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안길14(5장대, 2023/03/10, 환주, Eye In The Sky / Sirius)
이름없는풀뿌리2023. 3. 11. 19:03
요즈음 – 성안길14(5장대) –
병사들 발자국은 지워져 잊혀지고
주춧돌 나뒹구는 누각의 흔적 위로
先人이 남긴 詩片만 봄바람에 실려와
배달9219/개천5920/단기4355/서기2023/03/10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성안길14(5장대)(1) 계획
지난 번 봄소식을 못들어 나선 길
5장대(동장대, 외동장대, 서장대, 남장대, 북장대)의
의미를 되새기며 그 흔적을 다시 살펴보고
노루귀 자생지등 봄소식을 기대하며
하산길은 덕운사 복수초의 꽃을 살펴보려
아내의 차량 전송으로 남문 앞 하차.
(2) 남문-1남옹성-2남옹성-남장대터-암문-3남옹성-암문-시구문-수문-동문
(至和門, +45=45분(10:05-10:50), +1.8=1.8km)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지화문.
성루의 지붕에 드리운 우듬지 위로 파란 봄 하늘.
남성에 올라서니 넓은 잎의 떡갈나무 아래 쉼터를 지나
서장대와 더불어 2층의 타운루라는 누각을 가졌다던 남장대.
여기서 보면 청군이 진주한 검단산(신남성)을 마주하고
산성의 어느 곳 보다고 높고 견고하게 구축한 남성벽 위의 요충지임을 알겠다.
시구문을 나가 수문(水門)을 살펴보니 아직도 두꺼운 얼음.
근처 노루귀 자생지 구석구석 살펴보아도
어디에도 노루귀, 앉은부채, 현호색등 어느 애도
아직은 낙엽 속에 숨어 기척도 없다.
그런데 문득 다가온 길 가의 노루귀 한 포기.
아직도 찬바람이 기세등등한데
세상이 궁금한지 청보라의 앙증맞은 얼굴을 내밀고 있다.
(3) 동문-송암정-장경사-암문(장경사신지옹성)-동장대지
(左翼門, +50=95분(10:50-11:40), +1.5=3.3km)
동문을 지나 작년의 폭우로 폐쇄된
송암정 방향이 열려있어 나아가니
붕괴된 부분은 아직 미복구로 가림막으로 임시조치.
봄비가 오기 전 복구되어야 무사할텐데 복구 속도가 너무 느리다.
장경사신지옹성 너머 한봉을 보며 올라
동장대지 기반을 살펴보며 서어나무 아래 자리 잡아
잠시 휴식후 봄 아지랑이 가물거리는 봉암성을 바라보니
홍타이지가 홍이포를 쏘아대던 벌봉 아래
외동장대지가 숲 속에 보일듯 말듯하다.
제4암문, 북문 방향으로 向.
(4) 동장대지-3암문(봉암성)-2군포터-4암문-1군포터-북문
(+25=120분(11:40-12:05), +1.4=4.7km)
곧 사라질 상사창동의 게딱지같은 마을을 내려다보며
급전직하의 성벽길을 내려가 지난 폭우가 할퀸 4암문 주변을 살펴보니
막혔던 水口와 폐쇄되었던 4암문도 개방.
송림이 시작되는 옥정사, 현절사 갈림길을 지나
지난 가을 아름다웠던 붉나무 상단을 지나니 복원중인 북문 도착.
(5) 북문-북장대지-5암문(연주봉옹성)-매탄터-서문
(全勝門, +20=140분(12:05-12:25), +1.1=5.8km)
북문 가설울타리 계단을 올라
울창한 송림이 우거진 폐허의 북장대지에 다다르니
알림판이 없으면 여기가 북장대터임을 알지 못하겠다.
북장대는 초기에만 누각이 있었고
곧 필요성이 없어져 오랫동안 터만 남은 듯...
(6) 서문-병암-수어장대-6암문(서암문)-영춘정-남문-덕운사
(右翼門, +45=185분(12:25-13:10), +3.3=9.1km)
멀리 발굴조사 중인 국청사지를 바라보며
울창한 송림 터널을 지나니 오늘의 하이라이트 서장대(수어장대).
숙종의 장인 김만기와 세도가 김석주의 [登西將臺]란 詩를 상기.
둘 다 여기서 긴 강이 돌아든다고 노래했는데
숲이 지금만큼 우거지지 않았었음을 감안하더라도
여기 서장대에서는 강이 보이지 않는데 다만 의미로서 수용해야 할 듯...
廣州留守(兼守禦副使) 김만기(金萬基, 1633인조11 ∼ 1687숙종14)
「西將臺記」 (1667년 11월부터 1669년 1월 근무)
千尺層臺迥
천 자나 되는 층대 빛나니
曾經百戰來
일찍이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네
艱危那忍說
어렵고 위태로움 어찌 차마 말하리
鎖鑰愧非才
성 지키던 자 재목이 아님 부끄럽구나
大野茫茫遠
큰 들은 아득히 멀고
長江曲曲廻
긴 강은 굽이굽이 돌아가네
愀然倚孤劍
추연히 외로운 검에 기대어
斜日獨徘徊
해거름에 홀로 배회하는구나
守禦使 김석주(金錫冑, 1634인조12 ~ 1684숙종10)
(1674년 9월부터 1678년 御營大將으로 이배되기까지 4년 동안 근무)
「遊南漢山城感舊」 8수 중 [登西將臺]
靑春獨上漢南臺
청춘에 홀로 남한대에 올랐는데
臺下長江入海廻
대 아래엔 긴 강이 바다에 돌아드네
日暮煙塵迷北望
해지자 연진 속의 북쪽 시야 아득한데
不堪孤劍吼風雷
외로운 칼에 우는 풍뢰 소리 견딜 수 없네
「遊南漢山城感舊」 8수 중 [望可汗峰],
一夕胡烽照漢宮
하룻밤에 오랑캐 쳐들어왔단 봉화 오르니
先王於此駐飛龍
선왕께서 여기에 행차하셨네
誰知百二金湯地
누가 알았으리, 이만이 백만을 막는 금성탕지에
更有吳山立馬峯
다시 오산의 입마봉이 있었음을.
「遊南漢山城感舊」 8수 중 [觀西暗門破賊處],
壯士橫戈壓虎關
장사는 창을 비껴 호관을 누르고
西門一箭破完顏
서문에서 날린 화살 完顔을 깨뜨렸네
至今雉堞連雲處
지금도 성가퀴는 구름 속으로 이어지니
猶有當時戰血斑
외려 당시 싸우던 피 자국 있으리.
先人의 詩片을 생각하며
지화문을 지나 덕운사로 하산하니
기대했던 복수초가 샛노란 꽃 몇 송이를 보여주고
상사화와 원추리도 봄바람에 기지개를 펴며
수북한 낙엽을 뚫고 연둣빛 잎사귀를 내밀고 있다.
(7) 후기
산성은 기대에 부응하듯
노루귀와 복수초를 보여주고
따스한 봄바람에 큰뱀무와 곰보배추등의 동태도 보였다.
이제 부지런히 산성을 오르내려야겠다.
9.1km, 봄바람에 깊은 땀을 흘리며... 천천히 4시간여...
배달9219/개천5920/단기4355/서기2023/03/10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1) 남문(11:55)
2) 아름드리 떡갈나무 쉼터(12:11)
3) 타운루라는 2층누각이 있ㄲ었다는 남장대지(12:13)
4) 산성 곳곳에 와편과 전돌이 쌓여있는데 체계적 보관 필요
5) 제10암문 조망(12:22)
6) 큰뱀무도 고개를 내밀고...
7) 시구문(11암문)을 거쳐 살펴본 성안 우물 80개, 연못 45개의 유일한 배출구인 水門(12:40)
8) 잘 살펴보아도 보이지 않던 노루귀가 길 가에서 반겨주고...
9) 동문에 오른 산객들(12:47)
10) 장경사 포루에서 본 한봉(13:00)
11) 장경사 송림(13:07)
12) 인조 대에는 누각이 있았다는 동장대지(13:28)
13) 동장대지에서 본 가 보고 싶은 봉암성(13:30)
13_1) 2020/10/10 가 본 외동장대지에서 본 풍경
14) 제4암문으로 내려가는 길에 본 상사창동(13:43)
15) 인조 대에는 누각이 있었다는 북장대지(14:22)
15_1) 2022/04/11 본 북장대지 후면
16) 서장대(수어장대, 14:50)
17) 다시 돌아온 남문을 나와 덕운사 방면으로...(15:15)
18) 덕운사 초롱꽃(15:30)
19) 덕운사 복수초
20) 덕운사 상사화
21) 공예관 원추리(15:40)
29) 오늘의 여정(남문-남장대지-시구문-동장대지-북장대지-수어장대-남문-덕운사, 9km, 4시간여)
남한산성 장대 연혁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 각 방면에 각각 하나씩 4개의 장대와
봉암성에 외동장대를 설치하여 5개의 장대가 있었다.
그런데 17세기 말경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영남대박물관 소장의「남한산성도」를 보면
당시에 동장대, 북장대, 서장대, 남장대에 각각 단층누각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외동장대는 누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8세기 중엽에 제작된 「해동지도」에는 각 장대의 위치만 표기되어 있을 뿐
누각은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5장대의 누각이 모두 붕괴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영조 27년(1751) 부윤 이기진이 서장대에 무망루(無忘樓)를 건립하고,
정조 12년(1788) 부윤 이태영이 남장대에 타운루(唾雲樓)를 건립하였다는
『남한지』의 기록내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9세기 초.중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소장의 「남한산성도」에는
서장대와 남장대만이 이층누각 형태의 건물이 있을 뿐,
북장대와 동장대 그리고 외동장대는 터만 남아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은 1872년에 제작된 규장각 소장의 「광주부도」에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남한산성에 구축된 5장대 중 외동장대를 제외한
4장대는 17세기 말엽까지는 단층누각 건물이 있었으나,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5장대 모두 건물은 무너지고 터만 남아 있게 되었다.
18세기 중.후반에는 서장대와 남장대가 2층누각 형태로 건립되어 19세기 후반까지 남아 있었으며,
그중 서장대인 수어장대만이 지금까지 남아 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〇 동장대는 남한산성의 동북쪽 모서리 부분의 해발 501m 지점에 위치한다.
이곳은 서쪽에서 뻗어나온 줄기가 망월봉을 이루며 갈라져 한줄기는 남쪽으로 내려가고
다른 한줄기는 동북쪽으로 이어져 법화봉을 이루고 있다.
동장대 부근은 여주목사(좌부별장)가, 그리고
외동장대는 죽산부사(후영장)가 각각 군사 1,991인, 2,608인을 지휘하여 방어책임을 맡았던 곳이다.
동장대는 원성의 동북쪽 모서리 부분이며, 해발 501m 망월봉 정상에 위치한다.
이곳은 현재 터만 남아 있으며 축대를 쌓아
동-서 21m, 남북 17m에 동쪽 변의 축대 높이는 350cm이고 장대의 면적은 357㎡이다.
이곳에는 전돌과 와편이 산재되어 있으며 지상에는 4개의 초석이 남북방향으로 노출되어 있다.
동장대에는 인조 2년(1624) 산성수축시 동장대가 설치되고 누각이 함께 건축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1750년대에 제작된 「海東地圖」이후의 지도에 보면 장대의 누각이 나타나지 않고
터만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18세기 초에 누각이 무너지고 난 이후
다시 누각을 건립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〇 북장대는 북문에서 서북쪽으로 245m 거리의 해발 405m 지점에 위치한다.
이곳은 연주봉 쪽에서 내려온 능선이 봉우리를 이룬 곳으로서
정상부에는 비교적 넓은 평탄지가 조성되어 있고,
석축단이나 담장 시설로 보이는 축대가 일부 노출되어 있으나
전체적인 규모나 구조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상태이다.
이곳은 남한산성의 수어청 중 중영장인 양주목사의 信地로서 병사 2,608명이 배치되었다.
북장대는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수축시에 단층의 누각이 함께 지어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영남대학교소장 「남한지도」를 보면 17세기 후반까지도 남아있던 이 장대는
그후 18세기 초에 붕괴되어 18세기 중엽의 「해동지도」이후부터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것으로 보아
1700년대 초에 붕괴된 이후 다시 수축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비교적 후기까지 남아있었던 남장대의 경우에는 초석까지 원위치에 잘 남아 있으나
북장대는 그 터조차 찾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상태가 심한 것도 이러한 상황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〇 서장대는 남한산성의 대표적인 장대로
서쪽 주봉인 청량산 지상에 세워져 있는 이 건물은
지휘 및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어진 누각이다.
성내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게 지어진 누각과
건물의 왼쪽에 사당인 청량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어장대 뒤편에는 우물이 나란히 2개가 있어 장대에 근무하는 장졸에게 음료수를 공급하였다.
이 건물은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축성 때 단층누각으로 지어 서장대라 불리던 것을
영조 27년(1751) 유수 이기진이 왕명으로 이층누각으로 증축하였다.
남한산성의 수어는 처음에 총융청이 맡았으나 성이 준공되자 수어청을 따로 열어 전담하게 하였다.
수어청에는 전/후/좌/우/중의 5영이 소속되는데
전영장은 남장대에,
중영장은 북장대에,
후영장과 좌영장은 동장대에,
우영장은 서장대에 배치되어 소속된 군인을 지휘하였다.
인조 14년(1636) 1월 18일에는 산성에 들어온 인조가 성을 순찰하다가
서장대에 이르러 장사들을 격려하고 행궁으로 돌아 갔다는 기록이 보인다.
『南漢誌』에는 광주유수 이기진이 쓴 다음과 같은 「수어장대기문」이 기록되어 있다.
그 서쪽으로는 평야가 연결되어 바로 한강으로 닿으니
오랑캐가 일찍이 진을 치고 대장기를 세웠던 곳이다.
비록 한강의 흐름을 기울여도 당일의 비린내는 씻지 못할 것이다.
동으로 하나의 봉우리가 있어 可汗이라고 이름한다.......슬프다.
터와 묘가 슬픔을 일으키고 종묘가 공경을 일으킴은 천리의 양심이라
그 환경을 따라 말없이 느끼며 유연히 생기나니
진실로 그 서연(黎然)과 유연(油然)의 발단을 인하여 확대한다면 인과 예의 실을 못다 쓸 것이다.
이 대에 오르고도 그 감개하고 탄식하지 않을 자가 있을까.
누구나 이것을 말미암아 더욱 충성의 의를 힘쓴다면
이 장대에서 웃는 것이 어찌 홀로 부하나 사열하고 형세나 찾고 말리오.
만약에 혹시라도 풍경이나 구경하고 유람이나 탐하면서
다시는 감개하고 탄식하는 마음이 없다고 하면 이는 이른바 그 양심을 잃은 자 일 것이다.
후인에게 경계하며 또 고하노라.
수어장대는 하층 정면5칸, 측면3칸, 상층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양식 2층 누각이다.
지붕은 상하층 모두 겹처마를 둘렀으며 사래 끝에는 토수를 달고
추녀마루에는 용두를 올렸으며 용마루에는 취두를 올렸다.
건물의 기둥은 높이 60cm의 팔각장주초석 위에 올려져있고, 포는 주심포 양식의 이출목익공식이다.
1층의 사방 1칸은 복도로 비워두고 정면3칸, 측면2칸만을 장마루를 깔고 사방에 높이 45cm의 난간
을 둘렀다. 이층은 1층 우측 뒷켠에 있는 사다리를 통하여 올라갈 수 있도록 하였다.
2층은 무망루라 하는데 1836년 유수 박기룡이 증축한 것이다.
2층은 정면3칸, 측면2칸의 사방에 판문을 달았으며,
판문에는 태극무늬를 그렸다. 천정양식은 연등천정을 하였다.
〇 남장대는 남한산성의 남쪽 2남옹성 바로 안쪽에 있는 장대이다.
장대란 성을 지키기 위하여 장수가 군사를 지휘하는 곳으로서
남한산성에는 서장대(수어장대, 無忘樓), 동장대(내,외부 2개), 남장대, 북장대등 5곳의 장대가 있었으나
현재까지 남아있는 장대는 서장대 하나 뿐이다. 그 중 규모가 큰 것이 남장대(타운루)이다.
남한산성을 축조한 후 성안에 수어청을 두었는데, 수어청에는 前.中.後.左.右의 5營이 있었고,
남장대는 후영장(혹은 전영장인 광주판관)이 배치되어 이곳에서 군사들 2,608인을 지휘하였다.
각 장대(5개)와 성안의 각 사찰은「신지(信地)」라 하여 성을 책임지고 지키는 관할구역을 정했다.
정조 12년(1788) 부윤 이태영이 세웠고,
순조 2년(1802) 유수 김관주가 고쳐지었다는 '타운루(唾雲樓)'가 있었다고 한다.
타운루는 중수하기 전에는 1층 누각이었으나,
18세기 중수하면서 2층 누각 형태로 건립되어 19세기 후반까지 남아있었다고 전한다.
남장대지에는 현재 초석만이 남아있는데, 모두 21개이다.
초석의 거리로 봤을 때 건물 규모는 동서880cm, 남북 880cm의 정방형 건물이다.
남장대에서는 성의 남쪽 방향과 성남의 조망이 잘 이루어져 적의 침입에 대비할 수 있었다.
Eye In The Sky / Siri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