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성역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中 行宮全圖, 24.3 x 33.3cm,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1779년 정조의 능행과 남한산성
- 김문식(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 -
연구논문 / 실학사상 2011. 3. 25.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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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2. 능행의 경과
3. 능행 중의 조치
4. 능행의 의의
5. 맺음말
1. 머리말
1779년(정조 3) 8월, 정조는 도성을 벗어나
남한산성과 이천을 경유하여 여주에 있는 효종의 寧陵을 참배하고 돌아왔다.
총 7박 8일의 장거리 여행이었다.
정조가 영릉을 참배한 것은 효종이 서거한지 2周甲이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정조는 재위 24년 동안 총 66차례의 능행을 했으므로, 능행 자체가 이례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보다 앞서 정조는 1777년에 永陵과 弘陵을 방문한 것에서 시작하여,
1778년에는 2차례, 1779년에는 4월까지 이미 2차례의 능행을 다녀온 바 있었다.
그러나 1779년의 능행은 정조에게 최장거리 여행이자 여주를 다녀오는 유일한 여행이었고,
이동 시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남한산성에서 보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조의 능행 중 7박 8일이 소요된 여행은 두 번 있었다.
1779년 여주 능행과 1795년의 화성 행차가 그것인데,
후자는 정조가 생모인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화성에 행차하여 사도세자의 묘소인
顯隆園을 참배하고, 화성행궁에서 혜경궁의 회갑잔치를 열었던 뜻 깊은 행사였다.
조선시대의 왕릉은 도성 인근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능행이라 해봐야
당일에 다녀오는 것이 대부분이고 길어도 3일 내지 5일이 소요되는 정도였다.
당시 여주에는 효종의 寧陵과 세종의 英陵이 있었는데,
이들은 도성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왕릉이었다.
그런데 여주 능행이라 하더라도 남한산성, 이천, 여주에서 숙박하는 것으로 계산하면,
5박 6일의 일정이면 충분히 다녀올 수가 있었다.
그러나 정조는 일정을 7박 8일로 늘였고, 그 중 4박 5일을 남한산성에서 보냈다.
이 때의 능행은 120주기를 맞은 효종의 능을 참배하는 동시에 남한산성을 방문하여
산성의 상황을 점검하고 군사 훈련을 실시한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1779년 정조 능행의 실상과 의의를 검토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이를 위해 2장에서는 능행의 과정을 시간 순서에 따라
행사 준비, 본 행사, 행사 마무리로 구분하여 정리하고, 3장에서는 정조가
능행 중에 취했던 조치들을 대상에 따라 山林, 유생과 무사, 백성으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그리고 4장에서는 정조의 능행이 가지는 의의를 정리했다.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中 洛南軒養老宴圖, 24.1 x 16.8cm, 고려대중앙도서관
2. 능행의 경과
1) 행사 준비
1779년(정조 3) 7월 6일, 정조는
여주에 있는 효종의 寧陵을 방문하여 제사를 올리겠다고 밝혔다.
올해는 바로 기해년이다. 禮法을 따라 寧陵에 가서 展拜를 해야 하지만,
초봄에는 민간의 양식이 떨어질까 염려되어 결행하지 못했다.
이제 농사일이 거의 실마리가 잡혔고 길도 멀기 때문에,
草記를 기다려 하교한다면 군색한 점이 많을 것이다.
이미 대신들에게 물어보았으므로, 여주 寧陵에 직접 제사한 뒤
英陵에 나아가 展謁하는 날짜를 다음달 초순 중에 택하여 올려라.
여기서 ‘기해년’이란 효종이 승하한 1659년을 말하므로,
1779년은 효종이 승하한지 2周甲, 120년이 되는 해가 되었다.
그리고 국왕이 영릉을 방문했던 것은 1730년(영조 6)이 마지막이었으므로,
50년 만에 거행되는 행사이기도 했다. 이 날, 정조는 능행은 8월 3일에 출발하고,
숙박은 남한산성, 이천, 여주에서 하며, 국왕의 호위는 훈련도감과 어영청이 담당하고,
도성의 방위는 금위영과 총융청이 담당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렇게 되면 중앙의 5군영 가운데 수어청이 빠지게 되는데,
정조가 방문하는 남한산성이 수어청 관할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정조는 도로를 정비하거나
船艙을 조성할 때, 民弊가 발생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하라고 명령했다.
7월 8일, 정조는 조정 대신과 수어사(徐命膺), 경기감사(鄭昌聖), 훈련대장(洪國榮)이
합석한 자리에서 보다 구체적인 사항들을 결정했다.
먼저 年老하여 능행에 참여하기 어려운 병조판서 權噵를 鄭尙淳으로 교체하고,
현지의 호위군 및 布城의 숫자, 각 관서의 支供을 줄여 경비를 절감하도록 했다.
또한 1천여 명의 군사가 참여하는 남한산성의 군사훈련[城操] 장소를
練兵館의 서남쪽으로 이동시키고 국왕은 西將臺에서 이를 지켜보며,
남한산성의 밖에서는 모든 신하가 말을 타고 이동하도록 했다.
그리고 남한산성의 別試에는 광주, 여주, 이천에 거주하는 사람에게만 응시 자격을 주고,
武科의 初試는 능행 전(7월 17일)에 수어사가 주관하여 미리 실시하도록 했다.
또한 摠戎使만 능행에 참여하고
총융청 소속 군사들은 창경궁 弘化門 밖에서 陣을 짜고 留都하며,
국왕의 호위부대로 前廂軍은 훈련도감의 步軍 8哨 馬軍 4哨,
後廂軍은 어영청의 步軍 8哨 騎士 3番, 挾輦軍는 600명, 前排 20쌍으로 할 것을 결정했다.
그리고 국왕의 행렬을 수행할 禁軍의 숫자는 5番으로 결정했다.
7월 13일에는 남한산성 군사 훈련에 대한 의논이 주로 이뤄졌다.
이 논의는 수어사 서명응이 주도했는데,
국왕이 閱武를 하기 전에 私操를 실시하기 위해 미리 標信을 받았고,
군사훈련은 晝操와 夜操를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후 정조는 大駕가 강을 건널 때의 호위 상황을 결정했고,
御駕가 남한산성에 도착했을 때 溫王廟와 顯節祠에 官員을 파견하여 제사를 지내기로 했다.
준비의 마지막 단계는 행차가 출발한 이후 서울의 방어 상황에 대한 점검이었다.
8월 2일, 정조는 행차가 떠난 후
창덕궁의 敦化門과 金虎門, 창경궁의 通化門은 규정대로 개폐하되
창경궁의 弘化門은 즉시 닫으며,
서울에 남는 금위영은 露宿을 하되 날이 밝은 뒤에 結陣하고
날이 저문 뒤에 陣을 本營으로 옮기도록 했다.
또한 守宮大將은 藥房의 分提調가 겸하도록 결정했다.
2) 본 행사
1779년 정조의 능행은 창덕궁에서 남한산성, 이천, 여주를 거쳐
창덕궁으로 되돌아오는 7박 8일간의 일정이었다.
이하에서는 날짜별로 방문지와 현지에서의 행사를 정리한다.
8월 3일, 행차가 창덕궁을 출발했다. 정조는 출발하기 전에
훈련대장(홍국영)을 불러 행군 중의 군율을 엄격히 단속할 것을 명령했다.
이 날의 경로는 창덕궁 인정전→東關王廟→華陽亭→馬場→廣津(晝停所)→船艙所→
栗木亭(迎接所)→남한산성(남문)이었고, 정조의 복장은 戎服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율목정 영접소에서 수어사 이하 營將들을 만난 이후
남한산성에 입성할 때까지 황금 장식이 달린 갑옷과 투구를 썼다.
남한산성 正堂에서 정조는 수어사, 광주부윤(宋煥億), 수어청 교련관을 불러
남한산성과 광주부의 현황을 물었다.
8월 4일, 정조는 남한산성을 출발하여 이천행궁에 도착했다.
경로는 남한산성(동문)→慶安驛(晝停所)→雙嶺川→慶安橋→이천 西峴→이천 행궁이었고,
정조의 복장은 융복이었다.
이 날 정조는 국왕 행차를 보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백성들이 길가를 메운 것을 보고 놀랐으며, 이천 입구에서 儒賢(山林) 金亮行을 보았다.
이 날 정조는 민심을 파악하기 위해 현지에 파견했던 史官(金勉柱)를 만나 보고를 받았고,
행차로 인한 民弊가 크지 않음을 확인하고 안심했다.
8월 5일, 정조는 여주에 도착하여 두 영릉을 참배했는데,
경로는 이천 행궁→寧陵→英陵→여주 행궁이었다.
정조의 복장은 융복이었는데, 왕릉을 참배할 때는 翊善冠과 黲袍로 바꿔 입었다.
정조는 寧陵에서 왕릉과 비각, 정자각을 奉審한 후 酌獻禮와 辭陵禮를 올렸고,
英陵에서는 봉심과 사릉례만 거행했다. 국왕이 여주에 행차한 것은
100년 동안 계유년(1693, 숙종 19), 경술년(1730, 영조 6)을 이어 세 번째였다.
정조는 여주 행궁의 淸心樓에 앉아 효종과 송시열을 추모하고,
信砲를 쏘아 각 營의 旗를 점검했다.
8월 6일, 정조는 여주 행궁을 출발하여 이천 행궁까지 이동했다.
여주 행궁에서 정조는 儒賢인 호조참판 宋德相과 부사직 金亮行을 만났다.
이 때 김양행은 나이는 65세였는데, 정조는 자신과 함께 서울로 가자고 권했다.
정조는 대신들과 합석한 자리에서 사관(김면주)이 감찰한 내용을 보고하게 했고,
여주 행궁와 이천 행궁에서 백성들을 만나 민폐를 물은 다음
백성들에게 경제적 혜택을 내리는 諭書를 발표했다.
8월 7일, 정조는 이천 행궁을 출발하여 남한산성으로 이동했다.
경로는 慶安驛(晝停所)→攀川 小峴→남한산성(左翼門)이었고,
남한산성에 입성할 때 정조는 황금 장식이 달린 갑옷으로 갈아입었다.
이 날 정조는 남한산성에서 백성들을 만나 민폐를 물었고,
행군 중에 군율을 어긴 사람을 처벌했다.
그리고 수어사와 광주부윤을 만나 남한산성과 광주부의 현황을 상세히 물었다.
8월 8일, 정조는 남한산성 鍊兵館에서 別試를 보았다.
시험장에서 정조와 근신들은 모두 융복을 입고 唱榜禮를 거행했다.
같은 장소에서 정조는 僧軍들이 方陣, 圓陣을 이루는 것을 참관했고,
紅夷砲의 유제로 알려진 埋火의 발사 시험을 했다.
8월 9일, 정조는 남한산성 서장대에 올라 城操와 夜操를 참관했다.
이 날 정조는 황금 장식의 갑옷을 입고 훈련에 임했으며,
평상시 성벽을 잘 관리하고 군사 훈련을 거르지 않는 것이
유사시를 대비하기 위한 것임을 강조했다.
정조는 남한산성의 西城, 南城, 北城을 돌아보며 병자호란 당시를 회고했고,
正堂에서 백성들을 만나 債錢을 탕감하는 특별 조치를 내렸다.
밤이 되자 정조는 다시 서장대에 올라 야조를 참관했다.
남한산성의 城操는 15년 만에 거행되는 행사였다.
8월 10일, 정조는 남한산성을 출발하여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경로는 남한산성(남문)→廣津(晝停所)→船廠所→살곶이[箭串]→仁明園→興仁之門→돈화문이었고,
정조는 융복을 입었다가 인명원을 참배할 때 翼善冠에 黲袍로 갈아입었다.
아침에 정조는 남한산성 연병관에 가서 행차를 수행한 군사들에게 음식을 하사했고[犒饋],
살곶이 앞길에서 11세의 어린아이가 擊錚하는 것을 보았다.
원명원에 참배한 후 큰 길이 墓穴과 가깝다고
400년이나 뚫려있던 길을 막으려 한 좌의정(徐命善)을 나무랐고,
창덕궁에 도착한 후 계엄을 해제하여 진을 치고 있던 군대를 해산시켰다.
3) 행사 마무리
창덕궁에 도착한 직후, 정조는 능행 중에 허물이 기록된 사람들을
용서하는 은전을 시행하고, 동관왕묘와 남관왕묘에 將臣을 보내 제사를 올리게 했다.
이튿날 정조는 능행을 수행한 관리 및 군사들을 포상했는데 그 내역은 다음과 같다.
직함 및 직무 인명 시상 내역
內外各營都領宿衛, 訓練大將 洪國榮 鞍具馬 1匹
守禦使 徐命膺 熟馬 1필
守禦前營將, 廣州府尹 宋煥億 大虎皮 1令
晝夜試閱時 兵曹判書 鄭尙淳 半熟馬 1필
壇上執事 宣傳官 申應周외3인 兒馬 1필
訓練都監 御前待令敎鍊官 金鼎澤 加資, 邊將 임명
京畿監司 鄭昌聖 大虎皮 1令
兩陵地方官 前驪州牧使 朴師崙 熟馬 1필
駕前八把驛人 다수 本寺에서 시상
정조는 능행에 참여한 軍官들을 포상했는데, 남한산성에서
국왕의 질문에 응대를 잘한 山城敎鍊官 延德雨를 특별히 邊將에 임명하도록 했다.
정조는 능행이 진행되던 중에 행차를 수행한 군병들에게
別試射를 시행하여 발탁하라고 했는데, 능행이 끝난 뒤에는
武臣 가운데 직임이 있던 사람과 장교들도 별시사 응시자에 추가되었다.
정조는 능행 지역에 있던 왕실 가족과 공신에 墓所에 관리를 파견하여 제사를 올리게 했다.
여주에는 淑敬公主와 興平尉, 金昌集의 묘가 있었는데 지방관이 제사를 지내고,
광주에 있는 淑靜公主와 東平尉, 明安公主와 海昌尉의 묘에는 지방관이,
永昌大君, 明善公主, 明惠公主의 묘에는 내시가 제사를 올리게 했다.
정조는 또한 이 때의 행사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행차를 수행한 장군 및 군사의 이름과 숫자, 연로의 사실 등을 갖추어 기록한
陪從錄과 남한산성의 故事를 분류한 南漢山城誌를 작성해 올리라고 명령했다.
이를 담당한 관리는 수어사 서명응이었다.
정조의 능행은 기념 비석을 세우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8월 24일, 정조는 서명응을 만난 자리에서 이 일을 의논했다.
이번 남한산성에 행행할 때에 글을 남기려고 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詩文을 쓰는 것은 긴요하지 않은 일인 것 같다.
내 생각에는 산성의 동문과 남문 밖에 비석을 세우고
‘己亥駐蹕’이라고 적는 것이 무방할 것 같은데 경(서명응)의 생각은 어떤가?
서명응은 이에 동의했고,
남한산성의 東門과 南門 밖에 ‘己亥駐蹕’이란 御筆을 새긴 비석이 세워졌다.
《화성능행도(華城陵幸圖)》 8폭병풍 中 제4폭 洛南軒養老宴圖, 견본채색, 151.5x66.4cm, 국립중앙박물관
3. 능행 중의 조치
1) 老論 山林의 초빙
정조는 노론 山林 두 사람을 초빙하기 위해 노력했다.
宋德相(1710~1783)과 金亮行(1715∼1779)이 그 주인공인데,
송덕상은 회덕 출신으로 宋時烈의 玄孫이었고, 김양행은 여주 출신으로 金壽恒의 曾孫이었다.
그런데 송덕상은 정조 초년에 홍국영의 지원을 받아 조정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초빙 대상은 김양행이었다.
정조는 능행 준비가 진행되던 중에 송덕상을 불러 이번에 김양행을 만나기를 희망했다.
두 儒賢이 함께 陵所에 간다면 또한 훌륭한 일이다. 先正(송시열)의 시 중에
‘어느 곳에서 무릎을 꿇고 진달할지 모르겠네(不知何處跪陳辭)’라는 구절이 있는데,
올해 경(송덕상)이 능소에 참배하게 되었으니, 이 일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송덕상은 이 자리에서 寧陵 제향에서 사용할 祝文에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말 것을
건의했고, 정조는 이를 흔쾌히 수용했다. 효종의 對明義理를 고려해서였다.
효종대왕께서는 일찍이 ‘忍痛含寃’ 네 글자를 잊은 적이 없어,
저 나라를 항상 ‘오랑캐 나라[虜國]’라 칭하셨습니다.
그런데 本陵에 祭享할 때의 축문에 저 나라의 연호를 사용했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온당치 못한 것 같습니다. 年月과 干支만 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정조가 김양행을 처음 본 것은 8월 4일이었다.
행렬이 여주에 들어섰을 때 김양행이 동구 밖에 나와 국왕을 맞이했는데,
정조가 지나가면서 얼핏 그를 보았던 것이다.
이튿날, 정조는 김양행을 이조참의에 임명하고 불렀지만,
김양행은 해직된 다음에 나오겠다고 답했다.
정조는 김양행을 이조참의에서 해임한 다음에야 그를 만날 수 있었다.
8월 6일, 정조는 여주 행궁에서 김양행을 만났다.
오랜 기다림 끝에 김양행을 만난 정조는 그 기쁨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卿(김양행)을 한번 보려고 하는 나의 마음은
목마를 때 물 마시기를 생각하는 정도를 넘어서,
이전에도 정성을 들여 부른 것이 여러 번이었다. 그러나 나의 성의가 부족하여
경이 나를 멀리하는 마음을 돌리지 못했는데, 이제 여기에서 서로 만나게 되니
나의 기쁜 마음을 어찌 말로 형용하겠는가?
당초 이조참의에 제수한 것은 나에게 다른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경이 간절히 사양했기 때문에,
해임을 허락하여 경의 마음을 편히 하고 나오는 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다.
경(김양행)은 山林의 宿德이 있는 현자로 泰山北斗와 같은 명망이 있다.
내가 왕위를 계승한 뒤 맨 먼저 불러 隱士에 대한 聘禮를 부지런히 했지만 賢士의 수레를
돌리지 못했는데, 이는 나의 정성과 예우가 부족하여 감동시키지 못한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마음에 부끄러움만 절실했는데,
이제 능에 展謁하는 행차가 현자가 사는 마을을 지나게 되었으므로,
이로 인해 서로 만나기를 바랐다. 다행히 나를 멀리하지 않고 생각을 바꾸어 登對했으니,
바라고 기다리던 끝에 위로가 된다. 이제 서로 만났으므로 계속 자주 만날 수 있겠지만,
車駕가 돌아갈 때 함께 가는 것이 나의 소망이다.
정조는 김양행이 송덕상처럼 경연에서 자문해 줄 것을 요청했고,
김양행은 쇠약해진 몸을 치료한 후 上京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정조는 김양행과 송덕상에게 음식물과 땔감을 보내고, 御醫를 파견하거나
藥物을 보내는 등, 산림을 초빙하는 국왕으로서의 예를 갖추었다.
또한 정조는 김양행에게 召對에서 강의할 책자를 문의했고,
김양행은 송시열의 節酌通編을 추천했다.
9월 8일, 정조는 경연에서 김양행을 만났다.
정조는 경연관 김양행에게 정치와 학문하는 방도를 물었다.
驪江 가에서 잠시 보았지만 행사가 바쁘고 번잡하여 정치와 학문하는 방도를
자세히 물어보지 못해 지금까지도 마음에 한탄스럽다. 지금 다행히
차분하게 召對에 나와 목마른 듯했던 뜻에 부응해 주니, 실로 기쁜 마음 가득하다.
정조의 물음에 화답하여 김양행은 涵養의 공부에 힘쓸 것과
人心을 안정시킬 방안을 강구할 것을 건의했고, 정조는 이를 수용했다.
臣이 선포하신 綸音을 보면 정중하게 읽어보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만,
구구하고 어리석은 생각으로 볼 때, 명령하시는 사이에 혹 급작스럽게 하는 부분이
없지 않으십니다. 이는 涵養의 공부가 독실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亂逆의 변고가 매년 거듭 발생하여 大族들이 많이 상하고 人心이 안정되지 않고 있으니,
위에서 진정시켜 안도하게 할 방안을 좀 생각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날, 김양행은 元에 벼슬하여 義理를 저버린 許衡을 文廟에서 黜享할 것,
文廟의 祝辭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말 것, 사치 풍조를 경계할 것,
역적의 처벌을 마무리 할 것 등을 건의했다.
그러나 정조로서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사안이 많았다.
가령 허형을 문묘에서 출향하는 것은 송시열도 주장했었는데,
정조는 허형을 문묘에 배향한 것이 明나라이고 숙종 대에도 이 문제가 거론되었지만
그대로 두었던 점을 들어 거절했다.
우리나라가 한결같이 中華의 제도를 따랐는데,
許衡의 配享은 明나라 때부터 해 온 것이다.
지금 갑자기 출향하려는 것은 무슨 까닭이 없진 않겠지만,
이는 先正(송시열)이 미처 하지 못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許衡은 宋나라 때 진사가 되었다가 오랑캐 元에게 몸을 허락한데 지나지 않았으니,
그 처신을 잘못했다고는 할 수 있어도 節義를 잃었다고 배척하는 것은 지나치다.
만약 머리를 풀고 옷섶을 왼쪽으로 여미는 오랑캐의 습속을 따랐던 것을 허물로 삼는다면,
그 당시 온 천하에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므로,
이를 가지고 허형 만의 죄라고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肅廟 때 朴泰輔 등이 급한 일이 아니라 하여 실행에 옮기지 않은 것이다.
얼마 후 이조판서 송덕상과 공조참의 김양행은 사직을 했으며,
정조는 이들을 다시 초빙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김양행은 노론계의 정치적 입장을 반영한 상소를 올렸지만,
역시 정조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안이었다.
김양행은 그 해 11월에 사망했고, 정조와의 직접 대면은 두 번으로 끝났다.
2) 儒生과 武士의 선발
정조는 광주, 이천, 여주 지역에 거주하는 유생과 무사를 선발하는 別試를 실시했다.
국왕의 행차가 지나가는 지역에 거주하는 유생과 무사들의 士氣를 고양시키려는 조치였다.
문무과 별시는 8월 8일에 남한산성 연병관에서 진행되었다.
먼저 문과의 試官은 徐命善, 李徽之, 金華國, 洪國榮, 兪彦鎬, 李性源이 讀券官을 맡고,
林鼎遠, 洪樂彬, 尹行修, 柳孟陽, 朴祐源, 李度黙, 金宇鎭, 趙時偉, 沈樂銖, 李夔, 睦萬中이
對獨官을 담당했다. 이 날 시험장에 들어와 응시한 유생의 숫자는 800명을 넘었고,
이들이 바친 試券의 양은 수레로 5𨋀이었다.
시권을 채점한 결과 閔泰爀, 黃仁炫, 尹永儀 등 3人이 선발되었는데, 帳籍을 확인한 결과
윤영의는 廣州 유생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어 실격 처리하고 중벌을 내렸다.
무과는 初試와 本試로 구분되어 시행되었다.
무과 초시는 7월 17일 남한산성에서 수어사가 주관했는데, 응시 자격을 갖추려고
호적을 위조하는 폐단을 막기 위해 나중에 單子를 올린 사람은 제외시켰다.
무과 본시는 문과와 함께 8월 8일에 거행되었다.
이 날의 試官은 徐命膺, 鄭尙淳, 李柱國이 參考官을, 申應周, 尹行元, 吳毅尙이
參試官을 담당했고, 시험을 치른 결과 李尙淵 등 15인의 무사가 선발되었다.
무과 별시는 광주, 여주, 이천에 거주하는 무사를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능행에 참여한 장교와 병사들을 위해서는 別試射를 시행했다.
먼저 남한산성 훈련에 참가한 수어청 장교와 병사에게 觀武才 시험을 보였는데,
장교의 경우 柳葉箭에서 貫 1발, 帿箭에서 貫 1발을 1技로 하고,
병사는 鳥銃에서 貫 1발, 柳葉箭에서 貫 1발을 1技로 하도록 했다. 그 결과
유엽전 1巡에 邊 3발을 맞춘 守堞軍官 陳儀行과 金碩官에게 直赴殿試의 혜택을 주었다.
또한 별시사에서 떨어진 수어청의 장교와 병사들은
능행에 참여한 사람들이 응시하는 鍊戎臺 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능행에 참여한 장교와 병사들을 위해서는 湯春臺 별시사가 있었다. 정조는
이들이 밤낮을 통틀어 16일간이나 고생한 점을 위로하며 별시사를 거행하도록 했는데,
장교는 柳葉箭와 騎蒭를 각 1巡하고,
병사는 鳥銃 1巡을 쏘아 1발 이상을 명중하면 시상하게 했다.
또한 각 營門의 初試에서는 장교의 경우 유엽전과 기추 1순에 2발 이상,
병사는 조총 1순에 2발 이상을 맞춘 사람을 선발하게 했는데,
뒤에 ‘二中’을 ‘二分’으로 수정하여 1발 이상을 명중시키면 會試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정조는 탕춘대 별시사를 직접 참관하여 능행에서의 수고로움을 위로했다.
3) 民弊의 제거와 세금 경감
정조가 가장 많은 신경을 쓴 것을 民弊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국왕이 궁궐에 앉아 아무리 爲民정치를 펼쳐도 백성들에게 어떤 효과가 있는지 알지 못하다가,
능행을 통해 백성들의 삶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정조는 능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민폐를 제거할 것을 천명했다.
정조 : “이번 능행에 폐단을 제거하는 것이 과연 많겠는가?”
좌의정(서명선) : “外邑의 민폐는 거의 모두 제거될 것입니다.”
정조는 한강 양쪽에 몰려든 백성을 보았고, 민생을 안정시킬 방안을 걱정했다.
산에 가득한 백성과 온 들판에 펼쳐진 곡식은 매우 완상할 만하다.
다행히 농사가 풍년이 된 것은 실로 皇天이 백성을 돌보았기 때문이지,
不德한 내가 혹시라도 이것을 이루었겠는가? 새해에도 거듭 풍년이 들기를 간절히 바란다.
구경하는 백성들은 담장을 두른 것 같아 億萬으로도 헤아릴 수 없으니,
노인을 부축하거나 어린아이를 데리고 길을 메우고 막아 가득 찼다.
내가 오늘 이곳에 와서 이 백성들을 대하니,
한결같이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한사람이라도 자기 자리를 얻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할
방도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믿는 것은 경들이 협력하여 보좌하는 功에 있다.
능행 첫날, 정조는 고위 관리들(영의정, 좌의정, 수어사)에게 백성들의 어려움을 말하게 했다.
국왕의 행차를 ‘行幸’이라 하는 것은 본래 백성들에게 은택이 있기 때문인데,
이 말의 본뜻을 실천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車駕가 행차하는 것을 ‘行幸’이라 하는 것은
백성이 거가의 행차를 다행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거가가 이르는 곳에는
반드시 백성에게 은택이 미치므로, 백성들이 모두 이것을 다행으로 여겨서 그런 것이다.
이제 나의 거가가 이곳에 이르렀으니, 저 백성들이 어찌 바라는 마음이 없겠는가.
옛사람이 말하길 ‘행행의 의의를 실천한 다음에야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다’고 했으니,
경들은 백성을 편하게 하고 폐단을 바로잡을 방책을 생각해 각자 앞에서 진달하라.
정조는 관리들로부터 흡족한 답을 듣지 못했고,
경기감사(정창성)에게 民弊를 조사했다가 환궁할 때 보고하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다음날의 사정은 달랐다. 정조는 민심을 파악하기 위해
미리 암행어사로 파견해 두었던 史官(金勉柱)을 만났기 때문이다.
이번 車駕로 행행할 때 列邑에서 물자를 제공하고 백성들이 공역에 동원되는 과정에
필시 폐단이 많았을 것이지만, 九重宮闕이 깊어 알 길이 없다.
특별이 그대를 보내어 찾아 묻게 한 것은 이 때문이다.
暗行할 때 연도에서 듣고 본 것이 과연 어떠한가?
탐욕스런 관리와 교활한 아전이 권세에 의지하여 마구 침해하는 폐단이 없으며,
오막살이에 사는 백성들이 견디기 어려운 근심을 면할 수 있던가? 낱낱이 진달하라.
사관은 자신이 탐문했던 것을 보고했다. 양주목사(엄숙)는 刑杖을 지나치게 쓰고
이번 행차에 진배할 물건을 백성에게 강제로 징수한 뒤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는 것에서 시작하여, 양근현감(김재화), 과천현감(이의화),
여주목사(박사륜)의 비리가 보고되었다. 다만 음죽현감(이보첨)은 봄에 진휼할 때
굶주린 백성들에게 衙祿을 나눠주고, 부역이 편중되는 폐단을 제거했으며,
행차에 사용된 물건의 비용도 관에서 부담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사관의 보고는 대신들이 합석한 자리에서 다시 한번 있었고,
음죽현감은 熟馬 1필을 상으로 받은 반면에 비리가 알려진 지방관들은 파직되었다.
정조는 관리들에게 民弊를 물었지만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제 정조는 백성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으려 했으며,
여주, 이천, 남한산성에서 백성들을 직접 만났다.
(여주 행궁에서) 너희들은 나의 어린 자식이고, 나는 너희들의 부모이다.
자식에게 고생스럽고 원망스런 일이 있는데 부모된 자가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하여
구제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찌 마음이 편할 수 있겠는가?
내가 여기에 와서 너희들을 만나 보았으므로, 너희들을 근심스럽게 하는 숨은 폐단이나
고질적 폐해가 있다면, 어렵게 여기지 말고 나에게 자세하게 진달하여라.
(이천 행궁에서) 나 과인이 너희들의 부모가 되어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한결같이 생각하는 것은, 항상 사랑하고 기르는 도리를 다하지 못해
버려져 수척해지는 근심이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늘 마음속에 염려되어 비단옷을 입고 맛난 음식을 먹어도 편안하지가 않다.
이제 輦이 지나는 곳에 너희들이 늙은이를 부축하거나 어린아이를 데리고
길가에 모여든 것을 보니, 갓난아이가 자애로운 어머니에게 나아가는 것과 같다.
따라서 내 마음에 부족하고 부끄러움을 더욱 감당하지 못하겠다.
이번에 특별히 너희들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한 것은
고질적인 폐단을 물으려 하는 것이니, 너희들은 모두 진달하여라.
(남한산성 연병관에서) 남한산성 백성에 있어서는
그 노고가 다른 읍에 비해 더욱 심하니 가엾고 불쌍하다.
너희들의 근심과 고생의 단서가 되는 고질적인 폐단이 있으면,
반드시 앞에서 다 아뢰어 빠뜨리는 것이 없게 하라.
내가 廟堂의 신하와 수령으로 하여금 바로잡고 개혁할 방도를 강구하여
진휼하는 정사를 시행할 것이니, 너희들은 그리 알아라.
국왕의 말을 들은 백성들은 몹시 감격하면서도 직접 폐해를 말하지는 않았다.
경기감사와 지방수령이 함께 한 자리라 그들의 잘못을 말하기 어려운 점도 있었다.
그러나 정조는 백성들을 직접 만나 자기 뜻을 전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으리라 짐작된다.
정조는 자신이 방문한 3개 읍의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은 혜택을 주었다.
1) 3개 읍 사람들에게 과거를 실시함
2) 3개 읍 백성들에게 금년 가을 세금을 면제함. 儲置米를 會減하고 가을 大同米를 덜어줌
3) 3개 읍의 士庶人으로 70세 이상인 사람에게 음식과 고기를 하사함
4) 3개 읍의 士庶人으로 80세 이상이고 行幸을 2번 경험한 사람에게는 한 資級을 더해줌
5) 卿宰를 역임했고 70세 이상인 사람에게 음식물을 하사함
정조의 다그침이 계속되면서 민폐를 보고하는 관리도 나타났다.
경기감사와 이천현감(이단회)은 原田을 續田을 포함시켰다가
災荒이 든 해에 조세를 면제해 달라는 것과 이천 백성들이 광주의 移轉米를 빌렸다가
납부하는 장소를 남한산성 대신 이천으로 해 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물론 정조는 이 요청을 수락했고, 은혜를 공평히 한다는 차원에서
여주 지역의 이전미도 남한산성 대신 이천에 납부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정조는 남한산성의 백성을 위해 별도의 조치를 했다. 保恤錢의 債錢을
전부 탕감해 주었는데, 이는 경상비용의 축소를 감수해야 하는 특별한 조치였다.
정조는 남한산성의 父老들을 불러 탕감 조치를 직접 통보하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20년간 쌓인 債錢文券을 쌓아놓고 불살라 버렸다.
이 광경을 지켜본 백성들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정조는 능행길에 上言과 擊錚도 받아들였다. 정조는 국왕이 행차할 때
衛外에서 격쟁을 하는 것을 허용하고 상언과 격쟁에 民隱을 올리게 했는데,
1779년의 행차에서 이를 시행했다. 정조는 여주 寧陵을 참배한 이후
왕릉 입구에서 서울의 흥인문에 이르기까지 상언을 받아들이라고 명령했고,
이후 상언과 격쟁이 접수되었다. 격쟁 중에 특이한 경우도 있었다.
행렬이 살곶이 앞길에 이르렀을 때 어린 아이가 격쟁을 하며 원통함을 호소하자,
정조는 행렬을 멈추고 그의 호소를 들었다.
제 나이는 11세이고, 제 아비 金宗孝가 지극히 원통한 일로 유배를 당한지 오래되었는데
아직도 풀려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실정을 드러낼 수 없어 원통함이
뼛속에 사무치기에, 외람됨과 두려움을 잊고 만번 죽을 각오를 하고 격쟁했습니다.
이는 돈을 사사로이 주조했다는 죄명으로 위원군에 유배되어 있던
김종효를 풀어달라는 호소였다. 정조는 그 자리에서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너의 행동을 보고 네 사정을 들으니 불쌍하고 가엾다.
이는 조정에서 마땅히 처분할 것이므로 너는 물러가 기다리도록 하여라.
능행에서 돌아온 후 정조는 행차 중에 받은 上言을
담당 관서에서 기한 안에 모두 처리하게 했다. 그러나 상언과 격쟁에서 받은
供招의 숫자가 너무 적은 것을 이상하게 여긴 정조가 승정원에 그 까닭을 묻는 것으로 보아,
상언과 격쟁이 활성화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화성능행도(華城陵幸圖)》 8폭병풍 中 제6폭 得中亭御射圖, 견본채색, 151.5x66.4cm, 국립중앙박물관
4. 능행의 의의
1) 국왕의 통치력 과시
1779년의 능행에서 정조는 자신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음을 과시하고자 했다.
먼저, 정조는 자신이 선왕으로부터 이어진 정통성이 있음을 보이고자 했다.
행차가 출발하려 할 때 정조는 군대를 동원할 때 사용하는 信箭을 내주며,
자신의 信箭이 명에서 조선으로, 영조에서 자신으로 이어진 것임을 강조했다.
이 信箭은 예전의 이른바 彤弓(붉은 색의 활)과 彤示(붉은 색의 화살)이다.
우리나라는 일찍이 皇朝에서 九章의 복식과 九錫의 은전을 받았는데,
이 신전도 하사받은 것이다.
내가 政務를 보던 초기에 선대왕(영조)께서 이것을 나에게 내려주셨는데,
이것은 궁중에 전해오던 물건이다. 옛적부터 매양 군사가 움직일 때가 되면
반드시 車駕 앞에 이 신전을 세웠는데, 오직 정벌의 뜻이다.
정조는 효종과 세종의 왕릉을 참배하고 나서,
세종, 효종, 숙종, 영조의 사업을 繼述할 책무가 자신에게 있음을 강조했다.
英廟(세종)와 孝廟(효종)의 盛德과 大業을 어찌 감히 형용하여 말할 수 있으랴마는,
오늘에 있어 繼述하는 방안은 바로 왕위를 계승한 나 小子의 책임이다.
내가 오늘 두 능을 전배하고 추모하는 가운데, 조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이 더욱 절실했다.
우리 肅祖와 英考께서 孝廟의 포부를 추모하고
중국(明)의 멸망을 통탄하여 繼述하는 도리를 극진히 하지 않음이 없으셨으니,
이는 왕위를 계승한 내가 법도로 삼을 만하다.
부덕한 내가 만에 하나라도 聖祖의 聖德과 방불하기를 바라겠는가마는, 구구하게 스스로
힘쓰는 마음만은 선조의 뜻을 이어 계술하고 훌륭한 뜻을 실추시키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데 계술을 잘 하는 방법은 참된 마음으로 政事를 행하여 실제 효과를 얻는데 달려 있다.
숙종대왕께서 일찍이 하교하시기를
‘진실로 백성에게 이롭다면 살갗인들 아끼겠는가’라 하셨고,
선대왕(영조)께서 늘 이 하교를 絲綸에서 일컬었는데,
나 小子가 곁에서 듣고 지금까지 마음속에 엄숙히 새기고 있다.
내가 왕위를 계승한 이후 늘 두 聖朝의 덕을 생각하여 우러러 체득할 방도를 생각했는데,
백성에게 편리하고 이로운 일이라면 어찌 살갗을 아끼지 않을 뿐이겠는가?
약간의 國用이 축소되는 것이야 어찌 돌아보겠는가?
이외에도 정조는 능행을 하는 동안 선왕 때의 관례를 실천함으로써,
선대에서 이어지는 정통성을 중시했다.
왕위의 계승성을 중시한 정조는 軍令을 확립함으로써 국왕의 권위를 높이고자 했다.
능행을 출발하기 직전, 정조는 병조판서(정상순)와 훈련대장(홍국영)을 불러
능행 중에 군령을 엄격하게 할 것을 당부했다.
이번 行幸은 길이 매우 멀어 가까운 능에 動駕하는 것에 견줄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文治를 숭상하고 武備를 닦지 않아,
사람들은 병사 일에 익숙하지 않고 병사는 조련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行軍할 때마다
비록 1舍(30里)의 거리라도 달리면 다들 숨이 차서 진정하지 못하는데,
장수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군병들도 예사로 여긴다.
하물며 훈련대장은 三軍의 司命이고, 元戎(병조판서)은 국가의 重任임에랴.
예전 唐나라 玄宗의 開元 초기에 驪山에서 講武할 때 군법이 威儀를 잃자
병부상서 郭元振을 처벌한 것을 史家들은 지금까지도 일컫는다.
이 하교는 군대에 誓戒하는 것과 같으므로 훈련대장은 힘쓰라. 車駕를 扈從하는 일과
衛內를 돌며 경계를 서는 것은 本兵의 임무이므로 병조판서도 힘쓰라.
정조의 다짐은 현장에서도 확인되었다.
정조는 가랑비가 내리는데 雨傘을 대령하지 않은 京畿都事,
행군할 때 제대로 이동하지 않은 啓螺・招搖旗의 次知宣傳官을 문책했고,
한강을 건널 때 放砲를 잘못한 책임을 물어 어영대장(李敬懋)을 삭직시켰다.
또한 英陵을 참배할 때 作門을 信地에 설치하라고 명령했는데,
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훈련도감의 中軍을 문책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이천에서 남한산성으로 향하는 도중,
왕명을 받아 信箭을 가지고 간 宣傳官이 中營(홍국영)에서 차단당하고,
말을 갈아타려는 선전관을 具敏和의 종이 밀어서 신전을 부러뜨린 사건이었다.
더구나 왕명을 받은 선전관은 中營에서 차단당했는데,
중영의 교련관은 武藝別監이 파수하는 衛內를 무단으로 지나가자, 정조는 무엄함을 느꼈다.
이에 정조는 중영의 지휘 책임자인 홍국영을 문책하고,
신전을 부러뜨린 구민하의 종은 棍杖 15대를 치고 구민화를 김제군으로 유배시켰다.
정조는 각종 典故 및 지리에 해박한 지식을 보임으로써
정국을 실질적으로 운영할 능력을 있음을 보여주었다.
정조는 1768년(영조 44)에 영조를 수행하여 獻陵에 간적이 있었는데,
그 때 廣津를 건넌 경험이 이번 능행에 도움이 되었다.
정조는 여주의 邑誌를 통해 여주부의 연혁을 파악하고,
『東國與地勝覽』을 통해 신륵사의 甓浮圖를 알았다.
또한 정조는 영릉을 참배한 날 여주 淸心樓에 숙박할 것을 결정했는데,
이는 承政院日記을 통해 1688년(숙종 14)과 1730년(영조 6)의 여주 능행을
검토한 이후 내린 결정이었다. 정조는 여주에서 숙박하지 않고 이천까지 갔더라면,
한밤중에 백성들이 횃불을 들고 50여리의 길을 밝혀야 했을 것이라 했다.
지방 지리에 대한 정조의 관심은 능행 이후로도 이어졌다.
정조는 서명응에게 『南漢山城誌』의 편찬을 명하는 자리에서 安鼎福이 작성한 『廣州誌』가
상세하다는 소식을 듣자, 이 책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정조는 자신이 이르는 곳마다 해당 지역의 역사와 지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보여,
응대하는 신료들이 긴장할 정도였다.
2) 對明義理論의 확인과 老論 우대
정조의 능행은 병자호란 때 청에 항복했던 남한산성을 방문하고 120주기를 맞은
효종의 영릉을 방문하는 행사였다. 따라서 정조는 효종과 송시열을 추모하고
조선의 대명의리론을 재확인하는 기회로 활용했다.
1779년 정초, 정조는 宋德相의 건의를 받아들여
도성 안의 宣武祠와 남한산성의 顯節祠, 강화도의 忠烈祠에 관원을 보내 제사를 올렸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원한 명나라 병사, 청에 항거하다 죽임을 당한 三學士,
병자호란 때 순사한 金尙容을 모신 사당으로 조선의 대명의리론을 상징하는 제사 공간이었다.
정조는 능행 중에도 현절사에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내기로 했는데,
이는 삼학사들의 忠節을 장려하기 위해서였다.
남한산성에 도착한 날, 정조는 조선의 대명의리론을 거론하며 효종과 송시열을 떠올렸다.
병자년(1636) 당시의 일을 생각하면 君臣 모두가
어찌 이처럼 태연하게 지내며 치욕을 씻을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日暮途遠)’고 한 것은 聖祖(효종)께서 조정에서 탄식하신 것이고,
‘關門을 닫아버리고 조약을 거절하는 것(閉關絶約)’은
先正(송시열)이 상소에서 여러 차례 진달한 말이다.
우리나라는 작은 鰈域인데도 禮義의 방도를 대강 알았기 때문에 세상에서
‘中華’라고 일컬었다. 그러나 지금은 人心이 점차 안일함에 젖어들고 大義는 갈수록
자취를 감추어, 북으로 가는 폐백(朝貢)을 예사로 여기고 수치스러워 하지도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漢官의 威儀를 다시 볼 수 없고, 神州(중국)의 더러운 오랑캐를 다시 제거할 수도 없다.
다만 北苑의 작은 단(大報壇)에 예물을 바치는 정성을 붙임에,
大明의 日月이 한 구역의 나라(조선)를 비출 뿐이니 후세에 할 말이 있을 것이다.
하물며 이 해를 만나 孝廟께서 이루지 못한 뜻을 우러러 생각함에
강개하고 격앙한 심정을 이기지 못하겠다.
정조는 조선이 北伐을 통해 청을 몰아낼 능력을 가지지 못한 상황에서
大報壇 祭享을 통해 대명의리론을 유지함을 피력하고,
청에 조공을 바치는 것을 당연시하는 당대의 풍조를 비판했다. 또한 정조는
여주 행궁의 청심루에 올라 송시열을 추모했다. 청심루의 편액은 바로 송시열의 글씨였다.
오늘 두 능을 전배하니 내 마음 실로 슬픔을 견디지 못하겠다.
지금 이곳에서 강 건너 서쪽을 바라보니, 仙寢의 松柏이 무성하게 바라보인다.
내가 宋先正(송시열)의 詩 가운데 ‘한참 앉았으매 달이 지자 능의 잣나무 어두워지니,
어느 곳에 무릎 꿇고 진달할지 모르겠네(坐久月沈陵柏暗 不知何處跪陳辭)라는
구절을 욀 때마다, 탄식하며 슬퍼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효종과 송시열의 知遇, 그들의 대명의리론을 떠올린 정조는
송시열을 현창하는 사업을 허락했다. 여주에는 효종의 영릉이 있고
송시열이 만년에 소요했던 곳이므로 이곳에 송시열의 祠宇를 건립하도록 한 것이다.
정조가 사우의 건설을 허락한 것은 국왕이 된 이후 최초의 일이었다.
또한 정조는 병자호란 이후 斥和하고 死節한 사람의 자손으로
여주에 거주하던 副司直 洪秉纘, 司果 洪秉殷 등 9명을 만나보기도 했다.
여주와 대명의리론을 연결시키는 상징적 만남이었다.
정조가 송시열을 현창한 것은 국왕이 되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1774년(영조 50)에 세손 정조가 편찬한 『兩賢傳心錄』이 그것인데,
정조는 서문에서 유학의 정통이 공자→주자→송시열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천도에 순환하는 이치가 있어 국가의 운세가 크게 밝아지는 시기에 이르렀다.
우리 조선에 尤庵 宋선생이 나타나자 인륜이 밝아지고 천리가 확고히 섰으니,
그가 지킨 것은 주자의 大義이고, 그가 가르친 것은 주자의 大道이다.
주자가 떠나간 후 다시 주자가 태어난 셈이니,
훤히 빛나는 저 물속의 달도 바로 하늘에 떠있는 달과 동일한 빛인 것이다.
정조는 국왕이 된 이후에도 송시열에 대한 평가를 높여 나갔다.
1776년(정조 즉위년) 5월에 정조는 송시열을 효종의 공신으로 종묘에 배향했고,
10월에는 승지 金鍾秀를 화양동에 파견하여 萬東廟에 어필 현판을 걸게 했다.
1779년 능행이 끝난 후에는 송시열의 墓碑銘을 짓고 大字 어필을 썼으며,
1785년에 여주에 서원을 세우고 ‘大老祠’란 賜額을 내렸다.
1787년(정조 11) 9월, 정조는 평양감영에서 『宋子大全』을 간행하게 했고,
10월에는 大老祠 廟庭碑文을 짓고 ‘大老祠碑’의 大字와 본문을 어필로 써서 내렸다.
1787년 11월 12일, 정조는 대로사에 香祝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는데,
이 날은 송시열이 탄생한지 3周甲이 되는 날이었다.
대명의리론을 강조하고 송시열을 현창하는 정조의 조치는 노론 산림의 초빙으로 이어졌다.
앞서 보았듯이 정조는 노론 산림인 송덕상과 김양행을 초빙하기 위해 禮를 갖추었고,
자신의 정국 운영에 대한 자문을 들으려 했다.
그러나 정조의 노론 산림의 대한 우대는 형식적인 측면이 많았는데,
이는 산림들의 건의에 대한 대응 조치를 보면 잘 나타난다.
다음은 송덕상과 김양행이 정조에게 건의한 내용과 정조의 조치를 정리한 것이다.
1. 寧陵에 祭享할 때 祝文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말 것(송덕상)→수용
2. 文廟의 祝文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말 것(송덕상, 김양행)→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거절
3. 과거제도와 토지제도에 대한 건의(송덕상)→廟堂에 의논하게 했으나 대책 없음
4. 臨漳書院에 송시열 배향, 安東 鶴駕山에 金尙憲의 서원 세울 것 건의(송덕상)
→여주의 송시열과 다르다는 취지에서 거절
5. 宋의 유민으로 元에 벼슬한 許衡을 文廟 配享에서 黜享할 것(송덕상, 김양행)
→영조대의 정책을 내세워 거절
6. 洪樂任을 비롯한 역적의 懲討를 마무리할 것(김양행)→慈宮을 거론하며 완곡한 거절
7. 朴世采를 문묘 종사에서 내칠 것(김양행)→영조의 禁典을 들어 거절
8. 南九萬, 尹趾完, 崔錫鼎을 肅宗 공신에서 黜享할 것(김양행)→영조의 敎示를 들어 거절
이를 보면 노론 산림들은 대명의리론을 실천하고 노론계의 명분을 강조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그중에서 許衡의 黜享과 박세채 건은 송시열이 추진한 적이 있었고,
文廟의 축문에 관한 건은 金壽興이 요청했다는 명분도 있는 사안이었는데,
정조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조가 송시열을 현창하고 노론 산림을 초빙한 것은 집권 기반이 취약했던 초기 정국에서
가장 유력한 정치세력이던 노론계를 위무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강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정조의 이러한 의도는 훗날 나타나는데, 노론계의 명분을 견지하면서도
홍국영의 권세를 무시했던 김양행이 사망했을 때는 산림의 禮葬을 거행하게 했으나,
홍국영의 권세에 합류하여 왕권에 도전했던 송덕상에 대해서는 강한 비판을 했다.
‘선비를 숭상하고 도를 중하게 여기는[崇儒重道]’ 네 글자는
우리 조정의 법으로 列聖들이 서로 계승하여 교화와 정치가 아름답고 밝았다. (중략)
그런데 송덕상은 先正(송시열)의 후손으로 선비라는 이름을 훔쳤기 때문에
朱色과 紫色을 분간하지 못했고, 잘못 그를 불렀다가
필경에는 여지없이 낭패를 당하고 말았으니, 통탄을 금할 수 있겠는가?
당초 그를 부른 의도는 그가 어진 이의 후손이었기 때문인데,
속이고 훔친 사실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조금이나마 도움이 있을까 기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조정에 나온 뒤에 비루하고 어긋난 양상이 하나도 남김없이 나왔으니
말하기에도 부끄럽다. 세력과 이익만 쫓아가고 권력있는 간사한 사람들과 체결하여,
안팎으로 내통하여 스스로 큰 죄에 빠지고 말았다.
그가 이처럼 빌붙고 돼지처럼 머뭇거리자, 사방에서 침을 뱉고 욕을 했다.
자신을 아꼈던 人士도 그와 함께 벼슬하기를 부끄러워했으니,
고 참판 金亮行이 결연히 물러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아! 누가 선비를 숭상하는 일이 도리어 도를 해치고 말 줄을 알았겠는가?
이상은 정조의 발언인데,
그는 국왕은 산림을 예우하고, 산림은 국왕에게 나와 원론적 건의를 함으로써
君臣이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물러나기를 희망했음을 알 수 있다.
3) 남한산성의 육성
남한산성을 수축하자는 논의는 임진왜란이 마무리된 직후부터 시작되었는데,
宣祖는 廣州가 경기도의 巨鎭이고 南道를 왕래하는 요충지이므로,
수원의 독산산성처럼 남한산성을 쌓고 군대가 지키게 하면
서울을 보호하고 여러 陣들을 조절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일찍이 남한산성의 형세가 우리나라의 으뜸이라고 들었다.
廣州는 畿甸의 巨鎭으로 남도를 왕래하는데 있어 요충이 되는 곳이다.
만약 이곳에 산성을 수축한 다음 禿城처럼 군사를 조련하고 수령을 골라 지키게 한다면,
안으로는 京都의 保障이 되고, 밖으로는 諸陣을 控制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선조는 산성을 쌓을 곳의 지형도를 그려오게 했지만, 산성을 수축하지는 못했다.
남한산성이 수축된 것은 인조 대였다.
1624년(인조 2) 李曙의 지휘 아래 실제 공사는 승려 覺性이 八道都摠攝이 되어 진행했고,
1626년에 축성 공사를 마무리했다. 그러나 얼마 후 병자호란이 일어났고,
인조가 이곳에서 抗戰하다가 청에 항복하면서 남한산성은 대명의리론의 상징물이 되었다.
숙종대 이후 남한산성은 수리가 계속되었는데, 이곳은 도성의 남방 방어거점이었기 때문이다.
1779년 능행에서 정조는 7박 8일 가운데 4박 5일을 남한산성에서 보냈다.
영릉을 참배하기 위해 이동한 시간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간을 남한산성에서 보냈던 것이다
정조가 남한산성에 행차한 목적은 수도를 방어하는 산성의 관리 상태를 확인하고
군사 조련을 참관하여 환난에 대비하려는 것이었다.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이 우리 조정에 있어 긴요하고 중대한 것은
漢나라 三輔와 唐나라 兩衛와 같을 뿐만이 아니다.
태평한 날이 오래되어 軍務가 폐기되고 해이해져, 병사는 환난을 대비하기에 부족하고
성곽은 보루가 되기에 부족하다. 생각에 여기에 미치자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이 때문에 내가 왕릉을 전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여러 날의 수고로움을 피하지 않고,
반드시 조련하는 것을 직접 보려고 한 것이다. 이는 편안하고 즐거운데 길들여진
將卒들에게 떨치고 일어나는 부지런한 뜻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남한산성은 정조가 방문하기 직전에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하였다.
이는 수어사의 지휘 하에 1779년 3월부터 6월까지 진행되었는데,
정조는 남한산성이 수도의 保障處임을 강조하며 보수 공사의 유공자를 포상했다.
또한 남한산성의 서리들이 4천石이나 되는 곡식을 逋欠했을 때도
그 부담이 백성들에게 돌아가지 않게 하여 수도를 보위하는 백성들을 보호하라고 명령했다.
남한산성이 도성의 외곽 방어기지임을 거듭 확인한 것이다.
정조는 보수 공사가 끝난 남한산성에 행차하여 산성 곳곳을 둘러보며 현장을 확인했다.
이 때 정조는 사전 학습을 통해 남한산성 및 인근 지역의 연혁,
병자호란 당시의 戰況을 상세하게 파악하였는데, 이를 현장에서 확인하며 산성을 돌았다.
다음은 정조가 남한산성에 머무는 동안
남한산성, 수어청, 광주부에 관해 언급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여기에는 신료들의 답변도 함께 정리했다.
1. 南漢山城
○ 南門 : 편액은 서명응 글씨.
병자호란 때 金瑬 등이 江都(강화도)로 옮길 것을 요청하여
聖祖(인조)가 밤에 南門을 나갔는데, 빙판 길에 길까지 험하여 말을 버리고
걷는 지경이 되자 어가를 돌려 성으로 돌아왔음.
당시 남문은 具宏이 지켰는데 싸워서 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적이 많았음.
성 아래 골짜기에서는 鐵丸 箭鏃이 나오고 있음
○ 北門 : 병자호란 때 청나라 병사가 특히 많이 모여있던 곳.
金鎏가 성안에서 싸움을 독려하다가 적에게 속아 경솔하게 御營軍 300인을 이끌고 출병했다가
全軍이 패망하는 지경에 이름. 북문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은 하나도 없었음.
성 아래 산골짜기에서 전쟁에서 죽은 사람을 致祭함.
북문 밖 큰 길의 왼편은 金陽洞, 오른편은 馬跟洞이라 함.
○ 行宮 正堂 :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행차했을 때
汗軍이 漢峯에서 대포를 쏘아 기둥을 맞춘 건물인가를 물음.
○ 廣州府尹의 거처 : 여름에는 행궁 正堂에 거처하고 겨울에는 鍊兵館 안채로 옮겨 거처함
○ 溫祚王廟 : 西門 안에 위치. 병조호란 때 인조의 꿈에 溫祚王이 나타나
적병이 성에 오른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깨어나 정탐하게 하여 적을 물리침.
인조는 還都 후 溫祚廟를 세워 봄 가을로 제사를 지내게 함
○ 顯節祠 : 東門 안에 위치. 병자호란 때 斥和臣인
金尙憲, 鄭蘊, 洪翼漢, 尹集, 吳達濟의 신위를 모심
○ 地水堂 : 사면에 池水가 있어 諸軍이 해갈할 수 있음.
1672년(현종 13)에 李世華가 건립. 『周易』 師卦의 “땅속의 물은 병사가 많다는 것이다.
노성한 사람이어야 길하다(地水師 大人吉之)”에서 뜻을 취한 것임
○ 人和館 : 客舍로 사용함. 목사 柳琳이 처음 지었고, 이름은 목사 李泰淵이 지어 건 것
○ 西將臺 : 병자호란 때 賊兵이 밤에 널빤지를 지고 성에 오르는 것을 보고
아군이 끓인 물을 부어 물리친 곳임
○ 南漢山城 : 성 안의 둘레가 6,297보, 성 밖의 둘레가 7,295보.
1624년(인조 2) 완풍부원군 李曙가 성을 쌓기 시작하여 1626년까지 쌓음.
영조 때 수어사 閔應洙가 성을 중수하면서 벽돌을 철거하고 기와를 덮었으며,
趙觀彬이 후임이 되어 성 쌓는 일을 마침.
이번에 서명응이 수리하면서 기와를 철거하고 벽돌을 덮음
○ 汗峯城 : 1693년(숙종 19) 수어사 吳時福이 성을 쌓기 시작했는데,
1705년(숙종 31) 수어사 閔鎭厚가 훼철했다가, 1739년(영조 15) 趙顯命이 개축함.
병자호란 때 청나라 사람이 봉우리에 올라 대포를 쏘았던 곳임.
병자호란 이전에 漢峯이라는 명칭이 있었음
○ 梨峴山 : 병자호란 때 金藎國, 鄭蘊 등이 400명의 군사로 이곳을 점거하여
三南과 연락하기를 청했지만 體察府에서 들어주지 않음. 적이 이곳을 점거하여
삼남과의 소식이 끊어짐. 산성에서 14里가 되며, 三南의 여러 길과 통함
○ 南格臺 : 이번에 수축함. 남한산성의 주봉이고 요해가 되는 곳. 남한산성과 상응하여
적을 견제하는 형세가 되며, 이곳에 오르면 남한산성 안의 형편을 굽어볼 수 있음.
閔鎭厚가 성을 쌓을 것을 건의했지만 중간에 폐기되었고,
1725년(영조 28)에 유수 李箕鎭이 筵席에서 건의하여 두 墩臺를 쌓음.
병자호란 때 일부 軍兵으로 이곳을 막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적이 이곳을
점거한 뒤 성안과 성밖의 소식이 단절됨. 溫祚王의 성터가 봉우리 위에 남아 있음
○ 黔丹山 : 성에서 15리가 됨. 병자호란 때 原州營將 權正吉에 勤王兵을 이끌고
여기에 이르렀으나 적에게 막혀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봉화를 올려 서로 응함.
성안 사람들이 바라보고 구원병이 있는 줄 알고 뛸 듯이 기뻐함
○ 天柱寺 : 天柱峯 아래 숲 사이에 드러남
○ 國淸寺 : 서문 안에 있음. 1624년(인조 2) 覺性이 성을 쌓을 때 맨 먼저
두 절을 지어 國淸寺, 漢興寺라 함. 사람들이 그 뜻을 알지 못하다가 병자호란 이후에
漢이 汗과 음이 같고, 金國이 이 해에 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것을 깨달음
○ 枕戈亭 : 옛 軍器所 자리. 편액은 유수 이기진의 글씨.
1624년(인조 2) 完豊府院君 李曙가 성을 쌓을 때 이 정자를 찾아냈지만
연대를 알 수 없는데, 邑誌에는 溫祚王이 세운 것이라 기록함.
명의 副摠管 程龍이 벽에 난초 몇 떨기와 용을 그렸는데, 비가 내리려고 하면
그 사이에서 항상 구름이 나오고, 비가 내리기를 빌면 응험이 있었다고 함.
병자호란 때 청의 砲丸이 행궁으로 날아들자 인조가 이 정자로 옮김.
1688년(숙종 14)에 숙종이 행행했을 때에도 이곳에 들림
2. 守禦廳
○ 五營 : 左營 右營에는 別將을 두고 京營의 장관이 맡음,
前營은 廣州, 後營은 竹山, 中營은 楊州가 담당함
○ 軍摠 : 총 군총은 15,714명, 본영의 군총은 2,814명
○ 조련 장소 : 조련할 때 左營은 東將臺, 右營은 西將臺, 前營은 南將臺, 中營은 北將臺,
後營은 東將臺에 진을 쳐 성을 엄중히 경비함. 中將臺가 없는 것은 지형 때문임
○ 조련 방법 : 본영의 조련은 해마다 五營이 한 차례씩 輪操하고
3년에 한번 五營이 合操를 함. 私操와 正操의 법은 1일째에 모이면, 2일째에 私操,
3일째에 正操, 4일째에 晝操와 夜操, 5일째에 음식을 베풀어 위로하고 활쏘기와 총쏘기 시험,
6일째에 훈련을 마치고 군병을 되돌려 보냄
○ 僧軍 : 1624년(인조 2) 남한산성을 쌓을 대부터 설치함, 당시 異僧 覺性을 팔도도총섭을
삼아 성을 쌓게 했다가 僧軍을 불러 모아 軍伍를 만들고 각 사찰에 나누어 살게 함
○ 屯田 : 총 29곳, 廣州 6, 果川 1, 龍仁 3, 陽智 1, 永平 1, 利川 1, 砥平 1, 原州 1, 洪川 1,
平澤 1, 忠州 1, 金海 1, 昌原 1, 扶安 1, 長興 1, 海州 1, 定州 1, 稷山 1, 振威 1, 永同 1,
載寧 1, 橫城 1. 재령 둔전은 1776년 서명선이 수어사로 있을 때
정조가 수어청 본청에 붙여주었으며,
둔전에서 나오는 세금이 1,000金을 넘어 둑을 막고 배를 띄우는 비용에 쓰임
○ 軍餉穀 : 청성부원군 金錫冑가 저장한 餉穀이 가장 많고,
京營의 別備는 판서 趙觀彬이 마련한 것. 환곡으로 사용하는 쌀이 25,040石,
나머지 각종 곡식 3만石을 합하여 57,790石이나 折米했으므로 44,800석에 불과함.
그 중 15,000석은 還穀으로 민간에 나누어 주고, 창고에 남은 것은 29,800石임
○ 軍餉 창고 : 稤倉, 僧倉, 松坡倉 3곳인데, 한 창고에 2천~5천石씩 비축함.
稤倉은 祭享 賑恤 人夫 刷馬의 삯이 나오는 것으로 잡곡을 합하여 4천석.
僧倉은 수어사 李世白이 공명첩으로 운영한 것으로 잡곡을 합하여 2천석이 있음
○ 수입 : 儲胥所 본전이 16,000兩인데
1761년(영조 37) 將臣의 요청으로 이자를 면제하고 내외 각 청에 빌려줌,
京營의 別備錢은 2,700냥이고 기타 7,000냥인데, 1년 경비를 제하면 수천냥에 불과함
3. 廣州府
○ 戶口 : 남한산성 안의 民戶는 1,114戶, 남자 2,041명 여자 2,300명임.
광주부 전체의 民戶는 10,663戶, 인구 48,018명임.
성안의 인구가 1천 호에 불과한 것은 성안의 지형이 본래 좁기 때문임
○ 忠臣 : 병자호란 때 徐欣男은 私奴였지만
단신으로 청나라 군사의 세 겹 포위를 뚫고 나가 三南에 명을 전했고,
孟元賓은 閑散人이었지만 인조가 행행했을 때 말을 바쳐 무사히 입성하게 했으며,
軍官 朴震龜는 金瑬에게 자신을 발탁할 것을 요청했지만 김류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함.
고려의 金邦慶, 趙狷이 이곳에서 나옴.
○ 창고 : 곡식창고 11곳, 무기창고 7곳
○ 田結 : 6,075결
○ 面 : 上道, 中道, 下道에 모두 23개면이 있음
○ 農土 : 四門 밖 두어 마장의 땅은 산이 평평하고 들이 없어
성안의 백성이 여기서 경작함. 동문 밖에 전답은 司饔院 柴場이었다가 효종 대에
수어사 李時昉의 요청으로 조세를 면제하고 성안의 民戶를 소속시켜 경작하게 함.
1738년(영조14) 부윤 沈聖希가 다시 조세를 거두어 연말에 쌀 1말씩 성안 백성들에게 나누어 줌.
○ 還穀 : 1년에 나누어 주는 것이 15,000石
정조가 남한산성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졌는지는 다음 자료를 검토하면 잘 나타난다.
다음은 정조가 이천에 관해 언급한 사항을 정리한 것인데,
남한산성에 비해 관심의 정도가 훨씬 낮았음을 알 수 있다.
4. 利川縣
○ 戶口 : 5000여 호
○ 結數 : 3,042결
○ 楊根까지 거리 : 수십리
○ 都護府가 된 이유 : 토지가 비옥하고 백성이 많지만 廣州의 屬邑이 되었기 때문
○ 이천 지명의 유래 : 본래 南川縣이었는데, 고려 때 백성들이
太祖를 인도하여 건너가기 편리하게 해 주었기 때문에 ‘利’라는 지명을 하사함
○ 愛蓮亭 : 이천 행궁에 위치. 邑倅 李世珤가 정자를 처음 건립했고 申叔舟가 편액을 씀.
월산대군(李婷)의 『風月亭集』에 나오는 “새 연못을 파고 연을 심으니,
풍류 사랑스럽고 주인 어질다(鑿得新塘又種蓮 風流可愛主人賢)”는 구절의 정자
○ 행궁의 以于斯 편액 : 『禮記』 『檀弓下』의 “여기에서 노래한다(歌于斯)”는 구절에서 따온 것임
○ 雙嶺川 가 : 병자호란 때 兩南의 군사가 전사한 곳
정조는 남한산성의 시설을 둘러보고 군량미 비축분을 확인한 다음,
군사들의 조련 상태를 점검했다. 정조는 남한산성에 소속된 僧軍들의 陣法을 참관하고,
明末 袁崇煥이 寧遠에서 시험한 紅夷砲의 遺制로 알려진 埋火砲의 위력 시험을 했으며,
수어청 소속 군사들의 晝操와 夜操를 참관했다.
정조가 남한산성에서 시행한 조치들은 남한산성의 방어력을 강화하는데 집중되었는데,
이는 1795년(정조 19) 8월에 廣州留守府를 설치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4) 서명응의 활약
1779년 능행에서 가장 돋보이는 활약을 한 인물은 수어사 서명응(1716∼1787)이었다.
서명응은 1779년 1월 12일에 수어사로 임명되었는데, 남한산성의 보수를 총지휘하고,
정조의 능행 중 남한산성에서 거행된 일체의 행사를 주도했다.
가령 그는 정조가 한강을 건너면서부터 수어청 군사를 거느리고 행렬의 앞에 섰고,
국왕의 행차가 여주, 이천으로 이동할 때에도 행렬의 앞에서 인도했다.
또한 국왕이 남한산성에 머무는 동안 4개 城門 및 13개 暗門의 관리를 주관했고,
수어청 군대를 조련하거나 무과 별시를 치를 때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정조는 능행이 끝난 이후 능행 관련 자료를 정리한
『배종록』과 지리지 『南漢山城誌』의 편찬을 서명응에게 일임했다.
서명응의 학문에 대한 신뢰가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을 중하게 여기는 것이 어찌 뒷날의 禍亂을 미리 대비하는 것뿐이겠는가?
御駕가 도착한 날 邑誌를 가져다 보았는데,
모호하고 소략하여 증거로 삼기에 부족하니 흠이 되는 일이다.
게다가 南漢山城과 北漢山城은 다같이 나라의 保障인데,
북한산성은 誌도 있고, 刊本도 있지만, 남한산성만은 이것이 없다고 한다.
경은 일찍이 典考에 뜻을 둔 적이 있는데,
옛 事績에 뒤섞여 나오는 見聞을 분류하여 하나의 책으로 만들어라.
오래 전해지는 방법도 되고 문헌을 숭상하는 일단도 될 것이니,
경이 이 편수 작업을 수행하라.
정조와 서명응의 인연은 1772년 서명응이 世孫右賓客에 임명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서명응은 세손 정조의 교육을 위해 많은 교재들을 편찬했고,
이는 청년기 정조의 학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면서 奎章閣을 건립했고,
서명응을 규장각 提學으로 임명하여 국가적 편찬 사업을 이끌게 했다.
서명응을 지지해 준 또 하나의 인물은 동생 徐命善(1728~1791)이었다.
서명선은 1775년(영조 51) 세손의 대리청정에 반대하는 洪麟漢・鄭厚謙 일파에 맞서
정조를 옹립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이후 영조와 정조의 신임을 받으며 국가의 요직을 차지했다.
1779년 능행 당시 서명선은 좌의정이란 중책을 맡았고,
서명응 형제의 위상을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서명응은 수어사로 있는 동안에도 규장각 제학을 겸했으며,
능행이 마무리되자 정조와 서명응의 관심은 奎章閣을 발전시키는 방안으로 옮겨갔다.
8월 24일, 정조는 서명응에게 『南漢山城誌』의 진척 정도를 물으면서
자신이 지은 『奎章閣志』 序文의 초고를 검토하라고 했고,
얼마 후 서명응에게 규장각 檢書官의 節目을 정해 올리라고 했다.
11월 24일, 서명응은 홍문관 대제학에 임명되었고, 김종수가 수어사에 임명되었다.
이 때 서명선은 영의정이었으므로, 서명응 형제는 중앙 정계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得中亭御射圖』 부분도
5. 맺음말
정조가 즉위한 시기는 정치적 격변기였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자신의 즉위를 방해한 핵심 세력들을 처형하고
『名義錄』을 편찬했다. 그렇지만 정조의 政敵 제거는 철저하지 못했고,
思悼世子에서 이어지는 자신의 정통성은 여전히 위협받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조는 7박 8일의 여주 능행을 기획하고 실천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120주기를 맞은 효종의 영릉을 참배하는 것이었다.
국왕의 능행은 왕실의 孝를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관례적으로 거행되던 행사였고,
숙종과 영조도 여주 능행을 하였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정조는 능행 중 대부분의 시간을 남한산성에 머물면서 산성의 시설물을 점검하고,
승군 및 수어청 소속 군사들의 조련을 참관했으며,
백성들의 민원을 해결하고 경제적 혜택을 주었다.
정조가 들렀던 남한산성이나 여주는 인조의 抗淸,
효종의 北伐論과 밀접한 인연이 있는 곳이었다. 따라서 정조는 조선의 對明義理論을
재천명하고 대명의리론의 상징적 인물인 송시열을 현창했으며,
송시열을 계승한 노론계 산림인 송덕상과 김양행을 초빙하여 자문을 요청했다.
정조가 노론 산림을 우대한 것은 가장 강력한 정치세력이던 노론을 의식한 정치적 조치였다.
당시 정조는 영조대 후반에 일어난 척족 세력을 제거하는데 성공했지만,
여전히 소수의 친위세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취약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능행 중 정조는 王統의 정통성과 軍令의 확립을 강조했는데,
이는 국왕의 권위를 과시하고 통치력을 장악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런데 정조가 집권 기반이 취약하던 시기에 爲民 정치를 부각시키고
백성들을 위한 조치들을 과감하게 시행한 것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남한산성 백성들의 채무를 탕감하고 文券을 불태운 것은 전격적인 조치라 할 수 있는데,
김양행의 말처럼 大族들이 많이 다치고 人心이 안정되지 않은 시기에
民心을 확보하는 것이 정조로서는 절실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1779년 능행을 통해 정조는 자신이 구상하는 정책 방안을 보여주기도 했다.
인재 활용에 있어 소론계 인사인 서명응을 적극 활용한 것이 그것인데,
정조는 남한산성의 수리, 능행 중의 행사, 행사 마무리에 이르는 일체의 과정을
서명응에게 집행하게 했다. 정조가 김양행을 초빙하여 자문을 받은 것과
서명응을 활용하여 실무를 담당하게 한 것은 뚜렷한 대조를 보이는데,
향후 정국에서 소론계가 일정한 역할을 할 것임을 예고하는 조치였다.
남한산성을 육성시키는 조치에도 정조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었다.
정조는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이 도성을 남북에서 방어하는 군사적 거점임을 분명히 했다.
게다가 남한산성은 수도권의 주요 교통로인 한강을 끼고
松坡倉을 관할하는 경제적 거점이기도 했다.
남한산성을 육성하려는 정조의 의도는 廣州留守府를 설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779년의 능행은 권력 기반이 취약하던 집권 초기의 정조가
다양한 의도를 가지고 기획했던 특별한 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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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실학학회 2004.12.12
『華城園幸班次圖, 화성원행반차도』 재질:종이, 크기:세로 46.7cm, 국립중앙박물관
정조대왕 화성행행 반차도
조선왕국 500년 도읍지의 숨결이 살아있는 청계천 곳곳에 문화유적이 남아있다.
대표적인 곳이 광통교와 수표교, 그리고 오간수문이다.
하지만 청계천 복원과정에서 제대로 복원되지 않아 많은 아쉬움이 남아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새로운 볼거리가 등장했으니 '정조대왕 반차도' 도자 벽화다.
반차도와 청계천이 무슨 연관이 있냐는 비판도 있었지만,
조선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행차 인원이 광통교를 통과했으니까 관련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궁중화가 김홍도가 그린 정조대왕 화성행행 반차도
'정조대왕 화성행행 반차도'는 조선 22대 국왕 정조가 그의 아버지 장조(사도세자)가 잠들어 있는
화성 현륭원을 참배하는 기록화를 현대적으로 재현한 벽화다.
가로 세로 30cm, 세라믹 타일 5120장을 이어 붙인 길이 192m의 세계 최대 도자벽화다.
원본은 원본으로써 문화재적인 가치가 있고,
청계천에 재현된 벽화는 역사적인 행차를 현대적인 기법으로 재탄생 시킨 작품이다.
▲ 행차에 동원된 군마와 인력
원본 그림 반차도는 '반열도' 또는 '노부도'라고 불리는
의궤도의 일종으로써 풍속적인 성격을 띤 기록화다.
'정조대왕 화성행행 반차도(正祖大王華城幸行班次圖)'라는 정식 명칭을 갖고 있다.
정조대왕 반차도는 '화성행차도'라고도 불리며,
당대의 궁중화원 김홍도와 김득신, 이인문, 장한종, 이명규 등이 정조의 어명에 의하여
2년여에 걸쳐 완성한 가로 15m, 세로 18m에 이르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흑백 목판본으로 남아있던 정조 반차도는
1994년 채색되어 서울대 규장각에서 보존하고 있다.
조선개국 이래 최대의 국가적인 행사로 평가받는 정조대왕의 화성행차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 참배가 그 목적이 있었지만,
어머니 혜경궁홍씨 환갑과 사갑(死甲)을 맞는 아버지에 대한 절절한 사부곡(思父曲)이 스며 있다.
▲ 정조대왕의 어머니 혜경궁홍씨가 타고 가는 자궁가교.
화성행차는 수구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조대왕의 정치적인 의도가 숨어 있었다.
신진세력으로 급부상한 정약용으로 하여금
화성에 행궁 이상의 견고한 궁을 짓도록 밀명을 내린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더불어 사직단을 짓고, 임금의 별동부대인 장용영 군영을 설치한 것으로 보아
벽파세력의 근거지인 한양을 버리고 화성으로 천도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정조대왕과 노론 벽파세력과의 갈등은 깊어지고...
이러한 대왕의 숨은 뜻을 간파한 수구세력은 방해공작에 혈안이 되었다.
특히 병조판서는 개인적으로 영 기분이 나빴다.
자신의 수하에 있는 부하 병조참지 정약용을 왕이 총애하고 있으니 벌레 씹는 심정이었다.
병판으로서 시기의 대상 정약용이 눈에 가시처럼 보였다.
그가 속한 수구세력 노론으로서 정조대왕이 임금으로 받들어 모셔야 할 왕이지만,
한편으로 제거해야 할 정적이었다.
▲ 정조 임금이 타고 가는 좌마. 철통같은 경호다.
왕세자로서 기량과 도량이 넓어 백성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고 있던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노론에게
정조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두려운 존재였다.
폐비 윤씨의 죽음을 알게 된 연산군이 휘두른 갑자사화의 피바람이 유령처럼 따라 다녔다.
하루가 편할 날이 없었다.
정조 즉위 초, 자신의 왕위 승계를 방해한
홍인한과 정후겸을 사사케 한 정조의 단호함에 수구세력은 떨고 있었다.
정조 역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연산군은 뒤늦게 어머니의 죽음을 알았지만, 정조는 일찍부터 아버지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 영조에 대한 원망도 있었다. 그만큼 인간적인 괴로움이 컸다.
그렇다고 드러내놓고 정치적인 행보를 펼칠 수도 없었다.
조정을 노론세력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감 마마 황공 하옵나이다"라며
자신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노론세력 대신들이 가증스러울 뿐이었다.
▲ 맨 앞에서 행차를 선도하는 경기감사
정조19년. 그러니까 1795년 윤 2월 9일부터 16일까지 8일간 치러진 행사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창덕궁에서 현륭원까지 62.2km.
지금이야 현륭원이 있는 경기도 화성까지 승용차로 1시간 코스이지만,
그 당시 6000여 명(도자 타일에는 1779명의 사람과 779필의 말 재현)이 동원된
임금의 행차는 장관이었다. 한마디로 국력을 총 동원한 국가적인 행사였다.
내시와 궁중 나인도 말 타고 행차에 참가
문무 관리에서부터 마부에 이르기까지 동원된 사람들의 성분도 각계각층이다.
우의정과 판서를 비롯한 조정의 대신들.
도승지를 비롯한 승정원 승지와 장용원 제조, 경연관 등 왕의 측근과
병을 치료하는 내의원 제조와 의관,
수라간 장금이와 열쇠를 담당하는 사략과 등불과 촛불을 담당하는 등촉방 중관도 동행했다.
뿐만 아니다. 내시도 말을 타고 행차에 참가했으며,
궁중나인도 여자의 몸으로 너울을 쓰고 말을 타고 가고 있다.
또 도성에서 현륭원이 있는 화성까지 오가는 임금님의 행차 길에
행패를 부리는 백성을 치죄할 곤장을 멘 군뢰까지 동원하였으니 대단한 규모다.
대궐 전체가 움직이는 행사나 다름없었다.
▲ 너울을 쓰고 남자 마부가 끄는 말을 타고 가는 궁중 여인들. 내의원 의녀, 악공, 장금이 들이다.
기생이 아닌 정숙한 아녀자가 남자 마부가 끄는 말을 타고 가는 것은 당시로는 충격적인 사건이다.
▲ 등촉방 중관. 요즈음으로 말하면 조명기사이다.
"행차 시작부터 끝까지 민폐를 끼치지 말라"는 엄명 아래 정리소를 임시로 설치하고,
대내의 음식물 공급에서부터 수행한 관원들의 식량과 노자,
그리고 동원된 군마의 사료비까지 궁에서 내린 10만 궤미의 돈으로 충당했다.
이 행차의 모든 과정을 기록할 요원으로 승정원 주서와 예문관 한림을 대동하였고,
기록화를 남기기 위하여 궁중 화원을 참여시켰다.
출발 당일에 화성 도착이 어려웠으므로 시흥에 임금이 하룻밤 묵어갈 행궁을 마련해야 했으며,
한강 노량진에 배다리(舟橋)를 건설해야 했다. 배다리, 이거 보통 일이 아니다.
6·25 한국전쟁 시에도 한강철교가 끊어져 부교를 가설하고 병력과 장비가 도하작전을 벌렸지만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아차 하면 모두가 수장되는 올인 작전이 배다리 건너기다.
▲ 완전무장한 장용대장과 군졸들. 말 타고 행진하면서 좌우를 살피는 눈초리가 매섭다.
한강에 교량이 없던 그 시절. 왕이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넌다는 것은
체통에도 어울리지 않고 안전에도 문제가 있었다.
더더욱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두 누이동생,
그리고 수많은 인원이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넌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리하여 한강에 배다리를 건설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배다리 역시 안전에 무리가 있었다. 또한 얼마 전부터 도성에 괴소문이 나돌았다.
"임금이 한강에 수장될는지 모른다."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소문이었지만 급속히 도성에 퍼져 나갔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는 말이 있듯이
발 없는 말이 '대궐 담장'쯤이야 못 넘을 소냐. 정조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내가 한강에 빠져 죽는다면, 나 혼자만의 목숨이 아니라 종묘사직이 무너지고 왕권이 무너진다."
이렇게 생각해서 일까? 배다리의 설계를 정조가 직접 챙겼다.
2중 3중의 안전장치를 강구했다.
하지만 배다리를 건설하는 주교사(舟橋司)의 모든 관원들까지는 손이 미치지 못했다.
수원화성 원행길 기록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승인 2015-11-03 20:17 이명관 기자 mklee@kyeonggi.com
혜경궁 회갑연·행차절차 등 글과 그림으로 상세히 기록
의궤(儀軌)란 국가의 주요 행사를 치르고 난 뒤
후세에 참고하도록 행사 내용과 경과, 대책 등을 기록한 책을 말한다.
원행(園幸)은 정조가 사도의 묘 현륭원을 찾아갔다는 의미고
을묘(乙卯)년에 정리(整理)자라는 금속활자로 인쇄했다는 뜻이다.
원행에서 ‘幸’자를 쓴 것은 임금이 대궐 밖으로 행차하는 것을 행행(行幸)이라 한데서 비롯된다.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는 수원화성 행차를 마치고
열흘만인 1795년 윤2월27일 의궤를 편찬하라는 정조의 어명에 따라 주자소에 의궤청을 설치하고
좌의정 채제공이 총리대신을 맡았다.
그해 8월15일 교정을 끝내고 인쇄를 시작해 1797년 3월24일 완성했다.
10권 8책으로 구성된 의궤는 혜경궁의 화성행궁 회갑연 개최와 관련한
정조와 조정 신료들의 논의 내용, 행차의 세부절차, 물자와 인원 동원계획 등을 실었고
회갑연 참석자, 잔칫상 차림표, 장식한 꽃송이 개수까지 글과 그림으로 기록했다.
의궤 첫 권인 권수의 도식은 행차 주요 장면을 판화로 남겼고
별도로 컬러로 그린 반차도와 화성능행도병은 당시 상황을 파노라마처럼 재연하고 있다.
15m 길이의 반차도(班次圖)는 문무백관이 계급 순서대로 늘어선 행렬을 그린 것으로
왕실 기록화이면서 커다란 풍속화를 연상시킨다.
병풍 형태로 그렸다는 능행도병은 향교 공자묘를 참배하는 화성성묘전배도,
별시 합격자를 시상하는 낙남헌방방도,
회갑잔치를 그린 봉수당진찬도,
양로연을 그린 낙남헌양로연도,
야간군사훈련 서장대성조도,
활을 쏘고 폭죽놀이를 하는 득중정어사도,
시흥행궁으로 돌아가는 시흥환어행렬도,
배다리를 건너는 노량주교도섭도 등 8폭으로 전한다.
이 그림들은 정부 기관 도화서 화원들이 그린 것으로
당시 최고 화가 김홍도가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유네스코는 지난 2007년 원행을묘정리의궤를
화성의 건축과정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 등과 함께 ‘의궤’로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했다.
이명관기자
[역사 속 명저를 찾아서] 정조의 화성행차와 '원행을묘정리의궤'
매일경제 입력2022.02.19. 오전 12:05 기사원문
1795년 정조의 화성행차
/ 즉위 20년·어머니 회갑맞아 / 위업과시와 민심결집 위해 / 단행된 8일의 정치 이벤트
서적 '원행을묘정리의궤'
/ 밥상 장식한 꽃의 숫자 등 / 행사 과정 꼼꼼히 정리해 / 후대에게 당시 현장 선사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왕 정조는 1795년 윤 2월 9일 새벽, 창덕궁을 나섰다.
목적지는 현재의 수원 화성(華城).
정조는 1789년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의 화산(花山) 쪽으로 옮기고
현륭원(顯隆園)이라 승격한 이후 매년 이곳을 방문했다.
그러나 1795년은 정조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해였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1735~1815)가 회갑을 맞는 해였기 때문이다.
사도세자(1735~1762)와 혜경궁 홍씨는 동갑이었으니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함께 회갑 잔치를 올릴 해였다. 1795년은 또한 정조가 왕위에 오른 지 20년이 되는 뜻깊은 해였다.
1795년의 화성 행차는 정조가 그동안 이룩했던 자신의 위업을 과시하고
신하와 백성들을 결집시키는 정치적 이벤트이기도 했다.
부모에 대한 효심을 표현하는 한편 자신이 추진하는 개혁에 더욱 박차를 기하기 위한 행사였다.
정조가 단행했던 8일간 행사의 전말은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라는 책으로 정리됐다.
현륭원에 행차했다고 해 '원행',
1795년이 을묘년이어서 '을묘',
정리자(整理字)라는 활자로 인쇄해서 '정리'라는 명칭이 책의 제목으로 붙여졌다.
'원행을묘정리의궤'에는 7박8일의 공식 일정과 함께
당시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내용들이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행렬의 모습을 담은 반차도에 나타난 인원만도 1779명이다.
현지에 미리 간 인원, 도로변에 대기하며 근무한 자를 포함하면 6000여 명에 달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새벽에 창덕궁을 출발한 일행은 노량진을 통해 배다리를 건너 노량행궁에서 점심을 먹었고,
저녁에 시흥행궁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휴식 시간에 간식을 먹거나 식사할 때 음식의 그릇 수,
들어간 재료와 음식의 높이, 밥상을 장식한 꽃의 숫자까지 기록했다.
둘째 날에는 시흥을 출발해 청천평에서 휴식을 취했고,
사근참행궁에서 점심을 먹었다.
장안문을 들어갈 때 정조는 갑옷 차림이었고, 이날 저녁 화성행궁에 도착했다.
셋째 날 아침 화성향교 대성전에 가서 공자에게 참배를 한 후
낙남헌으로 돌아와 화성 인근의 거주자를 대상으로 문과와 무과 별시를 거행했다.
문과 5인, 무과 56인을 선발했음이 기록으로 나타난다.
넷째 날 아침에 정조는 어머니와 함께 현륭원 참배에 나섰다.
남편의 무덤을 처음 방문한 어머니가 오열하는 모습을 정조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지켜봤다.
오후에 정조는 화성의 지휘 본부가 있는 서장대에 올라가
주간 및 야간 군사 훈련을 주관했는데, 5000명의 친위 부대가 동원됐다.
다섯째 날은 행차에서 가장 큰 의미를 띠고 있는 어머니의 회갑연이 거행됐다.
'장수를 받는 전당'이라는 이름의 '봉수당(奉壽堂)'에서 거행된 잔치에서는
궁중 무용인 선유락(船遊樂)이 공연됐고
의식 절차, 잔치에 참가한 여자 손님 13명과 남자 손님 69명의 명단,
잔치에 쓰일 춤과 음악, 손님에게 제공된 상의 숫자와 음식까지 낱낱이 기록했다.
여섯째 날에는 화성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눠주고, 오전에는 낙남헌에서 양로연(養老宴)을 베풀었다.
양로연에는 384명의 노인이 참가했는데,
정조는 노인들과 똑같은 밥상을 받았고, 지팡이를 선물로 내렸다.
공식 행사가 끝난 다음 정조는 화성 일대를 둘러봤다.
낮에는 화성에서 가장 경치가 뛰어났던 방화수류정을 살펴보고,
오후에는 득중정에서 활쏘기 시범을 보였다.
다음 날 정조는 오던 길을 돌아서 시흥에 도착해 하룻밤을 묵은 후,
마지막 날 노량을 거쳐 서울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정조는 아버지의 묘소가 마지막으로 보이는 고갯길에서
계속 걸음을 멈추며 부친과의 이별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지지대(遲遲臺·걸음이 느려지는 고개)'라고 불리는
이 고개 이름은 정조의 효심을 널리 기억하고 있다.
정조는 1795년에 단행한 화성 행차를 가장 장엄하게 추진하며
그동안 자신을 짓눌러오던 '죄인의 아들'이라는 굴레에서 확실히 벗어나는 한편,
화성 건설 및 개혁정치를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당시 행차의 전 과정을 기록과 그림으로 철저하게 정리한
'원행을묘정리의궤'로 인해 우리는 그날의 현장에 직접 초대를 받은 것과 같은 행운을 누리고 있다.
(건국대 사학과 교수 신병주)
정조, 조선의 혁신을 주도한 마지막 개혁 군주
기자명 박기현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입력 2022.12.04 05:00 댓글 0
원수까지도 보듬어 안고 개혁을 주도한 군주
정조, 조선의 혁신을 주도한 마지막 개혁 군주
오래 전에 종영되었지만 대하 드라마 <정조 이산>은 전국민적인 사랑을 받은 작품이었다.
그만큼 정조의 삶은 드라마틱한 것이었다.
조선 역사상 정조(1752-1800)만큼 생명에 심각한 위협을 느끼며 왕위에 간신히 올랐던 왕재는 없었을 것이다.
자객이 궁안 깊숙이까지 침입하여 세손(정조)의 목숨을 노리는가 하면
축출의 위협이 상존해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세도가들로서는 세손이 군주가 된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고통의 와중에서도 정조는 강력한 리더십으로 왕권을 구축하고
국방과 제도를 개혁하는 한편 조선 후기 르네상스를 실현해냄으로써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원해 냈다.
정조가 보여준 지혜의 리더십과 개혁정신의 실체를 살펴보자.
SWOT 분석 ---------------
약점 요인(weakness) : 사방이 적으로, 믿고 맡길 만한 인재가 없었다
채제공과 다산 정약용은 정조 시대 임금이 믿고 일을 맡길 만한 지혜로운 충신들이었다.
그러나 이 둘 만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는 없는 노릇.
정조의 문제는 중앙정부와 지방의 조직을 이끌고 갈 훨씬 더 많은 인재가 필요했음에도
그들 말고는 마음을 터놓고 무엇을 함께 의논하고 맡길 만한 충신들이 별로 없었다.
탐관오리가 부당하게 거두고 큰 상인과 교활한 장사치들이 이익을 독점하며
관료들이 이를 틈타 자기 배를 채우는 시대‘였기에 국왕이 직접 실무를 챙겨야 했다.
게다가 184권 100책에 달하는 방대한 문집을 남길 정도로
조선 역사상 가장 학자적인 군주였기에 스스로의 명을 단축하고 있었다.
몸이 정신을 따라가지 못함으로 인해 병마가 정조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홀로 커 오면서 정적의 도전에 늘 직면해 있었기에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할 정도로 마음의 병을 키우고 있었다.
여기에 실학을 공부한 관료들과 재야 정치가들,
그리고 보수 관료주의에 빠진 지도층 사대부들의 괴리가 정조의 완벽주의에 제동을 걸고 있었다.
위협요인(threat) : 세손 시절부터 목숨의 위협을 끊임없이 받아왔다
세손 시절을 막 벗어나 왕으로 즉위한 정조를 노려 지붕 위에서 자객이 침입한 적이 있었다.
다행히 정조가 밤늦게까지 책을 읽느라 깨어 있어서 범인이 발각된 것이지
만일 자고 있었다면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다.
이날 밤에 호위무사도 자리를 비우고 도승지도 없어졌고 사관까지도 자리를 비웠다.
이게 우연의 일치일까? 우연이라면 너무도 절묘한 우연이었다.
궁중의 모든 사람들은 주모자가 영조의 정비 정순왕후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정조가 직접 심문에 들어가 조사해보니 궐내의 환관과 궁녀까지 결탁해 역모에 참가한 것을 알게 됐다.
상궁 고수애, 그녀가 종범 가운데 하나였는데 그녀와 친하게 지내며 사주한 인물이 정순왕후의 오라비 김귀주였다.
게다가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도 정조 재위 10년만에 사망했다.
정조가 가장 사랑하던 후궁 의빈 성씨도 갑자기 죽었다.
그해 11월에는 왕의 조카인 상계군도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여기에 정순왕후는 은언군도 사사하라고 들고 일어났다.
정순왕후는 열 다섯에 예순여섯의 영조에게 시집와 소생이 없었다.
그러면서 당쟁의 한복판에 들어가 벽파의 입장을 대변하며 사도세자를 고변하고
아버지 김한구의 사주를 받아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게 하는 데 일조한 정치적인 여인이었다.
정조가 죽기 직전까지 그를 치료했던 어의도 벽파의 거두 심환지의 친척인 의원 심연이었다.
정조의 지밀한 곳까지 정순왕후의 손안에 있었으니 정조는 사면초가였다.
강점 요인(Strength) : 자력갱생, 스스로 힘을 키워 적을 물리쳤다
정조가 위대한 점은 그가 어느 시대의 군주보다 학문이 뛰어난 실력자였으며
스스로를 지킬 지혜와 힘을 갖춰나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단하는 자세가 그에게 있었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이겨내기 위해 규장각을 세워 자신을 지켜 줄 새로운 신진세력을 구했다.
세종이 집현전을 세워 인재를 구했다면 정조는 규장각으로 새로운 엘리트층을 규합하여 자신을 지키려 했다.
게다가 그는 무술과 병법과 학문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다.
전하기로는 태조 이성계 이후 가장 뛰어난 궁사였다는 것이 실록의 증언이다.
게다가 힘을 쓸 때와 적을 피할 때를 절묘하게 아는 지혜가 그에게 있었다.
그는 군주로 즉위하자마자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언하여 경쟁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피하지 않고 정면 승부수를 던져 적들을 주춤거리게 한 것이다.
기습을 당한 정순왕후의 세력들은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힘을 빼앗겨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세우고 수원 화성으로 서울을 천도하려고 준비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지혜롭게 처신하여 개혁의 기치를 들고 수구와 폐습을 걷어냈다.
정조가 조선 후기 르네상스의 주역으로 평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회 요인opportunity : 북벌론이 주춤해지고 민족주의가 강해졌다
조선 후기 사회는 임진왜란에 이어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을 겪으며
1644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키는 놀라운 변화를 겪었다.
이 때문에 절대 지존이었던 명나라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청나라는 망해야 하고 명나라가 다시 서야 한다는 이른바 반청복명의 사대주의와 북벌론이 대세였다.
그러나 청나라는 이미 세상의 대세였다.
동아시아 절대 강자로 떠 올라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강력한 정부로 거듭난 청나라를 이길 힘은 조선에 결코 없었다.
따라서 북벌의 명분은 점점 사라지고 복수보다 실리를 꾀하자는 자력자강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아가 오랑캐 청나라의 것도 배울 것이 많으므로
이를 배우고 익혀 새로운 조선을 건설해야 한다는 실학론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정조로서는 이것이 기회였다.
중화사대주의를 버리고 조선이 중심임을 외치는 사상의 르네상스를 펼칠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게다가 청나라 북경을 방문하고 돌아온 신진 사류들이
앞장 서서 선진 문명을 배우자고 글을 쓰고 소문을 전파하는 문화계몽이 일어났다.
정조가 개혁의 기치를 들고 일어날 명분이 주어진 것이었다.
살기 위해 힘과 지혜를 기르다
- 활쏘기와 책읽기가 그를 지켜준 최강의 무기였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 이후 발뻗고 잠을 잘 수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세자를 죽인 정적들이 세손이 왕이 되도록 두었다가는
언젠가 자신들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정조가 세손 시절일 때 죽여야 한다는 것이 정적들의 입장이었다.
이런 연유로 정조는 세손 시절 한 번도 마음 놓고 쉰 적이 없었다.
후일 규장각을 세운 정조는 이런 속내를 드러내게 된다.
“옷을 벗지도 못한 채 잠자리에 들었던 것이 몇 달이나 되었는지 알 수가 없으며
이제 생각하니 불안하고 고독했던 나날들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내가 세자로 있을 때 온갖 어려운 일을 겪었다.
처음 정치를 시작했을 때, 친척인 척리이면서 바르지 못한 자들을 숙청하여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는 것이 내가 가장 고심했던 일이었다...
이제는 척리와 내관을 뜻하는 두 글자만 봐도 신물이 난다.”(정조실록 중에서)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이 최고의 궁사가 되는 것이었다.
어릴 적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활을 쏘기 시작해 인내심과 집중력, 민첩성과 결단성을 키웠다.
그는 끊임없는 연습으로 최고의 궁수가 되었고 이를 궐안팎에 과시했다.
즉 문무백관 앞에서 활쏘기를 통해 자신의 실력을 보여준 것이다.
정조는 50발을 쏘며 49발을 명중시키고 화살 한 대를 일부러 하늘로 날려보내는 여유를 보였다.
‘자, 따라 할 테면 한 번 해 보지 그래?’라는 여유와 배짱,
그리고 너희들보다 내가 훨씬 낫다는 강한 자주의식의 발로였다. 그는 실력으로 정적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강력한 친위부대와 화성 원행으로 정적을 제압하다
- 말로만이 아닌 실력을 지탱해 줄 비책을 실현시켰다
정조는 영조 시절부터 계속돼 온 자신의 암살 모의를 이겨내기 위해 강력한 친위부대를 확대 편성했다.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수년에 걸쳐 확대 개편한 결과 기병과 보병의 규모가 모두 5천 1백 52명이나 되었다.
당연히 구 세력들의 입김과 견제가 약화되고 왕권은 크게 강화되었다.
그러나 정조는 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는 실학파들과 손잡고 한 손에는 병기를 한 손에는 농기구를 들고 싸우자는
조선 민방위제도의 창설을 주도하여 국력을 키우는 한편,
수원 화성에 이상적인 자족자립의 정치경제 형태를 갖춘 신도시를 세우기로 하였다.
그는 재위 18년 되던 1794년부터 2년 10개월에 걸쳐
채제공과 정약용 및 민과 군의 힘을 빌어 화성 건설을 완성하였다.
정조의 뛰어난 점은 도시계획의 우선 순위로 재정적 자립이 가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는 기득권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서울을 정점으로 한 기득권 세력의 경제권을 약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수원은 서울에서 벗어나 경제적 자립을 시도할 수 있으니 그런 면에서 기가 막힌 대안이 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정조는 수시로 화성을 방문, 공사를 감독하는 한편
화산으로 옮긴 아버지의 묘를 찾아 자주 원행을 나갔는데 재위 24년간 66회나 원행을 감행,
정적들에게는 덤빌 테면 덤벼보라는 정치적 시위를 보이고
백성들에게는 군주에 대한 존경과 조선 르네상스의 부활을 알렸다.
이는 또 백성들과 소통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조선조에 선비들을 제외하고는 임금에게 백성들 자신의 의견을 올릴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임금 앞에 직접 나와 호소하는 상언이라는 제도와
행차 중에 징을 울리고 나오면 볼기를 몇 대 맞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격쟁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정조는 이를 적극 활용하여 무려 재임중 3,355건의 상언과 격쟁을 해결했다.
이 격무로 인해 정조 스스로 수명을 재촉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는 백성들과의 소통을 중시했다.
이것은 지방의 탐관오리를 척결하고 직접 실무를 챙겨 관리들의 개혁을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이 원행으로 정조는 일거다득의 노림수를 기획했다.
친왕체제의 점검과 국도의 보수, 다리 건설, 군사 훈련, 방위체제 점검, 지방관아의 점검,
지방 인재의 발굴과 지원, 서울과 지방의 격차 해소, 정적들의 견제 등을 가져올 수 있었으며
나아가 백성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여
정치의 안정을 꾀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다양한 결실을 거두었던 것이다.
특히 1795년 윤 2월9일 을묘원행은
어머니 혜경궁 홍 씨의 회갑 기념을 핑계로
과거를 수원에서 치러 지방 인재를 발굴하는 한편
장용영의 훈련된 병사들과 대규모 병력이동으로 군주의 강한 힘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이 행차는 무려 1km에 달했는데,
채제공을 비롯한 대소신료와 호위병까지 무려 1779명,
말은 779필이 동원됐고 현지에 미리 간 관료와 무사들을 합하면 6천 명이 행차에 참여했다.
지금 현재 청계천 방벽에 그려진 것이 이 행차의 그림인 반차도이다.
정적들의 반격에 비장의 무기를 던지다
- 오만불손하던 신하들, 금등(金縢) 문서로 고개를 숙이다
그러나 정적들은 개혁에 반발하고 있었다.
수원 화성 천도의 낌새를 차리자마자 상소가 터져 나오고 반발이 거세졌다.
정국은 불타는 화약고처럼 폭발 직전이었다. 그러자 정조는 승부수를 던졌다. 바로 사도세자의 죽음 건이었다.
1762년 윤 5월 21일은 조선 역사상 아버지가 가장 참혹하게 자식을 죽인 사건으로 길이 기억될 것이다.
영조 임금에 의해 뒤주에 갇혀 있던 사도세자가 8일만에 숨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사도세자는 정조의 아버지다. 영조는 세자의 죽음을 듣고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정신이 퍼뜩 들게 되었다.
당쟁을 미워하여 탕평책을 실시하였던 군주였지만
사실은 영조 자신이 당쟁에 휘말려 사랑하던 아들을 뒤주에 가둬 굶겨 죽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는 한밤중에 서둘러 도승지 채제공과 궁궐에서 나가 있던 세손(훗날 정조)을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사초를 기록해야 할 사관마저 내보낸 채 이들에게 은밀하게 몇 마디를 당부했다.
“도승지는 짐의 말을 신중하게 들으라. 세자의 죽음은 노론의 당쟁으로 인한 피해였다.
이것은 이미 5년 전부터 은밀하게 준비되어 왔던 것으로 내가 스스로 경솔하여 이 일을 만들었구나.
이 일은 절대 입 밖에 내지 말라. 이 한 통의 글을 잘 보관하라.
세손이 크면 이 글을 읽어보게 하라. 세자의 죽음에 대한 비밀은 절대 지켜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손마저 불행한 일을 당하게 될 것이다.”
영조는 한 통의 글을 도승지에게 주면서
자신의 첫 왕비였던 정성왕후 서씨 신위(神位) 밑에 있는 요의 꿰맨 솔기를 뜯고 그 안에 글을 넣어두게 하였다.
이것이 금등 문서라고 불리는 것으로,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인 정쟁에 대해 영조가 쓴 비밀문서였다.
이 문서는 무려 31년간이나 정조의 가슴 속에 숨겨져 있었다.
정조는 이 문서를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채제공으로 하여금 사도세자 죽음 30년 후에 폭로하게 했다.
더 이상 수원 화성 건설과 군주의 원행을 막아서면
나도 끝까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파헤쳐 관련된 이들은 모두 죽이겠다는 엄포요 위협이었다.
당시 상황을 보면 정조가 화성유수 채제공을 영의정으로 승진시켰는데
이것은 숙종 이후 남인이 공식적으로 영의정에 오른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영의정에 오른 채제공은 직첩을 받은 문건의 먹이 채 마르기도 전에 사도세자 문제를 공식적으로 거론하며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잘잘못을 가리자고 상소를 올렸다.
정조가 가장 신임하고 아끼는 참모였다.
그가 갑자기 승부수를 던지듯 정적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발언을 하고 만 것이다.
당시 채제공은 ‘동호지필(董狐之筆)’이란 말로 상소를 올렸는데
이 말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실을 바르게 기록한다는 고사에서 나온 것이었다.
즉, 사도제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솔직하게 죽음을 무릅쓰고 가려보자는 정치적 도전이었다.
깜짝 놀란 정적들은 선왕인 영조가 절대 발설 말라던 일을 들고 나온 채제공을 탄핵하기 시작했다.
그들로선 사도세자를 죽인 책임 때문에 목숨을 건 것이었다.
조정은 누가 죽느냐 사느냐의 양단간의 결판이 날 상황이었다.
그 때 지혜로운 정조가 솔로몬의 심판을 내렸다.
양쪽의 책임을 물어 노론의 영수 김종수와 영의정 채제공의 옷을 벗긴 것이다.
채제공이 영의정에 오른지 열흘만이었다.
정조는 1793년 8월8일 2품 이상의 주요 대신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금등의 문서에서 직접 베낀 두 구절을 승지를 시켜 보여주었다.
“피묻은 적삼이여 피묻은 적삼이여. 동(桐)이여 동이여.
누가 영원토록 금등으로 간수하겠는가. 천추에 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바라노라.”
사도세자를 간절히 아끼고 사랑하던 아비 영조의 마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글을 읽은 중신들이 숙연해지고 눈물을 훔치며 더 이상 이 문제를 시비걸지 못하게 되었다.
정조의 노림수는 이러했다. 기존 보수적 정치권들이
수원 화성에 대해 시비를 걸면 나도 금등의 문서로 사도세자 문제를 공론화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리고 두 책임자를 처벌, 이만 끝내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이 절묘한 승부수로 정계가 폭풍 전야에서 안정되었던 것이다.
정조의 개혁수, 채제공의 바람몰이
- 부창부수의 리더와 참모
채제공은 정조의 실세로 올라서면서 그는 임금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사실 채제공은 정조가 세손 시절 일 때 그의 교육을 맡았던 사부였다. 정조는 이 채제공을 통해
그가 제시한 개혁 '6조 진언'을 받아들여 신하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1.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를 바로 세울 것
2. 탐관오리를 징벌할 것
3. 당론을 없앨 것
4. 의리를 밝힐 것
5. 백성의 어려움을 돌볼 것
6. 권력기강을 바로 잡을 것
이것이 정조의 개혁실체였다.
이로써 북학파들을 대거 기용,
남인의 정약용, 이가환 북학파의 박제가 서얼출신의 유득공, 이덕무 등이 실력자로 올라섰다.
1791년 정조는 또 하나의 승부수를 던졌다.
바로 ‘신해통공’이었다. 이것은 숙종 때부터 당시까지 유지해 왔던 시전상인들의 금난전권을 폐지시킨 사건이다.
금난전권이라는 제도는 상업발전과 더불어 성장한 시전 소속이 아닌 사사로운 상인계층들의 장사를 방해하여
난전과의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려는 시전 상인들의 독점권을 말한다.
시전상인이 조선 조정의 사대부들과 결탁하여 자신들만의 상권을 확보하면서 시전을 독점체제로 이끌고 가는 대신
사대부들은 이에 대한 대가를 받아왔으니 민관이 합작한 사기극이었다.
다른 이들은 장사를 하고 싶어도 이들에게 밀려 끼어들 수가 없었다. 정조는 이를 일거에 뒤집어버린 것이다.
시장에 자유경쟁체제를 도입했으니 기득권층이 큰 타격을 입게 된 것이다.
인사권을 제한하고 경쟁체제를 도입한 정조
-탕평책으로 정적에게도 기회를 주다
채제공은 정조의 집사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정조의 속내를 읽고 있었다. 그래서 붕당정치의 한 원인이던 전랑법(銓郞法)을 철폐하자고 제안했다.
전랑이란 관리 선발을 전담하고 있던 정랑(正郞:정5품)과 좌랑(佐郞:정6품)을 전랑(銓郞)으로 합칭한 것을 말한다.
전랑의 임직은 장관인 이조판서나 병조판서도 관여하지 못하고 전랑 스스로 후임자를 천거하도록 되어 있었다.
당연히 줄서기가 일어나고 떼거리 정치가 계속되었던 것이다.
정조는 이에 전랑제를 철폐하도록 하여 노론측의 대를 이어가는 전랑 독직을 막아버렸다.
그의 개혁이 이제 완성되기 직전이었다.
그는 지혜로운 군주였다. 빌미를 주기 전에 전광석화처럼 정적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즉위하자마자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만천하게 선언한 그는 철저히 범인을 가려내 숙청했다.
그러나 그런 무력위주의 분위기를 계속 끌고 가지 않고 탕평책으로 인재를 공평하게 선발했다.
규장각을 통해 나라를 이끌고 갈 싱크탱크들을 키우고 과거제도의 혁신을 통해 좋은 인재를 찾아냈다.
또 북학파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을 뽑아 실학을 전면배치하고
채제공을 신뢰하여 그에게 개혁을 추진케 했다. 정약용 이익 유성원 등이 이 때 등용되었다.
지혜로는 당할 자 없는 전술전문가 정조
정조의 리더십은 이처럼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워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지혜를 갖추었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군주보다 더 탁월하다.
그는 한마디로 문신으로서도 무인으로서도 뛰어난 전술가였다.
24기를 기본으로 하는 훈련무예도통지를 만들어 이를 교본으로 장교와 군사들을 훈련시키는 한편
궁내에서 대신들과 장교들을 모아놓고 활쏘기 연습을 계속했다.
현장을 직접 나가 보다 보니 그는 느끼고 깨닫는 것도 많았다.
정조는 이런 경험을 국방전략에 흡수하여 보병과 기병 포병 등 세 병과의 전법을 정리한 ‘병학통’,
군사의 조련을 요약한 ‘병약지남,
진법과 전차의 운용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악기도설‘ 등을 간행하여 전략전문가로서의 업적도 높이 쌓았다.
정조는 이처럼 힘을 바탕으로 한 개혁을 통해
정치적 규합과 조선의 부흥을 꿈꾸었고 르네상의 실현자로 길이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필자가 여기서 그를 전략가로 부르지 않고 전술가라고 부른 것은
정조가 동아시아의 흐름을 읽는데는 부족한 면을 보였기 때문이다.
남해에는 이미 수많은 네덜란드의 선단들이 무역을 하러 다녔지만 정조는 이를 살피지 못했다.
그가 글로벌리즘에 대해 눈을 뜰 수만 있었다면
조선의 부흥은 제대로 된 열매를 맺었을 것이다. 그것이 그의 한계였다.
아직도 진행중인 정조 독살설
과연 정조는 독살된 것인가?
정조의 측근이었고 그가 그렇게 사랑했던 다산 정약용은 저서 <여유당전서>에서
당시 백성들 사이에 한 정승이 심연이라는 어의를 시켜 임금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나돈다고 적었다.
익명의 대자보도 붙고 수상한 소문들이 줄을 이었으니 정조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왜 이런 이야기까지 나왔을까?
그것은 정조가 어의의 약재를 제대로 듣지 않고
심지어 자신이 직접 약재를 쓰기까지 하며 아무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어의조차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정조 사후 정순왕후가 모든 개혁조치를 뒤로 돌리고 폐지한 조치를 보면
적어도 그녀가 깊이 개입한 뭔가가 있을 거라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현대 의학으로 이 문제를 풀어보려는 시도가 나와 여러 가지 가정 하에 추론한 적도 있었지만
어느 쪽도 독살설의 지위를 가려내지는 못했다.
독살의 징후나 추정은 가능하지만 과연 감시의 눈이 시퍼런 궐내에서
설마 당대의 군주를 살해하려고 할 수 있었겠는가라는 반대 입장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정조의 개혁조치 이후 설 자리가 없어져 가던
정순왕후와 그의 측근들이 승부수를 던진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단정하긴 어렵다.
다만, 과학적으로는 미필적이든 고의적이든 간에 한방약재의 쓰임새에 문제가 발견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역사는 현재까지 밝혀진 것만 수용하는 것이 원칙이다.
후일 더 정확한 고증과 고고학적 유물이 나온다면 몰라도
현재까지는 추론에 불과한 것을 사실로 여길 수는 없는 일이다.
정조의 개혁수와 승부수를 지금 시점에서 보자면...
쿠데타가 일어나는 후진적 나라가 아닌 상황에서 정조 시절의 극단적 사건을 현대에 적용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기업이나 작은 조직에서라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대표이사를 갈아치우고 경쟁자를 제거하거나 적대적 M&A로 경쟁사를 넘어뜨리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정조의 노림수와 승부수는 그래서 돋보인다.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필살기를 한 가지 반드시 갖지 않으면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의 기업 현장이다.
그리고 창업주라 할지라도 자신을 지킬 힘과 지혜가 없으면 패한다는 사실을 역사의 교훈은 가르쳐 주고 있다.
정조는 자신이 마음 먹은 것을 차곡차곡 실천하려는 의지와 여론(백성들)을 자기 편으로 끌고 가는 강한 실천력,
그리고 흐름을 읽을 줄 아는 지혜가 있었다.
경쟁 속에서 자신을 키우고 지켜나가고 싶은 CEO나 팀장들이라면
마땅히 정조의 실천적 지혜를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이다.
※ 글 : 박기현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역사학자, 연합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