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항적 목가시인 신석정(辛夕汀)에 관한 논문 5편
□ 신석정논문1) 신석정 초기 시편에서 본 참여의식과 저항의식 / 하재준
□ 신석정논문2) 어머니,산(山),대바람소리 ―신석정(辛夕汀)론 / 윤여탁
□ 신석정논문3) 신석정 시에서의 근대성과 노장적 자연인식 / 송기한
□ 신석정논문4) 신석정 초기시의 근대적 자연미와 공동체 의식 / 김옥성
-‘지구’ 이미지를 중심으로
□ 신석정논문5) 1930년대 시에 나타난 ‘지도’ 표상과 세계의 상상
― 정지용, 임화, 김기림, 신석정의 시를 중심으로 / 강호정
□ 신석정논문1) 신석정 초기 시편에서 본 참여의식과 저항의식
- ‘기존 목가적 서정시인’ 다시 평가 되어야 / 하 재 준 -
1. 머리말
신석정은 1924년 4월 19일 ‘조선일보’에 『기우는 해』시를 발표한 이후 그가 작고하던 1974년 7월
‘동아일보’에 『뜰을 그리며』가 유고시로 발표되기까지 꼭 반세기동안 시작(詩作)에 혼신을 쏟은
시인이다. 1930년대 일제탄압이 극심했던 때임에도 민족의 혼을 불태워가며 시를 써온 그는 시문학파
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 시사(詩史)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시인이다.
그는 1931년 10월 「시문학」 3호에 『선물』이 발표됨에 따라 박용철, 정지용, 김영랑, 김기림 등과
함께 시작에 전념했다. 그가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한지 얼마 되지 않은 1933년에 김기림은 ‘조선일
보’에 「시단의 회고와 전망」이라는 글을 썼는데, 여기에서 신석정을 가리켜 ‘현대문명의 잡담을
멀리 피한 곳에 한 개의 유토피아를 음모하는 목가적 서정시인이다.’ 라고 평했다. 김기림은 석정이
단순히 그리고 막연하게 유토피아의 꿈에 잠긴 나약한 시인이라 보지 아니했으리라 여겨진다. 이는
그가 ‘음모’란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음모’란 뜻은 국어사전에 의하면 계략을 음밀하게 꾸
민다. 란 뜻으로 되어있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유토피아를 음모’하는 사람이란 표현은 김기림이
음모에 담긴 이면의 심리까지를 보다 깊이 생각해 보고 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맥의 내용으
로 봐 참여시인 혹은 저항시인이라 함이 옳으리라고 판단된다. 그런데도 석정 시인을 ‘목가적 서정
시인’이라 칭함은 당시 악랄한 일제치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탄압을 일삼는 무단정치였기에 아까운
시인의 생명을 위태로움에서 건져내기 위해 김기림은 석정을 ‘목가적 서정시인’이라 명명했으리라
고 여겨진다. 신석정 자신도 삼엄한 검열을 피하기 위해 시 속에 자연을 노래한 시인처럼 새, 양, 염
소, 나무, 꽃 등을 썼고, 목가적, 자연적인 이상향을 노래하듯 하늘, 산, 밤, 달, 구름, 바람, 임,
어머니 등의 시어를 썼을 것이다.
이러한 시어들만 보면 목가적인 시인이요, 자연을 노래한 서정시인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여러 선
행연구가들의 평가는 신석정 초기작품이 실린 1939년 제1시집 『촛불』과 1947년 제2시집 『슬픈 목
가』 시대의 시를 보고 그를 전원적 목가적 시인으로 보는데 일치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후기작품인
1956년 제3시집 『빙하』부터 1967년 제4시집 『산의 서곡』, 1970년 제5시집 『대바람소리』에 이르
러서는 연구가들 대부분이 ‘참여시인’, ‘저항시인’로 전환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초기 시
연구진들의 이론을 지지하는 이들은 그 당시의 시를 참여시나 저항시로 보기에는 적극적인 참여의식
이 결핍됐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참여나 저항을 직설화법으로 표현해야만 하는가. 이 이론은 퍽
온당치 못하다고 본다. 전술(戰術)에서도 일보전진하기 위한 후퇴가 있다. 무모하게 전진만 계속한다
면 백전백패라고 말한 전술정론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고 본다.
이같이 이론이 분분할 때 우리 시사(詩史)에서 시인의 위치를 올바르게 정립할 수 없다. 그러기에 많
은 연구진들이 여러 면에서 연구를 거듭해왔고 앞으로도 계속하겠지만 필자 역시 시인의 시세계(詩世
界)를 보다 분명히 알기 위하여 시를 집필할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역사의식, 그리고 시인이 지니고
있는 사상과 정서를 파악하며 시를 분석해 봤다.
신석정이 시를 집필할 당시는 1930년대 일제의 암울한 시대적, 역사적 상황이었다. 이를 통찰하면서
시를 분석해 볼 때 초기에서부터 그의 투철한 민족정신이 시속에 맥맥이 흐르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
러기에 그를 참여시인, 저항시인으로 명명함이 옳다고 여기면서 그 이론을 정립하고자 한다.
2. 시인의 사상과 시대적 역사적 상황
가) 연구대상 범위와 현대문학의 성장기
그간 신석정 초기의 시를 연구한 대부분의 논문들이 목가적, 전원적, 명상적, 성격이 뚜렷이 나타난
시인이라고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문학대사전에서조차 이 이론에 편승한 탓인지 그렇게
등재되어 있다. 그러기에 필자는 그의 초기시를 면밀히 살펴보기 위해 당시의 시대적 역사적 상황을
살펴보았다.
현대문학의 발생배경은 3·1운동 이후였다. 우리민족이 일제식민지에 대해 응전(應戰)이 형성되고 작
가와 지식인을 자극한 개화사상 및 외국으로부터 신문예 사조 등의 영향으로 발생되었다. 특히 1924
년 최초의 월간종합지 창조(創造)가 발간되면서 신문예운동은 본격화 되었으며 개벽(開闢), 백조(白
潮), 조선문단(朝鮮文壇) 등이 발간되고 여러 갈래의 문학파를 이루어 근대문학 사조의 형태를 이루
었다. 특히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제 군국주의가 험악하게 사회 곳곳을 파고들어 직접적인 충돌을
일으켜 문학을 정치적 도구로 끌어들였다. 이를 피하기 위해 농촌계몽으로 포장한 이광수의 흙과 심
훈의 상록수의 소설이 등장했고 순수 자연주의를 표방한 시문학이 등장했다.
나) 신석정 작품에서 본 1930년대 시세계
시의 세계를 올바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시인이 지니고 있는 근본 사상을 잘 파악해야 하며 시를 집필
할 때의 시대적 역사적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않고서는 수박 겉핥기식이 될 것이다. 신석정의 시어
들을 보면 앞에서도 말했듯이 표면에서는 자연친화적 이상향적 전원적인 성격인양 보이나 내면에서
흐르는 상징성과 비유성과 암시성 그리고 이미지를 통해 시인이 구현시키고자 하는 이상세계를 제시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면 신석정이 조선일보에 발표한 『기우는 해』 첫 작품과 김기림이 평했던 당시에 발표된 시 중
에서 『임께서 부르시면』 『나의 꿈을 엿보시겠습니까』의 2편을 여기서 살펴보기로 하자.
해가 기울고요-
울던 물새는 잠자코 있습니다.
탁탁 폭폭 흰 언덕에 가벼이
부딪치는
푸른 물결도 잠잠합니다.
해는 기울고요-
끝없는 바닷가에
해는 기울어집니다
오! 내가 미술가였다면
기우는 해를 어여쁘게 그릴 것을!
해는 기울고요-
밝힌 북새만을
남기고 갑니다
다정한 친구끼리 이별하듯
말없이 시름없이
가버립니다
-『기우는 해』 전문
이 시는 시인이 18세에 ‘소적’이란 필명으로 쓴 첫 작품이다. 18세라면 피가 끓고 정의가 용솟음치
는 나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필자는 이 시 첫 행 “해는 기울고요-”를 읽으면서 시인의 의식이
어디에 있는가를 꼼꼼히 따져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석양’이란 단어를 쓰지 아니하고 ‘기울다’
라는 단어를 택한 그 이유는 뭘까? 자연의 해가 기울고 있음을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암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유는 당시 1919년 3‧1운동의 실패가 불과 5년밖에 되지 않아 일
본의 악랄한 탄압은 날이 갈수록 심했다. 그러나 불굴의 민족의 의지는 조금도 꺾이지 않은 채 더욱
철저히 미래를 준비하려고 일보 전진하기 위한 일보 후퇴한 민족의식이었다. 이것을 역설적으로 표현
한 것이다.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는 연이 3연이다. 해는 기울고요-/ 밝힌 북새만을/ 남기고 갑니다.
여기서 ‘밝힌 북새’란 3·1운동의 정신과 민족의 의지를 말하기 위함이다. 그러기에 민족의 의지만
을 남기고 간다는 뜻이다. 같은 유형으로 이루어진 유치환의 ‘깃발’의 시에서도 이러한 표현을 넉
넉히 찾아볼 수 있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 바로 그것이다. 소리가 없는데 아우성은 웬 말인가 하
겠지만, 이는 일본의 삼엄한 총칼 앞이기에 차마 불붙는 민족심리를 발설(發說) 할 수 었었던 데서
나온 표현이다. 그러기에 가슴속에 끓어오르는 분노와 애국의 열정이 마음속에서 아우성치고 있다는
뜻이다.
또 하나의 예를 살펴보자. 신석정 시인의 초등학교 6학년(4년제에서 연장) 때 의식이다. 같은 반, 같
은 민족의 학생이 수업료를 못 냈다고 해서 담임은 그 학생에게 반 전체의 학우들이 보는 앞에서 옷
을 벗겨 개구멍으로 나갔다 들어오게 하는 수모를 주었다. 이를 본 석정은 우리민족에게 수치감을 준
사건이라 해서 일본인 담임과 이를 묵인한 학교당국에 시정을 요구했고, 이를 묵살 당하자 그 분노는
전교생을 선동하여 수업거부를 일으켰다. 그로 인해 그는 무기정학을 받았다. 그러나 다음해 3월에
복교되어 졸업을 했다. 이러한 민족의식이 그 맥을 같이한 저항의식으로 훗날 그가 쓴 시는 물론 본
시에서도 여실히 잘 드러나고 있다.
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호수에 안개 끼어 자욱한 밤에
말없이 재 넘는 초승달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포근히 풀린, 봄 하늘 아래
굽이굽이 하늘가에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파-란 하늘에 백로가 노래하고
이른 봄 잔디밭에 스며드는 햇볕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 『임께서 부르시면』 (「동광」 1931, 8) 전문
이 시 속 시인은 어딘가를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일제(日帝)라고 하는 현실적 분통이 터
질 듯한 공간에서 떠나고 싶어 하는 심정이다. 바람에 휘날리듯이 비록 일제강점기에 시달려 쓸쓸하
고, 그리고 안개 자욱한 초승달처럼 암담할지라도 이곳을 떠나면 포근하게 풀린 봄날처럼 잔디밭에
평온하게 내려앉은 햇볕처럼 그런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뜻이다. 그 때가 어느 때일까? 가을과 봄이
다. 가을은 여문 곡식이 갈무리 되듯 민족의식이 충만할 때며, 봄은 혹독한 추위에 시달릴지라도 봄
기운을 받아 새 생명이 돋아나듯 희망이 충만할 때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임은 누굴까? 조국이다. 그
러기에 조국이 나를 부르면 그렇게 가고 싶다는 뜻이다.
햇볕이 유달리 맑은 하늘의 푸른 길을 밟고
아스라한 산 너머 그 나라에 나를 담숙 안고 가시겠습니까?
어머니가 만일 구름이 된다면……
『나의 꿈을 엿보시겠습니까』 (「문예월간」 1932, 1) 일부
이 시는 저자가 가정법을 통해 청자인 어머니에게 나의 소망 즉 꿈을 호소하는 내용이다. 어둡고 괴
로운 현실을 감당할 수 없는 이 시인은 하늘을 바라면서 유달리 밝고 푸른 하늘 길을 걷고 있는 것이
다. 이러한 심정을 어머니에게 호소하고 있다. ‘어머니’는 조국이다. 여기서 “어머니가 만일 구름
이 된다면” 했는데 ‘구름’은 성경에서 말하는 ‘구름기둥’을 연상시킨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
을 이끌고 불볕이 내리쬐는 광야를 지날 때 하나님이 그 민족을 위해 구름기둥으로 보호했듯 어머니
즉 조국이 우리민족을 보호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비록 나라를 빼앗긴 현실일지라도 나를 나
아준 조국은 어디까지나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기에 나를 보호하며 간절히 부르고 있음을 심안(心眼)
으로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다.
이상의 시에서 본 바와 같이 현실이 어둡고 암담할 때일수록 꿈은 멀리서 가까이서 손짓하고 있는 것
이다. 이것이 우리민족의 의지요, 자세요, 시인의 이상향이다. 이상향은 비록 멀리서나마 우리를 부
르고 있다. 그러나 이는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닌 당위성을 지니고 있기에 석정의 시는 그것을 읽는 독
자로 하여금 고통 받고 있는 현실 속에서도 열망을 일으키는 자극제의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기에 김기림은 신석정을 가리켜 ‘현대문명의 잡담을 멀리 피한 시인’으로 본 것이다. 이같이
높이 평가하면서도 ’목가적 서정시인‘이라고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를 앞에서 언급했기에 재론
을 피하면서 필자는 신경림이 말한 대로 후대에서 신석정을 목가적 저항시인으로 재평가 되어야 마당
하다는 이론에 동조하면서도 필자는 더 나아가 석정을 참여시인, 저항시인으로 명명함이 옳다는 주장
을 주저하지 않는다.
필자가 왜 이런 확고한 주장을 밝히느냐 하면, 그간 신석정 시 연구 논문들의 평가를 보면 대체로 초
기인 『촛불』과 『슬픈 목가』 시대의 시인을 전원적 목가적 시인이라는 데에 일치를 이루고 있기에
그러하다.
그렇다면 같은 시대에 살았던 뛰어난 많은 문인들이 일제의 권력 앞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잠시 살
펴보자. 결국 많은 문인들은 그들의 재능조차도 감당 못한 채 생존을 위하여 퇴색하거나 바래버린 채
일제의 입맛에 맞는 글을 썼거나 동조했다. 그러나 신석정은 일제의 강압에도 창씨개명을 거절하여
신석정이란 이름을 지켜냈고, 1941년 한글로 발행했던 마지막 문예지인 <문장>지가 폐간되자 절필을
선언했다. 그리고 「차라리 한그루 푸른 대로」란 시를 발표하려다가 검열에 삭제되기도 했다. 이같
이 올곧게 살다가 해방을 맞이하여 평생 교육자로서 그리고 시인으로서 청렴하게 살아왔다. 이러한
석정의 삶의 저항성은 그가 그의 초기작품에서부터 목가적 형태에만 머물지 않고 민족적 저항의식을
담고자했음을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
또 30년대 후반에 쓴 시 두 편을 살펴보자.
어머니
黃昏마저 어느 星座로 떠나고
밤……
밤이 왔습니다.
그 검고 무서운 밤이 왔습니다.
태양이 가고
빛나는 모든 것이 가고
어둠은 아름다운 전설과 신화까지도 먹칠하였습니다.
어머니
옛이야기 하나 들려주세요
이 밤이 너무 길지 않습니까?
『이 밤이 너무 길지 않습니까?』 (「여성」 1936, 12) 일부
거의 1세기가 다된 긴긴 세월이 흐른 오늘이다. 그런데 이 시를 읽는 우리에게도 당시의 비통한 밤의
현실이 절절히 가슴 깊이 스며오는데,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심정은 얼마나 통분했을까. 삶의
고달픔과 비통함을 마음 놓고 원정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어머니’뿐이다.
“어머니/ 黃昏마저 어느 星座로 떠나고/ 밤……/ 밤이 왔습니다./ 그 검고 무서운 밤이 왔습니다.”
여기서 황혼은 무엇을 말하며 성좌는 무엇을 말하는가? 황혼은 그냥 해질 무렵이 아니다. ‘황혼마
저’라고 했으니 ‘마저’란 부사의 의미는 ‘남음이 없이 모두’란 뜻이다. 그러니 국운이 기울게끔
정치한 위정자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방관했던 백성 모두를 가리킨다. 그러기에 왕이 통곡을 하며
떠나야만 했다. 그리고 왕의 의자인 ‘聖座’가 아니라 ‘星座’다. 한자의 聖座는 성스러운 자리란
의미로 임금의 좌석을 가리킨다. 이는 우리말의 음성(音聲)으로는 같으나 본시에는 ‘星座’로 표기
되어 있다. 이는 분명히 멀리서나마 별처럼 반짝이는 王座의 자리에서 우리민족을 지켜보고 있다는
의미다.
더불어, ‘어머니’란 시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석정이 30년대 초기 작품에서부터 줄곧 읊고 있는
‘임’이나 ‘어머니’를 필자는 ‘조국’으로 해석하는데, 이에 동의한다면 석정은 앞서 살펴보았듯
이 줄곧 ‘잃어버린 조국’을 그리며 그의 저항의식을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위의 시에서도
화자는 청자인 ‘어머니’에게 ‘옛이야기 하나 들려주세요.’ 간곡히 요청한다. 이 의미는 무얼까?
과거엔 우리민족도 당당히 주권국이었음을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데도 ‘이 밤이 너무 길지 않습니
까?’ 이렇게 하소연하고 있다. ‘이 밤’은 억울함과 분노의 밤이다. 이러한 밤이 너무 길기에 빨리
되찾아야 한다고 청자에게 간곡히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민족을 일깨우는 시이며 저항의
식이 투철한 시인가.
석정이 말하고자 하는 ‘밤’에 관하여 다음 시에서 더 살펴보기로 하자.
새해가 흘러와도 새해가 달려가도
마음은 밤이란다
언제나 밤이란다
(중략)
막막한 이 밤이, 막막한 이 한 밤이
천년을 간다 해도
만년을 간다 해도
밤에서 살으련다 새벽이 올 때까지
心臟처럼 지니고
검은 밤을 지니고
『밤을 지니고』 (「동아일보」 1939년 1,3)에서
석정은 여기서 ‘밤’이란 시어를 통해 그의 강한 저항의식을 가득 담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밤인데
도 여기서는 유독 ‘검은 밤’이다. 일제치하의 현실이 얼마나 참혹하고 암담했는가를 문자로 잘 압
축해 놓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새벽이 올 때까지 조국(검은 밤)을 心臟처럼 부둥켜 안고 살겠다는
강한 의지가 서려 있다.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는 시인의 말은 그가 쓴 유고 수필집 『난초잎에 어둠
이 내리면』에서 「못다부른 목가」수필 중에 ‘슬픈 목가시절은 악몽과도 같으면서도 뼈에 저리도록
망각할 수 없는 나의 몸부림이요, 발버둥이다’라는 표현에 잘 나타나있다. 뼈에 사무치도록 몸부림
과 발버둥을 쳐야만 하는 절박한 시대적 사명의식을 시인의 시 의식에서 엿볼 수 있다.
3. 맺는 말
이상에서 신석정 초기인 1930년대 시에 나타난 그의 성향을 살펴봤다. 필자가 그의 작품을 본 바로는
초기 시부터 강한 저항의식을 담고 있음을 보았다. 그러나 그의 초기인 『촛불』과 『슬픈 목가』에
담긴 시를 목가적 전원적 이상향적 성향을 보이고 있다고 주장하는 설이 학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기에 선행연구진들의 주장을 존중하면서도 작품 속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이미지를 꼼꼼히 살펴봤
다. 필자의 설익은 안목인지는 모르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핵심적 이미지는 민족의 투철한 저항의식,
참여의식이었음이 분명하다고 여겨진다. 그러기에 기존 평가에서 재조명됨이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물론 시를 바라보는 관점과 가치기준에 따라 평가가 다양하게 이루어짐이 사실이다. 그러기에 시를
가리켜 백인백색(百人百色)이라는 이론이 오늘날까지 타당하리만큼 지배적이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본고의 주장도 역시 그중 하나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가 보는 관점을 평이하게 여길 수만은
없다는 입장이다. 그 이유는 같은 시대인 일제 탄압 속에서 발표된 많은 서정시를 보면 그 작품들에
서는 너무도 평화롭고 향토적인 감각에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시들을 여기서 지적하
거나 제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신석정의 시에서는 이들의 시와 차원이 다르게 민족정신의
당위성을 이미지를 통해 전달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의 시는 빛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신석정의 초기 시를 한마디로 요약하여 ‘동면의 양면성을 지닌 시’라고 표현하
고 싶다. 외적으로는 자연적, 목가적, 이상향을 표방한 반면 내적으로는 시적 이미지를 통해 민족의
식을 구축했는데 시의 핵심은 단연 내적인 면에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양면성을 지닌 시를 쓰지 않
을 수 없었던 것은 삼엄한 일제치하였기에 어찌할 수없는 시대적 상황이었음을 앞에서 제시했기에 재
론을 피한다. 이같이 독특한 필력으로 시세계를 구축한 신석정은 우리들의 가슴뿐 아니라 한국현대시
문학사에 길이 남을 참여시인, 저항시인이라고 힘주어 단언할 수 있기에 재평가되어야 함을 몇 번 강
조해도 타당하다고 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