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목가시인부록8) 신석정(辛夕汀)을 왜 저항시인이라 하는가?

이름없는풀뿌리 2023. 10. 10. 07:39
■ 부록8) 신석정(辛夕汀)을 왜 저항시인이라 하는가? □ 부록8-1) 신석정(辛夕汀) 시인은 누구인가? □ 부록8-2) 신석정(辛夕汀)-“韓醫와 佛典 버리고 詩의 길 열어” □ 부록8-3) 친일에 빠진 서정주, 그를 걱정한 선배 시인 신석정 □ 부록8-1) 신석정(辛夕汀) 시인은 누구인가? 신석정(1907-1974) 시인의 본명은 석정錫正, 관향은 영월寧越이고, 아호는 석정夕汀을 주로 썼다. 구 한말 간재艮齋 전우田愚문하에서 유학을 닦으신 신기온辛基溫과 이윤옥李允玉의 차남으로 1907년 7월 7일 전라북도 부안군 동중리에서 태어났다. 부안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향리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일찍이 망국의 한에 젖은 시인은 명리보다 시문의 길을 걸었다. 1924년 조선·동아·중앙의 지상에 시를 발표하였다. 1926년 스무 살 때 김제 만경인 박소정朴小汀과 혼례를 올렸다. 슬하에 4남 4녀를 두었다. 그 뒤 1930년 상경하여 지금의 동국대학교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中央佛敎專門學校 박한영朴漢永문 하에서 1년 남짓 불전을 연구하며 회람지「원선圓線」을 편집하기도 하였다. 1년여 끝에 전원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귀향하여 1933년 지금 석정문학관 경내에 있는 고택인 청구원靑丘園 집을 마련했다. ▲ 겨레의 향수를 노래한 서정시인-1924년 조선일보에 <기우는 해>로 중앙문단 데뷰 1939년 첫 시집「촛불」이 발간되자 김기림은 시문학사에 휘황한 횃불을 밝혀든 목가시인이라 말하였 다. 겨레의 향수를 노래한 목가로서 독자들의 공감대 또한 드넓었다. 광복 후에도 시인은 고향을 떠 나지 않았다.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18일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결성에 참여했다. 부안에서 ‘중학 설립기성회’를 조직하여 개교를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1946년 3월 1일 부안중학교가 개교되 어 서울 등지에서 교사를 초빙해 왔으나 마땅한‘국어’ 담당자가 없어 국어교사로 근무했다. 그 후 시창작과 교육으로 일관했다. 6·25 한국전쟁 이후 태백신문사 고문을 지내다가 1954년 전주고 등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55년부터는 전북대학교에서 시론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1961년(55세) 5 월 5.16 직후‘교원노조’를 지지하는 시「단식의 노래」와 혁신계 신문「민족일보」에 발표한「춘궁 은 다가오는데」,「전아사餞迓詞」등의 작품 때문에 당국에 구금되었다가 8일간 혹독한 취조를 받고 가까스로 풀려났다. 1961년에 김제고등학교, 1963년부터 1972년 정년퇴직 때까지는 전주상업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그의 시작활동은 1924년 4월 19일자 조선일보에 소적蘇笛이라는 필명으로 <기우는 해>를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뒤 1931년「시문학」지에 시〈선물〉을 발표하여 그 잡지의 동인이 되면서부터 본격 적인 작품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1974년 7월 8일 동아일보에 유고시「뜰을 그리며」를 남기기까지 장장 반세기의 시력詩歷을 지니고 있다. 우리 시문학사에서 이렇게 일생을 오로지 시 창작에만 몰두 한 시인은 흔치 않다. 설령 오랜 문단 활동을 지속했다 해도 끝내는 이를 발판으로 권력이나 금력을 탐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시인은 일생을 교육계에 종사하면서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조금 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지조를 지키며 삶을 마감했다. 1973년 12월21일 전북문화상 심사 도중 뇌혈전증으로 졸도한 석정은 200일이란 기나긴 시간을 병상에 서 투병했으나 1974년 전주 남노송동 비사벌초사(석정 시인의 전주자택)에서 향년 예순여덟으로 생을 마쳤다. ▲전주시 남노송동 주택 재개발 예정 부지에 자리한 신석정 시인의 고택 '비사벌초가’ 석정시인은 일제 말 협박 강요하던 창씨개명을 거부하기 위하여 생계를 꾸려야 할 직장도 버리고 군 징집의 위협에 한동안 잠적할 정도로 일제에 저항적이어서, 문예지에 투고한 작품이 사상불온으로 검 열에서 삭제되기도 했고 일본어로 시 쓰기를 청탁받았으나‘차라리 푸른 대’로 살기 위하여 아예 붓 을 꺾었다. 석정시인은 자연의 세계에서 꿈꾸는가 하면 삶의 현장에서 신음소리를 뱉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시문학사는 첫 시집인「촛불」에서‘이 밤이 너무나 길지 않습니까’의 울부짖음은 잊고‘그 먼 나라 를 알으십니까’의 속삭임만을 기억하여, 시인의 시세계를‘목가시’니‘전원시’니 하는 한정된 울 안에 유폐시켜 놓았다. 그렇지만 그 꿈의 속삭임조차도 일상의 아름다운 농촌의 풍경을‘먼 나라’에 설정한 아이러니이어서‘그 먼 나라’가 부재하는 현실을 부각시켰다고 할 수 있다. 석정시인은 한시에도 능했다. 그의 조부, 부친과 맏형인 신석갑辛錫鉀(1904-1975)이 한학과 한시에 조예가 깊었듯이 석정 또한 한시漢詩에서 시적 감성을 길어 올려 시 창작의 에너지로 삼았다. 자연히 한시도 번역하게 되었다. 제대로 된 한시 번역서가 없을 때 석정이 번역한 한시는 교과서다운 역할을 당당했다. 또 향리 출신인 이매창李梅窓의 시를 번역하여 지방의 기생 시인으로 자칫 묻혀버릴 그녀 를 조선의 빼어난 시인으로 새로 부각시켰다. 시인은 때로는 논설과 수필로 자신과 이웃과 국가와 자연이 가지는 당위의 세계와 실제의 세계를 이 성과 감성을 통하여 여과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기와 기행, 그리고 편지와 전기 등 다양한 장르 를 동원하여 스스로를 노출시켜 사회와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선생은 습작 투고기에 소설을 쓰기 도 했다. 시인은 시론을 직접 집필하여 이를 대학에서 강의하고 이에 입각하여 각종 현상모집에서 시 작품을 심사하고, 이러한 시론으로 많은 후학들의 시집이나 저서에 서문을 얹어 그들을 지도 편달하 고 고무시켰다. 또 문예지의 추천위원으로 참여하여 여러 시인들을 문단에 등용시켰다. <신이영 : 32世 / 일옹공파 종회 회장> □ 부록8-2) 신석정(辛夕汀)-“韓醫와 佛典 버리고 詩의 길 열어” 문인의 遺産, 가족 이야기 〈14〉 시인 辛夕汀의 후손들 월간조선 2016.01.26.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 평생 고향인 전북 부안(靑丘園)과 전주(比斯伐 艸舍)에서 詩作… 1500여 편 작품 남겨 ⊙ 4대째 이어온 韓醫 집안의 차남으로 태어나 자연을 노래한 牧歌시인 ⊙ 鄭芝溶, 朴龍喆, 金永郞 등과 함께 시문학파로 활약… 死後 재평가 이뤄져 신석정의 아들 광연씨. 당시(唐詩)를 좋아한, 도연명(陶淵明)을 꿈꾼 시인이었다. 평생을 자연과 생활을 노래하고 백자와 벼 루, 붓, 한지와 함께한 그의 시에는 문향(文香)과 묵향(墨香)이 배어 있다. ‘목가(牧歌)시인’이라 불린 그는 한국 시단에서 독특한 서정 세계를 구축했다. 시인 신석정(辛夕汀·1907~1974)은 도연명이 될 수 없었던 가혹한 시대에 태어나 은사(隱士)를 꿈꾸 며 수많은 서정시를 남긴 인물이다. 평생을 전북 부안과 전주에 머무르며 1500여 편의 시를 썼다. 대 표작으로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꽃덤풀〉 등이 있다. 해 방과 6·25를 겪으며 그의 시정신은 비판적 저항시로 나아갔으나 거칠지 않은 서정의 면모를 그대로 이었다. 전주 ‘비사벌 초사’에서 시인 신석정. 178cm의 훤칠한 키에다 서구적인 쌍꺼풀, 약간의 코멘소리, 해학이 뛰어난 말씨, 섬세하고 다정다감 하며 악하지 못한 마음씨 등과 관련한 시인의 추억담은 여전히 전주와 부안에서 회자한다. 부안읍에 ‘석정문학관’이 세워지고 해마다 ‘석정문학제’가 개최되고 있으며, 석정기념사업회가 2014년 출 범, 상금 3500만원(중견시인 3000만원, 신인 500만원)을 내건 ‘석정문학상’이 작가들을 들뜨게 한 다. 시인이 떠난 지 40년이 넘었지만 그의 이름은 여전하다. 기자는 신석정의 슬하 8남매 중 3남인 광연(辛光淵·80)씨를 만났다. 장남과 차남은 이미 사망한 상 태다. 경기도 안양에 거주하는 그는 《동아일보》 기자와 《경인일보》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아버지는 8남매 모두를 부안에서 낳으셨어요. 문학 공간으로 부안과 전주의 무게가 비슷하지만 생 애 후기에 역사성과 철학성의 완숙미가 더 깊어졌다고 할까요? 하지만 부안에서 쓰신 초기 시가 더 많이 알려졌어요.” 시인은 전북 부안읍 동중리(東中里)에서 태어나 여덟 살 무렵 선은리(仙隱里)로 이사해 그곳에서 부 안보통학교를 다녔다. ‘신선이 은거한(仙隱)’ 마을은 평생의 문학적 토양이 되었다. 청구원 시절의 辛夕汀 전북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 560. 靑丘園이라 불리던 신석정 복원 고택.(현 신석정문학관) “‘선은동’은 비산비야(非山非野)라 할 전원에 자리 잡은 아담한 마을입니다. 마을 앞산이자 부안 읍의 뒷산이 상소산(上蘇山)입니다. 이 산에서 서북쪽으로 내려온 산줄기 끝쪽 작은 구릉에 안긴 마 을이 선은동이죠. 이름부터가 동화 속 나라처럼 들리는 이 마을에서 아버지는 첫 시집 《촛불》(1939 년 간행)과 둘째 시집 《슬픈 목가》(1947년 간행)를 내셨어요. 전주로 옮기셨던 마흔다섯까지 줄곧 부안에서 사셨습니다.” ―시인이 남긴 1500여 편의 시 가운데 어떤 시를 가장 좋아하세요. “초기작인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를 가장 좋아합니다.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내려오면, 양지 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뜯고, 길 솟은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결소리 구슬피 들 려오는…’ 이 구절은 상소산을 내려와 선은동에 이르는 길의 여정과 너무 흡사합니다.” 평생을 부안과 전주를 못 벗어난 그가 어떻게 정지용(鄭芝溶), 박용철(朴龍喆), 김기림(金起林, 片 石村), 김영랑(金永郞), 이하윤(異河潤) 시인 등 서울의 기라성 같은 문인들을 만나 ‘시문학파’가 됐을까. “아버지는 25세 무렵인 1930년 상경해 동대문 밖 대원암(大圓庵)에 있던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만해(萬海) 선생과 더불어 당대 거벽으로 추앙받던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1870~1948) 선사에게 불전(佛典)을 배우셨어요.” 그 무렵 한국 불교계의 사상적 지도자였던 석전은 수많은 제자를 길렀는데 문인 중에는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 벽초 홍명희, 위당 정인보, 조지훈, 신석정, 서정주 등이 그의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석정은 학문으로서 불전을 배웠을 뿐이었다. 대신 총독부 도서관을 찾아 루소와 타고르 등의 서적을 탐독했고 노장철학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이 무렵 시문학파 시인들과 교류하게 됐었고 1931년 10월 《시문학》지 3호에 〈선물〉이라는 시를 싣게 된다. “1935년 2월 어머니의 부음 소식을 듣고 귀향하기까지 서울에 머무르셨죠. 문우(文友)들의 만류를 뒤로하고 다시 부안으로 내려와 초가삼간의 집을 짓고 옥호를 ‘청구원(靑丘園)’이라 부르셨어요. 그곳에 은행나무, 벽오동, 목련, 산수유, 철쭉, 신우대, 등나무 등을 심으셨는데 8남매 모두 청구원 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현재 청구원이라 부른 신석정의 고택은 ‘전라도 기념물 제84호’로 지정돼 있다.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천생 시인이 되게끔 좋은 환경을 타고나셨던 것 같아요. 한학을 깨치고 한시 를 곧잘 지으셨던 증조부와 조부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란 데다 산 높고 물 맑고 바다가 푸른 고향의 산천 또한 일조가 됐을 겁니다. 여기에 아버지의 풍부한 감수성이 더해져 그분만의 독특한 시의 세계 를 이루지 않았을까 여겨져요. 또 소년 시절, 마을 어른들이 집으로 들여보낸 참외 꾸러미를 보시고 ‘얼마나 참외밭가에 서성댔으면 이런 것을 주었겠느냐’고 호되게 야단친 조모님의 조백(早白)도 영 향을 미쳤다고 봐요. 이런 일도 있었어요. 초등학교 6학년 무렵, 한 하급생이 수업료를 못 내 전교생 앞에서 발가벗겨지는 벌을 받자, 아버지가 스트라이크(동맹 파업)를 주도해 무기정학을 받았어요. 불 의를 외면하지 않던 올곧은 성품이셨죠. 아버지는 분명 ‘목가시인’이셨으나 시 속에 부조리한 현실을 은유적으로 노래하셨어요.” 광연씨는 청구원에 대한 추억이 많다고 했다. “이른 봄 제일 먼저 화신(花信)을 전하는 꽃은 개나리와 닮은 ‘영춘화’였어요. 거실이자 아버지의 서재이기도 했던 큰방 남쪽 유리창 밖 자그마한 돌무덤 가운데 심어진 영춘화는 겨울이 채 가기도 전 에 연황색의 가녀린 꽃을 터뜨려 청구원에 봄을 불러들였어요. 더러는 늦은 눈발이 흩날릴 때, 성급 히 피어나 삭막한 정원이 생기를 띠게 만들었습니다.” 시문학파와 辛夕汀의 만남 -‘대승기신론’ 수업 끝내고 朴龍喆 집 찾아 신석정은 마명(馬鳴) 정우홍(鄭宇洪)의 소개로 1930년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불전을 배운다. 그러나 불경보다는 문학에 마음이 갔다. 승려들을 규합해 《원선(圓線)》이라는 프린트 회람지를 만들어 돌 려 읽곤 했다. 시인은 1931년 10월 《시문학》 3호에 시 〈선물〉을 발표하고 시사(詩史)에 굵직한 이름을 올렸다. ‘시문학파’는 용아(龍兒) 박용철(朴龍喆·1904~1938)의 출자로 만들어진 시 동인지 《시문학》 (1930년 3월~1931년 10월)을 중심으로 활약했던 시인들을 말한다. 박용철, 김영랑, 정지용, 정인보, 이하윤, 신석정 등이 이에 속한다. 동인지는 3차례 발간으로 막을 내렸지만 신선한 비유와 회화적인 이미지로 한국문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시문학파 시인들과 신석정의 인연은 1931년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문학》지와 인연이 되어, 하 루는 용아(박용철)가 석정에게 ‘틈을 내서 꼭 한 번 와달라’는 엽서를 보냈고, 석정은 ‘대승기신 론’ 수업이 끝난 길로 종로 낙원동 박용철 집을 찾아갔다. 그의 집은 시문학파의 소굴이었다. 때마침 까만 두루마기를 입은 ‘촌뜨기’ 정지용과 양복바람의 화가 이순석이 나타나고 술상이 차려 졌다. 시인 이하윤도 그 자리에서 처음 만나 알게 됐다. 한잔 술을 들이켠 정지용이 일어서서 자신의 〈향수〉를 낭랑한 목소리로 읊고 뒤이어 신석정과 김영랑·박용철·김기림의 시를 줄줄 외더란다. 용아의 집은 시낭독과 노래, 문학적 담론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석정은 평생 시문 학파 시인들과 문통(文通)을 나누었다. 석정은 잡지 《조광》(1939년 10월호)에 쓴 산문 〈슬픈 구도(構圖)〉에서 이렇게 당시를 회고했다. “…더구나 틈만 있으면 낙원동에 있는 시문학사(詩文學社)에 박용철을 찾아가 지용 선배와 어울려 술을 마시게 되고, 때로는 주요한 선배를 찾아가 동광사(東光社)를 드나들었고, 불교사(佛敎社)에 들 러 한용운 스님을 만나 뵙는 것이 거의 주기적인 일과이고 보니, 숫제 불경 공부는 될 턱이 없었다.…” 청구원을 찾아온 시인 張萬榮과 徐廷柱 가운데 신석정·박소정 부부를 중심으로 오른쪽부터 반시계방향으로 3녀 소연, 큰며느리 김순이, 차 녀 란, 장녀 일림, 맏사위 최승범, 아동문학가 최승렬, 3남 광현, 당질 예영, 사촌 희영, 4녀 엽이다. 계속된 신광연씨의 회고다. “청구원 초기에 심긴 나무들이 나이테를 늘리면서 이내 숲을 이루자 계절마다 곤줄박이, 박새, 동박 새, 비비새 등 귀여운 새들이 드나들며 더러는 둥지를 틀어 새끼를 치기도 했어요. 어느 해 늦가을에 는 숲이 우거진 정원 안에 작은 개울이라도 있으리라 싶었던지 청둥오리가 짝지어 내려앉는 진풍경을 보았지요. 그 시절, 아버지는 청구원을 가꾸시며 주경야독으로 식견을 넓히고 시작(詩作)에 정진, 시집 《촛 불》과 《슬픈 목가》를 내셨는데 해가 설핏하면 촛불을 밝혀 놓고 밤이 이슥도록 작품을 짓고 다듬 으셨죠. 한 번 쓴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두 번, 세 번 퇴고하며 되짚어 낭송할 때 그 낮으면서도 그윽 했던 아버지의 목소리는 나를 먼 꿈나라로 이끌어주던 달콤한 자장가가 되었습니다.” 청구원에는 여러 문인이 그를 찾아왔다. 황해도에서 중학교를 갓 졸업한 문학소년 장만영(張萬 榮·1914~1975)과 고창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서정주(徐廷柱·1915~2000) 또한 매년 찾았다. 경성 제2고보 출신인 시인 장만영은 김억(金億)에게 시를 배웠고 《양(羊)》 《축제》 등 8권의 시집 을 펴냈다. 훗날 《서울신문》 출판국장을 지냈고 문예지 《신천지(新天地)》와 학생문예지 《신문예 (新文藝)》를 주간(主幹)하기도 했다. 시인 장만영(앞)과 신석정. 《조선일보》 교열부 기자를 역임한 장만영 시인의 아들 석훈(대한언론인회 전문위원)씨의 회고다. “1935년 아버지 장만영은 신석정 시인의 처제와 결혼했는데 그 인연은 청구원에서 시작됩니다. 신석 정 시에 매료된 문학청년 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쌀 한 말로 인절미를 만들어 달라 하여 황해도서 떡을 지고 전북 부안의 청구원으로 찾아간 겁니다. 석정 시인의 풍모와 인격에 반한 아버지는 더 깊은 인 연을 맺고 싶어 ‘저 장가 보내주세요’라고 청했다고 해요. 시인은 즉각 아내의 여동생 16세 처제 (朴英圭)를 소개해 주었어요. 너무 어린 소녀인지라 3년간 편지만 주고받다가 혼례를 올렸습니다.” 서정주도 신석정을 자주 찾아왔다. 젓갈과 천일염으로 유명한 ‘곰소만(灣)’을 사이에 두고 북쪽 부 안은 신석정, 남쪽 고창은 서정주의 고장이다. 이번에는 신광연씨의 말이다. “아버지보다 8세 아래인 서정주 시인이 처음 청구원을 찾았을 때 일입니다. 한 농부가 밀짚모자를 쓰고 열심히 일하고 있었는데 한참을 쳐다봤다고 해요. 농투성이 모습이 시 쓰는 양반 같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런 인연으로 두 분은 많은 정을 나누셨는데, 1943년인가 당시 흑석동에 살던 미당(未堂)에 게 〈흑석고개로 보내는 시〉라는 헌시를 쓰셨어요.” 이 시는 미당의 〈문둥이〉에 대한 일종의 화답시다. 미당이 ‘해와 하늘빛이/문둥이는 서러워//보리 밭에 달 뜨면/애기 하나 먹고//꽃처럼 붉은 울음을 울었다’고 노래하자 석정은 ‘정주여/나 또한 흰 복사꽃 지듯 곱게 죽어갈 수도 없거늘/이 어둔 하늘을 무릅쓴 채/너와 같이 살으리라/나 또한 징글징 글하게 살어 보리라’고 적었다. 서정주와 신석정은 닮은 점이 많다. 두 사람 모두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당대 석학인 박한영에게 학문으로 불전을 배웠고 두 사람 모두 불교 대신 문학으로 꽃을 피웠다. 부안과 고창이란 문학적 공 간도 닮아 있다. 창씨개명 거부해 郡서기 그만둬 신석정 시인이 낙향 후 면서기와 군서기로 일한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일제가 식량통제를 강화 하기 위해 마련한 조선식량영단(朝鮮食糧營團)에서 일한 경력도 있다. 그러나 일제가 창씨개명을 요 구해 시인은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고 한다. “아버지는 창씨개명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어요. 그때가 1940년 12월쯤이었다고 해요. 경찰서에서 출두령이 떨어지자 아버지는 고원(雇員)직을 팽개치고 어딘가로 피해 시 창작에만 몰두하셨다고 해요. 그리고 1945년 5월 무렵, 읍사무소에 몸담고 있던 선친의 후배(윤종성)가 ‘인비(人祕)’가 붙은 공 문을 들고 아버지를 찾아온 일이 있었어요. 공문에는 ‘정신대로 보낼 여성 50명을 6월 말까지 모집 하라’는 상부 지시가 담겨 있었답니다. 아버지는 강한 어조로 ‘알아서 처리하라’고 하셨는데, 아 버지 말씀의 속뜻에 따라 공문서를 불태웠다고 해요. 그해 6월 말, 상부의 지시를 묵살한 경위를 추궁키 위해 칼 찬 일본 군부가 읍장실로 들이닥쳤다고 합니다. 일본인 읍장은 ‘지시공문이 없었다’고 변명했고 급기야 내부조사가 이뤄졌어요. 말이 50명 이지, 이전부터 정신대 소문을 들은 마을 주민들은 자녀들을 일찍 혼인시켜 버리거나 멀리 남의 집에 숨겼지요. 그런데 얼마 후 광복이 되면서 모두 안도하게 됐습니다. 일본이 패망한 뒤에도 부안읍사무소에서는 정신대 비밀공문 증발사건이 심심찮게 재론됐다고 합니다. 덕분에 마을 처녀들을 지킬 수 있었으니까요. 그 후배가 다시 아버지를 찾아와 상의했다고 해요. 아 버지는 ‘이제 우리 천국이 왔는데 무엇을 주저하느냐. 당당히 밝히라’고 했고, 다음날 큰소리로 실 토했더니 모두 박수를 쳐주었다고 합니다.” 신광연씨는 이런 얘기도 들려주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광복을 맞았는데 어려운 형편 탓에 노상 나막신을 신고 다녔어요. 그해 늦봄 어 느 날, 20리가 넘는 친척집 제사에 나막신을 끌고 간 일이 있었어요. 제사 음식이 너무나 먹고 싶어 물어물어 찾아갔죠. 한참을 걸어 찾아갔는데 아버지를 보자 무엇이 서러웠던지 그만 울음이 터지고 말았어요. 돌아오는 길, 아버지는 제 손을 잡고 해변 모래밭을 걸으시며 ‘먼 길을 어렵게나마 찾아 온 것은 잘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눈물을 보인 것은 사내답지 못하다’고 다독여주신 일이 떠오릅니다. 아버지는 꼭 친자식만이 아니라 이웃집 아이들이라도 상처를 입으면 청구원으로 데려와 약을 발라주 었고, 걸인들에게도 이따금씩 밥상을 차려줄 정도로 측은지심이 많았어요. 한번은 한센병 환자가 찾 아왔는데 어머니에게 상을 차리라 하더군요. 이런 이타적(利他的) 마음은 타고나기도 하셨지만 불교전문강원에서 배운 불가의 영향도 있었을 겁니 다. 또 아버지가 평소 존경했던 톨스토이의 영향도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버지는 농노를 해방시 키고 농토를 나눠준 톨스토이의 박애주의 사상을 존경하셨어요.” ―시인의 ‘자연애’는 고통스런 현실과 어떤 관련이 있나요? “제가 부안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집에서 기르는 닭이나 오리의 머릿수 는 세지만 날아가는 기러기는 몇 마리인지 세지 않는다’고요. ‘사람살이를 떠나서는 어떤 장르이든 간에 예술의 존재 이유가 없다’는 부연말씀도 하셨어요. 아버지 작품 속 자연에는 가혹한 현실이 은 유적으로 담겨 있어요.” ―시인의 아들로 산다는 것은? “기자로 평생 살았지만 아버지처럼 글을 잘 쓰고 싶었어요. 저에겐 (아버지 존재가) 자랑이었으나 아무개의 아들이란 게 늘 부담스러웠어요.” 비사벌 艸舍의 시대 1968년 11월 한국문학상을 수상할 당시 신석정·박소정 부부. 박종화, 김동리(右)의 모습도 보인다. 1952년 시인은 부안의 ‘청구원’에서 전북 전주시 남노송동 ‘비사벌 초사(艸舍)’로 이사한다. 비 사벌은 전주의 옛 이름이다. 이 무렵 시인은 전주고 국어교사로 재임한다. 40평 남짓한 이 집 마당에 는 각종 화초와 나무 40여 종이 가득해 마치 식물원 같았다. 생을 마감한 1974년까지 22년여 간을지 내며 시집 《빙하》(1956)와 《산의 서곡》(1967), 《대바람 소리》(1970)를 집필했으며, 또 유고 수 필집 《난초잎에 어둠이 내리면》과 유고 시집인 《내 노래하고 싶은 것은》도 이곳에서 썼다. “아버지는 전주고 재직 시절, 한동안 학교 사택을 주거로 삼아 전전하시다가 말엽쯤 남노송동 주택 가에 집을 마련해 ‘비사벌 초사’라고 이름 짓고 청구원에서 옮겨 심은 신우대, 모란, 수련 등을 가 꾸셨어요. 젊어 청구원에서 기거하던 시절부터 가까운 벗들과 산행을 즐겼고, ‘초사’에서도 여가가 생기면 기 린봉과 완산칠봉, 승가산, 남고산 등 주변 산들을 오르내렸고 때로는 한라산과 지리산까지 원행(遠 行)하시며 시상을 다듬으셨어요.” 광연씨는 “아버지가 시작의 영감을 산에서 구했고 시집 《산의 서곡》 서두에 ‘침묵은 산의 얼굴이 니라’ ‘숭고는 산의 마음이니라’ 같은 글귀를 쓸 만큼 일상에서도 산을 닮고자 하셨다”고 회고했다. 시인은 1947~49년 김제 죽산중, 49~50년 부안중, 1954~61년 전주고(52년 지역 《태백신문》의 편집고 문을 잠시 맡기도 했다.), 61~65년 김제고, 65~72년 전주상고 교사로 재직했다. 사실 시인은 초등학 교 졸업이 유일한 학력이다. 사범대를 졸업했거나 대학에서 교직을 이수한 일은 없다. “처음에는 교육청이 아닌, 학교재단에서 학생 기성회비 일부를 떼어 월급을 주었다고 합니다. 교원 자격증이 없으셨으니 정식 교원은 아니었던 셈이죠. 나중 교육청에 논문 한 편을 제출해 교원 자격증 을 받았습니다. 잘 가르치셨고 시인으로 명성이 있었으니 가능했던 것 같아요.” ―교사로서 아버지는 어떠했나요. “5·16쿠데타가 나면서 김제고로 쫓겨가기 전까지 7년간 전주고에 재직하셨던 기간이 아버지에게는 교사로서 황금기였어요. 저도 아버지의 전주고 부임과 함께 이 학교에 입학해 부안중에 이어 다시 아 버지를 은사로 모시게 됐어요. 어느 학생이 아버지에게 ‘행복이 무엇이냐’는 다소 생뚱한 질문을 했는데 아버지는 즉답을 피한 채 며칠을 고심하다 원고지 9장가량의 ‘행복론’을 지역신문에 기고할 만큼 가르침에 정성을 다하셨어요.” 광연씨는 “아버지는 수업시간이면 매양 교과서의 범주를 벗어나 재기 넘치는 유머와 에피소드 등으로 학습의욕을 북돋우셨다. 또 ‘남을 밟지도, 밟히지도 말라’며 천부(天賦) 인권을 강조하셨다”고 했다. 시인이 마지막을 보냈던 ‘비사벌 초사’는 현재 타인이 소유하고 있다. 8남매가 외지에 나와 사는 바람에 1994년 부득이 집을 팔았다고 한다. 현재 전주시는 그곳을 매입해 문학공간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전주 한옥마을의 최명희 문학관, 강암 서예관과 연계시킨다는 구상이다. 다만 사업비 확보가 어려워 추진이 중단된 상태다. 그는 “우리 집 을 구입한 분이 초등교사 출신인데 나무나 식물에 관심이 많아 본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4대째 이어온 한의사 집안 신석정의 첫 시집 《촛불》. 오른쪽이 1939년판(인문사刊), 가운데가 1952년판(대지사), 왼쪽이 1960년판(대문사). 신석정 시인은 ‘옥성당(玉成堂)’이란 옥호로 4대째 이어온 한의 집안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 다. 형(辛錫鉀·1904~1975)과 동생(辛錫雨) 모두 한의업에 종사했다. 신석갑의 아들 조영(朝永)은 경 희대 한의예과를 나와 원광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원광대 광주한방병원 내과과장, 전주한방병 원장을 역임했다. 현재 옥성당이란 간판은 쓰지 않는다고 한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는데 사위는 양의(洋醫)이다. 중앙고보를 나온 수재였던 석정의 동생 석우는 해방 후 출판사를 다니다가 낙향, 형 석갑에게 한의술 을 배웠다. “한의 자격증은 없지만 지역에서 소문난 명의로 환자가 ‘어디 아프다’고 말하면 ‘거 기가 아니라 저기’라는 처방으로 환자를 감탄케 했고 그와 대화하면 병이 반절은 나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신석우는 3남 3녀를 낳았는데 다섯째가 대한간호협회장과 이화여대 간호대학장을 지낸 새누리당 신경 림 의원이다. 3남 중 장남(신희영)은 중등교사, 차남(신태영)은 건설업, 3남(신철)은 고려대 안산병 원 호흡기내과 교수다. 중동(中東)에서 건설업으로 성공한 신태영씨가 거금을 쾌척, 시인의 추모사업 이 활기를 띠었다고 한다. 신씨 집안을 잘 아는 한 인사의 이야기다. “신석정 시인은 불교전문강원 수학을 제외하고는 초등학교 졸업이 유일한 학력이었어요. 그는 ‘내 가 영어 공부를 좀 했더라면…’ 하는 말을 자주 했을 만큼 학력 콤플렉스가 있었죠. 석정보다 세 살 위인 형 석갑은 관동대지진 때 중도에 귀국했지만 일본 유학을 다녀왔고, 서울 YMCA 영어반에서 〈논 개〉로 유명한 시인 변영로(卞榮魯)에게 영어를 배우기도 했어요. 동생인 석우도 서울로 유학 보내 중앙고보를 졸업했는데 유독 석정만 초등학교 이상의 교육을 시키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석정은 아버지(辛基溫)에게 적지 않은 아쉬움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신광연씨는 이렇게 말했다. “할아버지는 차남인 아버지를 한의사로 길러 가업을 잇게 할 작정이셨던지 초등학교 취학 무렵에 이 미 약방에 나와 일을 거들라고 하셨어요. 아버지는 그게 싫어서 약재를 저울에 달라고 하면, 근을 틀 리게 해 꾸중을 자청하는 등 조부의 뜻을 거슬렀다고 합니다. 심지어 소학교에조차 못 다니게 하는 바람에 아버지가 뒷집에 사는 고모할머니께 담 너머로 책보를 넘겼다가 빈손으로 집을 나가 되받아 등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3형제는 우애가 좋기로 부안에서 소문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詩史的 복원, 이뤄질까 1933년 봄. 왼쪽부터 신석우, 석정, 석갑, 그리고 친척 신기태. 신석정 시인은 부인 박소정(朴小汀·1910~1997)과 사이에 4남 4녀를 부안에서 모두 낳았다. 장남 효 영(辛孝永·1929~1994)은 큰아버지(辛錫鉀) 밑에서 한의업에 종사했다. “《동의보감》을 줄줄 외고 부안, 김제 등지에서 명의로 이름이 높았으나 아버지가 일제치하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바람에 학교를 못 다녀 한의사나 약종상 자격증은 없었다”고 한다. 효영씨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장남(辛柳三)은 교보생명 전무, 차남(辛樹一)은 고교 교사, 3남(辛喜 森)은 동원대 교수(국문학)를 지냈다. 차남(辛悌永·1929~1950)은 전주농고를 나와 부안 동진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6·25 당시 의용군 으로 끌려가 실종됐다.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인 3남(辛光淵·1938~)은 초등학교 교사를 지낸 이수자(李秀子)와 결혼해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辛尙樂)이 정형외과 의사다. 전주시청 농업기술센 터장을 역임한 4남(辛光漫·1945~)은 1남 1녀를 낳았다. 시인은 작품 곳곳에 딸들의 이름이 등장할 만큼 딸들을 사랑한 것으로 전해진다. ‘일림아/촛불을 꺼라/소박한 정원에 강물처럼 흐르는 푸른 달빛을 우리 침실로 맞아와야지…’(〈푸 른 침실〉 중에서), ‘난이와 나는/산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작은 짐승〉 중에서)라 는 식이다. 장녀(辛一林·1931~)는 전주사범을 졸업해 초등교사로 재직했다. 시조시인이자 전북대 교수인 최승범 (崔勝範)과 결혼해 아들 셋을 두었다. 차녀(辛蘭·1935~)는 부안여중을 나와 초등학교 교사인 박창근 (朴昌根)과 결혼해 1남 2녀를 두었다. 초등학교 교사를 지낸 3녀(辛小淵·1940~)는 한·호주 친선협 회장인 문건주(文建柱)와 결혼해 아들 둘을 낳았다. 장남(문훈)은 건축가, 차남(문준)은 의사다. 초 등학교 교사를 지낸 4녀(辛葉·1942~)는 경복고 국어교사를 지낸 이영식(李榮植)과 결혼해 1남 2녀를 두었다. 신광연씨의 말이다. “직계후손 중에 아버지 뒤를 이어 문인이나 예술가가 된 이는 없어요. 한의·한약에 종사한 가업(家 業) 때문인지 의학 전공자가 많지요. 놀라운 사실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40년이 넘었는데 갈수록 아버지 시가 더 사랑받고 있다는 겁니 다. 재작년 시 낭송가 30여 명이 결성한 ‘한국 신석정 시낭송협회’가 생겼는데, 국내 100여 개의 문학관 중 한 인물을 협회 이름으로 내세워 활동하는 시낭송가협회는 없다고 합니다. 그것도 전북이 아닌 부산에서요. 고향에 문학관이 생기고 문학상이 제정됐는데… 어쩌면 평생을 시골에서 살아 저평 가됐는지 몰라요. 사후 재평가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기뻐요. 2년 전에 일본 NHK 기자 출신인 하타야마(畑山康幸) 씨가 편지를 보내왔어요. 1962년 무렵인 학창 시 절, 일본 교과서에 실린 아버지의 시 〈등고〉에 매료돼 오사카대 조선어과에 입학하게 됐다고요. 이 교과서에는 〈등고〉와 함께 중국 루쉰의 〈고향〉, 인도 타고르의 〈종이배〉가 실렸다고 합니다. 또 1930년대 말 영문학자 정인승씨가 아버지의 〈임께서 부르시면〉을 영역(英譯)해 노벨문학상 수상 자인 예이츠(Yeats)에게 직접 찾아가 소개한 일도 있다고 해요. 지금도 아버지의 시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가 계속 발굴되고 있어요. 아버지의 시사적(詩史的) 위치의 새로운 복원을 기대하고 또 기다리고 있습니다.” □ 부록8-3) 친일에 빠진 서정주, 그를 걱정한 선배 시인 2018/10/21 오마이뉴스 / 김학규 /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 [동작 민주올레 18] 동작지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 탐방 – 흑석길① 중에서 시인 신석정, 후배 서정주를 걱정하다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시를 주로 썼다고 평가되는 시인 신석정(1907~1974)은 1943년 서정주(1915~2000) 에게 <흑석고개로 보내는 시>를 '정주廷柱에게'라는 부제를 달아 보낸다. 이때 신석정은 전북 부안에 살고 있었고, 부안 바로 옆 고창이 고향이었던 서정주는 1942년 아버지 장례를 치른 후 가산을 정리 해 한강변 흑석정의 한 기와집으로 이사와 살고 있었다. 흑석고개로 보내는 시 - 정주廷柱에게(1943) 흑석고개는 어늬 두메산골인가 서울에서도 한강 한강 건너 산을 넘어가야 한다드고 좀 착한 키에 얼굴이 까무잡잡하여 유달리 희게 드러나는 네 이빨이 오늘은 선연히 뵈이는구나 눈오는 겨울밤 피비린내 나는 네 시를 읽으며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는 청년 그 청년이 바로 우리 고을에 있다 정주여 나 또한 흰 복사꽃 지듯 곱게 죽어갈 수도 없거늘 이 어둔 하늘을 무릅쓴 채 너와 같이 살으리라 나 또한 징글징글하게 살어보리라 1930년 초에 서울에 와서 1년여 정도 산 게 전부인 신석정은 후배 서정주가 이사해서 살고 있다는 흑 석정에 가본 적은 없었던 모양이다. 1930년대 중후반 이래 '학교촌'으로 불리기도 하며 크게 변하고 있던 곳이지만, 흑석정을 어느 '두메 산골' 쯤으로 상상하고 있다. 하긴 흑석동이 경성부에 편입된 게 1936년이고, 당시까지만 해도 흑석동으로 넘어가려면 흑석고개를 넘어야 했으니 흑석동을 '두메산 골' 쯤으로 그리는 것도 전혀 엉뚱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2연에서 우리는 신석정 시인의 표현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작은 키의 서정주를 "좀 착한 키"로 표현하고 있고, "얼굴이 까무잡잡하여/ 유달리 희게 드러나는 네 이빨이"라는 대목에서는 서정주의 모습을 절로 떠오르게 한다. 그런데 이 시의 압권은 역시 마지막 4연이라고 할 수 있다. "정주여/ 나 또한 흰 복사꽃 지듯 곱게 죽어갈 수도 없거늘/ 이 어둔 하늘을 무릅쓴 채/ 너와 같이 살으리라/ 나 또한 징글징글하게 살어보 리라"라는 표현에서 뭔가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읽힌다. ▲ 석정은 후배 시인 서정주를 걱정하여 <흑석고개로 보내는 시>를 지어 서정주에게 보내 격려했다. 우선 '어둔 하늘'은 식민지 조선의 암울한 현실을 간단히 설명하는 은유적 표현이다. 일제는 1931년 의 만주침략, 1937년의 중국본토침략을 연이어 일으키면서 식민지 조선에 대한 압박도 더욱 더 강화 했다. 신사참배 강요, 창씨개명 강요, 조선의 말과 글을 빼앗는 조선어 말살정책, 지식인과 독립운동 가들에 대한 전향강요 등이 그것이다. 그야말로 암울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석정은 이미 각오가 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복사꽃 지듯 곱게 죽어갈 수도 없 "는 것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시인 신석정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하지만 후배 서정주가 걱정이었다. 그래서 "이 어둔 하늘을 무릅쓴 채/ 너와 같이 살으리라/ 나 또한 징글징글하게 살어보리라"라는 표현은 단순히 자신의 강한 의지를 드러낸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걱정되는 후배 서정주에게 함께 이 '어둔 하늘'을 무릅쓰고 버텨나가자고 격려하고 고무하는 의 미가 담겨 있었다. 서정주, 흑석동에서 친일문학에 빠져 들다 사실 서정주는 흑석동으로 이사 온 직후인 1942년 7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시의 이야기 - 주로 국민시가에 대하여'라는 평론을 발표해 일제의 대동아공영권 논리를 수용하고 전파하는 친일 문학에 이미 빠져들기 시작했다. 시인 신석정이 1943년에 <흑석고개로 보내는 시>를 쓴 이유도 서정 주의 이런 변화를 감지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서정주는 선배 시인 신석정의 충고가 눈이 들어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1943.10, <춘추>), <스무살된 벗에게>(1943. 10, <조광>) 같은 글을 통해 일제의 징병에 젊은이와 어머니들이 적극 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최체부의 군속지망>(1943. 11, <조광>)이라는 소설까지 연이어 썼다. ▲ 서정주는 신석정의 걱정을 외면한 채 1942년부터 해방될 때까지 흑석동에서 친일문학 활동을 계속했다. '불편한 관계를 견디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여서 일제의 압박에도 쉽게 굴복했고, 독재정권의 하수 인 역할도 주저하지 않았다는 서정주는 어찌된 영문인지 시인 신석정과의 '불편한 관계'는 당시에도 철저히 무시했고, 이후에도 우리 국민은 물론 신석정에게도 자신의 친일행위를 사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종천순일파?>라는 시를 통해 궤변을 늘어놓기 까지 했다. (앞 생략) '이것은 하늘이 이 겨레에 주는 팔자다' 하는 것을 어떻게 해서라도 익히며 살아가려 했던 것이니 여기 적당한 말이라면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 같은 것이 괜찮을 듯하다. (뒤 생략) 심지어 1987년에는 <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1987)까지 써 살인마 전두환을 칭송하는데 앞장서기까지 했다. 친일문인 서정주가 흑석동 시절 썼던 작품 중에 가장 유명한 시 <마쓰이오장 송가>(1944.12.9., 매일신보) 를 소개하며 흑석고개에 담겨있는 사연 소개를 마친다. 마쓰이 오장은 조선인 출신 소년 비행병으로 가미카제 특공대로 필리핀 레이테만에서 전사한 인재웅이다. 마쓰이 히데오(松井秀雄)는 인재웅의 창 씨명이었다. 제9회 신석정 詩 선양 낭송대회 / 새인트영상마당(2023/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