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길49(해빙기, 2023/02/23, 단공-남문-10암문-덕운사-공예관, Free as a Bird / Omar Akram)
이름없는풀뿌리2023. 2. 25. 10:24
요즈음 – 산성길49(해빙기) –
찬바람 가스라이팅 용코로 맴돌아도
하류로 흐르는 물에 얼음은 얇아가고
따스한 햇볕 받으며 껍질 벗는 당산목
배달9220/개천5921/단기4356/서기2023/01/01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 가스라이팅(gaslighting) : 상황을 조작해 상대방이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들어
판단력을 잃게 하는 정서적 학대. '심리 지배'라고도 한다. 가스라이팅을 당한 사람은
자신의 판단을 믿지 못하게 되면서 가해자에게 점차 의존하게 된다.
* 용코 : 용빼는 재주를 속되게 이르는 말.
* 당산목 : 마을을 지켜 주는 신령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여 제사를 지내는 나무
덧붙임)
해빙기(1)
그동안 여러 家事가 겹쳐
近 1달만에 산성에 서다.
오늘도 씩씩하게 탐방하시는
아줌마, 아저씨들 행렬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아가니
아직은 찬바람의 가스라이팅에도 아랑곳없이
햇볕 감도는 아름다운 남문은 봄맞이 준비중.
남문의 수령 400년 느티나무도 당산목으로 당당한데
해빙기의 따스한 햇살맞으며 두툼한 겨울 외투같은 껍질을 벗고 있다.
사실 오늘 기대는 처녀치마나 할미의 봄눈이라도 볼까 했는데
지난 가을의 꽃향유, 기름나물, 달맞이들의 잔영만 관찰.
(2)
하지만 하늘 향한 우듬지 너머 파란 하늘로
아지랑이인 듯한 흐느적거림 포착.
마른 떡갈잎이 서걱이는 10암문을 돌아
덕운사 남향받이 따사로운 언덕에도 복수초는 조짐 없고
오히려 그 아래 개울에는 아직 두꺼운 얼음장 아래
해빙기의 봄으로 향하는 맑은 계곡수는
끊임없이 얼음의 두께를 지워내리며 下流를 향하고 있다.
어김없이 시절은 봄을 향하여 치달아 간다.
배달9220/개천5921/단기4356/서기2023/02/23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1) 경주김씨묘원(09:45-10:35)
2) 남문(11:25)
3) 제2비밀의정원의 무궁화, 꽃향유, 기름나물의 잔영(11:45)
4) 우듬지의 끝에 얼쩡이는 아지랑이
5) 제2남옹성(11:50)
6) 쑥부쟁이 잔영
7) 제3남옹성 조망
8) 제10암문 조망(12:10)
9) 남장대지(南將臺址, 12:20)
장대란 지휘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 건물로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다.
이 곳은 남장대가 있던 곳으로 성 남쪽에 있다하여 남장대라 불린다. 이 곳에는 남한산성에 주둔하던
수어청에 소속된 5영 중 전영장을 지휘하던 곳이다. 제2남옹성 바로 안쪽에 있었던 잔대로 주변 지형
을 보더라도 장대가 위치할 입지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1788년 부윤 이태영이 수어장대와 같이 2층
으로 고치고 타운루라 편액을 걸었으나 지금은 둥글게 잘 다듬어진 주춧돌만 남아있다. 남장대가 있는
이 지역은 제2남옹성치를 설치하여 장대 앞의 면적을 넓힘과 동시에 3개의 남옹성을 설치한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전략적으로 중요한 장대임을 알 수 있다.
남장대 연혁
남장대는 남한산성의 남쪽 2남옹성 바로 안쪽에 있는 장대이다.
장대란 성을 지키기 위하여 장수가 군사를 지휘하는 곳으로서
남한산성에는 서장대(수어장대, 無忘樓), 동장대(내,외부 2개), 남장대, 북장대등 5곳의 장대가 있었으나
현재까지 남아있는 장대는 서장대 하나 뿐이다. 그 중 규모가 큰 것이 남장대(타운루)이다.
남한산성을 축조한 후 성안에 수어청을 두었는데, 수어청에는 前.中.後.左.右의 5營이 있었고,
남장대는 후영장(혹은 전영장인 광주판관)이 배치되어 이곳에서 군사들 2,608인을 지휘하였다.
각 장대(5개)와 성안의 각 사찰은「신지(信地)」라 하여 성을 책임지고 지키는 관할구역을 정했다.
정조 12년(1788) 부윤 이태영이 세웠고,
순조 2년(1802) 유수 김관주가 고쳐지었다는 '타운루(唾雲樓)'가 있었다고 한다.
타운루는 중수하기 전에는 1층 누각이었으나,
18세기 중수하면서 2층 누각 형태로 건립되어 19세기 후반까지 남아있었다고 전한다.
남장대지에는 현재 초석만이 남아있는데, 모두 21개이다.
초석의 거리로 봤을 때 건물 규모는 동서880cm, 남북 880cm의 정방형 건물이다.
남장대에서는 성의 남쪽 방향과 성남의 조망이 잘 이루어져 적의 침입에 대비할 수 있었다.
광주부윤 이태영(李泰永)과 타운루(唾雲樓) 자료■ 승정원일기 1620책 (탈초본 86책) 정조 11년 2월 20일 1787년
李泰永에게 관직을 제수함
○ 備邊司薦望, 以李泰永爲廣州府尹。
■ 승정원일기 1620책 (탈초본 86책) 정조 11년 2월 24일 1787년
吏批의 관원현황
○ 有政。吏批, 判書尹蓍東進, 參判李秉模式暇, 參議徐鼎修內閣進, 行都承旨具㢞進。
以洪聖淵爲副校理, 尹弼秉爲分兵曹參知, 安昌郁爲律學校授, 故正李山重贈吏參例兼, 廣州府尹李泰永考。
■ 정조실록 26권, 정조 12년 9월 6일 1788년
선릉과 정릉에 전알하고 어가가 서빙고 나룻가에 머무르다.
선창을 보수하다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에 전알(展謁)하려고
어가(御駕)가 서빙고 나룻가에 이르렀는데, 경기 관찰사 홍수보(洪秀輔)가 아뢰기를,
"지난밤 2경(更)에 강물이 갑자기 불어나 선창(船艙)의 홍살문 안팎이 거의 정강이에 찰 정도로
물이 찼으므로 지금 지방관들을 독려해 선창을 축조(築造)하고 있습니다.
광주 부윤(廣州府尹) 이태영(李泰永)과 양주 목사(楊州牧使) 박천행(朴天行) 등을 아울러 파직하소서.“
하니, 내각 제조 김종수(金鍾秀)와 선공감 제조 서유린(徐有隣) 등에게 명하여
가서 물의 형세를 살피게 하였다. 이들이 돌아와서,
물이 불어나서 건너기 어렵다고 아뢰니, 좌의정 이성원(李性源) 등이 아뢰기를,
"강물은 가없이 아득하고 해는 벌써 석양으로 향하고 있는데 선창을 아직 완성하지 못했으니,
강을 건널 가망이 없습니다."하였다.
그러자 어떤 이는 회가(回駕)하기를 청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잠시 효창묘(孝昌墓)의 재전(齋殿)으로 거둥하여 물이 줄어들기를 기다리자고 청하였다.
우의정 채제공이 앞으로 나와 아뢰기를,
"해는 석양이 되려 하는데 야차(野次)에 어가(御駕)를 모셔 놓고서 시끄럽게 떠들어대기만 하고
팔장을 낀 채 앉아서 구경만 하니, 이것이 어찌 나라의 체통이며 신하의 직분이겠습니까.
당당한 천승(千乘)의 나라로서 한 줄기 물에 막혀서 회가(回駕)하자느니 주가(駐駕)하자느니 하는
의논이 있기까지 하니, 어찌 신하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효묘(孝廟)께서 거둥하실 때 다리가 불어난 물로 파괴되자,
그 당시 경기 감사가 특별히 사형(死刑)은 면했으나, 그래도 귀양을 갔습니다.
이번에도 한 사람의 목을 베어 기율(紀律)을 엄하게 한 뒤에야 조정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하고,
제공에게 명하여 양국(兩局)의 순뇌(巡牢)와 경기 감사·호조 판서 및 양국의 장신(將臣)를 거느리고서
선창 축조를 감독하게 하였다. 또 경기 관찰사 홍수보를 파직하고서
조정진(趙鼎鎭)으로 대신하게 하고, 이기(李夔)를 광주 부윤으로, 임시철(林蓍喆)을 양주 목사로
제수하여 함께 공사를 감독하게 하고,
전 경기 감사·광주 부윤·양주 목사는 백의(白衣)로 공사를 감독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과천(果川)·광주의 주민들과 좌우에서 구경하던 사람들과 어가를 수행하던 군병(軍兵)들이
조정의 명령이 없었는데도 죽음을 무릅쓰고 앞다투어 공사로 달려가서,
남은 배들을 선창의 물이 솟는 곳으로 끌어다가 차곡차곡 붙여 놓고 배안의 물건들을
배 위에 빽빽히 펴니, 신시(申時)가 되기 전에 공사가 끝났다.
이에 어가가 선창에 이르러 말을 타고 편안히 건너, 정릉으로 가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이어 선릉으로 가서 전배(展拜)하였다.
두 능의 능관(陵官)을 승서(陞敍)하라고 명하였다. 재실로 돌아와 묵었다.
광주유수 김관주(金觀柱)와 타운루(唾雲樓) 자료
1743년(영조19) 〜 1806년(순조6)
홍봉한(洪鳳漢)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시벽(時僻) 분당을 초래했으며,
1802년에는 신유사옥을 일으키는 데 앞장섰다(→ 노론). 본관은 경주.
자는 경일(景日). 아버지는 한록(漢祿)이다.
1765년(영조 41)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이 되었고, 이후 홍문관교리를 지냈다.
1772년 수찬으로 있을 때, 시파의 영수인 영의정 홍봉한의 척신정치를 제거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갑산에 유배되었다. 정조가 즉위하자 그의 상소는
당시 왕세손이었던 정조를 해치려는 음모로 비판되어 시벽당쟁의 원인이 되었다.
그뒤 복권되어 1793년(정조 17) 용궁현감에 임명되기도 했으나, 시파의 집권하에 말직을 전전했다.
순조가 즉위하고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벽파가 득세하자, 승진을 거듭했다.
첨지중추부사·이조참판·이조판서·양주목사·광주유수를 거쳐, 1802년에는 우의정이 되었다.
이때 김달순(金達淳)·심환지(沈煥之) 등과 함께 신유사옥을 일으켰다.
1804년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을 철회한 뒤,
다시 실시하려 하자 좌의정 이시수(李時秀)와 함께 반대하다 관직에서 쫓겨났다.
1806년 김조순(金祖淳)의 딸을 왕비로 책봉하는 데 반대하자
사당(私黨)을 꾸려 정조의 뜻을 배신했다는 죄명으로 대사간 신헌조(申獻朝)의 탄핵을 받고
경흥으로 유배가던 중, 이원에서 병으로 죽었다. 뒤에 신원되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10) 덕운사 복수초는 아직 동면중이지만 맑은 계곡수는 끊임없이 얼음의 두꺼운 외투를 벗기고(12:50)
11) 단공-경주김씨묘원-불망비-남문-제2남옹성-제3남옹성-10암문-남장대지-남문-덕운사(8km, 3시간)
Free as a Bird / Omar Akr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