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군길1(法, 22/11/17, La tristesse de amour(비애) / 남택상)
이름없는풀뿌리2022. 11. 18. 06:39
요즈음 – 망군길1(法) –
法典은 얇을수록 지켜지기 쉬울 텐데
갈수록 두꺼워져 떨어진 윤리 도덕
敎室이 바로 서야지 順理대로 될 것을
배달9219/개천5920/단기4355/서기2022/11/17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성밖길40(망군길1(法))(0)산행준비
지난 번 한양삼십리누리길 가며 보아둔
정겨운 이름을 가진
두리봉, 군두레봉이 그리워 나선 길.
망군길[남문-검단산-망덕산-두리봉-새오고개-군두레봉-회덕동)으로 계획.
한양길은 오르내리가 있었지만
망군길은 주로 능선길이어서
힘들지 않은 편안한 길이라 생각.
(1) 남문(지화문)-검단산(534.7m)-망덕산(왕기봉, 500.3m)
(09:10-09:55-10:30, +45+35=80분, +1.8+2.4=4.2km)
2017년 4월 성남누비길 2구간을 갈 때
보았던 망덕산 가는 길가의 구상나무라 생각했던 나무는 전나무.
생각대로 부드럽고 편안한 肉山길.
낙엽이 법전만큼이나 두꺼워 발길이 더디다.
(2) 망덕산(왕기봉, 500.3m)-두리봉(457m)-새오고개(草峴)
(10:30-11:20-11:40, +50+20=150분, +2.0+1.2=7.4km)
지금의 혼탁한 정치.
최소한의 윤리는 없고 진영논리, 자기 이익의 관점에서
어떠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무조건 상대를 쓰러트려야 한다는
옛 부족국가 시대의 죽고 살기식 이전투구.
춘추전국시대의 혼탁한 현실정치에 열렬히 참여했던
공자는 정치란 法治보다 德治로
德治보다 禮治로 다스려야 한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최하治인 法治조차 지켜지지 않는 無法인 상황.
(3) 새오고개(草峴)-청룡봉(376.4m)-군두레봉(380m)-회덕동정자나무
(11:40-12:05-12:10-13:00, +35+5+50=240분, +1.0+0.2+3.0=11.6km)
생각하면 부끄러움을 모르는 윤리도덕의 붕괴.
그러므로 정치, 문화보다 교육을 바로 세워야.
교육으로 인간의 기본 윤리와 수치심, 부끄러움을 알게 해야 한다.
倫理 이전에 무너진 順理를 깨닫게 해야 한다.
그런 연후에 法治, 德治, 禮治를 순차적으로 회복시켜야한다.
그런데 교실에 진정한 선생님들이 계시지 않다.
무의식중에 강시가 되어버린 학생들이 수치심 없이 사회에 진출해 있다.
마지막에는 理治로서 다스려야 한다.
필자는 일찍이(2003년)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에서
홍익인간 사상은 세계 어떠한 사상보다도 至高한 사상이요
여타의 철학, 종교, 교리의 궁극적 귀결이라 갈파하였었다.
그 홍익인간의 방법은 재세이화(在世理化)에 있고
바로 그 理治로서 다스릴 때
전쟁, 다툼이 없는 궁극적인 지상낙원(샹그릴라)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한시바삐 진정한 선생님들이 교실에서
교육법에 명시된 홍익인간을 가르쳐야 한다.
배달9219/개천5920/단기4355/서기2022/11/17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논어(論語) 제2편 위정(爲政)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자왈 도지이정 제지이형 민면이무치)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법으로 이끌고 형벌로 다스리면
백성들은 법과 형벌을 피해나가도 수치로 여기지 않고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도지이덕 제지이례 유치저격)
덕으로써 인도하고 예로써 다스리면
백성들은 수치를 알게되어 올바르게 되느니라.’ 라고 하셨다.
(1) 남문(지화문)-검단산(534.7m)-망덕산(왕기봉, 500.3m)
(09:10-09:55-10:30, +45+35=80분, +1.8+2.4=4.2km)
1-1) 남문
1-2) 제1남옹성 곁을 지나
1-3) 들어가 볼 수 없는 신남성 동돈대, 서돈대
신남성(新南城)은 남한산성의 제7암문에서 1.5㎞ 떨어진 검단산 정상부에 쌓은 성으로
남격대라고도 한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대가 이곳을 점령하여
호준포와 홍이포 7~8문을 포진시켜 성 안쪽을 공격했던 곳이다. 1710년(숙종 36) 남격대에
돈대(墩臺)를 쌓았으며 1719년 수어사 민진후가 개축하였는데, 둘레가 743보,
여첩이 238타였다고 한다. 이후 1753년(영조 29)에 신남성 주변에 2개의 돈대를 쌓았다.
동돈대는 검단성의 2번째 봉우리에 세워졌다. 둘레 134m이고, 성벽의 두께는 4.3m로
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내부면적은 1,381㎡이다. 평균 높이는 4m 내외이고 안쪽에 1m 정도
의 단이 조성되어 있다. 돈대의 상당 부분이 훼손되었고 서쪽의 출입구에 놓은
홍예석(虹霓石, 무지개 모양의 아치형 문이나 다리를 쌓을 때 쓰는 쐐기형의 돌도
차량진입을 위해 확장하여 신축하였다. 서돈대는 동돈대에서 서쪽으로 235m 거리에 있다.
남한산성 동쪽의 한봉과 함께 산성의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점이다.
서돈대의 둘레는 121m이고, 성 안쪽의 면적은 998㎡로 동돈대보다 약간 작은 규모이지만
시계는 더 좋다. 서쪽 부분 성벽이 5m 정도 결실된 상태이며, 원상태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돈대의 내부도 훼손되었으나 출입 시설과 외곽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출입구는 아치형으로 정교한 무사석(武砂石, 홍예석 옆에 층층이 쌓는 네모반듯한 돌)
위에 5매의 홍예석을 올렸는데 폭과 높이 모두 152㎝이다.(광주 문화원)
1-4) 검단산
1-5) 성남누비길2구간(남한산성-갈마치고개)에 조성된 전나무
1-5) 망덕산(왕기봉)
망덕산(왕기봉, 500.3m)은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불당리에 소재한 모개미 뒷산 이다. 검단지맥상의 산이다.
(2) 망덕산(왕기봉, 500.3m)-두리봉(457m)-새우고개(草峴)
(10:30-11:20-11:40, +50+20=150분, +2.0+1.2=7.4km)
2-1) 두리봉 가는 길에 본 오색딱다구리의 겨울준비
2-2) 낙엽송의 아름다움
2-3) 두리봉 중턱에서 뒤돌아 본 망덕산
2-4) 두리봉
두리봉(457.3m)은 망덕산의 맨 위 산봉우리를 말한다.(광주문화원)
검단산(534.7m)이 마을 앞에 큰 산인데, 지금의 하남시에 있는 검단산과 산이름이 같다.
보통골 뒷산 일명 망덕산이라고 한다. (성남문화원)
2-5) 새오고개
새오고개(蝦峴) 둔전말에서 광주시 목현동(새오개마을)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예전에는 경안동에서 남한산성으로 가려면 이 고개를 거쳐 둔전말을 지나가야 했다.
조현(鳥峴 새오개) '새오개'라는 마을 이름을 한자(漢字)로 표기하자니 '조현'(鳥峴)이 된 것이다.
이 마을을 경유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는 고갯길이 있는데 이 고개를
'새고개'라고 부르던 것이 변하여 '새오개'가 된 것 같다. 『중정남한지』(重訂南漢誌)에는
초현(草峴)으로 기록되어 있다. 남한산성으로 걸어서 가자면 이 곳에서 쉬어가야 하므로
이 마을에도 주점이 있었다. 이 마을은 진주 강씨의 세거지(世居地)이기도 하다.
(3) 새오고개(草峴)-청룡봉(376.4m)-군두레봉(380m)-회덕동정자나무
(11:40-12:05-12:10-13:00, +35+5+50=240분, +1.0+0.2+3.0=11.6km)
3-1) 청룡봉 중턱에서 뒤돌아 본 지나온 길(두리봉 뒤로 검단산능선길)
3-2) 청룡봉
청룡봉(靑龍峯262m)은 광지원리 산121번지를 '청룡봉'이라고 한다.
광지원리의 정남향에 있는 산이다. 이 산 너머가 군월산(軍月山)이다.
군부대가 점령하고있어 민간인 출입이 금지된 산이다. 그런데 군두레봉 (380m)아래에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청룡봉(340m)정상석’이 서있다.
3-3) 군두레봉(여기서 등산로폐쇄 방향으로 하산)
3-4) 안부로 내려와 올려다 본 군월산(376m)
군월산(軍月山357m)은 '군월라산'(軍月羅山)이라고도 한다. 회덕리의 뒷산으로,
남한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어, 옛날에는 남한산성의 보장지(保障地)로 활용되었다.
즉 남한산성을 방어하기 위하여 척후병들이 이 산에 올라 적정(敵情)을 살폈다고 한다.
『중정남한지』의 기록에는 고려 공민왕(恭愍王)의 전좌봉(殿座峯)이 있고,
주맥(主脈)은 청량산(淸凉山)이라고 되어 있다.
9) 여정(남문-검단산-망덕산-두리봉-새오고개-군두레봉-회덕동, 12km, 4시간여, 천천히)
이배재(二拜峴)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의 상대원동과 광주시의 목현동을 잇는 고개다.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와 광주시의 경계를 이루는 청량산·검단산 산줄기를 넘는 고개로
해발 300m에 이른다. 북쪽으로는 산성동을 거쳐야 광주시로 넘어갈 수 있고,
남쪽으로는 갈마치고개·새마을고개·태재 등의 고개가 두 도시를 연결한다.
국지도(局地道) 338호선이 이 고개를 지나 중원구의 성남공단 지역과 연결된다.
'절을 두 번 하는 고개'라는 뜻의 명칭이 붙은 것은 옛날 충청도의 선비가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갈 때 이 고개에 오르면 한양이 보여 임금이 있는 쪽을 향하여 한 번 절을 하고,
부모가 계신 고향을 향하여 다시 한 번 절을 하였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도 하고,
조선시대의 유학자 이황(李滉)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임금을 향하여 절을 두 번하고 길을 떠난 데서 유래하였다고도 한다.
그런데 임금이 죽은 사람도 아닌데 왜 절을 두 번 했을까?”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경기도 광주시의 북부 목현동에서 성남시 상대원동으로 넘어가는 길에 있는 고개이다.
『여지도서』에 "이현(梨峴)은 관아의 남쪽 12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중정남한지』에 "이보치(利保峙)는 경안면 북쪽에 있다." 『여지승람』에는
"이령(梨嶺)이라고 되어 있으니 즉 청량산의 과협(過峽)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보치라는 것은 남한산성(南漢山城)을 방어하는 데 있어서 아주 이로운
보장지(保障地)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고개에서 능선을 따라 약 2㎞만 올라가면
남한산성의 남장대(南將臺)에 다다르기 때문이다. 조선 말기까지 남한산성에서
군사훈련을 할 때면 이곳에도 군사들이 배치되었다고 한다.
즉 적이 남한산성을 침투하는 것을 사전에 방비하기 위하여 이 고개에
척후병과 복병을 두었다고 한다. 『해동지도』와 『광여도』에 이현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에 이배현(二拜峴) · 이배재가 기록되어 있다.
La tristesse de amour(비애) / 남택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