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여행과산행길

산성길46(율목정, 22/12/06, 율목정-불망비-남문-남옹성-덕운사, Moon River / Audrey Hepburn)

이름없는풀뿌리 2022. 12. 7. 16:29
요즈음 – 산성길46(율목정) – 임금님 여주 가는 고단한 능행길에 행궁에 유숙하려 말달려 가시다가 가마로 갈아타시고 오르시던 율목정 배달9219/개천5920/단기4355/서기2022/12/06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산성길46(율목정) (1) 요즘 산성 옛길을 탐구하다보니 산성 아래 율목정에서 임금님들이 주필하셨다는데 그 율목정이 실재 있슴을 알고 찾아 나선 길. 실은 현재의 산 위에 있는 율목정은 그 위치를 정확히 비정하여 복원한 것은 아닌 듯... 산 아래 360여년 된 보호수 근처가 아닐까 생각. 그렇게 임금님들은 말타고 오시다가 가마로 갈아타려 산 초입 정자에서 잠시 휴식하시는 사이, 가마꾼들은 부산하게 등정 준비를 하였으리라. (2) 그리하여 가마를 타시고 현재의 342번 지방도길을 따라 남문으로 나아가셨으리라. 임금님이 가신 길은 지금의 등산길보다는 342번 지방도가 옛길일 가능성이 커 보임. 지금의 지방도가 옛길을 기반으로 확장되었을 거라고 합리적 추론을 해보다. 불망비(수어사 서명응, 부윤 홍익필과 이명중)가 있는 지점에서 등산로와 지방도가 합류되는 현상이 그를 방증. 왜냐면 불망비는 사람들이 접근 가능한 곳에 세워졌을 것이기에... (3) 그렇게 임금님이 행행하시는 모습을 연상하며 남문을 지나 남옹성에 다다르니 오늘 아침 내린 하얀 눈이 성곽의 발치에 드리우고 유려하게 흘러가는 성채가 아름답다. 성채의 안과 밖 넘나들며 촌각을 다투는 전투. 먹거리가 바닥나 기력이 떨어져도 거적을 뒤집어쓰고 한겨울의 여장의 틈을 지키던 초병. 10암문에서 내려다 보는 발아래의 산맥들이 그 초병들의 기억을 뒤로 하고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줄달음쳐 가고 있었다. 배달9219/개천5920/단기4355/서기2022/12/06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0) 『자전곶교지광주략도』에 나와 있는 율목정을 찾아 나선 길 1) 위례역 STORY BOX(11:15) 2) 400여년 된 느티나무(11:20, 뒤편 동산이 율목정), 여기가 원래의 율목정 위치 아닐까? 3) 율목정으로 가다 뒤돌아 본 위례역, STORY BOX, 느티나무(11:25) 4) 여기서 마실길이 아니고 누비길로 산성까지... 5) 율목정(栗木亭, 11:30) 성남시 위례지역은 조선시대 국가보장지인 남한산성에 필요한 군량미와 무기등을 보관.수송 하던 대규모의 국가창고가 있던 율목창栗木倉과 역원인 율목참栗木站으로 조성된 마을이 형 성되었는데, 그 중심지에 세워진 정자의 옛 이름이 율목정栗木亭이다. 병자호란으로 파손된 남한산성을 보수.증축한 숙종 임금이 1688년 2월 이 곳 정자에서 잠시 쉬시면서 주정晝停 (낮수라)을 드시고 가마꾼에 의지해 산성에 올랐다는 기록 숙종실록19권과 1779년 8월 정조 임금이 능행길에 율목정에서 황금으로 장식된 갑주甲冑(갑옷과 투구)로 갈아 입으시고 말을 탔다는 기록 정조실록8권이 있다. 또한 1867년 9월 고종 임금이 헌릉에 제사를 지낸 후 남 한산성에 올랐는데, 이곳 율목정에 이르러 인부의 수레輿에 의해 남문을 거쳐 행궁에 이르 렀다는 기록 고종실록4권이 있다(위례역사문화연구소 제공) 6) 창곡의 유래(11:50) 7) 경주김씨 묘원(12:10) 8) 府尹李侯命中, 府尹洪侯益弼, 守禦使徐公命膺 불망비(不忘碑, 15:35) 불망비는 어떠한 사실을 후세 사람들이 잊지 않도록 기록하여 세우는 비석으로 높이 220㎝, 너비 200 ㎝, 두께 300㎝인 화강암 바위의 앞면을 높이 180㎝, 너비 140㎝로 편평하게 다듬고 3기의 비를 각각 높이 118㎝, 너비 32㎝, 두께 3㎝로 돌출하게 암각하였다. 본 바위 위에 새겨진 불망비는 조선 후기 문신인 수어사 서명응, 부윤 홍익필과 이명중 세 사람이 백성을 사랑한 공적을 '잊지 말자'는 뜻을 새 긴 것으로 하나의 바위에 3기의 비 형태로됨. 이명중, 서명응은 병암남성신수비에 나오는 인물들, 홍익 필은 이명중의 전임 광주부윤임. 1779년(정조3년) 3월에 광주부윤 이명중이 수어사 서명응을 책임자로 하여 허물어진 남성을 보수했다는 병암의 기록과 연결되어 있다. 같은 해 가을(10월)에 다른 많은 불 망비와는 달리 수리했던 성곽 가까이에 이 불망비를 새겼다고 볼 수 있겠다. 애휼교민(校民), 애휼군민 (軍民)이란 표현으로 봐서 산성 개축시 군졸과 백성 모두에 선정을 베풀은 듯... 8_1) 崇楨紀元後三己亥十月日刻 ('숭정기원 환산표'에 따르면 정조3년(1779년) 10월에 새겼다.) 8_2) 府尹李侯命中愛恤校民永世不忘(부윤 이명중의 애휼교민 영세불망비) 이명중(李明中, 숙종38:1712 ∼ 정조13:1789) 당시 68세, 재임기간 정조2:1778.9∼ 정조3:1779.6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상경(尙褧). 할아버지는 영의정 이유(李濡)이고, 아버지는 현감 이현응(李顯應) 이며, 어머니는 홍중기(洪重箕)의 딸이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사위이다. 1741년(영조 17) 진사가 되어 1744년 헌릉(獻陵) 참봉을 제수받았으나, 이 때 장인인 김재로가 대관(臺官)의 탄핵을 받아 결국 입사하지 못하였다. 1744년 감조관(監造官)의 공로를 인정받아 승륙(陞六)하여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 ·호조좌랑을 거쳐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이어 강서현감·금성현령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황 주목사에 제수되어 양전사업(量田事業)을 추진하였다. 이어서 진주목사·공조정랑·파주목사·선혜청낭청· 사복시판관을 역임하였고, 1770년 예천군수가 되어 시노비(寺奴婢)의 폐해를 제거하였으며, 이천부사를 거쳐 1774년 평양서윤에 임명되었다가 파직되었다. 이듬해 나주목사로 부임하였다가 통정대부로 가자 되어 첨지중추부사의 자리에 올랐다. 1778년(정조 2)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서 남한산성을 개축하여 그 공으로 충청감사로 특배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으며, 이어서 돈녕부와 의금부의 동지사의 자리에 올랐다. 1780년 맏아들 이의익(李義翊)이 대간의 탄핵을 받아 참판의 자리에서 쫓겨나자, 이를 계기로 조정에서 물러나와 귀록산(歸鹿山)에 은거하였다. 1782년 총관(摠管)에 임명되었으나, 아우인 이조판서 이최중(李最中)이 섬에 유배되는 등의 일로 끝내 나오지 않았다. 8_3) 府尹洪侯益弼愛恤校民永世不忘(부윤 홍익필의 애휼교민 영세불망비) 홍익필(洪翼弼, 경종1:1721 ∼ ?) 당시 59세 -> 자료 없슴 8_4) 守禦使徐公命膺愛恤軍民永世不忘(수어사 서명응의 애휼군민 영세불망비) 서명응(徐命膺, 숙종42:1716 ∼ 정조11:1787) 당시 64세, 재임기간 정조3:1779.1∼ 정조3:1779.9 본관은 달성(達成). 자는 군수(君受). 보만재(保晩齋)라는 호를 정조로부터 내려 받았다. 판서 성(渻)의 5 세손이고, 남원부사 정리(貞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찬 문유(文裕)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종옥 (宗玉)이며, 어머니는 이집(李)의 딸이다. 영의정 명선(命善)의 형이다. 1754년(영조 30) 증광문과에 병 과로 급제해 부제학(副提學)ㆍ이조판서를 거친 뒤, 청나라 연경(燕京)에 사행하여 다녀왔다. 그 뒤 대제 학을 거쳐 상신(相臣 : 정승)에 오르고 봉조하(奉朝賀)에 이르렀다. 박학강기(博學强記)로 이름났으며 역학(易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정조가 동궁에 있을 때 빈객(賓客)으로 초치되어 학문 수련에 큰 도움 을 주었다. 정조 즉위 직후 규장각이 세워졌을 때 제학(提學)에 첫번째로 임명되었으며, 죽을 때까지 규장각 운영에 절대적인 찬획(贊劃 : 영향)을 끼쳤다. 흔히 북학파(北學派)의 비조(鼻祖)로 일컬어지며,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추구하는 그의 학문 정신은 아들 호수(浩修), 손자 유구(有榘)에로 이어져 가학 (家學)의 전통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역학계몽집전(易學啓蒙集箋)』ㆍ『황극일원도(皇極一元圖)』ㆍ『계몽 도설(啓蒙圖說)』등 역서류,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記)』ㆍ『기사경회력(耆社慶會曆)』ㆍ『기자외기(箕子 外紀)』ㆍ『대구서씨세보(大丘徐氏世譜)』ㆍ『양한사명(兩漢詞命)』 등의 사서류, 『고사신서(攷事新書)』의 유 서(類書) 등을 편찬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고, 저술로는『보만재집』ㆍ 『보만재총서(保晩齋叢書)』ㆍ『보 만재잉간(保晩齋剩簡)』 등을 남겼다. 이 저술들은 사후에 호수와 유구 등에 의해 정리된 것인데, 보만 재총서는 정조로부터 “우리 동쪽에서 400년 간에 이런 거편(鉅篇)이 없었다.”는 평을 받았으며, 『보만 재잉간』은 총서를 편집하고 남은 것을 따로 모은 것이다. 『보만재총서』는 일종의 유서로서『고사신서』 와 함께 그의 농업을 중심으로 한 이용후생의 학문 정신을 대표적으로 반영.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9) 남문(至和門, 12:55) 10) 남장대치(13:10) 11) 제2남옹성 12) 제10암문 조망(13:35) 덕운사 하산(14:20) 13) 오늘의 여정(위례역-율목정-불망비-남문-남옹성-10암문-성안길-남문-덕운사, 약8km, 3시간여) 율목정(栗木亭)과 임금님 주필(駐蹕) 『숙종 임금이 1688년 2월 이 곳 정자에서 잠시 쉬시면서 주정晝停(낮수라)을 드시고 가마꾼에 의지해 산성에 올랐다는 기록 숙종실록19권과 1779년 8월 정조 임금이 능행길에 율목정에서 황금으로 장식된 갑주甲冑(갑옷과 투구)로 갈아 입으시고 말을 탔다는 기록 정조실록8권이 있다. 또한 1867년 9월 고종 임금이 헌릉에 제사를 지낸 후 남한산성에 올랐는데, 이곳 율목정에 이르러 인부의 수레輿에 의해 남문을 거쳐 행궁에 이르렀다는 기록 고종실록4권이 있다.』는 기록과 영조, 철종도 영릉, 인릉에 행행하신 일이 있다하여 관련 사료를 찾아보았다. 1. 숙종 영릉 능행(1688.2.26 ∼ 1688. 2.30) : 4박5일 □ 숙종실록 19권, 숙종 14년 2월 26일 1688년 광진 북쪽을 동가하다 임금이 동가(動駕)하여 광진(廣津) 북쪽 언덕에 주정(晝停)033) 하고, 이내 배를 타고 나루를 건너 배에 내려서 앞으로 나가 율목정(栗木亭)에 주정하였다가 보련(步輦)으로써 행차하려고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윤지선(尹趾善)이 교자(轎子)를 타되, 말을 버리고 연부(輦夫)를 사용하여 산성(山城)에 오르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여러 신하들은 말을 타고 배종(陪從)하라고 명하였다. [註 033]주정(晝停) : 임금이 멀리 거둥할 때 잠깐 머물러서 낮 수라(水剌)를 드는 것을 말함. □ 숙종실록 19권, 숙종 14년 2월 26일 1688년 미시에 광주 산성에 이르러 대신에게 하교하다 미시(未時)에 임금이 광주 산성(廣州山城)에 이르러 대신(大臣)을 불러 보고 하교(下敎)하기를, "여기가 바로 인묘(仁廟)께서 연(輦)을 머물렀던 곳인데, 지금 50 년을 지난 뒤에 내가 다시 여기에 와서 보니 슬픈 감회를 견딜 수 없다."하고, 인하여 양주(楊州)·광주(廣州)·여주(驪州)·이천(利川) 4읍(邑)의 봄 세금을 견감(蠲減)해 주고, 또 여주의 백성으로 나이 70이상인 자에게는 음식물을 주게 하였으니, 대개 능침(陵寢)이 있기 때문이었다. □ 숙종실록 19권, 숙종 14년 2월 26일 1688년 완풍 부원군 이서에 치제케 하다 임금이 산성(山城)은 바로 온조왕(溫祚王)이 나라를 개창(開創)한 땅인데, 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가 성(城)과 못[池]을 수선(修繕)한 공이 있다고 하여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이서는 일찍부터 이미 온조왕의 사당에 배향(配享)되었다. □ 숙종실록 19권, 숙종 14년 2월 26일 1688년 병자년에 죽은 전사자들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다 영부사(領府事) 김수흥(金壽興) 등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병자년034) 난리에 여러 도(道)의 근왕병(勤王兵)으로서 쌍령(雙嶺)에서 전사(戰死)한 자가 매우 많으니, 또한 마땅히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하고, 언(正言) 김홍복(金洪福)은 아뢰기를, "험천(險川)의 전쟁에서 사졸(士卒)로서 죽은 자가 쌍령에 못지 않고 북문(北門)의 싸움에서 날랜 장수와 강한 병졸이 태반이나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옛 노인들이 전(傳)하여 오므로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제사를 하사(下賜)하는 전례(典禮)를 마땅히 다름이 없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註 034]병자년 : 1636 인조 14년. □ 숙종실록 19권, 숙종 14년 2월 27일 1688년 이천에 머무르다 임금이 광주(廣州)에서 길을 떠나 벌원(伐院)과 공암(孔巖)에 주정(晝停)하고 저녁에는 이천(利川)에 머물렀는데, 이천·죽산(竹山)의 군병(軍兵)을 징발(徵發)하여 그들로 하여금 호위(扈衞)하게 하였다. □ 숙종실록 19권, 숙종 14년 2월 29일 1688년 신성립·지여해 등의 자손을 녹용하게 하다 임금이 경안(慶安)에 주정(晝停)하고, 저녁에 산성(山城)에 이르러 보련(步輦)을 타고 서장대(西將臺)에 올랐는데, 승지(承旨)·사관(史官)·옥당(玉堂)의 시위(侍衞)하는 여러 신하들만 따르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오늘 이곳에 와서 지나간 일을 추상(追想)하니, 저절로 서글픈 감회가 일어난다." 하고, 인하여 형세(形勢)를 두루 살펴보고 하교(下敎)하기를, "군량(軍糧)이 부족한 것이 결점(缺點)이 되기는 하나, 지세(地勢)만은 진실로 천험(天險)이다."하였다. 최석정(崔錫鼎)·윤덕준(尹德駿) 등이 계술(繼述)037) 하고 분발(奮發)하는 뜻으로 차자(箚子)를 올려 진계(陳戒)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김수흥(金壽興)이 아뢰기를, "신성립(申誠立)과 지여해(池汝海)가 전사(戰死)한 참상(慘狀)과 서흔남(徐欣南)이 나라를 위한 정성에는 마땅히 권장(勸奬)하고 포상(褒賞)하는 도리(道理)가 있어야 하겠습니다."하니, 임금이 그 자손을 수용(收用)하라고 명하였다. 남구만(南九萬)이 또 아뢰기를, "삼학사(三學士)인 홍익한(洪翼漢) 등의 사당(祠堂)을 건립(建立)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지만, 그 뒤에 흉년 때문에 아직 거행하지 못했습니다."하니, 임금이 속히 사당을 세우라고 명하였다. [註 037]계술(繼述) : 선인(先人)이 하던 일이나 뜻을 이어감. 2. 영조 영릉 능행(1730.2.25 ∼ 1688. 2.29) : 4박5일 □ 영조실록 25권, 영조 6년 2월 25일 1730년 저녁에 광주 행궁에 머물다 저녁에 거가(車駕)가 광주(廣州) 행궁(行宮)에 들었다. □ 영조실록 25권, 영조 6년 2월 26일 1730년 말을 타고 쌍령에 이르러 병자년에 전망한 유허에 치제하다 임금이 말을 타고 쌍령(雙嶺)에 이르러 병자년041) 에 전망(戰亡)한 유허(遺墟)를 바라보고 관원(官員)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고, 한참 동안 말을 멈추고 있다가 출발하였다. 신시(申時)에 이천(利川) 행궁에 들었다. □ 영조실록 25권, 영조 6년 2월 28일 1730년 이천을 출발하여 남한 산성 동문 밖에 이르러 말을 타고 서장대에 오르다 임금이 이천을 출발하여 남한산성의 동문 밖에 이르러 말을 타고 고취(鼓吹)하는 가운데 서장대(西將臺)에 올랐다. 싸움터를 가리키며 임금이 말하기를, "한봉(汗峰)이 어디 있는가?"하니, 수어사(守禦使) 윤순(尹淳)이 아뢰기를, "산성 동쪽에 있습니다."하였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아뢰기를, "성하지맹(城下之盟)042) 은 옛부터 사람들이 부끄럽게 여기는 바이므로, 뜻있는 선비로서 이땅을 지나는 사람들은 모두들 팔을 걷어붙이며 상심(傷心)합니다. 하물며 전하께서 어제 영릉(寧陵)을 배알하고 오늘 이 장단(將壇)에 오르셨으니, 지난날의 일을 뒤좇아 생각해 보신다면 성심(聖心)이 또한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생각하건대, 우리 효종(孝宗)께서는 산림(山林)의 선비를 초빙하시고 와신 상담(臥薪嘗膽)의 뜻을 가다듬으며 복수(復讐)·설치(雪恥)의 계책을 강구하여, 장차 천하 후세에 대의(大義)를 신장(伸長)하려 하시다가 대업(大業)의 절반을 이루지 못한 채 중도에 붕조(鵬殂)하셨으니, 이것이 충신과 지사(志士)들이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는 까닭입니다. 만일 전하께서 효종의 뜻과 사업을 뒤좇아 이으려 하신다면 더욱 이 일에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비록 몇 해와 몇 달로는 기약할 수 없지만, 언제나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해이해지지 않으며 군사를 양성하고 재물을 비축하고 인재(人材)들을 수습하고 국정을 닦고 국법을 밝히고, 도덕(道德)이 이미 이루어진다면, 비록 군사를 일으켜 가서 처지는 못하더라도 오히려 관문(關門)을 닫고 약조(約條)를 거절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하고, 교리 유엄(柳儼)이 아뢰기를,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는 오랑캐의 마당에서 참혹하게 죽어 시체가 이국(異國) 땅에 버려졌습니다. 홍씨와 윤씨 두 가문에서는 모두 남은 의복(衣服)을 가지고 허장(虛葬)을 했기에 조가(朝家)에서 특별히 복호(復戶)043) 해 주도록 했습니다만, 오달제의 가문에서는 허장은 예법이 아니라 하여 단지 의낭(衣囊)을 가져다 불태우고 그의 아내의 무덤 뒤에 묻어 애당초 분묘가 없었기 때문에 복호해 주라는 명이 있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의 아내의 무덤이 있고 또 묻은 의낭이 있으니, 일체 복호해 주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는 다른 것과 자별하니, 특별히 복호해 주어야 한다."하였다. [註 042]성하지맹(城下之盟) : 적군이 성밑까지 쳐들어 와서 항복하고 체결(締結)하는 맹약(盟約). 대단히 굴욕적인 강화(講和). [註 043]복호(復戶) : 군인이나 양반의 일부 및 궁중의 노비 등 특정한 대상자에게 조세(租稅)나 그 밖의 국가적 부담을 면제하여 주는 일. □ 영조실록 25권, 영조 6년 2월 29일 1730년 남한 산성의 행궁에서 출발하여 저녁 때 환궁하다 임금이 남한 산성의 행궁(行宮)에서 출발하였다. 부교리 조명익(趙明翼)이 아뢰기를, "성종조(成宗朝)경술년044) 에는 거가(車駕)가 지나가는 곳마다 문묘(文廟)에 치제(致祭)하고 향교(鄕校)의 유생(儒生)들에게 쌀을 내렸습니다. 이번에도 마땅히 그대로 본받았으면 합니다."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뒤좇아 그대로 거행하는 것이 어떠한가?"하였다. 도승지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뒤좇아 거행하는 것이 합당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선조(先朝) 무진년045) 에도 그런 예가 없었으니 그냥 두라."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여기서 관무재(觀武才)046) 를 행하고 싶지만 날짜가 더뎌질까 염려스러워 실행하지 못하니, 무진년의 전례대로 따로 어사(御史)를 보내어 시행함이 마땅하다."하고, 수어사 윤순에게 명하여 이 사실을 장사(將士)들에게 효유(曉諭)하게 하고, 이어 유엄(柳儼)을 어사로 삼았다. 저녁 때에 환궁(還宮)하였다. 당초 임금이 영릉(寧陵)을 전알(展謁)하려 했을 때는 막 무신년047)의 변란을 겪은 데다가 여주와 이천의 백성들 중에 역적들을 따른 자가 많아 인심이 채 안정되지 않았고, 또한 전염병이 크게 번져 죽은 사람이 즐비하였으므로, 조정에서 이런 때에 여러 날이 걸리는 곳으로 동가(動駕)하는 것은 위험과 의구(疑懼)가 많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신과 중재(重宰)들이 피차를 논할 것 없이 모두 이 일을 들어 큰 의리(義理)로 삼았던 것이다. 소장(疏章)이 공거(公車)에 가득 차고 심지어 눈물을 흘리며 극력 쟁집(爭執)하는 사람까지 있었으나, 임금은 마침내 듣지 않았다. 대저 여주와 이천의 백성들이 반드시 모두 역적을 따른 것도 아니었고, 촌락의 전염병의 기운이 반드시 장전(帳殿) 가까이 침범하는 것도 아니었다. 임금이 성조(聖祖)를 사모하는 마음이 일어나 한 번 전알(展謁)하고 소분(掃墳)하려 한 것은 곧 천리에 당연한 일인데, 조정의 신하들이 다른 계책 없이 단지 행행(幸行)을 정지하기만 일삼았으니, 그 또한 당시의 풍조가 미열(媚悅)에 가까웠던 것이다. 마침내 난여(鑾輿)가 평온하게 돌아왔고 먼 외방(外方)의 민생들이 기뻐하였으니, 당시 다투며 고집했던 사람들이 또한 할 말이 있겠는가? [註 044]경술년 : 1490 성종 21년. [註 045]무진년 : 1688 숙종 14년. [註 046]관무재(觀武才) : 무과(武科) 시험의 하나. 임금이 직접 열병(閱兵)한 뒤에 당상관으로부터 그 이하 군관(軍官) 및 한량(閑良)에게 무재를 시험보이는 것. 초시(初試)와 복시(覆試)만 치르게 하고, 시험 과목은 11기(技) 가운데 품주(稟奏)하여 4기를 시험하였음. [註 047]무신년 : 1728 영조 4년. 3. 정조 영릉 능행(1779.8.3 ∼ 1779.8.10) : 7박8일 □ 국역비변사등록 160책 정조 3년 1779년 07월14일(음) 守禦使 徐命膺이 입시하여 親臨하여 試閱할 때 標信을 받아 거행하는 일 등에 대해 논의함 / 動駕, 斥候伏兵, 行宮, 城操 이번 7월 13일 군사방승지(軍士房承旨)와 수어사가 함께 입시했을 때 수어사 서명응(徐命膺)이 아뢰기를, “평상시 성조(城操) 때에는 수어사가 예에 따라 거행하였으므로 표신(標信:증표)를 청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께서 친림하여 시열(試閱)하는데 표신이 없이 조발(調發)하면 지나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표신을 받아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해방(該房)에서 미품(微稟)하는 것이 좋겠다.”였다. 또 아뢰기를, “전에는 수어사가 산성(山城)에 왕래할 때 하직(下直)하지 않고 장계로 보고만 하였을 뿐인데 이번 무과 초시(武科初試)의 개장(開場)은 시험과 관계되는 일이므로 신이 이달 15일에 하직하고 나가겠다는 뜻으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임금이 그리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번 거둥에는 성조(城操)가 있으니 어전(御前)에 전배(前排)할 취수(吹手)는 본청(本廳)에서 미리 준비하여 대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이 삼가 대령하도록 조치하고 준비하였습니다. 어느 곳에 대령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전배는 경계에서 대령하고 취타(吹打)는 오리정(五里程)에서 대령하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또 아뢰기를, “척후복병(斥候伏兵)을 총융청에서 거행하라는 하교는 오로지 속오군병(束伍軍兵)에 대한 진념(軫念)에서 나온 성의(盛意)이시나, 지금 총융청의 초기(草記)를 보니 양주(楊州)의 척후복병 외에는 거행하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수어청에서 거행하는 일이고 또한 속오군도 총 75초나 되니 이러한 일은 스스로 넉넉히 거행할 수 있습니다. 전례에 따라 본청(本廳)의 속오군으로 거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리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행궁(行宮)은 포성(布城)이 없어도 허술하게 드러날 염려가 없지만, 연병관(鍊兵館)은 삼면(三面)이 허술하므로 대강이라도 포성을 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미리 준비하여 대령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리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막중한 친림시열(親臨試閱)에 사조(私操:비공식 조련)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가(大駕)가 출궁(出宮)한 뒤에는 사조 또한 행할 수 없으니 표신(標信)을 미리 내어 주시기를 청하였다가 거둥하시기 며칠 전에 먼저 사조를 행하되, 이미 조발(調發)한 병사는 흩어서 집으로 보낼 수 없으니 신들이 기고(旗鼓)를 가지고 영접할 때에 이 군병들을 양쪽에 배치하고 세워 군문(軍門)에 들어오는 절차로 삼고 군병(軍兵)이 오면 이들을 그대로 후상(後廂:후면 호위 군대)으로 삼아 입성(入城)한 뒤에는 행조(行操)할 신지(信地:목적지)에 배치하고 세우고자 하는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리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성조 날짜를 시사일(試士日) 다음날로 하라고 하교하셨습니다. 그러나 야조(夜操)만 행하면 야조 전에는 할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주조(晝操)와 야조(夜操)를 겸행할까요? 혹은 밤이 깊은 신시(申時:초경) 이후에 취품(取稟)할까요?”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주조와 야조를 겸행하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또 아뢰기를, “산성에서 여주·이천까지 어가(御駕)가 행행할 때에 호위할 군병이 모두 수어청 군대이고 또한 모두 훈련되지 않은 오합지졸이라서 신이 어가를 따라가며 감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때 성조 군병을 중군으로 하여금 거느리고 대령하게 하고 신은 어가를 따르겠습니다. 환궁할 때에는 여주에서 먼저 산성에 도착하여 중군과 함께 갑주(甲冑)를 갖추고 군병을 거느린 체 지영(祗迎)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리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번의 거둥은 산성에 역림(歷臨)할 뿐만 아니라 또한 성조도 있으니 수어하는 신하는 일반 배종신과 같을 수 없습니다. 대가(大駕)가 출궁하는 날 신은 중군과 함께 갑주를 갖추고 대기치(大旗幟)를 거느린 뒤에 산성에서 오리 거리인 율목정(栗木亭)에서 지영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리 하라. 지영은 경상(境上)에서 하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 정조실록 8권, 정조 3년 8월 3일 1779년 남한 산성에 행행하여 백성과 군대의 상태를 살피다 임금이 장차 영릉(寧陵)에 전배(展拜)하려고 이날 남한 행궁(南漢行宮)에 머물렀다. 융복(戎服)을 갖추고 여(輿)를 타고 인화문(仁和門)을 나가 인정전(仁政殿)의 월대(月臺)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 중략--- 화양정(華陽亭)에 이르렀을 때에 가랑비가 내리다가 광진(廣津)의 주정소(晝停所)에 이르렀을 때에 갰는데, 길을 끼고 구경하는 서울 백성을 막지 말라고 명하였다. --- 중략 ---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 내가 이제 배를 타고 백성에게 왔으니, 더욱 절실히 조심한다. 대저 사람의 마음이 느끼는 것은 흔히 사물을 만날 때에 있거니와, 옛사람이 이른바 유(類)를 따라서 부연한다는 것이다. 예전에 우리 성조(聖祖)께서 주수도(舟水圖)를 만들고 사신(詞臣)에게 명하여 그 명(銘)을 짓고 그 일에 대하여 서문(序文)을 쓰게 하셨다."하고 이어서 배에 있는 신하들에게 음식을 베풀라고 명하였다. --- 중략 --- 율목정(栗木亭)에 이르러 갑주(甲胄)로 갈아 입고 말을 탔고, 수어사(守禦使) 서명응(徐命膺)이 중군(中軍)과 각 영장(營將)과 기고(旗鼓)를 거느리고 영접하였다. 임금이 남문(南門)으로 들어가 행궁에 들어가서 정당(正堂)에 나아가니, 수어사가 참현(參現)하였다. 임금이 갑주를 벗고 융복(戎服)을 입고서 호가(護駕)한 대신(大臣)과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와 각무 차사원(各務差使員)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행행이라는 것은 백성이 거가의 행림(行臨)을 행복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거가가 가는 곳에는 반드시 백성에게 미치는 은택이 있으므로 백성들이 다 이것을 행복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제 내 거가가 이곳에 왔으니, 저 백성이 어찌 바라는 뜻이 없겠는가? 옛사람이 이른바 행행의 의의를 실천한 뒤에야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다고 하였으니, 경들은 각각 백성을 편리하게 하고 폐단을 바로잡을 방책을 아뢰라."하매, 영의정 김상철이 여러 신하들과 상의하여 우러러 아뢰겠다고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이 곳에 왔고 또 이 궁(宮)에 임하였으니, 옛일을 생각하여 느껴지는 마음을 참으로 스스로 누를 수 없다. 일찍이 고사(古事)를 보니, 병자년180) 성조(聖祖)께서 이 궁에 계실 때에 한군(汗軍)이 한봉(汗峰)에 올라 대포(大砲)를 쏘아서 포환(砲丸)이 전주(殿柱)를 쳤으므로 성조께서 후내전(後內殿)으로 이어(移御)하셨다 하였는데, 이 전이 바로 그때 계시던 전인가?" ---하략--- 4. 철종 인릉 능행(1862.9.18 ∼ 1862.9.20) : 2박3일 □ 철종실록 14권, 철종 13년 9월 18일 1862년 인릉에 나아가 친제하고 헌릉에 나아가 전알하다 인릉(仁陵)에 나아가 친제(親祭)하고, 이어 헌릉(獻陵)에 나아가 전알(展謁)하였다. □ 철종실록 14권, 철종 13년 9월 18일 1862년 남성 행궁에 나아가다 이어 남성 행궁(南城行宮)에 나아갔다. □ 철종실록 14권, 철종 13년 9월 19일 1862년 병자년·정축년에 전사한 사졸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다 하교하기를, "어가(御駕)가 이곳에 이르니, 감회가 더욱 간절하다. 병자년·정축년의 전사자(戰死者)를 홍문관(弘文館)으로 하여금 일일이 조사해 내어 들이게 하라. 그리고 전사(戰死)한 사졸(士卒)들에 대해서도 각 해읍(該邑)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어 저승의 억울한 영혼에게 음식을 권하게 하라."하고, 또 하교하기를, "이미 이곳에 왔고 또 이해를 당하였으니, 나의 뜻을 보이는 일이 없을 수 없다. 경내(境內)의 70세 이상된 사람은 본부(本府)로 하여금 쌀을 하사하게 하고, 내년의 결전(結錢)을 특별히 정면(停免)시키도록 하라."하였다. □ 철종실록 14권, 철종 13년 9월 19일 1862년 온왕묘와 현절사에게 치제하다 온왕묘(溫王廟)와 현절사(顯節祠)057) 에 치제(致祭)하고, 하교하기를, "현절사에 방금 치제하라는 명을 내렸거니와, 그 사손(祀孫)은 벼슬자리가 나는 대로 조용(調用)하도록 하라."하였다. [註 057]현절사(顯節祠) : 병자 호란(丙子胡亂) 때 척화(斥和)한 김상헌(金尙憲)·정온(鄭蘊)·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 등 절의(節義)를 지킨 이들을 제향(祭享)한 사우(祠宇). □ 철종실록 14권, 철종 13년 9월 19일 1862년 서장대에서 시·원임 대신을 소견하다 서장대(西將臺)에서 시임(時任)·원임(原任)의 대신(大臣)들을 불러서 접견하였다. 5. 고종 헌릉 능행(1867.9.10 ∼ 1867.9.12.) : 2박3일 □ 고종실록 4권, 고종 4년 9월 10일 1867년 조선 개국(開國) 476년 헌릉과 인릉에 나아가 친제하다 헌릉(獻陵), 인릉(仁陵)에 나아가 친히 제사를 행하였다. 이어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행궁(行宮)에 행행하여 경숙(經宿)하였다. □ 고종실록 4권, 고종 4년 9월 11일 1867년 조선 개국(開國) 476년 서장대와 남장대를 돌아보다 서장대(西將臺)와 남장대(南將臺)를 두루 보았다. 이어 연무관(演武館)에 나아가 야조(夜操)를 보고 돌아와 행궁(行宮)에서 경숙(經宿)하였다. □ 사료 고종시대사3 1867년(고종 4년) 9월 11일 대가(大駕)가 서장대(西將臺)와 남장대(南將臺)에 나아갔다가 그대로 연무관(演武館)에 임하여 야조(夜操)를 거행하였다. … (중략) … 때가 되자, 통례(通禮)가 외판(外辦)하기를 무릎 꿇고 계청하니, 상이 군복을 갖추어 입고 여(輿)를 타고 행궁을 나가자 약방 제조 김세균(金世均)과 부제조 김병지(金炳地)가 앞으로 나와 문후하였다. 상이 여에서 내려 말을 탔다. 국청사(國淸寺) 앞길에 이르자 말에서 내려 여를 탔고, 서장대에 이르자 여에서 내려 자리에 올랐다. 대신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자 김병학(金炳學)이 앞으로 나왔다. 상이 이르기를, “이곳에 와서 임하니 옛 감회가 더욱 새롭다.”하니, 김병학이 아뢰기를, “정묘년(1627)·병자년(1636) 이후로 원통함을 참아가며 200여 년을 하루같이 지냈는데, 폐백(幣帛)과 주옥(珠玉)을 해마다 연경(燕京)으로 보내면서 한 조각 『춘추(春秋)』의 의리를 이을 길이 없었으니, 이것이 뜻 있는 선비들이 격앙하고 감개하는 까닭입니다. 더구나 이 성은 와신상담하던 곳입니다. 지금 성상께서 직접 임하심에 산천과 초목이 모두 새로이 빛을 받게 되었습니다만, 성상께서는 성대하던 옛날을 그리며 서글픈 감회를 일으키셨습니다. 전하께서 늘 당시 효종(孝宗)의 마음을 전하의 마음으로 삼는다면 세교(世敎)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하였다.【원문 빠짐】상이 행궁으로 돌아왔다. 잠시 후에 상이 다시 여를 타고 남장대에 이르렀다. 여에서 내려 막차로 들어갔다. 선전관이 꿇어앉아 시기 호령(試技號令)을 계품하고 규례대로 거행하였다. 병조 판서가 기조(起操)를 계품하였다. --- 중략 --- 상이 자리에서 내려와 여를 탔다. 선전관이 꿇어앉아 취타를 그칠 것을 계품하였다. 상이 도로 행궁으로 들어갔다. 선전관이 꿇어앉아 기치를 좌우로 나누어 서게 할 것과 취타를 그칠 것을 계품하였다. 또 각 영의 파단(擺單)을 열 것을 계품하였다. 또 문을 열기를 계품하고 또 각 영의 조두(刁斗)를 계품하였다. 그대로 밤을 지냈다. 신하들이 차례로 상의 거처를 지켰다. □ 고종실록 4권, 고종 4년 9월 12일 1867년 조선 개국(開國) 476년 병자년과 정묘년의 싸움에서 죽은 사람을 위로하도록 하다 전교하기를, "이곳에 와 보니 감회가 더욱 절실하다. 병자년(1636)과 정묘년(1627)의 싸움에서 죽은 사람들을 홍문관(弘文館)으로 하여금 상고하여 찾아내서 들이게 한 다음 군사들을 각 해읍(該邑)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주어 저승에 있는 영혼들을 위로하여 주게 하고, 작년에 본부(本府)에서 싸움터에 나갔다가 죽은 군사들에게도 일체로 거행(擧行)하도록 하라."하였다. □ 사료 고종시대사3 1867년(고종 4년) 9월 12일 고종, 병자호란 및 정묘호란에서 전사한 사람을 홍문관으로 하여금 조사해 들일 것을 명함 전교하기를, “이곳에 와서 임하니 감회가 더욱 절실하다. 정묘년(1627)·병자년(1636) 전쟁에서 전사한 사람을 홍문관(弘文館)으로 하여금 조사해 들이게 하고, 사졸은 각각 해당 고을에서 제사를 지내 억울한 혼을 위로하도록 하라. 작년에 출정(出征)했다가 전사한 본부의 사졸도 같은 격식으로 거행하게 하라.”하였다. □ 사료 고종시대사3 1867년(고종 4년) 9월 12일 고종, 남한산성에서 환궁함 대가(大駕)가 남한산성으로부터 환궁했다. … (중략) … 때가 되자, 통례(通禮)가 외판(外辦)하기를 무릎 꿇고 계청하니, 상이 군복을 갖추어 입고 여(輿)를 타고 행궁 문밖으로 나가자 약방 제조 김세균(金世均)과 부제조 김병지(金炳地)가 앞으로 나와 문후하였다. 상이 여에서 내려 말을 탔다. 선전관이 꿇어앉아 기치를 세 줄로 나누어 서게 할 것과 징을 두 번 쳐서 대취타(大吹打)를 울리고 행고(行鼓)를 울릴 것을 계품하였다. 진남문(鎭南門)에 이르자 상이 말에서 내려 여를 탔고, 율목창(栗木倉) 아래에 이르자 상이 여에서 내려 말을 탔다. 매착리(梅着里)를 경유하여 원우리(遠隅里)에 이르자 선전관이 꿇어앉아 기치를 좌우로 나누게 할 것을 계품하였다. 상이 말에서 내려 막차로 들어가자 선전관이 꿇어앉아 취타를 그칠 것을 계품하였다. 잠시 후에 통례가 꿇어앉아 막차에서 나올 것을 계청하자 상이 막차를 나와 말을 탔다. --- 중략 --- 만안현(萬安峴)에 이르자 상이 말에서 내렸다. 인부를 시켜 여를 메고 재를 넘게 한 다음 다시 여에서 내려 말을 탔다. 봉저정에 이르자 선전관이 꿇어앉아 취타를 그칠 것을 계품하였다. 문안을 하지 말라고 하교하였다. 사알을 통해 구전으로 하교하기를, “주교(舟橋)를 건널 때 도섭(渡涉)하고 영접하는 절차는 그만두라.”하였다. --- 중략 --- 숭례문으로 들어가 돈화문(敦化門)에 이르자 선전관이 기치를 좌우로 나누어 서게 할 것을 계품하였다. 돈화문, 진선문(進善門), 숙장문(肅章門), 협양문(協陽門)으로 들어갔다. 병조 판서가 꿇어앉아 방장(放仗)을 계품하자 선전관이 표신(標信)을 내어 계엄을 풀기를 청하였다. 상이 선화문(宣化門)을 통해 대내(大內)로 돌아가니,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나왔다. □ 고종실록 4권, 고종 4년 9월 12일 1867년 조선 개국(開國) 476년 남한 산성의 행궁에서 환궁하다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행궁(行宮)에서 돌아와 용양 봉저정(龍驤鳳翥亭)에 나아가 잠깐 동안 머물러 있다가 주교(舟橋)로 강을 건너 환궁하였다. Moon River / Audrey Hepbu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