지는 마땅히 나라의 중앙에 두어야 하는데 계룡산이란 땅은 너무 남쪽에 치우쳐 있어서, 동북면, 서북면과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교통이 매우 불편할 것입니다. 또 신이 일찍이 아버지를 장사시키면서 풍수학에 대한 여러 서적들을 대강 읽어보았는데, 지금 계룡산의 지세를 본다면 산은 서북쪽으로 내려오고, 물은 동남쪽으로 흘러가니, 물이 장생(長生)하는 방향을 깨뜨리고 있으므로 앞으로 쇠퇴하여 패망할 땅이니, 도읍지를 건설할 땅으로는 결코 적당하지 못합니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태조는 마음이 개운치 않아 권중화(權仲和) 정도전 등을 불러서 이것을 다시 조사해서 보고하게 했다. 그 결과 하륜의 주장대로 계룡산은 길지가 되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계룡산으로 천도하려는 당초의 계획은 중지되었다. 그 뒤에 조선이 서울을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길 적에 한양을 넓은 땅 가운데 하륜은 무악(毋岳, 신촌일대)이 길지라고 주장하여 이곳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했으나, 정도전은 무악이 너무 비좁다고 반대하고, 오늘날의 서울의 4대문 안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했다. 이때 하륜은 주장하기를 『한양의 무악은 지리설에도 맞는 길지이니 도읍을 옮기려면 이곳이 제일 좋습니다』하고 무악을 명당이라고 고집하였다. 이리하여 조정에서 권중화 조준을 보내 그 지세를 조사하게 했는데, 그들이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한양의 무악이 비록 명당이라고 하더라도 그 땅은 좁아서 도읍을 옮길 수 업습니다』라고 반대하였다. 이방원 배경으로 중앙정계 진출 태조 이성계는 직접 한양을 돌아보고 정도전이 주장한 땅을 새 도읍지로 정했다. 원래 이곳은 고려 숙종(肅宗)때에 남경이었는데, 고려 때에 만들어 놓은 터가 너무 좁았기 때문에 그 남쪽으로 터를 더 넓혀서 잡았던 것이다. 한양 천도를 계기로 하륜은 정도전과 한 차례 충돌했으나 여지없이 패배하였다. 하륜은 정도전 남은 일당과 대적하기 위해서 정안군 이방원을 찾아가서 그의 참모가 되었던 것 같다. 하륜은 이방원의 배경 아래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정도전 일파와 대립하게 되었다. 1396년(태조 5년) 12월에 예문 춘추관 학사가 되고, 1398년(태조 7년) 9월에 정당 문학에 임명되었다. 그 사이에 박자안(朴子安) 사건에 연루돼 수원에 유배당했으나, 이방원이 구원하여 유배생활에서 풀려나 충청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1396년에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 표전문 사건이 발생하여 양국 사이가 극도로 나빠지자,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을 명나라로 압송할지 여부를 묻기 위하여 비밀히 중긴들을 모아놓고 그 의견을 물었다. 서로 얼굴을 쳐다보고 말이 없었는데, 정도전 일파는 주장하기를 『정도전을 꼭 보낼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이때에 하륜이 홀로 주장하기를 『지금 나라가 건국 초창기를 당하여 여러 가지 제도가 아직 정비되지 못했는데 중국으로부터 이와 같은 문책을 받는 것은 매우 곤란한 일이니 그들의 요구에 따라서 정도전을 압송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고 양국의 관계를 정상화시키려면 정도전 한 사람의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역설하였다. 그의 주장은 정도전 일파와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던 이방원 일파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었다. 이방원의 입장에서 보면 양국의 비꼬인 외교관계를 한시 빨리 풀기 위해서 당사자인 정도전을 명나라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실제로는 세자 이방석의 후견인을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을 명나라로 보내지 않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도전- 남은 일파와 이방원-하륜 일파가 다시 한번 팽팽히 대립하게 되었다. 특히 정도전은 하륜에게 극도의 원한을 품게 되었다. 정도전 제거를 위한 하륜의 계획 이처럼 나라가 곤란해지자 1396년 7월에 태조 이성계는 하륜을 계품사(啓稟使)로 임명하여 명나라로 가서 정도전이 중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입조할 수 없다고 변명하게 하였다. 계품사란 외교문제가 생겼을 때에 그 문제를 자세히 설명하고 서로 오해를 풀도록 특별히 보내던 사신이었다. 이때에 표전문을 지은 정탁, 그리고 그것을 교정한 권근과 노인도 등을 같이 보냈는데 하륜으로 하여금 명 태조에게 전후의 사정을 자세히 설명하게 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정도전의 반대파인 하륜을 계품사로 임명한 까닭은 무었인가? 중국은 조선의 사정을 정확히 알고 있었으므로 하륜이 정도전의 정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므로 그가 가서 설명을 한다면 명 태조가 오해를 적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에서 왕위에 오르는 사람은 중국의 허락을 반드시 받아야만 하였다. 이방원 일파가 중국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려고 애쓴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당시 이방원 일파가 중국의 집권자 사이에 어떤 교감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성계 일파는 중국 고나계를 원만하게 처리하지 못했던 결과 명나라의 고명(誥命, 왕위 즉위 승인장)과 옥새를 받지도 못하고 있던 차에 표전문 사건이 발생하여 최악의 관계로 치닫게 되었던 것이다. 하륜은 표전문 작성 경위를 해명하고 정도전의 입장을 변명하여 명태조의 양해를 얻어내고 그해 11월에 귀국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계비(繼妃) 강씨(姜氏) 소생의 제8왕자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고 정도전과 남은 등으로 하여금 보호하게 했다. 이에 대하여 한씨(韓氏) 소생의 여러 왕자가 불평을 품었는데, 특히 정안대군 이방원이 가장 심했다. 정도전과 알력이 심했던 하륜은 정안대군에게 먼저 군사를 일으켜서 그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느날 하륜이 이방원의 집으로 찾아가니 이방원이 주위 사람들을 물리치고 세자문제를 해결할 방책을 물었다. 하륜이 말하기를 『이것은 다른 방법은 없고, 다만 선수를 쳐서 정도전 무리를 쳐없애는 것뿐입니다』하니 이방원은 말없이 듣기만 했다고 한다. 1398년(태조 7년) 7월에 하륜이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기에 앞서 송별연이 열렸는데 이방원도 그 자리에 참석하였다. 연회석에서 여러번 술잔이 돌았는데 하륜은 술에 취한체 하면서 갑자기 술주정을 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일부러 주안상을 뒤엎어 음식들이 이방원의 옷자락에 엎질러지게 하였다. 이방원이 화가 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나가자 하륜도 그 뒤를 따라 나갔다. 이방원의 집에 이르러 하륜은 이방원에게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그리고 나서 다급히 말하기를 『대군, 일이 급합니다. 장차 이 나라에서 오늘 밤 술상이 엎질러졌던 것과 같은 사건이 생길 것 입니다』하고 이방원에게 난을 일으키도록 재촉하였다. 그러자 이방원은 하륜을 안내하여 함께 밀실로 들어가서 난을 꾸미게 되었고 이것이 제 1차 왕자의 난이다. 그리고 하륜은 이방원에게 부탁하기를 『저는 왕명을 받고 곧 임지에 가야 할 몸입니다. 안산군수(安山郡守) 이숙번(李叔蕃)이 멀지 않아 정릉(貞陵)으로 이장할 때에 동원할 역군들을 거느리고 서울에 도착할 테니 그 사람을 불러서 큰일을 맡기십시오. 저는 이 길로 내려가서 진천(鎭川) 지방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일이 벌어지거든 곧 저를 불러 주십시오』라고 했다. 그 직후 이방원은 거사를 준비했다. 이방원의 심복으로 군사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이숙번은 이때에 하륜이 소개했던 것이다. 그해 8월에 이숙번이 역군들을 거느리고 상경했다. 계획한대로 이숙번은 먼저 군기감(軍器監)을 점령, 무기를 탈취하여 역군들을 무장시킨 뒤 궁궐과 도성을 철통같이 포위했다. 남문(南門)밖에 지휘본부가 마련되었는데 그 중앙에는 이방원이 앉고 그 옆에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고 한다. 그날 연락을 받고 서울로 급히 돌아온 하륜이 그 자리에 앉아서 거사를 직접 지휘했다. 마침내 반란군은 정도전의 소재를 찾아내 포위했다. 담장을 넘어 옆집으로 도망치는 정도전을 잡아서 무참하게 살해했다. 이처럼 정도전, 남은 일파는 아무런 낌새도 차리지 못하고 있다가 하륜 이숙번이 거느린 군사들의 습격을 받아 비명에 죽었다. 세자 이방석과 그의 형 이방번, 그리고 매형 이제(李濟)등도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 결과 세자의 자리는 제 2왕자 영안대군(永安大君) 이방과(李芳果)에게 넘어갔다. 하륜의 개혁정책 추진 1400년 (정종 2년) 1월에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하륜과 이숙번은 회안대군(懷安大君) 이방간(李芳幹) 부자를 체포하고 박포(朴苞)일당을 소탕하였다. 하륜은 이방원의 위치가 불안하다고 생각하여 여러 중신을 거느리고 정종에게 가서 이방원을 세자로 책봉하도록 강요했다. 정종은 어쩔 수 없이 이 제안을 받아들여 이방원을 세자로 삼았다가 그해 11월 왕위를 이방원에게 넘겨주었다. 이리하여 1401년 태종 이방원이 왕위에 즉위했는데, 이 때에 하륜의 나이 55세였다. 그 이후 하륜은 태종의 가장 아끼는 신하로서 1416년(태종 16년) 11월에 70세의 나이로 공무를 수행하다가 정평(定平)에서 갑자기 병사할 때까지 태종 시대의 모든 제도를 개혁하고 기반을 다져나갔다. 하륜은 고려의 제도를 거의 모두 새로운 제도로 바꾸었다. 하륜이 보필하던 태종시대는 고려의 잔재를 말끔히 청산하고 새로운 제도로 개혁한 시기였다. 이 시대야말로 조선왕조 5백년의 터전을 마련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정치적 관제(官制)를 개혁하여 의정부(議政府)와 6조(六曹)를 만들고 6조에 사무를 분장했으며, 백관의 녹과(祿科)를 정하고 관등에 따라 관리들의 관복(冠服)을 제정하였다. 관리를 임용하는 전선법(銓選法)과 그 치적을 평가하여 승진, 또는 좌천시키는 고적 출척법(考積黜陟法)을 만들어 시행하고, 70세에 정년퇴직하는 70세 치사법(致仕法)을 만들어 스스로 실천하였다. 또 각 도 군, 현의 구획을 다시 정하고 고을 이름을 바꾸었는데 예를 들면 완주를 전주로, 계림을 경주로, 서북면을 평안도로, 동북면을 영안도(永安道)로 바꾸었다. 경제적으로 각 도의 전지를 다시 측량하여 조세와 공부(貢賦)를 상세히 정했다. 특히 종이 화폐인 저화(楮貨)를 통용시키려고 저화 통행법을 만들었으나 민간에서는 여전히 물물 교환하거나 포화(布貨: 삼베)를 사용했다. 사회적으로 여말선초에 많은 노비들이 해방되어 양인(良人) 신분을 얻으려고 했기 때문에 노비에 대한 소송 사건이 상당히 많았는데, 노비변정도감(奴婢辨定都監)을 두어서 그 신분을 가려내도록 하고 공사 노비의 신공(身貢)을 제정하였다. 이리하여 그 신분을 증명하는 호패(號牌)를 만들어 모든 사람에게 착용케 하고 승려들에게는 도첩(度牒)을 발급했다. 이처럼 조선조 5백년 동안의 기틀은 하륜의 손을 거쳐서 만들어졌다. 태종시대 18년동안 숱하게 많은 공신들이 제거되어으나 그는 한번도 권력의 핵심에서 물러난 적이 없었다. 태종이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의 집안을 몰락시킬 적에 왕후의 동생 민무회(閔無悔)등을 감싸다가 같이 연루될 뻔했다. 또 오랫동안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가끔 뇌물 시비에 휘말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몸가짐이 한결같이 성실하고 거짓이 없었으며, 친척에게는 어질게 대하고 친구들에게는 믿음성이 있었다. 인재를 천거할 때에는 사람의 조그만 장점이라도 반드시 취하고 작은 허물은 덮어주었다. 그러므로 대인 관계가 원만하여 오랫동안 정계에 있었으나 정적이 없었다. 태종도 말하기를, 『하륜이 나에게 공이 있기 때문에 가볍게 그를 버릴 수가 없다』라며 끝까지 감싸 주었다. 그는 천성이 중후하고 온화하고 말수가 적었으며 위급한 일을 당해도 당황하는 빛이 없었다. 제 1,2차 왕자의 난을 치르면서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큰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특히 어려운 문제를 결단할 때에는 남이 자기를 헐뜯거나 비난한다고 하여 그 마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1396년부터 1398년 사이에 표전문 사건으로 정도전 일파와 다툴 때에도 정도전과 남은의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고, 그는 정도전을 압송해야 한다고 홀로 주장했다. 그는 소신을 가지고 행동하는 정치가였다. 1398년부터 1416년까지 19년동안 중앙 정계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네 차례나 정승을 지냈으나 항상 다른 사람보다 앞서 훌륭한 정책을 거침없이 태종에게 제시했다. 조정에 물러 나와서도 그는 조정에서 논의된 비밀을 어느 누구에게도 누설하지 않았다. 그는 집이나 옷이 사치하고 화려한 것을 싫어했다. 또 연회나 오락을 좋아하지 않고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가 죽자 태종은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철인(哲人)의 죽음은 나라의 불행이다. 이제부터 나라에서 큰일을 당하거나 어려운 문제를 결정할 적에 조금도 당황하는 빛이 없이 결단하여 나라를 편안한 반석 위에 둘 사람은 그대가 아니면 누가 있겠는가. 이것은 내가 몹시 애석히 여겨 마지않는 것이다. 특별히 예관(禮官)을 보내 영구(靈柩) 앞에 치제(致祭)하니 영혼이 있다면 이 제사를 흠향하도록 하라』라고 했다. 왕권 중심과 재상 중심 정도전과 하륜은 모두 조선왕조를 창업하는데 기여한 일등 공신들이었다.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를 도와서 조선왕조를 창업했고, 하륜은 태종 이방원을 도와서 조선왕조의 문물제도를 완성했다. 정도전과 하륜은 다 같이 고려말 유명한 이색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한 정통 유학자였다. 그러나 정도전은 고려왕조를 뒤엎고 새로운 왕조를 열었고, 하륜은 피비린내나는 양차 왕자의 난을 주도하여 왕권의 안정을 가져왔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들은 유학자로서 보수파에 반대하는 개혁파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고려말 이색과 정몽주의 유학사상이 이 두 사람을 통하여 조선왕조로 제대로 전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도전과 하륜은 조선 개국공신 가운데에서 서로 비교해서 평가해야 그 비중을 제대로 알 수가 있다. 정도전은 조선이 건국된 이래에 태조시대 7년동안 정권을 담당했고, 하륜은 태종시대에 17년 중요한 관직을 역임하면서 태종의 개혁정치를 주도했다. 이와 같은 두 사람의 개혁정치는 그들의 사상에서 보면 그 성격을 알 수 있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심기리편(心氣理篇)』 『경제문감(經濟文鑑)』『불씨잡변(佛氏雜辨)』등의 저술을 남겼다. 그는 민본사상에 입각해서 덕치를 베푸는 인정(仁政)을 주장했다. 민심은 천심인데 민심을 잃을 때는 혁명이 온다고 믿었다. 토지 사유를 억제하여 부자의 토지겸병을 막아서 가난한 농민을 보호하고, 부세는 1/10세를 표준으로 공정하게 부과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도전의 사상은 성리학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재상 중심제, 감찰제도 강화, 부국강병, 전제 개혁 등을 주장했다. 이처럼 그는 당시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또 주자학의 무신론에 입각하여 불교를 철저히 배척했지만, 불교의 종교적 기능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세속화하는 것을 방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고려의 역사를 최초로 정리하여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했으나 후일 몇차례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완전히 고쳐지고 말았다. 하륜은 조준이 편찬한 『경제육전(經濟六典)』을 수정 보완하여 『속육전(續六典)』을 완성했고 『경제육전(經濟六典)』의 내용을 충실히 보충하여 『원집상절(元集詳節)』과 『속집상절(續集祥節)』을 저술했다. 이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필요한 정치 경제 사회의 여러 가지 제도를 체계적으로 논한 것이다. 하륜은 정치적으로 최고의 통치자는 왕인만큼 덕을 닦는 것보다 절실한 것이 없고, 재상은 시정(時政)의 잘잘못과 생민(生民)들의 이해관계를 왕에게 제대로 전달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정도전의 재상 중심제와 다른 견해다. 이리하여 태종이 즉위한 직후인 1401년(태종 1년) 7월에 그는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할 것을 주장하여 민의(民意)를 상달할 수 있게 했다. 결국 정치는 민의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신문고 설치 주장 경제적으로 그는 국가의 백년 대계를 위해서 현재는 어렵더라도 앞으로 나라에서 반드시 필요한 일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실례로 그라 적극적으로 추진한 저화(楮貨)와 운하를 들 수 있다. 1401년(태종 1년) 4월에 사섬서(司贍署)를 두고 저화라는 지폐를 만들어 사용하게 했으나 백성들은 이것을 사용하기 싫어했다. 그는 저화 통행법을 만들어 포전을 금지하고 저화를 강제로 사용하게 했다. 그는 저화가 동전(銅錢)보다 훨씬 사용하기 편리한 화폐라 믿었다. 그러나 태종시대 이후 일반 민중은 저화를 위면하여 쓰지 않게 되었다. 또 충청도 지역에 운하를 파고 3남 지방에서 서울로 운송하는 물화를 바다로 통하지 않고 내지의 운하를 통해서 수송하려고 계획했다. 왜냐하면 물자를 운반하는 배가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서 전복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1413년 (태종 13년)8월에 순제(蓴堤)에 제방을 쌓고 운하를 건설할 것을 제안했다. 여러 차례 현지 조사를 했으나 워낙 큰 공사여서 수만명의 인력을 동원해야 했으므로 결국 실행하지 못했다. 만약 이 운하가 만들어졌다면, 우리나라도 중국처럼 남북을 잇는 대운하가 만들어져 역사적으로 남북을 잇는 대운하가 만들어져 역사적으로 남북 문화의 교류에 크게 이바지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1413년 7월에 그는 남대문 밖에서 용산강을 잇는 운하를 파자고 주장했다. 하륜은 역사에 많은 흥미를 갖고 『태조실록(太祖實錄)』 『편년 삼국사(編年三國史)』『고려사(高麗史)』『동국사략(東國史略)』등을 편찬했다. 그는 단군(檀君)을 나라의 조상으로 높이고 기자(箕子)와 같이 나라에서 제사를 받들자고 주장했다. 그는 정도전이 편찬한 역사 기록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정도전, 남은 일파의 치적을 깎아내리고, 이방원, 하륜 일파의 행위를 미화하고 합리화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밖에도 『사서절요(四書節要)』『동국략운(東國略韻)』 『비록촬요(秘錄撮要)』등을 편찬했는데 그가 유학의 경전뿐만이 아니라 운학(韻學), 음양지리 등 다방면에 두루 정통했음을 알 수가 있다. 조선왕조 5백년 동안 하륜은 경륜이 있는 정치가로 추앙받았으나 정도전은 나라에 반역한 역적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오히려 정도전의 개혁사상이 높이 평가받고 있다. 후세 사람들은 각자 그들이 처한 시대의 가치관에 따라 역사의 인물을 달리 평가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태종의 총애를 업고 하륜 운하 건설에 집착 [Why][이한우의 역사속의 WHY] 한양 재천도·청계천 공사 등 대형 사업 뚝심으로 밀어붙여 백성들 반발 우려로 운하는 무산 태종 10년(1410년) 10월 13일 태종은 느닷없이 "전국의 기생들을 없애라!"는 명을 내렸다. 아마도 세자의 기생 탐닉이 심해지니 그것을 원천적으로 막아보자는 발상이었던 것 같다. 이 황당한 명에 거의 모든 신하들이 경쟁적으로 "지당하신 분부"라고 맞장구를 쳤다. 오직 한 사람, 영의정 하륜(河崙 1347년 고려 충목왕 3년~1416년 태종 16년)만이 절대 불가하다고 맞섰다. 너무나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태종도 웃으며 자신의 기생 철폐안을 철회했다. 하륜에 대한 태종의 총애는 그만큼 깊었다. 태종과 하륜의 인연은 하륜의 계산된 도발로 맺어졌다. 성현의 '용재총화'가 전하는 일화다. 정도전의 미움을 받던 하륜이 충청도 관찰사로 발령을 받아 외지로 나가게 됐다. 하륜 집에서 환송연이 열렸을 때 불우한 시절을 보내고 있던 정안공 이방원도 그 자리에 참석했다. 이방원이 하륜에게 술을 부어주려는데 하륜이 취한 척하며 상을 엎어버렸다. 옷이 더러워진 이방원은 크게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하륜은 곧바로 "왕자에게 사죄를 해야겠다"며 자리에서 나와 이방원을 집까지 따라갔다. 이방원은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하륜은 곧 나라에 위태로운 환란이 있을 것이니 선수를 쳐야 한다고 아뢰었다. 제1차 왕자의 난은 이렇게 해서 곧바로 실행에 옮겨졌고 이후 태종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관상에 뛰어난 하륜이 일찍부터 이방원에게서 왕기(王氣)를 읽었기 때문이다. 하륜은 풍수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끝내 관철시키지는 못했지만 그는 한양 천도 및 모악산 궁궐수축론의 주창자였다. 태조가 지금의 경복궁 자리를 고수했지만 태종은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일단 수도를 개경으로 환도한 바 있다. 이때 하륜은 줄기차게 한양 재천도를 주장했고 궁궐도 지금의 연세대 인근 모악산 아래로 해야 한다고 보았다. 논란이 끝없이 이어지자 태종은 개경과 현재의 북악산 아래, 그리고 하륜이 내세우는 모악산 아래 등 3가지 안을 놓고서 동전점을 친다. 점이라고 할 것도 없고 각각에 대해 삼세번 동전을 던져 앞면이 세 번 중 두 번으로 가장 많이 나온 지금의 경복궁 자리에 본궁을 완성하고 한양으로 재천도키로 결정이 됐다. 하륜은 국운(國運)의 융성과 관련해 모악산 궁궐론이 관철되지 못한 것을 늘 아쉬워했다. 사실 태종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권력을 누린 '천하의 하륜'이었지만 그는 '운하'문제에서도 제대로 뜻을 펼치지 못했다. 태종 12년 지금의 청계천 공사를 관철한 하륜은 곧바로 충청도 태안군 순제라는 곳에 운하건설을 추진했다. 태안반도 주변은 암초가 많은 바다였기 때문에 고려 때부터 안전항해를 위해 반도를 가로지르는 운하건설이 여러 차례 추진됐던 곳이다. 조선이 들어서자 태조 이성계도 이곳에 운하건설을 검토했다. 그러나 현지를 돌아보고 온 중추원 지사 최유경이 "바위가 많아 갑자기 팔 수 없다"고 보고하는 바람에 무산된 바 있다. 그리고 이 때 하륜이 밀어붙여 3개월 만에 5000명의 병사들이 동원돼 태안반도를 가로지르는 소형 운하가 태종 13년 2월 완성됐다. 그런데 이에 대한 실록의 평은 부정적이다. "헛되이 민력(民力)만 썼지 반드시 이용되지 못하여 조운(漕運·배로 물건을 실어 나름)은 결국 통하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한 달 후 충청도 관찰사 이안우는 큰 배들은 제대로 통과하기 어려워 바닥이 평평한 소형 선박을 만들어 통과할 수밖에 없다는 보고를 올렸다. 이후 '순제 운하'는 수심 및 폭 확대를 둘러싸고 격론이 제기됐지만 백성들의 반발을 우려한 태종의 의중 때문에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다. 이런 논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륜은 태종 13년 7월 20일 이번에는 숭례문(일명 남대문)에서 용산까지 운하를 파서 배를 통하게 하자고 건의했다. 원래 지방에서 올라오던 공물이 용산에 집결했기 때문에 바로 숭례문 앞까지 조운선을 끌어들이자는 구상이었다. 다른 신하들도 하륜의 눈치를 보느라 모두 해볼 만한 사업이라고 동조했다. 그러나 태종은 숭례문에서 용산까지는 모래땅이라 운하를 파기에 적절치 않고 또 1만 명 이상의 백성을 동원해야 하는 대역사(大役事)라 곤란하다며 하륜의 안을 윤허하지 않았다. 결국 하륜의 다양한 국토개조 구상은 그의 머릿속에 머물러야 했다. 삼봉 정도전의 정치사상에 대한 연구 유학과 박사1기 나대용 목차 1. 서론 2. 정도전과 유교국가 조선의 500년 역사 3. 유교국가 건설의 초석 - 민본사상 4. 유교국가 건설의 기둥(1) - 혁명론 5. 유교국가 건설의 기둥(2) - 闢佛論 6. 유교국가 건설의 지붕(1) - 중앙집권적 재상중심론 7. 유교국가 건설의 지붕(2) - 관료선발제도, 교육 8. 결어 1. 서론 정도전은 조선의 개국공신으로서 조선의 건국이념과 정치, 경제제도를 만드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조선 500년 동안 정도전이 틀을 잡은 조선의 정치, 경제제도는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고 실천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정도전이 정비하고 만든 정치, 경제제도가 어떻게 500년의 세월 속에서도 굳건히 유지될 수 있었을까? 특히 조선조 정치제도에 나타난 정도전의 정치사상은 오늘날 민주화의 격랑 속에 시달리는 현대 한국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정도전의 근본 사상은 유학, 특히 주자학이다. 정도전은 중국의 주자학을 이용하여 조선조 건국의 틀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정도전의 업적은 전 세계를 통 털어서 전무후무한 선례를 남겼다고 생각한다. 불교는 고려 말기에도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조선 유학의 비조라고 불리는 정몽주 까지도 당시에 배불소(排佛疏)를 올린 글에서 ‘佛은 夷狄之敎이다. 無父無君, 潔身亂倫의 敎이다. 화복.윤회설이 무근하다.’는 등등일 뿐이고 참으로 이론적, 학술적으로 불교를 타도할 만한 논증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의 질긴 고리를 끊고 새로운 유교의 나라를 건설한 정도전은 조선유학사에서 제일 많은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되고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2. 정도전과 유교국가 조선의 500년 역사 정도전은 불교에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대부분의 당시 성리학자들처럼 불자들과도 많은 교류를 하고 있었다. 이런 정도전이 당시 융성하던 불교를 철저히 배척하고 중국에서도 전혀 전례가 없는 철저한 유교 국가를 건설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당시로서는 누구도 꿈꿀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정몽주로부터 길재,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로 이어지는 조선 성리학의 학통은 오히려 정도전의 유교국가 건설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그 만큼 많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즉 당시의 순수 성리학자들 조차도 철저한 유교국가의 건설이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정도전은 개인의 출세와 영화를 위하여 불가능한 유교국가의 건설을 억지로 조장하고 있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500년의 역사는 정도전의 판단 (철저한 유교국가의 건설)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아울러 정도전의 이러한 판단은 개인의 출세와 영화를 위해서 생각해 낸 작은 술수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또한 그의 판단은 국가의 500년 大計를 내다본 절묘한 선견지명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3. 유교국가 건설의 초석 - 민본사상 정도전은 여말의 철학, 정치, 경제의 혼란을 수습하는 길은 철저한 유교 국가를 건설하는 것에 있다고 확신했다. 이러한 확신은 정몽주를 비롯한 당대의 성리학자들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도전이 이들과 다른 점은 어떻게 누구와 철저한 유교 국가를 건설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이 서 있었다는 점에 있다. 정도전은 이성계가 철저한 유교국가의 신왕조를 열 적임자로 판단하였고 그 판단이 적중하였다는 것은 조선 500년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또한 정도전은 어떻게 철저한 유교 국가 건설의 초석을 놓을 것인가에 대한 판단도 이미 서 있었다. 그것은 유교의 핵심사상인 민본사상이다. 정도전은 <<조선 경국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저 군주는 국가에 의존하고, 국가는 민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민은 국가의 근본 인 동시에 군주의 하늘이다. 유교의 민본사상은 정도전에 의해서 ‘민은 군주의 하늘이다’라는 명확한 지침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군주가 백성을 하늘로 떠받드는 나라. 이런 나라의 군주를 聖君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민본사상의 구체적인 실천방법은 당연히 聖君만들기로 이어진다. 4. 유교국가 건설의 기둥(1) - 혁명론 ‘민은 군주의 하늘이다’라는 지침은 <<경국 대전>>에 그대로 옮겨졌는데, 군주의 입장에서 보면 이 지침은 그냥 보아 넘길 글귀가 아닐 것이다. 이 지침은 군주가 민을 하늘로 섬기지 않았을 때 언제든지 군주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지침은 조선왕조의 모든 군주가 명심하지 않을 수 없는 실질적인 하늘의 명령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도전은 이러한 내용을 <<조선 경국전>>에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人君의 지위는 존귀한 것이다. 그러나 .... 만일 천하만민의 민심을 얻지 못하면 크게 우려할 만한 일이 생긴다..... 민심을 얻으면 민은 군주에게 복종하지만, 민심을 얻지 못하면 민은 군주를 버린다. 군주가 통치하는 나라의 헌법에 ‘민은 군주의 하늘이다’, ‘민심을 얻지 못하면 민은 군주를 버린다’라는 내용이 적시되어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지 않나 생각한다. 특히 당대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보면 더욱 그렇다. 이런 헌법을 가지고 있는 조선을 과연 전제주의 국가로만 치부할 수 있는지 자못 의문이 든다. 정도전의 유교국가 건설은 유교의 민본사상과 혁명사상을 조선의 헌법에 명기함으로서 구체적 실현의 틀을 갖추게 된다. 5. 유교국가 건설의 기둥 (2) - 闢佛論 정도전은 <<心問天答>> <<心氣理篇>>과 <<佛氏雜辨>> 세 편의 논문으로 당시 성행하던 불교를 철학적으로 공격하였다. 정도전의 위 闢佛논문들에 대해서는 ‘철학적으로 볼 때 불교를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였으나, 사회, 정치혁명의 한 수단으로 볼 때는 시대적 요청으로서 불가피한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오늘날의 평가가 내려져 있다. 불교의 철학적 이론구조에 대한 평가가 오늘날에도 이러한 것을 보면, 고려 말기에는 불교철학이론에 대한 신뢰가 지금보다 훨씬 농도가 짙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예로 고려 말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이색은 불교를 공공연히 신봉하였고, 東方理學元祖로 추앙받던 정몽주마저도 斥佛에 온건적이었다. 태조 이성계를 비롯한 조선의 군주들도 불교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신봉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해 보면 조선이라는 철저한 유교국가의 건설은 정도전을 비롯한 소수의 闢佛論者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평가가 어찌하던 정도전의 위 闢佛논문들은 당시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인 듯 하다. 그 이유는 정도전의 闢佛논리가 ‘유불도 삼교를 원리적으로 파헤치어 유가의 천인성명, 이기오행의 철리로써 釋老 양가의 교의가 근본적으로 그릇된 것’이라 만인 앞에 설파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정도전의 이 闢佛論이 세상에 발표된 지 5백 수 십년이 지났지만 그의 이론을 시비하거나 비판한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오늘날에 와서 정도전의 벽불논리는 비판되고 있지만, 불교이론에 대한 이해는 오늘날보다 당시가 훨씬 더 깊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도전의 벽불논리가 당대에 비판받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벽불논리에 탁월한 철학적 기반이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불교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근거로 정도전이 벽불론을 주장했다는 오늘날의 연구는 다시 정밀히 연구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어쨋튼, 당대의 수많은 불교인들에 의해서도 반박되지 못할 정도의 깊이 있는 정도전의 벽불론은 혁명론과 더불어 유교국가 건설의 든든한 기둥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6. 유교국가 건설의 지붕(1) - 중앙집권적 재상중심론 정도전의 유교국가 건설은 중앙정부의 행정체제론과 관료선발제도에서 완성된다. 귀족이나 호족 등의 폐해가 심각했던 고려 말의 정치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철저히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중앙정부가 필요했다. 중앙정부의 수장은 군주이다. ‘군주는 종묘와 사직이 의지하여 돌아가는 곳이며 자손과 臣庶가 우러러 의뢰하는 존재’ 로서 국가의 상징이며 국민통합의 구심체인 ‘元首’이다. 따라서 군주는 가장 존귀하고 천하의 인민과 천하의 토지를 소유하는 막강한 권력자인 동시에 최대의 부의 소유자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군주의 이러한 막강한 권한은 실질적으로는 두 가지로 제한된다. 첫째는 ‘재상을 선택하는데 있다.’(人主之職, 在擇一相) 둘째는 ‘재상과 政事를 협의. 결정하는데 있다.’(人主之職, 在論一相) 그러나 政事를 협의하는데 있어서도 모든 문제를 재상과 협의. 처결하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문제에 관해서만 협의할 권한이 있는 것이며, 작은 일들은 재상의 독자적인 처리에 맡겨져야 한다. 이제 유교국가 건설의 초점은 어떤 사람이 재상이 되어야 하며, 그 재상은 어떻게 국정을 처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모아진다. 재상의 자질에 대해서 정도전은 <<경제문감>>(상) 재상에서 자세히 명기하고 있다. 재상의 권한과 국정처리 방식에 대해서는 <<조선 경국전>> (상) 치전과 <<경제문감>>(상) 재상에서 자세히 명기하고 있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유교국가 조선에 있어서 재상은 군주와 쌍벽을 이루는 실질적인 수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 여러 왕조들도 왕과 재상이라는 중앙행정체제를 유지했었다. 그러나 조선의 재상처럼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 받지는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역대 조선의 재상들이 실질적으로 권한을 행사했는지는 역사적 고증을 거쳐 연구되어야 할 것이나, 정도전의 이런 재상중심론이 조선의 헌법인 <<경국대전>>에 그대로 기록되었고, 조선이 議政府제도에 의해서 국정이 처리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재상중심론이 조선조 중앙행정체제의 이론적 중심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7. 유교국가 건설의 지붕(2) - 관료선발제도, 교육 정도전은 관료선발제도에 대해서 <<조선 경국전>> (상) 치전, 예전과 <<경제문감>>(하) 등에서 자세히 명기하고 있다. 정도전의 관료선발제도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眞儒에 의한 士. 官일치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周禮>>에서 취한 것이다. 眞儒에 의한 士. 官일치란 ‘잘 교육시킨 선비(士)를 관료로 뽑는다’는 것이다. 이때 교육의 전적인 내용은 유교이므로, ‘유교로 교육받아 유교의 근본원리를 진정으로 실천할 수 있는 자(眞儒)가 정치를 담당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입장’을 의미한다. 여기서 유교는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자학이다. 따라서 정도전은 주자학을 참된 인간 교육의 학문으로 확신하고 있었으며, 이런 참된 인간에 의해서 정치가 운영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정도전의 이와 같은 주자학에 대한 신뢰와 확신은 관료선발제도와 교육을 통해서 구체화되었다. 이것은 주자학이 관학화된 것을 의미한다. 조선조 500년의 세월동안 관학화된 주자학이 유지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주자학의 효용가치가 당대인들에 의해서 인정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즉 주자학은 조선을 이끌어가는 진정한 엘리트 양산이라는 사회적 역할을 충분히 해 낸 것으로 볼 수 있다. 8. 결어 정도전은 조선이라는 유교국가 건설의 설계자이자 현장지휘감독이었다. 즉 그는 유교의 근본원리를 충분히 이해함으로써 유교의 사회적 효용가치를 꿰뚫고 있었고, 이런 통찰력에 의해서 멸사봉공의 자세로 유교국가 건설에 임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周代이래로 한번도 현실화되지 못한 이상적인 유교국가(민본주의)를 건설코자 하였으며, 혁명론, 벽불론, 중앙집권적 재상중심론, 관료선발제도 등을 통해서 이를 완성할 수 있었다. 정도전의 유교국가 건설은 오늘날 많은 점을 시사해 주고 있다. 오늘날의 민주자본주의가 이상적인 체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점차 감소하는 추세에 있다. 그러나 민주자본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체제를 설득력있게 내 놓는 사람도 없다. 이런 상황은 고려 말기와 너무도 흡사하다. 즉 고려 말기에도 불교의 병폐를 직시하고 있었으나, 이를 일소하고 새로운 이상적 모델을 제시하고 실행하는 것은 누구도 하지 못하는 과업이었던 것이다. 정도전은 국가의 요체가 관료에 있다고 본 것이다. 어떻게 진정으로 민에 봉사하는 관료를 안정적으로 영입할 것인가? 이것은 인간을 참되게 육성할 수 있는 학문이 존재하고, 이 학문이 국가적으로 적극 교육됨으로서 가능하다. 불교는 그런 학문이 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 학문은 주자학이어야 한다는 것이 정도전의 판단이었고, 그 판단이 옳았다는 것은 조선조 500년이라는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민주자본주의체제의 진정한 문제점도 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체제하에서는 참된 인간 육성의 길이 막혀 있다는 데에 있다. 조선 500년 동안 관학으로서 인재를 양성해온 유교, 주자학이 오늘날 주목받아야 하는 근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유교, 주자학은 서양철학에 의해서 정당한 학문적 지위를 박탈당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유교, 주자학의 근본원리들은 오늘날의 서양 철학적 학문경향에 의해 대부분 비학문적 위치로 밀려 난 상태이다. 오늘날의 서양 철학적 학문경향은 눈으로 볼 수 있고, 납득할 수 있는 증명, 증거 없이는 진리도 없다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오늘날의 유교, 주자학은 서양철학의 근본경향과 일대 접전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서양철학과의 끈질긴 투쟁을 통해서 현대의 진정한 학문적 지위를 회복함으로서, 유교. 주자학은 자신의 진정한 가치 즉 참된 인간 육성의 유일한 길을 이 세상에 밝게 드리울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전기 정치 체재의 변화 조선 건국초에는 고려와 마찬가지로 재상들의 의결기구인 도평의사사가 정무를 관장했는데, 이것은 왕권강화를 추구하던 왕실의 반발을 낳았다. 왕자의 난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방원(李芳遠:뒤의 태종)은 개혁을 단행하여 1400년 도평의사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신설했으며, 1405년 의정부의 업무를 6조로 분할하고 전례가 있는 사무는 6조에서 스스로 재결하게 했다. 또한 1414년에는 6조직계제를 완성하여 6조가 각기 사무를 왕에게 직계하며, 왕의 명령을 직접 받아 시행하게 했고 논의할 일이 있으면 6조의 판서들이 서로 의논하여 보고하게 했다. 이것은 의정부의 구성원인 중신들의 권한을 대폭 약화시키는 조치였다. 그러나 왕의 정무가 지나치게 많아지고, 재상권의 반발도 강하여 1436년(세종 18)에는 의정부의 정무의결 기능이 부활되었다. 그러나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6조직계제가 부활했다. 이것이 〈경국대전〉에 이어지는데 형식상으로는 의정부 중심제로 되어 있으나 실제의 권한사항은 중요한 부분이 명문화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실제 운영상에서는 6조직계제가 관철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조선 왕조는 최고 합의기관인 의정부가 국가의 모든 업무를 처리하도록 하고, 6조는 이를 실행에 옮기도록 하는 의정부서사제를 채택하고 있다. 따라서 6조의 판서는 자신이 담당한 업무를 의정부에 보고하도록 되어 있다. 이 제도는 의정부의 권한이 강화되는 것으로 재상들이 왕권을 견제하는데 유용한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왕권을 강화할 필요를 느꼈던 태종과 세조는 의정부의 권한을 축소하기 위해 6조의 판서로 하여금 모든 업무를 국왕에게 직접 보고하도록 하는 6조 직계제를 실시하였다. 6조 판서로부터 업무에 관한 사항들이 보고되지 않음으로 인해 의정부는 그 기능이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이는 공신 계열의 재상권을 약화시키는 반면 왕권을 강화시킴으로써 국왕 중심의 집권 체제 정비를 가져왔다. 세조 때의 6조 직계제 부활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이후에도 《경국대전》상 의정부 중심체제가 확립되어 있었으나 실제 운영면에 있어서는 왕권의 강약과 결부되면서 왕과 재상간의 현실적인 역학관계에 따라서 의정부의 실제 기능은 그 때마다 차이가 있었다. 1. 정도전의 재상 중심 정치 체제 치전(治典)은 총재(塚宰)가 관장하는 것이다. 사도(司徒) 이하가 모두 총재의 소속이니, 교전 이하 또한 총재의 직책인 것이다. 총재에 그 훌륭한 사람을 얻으면 6전(六典)이 잘 거행되고 모든 직책이 잘 수행된다. 그러므로 ‘임금[人主]의 직책은 한 사람의 재상을 논정하는 데 있다’ 했으니, 바로 총재를 두고 한 말이다. 총재라는 것은 위로는 군부를 받들고 밑으로는 백관을 통솔하며 만민을 다스리는 것이니, 그 직책이 매우 큰 것이다. 또 임금의 자질에는 어리석은 자질도 있고 현명한 자질도 있으며 강력한 자질도 있고 유약한 자질도 있어서 한결같지 않으니, 총재는 임금의 아름다운 점은 순종하고 나쁜 점은 바로잡으며, 옳은 일은 받들고 옳지 않은 것은 막아서, 임금으로 하여금 大中의 지경에 들게 해야 한다. 그 러므로 ‘상(相)’이라 하니, 즉 보상(輔相)한다는 뜻이다. 백관은 제각기 직책이 다르고 만민은 제각기 직업이 다르니, 재상은 공평하게 해서 그들로 하여금 각기 그 적의함을 잃지 않도록 하고, 고르게 해서 그들로 하여금 각기 그 처소를 얻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재(宰)’라 하니, 즉 재제(宰制)한다는 뜻이다. 2. 태종의 6조직계제 내가 일찍이 송도(松都)에 있을 때 정부(政府)를 파하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지금까지 겨를이 없었다. 지난 겨울에 대간(臺諫)에서 작은 허물로 인하여 정부를 없앨 것을 청하였던 까닭에 윤허하지 않았었다. 지난번에 좌정승(左政丞)이 말하기를 ‘ 중조(中朝)에도 또한 승상부(丞相府)가 없으니, 마땅히 정부(政府)를 혁파해야 한다.’고 하였다. 내가 골똘히 생각해 보니, 모든 일이 내 한 몸에 모이면 진실로 재결(裁決)하기가 어렵겠으나, 그러나 이미 나라의 임금이 되어서 어찌 노고스러움을 피하겠느냐?" 3. 세종의 의정부서사제 처음에 임금이 정부(政府)의 권한이 무거운 것을 염려하여 이를 개혁할 생각이 있었으나 정중히 여겨 서둘지 않았는데, 이 때에 이르러 단행하여 정부(政府)의 관장하는 것은 오직 사대 문서(事大文書)와 무거운 죄수[重因]를 다시 안핵(按覈)하는 것뿐이었다. ​이제 비록 의정부(議政府)의 권한이 무거운 폐단을 개혁하였다고 하나, 권력이 육조(六曹)에 분산되어 통일되는 바가 없고 모든 일을 제때에 품승(稟承) 하지 못하여 일이 많이 막히고 지체되었다고 한다. 4. 세조의 6조직계제 "상왕(上王)277) 께서 나이가 어리시어 모든 조치를 다 대신(大臣)에게 위임하여 의논해서 시행하였던 것인데, 이제 내가 명을 받아 통서(統緖)를 이으면서 군국(軍國)의 서무(庶務)를 모두 친히 보고(報告)받고 결단하여 다 조종(祖宗)의 옛 제도를 회복하였으니, 이제부터 형조(刑曹)의 사수(死囚) 를 제외한 모든 서무(庶務)는 육조(六曹)에서 각기 그 직무(職務)에 따라 직접 계달하라." (((힘찬 기운이 넘치는 삼봉의 글씨로 알려진 편지 : 성균관대 박물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