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 여행 ①역사 지질(22/06/13, STORIES (With Lyrics) / Chyi Yu)
이름없는풀뿌리2022. 6. 20. 09:30
요즈음 – 울릉도 여행 ①역사 지질 –
큰 바다 한가운데 땅 속 불 뚫고 나와
꿈틀댄 형상대로 그려진 파노라마
지금 나 플라이스토세 한 가운데 있었다.
배달9219/개천5920/단기4355/서기2022/06/13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울릉도 여행 ①역사 지질(1)
22/06/13∼06/15 2박3일
아내와 울릉도/독도 여행(독도는 기상 악화로 못 감)
그러니까 2000년 가족 울릉도 여행 후
아이들은 떨어뜨리고 2022년에 22년 만에 부부만 와 보는 감회.
후포에서 쾌속선으로 3.5시간 만에 도착
하지만 바람과 파도로 독도 출항금지.
전설이 깃든 기기묘묘한 바위들과
절벽에 둘러싸인 섬들,
그리고 불의 흔적이 역력히 살아있는 봉우리들,
그들의 실루엣에 붉은 색을 입혀보니
영락없이 용암이 노도처럼 꿈틀대는
신생대제4기 플라이스토세에 들어와 있는 착각.
(2)
46억년의 지구 역사에서
독도는 신생대제3기 플라이오세 기간인
460만년 전 2천m 수심에서 화산활동으로 융기를 시작하여
신생대제4기 플라이스토세 기간인
250만년 전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었고
울릉도는 독도가 화산활동을 멈춘 100만년 뒤인
140만년 전부터 1만년 전까지 5단계에 걸쳐 화산활동으로 탄생되었고,
마지막 화산활동은 9300~6300년 전까지 진행되었으며
제주도도 180만년 전 해저에서 융기를 시작하여
120만년 전부터 현재까지 6단계에 걸친 화산활동이 진행되었고,
송악산이 3천년 전 형성되었고 1002년(문종1) 용암분출 기록이 있으니
나이로 보면 독도가 첫째, 울릉도가 둘째, 제주도가 셋째인 셈.
따라서 제주도와 울릉도는 활화산, 독도는 휴화산.
(3)
성인봉(聖人峯, 984m), 알봉(卵峯, 538m), 서도 대한봉(168.5m)으로
솟아난 형제인 울릉도와 독도는
사실 水面下에 안용복해산, 심흥택해산, 이사부해산으로 이어진
해저 2천m, 지상 1천m의 거대한 덩어리의 화산산맥 따라 이어진 화산체로
언젠가는 그 화산체 위에 거대한 섬을 만들 수도 있다 하겠으며
해저에 부존한 미개발 청정에너지인 메탄하이드레이트등
자원의 보고로 반드시 지켜야 할 국가 재산이다.
또한 청동기시대부터 뗏목으로 조상들이 바다를 건너서
발을 내딛은 흔적이 있는 긴 역사를 가진 국토의 막둥이이다.
6/13 : 사동 통구미 거북바위, 현포 얼굴바위, 노인봉, 송곳봉, 코끼리바위, 예림원,
악어바위, 섬목 관음도, 죽도, 도동
6/14 : 도동, 저동 내수전전망대, 봉래폭포, 천부 나리분지, 저동 촛대암, 도동 독도박물관
6/15 : 도동 해변 산책, 사동 터미널 산책, 후포, 잠실
배달9219/개천5920/단기4355/서기2022/01/10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 독도의 역사와 지질1. 독도의 역사
독도는 신생대 3기인 약 460만년전의 동해, 수심 2,000m 해저면에서
화산활동이 시작되어 수백만년에 걸쳐 독도를 형성하였다.
독도 화산체가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은 약 250만년전으로,
대규모로 분출된 용암과 입자들이 굳어져 독도해산 위에 독도화산체가 형성되었다.
이 시기 이후로도 소규모 분출 및 관입(貫入)의 흔적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침식작용이 우세하였고, 수면 위로 드러났던
독도화산체의 대부분이 침식되어 현재의 형상이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독도는 34개의 바위섬으로,
사람이 살기 시작한 때는 독도와 인접한 울릉도에서 찾아낸
유물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인 [갈색무늬 토기](승문토기)가 사용된 시기를 기준으로
대략 기원 후 약300년 무렵(서양: 로마시대, 우리나라: 삼국시대)으로 추측되며,
울릉도는 신라와 많은 교류가 있었으므로
주민들도 신라 동해안에서 건너온 사람들로 짐작되고 있다.
이러한 독도는 신라 지증왕 13년(512년) 이사부에 의해
우산국이 신라 영토에 귀속됨으로써 역사서에 그에 관한 기록이 등장하게 되었다.
2. 독도(위키백과)
독도(獨島, 리앙쿠르 암초, Liancourt Rocks)
동도(東島), 서도(西島)등 91개 섬
면적 : 동도 73,297m², 서도 88,740m², 부속도서 25,517m², 총 187,554m²
최고점 : 서도 대한봉 168.500m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시마네현 오키군 오키노시마정
독도(獨島)는 동해의 남서부, 울릉도와 오키 제도 사이에 위치하며,
동도와 서도를 포함한 총 91개의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는 섬이다.
울릉도에서 뱃길로 200여 리나 떨어져 있다.
서양권에서는 1849년에 독도를 발견한 프랑스 선박인 '리앙쿠르 호'의 이름을 따서
리앙쿠르 암초(프랑스어: Rochers Liancourt, 영어: Liancourt Rocks)라고 부른다.
현재 대한민국이 실효지배하고 있으나 일본국 정부에서는
다케시마(일본어: 竹島, たけしま)라는 명칭으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최종덕이 1965년 3월부터 최초 거주한 이래로 김성도 부부 및 독도경비대원 35명,
등대 관리원 2명, 울릉군청 독도관리 사무소 직원 2명 등 약 40명이 거주하고 있다.
또한, 2005년 동도에 대한 입도 신고제 도입 이후
2021년 4월 기준 약 200만 명이 방문하였고, 1일 평균 500명이 입도하고 있다.
2-1) 명칭
돌로 된 섬이란 뜻의 '돌섬'의 경상도 방언 명칭인 독섬을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쓰면서 독도(獨島)가 되었다.
과거에는 우산도(于山島)라고 불렸다. 독도 분쟁으로 인해 제3국에서는 리앙쿠르 암초
(프랑스어: Rochers Liancourt, 영어: Liancourt Rocks)라는 중립적인 명칭을 주로 사용한다.
2-2) 섬의 위치
이 섬은 동해의 해저 지형 중 울릉분지의 북쪽 경계부분에 위치하고 있으며,
평균 수심 2,000m의 해양 평원에 솟아 있는 화산섬이다.
두 개의 큰 섬인 동도(東島)와 서도(西島)를 중심으로 총 91개의 크고 작은 섬과
암초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도와 서도 사이의 거리는 151m이다.
일본에서는 동도를 오지마(男島), 서도를 메지마(女島)라고 부른다.
독도의 총 면적은 187,554m²로, 서도(西島)가 88,740m², 동도(東島)가 73,297m²,
그 밖의 부속도서가 25,517m²이다. 서도의 최고 높이는 168.5m이고,
동도의 최고 높이는 98.6m이다.
2012년 11월부터 대한민국 정부 고시에 의거하여 서도의 최고봉은 '대한봉'(大韓峰),
동도의 최고봉은 '우산봉'(于山峰)으로 부른다.
동도의 최고봉은 1950년대에는 '성걸봉'으로 불렸으며,
2005년부터 고시 이전까지는 '일출봉'(日出峰)이라 불렸다.
동도와 서도 및 부속 도서는 대부분 수심 10m 미만의 얕은 땅으로 연결되어 있다.
독도의 동도는 동경 131도 52분 10.4초, 북위 37도 14분 26.8초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섬은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도에서 동남쪽으로 약 87.4 km 떨어져 있으며,
일본 시마네 현 오키 제도에서는 약 157.5 km 떨어져 있다.
한반도에서의 거리는 약 216.8km이며, 일본 혼슈에서의 거리는 약 211km이다.
날씨가 좋으면 울릉도 동쪽 해안에서 육안으로 이 섬을 볼 수 있다.
독도는 약 460~250만 년 전에 형성된 해양섬 기원의 화산체로서,
섬 주변에 분포하는 지층들을 아래에서부터
괴상 응회각력암, 조면안산암 I, 층상 라필리응회암, 층상응회암,
조면안산암 II, 스코리아성 층상 라릴리응회암, 조면안산암III, 각력암, 조면암, 염기섬 암맥 등
총 9개의 화산암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는 오랜 세월동안 침식되어 화산의 흔적은 찾기 힘들다.
독도(특히 동도)의 지반은 불안정한데, 이것은 단층과 절리, 균열,
그리고 불완전한 공사 등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독도는 지질학적으로 울릉도의 화산암류와 비슷한 전암 화학조성을 갖는
알칼리 현무암, 조면 현무암, 조면 안산암 및 조면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2-3) 서도
높이 168.5m, 둘레 2.6km, 면적 88,740m² 5필지,
동도에 비해 높이가 높고 면적이 넓지만, 경사가 급한 편이라 필지가 적은 편이다.
자연환경 - 지형
대한봉 : 서도의 정상
탕건봉 : 서도 북쪽에 위치하여 봉우리 형상이 탕건을 꼭 닮아 붙여진 이름.
서도 최고봉과 북편에 위치함. 주로 주상절리임.
오른쪽으로 탕건봉이며, 탕건봉 상부는 주상절리, 하부는 타포니 형태이다.
삼형제굴바위 : 형상을 아우르는 명칭으로 3개의 동굴이 있어
현지 어민들의 구전에 의한 명칭 안파식 대상에 발달한 시스택으로
서도에는 속하지 않지만 서도 근방에 위치
상장군바위
코끼리바위 : 코끼리가 물을 마시는 형상의 독특한 모양에 대하여 불리는 바위
김바위 : 독특한 모양에 대한 일관된 명칭 구전으로 김은 해태를 의미함
2-4) 동도
높이 98.6m, 둘레 2.8km 면적 73,297m² 7필지.
서도에 비해 높이가 낮고 면적이 좁지만, 둘레가 크고 완만해 필지가 많은 편이다.
자연환경 - 지형
한반도 바위 : 북쪽에서 바라보면 마치 한반도 형상과 꼭 닮아 붙여진 이름.
실제 부속도서를 제외한 한반도의 형상이 보인다.
숫돌바위 : 의용수비대원들이 생활할 당시 칼을 갈았다는 곳으로
바위의 암질이 숫돌과 비슷하여 붙여진 이름. 선착장 근처에 노출되는 조면암맥.
차별침식으로 주변의 응회각력암층은 침식되어 없어지고
수면상에 솟아있어 숫돌바위라 일컬으며 주상절리가 거의 수평으로 발달되어 있다.
얼굴바위 : 사람의 얼굴과 흡사한 독특한 모양으로 현지어민들의 구전으로 붙여진 이름.
독립문바위 : 시아치(왼쪽)와 해식동굴(오른쪽)
- 절리밀도가 높은 해안가에 위치하는 기반암 지대에서 발달 한다.
아치의 형태가 대한민국의 지도를 닮아서 잘 알려진 곳이다.
천장굴 : 분화구라고도 하였으나
학계에 의하면 침식에 의해 함몰로 생긴 천장동굴로 불린 명칭
물오리바위 : 물오리서식지로서 현지어민들에 의해 불리는 명칭으로
물오리는 바다가마우지를 지칭함
춧발바위 : 춧발은 갑, 곶 등이 튀어 나온 곳을 의미하는 현지 방언으로 구전되어온 명칭
악어바위 : 암석의 측면에서 형성된 풍화혈을 총칭하여 타포니라 한다.
집괴암을 구성하는 작은 역들이 염풍화 작용으로 인하여
기반암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면 구멍이 형성되어 있다.
2-5) 행정 구역
대한민국의 행정구역에서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 1-96번지에 속하며 우편번호는 40240이다.
대한민국은 이 섬을 천연기념물 제336호 독도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울릉군은 국민 공모를 통해 도로명 주소법에 따른 이 섬의 도로명 주소를
'독도안용복길'(서도)과 '독도이사부길'(동도)로 정하였다.
일본이 주장하는 행정 구역에서는 시마네현 오키군 오키노시마정에 속해 있다.
2-6) 기후 파노라마
난류의 영향을 많이 받는 전형적인 해양성 기후로 연간 평균강수량은 1,240mm 정도,
연평균 기온 약 12℃[20], 1월 평균기온 1℃, 8월 평균기온 23℃로 온난한 편이다.
연평균 풍속은 4.3m/s로[21] 겨울과 봄에는 북서풍이 빈번하고,
여름과 가을에는 남서풍이 빈번하여 계절에 따른 주풍향이 뚜렷하다.
안개가 잦고 연중 날씨 중 흐린 날은 160일 이상이며 비 또는 눈 오는 날은 150일 정도로,
겨울철 강수량이 많다. 즉, 일 년 중 맑은 날은 불과 45일 정도밖에 없다.
2-7) 자연 및 자원
두 섬과 주변 섬들은 서로 분리된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해저 2천여 미터로부터 바다 위로 솟은 해산(海山)의 봉우리 부분에 해당된다.
대한민국은 독도 섬 주변의 바다에 다양한 해양생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섬 일대의 자연환경을 보존하기 위해 이 섬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1982년에 "독도 해조류(바다제비·슴새·괭이갈매기) 번식지(獨島海鳥類-繁殖地)"라는 이름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했고, 1999년에 천연보호구역으로 명칭을 바꾸어
동식물 전체의 식생을 관리하게 되었다.
2005년 독도의 기존 토지 및 부속도서를 측량하고 그 결과에 따라 지적공부를 정정하여
독도의 지적현황이 전체적으로 변경됨에 따라
2006년 9월 14일 문화재청장은 문화재보호법 제6조에 의거
천연기념물 제336호로 지정된 《독도 천연보호구역》의 문화재구역을 당초 고시한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37필지 180,902평미터(보호구역)"을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101필지
187,554평방미터(지정구역)으로 정정고시하였다.
2002년 경상북도는 환경부에 '울릉도·독도 해상국립공원' 지정을 건의했으나,
이는 울릉군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2-8) 독도 사철나무
종목 천연기념물 제538호(2012년 10월 5일 지정)
울릉군 독도리 30번지에 있는 독도 사철나무는 독도를 구성하는
2개 섬인 동도와 서도 중 동도의 천장굴 급경사 지역 위쪽 끝 부분에서 자라고 있으며,
강한 해풍과 극히 열악한 토양조건 등에서 자란 나무로
독도에서 생육하는 몇 안 되는 수목 중 가장 오래된 나무로
2012년 10월 25일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제538호로 지정되었다.
2-9) 특정도서
대한민국은 독도가 독특한 자연환경이 유지되고 있고,
해양생물상이 다양하고 풍부하여 독도 등
도서지역의 생태계보전에 관한 특별법에 의거 특정도서로 지정하였다.
지정일자 : 2000년 9월 5일, 지정번호 : 제1호
면적 : 187,554m2 (지번은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1 ~ 산96이고,
2000년 9월 5일 특정도서로 최초 지정 당시 면적은 180,902m2였다)
특정도서안에서는 「대한민국 독도 등 도서지역의 생태계보전에 관한 특별법」 제8조에 의거
누구든지 다음 각호의 1에 해당하는 행위를 하거나 허가를 하여서는 아니된다.
건축물·공작물의 신축·개축·증축
개간·매립·준설 또는 간척
택지의 조성·토지의 형질변경·토지의 분할
공유수면의 매립
입목·죽의 벌채 또는 훼손
도로의 신설
흙·모래·자갈·돌의 채취, 광물의 채굴, 지하수의 개발
가축의 방목, 야생동물의 포획·살생 또는 그 알의 채취, 야생식물의 채취
특정도서에 서식하거나 도래하는 야생 동·식물 또는
특정도서 안에 존재하는 자연적 생성물을 그 섬 밖으로 반출하는 행위
특정도서 안으로 생태계 위해 외래 동·식물을 반입하는 행위
폐기물을 매립 또는 투기하는 행위
인화물질을 이용하여 음식물을 짓거나 야영을 하는 행위
지질·지형·자연적 생성물의 형상손괴 기타 이와 유사한 행위
2-10) 국가지질공원
2012년 12월 27일 환경부장관은 자연공원법 제36조의3의 규정에 의거
울릉도·독도 국가지질공원을 인증 고시하였다.
지질공원의 명칭 : 울릉도·독도 국가지질공원
지질공원의 구역 : 경상북도 울릉군 전 지역
지질공원의 면적 : 1,279 평방킬로미터
인증연월일 : 고시일
공원관리청: 경상북도
인증목적 : 울릉도·독도의 우수한 지질유산자원을 보전하고 교육·관광자원으로 활용하여
국민의 휴양 및 정서함양에 기여하고 지역경제 활성화 도모
지정명소 : 23개소(울릉도 19, 독도 4)
울릉도 : 19개소 (봉래폭포, 저동 해안산책로, 도동 해안산책로, 거북바위 및 향나무자생지,
국수바위, 버섯바위, 학포 해안, 황토굴, 태하 해안산책로 및 대풍감, 노인봉, 송곳봉,
코끼리바위, 용출소, 알봉, 성인봉 원시림, 죽암몽돌해안, 삼선암, 관음도, 죽도)
독도 : 4개소 (숫돌바위, 독립문바위, 삼형제굴바위, 천장굴)
2-11) 동물
2005년과 2006년에 이루어진 실태조사를 통해 독도에서 관찰된 조류는 126종이다.
개체수가 가장 많은 종은 괭이갈매기이었고, 약 7,000여 마리가 서식하고 있다.
그리고 바다제비, 슴새, 참새가 서식하고 있는데,
최근 슴새의 수는 감소하고 있는 반면 바다제비 수는 증가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섬은 남북으로 왕래하는 철새들이 쉬어가는 주요 휴식처이다.
조류는 여러 가지의 천연 기념물이 있다.
짐승은 1973년 경비대에서 토끼를 방목하였으나 지금은 한 마리도 서식하지 않는다.
곤충은 7목 26과 37종이 서식하고 있다.
인근 해양에는 파랑돔, 가막베도라치, 일곱줄얼게비늘, 넙치, 미역치, 주홍감펭 등
다양한 어류가 서식하고 있다.
또한 대구지방환경청은 지난 2007년 5월부터 6개월 동안
경북대학교 울릉도·독도연구소와 공동으로 네 차례에 걸쳐 이 섬의 생태계를 조사한 결과
이 섬에 무척추동물 26종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2007년 12월 11일에 발표했다.
2013년에는 시베리아의 텃새인 솔양진이 수컷 한 개체가
남한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동도에서 발견되었다.
2-12) 바다사자
바다사자(독도강치)는 동해 연안에 서식하던 강치의 아종이다.
현재 멸종되었다고 알려진 동물로,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들을 "가제" 또는 "가지"로
불렀으며 이 섬을 중심으로 동해에 수만 마리가 서식했다고 한다.
이들이 머물렀다는 가제바위가 독도에 남아 있다.
러일 전쟁 전후로 가죽을 얻기 위해 시작된 일본인들의 무분별한 남획으로
바다사자는 서서히 그 모습을 감추었으며
1974년 홋카이도에서 새끼 강치가 확인된 이후로 목격되지 않는다.
1905년 일본 시마네현이 이 섬을 무단으로 편입한 이후 일본인들의 어획이 시작되었지만,
1905년 이전에 울릉도에 살던 한국인들이 1904년과 1905년에 독도에서 강치를 잡아
매년 가죽 800관(600엔)씩 일본에 수출한 기록이
1907년 시마네현 다케시마 섬 조사단의 오쿠하라 헤키운이 쓴 책
'죽도 및 울릉도'에 나온다.
2-13) 식물
박선주 등이 2008년과 2009년에 걸쳐 실행한 독도의 식물상 및 식생 조사에서는
독도의 식물은 29과 48속 49종, 1아종 3변종 총 53종류로 조사되었다.
이 중 특산식물은 섬기린초와 섬초롱꽃 2종류이고,
귀화식물은 갓, 방가지똥, 큰이삭풀, 콩다닥냉이, 흰명아주, 둥근입나팔꽃 6종류가 있다.
식생형은 주로 해국-땅채송화, 해국-갯제비쑥, 왕호장근-도깨비쇠고비,
돌피, 물피군락 등으로 구분된다.
경사가 급하여 토양이 발달하지 못하였고,
비는 내리는 대로 배수되어 수분이 부족하여 자생하는 식물이 적으나
울릉도에서 씨앗이 날아와 50~60종의 풀과 나무가 있다.
이 섬에 사는 식물은 키가 작아 강한 바람에 적응하고 잎이 두껍고 잔털이 많다.
물론 가뭄과 추위에도 잘 견딘다. 2007년 12월, 외부에서 들여와 직접 심은 나무 가운데
무궁화, 후박나무, 곰솔, 향나무 등이 대부분 말라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인근 얕은 바다에는 모자반, 대황 등의 해양식물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독도 사철나무는 독도에서 현존하는 수목 중 가장 오래된 나무로
독도에서 생육할 수 있는 수종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국토의 동쪽 끝 독도를 100년 이상 지켜왔다는 영토적·상징적 가치가 큰 점을 감안하여
2012년 10월 5일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제538호로 지정되었다.
2-14) 박테리아
섬 일대는 '박테리아의 보고'로 불릴 만큼 다양한 종의 박테리아가 많이 서식하는 곳이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05년 5종, 2006년 13종, 2007년 16종,
2008년 4종 등 2008년 기준으로 이 섬에서 발견된 신종 박테리아는 38종에 이른다.
발견된 신종 박테리아들의 학명에는 독도넬라 코린시스(Dokdonella koreensis),
동해아나 독도넨시스(Donghaeana dokdonensis) 등과 같이
'독도'나 '동해'의 명칭이 포함되었다. 독도에서 발견된 박테리아들로 인해
2005년부터 2008년까지 대한민국이 3년 연속으로 신종 세균 발표 건수 1위를 차지했다.
2-15) 매장 자원
KAIST 생명공학과의 조사에 따르면, 섬 근해 해저에 이른바 '불타는 얼음'으로 불리는
메탄 하이드레이트(methane hydrate, 고체 천연가스 또는 메탄 수화물)가
확인된 양만 약 6억 톤가량 매장되어 있다고 밝혀졌다.
메탄 하이드레이트는 녹으면서 물과 메탄 가스를 발생시켜
효용가치가 큰 미래 청정자원으로 주요 선진국의 개발·연구 대상으로 주목받는 자원이다.
메탄 하이드레이트 차세대 연료로 주목받은
메탄 하이드레이트는 21세기 신에너지 자원으로
빙하기 시대 이후 해저 또는 동토지역에서 고압, 저온으로 형성된 메탄의 수화물입니다.
해저에는 지하에 매장된 석탄, 석유, 가스 양의
거의 2배에 가까운 메탄 하이드레이트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cc의 메탄 하이드레이트는 표준상태의 메탄 160cc에 해당되므로
농축시킨 천연가스로 규정합니다.
이러한 에너지가 알려진 것은 1930년 대였으나 이때는 원유나 천연가스가 풍부해
하이드레이트 개발에는 별다른 관심을 갖지 못했으나,
점차 석유 등 에너지 자원이 고갈되어 가고 있어
세계 각국의 환경보호 정책에 따라 지구온난화 물질인 이산화탄소의 발생량이 적은
청정에너지에 대한 요구가 확산되면서 하이드레이트에 대한 관심이 많아진거죠.
메탄하이드레이트는 물과 가스가 높은 압력과 낮은 온도 상태에서 만나
이룬 얼음 형태의 고체 결정입니다.
즉 얼음이 불에 붙는 비상적인 물질인 거죠.
세계 각지에 4경 3,000조㎥ 가 매장돼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천연가스처럼 95% 이상이 메탄으로 이루어진 하이드레이트가
기존 천연가스의 매장량보다 수십 배나 많고
연소 시 이산화탄소 발생량이 석탄, 석유의 절반에 불과한 저탄소 에너지원이기 때문입니다.
동아시아 영토 인근 해역에 대량으로 묻혀있어 주요 에너지 수입국인
대한민국, 중국, 일본의 영유권 갈등이 심화될 여지가 있습니다.
특히 동아시아의 최대 메탄하이드레이트 매장지로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의 매장량은 중국이 130년간 소비할 수 있는 양이 있어,
중국-일본 영토분쟁의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독도 인근 동해 해저에는 한국이 200년간 사용 가능한 부존량이 확인되었지만,
2014년 기술 및 경제성과 위험성 문제가 발생하여
결국 2015년 시추사업이 전면 보류되었습니다.
세계 최초의 추출 성공은 일본에서 하였으며
2017년 에는 중국 정부도 추출에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냐라도 아직 상용화에는 성공하지 못 했다는게 현실 입니다.
그 이유는 시추 과정 중 메탄이 연소되지 않고 그대로 방출될 경우
이산화탄소보다 10배 강력한 온실효과를 유발할 수 있어,
시추 과정에서 메탄의 방출을 막는 것이 핵심 난제라고 합니다.
중국 정부에 따르면 2030년까지 상용화를 목표로 안정적 시추기술을 개발 중이라고 하네요.
우리 정부는 추후 기술적 문제가 해결되면 재추진한다지만, 현재 잠정 보류 상태이며,
또한 개발 소식이 들리면 일본 정부에서 적잖은 방해공작을 필 것인데요.
일본과의 마찰은 피할 수 없는 과제입니다.
결국 일본은 독도의 황금 보고를 가만히 두고 보진 않을 것입니다.
2-16) 해양
독도 주변은 쿠로시오 지류인 따뜻한 대만남류와 찬 북한 해류가 만나는 지역으로,
영양염류가 풍부하며, 이로 인한 동·식물 플랑크톤이 다양하고,
경제적 가치가 높은 회유성 어족이 다량 분포하고 있다.
독도는 지형적으로 수심 2,068 m 정도 되는 동해 새중에서 분출한 화산성해산으로,
물위로 솟아있는 독도의 면적은 비록 작지만(0.186km2),
수면아래 독도의 면적을 합하면 울릉도의 2배 이상되는 거대한 해산이며,
동도와 서도를 중심으로 주변에 물개바위를 비롯한
크고 작은 32개 이상의 바위섬과 암초가 있어
단단한 바닥에 부착하여 생활하는 해양 저서생물에게 좋은 서식지를 마련하고 있다.
독도의 바다는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곳으로
생물종이 다양하고 수산자원이 풍부한 곳으로
섬 주변에는 감태, 대황, 모자반 등 해조류를 비롯하여 게류, 고둥류가 넓게 서식하고 있고,
어류로서는 볼락, 자리돔, 도화돔 등의 냉온대성, 온대성 및
아열대성 생물종이 집합하여 서식하고 있다.
또한 독도의 섬효과를 통해 깊은 바다의 영양염류가 표층으로 용승되어
플랑크톤을 먹이로 하는 동해의 회유성 및 독도 정착성 어종의 치어와 유어들이 모여 사는
산란장 내지 성육장의 기능으로서도 중요한 어장이다.
2-17) 해양 생물
국립수산과학원에서 동도와 서도 주변연안 및 수중생태를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해양·자포동물 22종, 고둥류 30종, 극피동물 23종, 갑각류 22종, 갈조식물류 17종과
어류 17종 등 총 169종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독도 주변연안에서 서식하고 있는 갑각류 중에서
도화새우, 물렁가시붉은새우, 가시배새우를 통틀어 '독도새우'라고 부르고 있다.
2-18) 환경 오염
독도에 하수처리시설이 설치된 이후, 그 오작동으로 인해
독도 경비대나 등대 관리자와 같은 거주자들로부터 발생한 오수가
바다에 그대로 쏟아지는 일이 반복돼 독도 부근은 심각한 바다 오염의 우려가 높다.
독도 부근 바다에서는 바닷물이 우윳빛으로 변하거나,
해초들이 죽고 산호초가 석회화되는 현상이 발견되고 있다.
현재는 이러한 오염을 줄이기 위한 공공 단체와 시민 조직에 의한 노력이 진행 중이다.
2-19) 선착장
동도 선착장에 접안중인 해경 309정
동도에 선착장과 접안 시설(1997년 11월 완공, 1998년 8월 지적공부에 등록) 80미터로
500톤급 선박 접안이 가능하며, 유인 등대 1기가 설치되어 있다.
2-20) 여객선
대저해운에서 포항~울릉도~독도 구간을 1일 2회 운항한다.
단 풍랑 등 기상특보가 발생시 결항될 수 있다.
2-21) 헬기장
동도에 있는 독도헬기장(ICAO: RKDD)은 경찰청이 관할하는 헬리콥터 이착륙장이다.
동도에 있기 때문에 '동도 헬기장'으로도 불린다.
2008년 국제민간항공기구(ICAO)로부터 지명약어 RKDD를 부여받았다.
2-22) 통신
2013년 6월 12일 한국방송통신전파진흥원(KCA) 경북본부와
대구·경북 소재의 이통3사 및 협력사 공동 주관으로 독도에 입도해
독도의 전파환경을 측정한 결과 독도는 방송, 통신뿐 아니라
아마추어 무선 주파수까지 모두 양호하게 도달되며,
최신 초고속 광대역 통신인 롱텀에볼루션(LTE)까지 끊김없이 전달된 것으로 조사됐다.
2-23) 동도 주요 시설
경비 초소: 1999년 건물 옥상(해발고도 95m)에
무인기상관측장비(Automatic Weather System, AWS)를 설치하여
독도의 기온, 풍향, 풍속, 강수량을 매시간 측정하여
그 자료를 무선통신으로 울릉도로 송신하고 있음
막사 9동
접안시설(선착장) : 1997년 11월 건립, 최대 500톤급 접안 가능, 길이 80m, 넓이 1,945㎡.
보통 울릉도에서 관광을 목적으로 배를 타고 독도로 가는 경우 내리는 장소이다.
독도 등대 : 1954년 8월 최초 설치, 1998년 12월 증축 및 유인화(3명 근무),
등탑높이 15m, 넓이 161㎡, 광원거리 25마일, 디젤발전기 2기(75kw), 태양광발전(15kw)
위성 안테나 : 2000년 6월 설치, 인터넷위성기지국 2기
경비대 : 1997년 8월 증축(30명 근무), 숙소 1동 658㎡, 담수시설(27톤/1일 생산),
헬기장 1개소 400㎡, 케이블카 1기(300m, 1.5톤), (접안시설~경비대숙소 앞),
해수정화시설. 이곳에 근무하고 있는 경비대는 군인이 아닌 경찰이다.
등반로 : 796m(폭 0.8~1m)
해수정화시설
2-24) 서도 주요 시설
경비대 30여명이 생활하고 방문객들이 방문하는 경로인 동도와는 달리
주로 주민 숙소로 이용되는 서도는 시설물이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주민숙소 : 2011년 8월 증축 완료(주민, 울릉군청 직원 각2명 거주 - 2018년 주민 중
한 분이셨던 김성도씨가 사망함에 따라 현재는 김신열씨 혼자 거주하고 있다.),
1동 373제곱미터, 담수기 2기(4톤/1일 생산), 디젤발전기 2기 (50kh)
음용시설 : 물골 1톤/1일(3톤 저장 가능)
등반로 : 550m (폭 0.6~0.8m)[52]
기타
문화재청은 이명박정부때인 2008년 독도 대포(大砲)의 문화재 지정을 추진했으나 좌절됐다.
당시 국무총리와 외교통상부 장관이 한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일본을 자극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했기 때문으로 전해졌다.
이후 이건무 전 문화재청장과 엄승용 전 문화재청 사적명승국장, 독도단체 및
문화재계 관계자들이 독도 대포의 영토주권 수호 상징성과 보존가치를 고려해
문화재 지정 재추진을 주장(서울신문 2014년 8월 15일자 8면)했으나
지금까지 정부나 지자체에서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2-25) 관련 법령과 정부 조직
독도 등 도서지역의 생태계보전에 관한 특별법
독도의용수비대 지원법
독도의 지속가능한 이용에 관한 법률
독도지속가능이용위원회 : 독도의 지속가능한 이용을 위한
기본(시행)계획을 심의하기 위하여 설치된 대한민국 국토해양부 소속의 자문위원회이다.
2-26) 전설
독도와 관련되어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여러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구멍바위' 형성에 관한 전설이다.
전설에 따르면, 먼 옛날 힘센 노인 하나가 노인의 집 앞을 가리고 있던 바위를 묶어
배를 타고 옮기던 중에 다른 바위를 던져 바위에 구멍을 내고 난 후
독도에서 좌초되어 지금의 자리에 구멍바위가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2-27) 관광
본래 이 섬은 대한민국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어서 입도가 제한되었으나
2005년 3월 24일 대한민국 정부가 일본의 영유권 주장에 대항하기 위한 대책의 일환으로
입도 허가제를 신고제로 변경함으로써 동도 선착장에 한해서 하루 1,800명씩
일반인의 관광을 허용했다. 학술 조사와 같이 관광 이외의 목적으로
이 섬을 방문할 경우에는 14일 전에 신청서를 제출해야 한다.
2-28) 기념 사업
대한민국이 1954년에 발행한 독도 우표
고종이 대한제국칙령 제41호 1900년 10월 25일로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제정된 일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독도의 날이 기념일로 잘 알려져 있다.
1954년 9월 15일 대한민국은 3종의 독도 우표 3000만 장을 발행했는데
2환권과 5환권은 각각 500만 장, 10환권은 2000만 장이 팔렸다.
일본 외무성에서 독도 우표가 붙은 우편물을 받지 않겠다고 했으나,
만국우편연합(UPU) 규정중 '우편물 중계의 자유보장' 조항에 따라 허용하기로 하였다.
일본은 항의의 표시로 독도 우표가 붙은 한국 우편물에 먹칠을 해서 배달을 하였다.
대한민국은 이 섬을 도안으로 한 우표를 2002년과 2004년 1월 두 차례 더 발행했다.
2002년 8월 1일 내고향 특별우표 시리즈(32종)중 경북편에도 독도우표가 포함,
90만장이 발행되었으나 당시 일본의 항의는 없었다.
2004년 1월 대한민국이 독도 우표 4종 224만장을 발행하자
가와구치 일본 외상은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의 입장과 한국의 우표발행이
만국우편연합헌장의 정신에 위배된다고 주장하고 주일 한국대사에게 항의하였다.
2004년 6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이 섬이 조선의 영토임을 보여주고 있는 고지도를 도안으로 한 우표를 발행하였으며
2006년 8월에는 도안이 약간 수정되어 대한민국에서 판매되기도 하였다.
대한결핵협회는 2006년 크리스마스 실로 독도의 자연을 그린 '아이러브 독도'를 발행하였다.
독도함(獨島艦, LPH-6111)은 대한민국 해군의 독도급 강습상륙함의 첫 번째 함이다.
독도의 이름을 함명으로 정하였다. 실제로는 LHD(다목적 강습상륙함)의 기능을 갖고 있으나,
공식적으로는 LPH(강습상륙함)라고 불리고 있다.
2002년 10월 말에 한진중공업이 대한민국 해군으로부터 수주를 받아 건조를 시작한 뒤,
2005년 7월 12일 진수하였고 2006년 5월 22일부터 시운전을 시작하여
2007년 7월 3일 취역하였다. 2010년 3월 천안함 침몰 사고 수색구조 작전에 투입되었다.
2-29) 학문
한국복지사이버대학에 2012년 독도학과가 개설되어 2014년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정치·경제·사회·문화·지리·환경·역사학적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교육할 수 있는
학문적 기반 구축을 위해 전국 최초로 개설되었으며,
울릉군수와 독도경비대장 등 독도와 관련해 직·간접적으로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여러 인사들뿐만 아니라, 교육계 전문가, 독도 관련 시민사회단체 대표 등
사회 각계각층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는 인사들이 재학 중이거나 졸업하였다.
2-30) 대중 문화
1982년에 한국방송의 PD였던 박문영은 이 섬을 주제로 한 노래
〈독도는 우리 땅〉을 만들어 코미디 프로그램인 《유머 일번지》를 통해 발표했는데,
시기적절한 곡이라는 평가를 받아 곧 정광태의 정식 음반이 출시되면서 큰 인기를 모았다.
그 밖에도 박명수의 〈We Love 독도〉 등
수많은 연예인과 가수들이 독도에 관한 노래를 발표해 왔다.
2004년에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공동으로 개발한 모바일 게임인
〈독도를 지켜라〉가 대한민국으로 수출되었다.
이 게임은 통일부로부터 외교적인 문제를 피할 것을 요청받아 〈섬을 지켜라〉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네티즌들의 항의로 다시 〈독도를 지켜라〉로 바뀌었다.
대한민국과 일본에서는 독도를 섬(island)으로 규정하지만,
국제해양법상 암초(rocks)로 분류된다.
섬을 "사람이 살며 경제 활동이 가능한 섬(island)"과
"그렇지 못한 암초(rocks)"로 구별하며, 독도가 국제법상 섬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까닭은
사람이 살고는 있으나, 독도 안에서 스스로 경제 활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섬에 마을을 건설하여 스스로 살 수 없다는 이야기.
섬의 정의에는 거주민 뿐만 아니라 스스로 경제 활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단서가 붙기 때문에 섬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제121조 섬제도
1. 섬이라 함은 바닷물로 둘러싸여 있으며,
밀물일 때에도 수면 위에 있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육지 지역을 말한다.
2. 제3항에 규정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섬의 영해, 접속수역,
배타적경제수역 및 대륙붕은 다른 영토에 적용가능한 이 협약의 규정에 따라 결정한다.
3. 인간이 거주할 수 없거나 독자적인 경제활동을 유지할 수 없는 암석은
배타적경제수역이나 대륙붕을 가지지 아니한다.(유엔해양법협약)
남중국해의 중국-필리핀간 분쟁으로 인한 판결로,
섬의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섬에서 마실 물과 식량이 있는지까지 따진다.
즉, 섬 자체에 도달했을 시 자체적으로 생존이 가능한 환경인지 따지는 것.
주민을 강제 이주시키거나 오키노토리 암초마냥
엄청난 콘크리트를 쏟아부어 농업이 불가능한 땅이라면 국제법상 암초다.
물론 암초도 주권이 미치는 육지라는 것은 다르지 않으므로
12해리의 영해와 영공은 인정된다. 단지 EEZ나 대륙붕을 인정 받을 수 없다는 뜻이다.
2-31) 독도의 연혁
512년 (신라 지증왕 13년) : 이사부 우산국 정벌 신라영토에 귀속시킴 (삼국사기)
1454년(단종2년) 세종실록중 권148권에서 권155까지의 8권 8책에
지리지로써 세종실록지리지라고도 하는데
권153 강원도 울진현조에 그 부속도서로써 우산도와 무릉도를 열거하고
이들의 개략적인 위치를 우산, 무릉2도 재현 정동해중 2도
相距不遠 風月淸明卽望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역사기록은 독 도와 울릉도의 관계를 뚜렷이 밝힌 세계 최초의 문헌으로 평가되며
1432년(세종14년)에 편찬된 신선입도지리지를 그대로 옮긴 것이라고 머리에 밝히고 있다.
1881년(고종18년) : 울릉도 개척령 반포(척민정책)
일본어민의 울릉도 근해 출어에 대한 일본정부에게 엄중항의.
1900년 10월 27일 (대한제국 광무4년)
관보 제 716호의 칙령 제41호 울릉도, 즉도 석도(독도)를 울릉군수가 관할토록 함.
1905년 2월 22일 독도의 일본령 편입결의 도금현 고시 제40호로 독도의 동현편입 발표
1905년 독도망루설치 해군통신기지로 이용.
광무 10년 3월 5일 울릉도 군수 심흥택 보고서 「매천야록」에 독도 관련기록.
1910년 : 한국수산지 제1호 제1편에 한국령으로 표기
1946년 1월 29일 SCAPIN 제677호-연합군 최고사령관이 항복문서의 시해을 위해
일본정부에 보낸 각서 울릉도, 독도, 제주도를 일본의 통치권에서 제외.
1948년 6월 30일 미공군 폭격연습중 독도출어중인 어민 30명 희생.
한국정부의 항의에 따라 1953. 2,27자 미공군 연습기지에서 제외.
1951년 6월 독도 조난어민 위령비 건립.
1953년 일본이 미국기를 게양하고 조난어민 위령비 철거, 일본영유 표지 설치
한국 어민 독도근해조업에 대한 항의.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일본에 항의 각서 발송
그해 8월 5일 영토비 건립, 해양경비대 파견 협의.
1953년 4월 27일 울릉도 주민으로 구성된 독도의용수비대 창설 (대장 : 홍순칠)
1954년 : 항로표지(등대)설치. 동년 8월 1일 점화개시 각국에 통보.
1956년 4월 8일 : 국립경찰의 경비임무 인수결정.
1956년 12월 30일 : 경비임무 인계인수 1966년 4월 12일 수비대장 홍순칠 공로훈장 수여.
1980년 : 최종덕 독도 전입.
1986년 7월 8일 : 최종덕 사위 조준기 주민등록 전입(가족 3명). 6개월간 어로 작업 목적.
1991년 : 김성도(56) 가족1명 현재 2명 거주(서도), 울릉경찰서 독도경비대 32명 근무(동도)
□ 울릉도의 역사와 지질
울릉도는 약 140만년 전부터 1만년 전까지
5단계에 걸쳐 화산활동을 거치며 탄생한 섬이다.
마지막 화산활동은 9300~6300년 전에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그마가 빠져나간 화산 윗부분의 빈 공간이 무너져 내리면서 나리분지가 생겼고,
분지 서쪽엔 또다른 분화구인 알봉이 있어 이중화산을 이루고 있다.
울릉도는 독도가 화산활동을 멈춘 지 100만년 뒤에야 분화를 시작했지만
주요 암석이 알칼리 계열 조면암이고 화학적 구성도 매우 비슷한 것으로 밝혀졌다.
140만 년 전 즈음부터 울릉도가 본격적으로 드러나
지속적으로 화산 활동을 일으켰다고 생각되며, 울릉도 칼데라,
즉 나리 분지 내부에 퇴적된 화산재층을 살피면 마지막 분출은 약 5000년 전까지 지속됐다.
알봉은 최후기에 화산이 밀어올린 화산돔(volcanic dome)으로 생각되고 있다.
활화산의 기준은 10,000년 전까지 분출이 있었는가이며,
약 5000년 전까지 다양한 형태의 분출이 있었기에,
울릉도는 백두산, 제주도와 함께 활화산의 범주에 들어간다.
실제로 울릉도 지하의 온도는 제법 높으며, 아직 지진파 감속 구간이 있다.
활화산으로서, 울릉도는 언제 분출해도 이상하지 않으며,
현재 지하 온도가 상승 중이라는 보고도 있다.
청동기시대(기원전 1000~300년) 또는 철기시대 전기 (300년~1년)에
울릉도에 최초로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했고
흔적으로 지석묘, 무문토기, 갈돌, 갈판(현포, 남서, 저동리)이 발견된다.
1. 개요
울릉도(鬱陵島)는 대한민국의 동해상에 있는 섬이다.
대한민국에서 9번째로 큰 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울릉도, 독도, 죽도, 관음도와 함께 경상북도 울릉군에 속한다.
울릉도는 서쪽 방면으로 한반도 쪽에 가깝기는 하지만, 동해 자체가 수심이 깊어서
섬이 거의 없는 바다이기 때문에 거의 동해 한가운데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울릉도의 생활, 역사, 문화, 교통 등에 관해서는 울릉군 문서를 참고하자.
울릉도는 죽변에서 동쪽으로 140㎞, 포항에서 217㎞, 동해 묵호에서 161㎞ 지점에 있으며,
독도와는 92㎞ 떨어져 있다. 동경 131°52′, 북위 37°30′에 위치하며,
면적 72.9㎢, 인구는 1만 153명(2015년 현재)이다. 현재 울릉도는 1읍 2면 25리 체제이다.
2. 지질
울릉도는 동해에 발달해 있는 화산섬이다. 동해의 화산 대부분은
울릉도 남쪽의 깊은 바다를 이루는 울릉 분지의 북쪽 경계에 일렬로 늘어서 있다.
이 열주한 화산 대부분은 울릉도보다 먼저 활동하고 소강돼 침식된 후 해산으로 남아 있다.
독도는 울릉도와 함께 아직 뭍에 드러나 있는 몇 안 되는 젊은 화산체이다.
이들의 구체적인 형성 과정은 아직 연구 중이나,
동해가 벌어지고 지각이 얇아져 마그마가 줄줄이 형성된 결과라고 생각되고 있다.
화산암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절경으로 촉대암·공암·삼선암·만물상 등 기암괴석이 많고
천연식물이 많이 분포하고 있어 관광지로 손꼽히고 있다.
울릉도는 가파른 산사면이 에워싼 채로, 중앙은 말발굽 모양으로
움푹 파인 분지, 즉 칼데라가 발달해 있다. 칼데라 벽면을 따라 봉우리가 있는데,
성인봉이 해수면으로부터 984m로 가장 높이 솟아있다.
깊은 동해 바다 해저면으로부터 화산 분출로 쌓아올려진 성층화산의 일종으로,
바닷물을 걷어내면 원뿔대 모양이 드러난다.
해수면 가까이에는 침식으로 깎여 얕은 평탄면이 발달해 있으며,
섬을 이루는 산체의 바닥 직경은 30km를 웃돈다.
울릉도 주변의 해저면의 깊이가 2,200m에 달하여, 실제 산의 높이는 3,000m가 넘는데,
이는 성층화산 중에서도 상당한 규모이며, 실제 부피를 따지면 제주도를 능가한다.
울릉도는 신생대 화산작용으로 형성된 종상화산으로
조면암·안산암·현무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울릉도는 대체로 해안가를 따라 불그스름하게 산화된
조면현무암(trachybasalt)질 용암류가 분포하고, 나머지 상당 부분은
치밀하고 잿빛을 띠는 조면암(trachyte)에서 조면안산암(trachyandesite)질 용암류로,
특히 산사면 절벽에 노출되어 있다.
용암류 중에는 드물게 향암(phonolite)질 용암류도 발견된다.
큰 암괴를 포함한 노르스름한 화산재층이 울릉도 산사면 중간 즈음에 두껍게 분포하여,
울릉도 역시 강력한 화산 분출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해안가에서 발견되는 용암류가 연대가 확인된 가장 오래된 것에 속하는데
약 140만 년 전의 것이다.
3. 명칭 유래
울릉도에 대한 지명은 512년(지증왕 13)에 우산국에 대한 이야기로 처음 등장한다.
930년(태조 13) 우릉도(芋陵島), 덕종 때 우릉성(羽陵城),
인종 때 울릉도(蔚陵島) 등의 지명이 등장했다.
고려 때는 울릉도(鬱陵島)·우릉도(于陵島)·무릉도(武陵島) 등이 나온다.
일본은 울릉도를 죽도(竹島: 다케시마)라 하고
독도를 송도(松島: 마쓰시마)라고 하기도 하였으나
메이지 정권 전후에 울릉도를 마쓰시마,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하였다.
4. 자연환경
이곳은 넓은 구화구에 신화구가 분출한 이중화산인데
성인봉(聖人峯, 984m)은 외륜산에 해당하고,
신화구인 알봉분지에는 중앙 화구인 알봉[卵峯, 538m]이 있다.
섬 전체가 하나의 화산체이므로 해안은 대부분이 절벽을 이룬다.
특히 서남과 동남 해안은 90m 높이의 절벽으로 천연의 양항 발달이 어렵다.
온화한 해양성기후로 2005년의 최저 기온은 -9.1℃, 최고기온은 32.3℃,
연평균기온은 12.2℃, 연강수량은 1,511.6㎜이다.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폭풍 일수가 많다.
강수량은 연중 고르게 나타나며,
특히 겨울철에는 강설량이 많아 우데기라는 특수한 가옥 구조를 가지고 있다.
대표적 식생은 향나무·박달나무인데,
특히 향나무는 섬 전체에서 볼 수 있으며 그 밖에 해당화·섬들국화도 자라고 있다.
5. 현황
울릉도의 토지용을 살펴보면 경지 면적은 밭이 12.4㎢, 논이 0.5㎢, 임야 55.5㎢이다.
주민들은 2차 산업보다 1차 산업인 농업과 어업에 상대적으로 많이 종사하고 있다.
2차 산업 종사자는 매우 적고 관광산업의 발달로 3차 산업은 비교적 발달되어 있다.
주요 농작물은 감자·옥수수·채소·콩 등이며, 임산물로는 밤도 생산되고 있다.
농경 외에 한우와 염소의 사육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당귀를 비롯한 약초 재배가 활발하여 당귀는 해외에 수출되기도 한다.
또, 특산물로 전호(前胡)·명이·고사리·땅두릅나물 등이 유명하다.
근해는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조경수역으로 오징어·꽁치·명태 등이 어획되며,
특히 오징어는 그 품질이 우수하여 동남아시아로 수출되고 있다.
울릉도의 인구는 최근 오징어 흉작과 교육의 어려움, 자연 재해 등으로 매년 줄고 있다.
포항·후포·묵호와의 사이에 정기 여객선이 매일 운항되고,
헬기가 강릉∼울릉 간에 부정기적으로 운항된다.
2014년 현재 교육 기관으로 초등학교 5개교, 중학교 4개교, 고등학교 1개교가 있다.
6. 울릉도의 연혁
512년(지증왕 13년) 신라장군 이사부에 의한 우산국 정벌(울릉도가 최초로 문헌에 등장)
참고로 삼국지위지동이전 옥저조」의 고구려 동천왕 20년(246년)에 관한 기사에서
언급된 동해안의 섬이 울릉도라는 견해가 있음.
930년(태조 13년) 조공한 우릉도(芋陵島)주민에게 작위를 하사함.
1018년(현종 9년) 여진족의 침입을 받고 농업이 어려워 이원구를 보내어 농기구를 하사함.
1032년(덕종 원년) 우릉성주가 아들을 보내어 조공함.
1157년(의종 11년) 우릉도 주민을 이주시킬 계획(空島政策)으로
명주도 감창사 김유립을 보내 조사케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함
1379년(우왕 15년) 왜구가 무릉도(武陵島) 주민들을 본토로 귀환케 함.
1417년(태종 17년) 김인우를 안무사로 파견하여 주민들을 귀환시킴.
1614년(광해군 6년) 대마도주에게 울릉도(鬱陵島)에
왜인들의 왕래를 금지하는 금약을 준수하라는 서계를 보냄.
1693년(숙종19년) 울릉도에서 안용복 일행과 일본 어부들의 충돌로
조선과 일본 사이 외교분쟁 발생. (안용복 1차 도일)
1694년(숙종 20년) 삼척첨사 장한상 울릉도 수토, 울릉도에 대한 순찰을 강화하고,
1696년(숙종 22년) 안용복 2차 도일 일본 백기주(伯耆州) 태수와 담판,
울릉도가 조선영토임을 인정(일본인의 출어.벌채금지서계 조선에 전달)
1882년(고종 19년) 이규원 검찰사 울릉도 검찰, 울릉도 개척령 반포,
전석규 도장에 임명. (수토정책 철훼) 이주가 장려되었다.
1883년 울릉도 주민이주 시작(16호 54명)
1895년(고종 32년) 삼척영장 겸임 도장제에서 전임도장을 임명하고 도장을 도감으로 개칭.
1900년(광무 4년)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개칭하면서
강원도에 편입하고 행정구역을 남면과 북면으로 나눔(도감->군수)
1906년(광무 10년) 울도군을 경상남도에 편입. (1914년 경상남도에서 경상북도로 이속)
1915년 군(郡)제를 폐지하고 제주도와 더불어 도(島)제로 변경, 울도군청(鬱島郡廳)을
울릉도청(鬱陵島廳)으로, 군수(郡守)를 도사(島司)로 개편.(행정, 치안 총괄)
1949년 정부수립 후 울릉군으로 환원. (경상북도 울릉군)
1979년 남면이 울릉읍으로 승격, 현재의 1읍2면 체제 구축.
2000년 4월 7일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를 신설하였다.
7. 울릉도 지명의 유래 등
울릉도는 무릉, 우릉, 우산,으로 불렸던 섬이다.
1000년대 초 일본인들은 우루마로 불렀으며
1700년대 프랑스인들은 다쥐레(Dagulet)로 기록했다.
이두로 보아야 할 이 한자 표기들의 주류인 울릉과 우릉은
'ㄹ'이 하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다. 그리고 우산은 우뫼로 읽힌다.
여기에 일본인들의 우루마 곧 울마를 고려하면
울릉과 우릉의 받침 소리는 'ㅇ' 이 아니라 'ㅁ'이었지 않나 싶다.
우뫼, 울마, 울름, 우름에 가장 가까운 소리는 우르뫼의 줄임말 울뫼다.
울릉도의 본래 이름은 이렇듯 산에서 온 것이다.
(울뫼의 울은 나리분지를 울타리처럼 두른 산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울릉도의 높은산이라고는 성인봉밖에 없다.
그런데 그것은 산 없는 봉이다. 본래 산이었던 것이 봉으로만 이름이 남은 것이다.
이 추론이 맞다면 개관에서 언급한 가설은 여기서 정설로 입증된다
울릉도에서 발굴된 가장 오랜 유물은
김해식 토기 전통이 약간 남아 있는 조잡한 갈색 승문토기다.
석기나 고인돌은 물론 없다. 이로 볼 때 울릉도에 사람이 처음 들어간 것은
김해식 토기 시대 후기인 1세기쯤으로 추정된다.
울릉도로 추측되는 것이 처음 나타나는 기록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 옥저조다.
['고구려 동천왕 20년(246). 고구려에 쳐들어온 위나라 장수 관구검은
현도군의 태수 왕기로 하여금 동천왕을 남옥저(지금의 함남 남부 지역)까지 쫓게 하였다.
거기까지 온 왕기가 바다 동쪽에도 사람이 사느냐고 묻자
그 지방 사람이 "언젠가 풍랑을 만나 동쪽의 한 섬에 도착한 적이 있었는데
섬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지만 말이 잘 통하지 않았고
칠월이면 소녀를 골라 바다에 빠뜨리는 풍습이있다고 들었다" 하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에 대해 일본인 역사학자 이케우치 히로시 박사는 그섬은 틀림없이
울릉도를 가리키는 것이며 이 기록은 울릉도에 관한 가장 오랜 것이라고 한 바 있다.
우산국이라는 이름은 [삼국사기]부터 보인다.
바로 거기에 신라 지증왕 13년(512) 하슬라(강릉) 주둔군 사령관 이사부가
뱃머리에 나무 사자를 세워 우산국을 정벌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고학자 김원룡 박사는 그 우산국 사람들이
낙동강 동쪽, 지금의 강원도와 경상도 바닷가 지방 출신들이라고 본다.
그랬기에 점령 당시 이사부의 나무 사자 거짓말이 통했다는 것이다
(이사부가 거짓말을 할 때 통역을 썼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기록의 문맥으로는 직접 말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400년 넘게 자취를 감춘 울릉도가 역사에 다시 등장한 것은
고려 통일 전야인 태조 13년(930)이다
(그동안 울릉도는 정말 태평성대를 구가한 것으로 보인다).
백길, 토두라는 우릉도 사람 둘이 공물을 가지고 왕을 찾았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90년쯤 뒤인 현종 9년(1018)에는 고려 조정에서
동북 여진 해적들의 노략질로 초토화된 우산국에 농기구를 보내 주고
현종13년에는 해적을 패해온 섬사람들을
지금의 경상도 영해 지방에 살 수 있도록 조처하고 있다.
현종 때는 여진 해적의 극성기였다.
1019년에는 그들이 50척이나 되는 배를 이끌고 일본의 규슈 지방까지 내려와
463명을 죽이고 1,230명을 잡아갔을 정도였다.
그 과정에서 해적들이 포로가 되기도 했는데
그들은 대개 고려인으로서 여진 해적과 싸우다 잡혀
어쩔 수 없이 해적이 되었다고 진술했다 한다(일본 역사책에만 보이는 기록이다).
숙종 2년(1097) 안변도호부의 판관 안증은
원산 앞바다에서 열 척의 해적선과 맞붙어 40명을 죽이고 세 척을 나포했다.
숙종 12년(1107)과 그 이듬해에는 윤관이 동북 여진을 쫓고 거기에 9성을 쌓았다.
근거지를 뺏긴 여진족들은 1115년 하얼빈 부근의 회령 지방으로 옮겨 중원으로 쳐들어간다.
1125년에는 요나라를 멸망시키더니 이태 뒤에는 송나라를 몰아내고
중원의 노른자 황하 유역을 차지한다.
동양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윤관의 일격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울릉도 사람들의 기록은 이보다 한참 전인 덕종 원년(1032)을 끝으로 끊기고 만다.
해적들의 등쌀에 견디다 못해 현종 13년의 경우처럼 모두 육지로 나와 버렸던 것 같다.
이후 인종 19년(1141)과 의종 11년(1157) 조정에서 관리를 파견해
사람이 살 수 있는가 보지만 조사로 그쳤을 뿐이었다.
울릉도에 다시 사람들이 들어가서 살기 시작한 것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최중헌이 왕에게 시무 10조를 건의한 1200년경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번에는 왜구라는 해적들이 몰려왔다.
그리하여 고종 10년(1223)부터 시작되어
조선 세종 원년(1419) 이종무가 대마도 정벌을 할 때까지
196년 동안 500여 회나 쳐들어왔던 그들 때문에 울릉도는 다시 무인지경으로 되돌아갔다.
그럼에도 들어가 사는 사람이 간혹 있었다.
산것, 갯것이 지천인데다 자유의 땅인 터라 버젓이 살 처지가 안 된 사람들에게는
그만한 유토피아가 따로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면 조정에서는 군대를 보내 사람들을 잡아 육지로 끌고 들어오곤 했다.
사람이 있으면 왜구의 근거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선 태종 3년(1403)과 13, 14년, 세종 7년(1425)과 20,23년 무렵이었다.
이후 울릉도는 정말 빈 섬이 되었다.
이 지경에 이르자 일본인들은 저들 마음대로 들어와 나무를 베어가고 고기를 잡아갔다.
심지어는 제나라 땅이라며 다케시마라는 이름까지 붙여 놓았다.
그래서 동래 어부 안용복은 숙종 19년(1693)과 22년에 일본 막부로부터
독도는 조선땅임을 확인받아 이것이 양국 정부간의 공식 협약이 되게 했다.
그리고 고종 19년(1882) 조정에서는 마침내 공도정책
(섬에 사는 것을 불법으로 치는 것)을 버리고 개척령을 발표하여 울릉도의 역사를 이었다.
8. 울릉도 1일생활권 시대
한경닷컴 서화동 논설위원 입력 2022.06.13 17:20
[천자 칼럼] 울릉도 1일생활권 시대
국토의 동쪽 끝 독도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형님 섬 울릉도는
화산활동에 의해 2200m의 심해에서 솟아오른 해발 1000m 가까운 절벽 섬이다.
섬의 대부분이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뤄져 천혜의 절경을 자랑한다.
하지만 연중 100일가량은 육지로부터 고립된다.
파도가 출항 조건을 초과하면 배가 뜨지 못한다. 겨울엔 폭설과 강풍까지 겹쳐
이동이 더욱 어렵다. 응급환자가 생겨도 발만 동동 구를 뿐 육지로 나갈 수 없다.
울릉도로 여행 갔다가 며칠씩 발이 묶이는 건 예사다.
울릉도의 최근 5년 평균 선박 결항률은 22.1%에 달한다.
섬을 지배하는 건 사람이 아니라 자연이라고 하는 이유다.
울릉도의 교통은 외부와의 연결은 물론 내부 왕래도 여의치 않았다.
섬 곳곳을 연결하는 유일한 연결로인 울릉도일주도로가 완전 개통된 게 불과 몇 해 전이다.
1963년 정부가 일주도로 건설을 결정했지만 1976년에야 공사가 시작됐다.
“길을 뚫자, 파도를 막자”는 간판을 섬 곳곳에 걸어놓은 채 변변한 장비도 없이
석공들이 거의 맨손으로 돌을 깨 해안 석축을 쌓았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39.8㎞의 일주도로가 1차로 개통한 것은 2001년.
그러나 울릉읍 내수전~북면 섬목을 잇는 동쪽 4.4㎞ 구간은 울릉도에서도 절벽이
가장 험한 데다 지반이 약해 도로를 뚫지 못했다.
이 때문에 북면 사람들이 육지로 나가려면 서면을 거쳐 빙 둘러서 도동항으로 가야 했다.
이 난공사 구간을 뚫는 작업이 2011년 시작돼 2019년 3월 끝나
마침내 44.2㎞ 전 구간이 개통됐다. 북면에서 도동항까지 1시간30분 걸리던 길이
15분가량으로 줄었으니 상전벽해(桑田碧海)에 견줄 만한 변화다.
울릉도에 또 하나의 상전벽해가 이뤄지고 있다.
2020년 11월 착공한 울릉공항 건설공사다. 사업비 7092억원을 투입하는 소형 공항이지만
섬의 남쪽인 울릉읍 사동항 방파제 바깥쪽에 평균 수심 23m의 바다를 메워
1200m의 활주로와 계류장, 여객터미널 등을 만드는 난공사다.
2025년 말 공사가 끝나고 이듬해 공항이 개항하면
50인승 소형 항공기가 하루 2000명의 승객을 실어 나를 것이라고 한다.
울릉도와 육지를 잇는 ‘1일 생활권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울릉도 여행이 편리해지는 것은 물론 응급환자 등 울릉군민의 육지 나들이도
한결 수월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서화동 논설위원 fireboy@hankyung.com
9. 울릉도지질공원(ulleungdo national geopark)
울릉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마치 다른 나라에 온 듯하다.
신기한 절벽과 바다 사이에 점점이 떠있는 섬, 분화구의 평원까지
기존의 국내 여행지와는 다른 풍경이다. 살아있는 자연은 아이에게 훌륭한 배움터다.
섬 이곳저곳을 오가는 자체만으로도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신기한 자연 풍경이 자리 잡는다.
굳이 지질 탐사를 핑계 삼지 않아도 된다.
물론 한두 마디 설명을 덧붙이면 쏠쏠한 체험 학습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신기한 지질 박물관, 울릉도
아이들에게 지질학은 어렵고 낯설거나 막연한 학문이다.
하지만 모험을 다룬 많은 영화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인물이 지질학자다.
블록버스터 재난 영화에서도 지질학자들이 지구를 구한다.
지질학은 '지각1) 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자연과학의 한 분야'다.
직접 대상을 보고 만지며 자연과학 전반을 활용해 연구한다.
연구실보다는 야외에서 땅이 간직한 시간의 비밀을 찾는 것이 바로 지질학의 묘미다.
지질학의 명소만 떠올려도 지질학에 대한 생각은 바뀐다.
특별한 곳일 거라 생각하지만 제주도의 '주상절리'나 고성의 '상족암군립공원',
부안의 '격포 퇴적층'처럼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자연의 볼거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처럼 지질학적으로 중요한 지역을 환경부는 국가지질공원으로 인증했다.
지질을 파헤쳐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장소가 전국 각지에 많다.
조금만 더 넓게 생각하면 우리나라 곳곳이 야외 지질 박물관이다.
아이와 함께 여행을 하며 지질학에 한걸음 다가서 보자.
훌륭한 지질 경관을 자랑하는 미지의 섬 여행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지질공원은 제주도다.
제주도는 우리나라를 넘어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지질공원이다.
울릉도, 독도 국가지질공원 또한 제주도 못지않은 훌륭한 지질 공원이다.
지질학자들 사이에서도 제주도 못지않은 '지질학의 보고'라고 불린다.
울릉도는 우리나라 동쪽 끝 섬으로,
서해나 남해와 달리 섬이 많지 않은 동해 바다의 형성 과정을 밝혀줄 단서다.
울릉도와 독도의 유명한 여행지 대부분이 빼어난 지질 경관을 자랑한다.
울릉도 여행이 곧 지질 여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두드러지는 지질은 울릉도 가장자리에 해당하는 해안 절벽 '해식애2) '다.
울릉도는 부서지기 쉬운 응회암질이라 파도(파랑)나 바람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래서 기묘한 형상의 절벽이 많다.
도동의 '행남해안산책로', 태하의 '대풍감전망대' 등은 그 진수다.
행남해안산책로는 해안 도보 산책 코스로 울릉도의 자랑거리다. 절벽 아래 난 데크를 따라
'아아용암' 등의 지질을 살피며 걷기에 좋다.
초기 울릉도의 화산 활동 특징을 간직한 곳이다. 해안폭포와 해식동굴 등도 만난다.
서면의 대풍감전망대도 가볼 만하다. 우리나라 '10대 비경'이라 불리는 울릉도의 명소다.
대풍감전망대에서는 해식애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바다의 아치 '시아치'와 바다의 굴뚝 '시스택'
바람이나 파도가 행남해안산책로나 대풍감 일대로 계속 불어들면 어떻게 될까?
파도나 바람이 절벽이나 바위를 공격하면 약한 부분이 부서지고 강한 부분만 남게 된다.
그 모양이 아치(arch)를 닮은 것은 '시아치',
지붕도 없는 굴뚝 모양을 닮은 것은 '시스택'이라고 부른다.
울릉도는 해안 절벽과 더불어 해안의 다양한 바위가 여행의 묘미를 선사한다.
시아치는 북면의 '악어터널'이 잘 알려져 있다.
아치 모양이 마치 악어가 입을 벌린 모양이다. 그 아래로 해안 도로가 통과한다.
이곳을 지나갈 때 거짓말을 하면 악어가 입을 닫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닭다리처럼 생겼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울릉도의 대표 시스택은 울릉읍 저동항의 '촛대바위'와 서면 통구미항의 '거북바위'다.
방파제에 기댄 저동항의 촛대바위는 육지와 떨어져 촛대처럼 서있다.
아침 해가 뜰 때 가장 아름답다.
통구미항의 거북바위는 포구 근처의 커다란 바위로 한 마리 거북이 육지를 향해
들어오는 모양이다. 보는 방향에 따라서는 바위를 오르는 대여섯 마리의 거북으로 보인다.
거북바위는 비슷한 크기의 다른 바위에 비해
비교적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게 장점이다.
물때에 따라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볼 수도 있다. 거북바위 서쪽 면에 공 모양으로 생긴
용암 덩어리 '라바볼(용암구)4) '도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거북바위 같은 지형은 시간이 지나면 외딴 섬으로 바뀐다.
가까이 접한 육지가 바람과 파도에 부서지며 점점 침식하기 때문이다.
북면 앞 바다에 있는 '코끼리바위'나 '삼선암' 등이 이런 경우다.
코끼리바위는 코 부분이 10m 높이의 시아치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코끼리바위라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코끼리와 닮았다.
코끼리바위의 코 부분은 시간이 지나면 침식되어 떨어져나갈 확률이 높다.
삼선암이 그 예다. 삼선암은 울릉도 북면 해안에 솟아있는 세 개의 바위섬이다.
그 가운데 이선암과 삼선암은 지척에 있는 섬이다.
원래 두 섬은 시아치로 이뤄진 하나의 바위였는데 시간이 지나
침식이 이루어져 두 개의 바위가 됐다.
화산 폭발로 생겨난 나리분지
그럼 해안의 해식애나 시아치, 시스택이 생기기 이전 태초의 울릉도는 어떤 섬이었을까?
울릉도는 제주도와 마찬가지로 화산 폭발로 생겨난 섬이다.
신생대 3기 화산 활동이 섬의 큰 틀을 만들었고,
신생대 4기 동안 바람과 파도의 침식과 퇴적 과정을 거치며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했다.
화산 폭발이 만든 울릉도의 가장 흥미로운 지형은 '나리분지'다.
북면 천부항에서 고개를 넘으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울릉도 최대의 평지가 나온다.
절벽의 해안 도로를 오갈 때 상상할 수 없는 평원이 펼쳐진다.
더 놀라운 것은 거대한 평원이 화산 폭발로 생겨났다는 사실이다.
나리분지는 원래 너른 분화구였지만, 지하 공간이 비며 한 차례 함몰이 생겼고
지금과 같은 평지가 됐다. 나리분지 뒤편으로는 '알봉'이라는 작은 봉우리가 있다.
이 지형은 분화구 안에서 또 한 번의 화산 폭발로 생겨났다.
일대의 가을 단풍과 겨울 설경은 우리나라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다.
울릉도에서 꼭 봐야 할 주상절리와 빼어난 자연 경관
주상절리도 빼놓을 수 없다. 주상절리는 제주도 대포주상절리가 먼저 떠오르지만
울릉도에는 그 못지않은 주상절리 명소가 많다. 남양에는 국수 가락처럼 생긴
'국수바위'가 있다. 비파라는 악기를 닮아서 '비파산'이라고도 한다.
'관음도' 역시 주상절리 명소다. 관음도는 울릉도 본섬에서 보행연도교를 건너 진입하는데,
다리 아래쪽에 해안과 접한 경사면이 주상절리다. 바다를 향해 부채처럼 펼쳐진 모양이다.
코끼리바위는 전체가 주상절리로 덮여있다.
몸통은 관음도와 마찬가지로 부챗살 모양이고 코와 다리는 바둑판 모양이다.
마치 코끼리의 피부를 새겨 넣은 듯하다.
독도리 서도에 있는 탕건봉에서도 주상절리를 볼 수 있다.
이밖에도 울릉도 해안 도로를 달리다 보면 곳곳에서 멈춰 설 수밖에 없는 경관이 나타난다.
'송곳봉'이나 '노인봉', '투구봉'처럼 해안에 우뚝 솟아있는 항구의 랜드마크는 물론,
도로 옆에 절벽과 바위 하나도 예사롭지 않다. 그 신기한 모양이 어떻게 생겨났을까
궁금증을 갖는 순간 지질학은 더 이상 지루한 공부가 아니다.
예림원은 울릉도 유일의 예술 공원이다.
예술 할 때 '예(藝)'와 수풀 할 때 '림(林)'을 따서 예림원이라고 부른다.
또 다른 이름은 '문자조각공원'이다. 예림원 내에는 문자 모양의 조각작품이 많다.
'꿈', '와~', '사랑', '행복해' 같은 한글 모양의 조각작품도 있고
'閑暇', '大' 같은 한자 모양의 조각작품도 있다.
문자 조각작품은 예림원을 만든 박경원 원장의 작품이다.
박경원 원장은 예림원의 조각은 물론 나무와 꽃, 집까지 직접 만들었다.
예림원에는 '울릉자생식물원'도 있다. 울릉도가 고향인
'울릉국화', '섬개야광나무', '솔송나무' 등을 볼 수 있다.
또한 예림원에서 보는 울릉도 앞바다 전망도 일품이다.
9-1) 봉래폭포 (울릉도, 독도 국가지질공원)
위치 :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 산39
봉래폭포는 암석의 차별침식에 의해 3단 폭포를 이루며,
하부로부터 화산 폭발 시 분출된 각력들이 모여 형성된 집괴암이 3단과 2단을 이루며,
화산재가 굳어져 생성된 응회암, 분출암의 일종인 조면암이 1단을 이루고 있다.
조면암은 강도가 커서 하부의 암석에 비해 침식이 덜 되는 편이지만 아래에 놓인
집괴암과 응회암이 깎여 나가면서 균열이 많아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다.
앞으로 하부 응회암과 집괴암이 더욱 침식되면,
상부 조면암은 무너지게 되어 폭포는 점차 뒤로 물러나게 된다.
총 낙차는 약 30m이며, 유량은 3,000톤/일 이상으로
울릉도 남부일대의 중요한 상수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봉래폭포관리소에서 봉래폭포까지는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으며,
찬바람이 불어나와 ‘천연에어컨’이라 불리는 풍혈(=바람구멍),
산사태 피해를 막기 위해 설치한 사방댐,
아토피성 피부염 완화 및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산림욕장이 있다.
또한 섬노루귀(=큰노루귀), 겨자냉이(=고추냉이), 노란물봉선, 큰연영초,
섬남성(=우산천남성), 왕호장(왕호장근)의 풀 종류와 너도밤나무, 우산고로쇠, 삼나무,
헛개나무, 말오줌나무(=말오줌때나무), 편백나무의 나무 종류 등
다양한 식생을 볼 수 있어 지질 뿐만이 아니라 생태 교육장소로도 훌륭한 지질명소이다.
9-2) 관음도 (울릉도, 독도 국가지질공원)
위치 : 경상북도 울릉군 북면 천부리
관음도는 총 면적 71,405m2, 높이 106m, 둘레 약 800m로,
죽도(207,868m2), 독도(187,554m2)에 이어 세 번째로 큰 울릉도 부속섬이다.
현재는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지만,
2012년 울릉도 섬목지역과 관음도 사이에 걸어서 이동할 수 있는 다리,
즉 연도교가 놓여져 관음도를 도보로 탐방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바람이 세게 불 때는 출입을 통제하기 때문에
반드시 사전에 울릉군청 홈페이지 메인화면에 출입가능여부를 확인하고 가야한다.
관음도는 깍새가 많아 깍새섬이라고도 부르며,
계절별로 다양한 식생이 자리하여 생태탐방지로 추천하는 곳이다.
봄에는 보리밥나무 열매, 후박나무 새순, 말오줌나무 꽃, 쑥부지갱이 어린잎을 볼 수 있고,
여름에는 섬바디 꽃, 말오줌나무 열매, 갯까치수염 꽃, 초종용 꽃을 볼 수 있다.
가을에는 억새와 갈대, 보리밥나무 꽃과 연자주색의 왕해국을 볼 수 있으며,
송악, 감탕나무와 후박나무, 동백나무 꽃을 볼 수 있다.
관음도는 조면암질 용암이 여러 번 분출하여 형성되었으며, 섬의 표면은 부석으로 덮여있다.
관음도 북쪽 하부 해안절벽에는 높이 14m 가량의 두 동굴이 있는데,
이를 관음쌍굴이라고 부르며, 해식으로 조면암에 발달한 주상절리와
수평절리를 따라 암석이 무너져 내려 생성되었다.
예전에는 해적의 소굴로 이용되었다고 전해지며,
동굴의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을 받아 마시면 장수한다는 설이 있다.
10. 울릉도, 독도 전력 공급
울릉도 자체 내연발전소 2곳에서 90% 이상 담당(10,500kW, 8000kW)
내연발전소는 쉽게 말해서 기름으로 돌리는(정확히 석유정제하면서 나오는 부산물)발전소
나머지 10% 미만은 울릉도 내 수력발전소 2곳(600kW,100kW)
독도는 완전 자가발전
2010년에 설치된 50kW급 태양광 시설에서 25%, 나머지는 전부 디젤발전
10-1) 추산수력발전소(錐山水力發電所)
경상북도 울릉군 북단의 송곳산(추산) 옆에 위치한 소형 발전소.
화산으로 형성된 산허리에 있는 높이 270m의
바위 사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용출수)을 이용한 것이다.
이 용출구로부터 나온 물은 수로를 통하여 제2발전소로 들어가고,
여기에서 방류된 물과 인근 소계곡에서 모인 물을 제2발전소의 저수조에 저장하였다가
수로를 거쳐 제1발전소에서 발전에 이용하고 바다로 방류된다.
추산제1수력은 도서 전원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울릉전업공사에서
1964년 착공하여 1966년 5월 준공, 발전해오던 것을 한국전력주식회사가
1969년 6월 1억 9,800만원에 인수하였으며,
일본 가와사키중공업에서 제작한 600㎾의 횡축 프란시스 수차발전기가 2대 설치되어 있다.
추산제2수력발전소는 1976년 2월 정부의 건설지시에 따라 건설계획을 확정하고
1976년 8월 착공, 1978년 10월 준공하였으며,
제1수력과 용출구의 중간지점인 높이 162.6m 위치에
설용량 200㎾(100㎾ 횡축 펠톤 수차발전기 2대)의 발전설비를
이천전기주식회사에서 제작하였으며, 공사비는 1억6200만원이 소요된 소규모의 발전소이다.
이 2개 발전소 4개 발전기에서 생산된 전력은 6.6㎸ 배전선로를 통하여
울릉도 저동에 위치한 내연발전소와 함께 울릉도 전역에 전력을 공급하고 있다.
10-2) 울릉도내연발전소(鬱陵島內燃發電所)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저동리에
내연발전기 9대를 보유하고 있는 총시설용량 8,000㎾의 내연발전소이다.
1970년대 중반기까지 울릉도의 전력 공급은 전량 수력발전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유일한 전력공급원인 1,200㎾급 추산수력발전소의 고장시
또는 갈수기 발전용수의 부족에 따른 전력생산능력 부족시에 대처하기 위하여
화력발전설비의 확보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56년 6월 당시 국제연합한국부흥위원단(UNKRA) 원조자금으로 도입된
미국의 유니온(Union)회사 제품의 100㎾급 내연발전기 2대 및 250㎾급 내연발전기 1대를
진도내연 및 성산포내연발전소에서 각각 이설하여, 1977년 3월 준공되었다.
그 뒤 도서지방 전력수급 대책의 일환으로 일본의 얀마회사 제품인
1,000㎾급 내연발전기 2대가 1980년 4월 증설되었고,
이어서 그해 10월 한국중공업주식회사와 일본의 다이하쓰회사에서 제작한
500㎾급 내연발전기 2대의 증설공사가 준공되었으며, 신규설비의 확보에 따라
구내연발전설비 3대(시설용량 450㎾)는 설비 노후로 1981년 11월 15일 폐지되었다.
또한, 계속되는 전력수요의 증가로 1980년대 하반기 전력공급상 불안이 예상되었는바,
1,000㎾급 내연발전기 2대의 증설공사가 추진되어
1986년 6월 준공됨으로써 울릉지구의 전력난은 완전히 해소되었다.
이 발전설비는 한국중공업주식회사에서 제작,
공급한 국산화율 100%의 설비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총건설비는 13억 8,600만원이 투입되었다.
1986년 8월 1,500㎾급 내연발전기 2대가 추가로 준공되었다.
러일전쟁 중이던 1905년 울릉도 앞바다에 침몰한러시아 순양함 ‘드미트리 돈스코이’. [중앙포토]
10-3) 150조 금괴 실렸다는 울릉 앞바다 보물선, 이번엔 진짜 인양?
중앙일보 김정석 입력 2017.09.21. 01:02 수정 2017.09.21. 06:42 댓글 63개
러일전쟁 때 침몰한 돈스코이함/ 일제 때 일본인들 보물 찾기 열풍/
99년엔 동아건설 인양 나섰다 중단/
주가 급등·폭락 .. 투자자 손실/ 당시 임원이 만든 건설사가 재시도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울릉도 앞바다에 침몰한 러시아 선박의 인양작업이 추진되고 있다.
현재 가치로 150조원으로 추정되는 금화·금괴 5000상자와 함께 침몰됐다고 전해지는
6200t급 순양함 ‘드미트리 돈스코이’ 이야기다.
20일 건설업계에 따르면 서울에 본사를 둔 건설업체 신일광채그룹은
최근 ‘드미트리 돈스코이함’ 인양을 추진하고 있다.
러시아 전쟁영웅 드미트리 돈스코이(1350~1389) 대공의 이름을 딴 이 배는
1905년 5월 29일 일본 함대의 포위를 뚫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다
울릉도 앞바다 70㎞ 해상에서 다시 포위됐다.
당시 돈스코이함 함장은 배를 일본 해군에 넘겨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울릉도 동쪽 앞바다로 최대한 배를 이동시킨 뒤
160여 명의 선원에게 해변으로 가라고 명령하고 배수판을 열어 배를 고의로 침몰시켰다.
돈스코이함이 ‘보물선’으로 불리는 이유는 당시 러시아 발트함대가
상당량의 금화·금괴·골동품을 배에 싣고 다닌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당시 함대는 기술적 한계 탓에 연료와 식수·보급품 등을
중간중간 항구에서 구매하는 방식으로 원거리 항해를 했다.
여기에 장병들에게 임금도 지급해야 했기에 배에 금화·금괴 등을 실었다고 한다.
112년 전 침몰한 ‘보물선’ 이야기가 다시 주목받는 것은
국내 건설업체 신일광채그룹이 돈스코이함 인양사업에 나서면서다.
이 업체는 아예 돈스코이함 인양사업을 회사의 비전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그룹은 최근 자사 홈페이지를 통해 ‘돈스코이함은
해양수산부도 그 존재를 인정하는 실존하는 보물선이다.
반드시 보물선 돈스코이함을 인양해 세상에 그 존재를 보여 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일광채그룹 측은 ‘돈스코이함은 1999년 동아그룹이
사업비 70억원 중 27억원을 들여 탐사해 울릉도 앞바다에서 발견했다’며
‘금괴와 금화가 없다면 당시 러시아 정부가 소유권을 주장하지도, 주장할 이유도 없었다.
금괴와 금화가 진짜 존재하기 때문에 소유권을 주장했던 것’이라고 했다.
돈스코이함 인양 시도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일본은 1916년 처음으로 돈스코이함 인양사업을 시작한 후 수십 년간 도전해 왔다.
1932년 11월 미 뉴욕타임스에 실린
‘보물선을 사냥하는 일본’이라는 기사에도 이런 상황이 그려졌다.
국내에선 1981년 도진실업이라는 회사가 돈스코이함 인양을 시도한 것이 최초다.
도진실업은 당시 매장물 발굴 허가를 얻어 탐사를 시도했다.
하지만 당시 기술로는 한계가 있어 돈스코이함을 발견하는 데 실패했다.
이어 인양사업에 뛰어든 곳은 1998년 외환위기로 위기에 처했던 동아건설이었다.
이 회사는 쓰러져 가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 사활을 걸고 인양사업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거듭된 실패 끝에 2000년 12월 보물선 실체가 확인됐다고 알려지면서
당시 동아건설 주가는 급등했다.
하지만 동아건설은 실체를 확인했다던 돈스코이함을 인양하지 못했다.
탐사를 통해 확인한 선박이 돈스코이함인지 알 수 없다는 반론도 나왔다.
결국 주가가 떨어지며 동아건설 투자자들은 막대한 손해를 봤다.
이듬해인 2001년 3월 9일 서울지법은 동아건설 파산을 결정했다.
최근 다시 돈스코이함 인양에 나선 신일광채그룹은
동아건설 전 임원들이 2015년 6월에 세웠다. 홍건표(57) 신일광채그룹 회장은
동아건설 회생본부장 출신이다. 현재 주력 기업은 건설사인 신일유토빌이다.
STX중공업 인수도 추진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보물선 인양 추진에 대해 신일광채그룹이 회사 이름을
일반에게 알리고 투자자를 끌어모으기 위한 수단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신일광채그룹 관계자는 중앙일보 기자와의 통화에서
“돈스코이함의 침몰과 금괴 보관은 역사적 사실”이라며
“20여 년 전엔 탐사에 나섰다가 중단했지만
이번에는 중단 없이 끝까지 탐사해 보물선 인양에 성공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 '울릉도~독도' 진화 실험실
"울릉도 동남쪽 뱃길따라 이백리 외로운 섬 하나 새들의 고향…."
독도를 바다 밑에서 보았다면 이 노래 가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울릉도와 독도는 다른 해저 산(해산)들과 옹기종기 모여 해저 산맥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동일한 탄생기원을 지닌 ‘친 형제들’일 가능성이 높다.
해저 지형조사 결과 울릉도는 수심 2000m의 바다에서
수면 위로 1000m 가까이 솟은 총 높이 3000m 규모의 화산체인 것으로 밝혀졌다.
독도도 해수면 밑에 높이 2000m, 직경 20~25㎞인 한라산 크기의 화산체를 숨기고 있다.
독도의 동도와 서도는 이 거대한 화산의 평평한 정상부에,
마치 산꼭대기 텔레비전 중계탑처럼 뾰족 솟아 있다.
1. 하와이나 갈라파고스 군도와 유사한 탄생설
독도 동쪽 약 15㎞와 55㎞ 떨어진 곳에는 독도해산과 규모가 비슷한
심흥택해산과 이사부해산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울릉도에서 독도를 거쳐 이사부해산까지 동해 바다에 띠처럼 이어진 섬과 해산은
하와이나 갈라파고스 군도처럼 맨틀상승류와 열점에 의해 탄생했다는 가설이 유력하다.
10여개의 작은 섬들이 사슬을 이루고 있는 하와이 군도는
특이하게도 북서쪽으로 갈수록 섬의 나이가 많아진다.
남동쪽 끝인 큰섬에서는 용암을 분출하는 화산활동이 아직도 활발하다.
지난 500만년 동안 화산활동을 하던 북서쪽의 섬들은
하나씩 불을 끄고 파도에 깎이며 물속으로 잠겨들고 있다
큰섬 남동쪽 바다밑에선 활화산 하나가 언젠가 수면 위 섬으로 떠오를 날을 기다리고 있다.
2. 해식동굴인 독도의 천장굴
맨틀과 핵의 경계인 약 3000㎞ 지하에서
주변보다 뜨거운 맨틀이 지표면으로 솟아올라 지각과 만나는 곳이 열점이다.
고정된 열점이 서서히 움직이는 지각판을 달궈 화산활동이 일어나면서
이사부해산부터 심흥택해산, 독도, 울릉도 등 일련의 해산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울릉도와 독도 주변 동해의 해저 산맥
<자료 제공: 한국해양연구원 독도전문연구센터>
1990년대 중반부터 독도의 형성을 연구해온 손영관 경상대 지구환경과학과 교수는
"울릉도에서 동쪽으로 갈수록 해산의 나이가 많아진다는 사실이
여러 연구에서 밝혀졌다"고 말했다. 해양수산부가 2005년 수행한
‘독도 해양생태계 조사연구’ 보고서에서도 "독도 주변의 지자기이상을 조사한 결과
독도해산이 동쪽에 있는 두 개의 해산보다 뒤에 분출했음을 알 수 있다"며
"해산의 배열 모습과 지형적 특징이 열점 개념의 화산체임을 뒷받침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심해저 굴착을 통해 해산에서 직접 채취한 암석의 연대와 지자기 등을 측정해야만
동해 해산 출생의 기원을 정확히 밝힐 수 있다.
수심 2000m가 넘는 심해에서 이런 작업을 하기는 어렵다.
유일하게 암석이 수면 위로 드러난 독도와 울릉도에서 단서를 찾을 수밖에 없다.
3. 빠르게 무너져 내리고 있는 독도
독도는 460만 년 전 수중화산으로 탄생했다.
조용히 용암을 분출하던 초기 독도는 수면 위로 성장하면서 격렬한 폭발을 일으켰다.
250만 년 전 화산활동을 멈췄을 때 독도는 지금보다 수십배 큰 화산체였다.
응회암과 각력암이 미처 굳지 않은데다
단층과 주상절리를 통한 침식 때문에 독도는 빠르게 무너져내리고 있다.
현재의 독도는 화산 분화구 바깥 테두리 가운데 남서쪽 일부가 남아있는 것이다.
화구는 독도 북동쪽으로 수백m 떨어진 바다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손 교수는 "독도가 처음 울릉도 크기였다면
지난 250만 년 동안 전체의 99%가 깎여나간 셈"이라며
"지질학적으로 수명이 얼마 안 남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독도가 수천~수만년 안에 사라질 걱정은 없다"고 덧붙였다.
4. 화산활동으로 생겨난 울릉도의 나리분지
울릉도는 약 140만년 전부터 1만년 전까지
5단계에 걸쳐 화산활동을 거치며 탄생한 섬이다.
마지막 화산활동은 9300~6300년 전에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그마가 빠져나간 화산 윗부분의 빈 공간이 무너져 내리면서 나리분지가 생겼고,
분지 서쪽엔 또다른 분화구인 알봉이 있어 이중화산을 이루고 있다.
울릉도는 독도가 화산활동을 멈춘 지 100만년 뒤에야 분화를 시작했지만
주요 암석이 알칼리 계열 조면암이고 화학적 구성도 매우 비슷한 것으로 밝혀졌다.
일본 대륙붕의 연장인 오키섬과는 탄생 과정부터 전혀 달라
이종익 한국해양연구원 극지지구시스템연구부 박사는 논문을 통해
"독도와 울릉도의 화산활동이 같은 맨틀 상승류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며
"화산활동의 시차는 맨틀상승류의 주기성과 지각판의 이동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울릉도의 마지막 화산활동기에 비추어 현재 열점의 위치는
울릉도 화산체 아래에 존재하거나 그 위치에서 소멸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박사는 열점 기원설의 한계로 해저 화산체에 대한
절대연령 측정자료가 없고 판 이동을 깔끔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점을 들었다.
김창환 한국해양연구원 독도전문연구센터 박사도
"지각을 남북으로 당기는 힘에 의해 동해가 탄생했고, 이 힘은 이후
동서방향의 압축력으로 바뀌어 독도, 울릉도 등 해산을 형성한 것으로 판단된다"며
"지각판이 이동하기보다는 해저지각이 갈라진 틈에
순차적으로 화산활동이 벌어진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독도의 형성과정
<자료 제공: 한국해양연구원 독도전문연구센터>
독도의 형성과정 연구는 진행중이지만
독도가 일본 오키섬과 생성원인이 전혀 다르다는 성과를 거뒀다.
독도화산체는 일련의 열점 활동 결과여서
일본 대륙붕의 연장인 오키섬과는 탄생 과정부터 다르다는 것이다.
경북도는 울릉도·독도의 이런 지질학적 가치를 살려
유네스코 세계유산과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하기 위한 타당성 조사를 벌이고 있다.
조사책임자인 장윤득 경북대 지질학과 교수는
"독특한 생물진화가 일어나는 울릉도와 해산의 진화과정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독도는
세계적으로도 뛰어난 보전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글 조홍섭 / 환경전문기자 ecotink@hani.co.kr
□ 독도의 역사(나무위키)
1. 개요
2. 전근대
2.1. 12세기 이전: 우산국
2.2. 12세기-14세기:무릉도와 우산도
2.2.1. 세종실록지리지
2.3. 15세기: 삼봉도 오류
2.4. 17세기: 다케시마와 마쓰시마, 그리고 안용복
2.4.1. 은주시청합기
2.4.2. 안용복 사건 진술의 신빙성은?
2.5. 17세기 후반-19세기 초반: 울릉도로의 지속적인 재파견과 독도의 인식 확대
3. 근현대
3.1. 19세기: 서양의 측량과 아르고노트 오류
3.2.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울릉도의 재개척과 '독도'의 탄생
3.3. 20세기: 일제의 패망과 독도의 행방
3.4. 1953년-1956년: 독도의용수비대
3.4.1. 일본과의 교전 및 침입 기록
3.5. 1960년대 이후
4. 옛 지도의 독도
1. 개요
독도의 역사를 서술한 문서.
2. 전근대
전근대 독도사(史)는 보통 울릉도와 함께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이사부가 정복한 '우산국'은 울릉도를 모도(母島)로 주변 부속섬을 아우르는 나라였고,
안용복이 지킨 '다케시마'도 당시에는 울릉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대부분의 독도 기록은 그 내용이 두리뭉실하게 서술되거나 아예 독도가 아닌 것처럼
서술된 지도나 문헌도 많은데, 그 원인은 공도정책의 일환으로
울릉도에 대한 민간인 출입이 엄격히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2.1. 12세기 이전: 우산국
독도를 발견한 것은 적어도 신석기 시대부터 거주하던
울릉도 주민들이 처음 한 것으로 추정된다.
울릉도에서 독도는 날이 맑으면 육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
이러한 섬을 울릉도 주민들이 발견하지 못 했을 리 없고,
삼국사기에 이사부가 현 울릉도까지 130km를 대규모 인력을 이끌고
정벌한 사실에 근거하여 당시 울릉도에서 90km 떨어진 독도로
항해하는 것이 능히 가능했을 것이라고 추정되기 때문이다.
독도가 간접 언급된 첫 문헌으로 추정되는 것은 한국 측의 삼국사기(1145년)로
지증왕 13년에 있었던 이사부의 우산국(于山國) 정벌을 다룬 내용이
독도가 편입된 첫 시기로 추정된다. 이는 동국문헌비고, 만기요람, 증보문헌비고 등에서
"울릉과 우산은 모두 우산국이다"라는 문구에 기초한 것이다.
삼국사기에서 우산국에 관음도, 죽도, 독도 등의
부속섬이 포함되었다는 직접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18세기 편찬된 동국문헌비고에 "여지지에 이르기를 울릉도와 우산도는 우산국의 땅인데
우산도는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점에 비추어
그 영유 인식이 문헌상 인과적으로 확인된다.
이에 따라 한국 역사학자들은 고대의 독도가 울릉도에 있던
우산국이라는 나라가 통치하던 땅으로 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무리가 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우산국에는 울릉도 이외에
현재의 독도를 뜻하거나 암시하는 묘사가 없다. 게다가 일본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우산국의 영토에 독도가 포함되었다면, 그리고 그것이 우산도라면 본토인 울릉도를 놔두고
미쳤다고 살 수도 없는 독도를 우산도라고 일컬었겠느냐고 반격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산도=독도를 가장 명확히 밝힐 수 있는 최초의 문헌은 세종실록지리지이고
그 세종실록지리지조차 일설에는 우산도=울릉도라 카더라 할 만큼
우산도에 관한 기술은 가지각색이다. '울릉도와 우산도가 모두 우산국의 땅이었다.'라는
최초 기록은 동국문헌비고이고 이 기술도 안용복 사건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신라와 고려에 복속되어 있던 우산국은 고려사에 의하면
1018년에 동북방 여진족들의 원정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12세기 즈음에 이르러 끝내 해체되어 버리고 만다.
남은 주민들은 대부분 울진군 지역에 이주했다. 웬 뜬금없는 여진족인가 싶을 수 있지만
여진족은 고려시대에 지금의 함경도에서 살고 있었고 함경도에서 동남쪽으로 항해하면
울릉도와 독도가 그렇게 멀지는 않으며, 이 11세기 초반에는 여진족 해적이
일본 서부 일부 지방까지 가서 약탈을 할 정도로 극성이었음이
일본 기록에서도 교차 검증되는데 그 사이에 끼인 우산국은
충분히 여진족에게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고 볼 수 있다.
2.2. 12세기-14세기 : 무릉도와 우산도
우산국이 사라진 뒤 고려에서는 의종이나 최충헌이 울릉도 개척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고,
또 국가의 통제를 피해 울릉도로 들어가 사는 사람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를 보였다.
고려 이후 들어선 조선은 잘 알려진 것처럼 극성을 부리는 왜구에 맞서고,
또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섬 지역에 대한 인구 쇄출(刷出)을 단행했다.
울릉도도 예외가 아니어서 태종은 1425년(세종 7)에 김인우(金麟雨)를
무릉등처안무사로 삼고 울릉도로 들어가서 주민들을 설득하여 육지로 나오도록 조처했다.
바로 이러한 과정 속에서 기존에는 한 섬인 것처럼 인식하던
우산도(于山島)와 무릉도(武陵島)가 짝을 이루어 기록되기 시작한다.
안무사 김인우가 우산도에서 돌아와 토산물인
대죽, 물소가죽, 생모시, 목화솜, 떡갈나무 등을 바쳤다.
또한 거주하던 사람 3명을 데리고 왔는데,
그 섬은 호(戶)가 무릇 15가구이고 남녀 아울러 86명이었다.
김인우가 갔다가 돌아오면서 거듭 태풍을 만나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고 했다.
─ 『태종실록』 17년(정유) 2월 5일 3번째 기사
쇄출하자는 주장이 옳다. 저들은 일찍이 역(役)을 피하여 편안히 살아왔다.
만약 토공(土貢)을 정하고 주수(主帥)를 둔다면 저들이 분명 싫어할 것이니
오래도록 머물러 있게 할 수 없다. 마땅히 김인우를 그대로 안무사로 삼아서
우산과 무릉 등지에 돌아 들어가 그 주민들을 이끌고 육지로 나오게 해야 할 것이다.
─ 『태종실록』 17년(정유) 2월 8일 1번째 기사
바로 이듬해인 1417년(태종 17)에 2차 쇄출,
1423년(세종 7)에 3차 쇄출,
1438년(세종 20)에 4차 쇄출이 거듭되었고,
이와 더불어 요도(蓼島)라는 섬의 존재를 탐문하는 일이 이어지면서
조선 조정은 차츰 동해에 있는 섬들의 존재를 실사해나가게 되었다.
더욱이 본토로 쇄출된 울릉도민에 의해 울릉도에 대한 경험이 축적됨에 따라
우산도는 무릉도와는 서로 다른 두 섬으로 개념이 분리되어 나갔다.
여기에 무릉도가 오늘날의 울릉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확정되면서
우산도는 울릉도 외의 한 섬을 가리키는 것으로 굳어졌다.
이에 따라 쇄출을 집행하는 사람의 직함도 1차 쇄출의 '무릉등처안무사'에서
우산도와 무릉도가 나열된 '우산무릉등처안무사'로 확장되었고,
3차 쇄출 이후에는 이 가운데 무릉도가 울릉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확정되면서
4차 쇄출에서는 다시 '무릉도순심경차관'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혼동을 겪으면서 확장된 지리적 지식은
이후 편찬된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여기에 울릉도가 있다.
(이 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신라 때에는 우산국이라 칭하였고,
일설에 무릉이라고 하고, 일설에 우릉이라 한다. 지방 백리이다.
지증왕 12년에 항복해 왔다. …… 일설에 우산과 울릉은 본래 2섬인데,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며,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 김종서 등, 『고려사』「지리지」 강원도 울진현조, 1451년
문제는 고려사는 우산도-울릉도 1도설을 본설로 채택하고 2도설을 일설로 하고 있다.
우산과 무릉 2섬이 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2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며,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신라 때에는 우산국이라 칭하였고, 일설에 울릉도라 한다. 지방 백리이다.
험준함을 믿고 복종하지 않아, 지증왕 12년 이사부가……)
─ 김종서·정인지 등, 『세종실록』「지리지」 강원도 울진현조, 1454년
여기서는 2도설을 본설로 하고 1도설을 일설로 하고 있다.
가와카미 겐조는 고려사를 잘못 베낀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다만, 이 시기의 우산도가 독도가 아닐 가능성도 제기 중이다,
다름 아닌 우산도에 대한 묘사 때문인데, 우산도의 묘사를
86명이 사는 비옥한 석벽에 둘러싸인 섬으로 묘사되어 있고,
당시 울릉도는 공도, 즉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이기 때문이다.
90km라는 먼 거리를 '부속 도서로 취급할만한 거리'인지도 의문이다.
또한 이후 우산이라는 이름은 조선왕조에 걸쳐 등장하는 일이 굉장히 적은데,
당장 조선왕조 실록을 펼쳐서 우산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태종 3건, 세종 4건, 문종과 단종 1건, 그리고 고종1건이 나온다.
그 사이 실록에 등장한 적이 아예 없다는 뜻.
이 원인 해당 실록에 등장한 이유인 울릉도의 쇄출정책과 공도정책의 영향이 크다.
그러나 이 말인 즉슨 조선 조정이 우산도라는 존재를
실감하지 않거나 아예 까먹은것이라는 의미도 된다. 공도 정책 이후
실록에 등장하는 섬은 무릉도(울릉도)가 전부인데, 만약 중요도가 있었다면
우산도 또한 올라왔겠지만 중요도 때문인지 아니면 관심을 끈 건지
아예 등장 자체를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 사이 조선이 이 섬에 대해
실질적인 영향을 했는지는 오리무중이다.
2.2.1. 세종실록지리지
우산, 무릉의 두 섬은 (울진)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두 섬이 서로 멀지 아니하여, 날씨가 청명한 날에는 충분히 바라볼 수 있다.
于山、武陵二島在縣正東海中. <二島相去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
《세종실록지리지 강원도 삼척 도호부 울진현》
일본의 가와카미 겐조(川上健三)는 세종실록이 고려사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울릉도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 우산도를 착오로 집어넣었다고 주장했으나,
애초에 고려사와 세종실록은 김종서로 편찬 책임자부터가 동일인이다.
울릉도에 파견되어 주민의 쇄출을 집행한 김인우의 직함 또한
1차 쇄출(1416년)에서는 '무릉등처안무사'였다가,
3차 쇄출(1423년)에서는 '우산·무릉등처안무사'로 바뀐다.
따라서 당시 조선이 울릉도, 독도라는 두 섬을 따로 인식했음은 분명하다.
그는 또 울릉도에서 독도를 보려면 130m 이상 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울릉도는 안개가 잦고 삼림에 덮여 있으므로 오르기 힘들었다고 주장하였다.
근데 울릉도 성인봉의 높이는 무려 984m고,
울릉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마을인 나리분지만 해도 250m에 달한다.
게다가 고려사엔 1157년에 이미 명주도감창 김유립이
울릉도 정상에서 사방을 답사한 보고가 기록되어 있다.
5월 병자일
○ 동해 가운데 있는 우릉도(羽陵島)는 옛날 주현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땅이 넓고 기름져 사람이 거주할 수 있다는 말을 왕이 듣자
명주도감창(溟州道監倉)·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김유립(金柔立)을 파견해 살펴보게 했다.
김유립이 돌아와서, 땅이 바위투성이라 백성들이 거주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보고하자
백성을 이주시킬 계획을 포기했다.
王聞東海中, 有羽陵島, 地廣土肥, 舊有州縣, 可以居民,
遣溟州道監倉殿中內給事金柔立往視. 柔立回奏, “土多巖石, 民不可居.” 遂寢其議.
『고려사』 권18, 세가18 의종 11년(1157년)
본래 고구려의 우진야현(于珍也縣)【고울이군(古亐伊郡)이라고도 함】으로,
신라 경덕왕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쳐 군(郡)으로 하였다.
고려에 들어서는 현(縣)으로 강등시키고 영(令)을 두었다.
울릉도(鬱陵島)가 있다.【현(縣)의 바로 동쪽 바다 한 가운데에 있다.
신라 때 우산국(于山國)이라고 불렀는데, 무릉(武陵), 혹은 우릉(羽陵)이라고도 하며
땅은 사방이 백리이다. 지증왕 11년(510)에 신라에 투항했다.
태조 13년(930)에 섬사람들이 백길토두(白吉土豆)를 보내 방물(方物: 특산물)을 바쳤다.
의종 11년(1157), 울릉의 땅이 넓고 토질이 비옥하여 과거에도 주·현이 있었고
백성이 거주할 만하다는 말을 왕이 듣고는
명주도감창(溟州道監倉) 김유립(金柔立)을 보내 살펴 보게 했는데
김유립이 돌아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섬 가운데 큰 산이 있으며,
산의 정상에서 동쪽으로 10,000여 보, 서쪽으로 13,000여 보, 남쪽으로 15,000여 보,
북쪽으로 8,000여 보 갈 수 있는 넓이입니다. 촌락의 터가 7곳이고,
석불(石佛), 철종(鐵鍾), 석탑(石塔)이 남아 있습니다. 시호(柴胡), 호본(蒿本),
석남초(石南草)가 많이 자라지만 바위가 많아 백성들이 살기는 불가능합니다.”
이에 따라 결국 논의는 흐지부지되었다. 일설에는 우산(于山)과 무릉(武陵)이 본래
두 개의 섬으로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기후가 청명하면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
『고려사』 권58, 지제12, 지리(地理)3, 동계, 울진현
다만 위의 주장과 반대되는 증거도 많은데, 대표적인게 다름아닌 태종실록과 세종실록이다.
안무사(按撫使) 김인우(金麟雨)가 우산도(于山島)에서 돌아와
토산물(土産物)인 대죽(大竹)·수우피(水牛皮)·생저(生苧)·면자(綿子)·검박목(檢樸木) 등을 바쳤다.
또 그곳의 거주민 3명을 거느리고 왔는데, 그 섬의 호수[戶]는 15구(口)요,
남녀를 합치면 86명이었다. 김인우가 갔다가 돌아올 때에,
두 번이나 태풍(颱風)을 만나서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고 했다.
태종실록 33권 ,17년 2월 5일 임술 3번째 기사
현재 독도의 인구는 12명이다.
식수와 먹을 것도 풍부하지 못한 독도의 자연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인데,
우산도를 86명이 사는 거대한 섬으로 묘사하였다는 점에서는 큰 무리가 있다.
우의정 한상경(韓尙敬), 육조(六曹)·대간(臺諫)에 명하여,
우산(于山)·무릉도(武陵島)의 주민[居民]을 쇄출(刷出)하는 것의 편의 여부를 의논케 하니,
모두가 말하기를, "무릉(武陵)의 주민은 쇄출하지 말고, 오곡(五穀)과 농기(農器)를 주어
그 생업을 안정케 하소서. 인하여 주수(主帥)를 보내어
그들을 위무(慰撫)하고 또 토공(土貢)을 정함이 좋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공조 판서 황희(黃喜)만이 유독 불가하다 하며,
"안치(安置)시키지 말고 빨리 쇄출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쇄출하는 계책이 옳다. 저 사람들은 일찍이 요역(徭役)을 피하여 편안히 살아왔다.
만약 토공(土貢)을 정하고 주수(主帥)를 둔다면 저들은 반드시 싫어할 것이니,
그들을 오래 머물러 있게 할 수 없다. 김인우(金麟雨)를 그대로 안무사(按撫使)로 삼아
도로 우산(于山)·무릉(武陵) 등지에 들어가 그곳 주민을 거느리고
육지로 나오게 함이 마땅하다." 하고, 인하여 옷[衣]·갓[笠]과 목화(木靴)를 내려 주고,
또 우산 사람 3명에게도 각기 옷 1습(襲)씩 내려 주었다.
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使)에게 명하여 병선(兵船) 2척(隻)을 주게 하고,
도내의 수군 만호(水軍萬戶)와 천호(千戶) 중
유능한 자를 선간(選揀)하여 김인우와 같이 가도록 하였다.
태종실록 33권,17년 2월8일 을축 1번째 기사
동일하게 독도라면 사람이 살지 않아야 할 우산도에서 주민들을 쇄출하자는 주장이 나온다.
강원도 감사 유계문(柳季聞)이 아뢰기를, "무릉도(武陵島)의 우산(牛山)은 토지가 비옥하고
산물도 많사오며, 동·서·남·북으로 각각 50여 리 연해(沿海)의 사면에 석벽(石壁)이 둘러 있고,
또 선척이 정박할 만한 곳도 있사오니, 청컨대, 인민을 모집하여 이를 채우고,
인하여 만호(萬戶)와 수령(守令)을 두게 되면
실로 장구지책이 될 것입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세종실록 73권, 세종 18년 윤 6월 20일 갑신 6번째 기사
여기선 더 가관인데, 독도는 당연히 돌섬이다.
토지가 비옥하고 산물도 많은 그런 섬이 아니란 뜻이다.
때문에 우산이 가리키는 장소가 죽도라 주장하는 이도 적지 않다.
완전히 억지 주장은 아닌 것이 위에 있는 글을 해당 문서가 적혀 있는 "울진군",
즉 본토에서 바라보면 울릉도가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다면 일설에 한 섬으로 취급하는 것, 청명한 날에는 보인다는 묘사와
위에 적은 우산도와의 혼란도 해결이 가능하다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2.3. 15세기: 삼봉도 오류
삼봉도라는 이름은 독도가 한국에서 불려온 여러 이름 중 하나로 등장하지만,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오히려 한국이 타격을 입는다?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병조(兵曹)에서 아뢰기를, "전에 전교(傳敎)를 받으니,
‘강원도의 해중에 삼봉도(三峯島)가 있는데, 오는 임진년169) 봄에 사람을 보내어 찾겠으니,
그 절목(節目)을 상의하여 아뢰라.’ 하였으므로,
이제 행해야 할 사건을 조목으로 기록하여 아룁니다.
─ 『성종실록』 3년 2월 3일 경오 3번째 기사
세종때(2건)처음 언급된 삼봉도는 동해에 있는 섬으로써
부역을 피한 이들이 도망친 곳으로 묘사되었다.
이 문제는 성종때 재 부각되었는데, 실록에 기록된 건수만 42건으로,
총 45번 등장한 삼봉도 서술의 90%이상을 차지한다.
이때 삼봉도에 대한 서술은 다음과 같다.
영안도 관찰사(永安道觀察使) 이계손(李繼孫)에게 하서(下書)하기를,
"이제 아뢴 바를 다 알았다. 그 삼봉도(三峯島)에 투왕(投往)한 자는 부세(賦稅)를 피하고
나라를 배반하였으므로 정범(情犯)807) 이 심히 악하니...
─ 『성종실록』 1년 12월 11일 갑인 4번째 기사
영안도 관찰사(永安道觀察使) 정난종(鄭蘭宗)에게 유시하기를,
"김한경(金漢京)의 말이, ‘경흥(慶興)에서는 청명(淸明)한 날이면
삼봉도(三峯島)를 바라볼 수 있는데, 회령(會寧)에서 동쪽으로 배를 타고
이레 밤낮을 항해하여 도착하고, 북쪽으로 나흘 밤낮을 항해하여 돌아왔습니다.
─ 『성종실록』 4년 1월 9일 경자 2번째 기사
양강도 경흥은 지금의 함경북도에 위치한 경흥군이다.
당연히 근처 동해 바다에 보이는 섬은 없다. 독도에는 당연히 사람도 못 산다.
함경북도에서 배를 타고 동쪽으로 가야 한다는 점에서
삼봉도는 홋카이도나 사할린 섬일 가능성이 높다. 아니면 근대 지리학 발전 이전에는
전 세계적으로도 종종 서술되던, 상상의 섬이었을 가능성도 높다.
때문에 묘사되는 바에서도 삼봉도는 천여명이 거주하는 거대한 동네로 묘사되고 있다.
성종이 경각심을 가질만도 하다. 때문에 삼봉도를 담당하는 직책이 만들어지고
삼봉도는 지속적인 탐사를 보내었으나 당연히 항로를
이상하게 잡아서 보낸 선박 중 대부분은 그냥 회항하거나 표류했다.
그러다 결국 섬 하나가 발견되었다는 묘사가 등장하는데...
병조(兵曹)에서 아뢰기를,
"영흥(永興) 사람 김자주(金自周)의 공초(供招)에 이르기를,
‘본도(本道)의 관찰사(觀察使)가 삼봉도(三峯島)를 찾는 일로써,
김자주와 송영로(宋永老), 그리고 전일(前日)에 갔다 온
김흥(金興)·김한경(金漢京)·이오을망(李吾乙亡) 등 12인에게
마상선(麻尙船) 5척(隻)을 주어 들여보냈는데,
지난 9월 16일에 경성(鏡城) 땅 옹구미(甕仇未)에서 배를 출발하여, 섬으로 향해
같은 날 부령(富寧) 땅 청암(靑巖)에 도착하여 자고,
17일에 회령(會寧) 땅 가린곶이[加隣串]에 도착하여 잤으며,
18일에는 경원(慶源) 땅 말응대(末應大)에 도착하여 잤고,
25일에 섬 서쪽 7, 8리(里) 남짓한 거리에 정박하고 바라보니,
섬 북쪽에 세 바위가 벌여 섰고, 그 다음은 작은 섬, 다음은 암석(巖石)이 벌여 섰으며,
다음은 복판 섬이고, 복판 섬 서쪽에 또 작은 섬이 있는데, 다 바닷물이 통합니다.
또 바다 섬 사이에는 인형(人形) 같은 것이 별도로 선 것이 30개나 되므로
의심이 나고 두려워서 곧바로 갈 수가 없어 섬 모양을 그려 왔습니다.’고 하였습니다.
─ 『성종실록』 7년 10월 27일 정유 2번째 기사
김한경과 그의 일당이 이 섬을 발견했다는 묘사가 적혀있다.
여기 있는 이 섬의 묘사가 사실일 경우, 해당 섬은 독도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많은데,
사람의 모습처럼 보인다는 인형 묘사가 일광욕을 즐기는 강치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
근데 문제는 이 주장은 후에 조정에서 다시는 섬을 찾지 못해 의심을 사고,
해당 발견자를 재수색시 찾지 못하면 처형하자는 기록을 거의 마지막으로
이후 실록에는 등장이 없다.
그러나 이 기록이 진실이더라면 한국은 큰 타격을 입게 되는데.
다름 아닌 기록에 있는 독도를 삼봉도라 주장했고,
이후 재수색해도 동일한 섬을 찾지 못했다는 것은, 독도에 대해 추가적인 기록이 없으며
삼봉도를 독도라 착각, 아니면 재발견할 정도로
독도의 인식이 떨어진 상태였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삼봉도가 거짓 증언이었을 경우에도, 그 방면으로 가면 독도가 나오는데
독도를 지나갔다는 언급이 없었다는 점을 미루어,
아예 독도 근처도 가지 못하고 회항하였을 가능성도 다분하다.
그렇다고 해서 삼봉도를 발견한 것이 조선 인식에 도움이 되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거짓된 발견으로 간주되어 계획 자체를 취소하기도 했고, 이후 삼봉도로
군사를 보내서 실질적인 영유권 행사 같은 활동도 하나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 해봤자 "발견"이상의 평을 주기 어렵다.
한 마디로, 삼봉도는 조선시대 독도의 영유권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아니라,
아예 조선이 독도를 까먹었거나 인식 자체가 없었다는 방증사례인 셈이 된다.
2.4. 17세기: 다케시마와 마쓰시마, 그리고 안용복
17세기는 일본의 울릉도, 독도에 대한 인식이 독자적으로 발견, 확대되는 시기이다.
1618년(또는 1625년), 오야 진키치(大谷甚吉)와 무라카와 이치베(村川市兵衛)는
동해 한가운데 있는 다케시마라는 섬에 도항하기를 요청했고,
허가를 받아 운행을 하게 되었다.
호키국(伯耆国) 요나고(米子)에서 몇 해 전 다케시마(현재의 울릉도)에 도항했다고 합니다.
이번 요나고의 주민인 무라카와 이치베(村川市兵衛)와 오야 진키치(大谷甚吉)의 도항 청원을
장군님께 여쭙자 승인을 해도 좋다고 말씀하셨으므로
그 뜻을 받들어 도항 허가의 분부를 내려 주십시오.
─다케시마 도해 허가 지령서, 1618년
문서의 내용을 미루어 보아,
이미 일본인들이 울릉도를 발견한 시기는 그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덩달아 울릉도로 가는 길에는 자그마한 돌섬도 하나 있어, 그곳도 왕래하게 되었다.
다케시마(현재의 울릉도)에 이르는 길에 주회 20정(町) 정도의 작은 섬이 있는데
초목이 없는 바위산으로 24~25년전에 아베시로고로(阿倍四郎五郎)님의 중개로
하사하여 도항하고 있습니다. 이 작은 섬에서 강치의 기름을 조금 얻고 있습니다.
─1681년(엔포 9년) 5월 오오야(大谷) 가에 숙박한
막부 순견 관리의 질문에 대한 큐에몬 가쓰노부(九右衛門勝信)의 답변
이때 도항을 한 기간은 안용복에 의해 저지된 1696년까지로,
일본은 최소한 71년, 최대 78년이나 울릉도와 독도를 왕래하며
고기와 전복을 잡고 나무를 베어낸 것이다.
(오키에서) 북서쪽으로 이틀 가면 송도(독도)가 있다. 또 하루를 가면 죽도(울릉도)가 있다.
속칭 기죽도라고 불리며, 대나무, 물고기, 바다사자가 많다.
생각건대 (바다사자는) 신서에 나오는 소위 오십맹이 아닌가.
이 두 섬은 사람이 살지 않는 땅으로 고려(내륙)을 보는 것이 마치
운주(雲州)에서 은주(隱州)를 보는 것과 같다.
그러한즉 일본의 서북 한계는 이 주(은주)까지로 한다.
─ 『은주시청합기』「국대기(國代記)」, 사이토 도요노부(斎藤豊宣)[13], 1667년
일본 측의 독도에 관한 최초의 직접 기록은 은주시청합기(1667년)으로
죽도-송도를 "이 사람이 살지 않는 두 섬에서 고려를 바라보는 것은
운주(이즈모국)에서 은주(오키국)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
(此二島無人之地 見高麗如雲州望隠州)"로 기술하여
울릉도-독도 두 섬을 일본 밖의 섬으로 인식하였다.
일본은 1800년대 중반에 이르러 다소간 울릉도-독도 사이 명칭 혼란을 겪던 도중,
과거 울릉도의 이름으로 사용한 '죽도(竹島)'를 독도의 명칭으로 확정하고,
독도의 명칭이었던 '송도(松島)'를 울릉도의 명칭으로 규정함으로써
두 섬이 부속관계임을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이 섬이 조선령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으며,
그냥 고기 잡으러 가는, 일본 밖의 무인도 정도로 취급한 듯 보인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조선이 울릉도에 공도정책을 실시해서 조선인들의 울릉도 민간출입이 엄금되어,
근처 다른 국가들이 왔다 가지 않았기 때문.
덕분에 오야, 무라카와 가는 울릉도를 일터로 삼았으며,
본의 아니게 조선땅을 무단점거해버리는 처지가 되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위에서 보이는 것처럼 울릉도는 이미 조선의 영토로 규정되어 있었고,
일본의 에도 막부에서 발급한 다케시마 도해 면허는 처음부터 조선 측의
아무런 동의를 얻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두 국가의 충돌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사태가 끝난 것은 1693년, 울릉도로 일부 어부들이 물고기를 잡으러 왔다가
일본인들과 분쟁하게 되었을 때부터 시작된다.
당시 물고기를 잡으러 나온 오야 가문 사람들은
조선인들의 난입(?)때문에 전복을 잡지 못하게 되었고, 이에 조선인들에게 항의했다.
이 때문에 조선인들은 조선인대로, 일본인들은 일본인대로
"여긴 우리땅이야"를 시전하며 분쟁이 발생하였고, 끝에 말미암아 오야 가는
조선인 2명을 일본에 데리고 가 일본 정부에 항의를 하게 되었다.
상술했듯 조선은 공도정책으로 민간출입을 엄금하였기 때문에, 이 사실이 밝혀지면
처벌을 면치 못하게 되어, 오히려 일본이 적극적인 반발을 실시하게 된 셈이다.
그리고 이 때, 잡혀간 사람 중 한 명이 그 유명한 안용복이다.
이 때문에 일본과 조선 사이에는 울릉도/다케시마 도해를 두고
외교적으로 교섭하였는데, 조선의 답변이 가관이다.
“우리나라가 동해안의 어민에게 외양(外洋)에 나갈 수 없도록 한 것은
비록 우리나라의 경지(境地)인 울릉도(鬱陵島)일지라도 역시 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임의 왕래를 허락하지 않거늘 하물며 그 밖에 있어서랴.
이제 이 고깃배가 귀국의 경지인 죽도(竹島)에 들어갔기 때문에
잡아 보내오는 번잡함에 이르고 멀리 서찰까지 보내게 했으니,
이웃 나라 사이의 친선의 우의에 감사하는 바이다.
바다백성이 고기를 잡아 생계를 삼으니 물에 표류해 가는 근심이 없을 수 없지만,
국경을 넘어 깊숙이 들어가서 혼잡하게 물고기를 잡는 것은 법률로써 마땅히
엄하게 징계해야 할 것이므로, 지금 범인들을 법률에 의거해서 죄를 부과하고,
이후에는 연해 등지에서 규칙을 엄격하게 제정하여 이를 신칙하게 할 것이다.”
조선 조정은 죽도를 울릉도와 다른 섬으로 인식 한 것이다.
그러다 협상은 부결되었다.
마침내 1696년 6월, 안용복은 사람을 모아 울릉도와 자산도(子山島)에서
일본인을 내쫓은 뒤, 내처 일본으로 건너가 호키슈 번주와 담판을 지었다.
그런데 정작 에도 막부는 쟁계 사건의 여파로 쇼군이 직접 나서서,
이미 이해 1월에 다케시마를 조선 땅으로 인정하고 도해를 금지한 상황이었다.
문제는 그게 이듬해인 1697년이 되어서야 조선으로 전달되었던 것이다.
마쓰다이라 신타로(松平新太郞)가 이나바(因幡), 호키(伯耆)를 다스리던 때에
청원이 있었던 요나고의 주민인 무라카와 이치베와 오야 진키치의
다케시마 도항에 대해 지금까지 고기잡이를 해왔지만,
앞으로 금지를 분부하는 취지의 상의가 있으므로 이해하길 바란다.
울릉도 도해 금지 봉서,1696년
때문에 호키 주의 번주는 두 섬이 이미 조선의 영토로 인정되었음을 재차 확인하고,
앞으로 일본인의 출어를 엄금할 것을 약속한 뒤 안용복을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제가 앞장 서서 말하길 "울릉도는 본디 우리 지경인데,
왜인이 어찌하여 감히 지경을 넘어 침범하였는가?
너희들을 모두 포박하여야 하겠다."하고, 이어서 뱃머리에 나아가 큰소리로 꾸짖었더니,
왜인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본디 마쓰시마에 사는데 우연히 고기잡이 하러 나왔다.
이제 본소로 돌아갈 것이다."하므로, "송도는 자산도로서,
그것도 우리 나라 땅인데 너희들이 감히 거기에 사는가?"하였습니다.
─ 이광좌(李光佐) 등, 『숙종실록』 22년(1696) 9월 25일, 1728년
조선의 팔도: 경기도 강원도(이 도 안에 다케시마와 마쓰시마가 있다)
전라도 충청도 평안도……
─ 나카세 단에몬(中瀬弾右衛門) • 야마모토 세이에몬(山本清右衛門)
『겐로쿠9병자년 조선주착안 일권지각서』, 1696년
하지만 안용복은 조선으로 귀국한 뒤 투옥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취지가 어떻든 간에 허가 없는 외국 출입은
밀수나 반란으로 간주될 수 있는 막중한 죄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관직까지 사칭했으니
아무리 공이 크다고 해도 뒤탈이 안 생길 수는 없는 일. 법대로라면 사형이지만,
당시 영의정 남구만을 비롯한 이들이 안용복의 활동이 가진 의미와
그의 공로를 높이 사서 유배형으로 그쳤다.
그나마도 안용복 이외의 사람들은 모두 석방된 것이다.
2.4.1. 은주시청합기
은주시청합기는 두 가문이 울릉도를 왕래하던 중인 1667년,
은주(隱州, 오키국) 지방 번사 사이토 호센이 남긴 책인데,
독도를 직접 기록한 일본 최초의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은 한국 정부에게 보낸
외교 공문에 이 저서를 언급하며 '17세기부터 일본은 독도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자료로 사용하려 했으나 실제 내용을 살펴보면,
(오키에서) 북서쪽으로 이틀 가면 송도(독도)가 있다.
또 하루를 가면 죽도(울릉도)가 있다. 속칭 기죽도라고 불리며,
대나무, 물고기, 바다사자가 많다. 생각건대 (바다사자는) 신서에 나오는 이른바
오십맹이 아닌가. 이 두 섬은 사람이 살지 않는 땅으로 고려(내륙)을 보는 것이 마치
운주(雲州)에서 은주(隱州)를 보는 것과 같다.
그러한즉 일본의 서북 한계는 이 주까지로 한다.
戌亥間行二日一有松島 又一日程有竹島 俗言磯竹島多竹魚海鹿 按神書所謂五十猛歟
此二島無人之地 見高麗如雲州望隱州 然則日本之乾地 以此州爲限矣
로 오히려 '17세기부터 일본은
독도를 일본령으로 인식하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말았다.
현재 일본 외무성의 독도 사이트에서 은주시청합기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선박의 항해 거리라는 객관적인 정보를 제시하며,
위의 아직 논란의 여지가 많은 조선시대 문헌과 다르게 은주시정합기는
첫 객관적으로도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나온 첫 문헌이다.
그건 그거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셈이다.
2.4.2. 안용복 사건 진술의 신빙성은?
안용복의 업적이 영유권 분쟁에 크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여긴 일본 측은
다양한 방법으로 안용복의 진술과 행적을 부정해 왔다.
1) 안용복은 범죄자이므로 그의 진술을 믿을 수 없다 論
안용복은 노비 출신 어부로서 불법 도항과 관리 사칭의 죄로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울릉도 쟁계이후 울릉도-독도의 영유권확보에 공이있음이 인정되어 유배형으로 감형되었다.
안용복을 범죄자로 취급한 바로 그 조선 정부에 의하여, 또한
일본에서의 문서와의 교차검증을 통해서도 그의 진술은 신빙성 있음이 확인되었으므로,
안용복이 범죄자임을 탓하려면
'안용복은 범죄자이나, 진술은 믿을 수 있다'라고 생각해야 일관성 있는 논리이다.
2) 안용복은 막부의 서계를 받은 바 없다 論
안용복이 에도 막부로부터 받았다가 대마도주에게 빼앗긴
'울릉도-독도는 조선령'이라는 서계는 안용복이 꾸며낸 이야기라는 주장이다.
유감스럽게도 안용복이 서계를 받았다는 이 주장은 어린이용 위인전 정도나 제외하고
한국 측 연구자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사실 조선 정부도 믿지 않았다.
안용복을 심문한 유집일(兪集一)은
"근년 동래에 봉사(奉使)했을 때 안용복을 추문(推問)했더니, 그가 말하기를,
“호키 주(伯耆州)에서 준 은화(銀貨)와 문서를 쓰시마 사람이 겁탈했다.” 했는데,
이번 그가 호키 주에 정문(呈文)한 데에는,
“쓰시마 사람이 2천 금(金)으로 나를 속(贖)바치고 본국(本國)에 내보낸다는
거짓말을 하고 그 은은 본국에서 받겠다고 했다.”고 했으니,
전후에 한 말이 매우 어그러집니다. 또 쓰시마는 본디 속은(贖銀)을 와서 거둔 일이 없고,
임술 약조(壬戌約條)도 비밀에 관계되는데, 안용복이 어떻게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또 왜인은 모두 죽도(竹島)가 호키주의 식읍(食邑)이라 하므로,
안용복이 한 번 말했다 해서 조선 땅이라 쾌히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안용복의 정문 가운데는 울릉도는 본국 땅이라고 여러 번 말했으나,
왜인이 문답한 문서와 안용복을 내보낸다는 문서에는 일체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정들은 매우 의심스러우니,
다시 핵사(覈査)해 실정을 알아 낸 뒤에 죄를 논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3) 안용복은 독도에서 일본 어부들과 마주친 적 없다 論
안용복의 1696년 왜인을 만났다는 숙종실록의 기록에 대해
일본 학자들은 안용복의 신빙성 없는 일방적 주장이라며 부정하였으나
1월 28일에 이미 막부가 도해 금지령을 내렸으므로,
그해 5월에 안용복 일행이 독도에서 일본 어부들을 만났다는 진술은 허위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실제 어업 중이던 일본의 두 가문에게 도해 금지 명령이 전달된 것은
그해 8월 1일의 일이라는 것을 나이토 세이츄 교수가 발견한 당시 돗토리번 공식 일지인
히카에쵸(控帳)에 기록됨으로써 안용복의 진술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런데, 2005년 겐로쿠 각서에는 자산도=송도가 기록되어 있으면서도
안용복이 송도에 오게 된 이유를 '영주에게 소송하기 위해서'라고만 쓰여 있지,
왜인이 또 울릉도에 어업을 하고 있는 걸 보았다는 내용이 없다는 것을 근거로
이케우치 사토시를 비롯한 일본 학자 및 일부 한국 독도 연구가들도
안용복의 진술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는 여전히 한, 일 간 논쟁 중이다.
다만 안용복이 "일본의 '마쓰시마'가 곧 자산도로 조선의 영토이다!"라고 주장한 것은
실제 1696년 안용복이 울릉도에 가서 일본인을 만났냐와는 것과 별개로
숙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엄연한 사실이고,
이것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자산도'를 일본인이 말하는 '송도'라고 명확히 기록했는데다,
일본 문서(겐로쿠 각서)에서도 확인되었으므로
전근대 영유권 주장에서 한국 측이 한발 앞서 나가게 되었다.
겐로쿠9 병자년 조선주착안 일권지각서에서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언급이 있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江カン原ヲン道: 此道ノ中竹島松島有之.
* 강원도: 이 도 안에 죽도와 송도가 있다.
安龍福申候ハ竹嶋ヲ竹ノ嶋と申朝鮮國江原道東萊府ノ
内ニ鬱陵嶋と申島御座候是ヲ竹ノ嶋と申由申候則八道ノ圖ニ記之所持候
* 안용복이 말하길, '다케시마'를 다케노시마라고도 한다.
조선국 강원도 동래부 안에 울릉도라고 하는 섬이 있으며,
이를 다케노시마라고 하는 까닭에라고 말해, 팔도지도에 기록해 이를 소지하고 있다.
松嶋ハ右同道之內子山と申嶋御座候是ヲ松嶋と申由是も八道之圖ニ記申候 참조
* '마쓰시마'는 상기한 도(道) 중에 자산이라고 하는 섬이며,
이를 '마쓰시마'라고 하는 까닭에 이도 팔도지도에 기록했다고 말했다.
다만 해당 문서는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이 아니라 해당 담화 내용을 적은 문서라,
국가가 이 지역을 직접 관리했다는 증거가 되지 못하는 것이 흠이다.
그러나 국가가 아닌 민간적 차원에서라도 독도가 한국의 땅임을 주장하려했다는 점에서,
해당 사건은 당시 조선인들의 인식을 보여준다는 의의를 지닌다.
2.5. 17세기 후반-19세기 초반 : 울릉도로의 지속적인 재파견과 독도의 인식 확대
1차 안용복 사건 직후, 조선 조정에서는
울릉도에 대한 권리를 확정하기 위해 장한상(張漢相)을 삼척첨사(僉使)로 울릉도에 파견하고,
이후로도 3년에 한 번 울릉도를 조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우산도가 독도로 확고히 비정된 것은 아니었는데,
실제로 이때 장한상은 실제로 울릉도 성인봉에서 독도를 보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지만
그것을 단지 '한 섬'이라고만 언급했을 뿐 우산도라고 집어서 언급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비 개이고 구름 걷힌 날, 산에 들어가 중봉에 올라보니
남쪽과 북쪽의 두 봉우리가 우뚝하게 마주하고 있는데, 이것이 이른바 삼봉입니다.
서쪽으로는 구불구불한 대관령의 모습이 보이고,
동쪽으로 바다를 바라보니 동남쪽에 섬 하나가 희미하게 있는데
크기는 울릉도의 3분의 1이 안 되고 거리는 300여 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남쪽과 북쪽에는 망망대해가 펼쳐져 물빛과 하늘빛이 같았습니다.
─ 장한상, 「울릉도사적」, 1694년
섬의 산봉우리에 올라 저 나라 강역을 자세히 살펴보니,
아득할 뿐 눈에 들어오는 섬이 없어 그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는데,
울릉도의 지리적 형세는 아마도 저 나라와 우리나라 사이에 있는 듯합니다.
─ 장한상, 「울릉도사적」, 1694년
다만 장한상이 일본의 섬은 보이는 것이 없다고 기술하여
동남쪽의 '한 섬'인 독도가 일본의 영토가 아님을 명시한 것은 분명한 의의가 있다.
그러나 조선 조정에서는 오히려 장한상의 보고가
기존의 울릉도 인식과 다른 점이 많았기에
혹자는 장한상이 가 본 데가 진짜 울릉도가 아닐 것이라고 의심하기에 이르렀고,
이로 인해 장한상의 탐사 결과는 울릉도와 독도의 지리적 정보를
구체적으로 확정하는 데까지는 이르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일본에서는 울릉도 성인봉 정상에서 독도를 육안만으로는 볼 수 없고
망원경 등 광학기기로 줌인을 해서야만 볼 수 있다고 주장하며
장한상이 본 '섬'은 사실 '수평선에 걸린 구름을 섬으로 착각한 것이다.'라고 반박하고 있다.
실제로 이후 18세기까지도, 조선에서 만들어진 울릉도 지도는
여전히 우산도가 울릉도의 서쪽에 그려져 있었다.
특히 1711년에 삼척영장(營將) 박석창(朴錫昌)이 울릉도를 조사하고
보고서에 첨부한 지도인 「울릉도도형(鬱陵島圖形)」에는
그 동쪽 한가운데 있는 우산도에 '대나무 밭'이라고 표기되어 있어서
여기서의 우산도는 독도보다는 지금의 죽도로 추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만기요람을 비롯한 문헌에서는 일본의 마쓰시마(松島)가 곧 우산도로
조선의 영토임을 명시하고 있어서, 일본인들이 부르는 마쓰시마는
곧 조선의 영토임을 분명히 못박아두고 있다.
輿地志云 鬱陵于山皆于山國地 于山則倭所謂松島也
여지지에 이르기를, 울릉과 우산은 모두 우산국의 땅인데,
우산은 일본이 말하는 마쓰시마라고 하였다.
─ 서영보(徐榮輔), 심상규(沈象奎) 등,
『만기요람』「군정(軍政)편 4」 해방(海防) 동해(東海)조, 1808년
즉 조선이 일본이 마쓰시마라고 부르는 섬은
우리 울릉도에 부속된 것으로 당연히 우리 것이라 여기고,
독도에 대해서 지나치게 피상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 탈이라면 탈.
하지만 전근대에 해양국가도 아닌 조선으로서는 여기까지만 해도 장한 것이다.
당장 일본만 해도 정확한 해양 측량이 불가능해 저 위에서 보듯이
'배타고 북서쪽으로 2일' 수준으로 기록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3. 근현대
근대 국제법에 근거하여 판단해 보더라도,
맑은 날 울릉도에서 독도가 상시 육안관측된다는 물리적 사실(기사, 사진)은
'지속적 발견'에 해당하는 영유권원으로 인정받고 있고,
따로 '실효 지배'한 근거를 갖추지 않더라도 6세기 우산국을 정벌한 이사부가
130km(육지-울릉도 간 최소 거리) 이상 항해한 기록이
그보다 적은 90km(울릉도-독도 간 거리) 떨어진 섬에 대한
'실효 지배'의 물리적 가능성을 담보하고 있어,
혹시 있을지 모를 국제법정에서의 영유권 분쟁 재판이 이루어 질 시
'고대 우산국의 영유권에 독도가 포함되는가'의 사항이
대한민국 쪽에 유리하게 작용할 여지가 상당하다.
야마무라 사이스케의 1806년 지도 『화이일람도(華夷一覧図)』.
'다케시마(죽도)'라 표기된 섬이 '마츠시마(송도)'보다 서쪽에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3.1. 19세기: 서양의 측량과 아르고노트 오류
1789년에도 영국의 아르고노트 호가 울릉도를 측량하고
아르고노트 섬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나, 측량 과정에서 벌어진 오류로
실제 울릉도의 위치에서 서북쪽에 있는 것으로 표시하였다.
그리고 이 어이가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는 실수로 인해 졸지에 서양의 지도에는
울릉도와 더불어, 존재하지도 않는 아르고노트 섬이 나란히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1840년에 독일인 지볼트가 이를 기반으로 지도를 제작하면서
일본의 명칭을 받아들여 서쪽의 아르고노트 섬을 다케시마,
동쪽의 다줄레 섬을 마쓰시마로 비정하면서 이 문제는 점점 악화되어 갔다.
이로써 독도를 가리키던 '마쓰시마(松島)'라는 이름은 울릉도로 옮겨가고,
정작 울릉도를 가리키던 '다케시마(竹島)'라는 이름은 가상의 섬의 이름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로부터 9년 뒤인 1849년, 프랑스의 포경선 리앙쿠르 호(Le Liancourt)가
독도의 바위로 인해 난파당한 뒤로,
독도는 '리앙쿠르 락스(암초)(Liancourt Rocks)'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이름이 현재까지 서양권에서 많이 사용되는 이름으로,
여기에서 rocks는 암초(岩礁), 그중에서 수상암으로
섬보다 작고 사람이 살 수 없는 해면 위로 튀어나온 바위를 의미한다.
일본은 이러한 정보를 받아들여 'Liancourt Rocks'를 리얀코루도
열암(リヤンコルド 列岩)이라 번역해 사용하기도 하고, '리앙쿠르'의 일본화된 발음으로
'랸코(リャンコ), 란코(ランコ), 얀코(ヤンコ)' 등을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서양의 아르고너트호가 울릉도 측량 과정에서 위도경도 표기를 잘못 기재하고,
서양에서는 이걸 다시 일본 명칭과 대조하는 과정에서 동쪽의 다줄레(울릉도)를
'마쓰시마', 서쪽의 아르고노트를 '다케시마'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이후 이것이 일본 해군성에 역수입되었다.
그런데 해군성을 제외한 원래 메이지 정부와 육군성은 여전히 에도 막부의 인식을
이어받아 울릉도를 '다케시마', 독도를 '마쓰시마'라 부르고 있었다.
때문에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일본은 1880년 군함 아마기호를 보내 울릉도 명칭 등의 정확한 정보 확인에 나서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울릉도의 원래 명칭이 '다케시마'='죽도'='竹島' 였음을 확인하고,
인근에 따로 “竹島“(죽도) 라고 불리는 소도가 있음을 보고하게 된다.
이러한 정보 보고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명확하게 울릉도와 독도의 명칭을 바로잡지 않았다.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령이 아닌 타국(조선)의 영토이기 때문에
그 명칭의 역사성과 정당성에 대해서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훗날 일본이 독도를 무주지라 주장하면서 비밀 편입 시도하려던 때에
그 이름을 지어 넣으면서 ‘원래 조선의 동쪽 해상에 '마쓰시마'와 '다케시마'라는
두 섬이 존재하는 것은 구전되어 내려오는 바이며....(중략)
종래 잘못 불려지던 명칭을 전용해서 '다케시마'라는 통칭을
새로운 섬의 이름으로 하고자 합니다’라는 오키도사의 보고를 일본 내각이 받아
독도의 일본 명칭을 '타다케시마'(竹島)로 결정한 것도 위와 같은 이유를 뒷받침한다.
이어서 1854년과 1855년에 각각 러시아의 올리부차 호와 영국의 호네트 호에 의해
독도가 정확히 측량되고 아르고노트 섬의 존재가 부정되면서
이전의 잘못된 지리 지식은 완전히 바로잡혔지만,
그럼에도 지볼트의 지도가 역수입된 일본에서는 서구의 해안 측량 결과를 맹신한 나머지
이러한 잘못된 지리적 지식에 기반한 지도가 여럿 만들어져 유포되었다.
하지만 에도 막부의 후신으로 성립된 일본 메이지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이전까지와 같은 울릉도를 다케시마, 독도를 마쓰시마라 부르는 인식이 이어지고 있었다.
메이지 유신 직후 조선을 정탐한 보고서 「조선국 교제 시말 내탐서」에는
보고서의 한 항목을 할애하면서까지 다케시마와 마쓰시마가
조선에 부속된 전모를 보고하고 있어 당시까지만 해도
마쓰시마 즉 독도가 조선의 영토로 인식되는 추세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1876년 메이지 정부가 전 일본의 근대적 지도를
편찬하면서 내린 결정도 주목할 만하다.
1876년 10월 16일 시마네현으로부터 다케시마와 다른 한 섬,
즉 마쓰시마를 시마네현 지도에 포함시킬 것인지에 대한 질의서를 접수한 일본 내무성은
조사 결과 두 섬은 일본과 관계가 전무하다고 결론짓고
이듬해 3월 17일 메이지 정부의 최고 결정 기관인 태정관에 품의서를 제출하여
"본방은 관계가 없다"는 승인을 받았다.
이로서 일본은 근대적 국가로의 영토 재편 과정에서도
오늘날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국외의 땅으로 규정했던 것이다.
별지 내무성 품의 : 일본해 내 다케시마 외 1도 지적 편찬의 건.
위는 겐로쿠 5년 조선인이 입도한 이래 구 정부가 해당 국가와 왕복한 결과
마침내 본방은 관계가 없다는 것을 들어,
상신한 품의의 취지를 듣고 다음과 같이 지령을 작성함이 가한지 이에 품의합니다.
지령안
품의한 취지의 다케시마 외 1도의 건에 대하여 본방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심득할 것.
─ 이와쿠라 도모미 등, 「내무성질의서 및 태정관지시문서」, 1877년
다음으로 한 섬이 있어 마쓰시마라 부른다. 둘레 30정 정도, 다케시마와 동일선로에 있다.
─ 「일본 내무성 부속문서」, 1876년
하지만 메이지 정부가 독도를 마쓰시마, 울릉도를 다케시마라 부르는
기존의 인식을 이어나간 데 반해,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문서에서 보이듯이
거의 '일본 내부의 국가'에 가깝던 일본 해군성에서는 서양 측의 오류를 그대로 답습하면서
울릉도는 마쓰시마, 독도는 리앙꼬루도 열암이라 불러댔고
이러한 명칭은 『조선국동해안약기』를 시작으로 『조선수로지』와 『환영수로지』 등
해군성의 지속적인 수로지 보급으로 차츰 일반화되어갔다.
3.2.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울릉도의 재개척과 '독도'의 탄생
한편 19세기 에도 막부의 붕괴와 메이지 정부의 수립 과정에서
도해 금지령의 실행이 느슨해지자, 다시 일본인들의 울릉도 도해가 활발해져
어채와 벌목 등이 공공연히 자행되면서 조선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이를 적발한 조선 조정은 1881년 일본 정부에 서계를 보내어 항의하는 한편
이규원을 울릉도검찰사로 임명하여 현지를 조사하게 하였다.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당시 고종과 이규원의 대담 내용은 조선 조정이
울릉도와 더불어 그에 부속된 섬을 조선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주상이 이르기를
"울릉도는 근래 다른 나라 사람들이 무시로 왕래하며
제멋대로 편리한 곳을 차지하는 폐단이 있다.
그리고 송죽도와 우산도가 울릉도 곁에 있다는데 서로의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으며,
또 어떤 물건이 있는지의 여부를 아직 상세히 알지 못한다.
이번에 그대가 가는 것은 특별히 가려서 보내는 것이니, 각별히 검찰하도록 하라.
그리고 그곳에 읍을 설치할 계획이니
반드시 도형과 별단으로 상세히 기록하여 아뢰도록 하라."하니, 이규원이 아뢰기를
"삼가 마땅히 힘껏 받들어 행하겠습니다. 우산도는 곧 울릉도인데 우산은 옛적 국도의
이름이고, 송죽도는 곧 하나의 작은 섬인데 울릉도와의 거리가 삼수십 리입니다.
그곳에서 나는 것은 단향과 간죽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주상이 이르기를
"혹은 우산도라고 부르기도 하고 혹은 송죽도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모두 《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또 송죽도라고 부르는데 우산도와 함께 세 섬이 되고,
통틀어 울릉도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곳 형편을 전부 검찰하도록 하라.
울릉도는 본래 삼척영장과 월송만호가 돌아가면서 수색하였는데,
모두 소홀하게 외면만 탐색하는 것을 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폐단을 초래한 것이니,
그대는 반드시 상세히 살피도록 하라."하니, 이규원이 아뢰기를
"삼가 깊숙이 들어가서 검찰하겠습니다.
간혹 송도와 죽도라고 부르는 것은 울릉도의 동쪽에 있는데,
이는 송죽도 이외에 별도로 송도와 죽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하였다.
─ 『승정원일기』 고종 19년(1882) 4월 7일
이규원은 왕명에 따라 맑은 날에 높은 곳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았으나 우산도를 찾지 못하고
울릉도를 우산도라 하는 것은 제주도를 탐라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리하여 이규원이 바친 「울릉도외도」에는 우산도가 표시되지 않고 죽도가 그려져있다.
그러나 울릉도에 사람들을 이주시킨 이후에는 독도가 울릉도의 가시거리 내에 있기 때문에
독도를 인식했고 당시 울릉도에 이주한 전라도인들이 독도(돌섬이라는 뜻)라고 명명하였다.
여튼 이처럼 이규원이 울릉도를 탐색하고 돌아온 뒤,
조선 정부는 공식적으로 쇄출정책을 폐기하고
울릉도 개척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해
1883년에는 개화파의 영수 김옥균(金玉均)을 동남제도개척사(東南諸島開拓使)로 임명해
사람을 이주시키고 울릉도의 일본인들을 쇄환하였다.
하지만 울릉도에 일본인들의 침탈이 거듭되는데도 불구하고
소극적인 일본 정부의 태도에 애를 먹던 대한제국 정부는 마침내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반포하여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정식 편제하는 한편,
석도를 죽도와 함께 울릉도의 행정구역에 소속됨을 분명히 규정하였다.
한국에서는 이 석도를 독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일본에서는 울릉도에 인접한 관음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1900년 대한제국 칙령 41호, 독도 영유권 국제적 재선언
하지만 이윽고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과 대한제국 사이에
한일의정서가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주권은 급속도로 일본에 잠식되어갔다.
일본 정부는 한일의정서를 통해 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음에도 동해 한가운데 자리한 독도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하여,
1905년에는 일전에 있었던 나카이 요사부로의 청원을 수리하는 방식으로
1월 28일 내각 결의가 이루어져
2월 22일에는 시마네현 고시 제40호가 발효되어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편입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내무 당국자에 따르면, 이 시국에 즈음하여 한국령일지도 모르는 일개 불모의 암초를,
여러 외국에게, 우리의 나라에게 한국 병탄의 야심이 있다는 의혹을 키울 것이다.
이익이 지극히 작은 데 반하여 상황이 결코 용이하지 않다.
아무리 설득해도 출원이 끝내 각하될 형편이었다.
이렇게 좌절할 수는 없어서, 즉시 외무성으로 달려가서
당시 정무국장 야마자 엔지로를 만나 자세히 설명하였다.
나카이(1910), 《사업경영개요》 中.
이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는 영토의 변화에 관련된 중대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한국령으로 의심되는 섬을 강탈함으로써 발생할 열강의 개입을 우려한
일본 지도부의 뜻에 따라 언론에 공시되지 않았고,
독도의 군사 망루 또한 비밀리에 설치되어 대한제국 정부는 다시 이듬해인
1906년 3월 28일이 되어서야 이러한 사실을 파악하게 되었다.
일본의 독도 편입 사실을 접한 대한제국에서는 참정대신이자 을사오적의 일원인 박제순이
"전속무근(全屬無根)", 내부에서 "필무기리(必無其理)"라 지령하며 그 정당성을 부정하고,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는 관련 기사를 전재하였으며,
동시대 황현은 저서 『오하기문(梧下記聞)』과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울릉도 소속의 독도가 침탈당한 사실을 기록하여 분개하는 뜻을 보였지만,
이미 대한제국은 모든 외교권을 박탈당한 채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해 있었으므로 이는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했다.
시마네 현 고시의 '무주지 주장'이 있으나,
한국은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서 "석도"라는 이름으로
독도를 근대적 영토에 편입한 바 있다.
그러나, 일본은 해당 칙령이 가리키는 "석도"가 독도가 아님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석도=독도'인지가 쟁점인데..
여기서 ‘독도’란 명칭은 1904년 일본 군함 니타카(新高)호의 행동일지에
“리앙코루도 암, 한인은 이를 독도(獨島)라고 쓴다”는 기록이 있어
이것이 한국인들이 부르던 고유 명칭임이 한일 사이에 교차 증명되며,
그 어원이 현재의 돌(石)에 있다는 것과
최소 1895년 이전부터 한국인들 사이에 사용되어 온 명칭임을
민국일보 1962년 3월 19일 김윤삼 翁 인터뷰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1899년 일본 해군 발행 조선수로지 전라남도 소안항 조에
석도(石島)의 발음을 'トヽクソム(토토쿠소무=>독섬)'로 적어 놓았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현재의 ‘돌’은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의 이전의 ‘돍’으로
지역차를 두고 발음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니타카 호와 조우한 한인이 이를 한자 独으로 표기해 일본인들에게 알려 주었고,
이 표기를 1906년 오키섬의 일본 행정관리들이 울릉도에 방문하여
울도군수 심흥택에게 사용하고, 심흥택이 일본인들이 사용한 명칭을 그대로
공식문서에 옮겨 적으면서 독도의 한자 표기로 굳어지게 된다.
다만 울릉도민들은 1950년이 넘어서까지 '독섬'이라는
한자표기 이전의 고유발음을 사용하고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이렇듯 대한제국은 1906년에 이르러서야 일본의 독도 영토 편입 시도를 뒤늦게 전해받고
독도 점거에 대해서도 항의하는 움직임을 보였으나, 이미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준 식민지로 접어든 상태에서는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도 일본에서는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도서로 간주하여
조선총독부 치하로 파악하였고, 그 이전부터 대한제국은
1901년 9월 내부대신 이건하의 울릉도 관할 문서,
1902년 4월 내부의 ‘울도군절목 문서 등을 통해서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 즉 행정 관할을 구체적으로 실행했다.
울도군절목 내용 중 출입하는 화물은 독도에서 잡은 바다사자를 포함한
일본인의 수출화물에 일종의 세금을 부과하는 근거가 되었다.
"울릉도 수출품목에는 독도에서 잡은 바다사자가 포함되어 있고,
일본인들은 이 수출품에도 수출세를 납부했다. 일본인들이 수출세를 납부했다는 기록은
일본 외무성 기록에 보이며, 울릉도의 바다사자 수출통계 역시외무성 기록에 보인다.
울릉도의 일본인들이 독도 바다사자에 대한 세금을 울도군에 납부했다는 것은
독도를 한국령으로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이들이 독도가 한국령임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울릉도의 산물에 대해서만 세금을 냈을 것이다. 당시 수출세는 물품에 따라
세금을 내는 이른바 ‘종가세’였기 때문이다. 이는 이들이 독도를 울릉도의 속도로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竹島問題100問100答』에 대한비판적 검토,그리고 우리의 대응
현대에 이르러서도 한국의 독도 주소는 울릉도에 부속되어 있으며,
영유권을 보유하지 못한 일본 또한 그 주소를
오키섬에 부속(島根県 隠岐郡 隠岐の島町)시킴으로써 독도가 사람들의 인식속에서
자연스럽게 모섬의 부속섬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음을 시인하였다.
이후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독도는 다시 한국의 영토로 귀속되었다.
3.3. 20세기: 일제의 패망과 독도의 행방
그리고 이렇게 무력해진 대한제국은 결국 1910년 일본에 강제 병합되어
모든 주권을 상실했지만, 그 뒤로도 일본은 지도에서
독도를 분명히 울릉도의 부속 도서로 인식하여 조선총독부 치하에 표시하였고
1945년 일본이 항복하면서 연합국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가
독도를 울릉도와 함께 일본의 판도에서 제외하는 지령으로
연합군최고사령관각서 677호를 발효함에 따라 독도는 다시 국제법상 한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후 1948년, 독도는 주일미군의 폭격 장소로 지정되게 되어 폭격을 당하는데,
당시 사망자 수는 12정도로 보도되었으나 근래 와서는 수백으로 보도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근해에서의 폭격이라 독도자체에 일어난 지반 피해는 거의 없는 수준이다.
한국 정부는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맥아더 라인이 해체되자
일본 어선들이 한국쪽 해역으로 넘어와 수산 자원을 남획할 것을 우려했다.
게다가 미국 국무부 고위 관리인 딘 러스크는
일본의 주장을 두둔하는 러스크 서한을 한국에 보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평화선 선언을 발표해 독도를 보호하였다.
그러나 해당 정책은 국제 조약을 반쯤 무시하는 조약이었던 탓에,
이 정책은 지금도 두고두고 일본이 불합리한 조약이었다며 독도 영유권을 주장할 때
써먹는 내용이지만, 한국은 그 이전부터 독도에 영향을 행사하고 있었음을 기억하자.
거기다가 평화선이 선포된지 얼마 되지 않아, 주일미군에 의해 목숨을 잃은
어민들의 위령비가 '시마네현 오키군 다케시마(島根縣隱岐郡竹島)'라는 나무 팻말을
꽂고 가던 일본 어민들에 의해 바다로 던져지면서,
강경적인 도발로 판단한 정부가 근처를 지나가는 어선들을 죄다 영토침입으로 간주,
전부 나포해버렸다. 평화선이 유지되는 동안 일본 어선 나포를 통해서만
수 천 명의 일본인이 체포되고, 접근하는 일본인들을 견제하기 위해
화기까지 사용하는 와중 44명의 사상자가 발생되었다.
3.4. 1953년-1956년: 독도의용수비대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 해군 및 경찰이 빈약하던 시기,
1953년 4월 20일에 독도에 상륙하여
1956년 12월 30일 국립경찰에 수비업무와 장비 전부를 인계할 때까지 활동한
33명의 의용수비대원이 결성한 33명의 독도의용수비대가 독도를 지켰다.
3.4.1. 일본과의 교전 및 침입 기록
이때 일본과 독도 의용 수비대는 3차례 충돌 및 교전을 했는데,
자세한 내용은 이곳을 참조하였다.
3년 동안 독도에서 일본 해상보안청 함정과 세 차례 총격전을 벌였다(수기 98)
1954년 7월에서 동년 10월 사이는 매월 일본 순시선이 23일에서 25일 사이에
1척 내지 3척이 독도에 나타나서 세 번의 총격전이 있었고(수기 105)
제 1차 : 1954. 5.23 10:00 해상보안청 소속 “즈가루”호 격퇴
제 2차 : 1954. 8.23 08:00 해상보안청 소속 “오키”호 격퇴
제 3차 : 1954. 11.21 05:00 해상보안청 소속 “오키”호와 “헤꾸라”호 격퇴
처음 조우한 것은 독도 의용 수비대가 서도에 온 지 약 1개월쯤 지났을 때였다.
이 경비정은 독도에 순찰을 왔던 듯하다.
(1953년) 5월 23일, 약 150m 전방 해상에 천 톤급으로 추산되는
흰색 일본 경비정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안개속의 그 모습은
육안이나 쌍안경으로 보아도 차이가 없었다. 전원 전투태세를 취하고 M1소총으로
공포탄 세발을 쐈더니 '나가레데 기다까?' (표류 했느냐?)라고 확성기 소리가 났다.
한참 있다가 안개가 걷히자 일본 경비정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산꼭대기의 태극기와 바닷가에 설치된 천막으로 봐서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판단했던 것 같았다. 이때가 일본 경비정을 사실 최초로 본 것이다.
수비대 수기 212~213 중
이후 일본은 낚싯배를 보내 불법 어로 행위를 하려다 적발된 적도 있었다.
1954.5.28 오전 3시경 일본 어업시험선인 “다이센”호가 독도에 정박하여 하선하려고
하는 것을 목격한 정원도, 이규현, 하자진, 양봉진 등 4명이 전마선을 타고 가서
즉시 퇴각할 것을 통보하여 바로 떠나도록 했다.
이 때 무기는 사용하지 아니했다. (정원도, 이규현 등 증언)
1954년 7월 28일 일본해상보안청 소속 순시선 “나가라”와“구즈류호”가
독도영해에 침범하였다. 이들의 침범을 보고 서도의 물골 앞에서 천막을 세우고 있던
6명의 독도의용수비대원들은 즉시 전투 태세를 취하고 퇴거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순시선들은 상륙을 포기한 채 그대로 도망쳤다.
실제로 일본 함선에 사격을 가한 적도 있다.
1954년 8월 23일(수기 34, 1953년 7월 23일 새벽 5시) 오전 8시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경비정 PS 9 おき(오끼)호가 동도 500m 지점으로 접근 했다는
동초의 보고를 받고 우리는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쌍안경으로 확인하니
일본경비정은 계속 접근을 하고 있었다. 거리 300m에서 기관총을 발사하였다.
후미 쪽에 몇 발이 맞자 일본 경비정은 진로를 바꾸어 도망을 갔다.
수비대 수기 221
이후 독도 의용 수비대는 일본의 접근을 막기 위해
나무로 가짜 대포를 만들어 해안포 진지로 속여 쫓아냈던 기록도 있다.
1954년 10월 2일 아침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오키”호 와 “나가라”호가
독도에 접근하였을 때 동도에 새로이 설치된 포진지에서
포구(砲口)를 선박 쪽으로 지향하여 실탄 없이 적을 위협하는 가장 원시적인 방법,
가짜 대포가 생각났다. 대원들과 의논했더니 모두들 한 번 만들어 보자고 했다.
시작한 지 한 1주일 만에 아주 멋진 대포가 완성되었다.
포구 직경이 20cm, 포신이 자유롭게 빙빙 돌고 미제 에나멜로 단장된 신형 대포였다.
소위 이것이 독도의 목 대포인 것이다. 다음 달(11월) 24일부터 함정이 나타났는데
이제는 근접치 않고 먼 곳에서 배회할 뿐 함정의 번호 조차 식별하기 힘든 정도였으니
필경 목대포의 위력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일본 잡지에 난 사진을 보았을 때
우리도 식별이 어려울 만큼 진짜와 흡사했다.
수비대 수기 76
1954년 11월에는 일본의 상륙전 시도도 있었으나
필사적인 전투 끝에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1954.11.21(수비대 수기 1954.4.22) 아침 일찍 전방 1km 해상에서
일본함정이 독도를 향하여 오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좌우를 보니 오른쪽, 왼쪽, 이것은
완전히 포위상태에서 독도를 공격함을 직감했다.
즉시 막사 안으로 뛰어들어 비상을 외치고, 쌍안경을 들어 확인하니,
1,000톤급의 일본함정 PS 9, PS 10. PS16 이었다. 평상시 훈련한 대로 대원들은
기민한 동작으로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일본함정이 500m 쯤 접근했을 때
권총으로 신호를 한다. 일본 함정이 700m에서 600m로 다가오고,
M1소총 유효 사거리에 들어왔다. ”탕!“ 한발의 신호와 함께 일제히 독도가 떠나갈듯 한
총성이 울려 퍼지고, 6․25 때 명사수 특무상사 출신 서기종이 쏜 박격포 1발이
PS 9 함에 명중하여 뱃머리에서 몇 사람이 나가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일본 함정은 불의의 총격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면서
PS16함에 구조요청을 하였고 PS9함에 접근한 16함은 예인 시도를 하려고 로프가
9함에 건너가고 중기에 치명상을 입은 PS9함은 먹구름 같은 연기를 뿜어내면서
동쪽으로 도망했다. 비행기만 계속 독도를 선회하면서 위협하고 있었다.
수비대원들은 대공사격자세를 갖추고 사격개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공을 비행하던 일본비행기도 일본 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수비대 수기 71
독도 의용수비대 중 9명은 경찰로 채용되어 그 뒤로도 독도를 지켰다.
이후인 1956년 12월 30일, 독도의용수비대가 경찰에게 모든 장비를 인계하여
현재는 경찰이 독도를 지키고 있다.
3.5. 1960년대 이후
일본은 어떻게든 평화선을 무력화 시키려고 했고,
결국 1965년 박정희 정권과의 한일협정으로 평화선을 무효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일본은 평화선을 한국이 독도를 무력으로 점령했다는 근거로 들고 있고,
한국은 평화선이 독도의 영유에 대한 자위권 행사의 근거라고 맞서고 있다.
광복 이후 6.25 전쟁을 거쳐 휴전선이 확정되면서
대한민국이 실효 지배하게 되었고, 이에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중종 때 편찬된 신동국여지승람의 팔도총도
4. 옛 지도의 독도
고지도상의 우산도는 독도인가?
조선시대 제작된 여러 고지도에 나오는 우산도가
현 독도를 지칭하는 것인지에 대해 논쟁이 있다. 이는 위성, 사진 기술,
근대적 측량 기술이 부족하고, 현대인과 인식 체계도 사뭇 달랐던 시대에 제작된
고지도를 현대인의 눈높이에 맞추어 읽으려 들기 때문에 발생하는 논란이다.
예를 들어 1530년에 제작된 「팔도총도」의 우산도는 울릉도의 서쪽에 그려졌기 때문에
독도가 아니라거나, 1711년 박석창이 보고한 「울릉도도형」 울릉도 바로 옆에 그려진
'소위 우산도(所謂 于山島)'는 해장죽전(海長竹田)이 있다고 기재되어 있으므로
죽서도라는 식의 도맷금 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한국이 보유한 수많은 독도 관련 사료를 트집 잡아
무용한 것인양 만들려는 일본 측의 전략적 폄하에 기인한 면이 크다.
그러나 실제로 고지도의 해독은 매우 고차원적인 일로 「울릉도도형」 '소위 우산도'의 경우
죽서도보다 남쪽인 저전동(현 저동) 저동항보다 더 남쪽에 그려져 있고,
1937년 그보다도 더 남쪽인 도동에서 발견된 수토관 박석창의 묘방(정동쪽) 각석입표를
고려하면, '소위 우산도'는 현 울릉도 동남쪽의 독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우산,무릉의 두 섬은 (울진)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두 섬이 서로 멀지 않아 날씨가 청명한 날에는 바라볼 수 있다.
(于山武陵[48]二島 在縣正東海中 二島相去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 《세종실록지리지》
독도가 직접 언급된 첫 문헌으로 추정되는 것은 세종실록지리지에 표기된 기록으로,
울진현에서 등장하는 무릉과 우산도가 각각 울릉도와 독도로 추정되는 첫 기록이다.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의 정확성은 현대적 수준 측량에서 성인봉의 약 600m 지점부터
육안으로 독도를 식별 가능하다는 연구 결과에서 드러나며, 이는 전통적으로
조선의 지리학자 및 관리들이 독도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팔도총도」의 경우에도 지도를 실제 제작한 이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울진 정동쪽 바다에 우산-무릉 이라는 두 개의 섬이 있다'는 세종실록지리지 등의
문헌-문자 정보만을 가지고 지도를 제작해야 하기 때문에
어느 섬이 더 육지에 가까이 있는지 알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두 섬의 위치를 해당 기록 순서인 우산, 무릉 순으로 동쪽 바다에 나란히 임의로
배치시키는 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선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실제로 15세기 「팔도총도」 이후, 자료의 축적에 따라 18세기 작성된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무릉은 왼쪽, 우산은 오른쪽으로 이동하게 되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는 서양에서 제작된 지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특히 2021년 6월 문재인 대통령의 스페인 순방 중 실물 공개되어 화제가 된
'조선왕국전도'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제기되는데, 울릉도를 반릉도(Fan-ling-tao)로,
우산도를 천산도(Tchian-chan-tao)로[50] 적고 있는 것은
아마도 이들이 당시 조선을 방문하여 실측 후 지도를 제작한 것이 아니라
중국 등 외국에서 수집한 자료를 이용해 지도를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 고지도는 이러한 미비함과 난해함 때문에 국제 법정에서도
판결에 직접 인용되는 경우가 지극히 제한적이다. 고지도를 직접 인용하여
판결을 내리는 경우는 그 고지도가 해당 분쟁에 직접 활용되는 경우 등에 한한다.
또한 자국의 영토에서 누락시킨 지도의 증명력보다
타국의 영토로 표시한 지도의 증명력을 더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으며,
개인 혹은 민간의 지도보다 정부 공인-공식 지도의 영향력을 더 높게 평가한다.
이러한 조건에 가장 잘 부합하는 고지도의 예는
태정관지령문에 첨부되었던 기죽도약도이다.
1) 시마네현 고시는 없다?
일본은 독도의 영토 편입을 시도했다는 시마네현 고시 제40호 문서가
1945년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며 원본 문서의 존재를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문서는 시마네현청에서 지방 촌 사무소로 배부된 사본 중
남아 있는 것을 수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사본에 시마네현 지사의 날인이 없고,
내부 용도로 사용되는 '회람' 도장이 찍혀있는 등의 근거로
애초에 고시문은 완료되지 못한 것이라는 추정과
고시(널리 알림)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려 했다는 의견이 있다.
2) 하치에몬 사형 이후 설립된 도해 금지 팻말
1837년 2월에 에도 바쿠후의 명령으로 다카다번이 니가타현 지역 해안가에 세운
도해 금지령 팻말에 있는 '오른쪽 섬(右島)'이 울릉도-독도 중
어느 섬을 지칭한 것인지 논쟁이 있다.
팻말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이번에 하치에몬이 '다케시마'(竹島)에 도해한 사건을
검토한 결과, 오른쪽의 섬(右島)은 겐로쿠 시대부터 도해 정지를 명령한 곳이므로
항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이 오른쪽 섬(右島)을 '죽도(당시 울릉도)',
독도 중 어느 쪽으로 해석할 것인지 엇갈리는 것이다.
'오른쪽 섬(右島)'이 울릉도를 칭한다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팻말의 왼쪽으로 문장을 연결하는 구조상 최초 등장한 '죽도(竹島)'에 대한 지칭대명사로
'오른쪽 섬(右島)'이 반복하여 등장하고 있음으로,
이는 '오른쪽에 지칭 한 섬', 즉 죽도=울릉도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입장이다.
반면 독도를 지칭한다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向後 右島之儀も 同様相心得 渡海致間敷候
(향후 오른쪽 섬도 같음을 명심해 도해하지 않도록)'의 문장을 근거로
여기에서 지칭된 오른쪽 섬은 'も(~도)'가 붙어있고,
바로 앞 문장에 울릉도가 도해 금지 된 이력을 말하고 있음으로
'울릉도의 오른쪽 섬', 즉 독도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입장이다.
이 팻말은 2010년에 한국인 사업가가 구입하여 한국으로 가져왔다.
3) 근대 문서의 논쟁점
18~19세기는 조선(대한 제국)이 한창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라
문서 면에서 여러 가지 논쟁점이 생긴다.
3-1) 대한지지
최남선의 대한지지는 독도와 울릉도의 경도를 잘못 표기하여
영유권 주장의 근거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대한 지지에는
"이 책은 일본인이 저술한 한국 지리 관계 도서를 주로 하고 동국여지승람을 참고하여
역술하였다.” 고 되어 있다. 그리고 현채는 '대한지지'의 후기에
"시간적 여유가 없어 일본의 지리서를 번역했다."며 일본의 문서를 가져왔다고 했다.
3-2) 대한신지지
"대한신지지"에는 울릉도만 있고, 독도가 없고, 위치편에
'조선의 동쪽의 경계는 두만강이며, 그것은 130도 58분이다' 라고 기술되어 있으므로
당시 독도는 조선령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장지연은 분명히
"于山島는 其東南에 在하니라(우산도는 울릉도의 동남쪽에 있다)"고 서술하였고,
대한신지지"는 일본의 한국신지리(韓國新地理,1905)를 참조한 것이다.
3-3) 대한제국 칙령 제41호(1900년) 1900년 대한제국 칙령 41호, 독도영유권 국제적 재선언
울릉도 동편 바로 옆에는 죽도(죽서도)라고 불리는 별개의 섬이 존재하여,
후에 우산도가 죽서도이냐 독도이냐를 놓고 많은 논란이 있었다.
특히 '울릉도 옆에 있으면서 사람이 사는 섬'은 죽서도로 추정되는 경우가 많아,
혹여 고지도에 상관된 문제를 접한다면 이를 알아두는 편이 바른 이해에 도움이 된다.
이후의 한국/일본 문헌에서 독도의 명칭은 다양하게 표기된다.
세종실록지리지의 우산도(于山島), 안용복 관련 기록의 자산도(子山島),
성종시대의 삼봉도(三峰島), 정조실록의 가지도(可支島),
에도 막부와 메이지 정부의 '마쓰시마/송도(松島)', 때로는 '다케시마(竹島)',
조선 말 고종이 말한 송죽도(松竹島), 대한제국의 석도(石島) 등등...
이 때문에 한국 측이 '이 섬은 독도다'라고 하면 지칭하면,
일본 측에서는 '이 섬은 독도가 아니다.'라며 자료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는 대개 죽서도라고 주장한다.
이는 전 근대까지만 해도 국가에서 영토를 파악하는 범위는 호구의 거주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고 본토와 멀리 떨어진 독도를
정부 차원에서 명확히 파악하기는 힘들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1876년까지는 '다케시마(竹島)'가 울릉도였다는 것이다.
정작 독도는 '마쓰시마(松島/송도)'라고 불렸다고 한다.
울릉과 우산이 모두 우산국 땅인데 우산은 왜에서 송도라 부른다.
《만기요람》, 조선
일본에서 1박 2일 거리에 송도가 있고
다시 거기서 1일 거리에 죽도가 있어 고려가 보인다. 《은주시청합기》, 일본
한국 측 사료상에서 독도로 추정되는 섬에 대한 기록은 15세기 초엽에 처음 나타난다.
특히 조선 태종 치세에 이루어진 일련의 울릉도 쇄출 과정에서
울릉도에 대한 지식이 축적됨과 더불어 '우산도'라는 이름으로
그 외의 섬에 대한 인지가 이루어진 것인데, 우산도라는 이름이 본래 울릉도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였으므로 다소간 울릉도와 우산도의 구분에 혼선이 빚어지기도 했다.
일본 측 사료상에서 독도로 확증되는 섬에 대한 기록은 17세기 중반에 처음 나타난다.
이는 오오야·무라카와 양 가문의 '다케시마' 즉 울릉도 출어 과정에서
울릉도에 대한 지식이 축적됨과 더불어 '마쓰시마'라는 이름으로
독도에 대한 인지가 이루어진 것인데, 그 위치나 거리 등의 표현에 따라
이것이 독도임을 부동의 사실로 확증할 수 있는 기록이다.
한국의 '우산도'와 일본의 '마쓰시마'로 인식되었던 독도의 존재는
17세기 후반의 쟁계 사건으로 더욱 구체화되었다.
울릉도의 영유권을 두고 한국의 조선 조정과 일본의 쓰시마 번이
첨예한 갈등을 빚었던 이 사건을 통해 이전까지 모호한 면이 있던
한국과 일본의 울릉도 인식이 완전히 정립되었는데,
이로서 한국은 울릉도에 대한 자세한 조사가 이루어져 독도의 존재를 다시금 인지하였고
일본은 '다케시마'와 그 부속 도서인 '마쓰시마'의 영유권이
조선 측에 있음을 명확히 규정하였던 것이다.
STORIES (With Lyrics) / Chyi Y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