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여행과산행길

사패능선2(22/10/10, Desire to Stay / Fariborz Lachini)

이름없는풀뿌리 2022. 10. 22. 08:07
요즈음 – 사패능선2 – 예전의 모습으로 흐르는 山 여울이 봉인된 시간 열고 일어나 뛰쳐나와 倫理를 順理라 하며 큰 소리로 외친다 배달9219/개천5920/단기4355/서기2022/10/20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사패능선2 (1) 산성 근처로 오기 전에는 한밭에서는 한밭 근처, 서울에서는 서울 근교의 산을 많이 다녔다. 모처럼 아내와 그 중 하나인 사패산에 가 보기로 했다. (남입-천호-군자-도봉산-회룡) 5번 갈아타고 도착한 회룡역. 주변의 많은 변화, 하지만 400년 된 회화나무가 지키는 회룡골은 먼 70년대의 정취를 풍기는 모습 그대로... 무학과 이태조의 전설이 스민 회룡사를 지나니 계곡에 단풍이 점점 물들어 가고... 계곡의 끝 긴 鐵階를 오르니 자운봉과 사패산으로 가는 갈림길 능선의 쉼터. 사패(賜牌)란 임금이 가족이나 신하에게 땅을 주는 것을 말한다는데 사패산은 선조가 그의 막내 딸 정휘옹주가 시집 갈 때 선물로 준 산이라고 한다. 정작 실록이나 어디에는 그 근거를 찾아 볼 수는 없고 추측하건데, 유정량(柳廷亮)이 1604년(선조 37) 14세 때 선조의 13남10녀 중 6녀인 정휘옹주(貞徽翁主)와 혼인하여 전창위(全昌尉)에 봉하여졌고, 이 때 옹주와 결혼하면서 사패산 자락 의정부 가능동 일대의 토지를 하사 받아 그 일족이 세거한 데에서 유래한 것이라 짐작해 본다. 사패산 정상의 치마바위에 앉아 남측을 바라보니 북한산 백운대, 오봉, 자운봉등 수많은 산봉우리가 물결쳐 가고 14년 전 와 봤던 그 기억이 바로 어제인 듯하다. (회룡역-회룡탐방지원센터-회룡사-쉼토-사패산) 왕복, 8.4km(11:00-14:00) (2) 미륵의 이마 같기도 하고 정휘옹주가 치맛자락을 펼쳐놓은 것 같은 너럭바위가 상봉인 사패산. 거기서 우주를 머리에 이고 발아래 사파의 세계를 내려다보니 내가 마치 미륵이 된 듯하여 잠시 바위에 앉아서 눈을 감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본다. 그렇게 관조하니 과거가 현재이고, 현재가 미래이고, 미래가 과거이다. 시간의 흐름이 정지된 듯 하늘에 그려진 산여울이 정지되어 있다. 이 세상의 계급, 직업, 재산으로 가늠되는 윤리. 그것으로 형성된 윤리를 가꾸거나 말거나 이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倫理는 흘러가는 봉우리들의 대열에서는 다만 順理로 빛나고 있다. 배달9219/개천5920/단기4355/서기2022/10/20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정휘옹주(貞徽翁主, 1593년_선조26 ∼ 1653년_효종4_壽61歲)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선조 26년) 황해도 해주(海州)의 행궁에서 조선의 제14대 왕인 선조(宣祖)와 그 후궁 인빈 김씨(仁嬪 金氏)의 여섯째 딸이자 막내딸로 태어났다. 성은 이(李),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원종(元宗, 정원군) 등과 친남매간이며, 인조(仁祖)의 친고모이다. 정휘옹주의 생모 인빈 김씨는 선조의 총애를 많이 받은 후궁이다. 인빈 김씨의 아들 중 정원군(定遠君)의 장남이 광해군(光海君)을 몰아내고 왕이 되니, 그가 곧 인조이다. 즉, 정휘옹주는 인조의 친고모이다. 정휘옹주는 1604년(선조 37년) 영의정을 지낸 전주 유씨 유영경(柳永慶)의 손자이자 유열(柳悅)의 아들 유정량(柳廷亮)과 혼인하였다. 이때 유정량은 전창위(全昌尉)에 봉해졌다. 한편 정휘옹주는 1653년(효종 4년) 음력 윤7월 15일 향년 61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정휘옹주는 사망 후에도 3년동안 녹봉을 지급받았다. 묘소는 양주의 도봉산(道峯山)에 마련되었다가, 훗날 남편 유정량의 묘에 합장되었다. 의정부시 가능3동 산 82번지는 선조의 여섯째 딸 정휘옹주(貞徽翁主)와 그의 남편 전창위 류정량(柳廷亮)의 묘가 있었는데, 1979년 그의 후손들에 의해 남양주군 별내면 덕송리 산10-1로 이장됐다. 정휘옹주의 남편 유정량은 할아버지 유영경이 선조 말기 선조의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 했던 사실 때문에 광해군과 대북파의 탄핵을 받았다. 이후 유영경은 1608년(광해군 즉위년) 광해군이 즉위하자마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으며, 4년 후인 1612년(광해군 4년)에는 그 일가가 몰살되다시피 하였다. 이때 유정량도 연좌되어 남해(南海, 지금의 경상남도 남해군로 유배를 갔으며, 이후 전라도 고부(古阜,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를 거쳐 경상도 지역으로 이배되었다. 한편 이때의 유배생활로 인해 유정량은 한때 실명의 위기까지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1623년(인조 원년) 인조 반정이 일어나면서 유배생활에서 풀려났다. 이후에는 여러 관직을 거치게 되었으며, 사은사 등으로 청나라에도 여러 차례 다녀왔다. 1663년(현종 4년)에 향년 7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한편 유정량과 정휘옹주는 2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의 이름은 유심(柳淰)으로, 아버지를 따라 함께 유배 생활을 하다가 인조 반정으로 한양으로 돌아왔다. 1627년(인조 5년) 음보로 벼슬 생활을 시작하여 경상도와 평안도의 관찰사를 지냈으며, 훗날 예조참판과 도승지 등을 지냈다. 1667년(현종 8년) 향년 60세를 일기로 죽었다. 차남은 군수를 지낸 유흡(柳潝)이며, 장녀는 이중규(李重揆)의 처이고 차녀는 정화제(鄭華齊)의 처이다. 유정량(柳廷亮, 1591년_선조24 ∼ 1663년_현종4_壽72歲)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룡(子龍), 호는 소한당(素閒堂). 영의정 영경(永慶)의 손자로, 통진현감(通津縣監) 열(悅)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첨지 이필(李韠)의 딸이다. 1604년(선조 37) 14세 때 선조의 딸 정휘옹주(貞徽翁主)와 혼인하여 전창위(全昌尉)에 봉하여졌다. 1612년(광해군 4) 할아버지 영경(永慶)의 사건으로 일가가 멸족될 때 전라도 고부에 유배되었다. 1619년 장차 역모가 있으리라는 소문이 호남 지방에 유포되자 경상도 기장(機張)으로 이배되었다. 여러 해 동안의 귀양살이로 토굴 속에서 햇빛을 보지 못하여 실명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즉시 풀려나와 작위가 회복되어 숭덕대부(崇德大夫)에 승품되고, 여러차례 승진하여 성록대부(成祿大夫)에 이르러 世勳을 물려받고 군(君)에 봉하여졌다. 1646년(인조 24)· 1651년(효종 2)· 1655년에 각각 사은사(謝恩使)· 진향사(進香使)·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도총관에 이르렀다. 글씨에 뛰어났다.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의정부시 가능3동 산 82번지는 선조의 여섯 번째 딸 정휘옹주와 그 남편 전창군 유정량 의 묘 가 있었는데, 1979년 그의 후손들에 의해 남양주군 별내면 덕송리 산10-1(용마사격장내)로 이장됐다. 유정량(柳廷亮)은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의 손자로 14세에 정휘옹주(貞徽翁主)에게 장가들어 부마가 되고 전창위(全昌尉)에 봉해졌다. 그는 성품이 활달하고 무인다운데가 있어 말타기를 즐겨했으며 장군이 되기를 원했으나 부마라는 신분 때문에 관직에 오를 수 없음을 불만스럽게 여긴 나머지 옹주에게 퉁명스럽게 대할 때가 여러번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무렵 우리나라에 담배가 처음 들어와 남녀 구분없이 장죽으로 담배 피우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하자 옹주도 장죽을 물고 다녀 남편이 보기에 지나치고 눈에 거슬려 몹시 나무랐는데 그게 화근이 되어 부부싸움까지 번졌다. 화가 난 옹주는 대궐로 들어가 분함을 실토하자 선조께서 부마를 불러 들였다. 유정량은 괴나리 봇짐을 메고 짚신 두 죽을 양허리에 찬 채 궁중으로 들어갔다. 그 차림새가 버릇 없는 것 같으면서도 기인다운 데가 있어 선조께서 손 행색으로 궁중에 들어선 까닭을 물으셨다. 그러자 유정량이 아뢰기를 “신은 이미 상감의 노여움을 산 죄인으로서 유배를 면키 어렵게 되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선조가 “귀양길을 떠날 자라면 짚신 한 죽이면 족하지 두죽은 다 무엇에 쓸 것인고?” 라고 묻자 유정량은 “여필종부라 하였으니 옹주와 함께 떠나려 하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선조는 더 이상 나무라지 아니했다. 한편 유정량의 할아버지인 유영경은 소북파의 우두머리로서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으려 했으나, 1608년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이이첨, 정인홍 등 대북파에게 모함당하여 함경도 경흥에서 죽게된다. 유정량도 16세의 어린 나이에 전라도 고부로 유배당한다. 귀양생활 7년째 되는 어느 날 경상도 양산으로 다시 옮겨 가는데 도중에 집은 다 헐고 거미줄이 곳곳에 늘어져 있는 주인 없는 빈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된다. 이때 동네사람들이 달려와서 빨리 나오라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전에도 여러 길손이 이 집에서 자게 되면 사람이 온데 간데 없이 귀신 밥이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정량은 말대꾸도 하기 싫은 듯 다리를 쭉 펴고 누었다. 조금 후에 방안에 차가운 공기가 맴돌며 천장에서 큰 구렁이가 뚝 떨어지면서 몸을 칭칭 감기 시작했다. 이튿날 날이 새자 마을 사람들이 몰려왔으나 길손은 간데없고 방안에 큰 구렁이만 죽어 있었다. 유정량은 이미 양산에 도착해 있었다. 한편 유정량에게는 표동이라 불리 우는 애마가 있었는데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준마였다. 그런데 어느 날 표동이 유정량을 찾아왔다. 광해군이 표동을 끌고가려 하자 마굿간에서 뛰어 나와 이곳 양산 6백리 길을 단순에 달려온 것이다. 귀양살이 12년 되던 해 어느날 표동이 별안간 네굽을 모아 구르며 갈기를 세우고 날뛰자 유정량이 이를 달랬으나 저녁에 겨우 그쳤다. 이날이 바로 인조반정이 있었던 1623년 3월 12일 이었는데 이튿날 아침 역졸이 궁으로 돌아오라는 어명을 가지고 달려왔다. 이때부터 표동응 영마라 하여 더욱 이름났으며 그후 40여년간 살다가 죽었는데 후히 장사지내고 그무덤을 용마총이라 이름 했으나 지금은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정휘옹주는 남편이 유배생활을 하는동안 홀로 되신 시할머니와 시어머니를 정성껏 모시며 집안 살림을 꾸려 가다 효종 4년(1653) 환갑(還甲)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1) 전철로(08:55-10:20, 남입-천호-군자-도봉산-회룡) 도착한 회룡골 420년된 회화나무(10:40) 2) 회룡사 입구 구절초(11:05) 3) 회룡골 계곡은 단풍으로 물들어 가고... 4) 회룡사거리 쉼터(12:00, 송추3.7k, 자운봉2.3k, 회룡사1.5k, 회룡탐지터2.4k, 사패산1.2k) 4) 사패산(12:40-13:10, 552m) 회룡역(14:30) 5) 회룡역-사패산 왕복(10:20-14:30, 4시간여, 8.4km) Desire to Stay / Fariborz Lachi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