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국왕의 남한산성 행차
-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
1. 머리말
선조 36년(1603) 2월에 선조는
남한산성이 충청, 경상, 전라 지역을 왕래하는 요충지에 있으면서,
수도를 지키는 보장堡障이 되고 주변의 여러 진영을 조절할 수 있다고 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남한산성이 가진 군사적 거점으로서의 중요성을 표현한 말이다.
그런데 병자호란 때 인조가 이곳에서 항전하다가 항복을 하자,
남한산성은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는 상징적 장소가 되었다.
조선후기에는 남한산성에 행차하여 병자호란 때 사망한 사람들의 충절을 기리고,
군사적 거점으로서의 기능을 강화하는 조치를 한 국왕들이 많이 나타났다.
남한산성에 행차한 국왕은 숙종을 비롯하여 영조, 정조, 철종, 고종등 5명이며,
방문시기는 1688년부터 1867년에 이른다.
이들은 여주의 영릉寧陵이나 광주의 인릉仁陵을 참배하는 길에 남한산성을 방문했다.
이하에서는 조선 후기의 국왕들이 남한산성에 행차한 일자와
남한산성에서 취했던 조치들을 정리하고, 그들이 남한산성을 방문한 의의를 살펴보기로 한다.
2. 남한산성에 행차한 일지
• 숙종의 행차(1688)
숙종14년(1688)에 숙종은 여주에 있는 효종의 영릉을 참배하는 길에 남한산성에 행차했다.
영릉은 원래 태조의 건원릉 부근에 조성되었지만 현종14년(1673)에 현종에 의해 여주로 이장되었다.
숙종은 여주로 옮겨진 영릉을 방문한 최초의 국왕이었다. 숙종의 행차는
2월 26일부터 30일까지 4박 5일간의 일정이었고, 남한산성에서는 26일과 29일에 머물렀다.
숙종은 26일에 창덕궁을 출발하여 남한산성에 도착했다. 한강을 건널 때 광나루에서 배를 탔으며,
광나루 북쪽 언덕과 남쪽에 있는 율목정에서 휴식을 취하고 남한산성으로 입성했다.
숙종은 27일에 벌원, 공암을 거쳐 이천에 머물렀고, 28일에 영릉에 제사지내고 이천으로 돌아왔다.
숙종은 29일에 공암, 쌍령을 거쳐 남한산성으로 돌아와 서장대에 올랐고,
30일에 광나루를 거쳐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 영조의 행차(1730)
영조 6년1730)에 영조는 효종의 영릉을 참배하는 길에 남한산성을 방문했다.
영조 4년1728) 무신란이 발생했을 때 여주와 이천 지역에서는 무신란에 가담하는 세력들이 나타났다.
그로부터 2년 후 영조가 이곳을 거쳐 영릉에 행차하려하자,
신하들은 변란이 발생할 가능성을 거론하며 영조의 행차를 반대했다.
그러나 영조는 여주로의 능행을 강행했다. 영조의 행차는 2월 25일부터 29일까지
4박 5일간의 일정이었고, 남한산성에서는 25일과 28일을 머물렀다.
영조는 25일에 창덕궁을 출발하여 광나루를 건너 남한산성에 도착했다.
남한산에서 하루를 묵은 영조는 26일에 쌍령을 거쳐 이천에서 머물렀고,
27일에 여주 영릉에 제사지내고 이천으로 돌아와 머물렀다.
영조는 28일에 남한산성으로 돌아와서 서장대에 올랐고,
29일에는 광나루를 경유하여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영조의 여정은 숙종의 행차와 동일했다.
• 정조의 행차(1779)
정조 3년(1779)에 정조는 효종의 영릉을 참배하는 길에 남한산성을 방문했다.
효종이 사망한지 120주년이 되는 해를 맞아 효종의 묘소를 방문한 것이다.
정조의 행차는 8월 3일부터 10일까지 7박 8일의 일정이었고,
남한산성에서는 3일, 7일∼9일을 합하여 총 4일을 머물렀다.
정조는 3일에 창닥궁을 출발하여 광나루, 율목정을 거쳐 남한산성 남문으로 입성했다.
정조는 4일에 쌍령천, 경안교를 거쳐 이천에 머물렀고,
5일에 영릉에 도착하여 제사지내고 여주에 머물렀다.
이전까지 이천으로 가서 숙박했던 여정을 하루 늦춘 결과였다.
6일에 정조는 여주에서 이천으로 이동했고,
7일에 경안역, 번천을 거처 남한산성 좌익문으로 입성했다.
이 날 정조는 남한산성의 지수당, 인화관(객사), 연병관에 행차했다.
8일에 정조는 연병관에서 문무과 별시를 시행하고,
승군들의 군사 훈련과 매화포의 발사 시험을 했고,
9일에 서장대에 올라 주간 훈련과 야간 훈련을 참관하고, 백성들의 채무를 탕감해 주었다.
정조는 10일에 광나루, 살곶이 다리, 인명원, 흥인문을 거쳐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정조의 행차는 숙종이나 영조와 같은 코스였지만,
남한산성에 4일간이나 머물면서 여러 가지 조치들을 내린 것이 특징이다.
• 철종의 행차(1862)
철종 13년(1862)에 철종은 순조의 인릉을 참배하는 길에 남한산성을 방문했다.
철종 7년(1856)에 철종은 교하에 있던 인릉을 헌릉의 오른편 언덕으로 이장했다.
순조가 철종의 꿈에 나타나
“지금 누워있는 곳은 너무 뜨거우므로 다른 곳에 눕혀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철종은 인릉을 이장한 이후 거의 매년 이곳을 방문했다.
그런데 1862년은 순조와 순원왕후가 가례를 거행한 지 60주년이 되는 해였다.
철종의 행차는 9월 18일부터 20일까지 2박 3일의 일정이었고,
이틀 밤을 모두 남한산성에서 묵었다.
철종은 18일에 창덕궁을 출발하여 인릉과 헌릉을 방문하고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이 날 철종은 주교(舟橋)를 통해 한강을 건넜고, 용양봉저정과 승방평에서 휴식을 취했다.
철종은 인릉에 제사한 후 매착리를 거쳐 남한산성 남문으로 입성했다.
19일에 철종은 남한산성 인회관에서 문과 시험을 보였고,
서장대와 남장대에 올랐으며, 연무관에서 야간 훈련을 시행했다.
철종은 20일에 남한산성을 출발하여 용양봉저정, 주교, 숭례문을 거쳐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철종의 행차는 목적지가 영릉에서 인릉으로 바뀌었고, 한강을 건널 때에
광나루에서 배를 타는 대신에 용양봉저정 앞에서 주교를 이용한 것이 특징이다.
• 고종의행차1867)
고종 4년(1867)에 고종은 헌릉과 인릉을 참배하는 길에 남한산성을 방문했다.
고종의 행차는 9월 9일부터 12일까지 3박 4일의 일정이었고,
10일과 11일을 남한산성에서 머물렀다.
고종은 9일에 창덕궁을 출발하여 주교로 한강을 건넜고,
용양봉저정에 머물면서 한강에서 수상 훈련과 이간 훈련을 거행했다.
10일에 고종은 헌릉과 인릉에 행차하여 제사를 지냈고,
율현, 매착리를 경유하여 남한산성에 입성했다.
11일에 고종은 남한산성 인화관에서 문과 시험을 보였고,
서장대와 남장대에 행차한 다음 연무관에서 야간 훈련을 거행했다.
12일에 고종은 남한산성을 출발하여 용양봉저정, 주교를 거쳐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고종의 행차는 철종과 동일했지만,
한강가에 있는 용양봉저정에서 하루를 묵으면서 수상 훈련을 한 것이 특징이다.
3. 남한산성에서의조치
• 온왕묘.현절사 제사와 유공자 포상
남한산성에 행차한 국왕은 온왕묘와 현절사에 관리를 파견하여
제사를 지내고 병자호란 때 순국한 유공자를 포상했다.
온왕묘는 온조왕을 모신 사당으로 1624년에 남한산성을 수축한 완풍부원군 이서가 배향되어 있었다.
인조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신하면서 온조왕에게 제사를 지냈다.
인조는 인조 15년(1637) 1월에 이서가 사망하자 성내에 온왕묘를 세워 이서를 배향하게 했고,
2월에 온조왕의 신위를 ‘백제시조왕百濟始祖王’으로 정했다.
온왕묘는 온조왕의 신위가 주향이고, 이서의 신위가 배향위에 있는 사당이다.
현절사는 병자호란 때 척화신으로 청나라에 끌려가 순절한
삼학사三學士(오달제.윤집.홍익한)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숙종14년(1688) 남한산성에 행차한 숙종은 온왕묘에 관리를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다.
남한산성 성곽을 수리한 이서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이 때 영의정 남구만은 병자호란 때 오달제와 윤집이 남한산성에서 끌려가
이곳에서 사망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성안에 그들을 위한 사당을 세워야 한다고 건의했다.
숙종은 현절사의 공사를 서두를 것을 명령했다.
현절사는 숙종이 남한산성에 행차한 것을 계기로 건설되었다.
영조는 삼학사의 집안에 조세를 면제하는 혜택을 내렸다.
이보다 앞서 영조는 홍익한과 윤집의 집안에 면세 해택을 내렸다.
두 집안에서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으므로 고인이 남긴 의복을 가지고 묘소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달제의 집안에서는 고인의 의복을 태워
아내의 무덤 옆에 묻기만 했지 묘소를 조성하지는 않았다.
영조는 오달제의 분묘가 없지만 특별히 면세를 허락했다.
이후 정조, 철종, 고종도 온왕묘와 현절사에 관리를 파견하여 제사를 지냈다.
남한산성에 행차한 국왕들은 병자호란 때 순국한 유공자에게 제사지내고
그 후손들을 관리로 등용하기도 했다.
숙종은 병자호란 때 쌍령, 험천, 북문에서 전사한 장수와 병사들의 제사를 지내주었고,
쌍령에서 사망한 민영과 허완, 북문에서 사망한 신성립, 지여해, 서흔남의 자손들을 관리로 등용했다.
숙종은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갔던 사람들도 포상했다.
숙종은 숙종 4년(1678)에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모신 사람 가운데
70세 이상의 노인에게 노인직老人職을 내린 적이 있었다.
남한산성을 방문했을 때 숙종은 이미 노인직을 받은 사람에게는 음식물만 제공하고,
『호종록扈從錄』에 이름을 올리지 못해 노인직을 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노인직을 주었다.
남한산성에서 인조와 함께 항전한 사람들을 우대하는 조치였다.
영조는 쌍령을 지나면서 병자호란 때 패전한 장소에 관리를 파견하여 제사지내고,
이곳에서 전사한 민영과 허완의 후손들을 등용하게 했다.
민영의 후손인 민동수는 선전관이 되었고, 허완의 후손인 허집은 헌납,
허채는 금정찰방, 봉사손인 허상은 참봉에 제수되었다.
영조는 특히 민동수의 인물됨과 무예실력에 관심을 보였다. 조선후기의 국왕들이
온왕묘와 현절사, 병자호란 때 순국한 사람들에게 제사지내고 그들의 후손을 관리로 등용한 것은
국가에서 그들의 희생을 잘 기억하고 있음을 표시하기 위해서였다.
• 문과와 무과의 시행
국왕이 남한산성에 행차하면 현지의 유생과 무사들 대상으로 과거 시험을 시행했다.
정조는 남한산성 연병관에 직접 나가 문과와 무과를 시행했다.
이 날 문과에는 800명의 유생들이 정조가 출제한
‘나라의 안전은 국왕의 덕에 있지 험한 것에 있지 않다[在德不在險]‘ 에 대한 글을 지었다.
답안지를 채점한 결과 민태혁, 황인현, 조윤대가 선발되었고,
현직 관리였던 민태혁은 당상관으로 품계가 올라갔다. 이 날 무과에서는 총 15인이 선발되었다.
철종은 남한산성 인화관에서 문과 시험을 실시했다.
철종이 출제한 문제는 ‘9월에 미리 겨울옷을 준비한다[九月授衣]‘였고,
1,020명이 응시하여 897장의 답안지가 제출 되었다.
이 날의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한 조병목은 3차 시험,
차석인 김영수는 2차 시험에 바로 나갈 자격을 얻었고,
나머지 9명은 『규장전운奎章全韻』이란 책을 선물로 받았다.
고종도 남한산성 인화관에서 현지의 유생들을 대상으로 한 문과 시험을 실시했다.
답안지는 총 574장이 제출 되었고, 수석을 차지한 이좌요는 3차 시험,
차석인 이민하등 2명은 2차 시험에 나갈 자격을 얻었으며,
나머지 합격자는 가산점을 받거나 『규장전운奎章全韻』 책을 받았다.
무과는 광주우수가 별도로 주관하여 실시하고 그 결과를 고종에게 보고했다.
이를 보면 국왕이 남한산성에 행차한 상황에서 무과가 실시된 것은 정조대가 유일했다.
• 군사 훈련
국왕이 남한산성에 행차했을 때에는 군사 훈련이 실시되었다.
병자호란의 격전지이자 군사적 요충지인 남한산성의 방어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남한산성에 행차한 국왕은 항상 서장대에 올라 주변의 형세와 산성의 관리 상태를 확인했다.
그러나 군사 훈련을 실시한 것은 정조로부터 시작되었다.
정조는 남힌산성에서 승군의 진법과 매화포埋火砲의 위력을 확인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정조는 먼저 연병관에서 송군들이 방진과 원진을 이루는 것을 보고 이어서 매화포의 위력을 참관했다.
매화포는 연병관 앞 길의 남쪽에 매설하여 수많은 불화살이 동시에 발사되는 위력을 보였고,
정조는 남한산성의 군사 훈련에서는 매화포의 사용법을 숙련시키라고 명령했다.
다음 날 정조는 서장대에 올라 주간 훈련과 야간 훈련을 실시했다.
정조는 갑옷을 갖춰 입었다. 이 날 훈련의 중심은 성벽에서 적을 방어하는 절차였다.
이는 적이 100보 이내에 오면 불랑기포佛狼機砲와 조총鳥統을 번갈아 쏘고,
50보 이내에 오면 불화살과 화살을 동시에 발사하며,
성벽 아래로 접근하면 병사들이 성벽 위에서 돌로 타격하는 방식이었다.
고종은 용양봉저정 행궁과 남한산성에서 수상 훈련과 야간 훈련을 실시했다.
수상 훈련은 서양의 이양선이 자주 출현하면서 한강수로의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수상 훈련의 중심은 전선을 운행하는 절차였다.
이는 전선을 일자로 배열한 상태에서 적선이 200보 이내에 들어오면
불랑기포와 조총, 불화살을 쏘고, 30보 이내에 접근하면 화기火器를 사용하며,
전선 가까이 접근하면 배를 직접 공격하여 전투를 벌이는 방식이었다.
고종은 남한산성에 도착한 이후 연무관에서 야간 훈련을 실시했다.
야간 훈련의 중심은 성벽을 방어하는 절차였다.
이는 적이 100보 이내에 오면 불랑기포와 조총을 번갈아 쏘고,
50보 이내에 오면 일제히 화살을 쏘며, 성벽 아래에 오면 성벽 위에서 돌을 던지는 방식이었다.
이를 보면 남한산성에서의 주간 훈련과 야간 훈련은 동일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 백성을 위한 혜택
조선후기의 국왕들은 능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인근 백성들에게
경제적 혜택을 주거나 민원시항을 접수하여 해결해 주었다.
국왕의 행차는 ‘행행行幸’이라 하여 백성에게 혜택을 주는 행차였기 때문이다.
숙종은 양주, 광주, 여주, 이천 네 읍의 봄철 대동미를 감면해주고,
여주의 백성으로 70세 이상의 노인에게 음식물을 제공했다. 양주는 국왕의 행차가
직접 지나간 지역은 아니지만 광나루 선착장의 노역에 동원되었기 때문에 포함시켰고,
여주의 노인에게 혜택을 준 것은 세종과 효종의 왕릉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세 읍(광주, 이천, 여주)의 백성들에게 가을 대동미를 감면해주고,
70세 이상의 노인에게는 음식물을 제공했으며,
80세 이상의 노인으로 영조와 정조의 행차를 본 사람에게는 노인직 품계를 한 등급 올려주었다.
이는 숙종이나 영조와 동일한 조치였다.
정조의 특별한 조치는 남한산성에서 나타났다 .
정조는 남한산성 연병관에서 산성의 백성들을 만나 그들의 어려움을 물었고,
이튿날 다시 백성들을 만나 그들의 부채를 완전히 탕감해 주었다.
정조가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부채 문권을 모두 불사르자, 백성들은 김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국왕이 행차할 때에는 백성들의 민원을 접수하여 처리해 주었다.
영조는 여주의 영릉 입구에서 살곶이다리까지 민원을 접수하라고 했고,
정조는 영릉 입구에서 흥인문까지 접수하라고 했다.
정조의 행차가 살곶이다리 앞길에 이르렀을 때
11세가 된 김종효의 아들이 자신의 아비를 유배지인 위원군에서 풀어 줄 것을 요청했다.
정조는 환궁한 후 이 요청을 들어주었다.
4. 남한산성 방문의 의의
• 국왕 정통성의 강화
숙종, 영조, 정조는 효종의 영릉을 참배하기 위해 행차했지만,
철종과 고종은 순조의 인릉을 참배하기 위해 행차했다.
행차의 목적이 남한산성을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통성과 밀착한 관련이 있는
왕릉을 방문하는 기회에 인근에 있던 남한산성을 방문하는 방식이었다.
숙종, 영조, 정조는 효종으로부터 왕위계승의 정통성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국왕이었다.
숙종은 여주로 옮겨진 효종의 능을 최초로 방문했고,
영조는 숙종의 행적을 계승하기 위해 영릉을 방문했으며,
정조는 효종 사망 120주년을 기념하여 영릉을 방문했다.
이는 『효종→숙종→영조→정조』에 이르는 정통성을 강화하는 의미가 있었다.
철종은 순원왕후의 명으로 순조의 아들이 되어 왕위를 계승했고,
순조와 순원왕후가 가례를 거행한 지 60주년이 되는 해에 순조의 인릉을 방문했다.
사도세자의 친손자인 철종은
『장헌세자(사도세자)→정조→순조→철종』으로 이어지는 정통성을 강화하려 했고,
사도세자의 증손자인 고종은 철종의 행적을 따라 인릉을 방문했다.
국왕의 능행은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행차 중에 내려지는 조치도 선왕의 행적을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정조는 행차를 떠나면서 숙종과 영조의 행적을 철저하게 따랐다.
그는 도성을 벗어나 동관왕묘에 들러 절을 올렸는데,
이는 숙종과 영조의 행적을 따랐기 때문이다.
정조는 남한산성에서도 효종, 숙종, 영조의 이전 행적들을 거론하며,
자신은 선왕들의 뜻과 일을 계승하여 좋은 정치를 펼치겠다고 다짐했다.
• 병자호란의 기억과 국토 방위
병자호란 이후 남한산성은 외적의 침입에 패배했다는 쓰라린 기억을 상기시키는 장소가 되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한 사건을 ‘성하지맹城下之盟’이라 하는데,
조선 사람이라면 누구나 남한산성에서 이 단어를 떠올렸다.
그런데 병자호란에 대한 기억은 패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 국력을 비축해 두었다가
북벌을 실현하여 청나라에 당한 억울함과 수치심을 씻어야한다는 각오로 이어졌다.
영조가 남한산성 서장대에 행차 했을 때, 영의정 홍치중은 효종께서 북벌하려던 유업을 계승하여
내정을 충실히 하면, 비록 북벌은 완수하지 못하더라도
조선의 국토를 방어하여 청나라의 무리한 요구를 거절할 수는 있다고 주장했다.
정조는 남한산성의 방어시설을 직접 살피면서 병자호란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고,
조선에 평화기가 계속되면서 군사력이 현저하게 약해진 현실을 개탄했다.
우리나라의 전쟁 준비는 요즈음 더욱 허술해졌다.
백성은 북치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군병은 일어나고 앉으며
전진하거나 후퇴하는 절차를 알지 못하면서 하루 이틀 세월만 보낸다.
병자호란 때의 일을 생각하면 군신 상하가 어찌 이렇게 게으를 수 있는가?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어 효종께서는 이 때문에 조정에서 탄식하셨고,
선정(송시열)도 이 때문에 상소문으로 여러 번 아뢴 것이다.
우리 나라는 작은 땅이지만 예의를 아는 지역이므로 세상에서 ‘중화中華’라 불렀다.
그러나 이제 인심은 점차 안일에 익숙해지고 대의는 점차 자취를 감추어,
청나라로 보내는 예물을 예사로 생각하고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중략)
더구나 이 해(효종 사망 120주년)를 당하여 효종께서 이루지 못한 뜻과 일을 생각하니
견딜 수 없을 만큼 강개하고 격앙된다. 돌이켜 보면 이제
백성들의 힘이 시들어 경비가 아주 없는 때이니, 어찌 반드시 먼 길의 행차를 해야 하겠는가?
그러나 기해년(1779)을 당하여 영릉에 가지 않는다면,
이것이 천리와 인정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겠는가?
정조는 조선이 예의를 제대로 아는 문화국가이지만
병자호란 같은 전쟁의 재발을 막으려면 군사력을 갖추어야 하며,
이 때문에 자신은 군사훈련을 참관한다 했다.
철종은 남한산성에서 효종의 유업을 떠올리고,
신하들은 민심의 안정과 전쟁 준비를 갖출 것을 요청했다.
철종과 신하들은 서장대에서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경험한 굴욕을 기억하고,
조선인의 명나라에 대한 의리와 효종이 청나라에 복수하려 했던 노력을 떠올렸으며,
국토를 제대로 수호하려면 민심을 안정시키고 전쟁 준비를 갖추어야 할 것으로 보았다.
고종이 남한산성에 행차했을 때에는 청나라의 침략을 대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고종은 남한산성에 도착하기 전에 한강에서 새로 제작한 전선을 이용하여
수상 훈련을 하고, 새로 제작한 수뢰포의 위력을 시험했다.
이제 조선의 국토를 방위하려면 육상과 해상에 나타나는 외적을 동시에 제압할 수 있어야 했다.
• 왕실 가족 및 공신의 우대
조선의 국왕들은 능행을 할 때 능행로 주변에 있는
왕실 가족이나 분신들의 묘소에 관리를 파견하여 제사를 지내주었다.
국왕이 남한산성을 방문한 것도 능행의 일환이었기 때문에 이와 동일한 조치가 있었다.
숙종은 광주에 묘소가 있던 명선공주 ,명혜공주, 명안공주, 숙정공주와 영창대군의 묘소에
관리를 파견하여 제사를 지내게 했다. 숙종은 특히 명선공주와 명혜공주의 묘소가
행차 길에 가까이 있어 직접 방문하려 했지만, ‘군주는 사적인 요소를 직접 방문하는 일이 없으며,
가는 길이 좁고 험하다‘는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명선공주와 명혜공주는 바로 숙종의 누이였다.
숙종은 장인인 김만기와 민유중의 묘소에도 사람을 보내 제사를 지냈다.
정조는 영창대군과 명선공주, 명혜공주, 영안공주, 숙정공주, 숙경공주의 묘소에
관리를 파견하여 제사를 지냈다.
이들은 선조의 아들, 효종과 현종의 딸이 되는 왕실 가족 이었다.
정조는 영조의 공신인 김창집과 민진원의 사당에도 관리를 파견하여 제사를 지냈다.
철종은 김조순 부부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게 했다. 김조순은 순원왕후의 부친으로,
이 해는 순조와 순원왕후가 가례를 거행한 지 60주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다.
고종은 태종과 세종의 아들인 양녕대군, 효녕대군, 평원대군, 제안대군, 광평대군, 능창대군,
의원군, 희녕군, 밀성군의 묘소에 종실의 관리를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다.
이는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왕실의 외척 대신에
종실세력을 강화하려 했던 대원군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이해된다.
조선 후기의 국왕들이 왕실 가족 및 공신의 묘소에 제사를 지낸 것은 왕실 가족의 화합을 도모하고
국가에서 이들의 존재와 행적을 잘 기억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조치였다.
5 . 맺음말
남한산성은 서울에서 하삼도(충청, 경상, 전라)로 이어지는 교통로의 요지이자
수도를 방어하는 전략적요충지였다. 이곳에는 백제시대부터 산성이 건설되어 있었고,
인조 대에 이괄의 난과 후금의 위협이 거세지면서 현재의 산성이 축성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인조가 남한산성에 들어가
47일 동안이나 항전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인조의 항전은 패배로 끝이 났고,
이후 남한산성은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조선 후기의 국왕들은 능행을 나섰다가 남한산성을 방문하여
병자호란 때 사망한 사람들의 충절을 기리고 군사적 거점으로서의 기능을 강화하는 조치를 했다.
숙종, 영조, 정조는 여주에 있는 효종의 영릉을 행차하는 길에 남한산성을 방문했고,
철종과 고종은 광주에 있는 순조의 인릉을 방문했다가 남한산성에 들렀다.
님한산성에 행차한 국왕들은 반드시 서장대에 올라가 산성 주변의 형세를 관찰하고,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경험한 항전과 항복,
효종이 국가의 수치를 씻으려고 추진한 북벌 운동을 떠올렸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의 아픔을 기억하는 장소이자, 동일한 사태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민심을 수습하고 군사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장소였다.
남한산성에 행차한 국왕들은 자신이 인조와 효종의 후손으로
선왕의 유업을 계승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는 후손으로서 당연한 도리이자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는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후대의 국왕들이 인조와 효종의 유업을 실천하려면 좋은 정치를 펼쳐야했고,
이는 민심을 수습하고 국력을 배양하여 국토를 제대로 방어할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병자호란의 아픔을 간직한 남한산성은 후대의 국왕들이 선조의 유업을 완수하기 위해
좋은 정치를 펼칠 것을 다짐하는 자리로 거듭나게 되었다.
조선 후기의 국왕들은 남한산성의 행궁, 서장대(수어장대), 남장대,
남문, 북문, 연병관(연무관), 인화관, 침과정을 직접 방문했고,
온왕묘와 현절사에는 관리를 파견하여 제사를 지내주었다.
필자는 남한산성을 방문한 국왕들의 발길이 미쳤던 장소와 건물을 원형대로 복원하고 보존하는 것은
남한산성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
조선 후기 국왕의 남한산성 행차
◇ 국왕의 나들이 ‘行幸’과 그 유적들
조선후기에 국왕이 직접 나들이를 하고
행궁에서 여러 날 머문 대표적인 곳은 수원 화성행궁이었다.
순조 이후 역대 임금이 화성행궁에 머물며 여러 혜택을 베풀었다.
수원에 못지않게 숙종 이래 다섯 임금이 행궁에 머문 곳이 남한산성이었다.
수원 화성의 국왕 행차가 널리 알려진 데 비해 남한산성 행차는 잘 알려지지 못한 측면이 있다.
이에 남한산성의 국왕행차와 주요 시설물들은 어떤 것이 있었는지 알아보자.
◇조선후기 남한산성의 국왕행차
임금의 행차를 행행(行幸)이라고 한다.
조선 후기에는 여주 효종릉의 능행은 모두 세차례였다.
숙종과 영조, 정조가 각각 한 차례 친제(親祭·국왕이 친림하여 행하는 제사)를 했다.
그때마다 남한산성에 오고 갈 때 들렀다.
철종과 고종은 헌릉과 인릉에 친제하면서 돌아오는 길에 남한행궁에 머물렀다.
남한행궁은 다섯 임금이 머문 곳으로 정조, 순조, 헌종, 철종, 고종 등
다섯 임금이 머문 화성행궁과 같은 숫자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서 숙종 이후 역대 다섯 임금이 영릉과 인릉 친제를 하면서
남한행궁에 머물렀으며 머문 기간은 짧게는 2일, 길게는 4일이었다.
숙종이 영릉에 전배한 것은 숙종 14년(1688년) 2월 26일에서 30일 사이였다.
효종의 기일은 5월 4일이었지만 참배일은 여기에 구애받지 않고
왕이 임의로 능행시기를 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한행궁에 머문 날은 출발일인 2월 26일과
영릉 전배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29일 하룻밤을 묵었다.
남한행궁에서는 연도 읍 주민들의 세금을 감액해주는 조치를 취했다.
영조는 영조 6년(1730년) 2월 25일부터 29일까지 능행을 했으며
남한행궁에는 25일과 28일 머물렀다. 역시 세금감액의 혜택을 주었다.
특히 정조는 가장 오래 머물면서 남한산성에서 여러 행사를 치렀다.
정조는 가장 긴 기간 남한산성에 머문 임금이었다.
정조 3년(1779년) 8월 3일에 시작된 능행은 8일이 걸려 10일에야 왕이 궁으로 돌아왔다.
남한행궁에 유숙한 날도 8월 3일 여주로 가는 길에 하루 머물고
돌아오면서 7, 8, 9일 3일 머물렀다. 그 사이에 문무과거시험을 치르고
군사들의 조련인 성조식(城燥式)을 거행했으며
산성의 여러 시설들을 직접 살펴보았다.(‘정조실록’ 권8, 정조 3년 8월 3일)
철종은 즉위 13년(1862년) 9월 18일에 궁을 나서 당일에 헌릉과 인릉을 들르고
남한행궁에 머물러 이틀을 지내고 19일에 산성을 나서 궁으로 돌아갔으며
남한산성 인화관에서 문과 시험을 치르고
서장대에서 성조식을 거행했다.(‘승정원일기’ 철종 13년 9월 19일)
고종은 고종 4년(1867년) 9월 9일에 궁을 출발해서
첫날은 노량진 용양봉저정에서 유숙하고 헌릉과 인릉에 친제한 후
10일과 11일 남한행궁에 머물렀다. 그 사이 인화관에서 문과시험을 치르고
역시 성조식을 거행했다.(‘승정원일기’ 고종 4년 9월 11일)
임금의 행차에는 왕의 비서격인 승지들이 반드시 따랐으며
영의정이나 좌의정, 중추부사 등 최고위 관료 일부가 수행했다.
또한 육조 판서 가운데도 일부가 참여했다.
왕은 그때그때 지역의 현안 문제를 파악하고 정승이나 판서들에게 필요한 조치를 내려
백성들의 애로점을 해결하도록 지시했으며 연로에 특별히 임금의 이름으로
제사지낼 곳이 있으면 관리를 보내서 대신 제를 올리도록 했다.
또 남한산성에 머물 때는 서장대나 연무관을 비롯해
산성의 이곳저곳을 말을 타거나 거마를 타고 직접 현장을 살폈다.
임금들이 남한산성에 들렀던 시기는 대부분 왕들이 한창 나이 때였다.
숙종 28세, 영조 37세, 정조 28세였으며 철종 32세, 고종이 16세 때였다.
궁궐 안에서만 지내던 임금이 먼 거리를 여행하는 일은 건강에 무리를 줄 수도
있는 일이어서 20∼30대 때가 아니면 좀처럼 하기 어려운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임금을 수행하는 영의정이나 육조 판서들의 경우는 나이가
간혹 60∼70대의 노령인 경우가 있었고 그 아래라 해도 50대 정도 됐다.
따라서 수행하는 신하들이 오히려 신체적으로 부담이 큰 경우가 적지 않았다.
정조는 가끔씩 수행하던 영의정과 좌의정의 체력을 염려해
산성 탐방에는 따라오지 말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국왕행차의 주요 시설들
남한산성 내에는 많은 유적들이 남아 있다.
산성의 성벽과 문루를 비롯해
연무관, 현절사, 온왕묘, 침과정, 지수당 등 조선시대 건물이 남아 있고
건물터로 행궁지와 인화관터, 관청터 등이 잘 보존되고 최근에는 행궁이 거의 모두 복원됐다.
국왕행차라는 관점에서 여러 시설 가운데 가장 중심은 행궁이다.
정조는 행궁에 들면서 수어사 서명응에게 병자호란 때 한군의 대포가 전각기둥을 때리자
인조가 후내전으로 거쳐를 옮겼다는 옛일을 상기시켰다.
행궁 다음으로 비중이 높은 시설은 연무관이다.
연무관은 정조 때까지는 각종 사료에 연병관으로 기록되다가
철종 행행시부터 연무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성조의식을 거행한 서장대는 군사훈련의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이며 서장대에서
신호포가 울리면 산성의 각 시설에서 응포가 울리고 사방에서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고
각종 색깔의 깃발이 휘날리는 화려한 군사 퍼레이드였다.
정조는 서장대에 올라 성조의식을 관람하고 군사들의 사기를 높였고
철종과 고종도 서장대에 와서 주변 산세들을 살폈다.
인화관은 철종과 고종 때 과거 시험을 치룬 장소로 의미가 깊다.
문과시험만 치렀기때문에 과거 장소를 연무관이 아닌 인화관으로 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밖에 시설 중 지수당은 정조가 각별하게 여겼던 장소다.
정조는 지수당 주변에 연못이 둘러싼 모습을 보고 군사들이 해갈할 수 있음을 지적했다.
‘지수’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주역의 지수사(地水師) 괘의 의미는
장수가 군대를 통솔하는 데 있어서 덕망으로 이끌게 돼
길운임을 상징한 ‘지수사장인길지의’(地水師丈人吉之義)에서 나온 말이다.
[출처] 경기신문 (https://www.kgnews.co.kr)
(이상 경기신문 『남한산성 세계문화유산으로 거듭난다<1>』에서 인용)
선조임금 어진(宣祖 御眞 傳) -추정 [서울=글로벌뉴스통신] 2019.01.06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7년 전쟁을 치르고 승리로 이끈 조선 제14대 선조대왕의
도사(圖寫)어진(御眞)이 용케 아직까지 남아 전(傳)하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푸른사상사에서 발간된 송영기 시조집
"중천 높이 걸린 저 달"의 목록 제7부 문화와 역사의 향기 편
'선조대왕의 목릉'에 주(註)를 달고 선조임금 어진(傳)이 게재됐다(149쪽)
반우향(半右向)으로 호피가 깔린 이동좌식 교의(交椅)에 앉아 왼손은 팔걸이를 잡고
오른손은홀(혹은 부채)을 팔걸이에 세운채 붉은색 차양밑의 갓끈달린 갓모자를 쓰고 있는데,
화려한 운보문(雲寶紋)녹포단령 안에는 붉은 용포를 껴입었고,
흉배의 용문과 풍만한 얼굴의 기품은 사대부의 그것과는 또 다른 고귀한 신분의 풍모로써
앞을 응시하는 맑은 눈에는 여유있는 만기친람의 기품이 넘쳐흐른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임진왜란시 의주로 몽진한 선조가 상황이 급박하여
세자 광해군과 분조(分朝)하여 후일을 기약하며 서로 달리 갈 때,
맏아들 임해군에게 본 어진을 주었는 바, 임해군은 곧 왜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그래서 임해군을 배종하던 본도도순찰사 윤탁연(尹卓然,1538-1594)에게
이 어진을 잘 보관토록 맡기시어 지금까지 전해 온 것이라 한다.
조선명인전에 의하면 윤탁연은 호가 중호(衆湖)도승지 한성판윤과 형조호조판서를 지내고,
광국 훈삼등으로 칠원군(漆原君)에 봉해진 인물로서, 의병을 모집하고 북변체류 3년만에
누적된 피로로 병을 얻어 향년 57세에 졸하니, 헌민(憲敏)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조선시대 왕의 어진은 창덕궁 신선원전에 모두 48점이 있었는데,
6.25 전쟁때 부산 용두산부근에 옮겨져 보관중 1954년 화재로 거의 전부 소실되었고,
현재는 태조 이성계와 영조(51세 때) 철종 고종 순종의 어진5첩,
영조의 21세 연잉군 왕세재 시절 초상화만 있다.
그리고 잃어버렸다가 최근에 나타난
어진화사 이당 김은호가 모사(模寫)한 세조의 밑그림이 남아 있어 현재 경복궁
국립고궁 박물관 궁중서화실에서 별도 전시되고 있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수도의 보장처가 될 남한산성에 대한 선조의 견해
선조(1552∼1608)
□ 선조실록 159권, 선조 36년 2월 18일 1603년
남한산성을 수축하는 일을 비변사로 하여금 논의하게 하다
비망기로 일렀다.
"일찍이 남한산성(南漢山城)의 형세가 우리 나라에서 으뜸이라고 들었다.
광주(廣州)는 기전(畿甸)의 거진(巨鎭)으로 남도(南道)를 왕래함에 있어 요충(要衝)이 되는 곳이다.
만약 이곳에다 산성(山城)을 수축한 다음 한결 같이 독성(禿城)에서처럼 군사를 조련하고
수령을 택하여 지키게 한다면 안으로는 경도(京都)의 보장(保障)이 되고
밖으로는 제진(諸陣)을 공제(控制)할 수 있을 것이다.
정유년에 산성을 지켜 내지 못한 이후 산성을 수축하는 것을 꺼리고 있는데,
우리 나라의 인정(人情)과 기습(氣習)이 이와 같으니 어찌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황칙(皇勅)에 있는 성지(聖旨)를 보지 못하였는가.
다만 그곳의 형세를 상세히 모르겠는데 수축할 만하다면 지금 마침 목사(牧使) 자리가 비어 있으니
본사(本司)에서 회의하여 그 일을 처리할 만한 재능이 있는 자를 엄밀히 가려 차출(差出)한 다음,
방략(方略)을 지시해 주고 헤아려 조처하게 함으로써 제도(諸道)의 본보기가 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먼저 계려(計慮)가 있는 사람을 보내어 잘 살펴본 다음
도형을 그려 오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비변사에 일러서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
○備忘記曰: "曾聞南漢山城, 形勢甲於東方。 廣州, 乃畿甸巨鎭, 南道往來要衝之地。
若於此處, 修築山城, 操鍊士卒, 一依禿城, 擇其倅而守之, 內有以爲京都之保障, 外有以爲諸陣之控制。
自丁酉山城不守之後, 以山城修築爲諱, 我國之人情氣習如此。 豈不謬哉? 不見皇勑內聖旨乎?
但其處形勢, 不能詳知, 如以爲可爲, 則適今牧使有闕, 本司會推, 極擇其才, 足以辦事者差出, 指授方略,
規畫措處, 以爲諸道倡如何? 先遣有計慮之人, 看審圖形而來, 似當。 言于備邊司議啓。"
□ 선조실록 159권, 선조 36년 2월 18일 1603년
남한산성의 형세에 대해 이기빈으로 하여금 도형을 그려오게 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남한산성의 형세에 대해서 본사(本司)에도 익히 살펴본 사람이 있습니다.
둘러싸인 가운데에 완연히 한 도읍(都邑)이 이루어졌는데, 서북쪽에는 높은 봉우리가 있고
동서쪽은 확 트여 시냇물과 논이 있으며 꼬불꼬불한 산굽이가 몹시 깊어
바깥에서 굽어보거나 엿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옛날에 백제(百濟)가 이곳을 국도로 삼은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던 것입니다.
만약 이곳에다 성을 쌓은 다음 한결 같이 독성(禿城)에서처럼 군사를 조련하여
안으로는 경도(京都)의 보장(保障)이 되고 바깥으로는 제진(諸鎭)을 공제(控制)하게 한다면
참으로 장구한 계책이 될 것으로, 성려(聖慮)가 미치신 바가 실로 뛰어나신 것입니다.
신들이 심가 헤아려 보건대, 이 성은 형세가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부근의 각읍이 모두 잔파된 곳이어서 인력(人力)이 부족한 탓으로
규획(規劃)하려 해도 형세상 매우 어렵습니다.
독성의 경우는, 수원부(水原府)가 사람과 물산(物産)이 많아 광주(廣州)에 비할 바가 아니고
또 성자(城子)가 광활하지 않으므로 많은 인력으로 수선하고 설진(設鎭)하여
모양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지금 이 남한산성의 경우는 독성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본주의 목사를 엄밀히 선택하여 차송(差送)한다 하더라도
무슨 힘에 의지하여 쉽사리 성을 완성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조정에 정해진 계책이 있어 사람을 가려 뽑아 그에게 위임할 경우에는
먼저 승도(僧徒)를 모집하거나 혹 창고를 지어 곡식을 저장해 두거나 인호(人戶)를 모집해 들여
부역을 면제해 안집(安集)시켜 점차 터전을 이루게 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시기를 헤아리고 힘을 요량하여 모처(某處)의 군사를 주어 성지(城池)를 수선하고
누노(樓櫓)를 지어 서울 가까운 곳의 한 거진(巨鎭)으로 삼는다면 참으로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나라는 정해진 의논이 없어 장구한 성과가 있기를 책임지우지 못하는 것이 염려됩니다.
본사의 당상(堂上) 이기빈(李箕賓)으로 하여금 화수(畫手)를 대동하고 가서 간심(看審)하고 나서
도형을 그려오게 한 다음 다시 의논해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상이 따랐다.
사신은 논한다.
듣건대 맹가(孟軻)가 ‘포루(布縷)의 정(征)도 있고 속미(粟米)의 정도 있고
역역(力役)의 정도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 두 가지를 시행하면
백성들이 유망(流亡)하고 세 가지를 다 쓰면 나라가 망한다.’고 하였다.
지금은 백성들이 병들었고 정역(征役)이 몹시 많은데
백성들을 쉬게 하여 나라의 근본을 굳게 하는 것은 지금이 바로 적당한 때이다.
그런데 인화(人和)가 바로 굳건한 성(城)이라는 것은 모르고
지리(地利)의 험고한 것만을 믿으려고 하니,
금성탕지(金城湯池)가 있다 하더라도 백성들이 원망하고 있는 데에야 모슨 소용이 있겠는가.
○備邊司啓曰: "南漢山城形勢, 本司亦有熟看之人。 其中襟抱, 宛作一都邑。
西北有高峰, 東西寬敞, 有川流水田, 曲曲深邃, 自外無窺覘臨壓之處。 昔爲百濟國都者, 有由然矣。
若於此處, 築城鍊卒, 一依禿城, 內爲京都保障, 外爲諸鎭控制, 則允爲長算。 聖慮所及, 實出尋常萬萬。
臣等竊伏商度, 此城形勢甚好, 而近處各邑, 俱是殘破之地, 人單力薄, 雖欲猝爲規畫, 其勢極難。
禿城、水原爲府, 物衆人多, 非廣州之比, 且城子不爲廣闊, 故以多人之力, 修繕設鎭, 猶得以成形,
今此南漢山城, 則與禿城有異, 本州牧使, 雖極擇差送, 而憑藉何力, 容易成事乎? 但朝廷如有定計,
擇人而委之, 則或先爲募聚僧徒, 或先設倉廒, 措峙糧穀, 或募入人戶, 免役定集, 漸成根基, 然後相時量力,
給與某處軍士, 繕設城池樓櫓, 以爲近京一巨鎭, 諒無不可。 但慮我國無定議, 而不能責久遠之效耳。
本司堂上李箕賓, 使之帶同畫手, 看審圖畫以來, 然後更爲議處何如?" 上從之。
[列聖御眞(1927간행)에 나오는 숙종 초상화]
1. 숙종 영릉 능행(1688.2.26 ∼ 1688. 2.30) : 4박5일
숙종(1661∼1720, 산성 방문시 28세)
□ 숙종실록 19권, 숙종 14년 2월 26일 1688년
광진 북쪽을 동가하다
임금이 동가(動駕)하여 광진(廣津) 북쪽 언덕에 주정(晝停)033) 하고,
이내 배를 타고 나루를 건너 배에 내려서 앞으로 나가
율목정(栗木亭)에 주정하였다가 보련(步輦)으로써 행차하려고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윤지선(尹趾善)이 교자(轎子)를 타되,
말을 버리고 연부(輦夫)를 사용하여 산성(山城)에 오르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여러 신하들은 말을 타고 배종(陪從)하라고 명하였다.
[註 033]주정(晝停) : 임금이 멀리 거둥할 때 잠깐 머물러서 낮 수라(水剌)를 드는 것을 말함.
□ 숙종실록 19권, 숙종 14년 2월 26일 1688년
미시에 광주 산성에 이르러 대신에게 하교하다
미시(未時)에 임금이 광주 산성(廣州山城)에 이르러 대신(大臣)을 불러 보고
하교(下敎)하기를,
"여기가 바로 인묘(仁廟)께서 연(輦)을 머물렀던 곳인데,
지금 50 년을 지난 뒤에 내가 다시 여기에 와서 보니 슬픈 감회를 견딜 수 없다."하고,
인하여 양주(楊州)·광주(廣州)·여주(驪州)·이천(利川) 4읍(邑)의 봄 세금을 견감(蠲減)해 주고,
또 여주의 백성으로 나이 70이상인 자에게는 음식물을 주게 하였으니,
대개 능침(陵寢)이 있기 때문이었다.
□ 숙종실록 19권, 숙종 14년 2월 26일 1688년
완풍 부원군 이서에 치제케 하다
임금이 산성(山城)은 바로 온조왕(溫祚王)이 나라를 개창(開創)한 땅인데,
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가 성(城)과 못[池]을 수선(修繕)한 공이 있다고 하여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이서는 일찍부터 이미 온조왕의 사당에 배향(配享)되었다.
□ 숙종실록 19권, 숙종 14년 2월 26일 1688년
병자년에 죽은 전사자들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다
영부사(領府事) 김수흥(金壽興) 등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병자년034) 난리에 여러 도(道)의 근왕병(勤王兵)으로서 쌍령(雙嶺)에서 전사(戰死)한 자가
매우 많으니, 또한 마땅히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하고,
언(正言) 김홍복(金洪福)은 아뢰기를,
"험천(險川)의 전쟁에서 사졸(士卒)로서 죽은 자가 쌍령에 못지 않고
북문(北門)의 싸움에서 날랜 장수와 강한 병졸이 태반이나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옛 노인들이 전(傳)하여 오므로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제사를 하사(下賜)하는 전례(典禮)를 마땅히 다름이 없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註 034]병자년 : 1636 인조 14년.
□ 숙종실록 19권, 숙종 14년 2월 27일 1688년
이천에 머무르다
임금이 광주(廣州)에서 길을 떠나 벌원(伐院)과 공암(孔巖)에 주정(晝停)하고
저녁에는 이천(利川)에 머물렀는데,
이천·죽산(竹山)의 군병(軍兵)을 징발(徵發)하여 그들로 하여금 호위(扈衞)하게 하였다.
□ 숙종실록 19권, 숙종 14년 2월 29일 1688년
신성립·지여해 등의 자손을 녹용하게 하다
임금이 경안(慶安)에 주정(晝停)하고, 저녁에 산성(山城)에 이르러 보련(步輦)을 타고
서장대(西將臺)에 올랐는데, 승지(承旨)·사관(史官)·옥당(玉堂)의 시위(侍衞)하는
여러 신하들만 따르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오늘 이곳에 와서 지나간 일을 추상(追想)하니, 저절로 서글픈 감회가 일어난다."
하고, 인하여 형세(形勢)를 두루 살펴보고 하교(下敎)하기를,
"군량(軍糧)이 부족한 것이 결점(缺點)이 되기는 하나,
지세(地勢)만은 진실로 천험(天險)이다."하였다.
최석정(崔錫鼎)·윤덕준(尹德駿) 등이 계술(繼述)037) 하고 분발(奮發)하는 뜻으로
차자(箚子)를 올려 진계(陳戒)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김수흥(金壽興)이 아뢰기를,
"신성립(申誠立)과 지여해(池汝海)가 전사(戰死)한 참상(慘狀)과
서흔남(徐欣南)이 나라를 위한 정성에는
마땅히 권장(勸奬)하고 포상(褒賞)하는 도리(道理)가 있어야 하겠습니다."하니,
임금이 그 자손을 수용(收用)하라고 명하였다.
남구만(南九萬)이 또 아뢰기를,
"삼학사(三學士)인 홍익한(洪翼漢) 등의 사당(祠堂)을 건립(建立)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지만,
그 뒤에 흉년 때문에 아직 거행하지 못했습니다."하니,
임금이 속히 사당을 세우라고 명하였다.
[註 037]계술(繼述) : 선인(先人)이 하던 일이나 뜻을 이어감.
[영조 어진 /조석진, 채용신 1900년 作 / 국립고궁박물관 ]
[列聖御眞(1927간행)에 나오는 영조 초상화]
2. 영조 영릉 능행(1730.2.25∼1730. 2.29) : 4박5일
영조(1694∼1776, 산성 방문시 37세)
□ 영조실록 25권, 영조 6년 2월 25일 1730년
저녁에 광주 행궁에 머물다
저녁에 거가(車駕)가 광주(廣州) 행궁(行宮)에 들었다.
□ 영조실록 25권, 영조 6년 2월 26일 1730년
말을 타고 쌍령에 이르러 병자년에 전망한 유허에 치제하다
임금이 말을 타고 쌍령(雙嶺)에 이르러 병자년041) 에 전망(戰亡)한 유허(遺墟)를 바라보고
관원(官員)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고, 한참 동안 말을 멈추고 있다가 출발하였다.
신시(申時)에 이천(利川) 행궁에 들었다.
□ 영조실록 25권, 영조 6년 2월 28일 1730년
이천을 출발하여 남한 산성 동문 밖에 이르러 말을 타고 서장대에 오르다
임금이 이천을 출발하여 남한산성의 동문 밖에 이르러 말을 타고 고취(鼓吹)하는 가운데
서장대(西將臺)에 올랐다. 싸움터를 가리키며 임금이 말하기를,
"한봉(汗峰)이 어디 있는가?"하니,
수어사(守禦使) 윤순(尹淳)이 아뢰기를,
"산성 동쪽에 있습니다."하였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아뢰기를,
"성하지맹(城下之盟)042) 은 옛부터 사람들이 부끄럽게 여기는 바이므로,
뜻있는 선비로서 이땅을 지나는 사람들은 모두들 팔을 걷어붙이며 상심(傷心)합니다.
하물며 전하께서 어제 영릉(寧陵)을 배알하고 오늘 이 장단(將壇)에 오르셨으니,
지난날의 일을 뒤좇아 생각해 보신다면 성심(聖心)이 또한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생각하건대, 우리 효종(孝宗)께서는 산림(山林)의 선비를 초빙하시고
와신 상담(臥薪嘗膽)의 뜻을 가다듬으며 복수(復讐)·설치(雪恥)의 계책을 강구하여,
장차 천하 후세에 대의(大義)를 신장(伸長)하려 하시다가 대업(大業)의 절반을 이루지 못한 채
중도에 붕조(鵬殂)하셨으니, 이것이 충신과 지사(志士)들이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는 까닭입니다.
만일 전하께서 효종의 뜻과 사업을 뒤좇아 이으려 하신다면
더욱 이 일에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비록 몇 해와 몇 달로는 기약할 수 없지만,
언제나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해이해지지 않으며 군사를 양성하고 재물을 비축하고
인재(人材)들을 수습하고 국정을 닦고 국법을 밝히고, 도덕(道德)이 이미 이루어진다면,
비록 군사를 일으켜 가서 처지는 못하더라도
오히려 관문(關門)을 닫고 약조(約條)를 거절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하고,
교리 유엄(柳儼)이 아뢰기를,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는 오랑캐의 마당에서 참혹하게 죽어
시체가 이국(異國) 땅에 버려졌습니다. 홍씨와 윤씨 두 가문에서는
모두 남은 의복(衣服)을 가지고 허장(虛葬)을 했기에
조가(朝家)에서 특별히 복호(復戶)043) 해 주도록 했습니다만,
오달제의 가문에서는 허장은 예법이 아니라 하여 단지 의낭(衣囊)을 가져다 불태우고 그의
아내의 무덤 뒤에 묻어 애당초 분묘가 없었기 때문에 복호해 주라는 명이 있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의 아내의 무덤이 있고 또 묻은 의낭이 있으니,
일체 복호해 주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는 다른 것과 자별하니, 특별히 복호해 주어야 한다."하였다.
[註 042]성하지맹(城下之盟) : 적군이 성밑까지 쳐들어 와서 항복하고
체결(締結)하는 맹약(盟約). 대단히 굴욕적인 강화(講和).
[註 043]복호(復戶) : 군인이나 양반의 일부 및 궁중의 노비 등
특정한 대상자에게 조세(租稅)나 그 밖의 국가적 부담을 면제하여 주는 일.
□ 영조실록 25권, 영조 6년 2월 29일 1730년
남한 산성의 행궁에서 출발하여 저녁 때 환궁하다
임금이 남한 산성의 행궁(行宮)에서 출발하였다. 부교리 조명익(趙明翼)이 아뢰기를,
"성종조(成宗朝)경술년044) 에는 거가(車駕)가 지나가는 곳마다
문묘(文廟)에 치제(致祭)하고 향교(鄕校)의 유생(儒生)들에게 쌀을 내렸습니다.
이번에도 마땅히 그대로 본받았으면 합니다."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뒤좇아 그대로 거행하는 것이 어떠한가?"하였다.
도승지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뒤좇아 거행하는 것이 합당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선조(先朝) 무진년045) 에도 그런 예가 없었으니 그냥 두라."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여기서 관무재(觀武才)046) 를 행하고 싶지만 날짜가 더뎌질까 염려스러워
실행하지 못하니, 무진년의 전례대로 따로 어사(御史)를 보내어 시행함이 마땅하다."하고,
수어사 윤순에게 명하여 이 사실을 장사(將士)들에게 효유(曉諭)하게 하고,
이어 유엄(柳儼)을 어사로 삼았다. 저녁 때에 환궁(還宮)하였다.
당초 임금이 영릉(寧陵)을 전알(展謁)하려 했을 때는 막 무신년047)의 변란을 겪은 데다가
여주와 이천의 백성들 중에 역적들을 따른 자가 많아 인심이 채 안정되지 않았고,
또한 전염병이 크게 번져 죽은 사람이 즐비하였으므로,
조정에서 이런 때에 여러 날이 걸리는 곳으로 동가(動駕)하는 것은
위험과 의구(疑懼)가 많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신과 중재(重宰)들이 피차를 논할 것 없이
모두 이 일을 들어 큰 의리(義理)로 삼았던 것이다. 소장(疏章)이 공거(公車)에 가득 차고
심지어 눈물을 흘리며 극력 쟁집(爭執)하는 사람까지 있었으나, 임금은 마침내 듣지 않았다.
대저 여주와 이천의 백성들이 반드시 모두 역적을 따른 것도 아니었고,
촌락의 전염병의 기운이 반드시 장전(帳殿) 가까이 침범하는 것도 아니었다.
임금이 성조(聖祖)를 사모하는 마음이 일어나 한 번 전알(展謁)하고 소분(掃墳)하려 한 것은
곧 천리에 당연한 일인데, 조정의 신하들이 다른 계책 없이 단지 행행(幸行)을 정지하기만
일삼았으니, 그 또한 당시의 풍조가 미열(媚悅)에 가까웠던 것이다.
마침내 난여(鑾輿)가 평온하게 돌아왔고 먼 외방(外方)의 민생들이 기뻐하였으니,
당시 다투며 고집했던 사람들이 또한 할 말이 있겠는가?
[註 044]경술년 : 1490 성종 21년.
[註 045]무진년 : 1688 숙종 14년.
[註 046]관무재(觀武才) : 무과(武科) 시험의 하나.
임금이 직접 열병(閱兵)한 뒤에 당상관으로부터 그 이하 군관(軍官) 및 한량(閑良)에게
무재를 시험보이는 것. 초시(初試)와 복시(覆試)만 치르게 하고,
시험 과목은 11기(技) 가운데 품주(稟奏)하여 4기를 시험하였음.
[註 047]무신년 : 1728 영조 4년.
[정조 표준 어진 / 우당 이길범 1989년 作 / 국립고궁박물관 ]
[구군복(具軍服)을 입은 정조 / 우당 이길범 1989년 作 / 국립고궁박물관 ]
[선원보략(璿源譜略, 조선 구 황실 족보)에 수록된 정조의 초상화]
3. 정조 영릉 능행(1779.8.3∼1779.8.10) : 7박8일
정조(1752∼1800, 산성 방문시 28세)
□ 국역비변사등록 160책 정조 3년 1779년 07월14일(음)
守禦使 徐命膺이 입시하여 親臨하여 試閱할 때 標信을 받아 거행하는 일 등에 대해 논의함
/ 動駕, 斥候伏兵, 行宮, 城操
이번 7월 13일 군사방승지(軍士房承旨)와 수어사가 함께 입시했을 때
수어사 서명응(徐命膺)이 아뢰기를,
“평상시 성조(城操) 때에는 수어사가 예에 따라 거행하였으므로
표신(標信:증표)를 청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께서 친림하여
시열(試閱)하는데 표신이 없이 조발(調發)하면 지나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 중략 ---
또 아뢰기를,
“이번 거둥에는 성조(城操)가 있으니 어전(御前)에 전배(前排)할 취수(吹手)는
본청(本廳)에서 미리 준비하여 대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이 삼가 대령하도록 조치하고 준비하였습니다. 어느 곳에 대령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전배는 경계에서 대령하고
취타(吹打)는 오리정(五里程)에서 대령하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또 아뢰기를,
“척후복병(斥候伏兵)을 총융청에서 거행하라는 하교는
오로지 속오군병(束伍軍兵)에 대한 진념(軫念)에서 나온 성의(盛意)이시나, 지금 총융청의
초기(草記)를 보니 양주(楊州)의 척후복병 외에는 거행하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수어청에서 거행하는 일이고 또한 속오군도 총 75초나 되니
이러한 일은 스스로 넉넉히 거행할 수 있습니다.
전례에 따라 본청(本廳)의 속오군으로 거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리 하라 하였다.
--- 중략 ---
대가(大駕)가 출궁하는 날
신은 중군과 함께 갑주를 갖추고 대기치(大旗幟)를 거느린 뒤에
산성에서 오리 거리인 율목정(栗木亭)에서 지영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리 하라. 지영은 경상(境上)에서 하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 정조실록 8권, 정조 3년 8월 3일 1779년
남한 산성에 행행하여 백성과 군대의 상태를 살피다
임금이 장차 영릉(寧陵)에 전배(展拜)하려고 이날 남한 행궁(南漢行宮)에 머물렀다.
융복(戎服)을 갖추고 여(輿)를 타고 인화문(仁和門)을 나가
인정전(仁政殿)의 월대(月臺)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 중략---
화양정(華陽亭)에 이르렀을 때에 가랑비가 내리다가
광진(廣津)의 주정소(晝停所)에 이르렀을 때에 갰는데, 길을 끼고 구경하는
서울 백성을 막지 말라고 명하였다.
--- 중략 ---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 내가 이제 배를 타고 백성에게 왔으니,
더욱 절실히 조심한다. 대저 사람의 마음이 느끼는 것은 흔히 사물을 만날 때에 있거니와,
옛사람이 이른바 유(類)를 따라서 부연한다는 것이다.
예전에 우리 성조(聖祖)께서 주수도(舟水圖)를 만들고 사신(詞臣)에게 명하여
그 명(銘)을 짓고 그 일에 대하여 서문(序文)을 쓰게 하셨다."하고
이어서 배에 있는 신하들에게 음식을 베풀라고 명하였다.
--- 중략 ---
율목정(栗木亭)에 이르러 갑주(甲胄)로 갈아 입고 말을 탔고,
수어사(守禦使) 서명응(徐命膺)이
중군(中軍)과 각 영장(營將)과 기고(旗鼓)를 거느리고 영접하였다.
임금이 남문(南門)으로 들어가 행궁에 들어가서 정당(正堂)에 나아가니, 수어사가
참현(參現)하였다. 임금이 갑주를 벗고 융복(戎服)을 입고서 호가(護駕)한 대신(大臣)과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와 각무 차사원(各務差使員)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행행이라는 것은 백성이 거가의 행림(行臨)을 행복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거가가 가는 곳에는 반드시 백성에게 미치는 은택이 있으므로
백성들이 다 이것을 행복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제 내 거가가 이곳에 왔으니,
저 백성이 어찌 바라는 뜻이 없겠는가?
옛사람이 이른바 행행의 의의를 실천한 뒤에야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다고 하였으니,
경들은 각각 백성을 편리하게 하고 폐단을 바로잡을 방책을 아뢰라."하매,
영의정 김상철이 여러 신하들과 상의하여 우러러 아뢰겠다고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이 곳에 왔고 또 이 궁(宮)에 임하였으니,
옛일을 생각하여 느껴지는 마음을 참으로 스스로 누를 수 없다.
일찍이 고사(古事)를 보니, 병자년180) 성조(聖祖)께서 이 궁에 계실 때에
한군(汗軍)이 한봉(汗峰)에 올라 대포(大砲)를 쏘아서
포환(砲丸)이 전주(殿柱)를 쳤으므로 성조께서 후내전(後內殿)으로
이어(移御)하셨다 하였는데, 이 전이 바로 그때 계시던 전인가?"
---하략---
[복원한 철종 어진]
4. 철종 인릉 능행(1862.9.18∼1862.9.20) : 2박3일
철종(1831∼1863, 산성 방문시 32세)
□ 철종실록 14권, 철종 13년 9월 18일 1862년
인릉에 나아가 친제하고 헌릉에 나아가 전알하다
인릉(仁陵)에 나아가 친제(親祭)하고, 이어 헌릉(獻陵)에 나아가 전알(展謁)하였다.
□ 철종실록 14권, 철종 13년 9월 18일 1862년
남성 행궁에 나아가다
이어 남성 행궁(南城行宮)에 나아갔다.
□ 철종실록 14권, 철종 13년 9월 19일 1862년
병자년·정축년에 전사한 사졸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다
하교하기를,
"어가(御駕)가 이곳에 이르니, 감회가 더욱 간절하다.
병자년·정축년의 전사자(戰死者)를 홍문관(弘文館)으로 하여금 일일이 조사해 내어 들이게 하라.
그리고 전사(戰死)한 사졸(士卒)들에 대해서도 각 해읍(該邑)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어 저승의 억울한 영혼에게 음식을 권하게 하라."하고,
또 하교하기를,
"이미 이곳에 왔고 또 이해를 당하였으니, 나의 뜻을 보이는 일이 없을 수 없다.
경내(境內)의 70세 이상된 사람은 본부(本府)로 하여금 쌀을 하사하게 하고,
내년의 결전(結錢)을 특별히 정면(停免)시키도록 하라."하였다.
□ 철종실록 14권, 철종 13년 9월 19일 1862년
온왕묘와 현절사에게 치제하다
온왕묘(溫王廟)와 현절사(顯節祠)057) 에 치제(致祭)하고, 하교하기를,
"현절사에 방금 치제하라는 명을 내렸거니와,
그 사손(祀孫)은 벼슬자리가 나는 대로 조용(調用)하도록 하라."하였다.
[註 057]현절사(顯節祠) : 병자 호란(丙子胡亂) 때 척화(斥和)한 김상헌(金尙憲)·정온(鄭蘊)·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 등 절의(節義)를 지킨 이들을 제향(祭享)한 사우(祠宇).
□ 철종실록 14권, 철종 13년 9월 19일 1862년
서장대에서 시·원임 대신을 소견하다
서장대(西將臺)에서 시임(時任)·원임(原任)의 대신(大臣)들을 불러서 접견하였다.
[고종 어진 / 채용신 / 국립중앙박물관]
5. 고종 헌릉 능행(1867.9.10∼1867.9.12.) : 2박3일
고종(1852∼1919, 산성 방문시 16세)
□ 고종실록 4권, 고종 4년 9월 10일 1867년 조선 개국(開國) 476년
헌릉과 인릉에 나아가 친제하다
헌릉(獻陵), 인릉(仁陵)에 나아가 친히 제사를 행하였다.
이어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행궁(行宮)에 행행하여 경숙(經宿)하였다.
□ 고종실록 4권, 고종 4년 9월 11일 1867년 조선 개국(開國) 476년
서장대와 남장대를 돌아보다
서장대(西將臺)와 남장대(南將臺)를 두루 보았다.
이어 연무관(演武館)에 나아가 야조(夜操)를 보고 돌아와 행궁(行宮)에서 경숙(經宿)하였다.
□ 사료 고종시대사3 1867년(고종 4년) 9월 11일
대가(大駕)가 서장대(西將臺)와 남장대(南將臺)에 나아갔다가
그대로 연무관(演武館)에 임하여 야조(夜操)를 거행하였다. … (중략) … 때가 되자,
통례(通禮)가 외판(外辦)하기를 무릎 꿇고 계청하니,
상이 군복을 갖추어 입고 여(輿)를 타고 행궁을 나가자
약방 제조 김세균(金世均)과 부제조 김병지(金炳地)가 앞으로 나와 문후하였다.
상이 여에서 내려 말을 탔다. 국청사(國淸寺) 앞길에 이르자 말에서 내려 여를 탔고,
서장대에 이르자 여에서 내려 자리에 올랐다.
대신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자 김병학(金炳學)이 앞으로 나왔다. 상이 이르기를,
“이곳에 와서 임하니 옛 감회가 더욱 새롭다.”하니, 김병학이 아뢰기를,
“정묘년(1627)·병자년(1636) 이후로 원통함을 참아가며 200여 년을 하루같이 지냈는데,
폐백(幣帛)과 주옥(珠玉)을 해마다 연경(燕京)으로 보내면서
한 조각 『춘추(春秋)』의 의리를 이을 길이 없었으니,
이것이 뜻 있는 선비들이 격앙하고 감개하는 까닭입니다.
더구나 이 성은 와신상담하던 곳입니다.
지금 성상께서 직접 임하심에 산천과 초목이 모두 새로이 빛을 받게 되었습니다만,
성상께서는 성대하던 옛날을 그리며 서글픈 감회를 일으키셨습니다.
전하께서 늘 당시 효종(孝宗)의 마음을 전하의 마음으로 삼는다면
세교(世敎)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하였다.【원문 빠짐】상이 행궁으로 돌아왔다.
잠시 후에 상이 다시 여를 타고 남장대에 이르렀다.
여에서 내려 막차로 들어갔다.
선전관이 꿇어앉아 시기 호령(試技號令)을 계품하고 규례대로 거행하였다.
병조 판서가 기조(起操)를 계품하였다.
--- 중략 ---
상이 자리에서 내려와 여를 탔다. 선전관이 꿇어앉아 취타를 그칠 것을 계품하였다.
상이 도로 행궁으로 들어갔다.
선전관이 꿇어앉아 기치를 좌우로 나누어 서게 할 것과 취타를 그칠 것을 계품하였다.
또 각 영의 파단(擺單)을 열 것을 계품하였다.
또 문을 열기를 계품하고 또 각 영의 조두(刁斗)를 계품하였다.
그대로 밤을 지냈다. 신하들이 차례로 상의 거처를 지켰다.
□ 고종실록 4권, 고종 4년 9월 12일 1867년 조선 개국(開國) 476년
병자년과 정묘년의 싸움에서 죽은 사람을 위로하도록 하다
전교하기를, "이곳에 와 보니 감회가 더욱 절실하다.
병자년(1636)과 정묘년(1627)의 싸움에서 죽은 사람들을
홍문관(弘文館)으로 하여금 상고하여 찾아내서 들이게 한 다음
군사들을 각 해읍(該邑)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주어 저승에 있는 영혼들을
위로하여 주게 하고, 작년에 본부(本府)에서 싸움터에 나갔다가 죽은 군사들에게도
일체로 거행(擧行)하도록 하라."하였다.
□ 사료 고종시대사3 1867년(고종 4년) 9월 12일
고종, 병자호란 및 정묘호란에서 전사한 사람을 홍문관으로 하여금 조사해 들일 것을 명함
전교하기를, “이곳에 와서 임하니 감회가 더욱 절실하다.
정묘년(1627)·병자년(1636) 전쟁에서 전사한 사람을
홍문관(弘文館)으로 하여금 조사해 들이게 하고,
사졸은 각각 해당 고을에서 제사를 지내 억울한 혼을 위로하도록 하라.
작년에 출정(出征)했다가 전사한 본부의 사졸도 같은 격식으로 거행하게 하라.”하였다.
□ 사료 고종시대사3 1867년(고종 4년) 9월 12일
고종, 남한산성에서 환궁함
대가(大駕)가 남한산성으로부터 환궁했다. … (중략) … 때가 되자,
통례(通禮)가 외판(外辦)하기를 무릎 꿇고 계청하니,
상이 군복을 갖추어 입고 여(輿)를 타고 행궁 문밖으로 나가자
약방 제조 김세균(金世均)과 부제조 김병지(金炳地)가 앞으로 나와 문후하였다.
상이 여에서 내려 말을 탔다. 선전관이 꿇어앉아 기치를 세 줄로 나누어 서게 할 것과
징을 두 번 쳐서 대취타(大吹打)를 울리고 행고(行鼓)를 울릴 것을 계품하였다.
진남문(鎭南門)에 이르자 상이 말에서 내려 여를 탔고,
율목창(栗木倉) 아래에 이르자 상이 여에서 내려 말을 탔다.
매착리(梅着里)를 경유하여 원우리(遠隅里)에 이르자
선전관이 꿇어앉아 기치를 좌우로 나누게 할 것을 계품하였다.
상이 말에서 내려 막차로 들어가자 선전관이 꿇어앉아 취타를 그칠 것을 계품하였다.
잠시 후에 통례가 꿇어앉아 막차에서 나올 것을 계청하자 상이 막차를 나와 말을 탔다.
--- 중략 ---
만안현(萬安峴)에 이르자 상이 말에서 내렸다.
인부를 시켜 여를 메고 재를 넘게 한 다음 다시 여에서 내려 말을 탔다.
봉저정에 이르자 선전관이 꿇어앉아 취타를 그칠 것을 계품하였다.
문안을 하지 말라고 하교하였다. 사알을 통해 구전으로 하교하기를,
“주교(舟橋)를 건널 때 도섭(渡涉)하고 영접하는 절차는 그만두라.”하였다.
--- 중략 ---
숭례문으로 들어가 돈화문(敦化門)에 이르자
선전관이 기치를 좌우로 나누어 서게 할 것을 계품하였다.
돈화문, 진선문(進善門), 숙장문(肅章門), 협양문(協陽門)으로 들어갔다.
병조 판서가 꿇어앉아 방장(放仗)을 계품하자 선전관이
표신(標信)을 내어 계엄을 풀기를 청하였다.
상이 선화문(宣化門)을 통해 대내(大內)로 돌아가니,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나왔다.
□ 고종실록 4권, 고종 4년 9월 12일 1867년 조선 개국(開國) 476년
남한 산성의 행궁에서 환궁하다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행궁(行宮)에서 돌아와 용양 봉저정(龍驤鳳翥亭)에 나아가
잠깐 동안 머물러 있다가 주교(舟橋)로 강을 건너 환궁하였다.
그 어느 겨울 / 박희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