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여행과산행길

외성길9(국청사2, 22/11/24, 현절사-동장대-봉암성-수어장대-국청사-행궁, May It Be / Enya)

이름없는풀뿌리 2022. 11. 27. 10:20
요즈음 – 외성길9(국청사2) – 맷돌과 화살촉등 드러난 痕迹들은 절규와 함성으로 귓가에 울리는데 모두 다 지켜보고도 말이 없는 松林숲 배달9219/개천5920/단기4355/서기2022/11/24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외성길9(국청사2) (1) 日出 보려고 나선 길. 사실 매일 뜨는 해이지만 오늘은 왜 그 해가 보고 싶은 걸까? 그 뜨거운 해를 보며 가슴 속 뜨거움을 느끼고 싶었다. 그런데 흐린 날씨. 기대를 안했는데 막상 동장대에 오르니 그 빛나는 이마를 구름사이로 살짝 내밀고 반짝 인사를 한다. 3암문으로 성밖길로 내려가다 보니 지난 폭우의 진흙으로 막혔던 4암문도 센터에서 복구. 4암문에서 성안으로 다시 들어와 울창한 松林사이로 청량산 수어장대를 보며 나아가다보니 산성 숲은 초겨울 예고. 카일라스산 같은 수어장대를 뵙고 내려오다 보니 펜스에 둘러쳐진 웬 발굴지가 보였다. (2) 알고 보니 옛 국청사지. 가림막 펜스에 국청사의 유래와 발굴 상황 그림으로 전시. 승영 사찰답게 철화살촉, 맷돌도 발굴. 축성책임자 각성대사가 한흥사와 함께 최초 건립. 그러고 보니 정조실록에서 한흥사, 국청사 由來를 본 기억. 정조대왕도 이 근처에 납셔서 주필하셔서 신하들과 국청사 유래며, 처절한 북문 전투에 대하여 論하셨으리라. 주위의 금림조합에서 가꿔 온 수백 년 된 송림 숲은 그 역사의 현장을 지켜보았을 것인데 말이 없고 다만 솔가지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은 쏴아 쏴 소리를 내며 그 날의 함성과 절규란 듯 빈숲을 울린다. 배달9219/개천5920/단기4355/서기2022/11/24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1) 행궁(06:40), 현절사(07:00), 동장대지(07:20)에 올라 본 일출 2) 복원 중인 봉암성 남한산 정상 일출(07:40) 3) 다시 돌아온 사위질빵이 장식한 동장대지(07:50) 4) 솔가지 사이로 보이는 오늘 가 보고 싶은 청량산 수어장대 5) 수어장대의 아름다움(08:50) 6) 발굴 중인 국청사지(09:00) □ 정조실록 8권, 정조 3년 8월 9일 1779년 남한산성내 백성의 가장 큰 폐단인 보휼고의 빚을 탕척하다 임금이 남한(南漢)에 있었다. ...... 중략 ...... 임금이 말하기를, "국청사(國淸寺)라는 이름은 중 각성(覺性)이 이름지어서 먼저 알린 것이라 하는데, 참말인가?"하매, 서유방이 말하기를, "갑자년 성을 쌓을 때에 각성이 두 절을 창건하여 국청(國淸)·한흥(漢興)이라 이름지었으나 당시 사람들이 그 뜻을 모르다가 병자년 이후에 비로소 한(漢)과 한(汗)이 같은 음이고 금(金)나라가 이 해에 국호를 청(淸)이라 고친 것을 알았는데, 인조 대왕(仁祖大王)께서 기이하게 여겨 각성에게 매우 후하게 물건을 내리셨다 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명이 서로 부합된 것을 어찌 반드시 앞일을 예언한 말로 죄다 돌려야 하랴마는, 후세 사람으로서 보면 일이 우연하지 않을 것이다."하였다. ...... 중략 ...... 부윤(府尹) 송환억(宋煥億)에게 명하여 부로(父老)를 거느리고 앞으로 나오게 하고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위유(慰諭)하게 하였다. 7) 1900년대에는 땔감으로 민둥산 8) 현재의 국청사는 1968년에 옛 국청사지로부터 떨어져 세워짐 9) 월영루(月映樓)가 있던 국청사 기록 10) 승영 사찰의 흔적 11) 현재의 국청사 12) 아직 문을 열리않은 행궁(09:20) 13) 오늘의 여정(행궁 -> 현절사 -> 동장대 -> 봉암성 -> 3암문 -> 성밖길 -> 4암문 -> 성안길 -> 수어장대 -> 국청사 -> 행궁, 6km, 2시간30분여) 남한산성 국청사지에서 목부재 출토… 승영사찰 누각 구조 이해 기대 - 월영루 축대 아래에서 장여, 화반, 인방 등 건축부재 출토 기자명 HKBC환경방송 입력 2021.07.20 15:23 ▲ 국청사지 전경(2018년 촬영) 경기도 제공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남한산성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승영사찰 ‘국청사(國淸寺)’ 옛터에서 목부재(구조물의 뼈대를 이루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는 나무로 만든 재료)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경기도는 출토된 목부재들이 국청사를 비롯한 남한산성 승영사찰의 누각 구조를 이해하는 데 큰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와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은 지난해 9월부터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일원 옛 국청사 터에서 문화재 정밀 발굴조사를 진행해 복수의 목부재 (정확한 발굴규모는 추후 정밀조사를 통해 결정) 등을 출토했다고 20일 밝혔다. 이번 조사는 문화재청 허가 속에서 ‘국청사지 종합정비계획 수립’ 등 국청사 옛터 활용을 위해 추진됐다. 조선 인조 2년(1624년) 축성된 남한산성에는 산성의 축성과 관리‧수비를 위해 10개의 승영사찰이 건립됐다. 승영사찰이란 승군이 산성에 주둔하면서 세운 사찰로, 금당‧승방 등 일반적인 사찰 공간 외에도 무기고·화약고 같은 군사적 공간이 함께 있다. 10개 중 국청사는 한흥사와 함께 1624년 가장 먼저 세워진 사찰이다. 그러나 1905년 일본이 의병 무기창고로 사용되던 남한산성 내 모든 사찰을 폭파하면서 국청사도 함께 폐사됐다. 1968년 동일한 이름의 국청사가 남한산성 내 세워졌지만 조선시대 국청사와 역사적 연관성은 없다. 도와 경기문화재연구원은 과거 기록된 국청사 누각인 ‘월영루(月暎樓)’ 입증에 집중했다. 1847년 편찬된 경기도 광주의 읍지(지리지)인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는 ‘국청사는 남한산성 서문 안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누각과 연못이 있었다’고 명시했다. 또한 숙종~정조 때 인물인 이명룡(1708~1789)의 ‘계일헌일기(戒逸軒日記)’는 국청사 누각의 이름을 ‘월영루’라고 했다. 이를 토대로 발굴한 결과, 국청사지 누각지 축대 아래에서 월영루에 사용된 것으로 짐작되는 복수의 목부재가 확인됐다. 이는 장여(長舌·도리 밑에서 도리를 받치는 부재), 인방(引枋·기둥과 기둥 사이 또는 문이나 창의 아래나 위로 가로지르는 부재), 화반(花盤·인방 위에 장여를 받치기 위해 끼우는 부재) 등 건축부재다. 화반은 연꽃 조각본과 귀면 조각본이 함께 확인됐다. 남한산성 내 발굴조사에서 조선시대 건축부재 출토는 이번이 최초다. 도는 국청사지 발굴조사가 다음달 끝나면 출토 문화재 활용 방안 등 정비사업계획을 수립할 예정이다. 이은선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소장은 “이번에 출토된 목부재는 옛 기록에서 확인된 ‘월영루’의 건축부재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 가치가 있다”며 “향후 보존처리와 추가연구를 거치면 남한산성 승영사찰에 건립된 누각 구조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번 발굴조사는 2017년 10월~2018년 9월 1차 발굴조사에 이은 2차 조사다. 당시 조사를 통해 국청사가 중정(中庭‧마당)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는 승려 방이, 남쪽에는 누각이, 북쪽에는 금당(본존불 안치 건물)이 들어선 산지중정형의 사찰임을 확인했다. 이 중 누각지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인 것도 밝혀졌다. 이 외에도 여러 동의 건물지, 우물, 백자, 기와 등의 유물과 함께 철화살촉, 철환 등의 무기류 유물이 출토돼 승영사찰임을 증명했다. May It Be / Eny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