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목가시인부록9) 신석정(辛夕汀) 세부 연보와 바로알기

이름없는풀뿌리 2023. 10. 20. 18:31
■ 부록9) 신석정(辛夕汀) 세부 연보와 바로알기 □ 부록9-1) 신석정(辛夕汀) 시인 세부 연보(年譜) □ 부록9-2) 신석정(辛夕汀) 시인 탄생과 시집 소개 □ 부록9-3) 신석정(辛夕汀) 주요 작품 감상 □ 부록9-4) 석정(夕汀)의 지조와 사랑 그리고 미당의 처신 □ 부록9-1) 신석정(辛夕汀) 시인 세부 연보(年譜) 한국 시 문학사의 거목 신석정 선생님 바로알기(上) 2018.03.17 석정문학관, 강사: 기세원 시인 부안인터넷신문승인 2019.01.07 17 (편집자 주: 석정문학관 연간 사업계획 '석정이야기 들려주기' 에 기세원 시인(부안농협 백산지점장)이 2018.3.17 특강한 내용을 3회로 나눠 소개합니다.) <강사: 시인 기세원(奇世源)> - 1964년생. 전북 부안군 하서면 출생. - 상서초등학교.하서중학교.부안고등학교.농협대학교 졸업. - 2010년 월간 조선문학에 시 당선으로 시인등단. - 활동 : 조선문학문인회. 형상21시문학회 .부안문인협회, 전북문인협회회원. - 수상 : 2010조선문학 신인상, 2014년 부안예술문화상 수상, 2017년 조선시문학상 수상 - 시집 : 『바다는 나를 위해 잔잔해주지 않는다』 Ⅰ.신석정 시인 주요 연보 1907년(01세) 7월7일(음력) 全北 扶安郡 扶安邑 東中里 303- 2번지에서 부친 辛基溫과 모친 李允玉의 3남 2녀중 차남으로 출생. 1915년(09세) 부터 문학적 고향인 선은리에 정착. 1917년(11세) 부안보통학교 2학년으로 입학. 1923년(17세) 6학년이 되는 봄. ‘움모임’이라는 소년단체를 조직, 뜻있는 친구들과 방정환이 주재 발간하던 아 동잡지를 읽으며 의기투합, 이해 5월에 가난으로 수업료를 못 내소 있는 한 학생을 일본인 담임선생님이 전체 앞 에서 발가벗겨 철조망 밖으로 쫒아내어 다시 개구멍으로 기어들어오라는 야만적인 처사에분개하여 전교생을 선동, 동맹휴학을 일으킴. 이로 인해 무기정학을 당함. 같은 해 두 살 연하의 만경 규수 朴姓女와 혼인. 1924년 (18세) 11월 24일자「조선일보 」에 ‘蘇笛’이라는 필명으로 「기우는 해」를 발표. 이로부터 1931년「시 문학」동인이 되기까지 7년간 조선, 동아, 중외 등에 80여편의 작품을 발표. 1925년 (19세) 11월 13일자 「조선일보」에 「이국자의 노래」를 발표하면서부터 필명 ‘蘇 笛은 夕汀으로 바뀜. ‘夕’은 출생일이 칠월 칠석(음력)인 것과 서해에 지는 낙조에 매료되어 ‘汀’자를 이어붙인 것임. 1927년 (21세) 3월 1일, 장남 효영 출생 1929년 (23세) 11월 1일, 차남 제영 출생. 11월 3일,「동아일보」에 첫 산문시 어머니 그 염소가 웨 ....?」를 발표. 1930년 (24세) 3월5일 마명 정우홍 소개로 상경, 조선 중앙불교전 문강원 石顚 朴漢永 스 님의 문하에서 불전을 연구. 정지용, 김기림 등과 교유가 시작되고 만해, 춘 원, 요한 등과도 대면을 시작. 1931년 (25세) 2월 6일(음), 모친 이윤옥 작고. 8월 안서의 소개로 첫시집 「촛불」의 서두 작 「임께서 부르시 면」을 『東光』지에 발표. 10월, 「시문학」제3호에 「선물」을 발표하면서부터 「시문학」후기 동인 으로 가담. 본격적인 문단활동 을 시작함. 그러나 김기림의 만류에도 불구하 고 향리 부안으로 낙향. 1932년 (26세) 낙향 전후 3여년 동안 10여 두락의 소작농에서 얻은 벼로 선은동 560번지에 집을 마련, 이곳을 ‘靑丘園’이라 이름 짓고 본격적인 시작 생활 시작. 노장사상과 도연명, 타고르, 만해에 심취하여 창작에 열중, 초기시의 대표작에 속하는 작품들이 바로 이곳에서 창작되어짐. 12월 27일, 장녀 일림 출생. 주요시 「나의 꿈을 엿보시겠습니까?」 (문예월간 1월호), 「봄의 유혹」(동방평론 7,8합병호) 게재. 1933년 (27세) 김기림이 처음으로 1933. 12.「조선일보」「시단회고」란에서 석정을‘목가시인’으로 호칭하기 시작. 「아 그 꿈에서 살고 싶어라」 (신생 2월호), 「봄이여 당신은 나의 침대()를지킬수가 있습니까」(삼천리 3 월호), 「일광용()」(카톨릭청년 7월호), 「훌륭한 새벽이여 오늘은 그 푸른 하늘을 찾으로 갑시다」 (신 동아 10월호) 등발표. 1934년 (28세)「너는 비둘기를 부러워하드구나」)문학2월호), 「새벽을 기다리는 마음」(중앙일보 3. 20), 「화석이 되고 싶어」 (신인문학 10월호) 발표. 1935년 (29세) 6월 5일, 차녀 난 출생. 「나는 어둠을 껴안는다」 (시원 2월호), 「밤을 맞이하는 노래」 (개벽 3월호), 「해변즉흥소시」 (시원12월호) 등 발표. 1936년 (30세)「수선화」(조선일보 1. 31), 「송하논고()」(중앙 6월호), 「이 밤이 너무나 길지 않습니까?」 (여성12월호) 등 발표. 1937년 (31세) 처녀시집「산호림의 백공작」을 출간키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뜻을 못 이룸. 이후 시집명을 「불」로 고친 후 한글학자 이윤재의 조언에 따라 시 집명을「불」에서 다시「촛불」로 고침. 저자가 직접 출두해야 한다는 전언 에 따라 상경했으나 이루지 못함. 1938년 (32세) 1월 21일 (음력), 3남 광연 출생. 4월「현대조선문학전집」권(1)(조선일보 출판부)에「나의 꿈을 엿보시겠습니까」등 6편 수록. 10월,「조선문학독본」(조광사)에「훌륭한 새벽이여 오늘은 그푸른 하늘을 찾으로 갑시다」외 2편 수록. 1939년 (33세) 11월 28일자로 첫시집「촛불」을 인문사에서 간행. 당시의 나이에 맞춰 33 편을수록. (6.25때 판권을 넘긴 이후의 재판본에서는 3편이 추가되어 36편 이 됨) 10월 말 「학운구락부」(9월호)에 발표한 시「방」이 문제가 돼 당국으로 부터 심한 조사를 받고 풀려남. 「고흔 심장」(조선일보 3.5), 「들길에 서서」(문장 6월호), 「작은짐승」 (문장 8월호), 「방」(학운구락 부 9월호),「슬픈구도)」(조광 10월호), 「삼 행시」(시학 10월호), 「슬픈 전설을 지니고」(문장 12월 호), 등 문장지를 중심으로 왕성히 발표. 1940년 (34세) 7월「문장」지에 게재키로 한「차라리 한그루 푸른 대」가 검열 삭제됨. 「꽃상여 가는 길」 (태양 3월호), 「슬픈백서리아()」(여성 4월호), 「애 가」(조광9월호) 등 발표. 1941년 (35세) 3월 28일, 소연 출생. 「문장」과 「인문평론」이 페간되고 친일문학지「국민문학」으로부터 원고 청탁서가 날아들자 (동년 9월) 찢어 던지고 이후 해방까지 절필함. 이 기간 에 발표된 시로는 「신보로」 (조광 42.7) 한 편 뿐임. 1943년 (37세) 10월 23일 4녀 엽 출생. 이 해 창씨개명을 안한다고 경찰서에서 출두령이 나오자 피신, 8 15 해방 까지 버팀. 1945년 (39세) 8월 18일,‘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 결성에 참여. 이날의 의장은 임화. 서기장은 김남천. 예하 단체인 ‘문학건설본부’ 중앙위원장에는 이태준, 서기 장은 이원조 등이 되었음. 9월, 8·15 해방의 감격 을 서울에서 펼칠까하다가 뜻을 바꿔 향리에서 ‘중학 설립기성회’를 조직하여 개교를 위한 준비에 착수. 1946년 40세) 3월 1일, 부안중학교가 개교되어 서울 등지에서 교사를 초빙해 왔으나 마땅 ‘국어’ 담당자가 없어 국어교사로 근무함. 그 해 전주여고 강당에서 결성된 「전북문화인연맹」에 채만식(대표), 이병기, 김해 강, 김창술, 백양촌 등과 함께 참여. 7월, 전북 최초의 종합지 「전북공예론」에 「8월 15일을」등의 시작 품 발표. 「삼대」(3.1기념시집), 「꽃덤불」(신문학 6월호), 「八월 十五일을」(전북 공론 7월호),「비의 서정시」(신문예 7월호) 등 발표. 1947년 (41세) 2월 16일 전주여고 강당에서 결성한 ‘전북문화연맹’에 참석. 7월 25일, 제 2시집「슬픈목가」를 부안 낭주문화사에서 100부 한정판으로 간행. 당시 석정의 시대관과 시의식에 많은 영향을 끼치던 김아(본 명, 김태 종)가 서문을 얹음.「움직이는 네 초상화」 (신천지 2월호), 「네 고향 하늘은 남녁하늘은」(백 제2월호), 「심판」(문학 4월호)등 발표. 1948년 (42세) 7월 28일, 4남 광만 출생. 11월 10일자로 부안중학교에서 죽산중학교로 부임.「봉화」 (문장 ‘속 간호’ 10월호) 발표. 1949년 (43세) 8월 31일자로 죽산중학교에서 다시 부안중학교로 옮김, 50년 6.25를 거쳐 9월 30일까지 근무함. 1950년 (44세) 3월 정음사간행「현대시집」에 김기림, 김광균과 함께「방」을 비롯하여 자 선시 24편 수록. 6월 채만식이 작고. 문인들과 함께 상여를 메고 치상한지 10일만에 향리 부안에서 6.25의 질곡을 맞음. 1951년 (45세) 이 무렵 생활이 너무 어려워 부안에서 단신 전주로 나온 석정은 1930년 불교전문강원 박한영 대사 를 소개했던 마명(馬鳴) 정우홍(鄭宇洪1897~ 1949)의 지제인 정환기씨 댁(전주시 고사동 497번지)에서 상 당 기간 기거 함. 마명은 일찍이 석전대사로부터 불교철학을 익혔으며 8 . 15 해방시까지 항일운동과 동양 철학 섭렵에 일생을 바친 우국지사로 석정에게는 사촌 자형 이 됨. 1952년 (46세) 3월 1일 ~53년 11월 30일까지 태백신문사 편집고문으로 있으면서 「토요 신단」을 주재. 5월 5일, 「촛불」「슬픈목가」의 재판본이 대지사에서 나옴. 상당부분 내 용이 변개됨. 이해에 부안에서 전주로 전 가족이 이거. 6 25의 상흔을 딛고 재기. 이때부 터 전쟁으로 인한 갖가지 상처와 비애를 ‘사랑의 정치 학’으로 각인하기 시작.「제주도」(태백신문3.10) 「망향()의 노래」(전북일보 4.5) 「귀향시초」 태백신 문 4. 20), 「소양강삼장」(전북일보 8.21), 「근영수제」(전북일보 9)등 20여편을 발표. 1953년 (47세)「발음」(전북일보 1.1),「산산산」(학원1월호).「애사 심장」(전북일보 2.2) 「짐승」(국어문학 5 호) 등 발표. 1954년(48세) 3월 1일, 삼남일보사, 편집고문직 피촉. 4월 1일, 이후 7년간 전주고등학교 교사생활. 50년대말 맥 락시대 동인지도, 이중 상당수가 중앙문단에 진출. 6월 15일,「중국시집」『대역』을 정양사에서 간행. 「빙하」(삼남일보1.1), 「백목련을 꺾던 밤」(태백신문 4.5) 발표. 1955년 (49세) 3월 전북대학교와 영생대학에서 ‘시론’을 강의 전북대 재학생으로 이뤄진 ‘청도문학동인회’(황 길현, 채만묵, 김종곤, 장태윤, 서완석, 이귀호, 허소라) 고문. 3월 15일 「한국시인전집」(학우사 권1)에 ‘나의꿈을 엿보시겠습니까?’. '방 ‘등 31편을 수록. 「어린 양을 데리고 」(전북일보1.1), 「망향의 노 래」(현대문학 3월호) 발 표. 1956년(50세) 11월 30일, 제3시집 『빙하』를 정음사에서 간행.「대춘부」(삼남일보1.1)「역사」(전북대학교 10.30) 발표. 1958년 (52세) 4월 30일, 「명시조감상」(이병기 공저)을 박영사에서 간행. 6월 5일 「매창시집」(대역)을 낭주매 창시집간행위원회‘에서 간행. 동년 「자유문학」지 시추진위원으로 피촉, 백촉(7월호) 추천. 11월 21일 ‘전라북도문화상(문학부분)’수상.「축제」(사상계 7월호),「종소리같은 별빛 속에」(자유문학 12월호)발표. 1959년 (53세) 4월 20일, 신구문화사 발행 「한국시인전집」(제5권)에 김영랑, 박용철과 함께 시작품 수록. 동년 「자유문학」지에 황길현(2월호), 이병훈 (4월호), 이기반(6월호), 허소라(9월호), 김민성(60년 2월호) 등을 차례로 추천하여 문단에 진출시킴.「나에게 어둠울 달라」(자유문학 4월호),「산은 알고 있다」(문예 12월호) 발표. 1960년 (54세) 2월2일 부친 신기온 작고. 4월 「동방반명」(1월1일) 등 4월 혁명을 다구치는 시작품들을 「전북대 학 교보」등에 이어 연이어 발표. 이승만 대통령 하야 성명이 나온 날 밤엔 만 취 상태로 미원탑 네거리 교통신호대 위에 올라가 윗저고리를 벗어든 채 오 가는 시민들에게 교통신호를 보내며 ‘민중의 승리’를 마음껏 외쳐댐. 11월 5일 「촛불」과 「슬픈목가」의 합본시집이 대문사에서 간행됨. 「단장서곡」(동아일 보 3.30), 「사월 혁명에 부치는 노래」(전북대학신문 4.13) 「우리들의 형제를 잊지말아라」(눈엽 8월 호), 「단식의 노래」(서울 일일신문10) 발표. 「한국의 현대시」(자유문학 5월호) 발표. 1961년(55세) 5월 5.16 직후 ‘교원노조’를 지지하는 시 「단식의 노래」와 혁신계 신문 「민족일보」에 발표한 「춘궁은 다가오는데 」, 「(전아사」등의 작품 때 문에 당국에 구금. 8일간 혹독한 취조를 받고 가까스로 풀려남. 8월 25일자로 전주고등학교를 떠나 이후 2년간 김제고등학교에서 교사생활. 이 무렵 어려움 속에 서도 역사현실과의 대결의지로 쓰여진 시 다수 발 표. 이해에 동부노송동 511번지 백에서 길 건너편 남노송 동 175의 27번지 소재의 마지막 거처로 이사함. 40여평의 정원을 가꾸면서 당호도 부안 시절 의 ‘청구 원’에서 ‘비사벌초사’로 바뀜.「쥐구멍에 햇볕을 보내는 민주주의의 노래」(전북일보 1.1) 「봄을 잊을 수는 없다」(전북대학신문 1.16), 「다가온 춘궁」, (민족일보 4.4) 「전아 사」(사상계 5월호), 「단식의 노래,」(서울일일신문 10)등 발표. 1962년 (56세)「무명에의 항변()(자유문학 5월호」, 「영구차의 역사」(자유문학 12월호) 등 5.16을 비판한 시 발표. 1963년 (57세) 8월 초 부안 변산문인협회(회장 김태수)와 전북일보사가 공동주최한 ‘하계 문화강좌’ 강사였던 석정과 조지훈이 변산에서 회동, 2박 3일간 문학과 지 조 등에 관해 정담을 나눔. 1964년 (58세) 3월 16일 전북대학교 대강당에서「시와 현실」이라는 연제로 전교생 대상 의 특강. 4월 1일자로 전 주상업고등학교로 옮겨 72년 8월 30일 정년시까지 재직.「봄은 있다」(삼남일보 1.1) 「슬픈 서정()」(한 양 6월호), 「지리산」(사 상계 12월호) 발표. 1965년 (59세) 6월 ‘전주시 문화장 수장’12월 당국이 국내반입을 규제하고 있는 「한양」지 (일본에서 교포가 간행)에 시 「그런 날은 언제나 올까」를 발표. (때론 원고를 인편으로 보내 기도 하였음.) 1966년 (60세) 이후 2년간 (66~67)한국문인협회 전북지부장 역임. 1967년 (61세) 이후 2년간 한국예총전북지부장 역임. 2월 월남파병에 깊은 우려를 표명한 시 「꿈의 일부」를 「신동아」지에 발표. 5월 조지훈 시인에게 시집 「산의 서곡」의 ‘서’를 부탁하는 친서를 보냄. 이후 8 월 초에 잡문 안 쓰기 로 유명한 병상의 지훈으로부터 정중한 내용의 ‘머리글’이 도착. 동년 10월 30일, 회갑기념으로 제4시집 「산의 서곡」을 전주 가림출판사 에서 간행 (시집 뒤 저자의 인지에 찍힌 한국지도 모형의 인장은 김아가 새 긴 것임) 과 의기투합. 군사정권의 비합법성과 표현의 자유 등에 관해 수시로 연 락을 취하며 비분강개함. 월남 파병을 비판 한 시 「꿈의 일부()(신동아 2월호), 「헐벗은 산하()에 살아 도 」(전북일보 3.12) 발표. 1968년 (62세) 8월 제주도 한라산 등반 이후 한라산 및 제주 풍물에 대한 관한 시 10여편 을 발표. 10월, ‘예술 의 기치를 대중 속에’라는 구호를 내걸고 예총 잔북지 부장으로서 ‘한국문학상’ 수상. 「조용한 분노」 (현대문학 8월호), 「추야장고조」(교육평론 10월호), 「백록담에서」(월간문학 11월호) 발표. 중학국어 (2), 고등국어 교과서에 「그 먼 나라를 아십니까」 수록. 1969년 (63세) 5월, 서울 남산 중앙정보부에서 혹독한 취조를 받고 풀려남. 8월 광주 Y 살롱에서 언론인 초청으로 제 1회 개인 시화전을 개최. 12월 29일, 전주시 다가공원에서 세울 ‘가람시비’ 건립위원으로 피촉. 「서 울 1969년 5월 어느날」(월간문학 8월호, 위 남산은 내려오면서 쓴 시),「비가」신동아 8월호 발표. 1970년 (64세) 4월 13~18일까지 ‘한국시인협회(회장 박목월) 초청으로 서울국립 공보관 화랑에서 제 2회 개인시 화전 개최. 11월 30일 박목월 시인협회장의 주선으로 제5시집「대바람소리」를 한 국시인협회’에서 간행. 「대바람소리」(현대시학 2월호), 「젊은 얼굴들」(전북대학신문 3. 17일자),「호조일성」 (전북문학 4월 호) 발표. 1971년 (65세) 4월 말 ‘외솔회’ 전북지회가 결성되고 초대 지회장에 추대됨. 5월 9~15일 까지 ‘전북문인협회’ 주관으로 ‘신석정 시화전’을 서울은행 2층에서 개최됨. 「지리산」 「산방일기」, 「청산별곡」 등 43편 이 출품됨. 1972년 (66세) 9월 1일 ‘문화포장을 수장. 9월 5일 전주상업고등학교에서 정년퇴임식. 시론 「시정신과 참여의 방향」 (문학사상 10월 창간호) 발표. 1973년 (67세) 8월 전주에서 「심상」지 주관으로 박목월 시인과 대담. 이 대담에서 자신 의 삶과 인생, 그리고 시세계에 대한 소회를 진솔하게 토로함(「심상」 1974년 5월호에 수록) 10/20‘대한민국예술문학상’수상. 12월 중순, ‘전라북도문화상’ 심사도중 고혈압증으로 졸도. 산문 「상처 입은 작은 역정()의 회고」(문 학사상 2월호)발표. 1974년 (68세) 7월 6일 0시 20분 영면, 전북 임실군 관촌면 신전리에 묻힘. 동년 7월 24 일자로 유고수필집 「난 초잎에 어둠이 내리면」이 지식산업사에서 간행됨. 1976년 7월, 전주덕진공원 ‘신석정 시비’ 가 건립 됨. 1984년 7월 작고 10주기를 맞아 1959년대 석정시인 추천(자유문학)으로 문단에 나온 문하생들로 「석정문학회」 (이병훈, 김민성, 이기반, 황길현, 허소라)를 결성함과 동시, 회지 1호 「그 먼나라를 아십니까?」를 간행 1986년 9월 기존의 시비 옆에 동상(배형식 작)을 세움. 12월, 역시 10주기를 기념하여 ‘석정문학회’에서 「신석 정대표시 평설」을 유림사에서 간행. 1991년 8월, 부안군 변산면 해창 ‘석정공원’에 시비를 건립. 2000년 3월 29일 임실 관촌면 신전리에서. 부안군 행만면 서옥부락에 있는 부인 박소정 여사의 곁으로 이장. 2001년 8월 24일 부안문화원(원장 김민성) 주최로 제 5회 ‘석정문학회’를 개최. 2004년 4월 25일 묘 앞에 비를 세움. 9월 3일~9일, ' 석정문학회‘, “전북문인협회 ”, 전북작가회의 등의 3개 문 학단체의 연합으로 ’신석정시인 30주기 추모문학제를 개최. 2007년 9월 14~ 20일 ‘신석정시인 탄생 100주년 기념문학제’를 전국규모로 개최. 제 1회 ‘촛불문학상’ 시상. 9월 14일자로 유고시집 「내 노래하고 싶은 것은」(창비)을 석정문학회에 서 간행. 2009년 4월 『신석정 전집』 (국학자료원) 간행 2011년 10월 전북 부안에서 석정문학관 건립 2012년 10월 '석정문학관'개관 1주년 기념문학제 개최 2013년 10월 25 ~ 26일 석정문학관 개관 2주년 기념식 석정문학제 개최 2014년 7월 11일 신석정기념사업회 창립 2014년 10월 25 ~ 26일 석정문학제 및 제1회 신석정문학상 시상 2017년 9월1일 부안댐 문학동산에 『임께서 부르시면』 시비 건립 □ 부록9-2) 신석정(辛夕汀) 시인 탄생과 시집 소개 석정이 사랑한 태산목이 서 있는 전주시 남노송동 175의 27번지 비사벌초사 시인 신석정(오른쪽)과 비사벌초사를 방문한 김남조(가운데), 김용호(왼쪽). Ⅱ.신석정 선생님의 좌우명 신석정 선생님의 좌우명은 『지재고산유수(志在高山流水)』이다. 한자를 직역하면 ‘뜻을 높은 산과 흐르는 물에 둔다’는 뜻이다. 속물이 되기 쉬운 것도 인간이고 지조를 헌신짝처럼 버리기 쉬운 것도 인간이므로 뜻을 항상 저 높은 산과 흐르는 물에 두어 정신의 기둥인 지조를 지킬수 있어야 한다고 믿고 좌우명으로 삼았다. 생전에 시인이 말하길 ‘세상이 모두 흐렸으되 맑은 것은 나뿐이요, 사람들이 모두 취했으나 취하지 않은 것은 나 뿐이다’는 굴원의 어부사 내용처럼 굴원의 경지에 도달하지는 못할지언정 실낱같이 남아 있는 지조나마 지키고 살자니 항상 마음을 저 고산과 유수에 둘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다. <굴원> 굴원(屈原, BC 343년~BC 277)은 중국 전국시대 정치가이자 시인이다. 초(楚)나라 회왕(懷王)의 좌도(左道 : 좌상, 좌의정 쯤 되려나)를 맡아 내정과 외교에서 활약하였으나, 정적(政敵)들의 모함을 받아 국왕 곁에서 멀어지고, 권 력을 잃게 되었다. 그는 제(齊)나라와 동맹하여 강국인 진(秦)나라에 대항해야 한다는 합종파(合縱派)였으나, 연 형파(連衡派)인 진나라의 장의(張儀)와 내통한 정적과 왕의 애첩(愛妾)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어리석은 왕은 제나라와 외교를 끊고 진나라에 기만당하였으며, 출병(出兵)하여서도 고전할 따름이었다. 진나라와 의 화평조건에 따라 자진하여 초나라의 인질이 된 장의마저 석방하였다.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던 굴원은 귀국 하여 장의를 죽여야 한다고 진언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고 왕이 진나라를 방문하는 것도 반대하였으나 역시 헛일 이었다. 왕이 진나라에서 객사(客死)하자, 장남 경양왕(頃襄王)이 즉위하고 막내인 자란(子蘭)이 영윤(令尹:재상)이 되었 다. 자란은 아버지를 객사하게 한 장본인이었으므로, 굴원은 그를 비난하다가 또다시 모함을 받아 양자강 이남의 소택지로 추방되었다. 어부사(漁父詞) 내용을 간략하고 알기 쉽게 설명해 보기로 한다. 굴원이 이미 쫓겨나 강가에서 노닐고 못가를 거닐면서 시를 읊조릴 적에 안색이 초췌하고 몸이 수척해 있었다. 어부가 그를 보고는 이렇게 물었다. "그대는 삼려대부가 아닌가? 어인 까닭으로 여기까지 이르렀소?" 굴원이 대답했다. "온 세상이 모두 혼탁한데 나만 홀로 깨끗하고, 뭇사람들이 모두 취해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으니, 그래서 쫓 겨난 몸이 되었소." 어부가 이에 말했다. "성인(聖人)은 사물에 얽매이거나 막히지 않고 능히 세상을 따라 옮기어 가느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혼탁하면 함께 그 진흙을 휘젓고 흙탕물을 일으키면 되고, 뭇사람들이 모두 취해있으면 그 술지게미를 먹고 탁한 술을 마실 일이지, 무슨 까닭으로 깊은 생각과 고상한 행동으로 스스로 추방을 당하셨소?“ 굴원이 이에 대답하였다. "내 듣기로, 막 머리를 감은 자는 반드시 갓을 털어 쓰고, 막 목욕을 한 자는 반드시 옷을 털어 입는다 하였소이 다. 어찌 깨끗한 몸에 더러운 것을 받겠소? 차라리 저 상강에 뛰어들어 강 물고기의 배속에서 장사를 지낼지언정 어찌 희디흰 순백으로 세속의 먼지를 뒤집어쓴단 말이오?" 어부는 빙그레 웃고는 배의 노를 두드려 떠나가며 이에 노래를 불렀다. "창랑의 물 맑으면 내 갓 끈을 씻으리, 창랑의 물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 그는 마침내 떠나가고 두 사람은 다시는 서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굴원은 이 작품 속의 시간 이후, 실제로 가슴에 돌을 품고 멱라강가에서 뛰어내려, 한 많은 생을 마감하였다 Ⅲ.시인이 되기까지 석정은 1907년 7월 7일 부안읍 동중리에서 태어났다. 석정의 본명은 석정(錫正)이었는데 생일이 칠석(七夕)날인데 착안하여, 자호를 석정(夕汀)이라 했다. 석정의 소년시절은 가난하고 고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평소 문학에 대한 동경이 남달랐던 석정은 집안 의 나무와 화초들을 가꾸며 도연명이 되어보기도 하고 전원시인 졸로우(Threau)rk 되어보기도 하며, 러시아 문호 트르게네프의 『사냥꾼 일기』나 하이네의 『서정소곡』등을 읽으며 꿈을 키워나가던 중, 18살이 되던 해 전남 영 광에 사는 진외가집 동생 남궁현이 석정의 집에 들렀다. 이 때 남궁현이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문학 잡지인 『창조』 창간호를 가져왔는데, 특히 『창조는 시골에 묻혀 살던 석정에게는 황홀 그 자체였다고 한다. 다음날 둘은 계화도에 놀러가서 수평선에 지는 낙조의 장관을 보고 감동하였고, 이날 밤 집에 돌아와 시 한편을 써서 남궁현에게 보였더니, 무릎을 치며 감탄하며, 투고를 권했는데 이 작품이 석정의 첫 발표작으로 1924년 11월 24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기우는 해』 였다. 첫 시를 잠시 감상해 보기로 한다. 기우는 해 해는 기울고요- 울던 물새는 잠자코 있습니다. 탁탁 툭툭 흰 언덕에 가벼이 부닺치는 푸른 물결도 잔잔합니다. 해는 기울고요- 끝없는 바닷가에 해는 기울어집니다. 오! 내가 미술가美術家였다면 기우는 저 해를 어여쁘게 그릴 것을. 해는 기울고요- 밝힌 북새만을 남기고 갑니다. 다정한 친구끼리 이별하듯 말없이 시름없이 가버립니다. 훗날 석정선생님이 자서전에서 이 시의 매연 첫행의 ‘해는 기울고요-‘는 주요한의 『봄달잡이』의 한줄 ’달은 물을 건너가고요-‘가 하도 매력적이어서 채용했노라고 고백하고 있다. 全北 扶安郡 扶安邑 東中里303-2 출생,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 560번지 소재 복원한 석정 생가‘청구원(靑丘園) □ 한국 시 문학사의 거목 신석정 선생님 바로알기(中) 부안인터넷신문승인 2019.01.18 (편집자 주: 석정문학관 연간 사업계획 '석정이야기 들려주기' 에 기세원 시인(부안농협 백산지점장)이 2018.3.17 특강한 내용을 3회로 나눠 소개합니다.) Ⅳ. 신석정 선생님의 시집공부 ▶제1집-"촛불"(인문사,1939) 시집 촛불은 1931년~1937년 사이에 이미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작품들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초판본은 간행 당시 의 선생님의 나이에 맞춰 33편이 수록되었은데, 중판본은 『먼 항해』, 『먼 날이 지내면』, 『화려한 풍선을 타 고』등 3편이 추가되어 총 36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2집-"슬픈 목가"(낭주문화사,1947) 슬픈 목가는 1937년 9월 『시건설』지에 발표한 『수선화』부터 『흑석고개로 보내는 시』(1943년)까지 발표한 6 년여의 작품으로 발간되었는데,초판본은 31편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재판본(1954) 에서는 초판본의 『房』을 빼 고, 『슬픈 구도(構圖)』와 『소년을 위한 목가』가 추가되어 총 32편이 실려 있다. ▶제3집-"빙하(정음사,1956)“ 빙하는 1946년 3월 1일 『삼일기념시집』에 발표한 『삼대』부터 『전북대핚교보』에 실린 『네 노랫소리를 들으 며』까지 총 79편이 실려 있다. ▶제4집-"산의 서곡"(가림출판사,1967) 삶의 체험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며, 질곡의 역사적 체험 속에서 역사의식이 예각화되어 주제 의식이 문학 적 심미성으로 드러난 시집으로 평가 받고 있는 산의 서곡은 1957년 3월 『제지계』에 실린 『석굴암 대불송』부 터 1967년 『탐라풍물시』까지 총 112편이 실려 있다. ▶제5집-"대바람 소리"(한국시인협회,1970) 대바람소리는 1967년 11월 전라예술제 가두 시사전에서 발표한 『울릉도 얼굴들』부터 1970년 12월『월간문학』에 발표한 『빛을 모반하는 저기압이』까지 74편이 실려 있다. ▶유고집으로 『내 노래하고 싶은 것은』에 111편이 실려 있고 그 외 지상에 발표되었으나, 시집으로 엮이지 않은 작품이 현재까지 16편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부록9-3) 신석정(辛夕汀) 주요 작품 감상 Ⅴ.주요 작품 감상 < 꽃덤불 > -신석정 태양(太陽)을 의논(議論)하는 거룩한 이야기는 항상 태양(太陽)을 등진 곳에서만 비롯하였다. 달빛이 흡사 비오듯 쏟아지는 밤에도 우리는 헐어진 성(城)터를 헤매이면서 언제 참으로 그 언제 우리 하늘에 오롯한 태양(太陽)을 모시겠느냐고 가슴을 쥐어 뜯으며 이야기하며 이야기하며 가슴을 쥐어 뜯지 않았느냐?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서른 여섯 해가 지내갔다. 다시 우러러 보는 이 하늘에 겨울밤 달이 아직도 차거니 오는 봄엔 분수(噴水)처럼 쏟아지는 태양(太陽)을 안고 그 어느 언덕 꽃덤불에 아늑히 안겨보리라. ('신문학'2호, 1946.6) 이 시는 광복 후 일제 강점기의 어둡고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광복의 기쁨과 완전한 조국 광복에의 희망을 노래하고 있는 시로, 식민지 시대를 다룬 대다수의 시와 마찬가지로 어둠과 밝음의 대립적 이미지를 주축 으로 하고 있다. 1연에서는 일제 강점기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 광복에 대한 소망을 보여 주고, 2연에서는 광복을 위한 노력과 갈망을 표현하고 있다. 3연에서는 애국지사의 죽음과 방랑, 변절과 전향 등 일제 강점하의 비극적인 상황을 나열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반복을 통해 토로하고 있다. 4연과 5연에서는 마침내 조국의 광복을 이루었으 나 좌우익의 갈등과 연합군의 신탁 통치로 인해 혼란스러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 한 어둠의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고 맞이해야 할 미래의 표상인 새로운 민족 국가의 수립을 ‘오는 봄엔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꽃덤불에 아늑히 안기는’ 모습을 통해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이 이 시는 과거에서 미래로의 시간의 흐름을 통해, 일제 강점하의 고통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이했으나 아직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 한 당시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걱정하는 시인의 고뇌와 민족 화합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형상화하고 있다. *수록교 과서 : (문학) 미래엔, 창비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신 석 정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대(森林帶)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들장미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놓고 뛰어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내려오면 양지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뜯고 길 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소리 구슬피 들려 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 그 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내리면, 꿩 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 서리 까마귀 높이 날아 산국화 더욱 곱고 노오란 은행잎이 한들한들 푸른 하늘에 날리는 가을이면 어머니! 그 나라에서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 함께 그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으렵니까? 이 시는 의미상 1~4연, 5~7연, 8~10연의 세 부분으로 나뉘고, 각 부분의 처음은 ‘먼 나라에 대한 물음’, 다음은 ‘먼 나라의 풍경의 구체적 제시’, 마지막은 ‘어머니에 대한 부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시에서 화자는 그의 이상적 세계를 ‘먼 나라’로 설정하고 있다. 이곳은 노루가 자유롭게 뛰어다니고, 사람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공간으로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자연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것은 현실로부터 벗어난 세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화자는 현실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먼 나라’는 동물들이 한가롭게 지내는 평화로운 공간이며, 과실이 익어 가는 풍요로운 세계이기도 하다. 한편, 이 작품에 드러난 어머니는 사랑 과 순수성을 상징하는 존재로, 화자가 이상 세계에서 함께 지내고 싶은 대상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사랑과 순수 성에 대한 화자의 소망이 간절함을 짐작할 수 있다. *수록교과서 : 천재(김윤식) <들길에 서서 > -신석정 푸른 산이 흰구름을 지니고 살듯 내 머리 후에는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하늘을 향하고 산림처럼 두 팔을 드러낸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냐 두 다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젊은 산맥으로 삼고 부절히 움직인다는 둥근 지구를 밟았거니…… 푸른 산처럼 든든하게 지구를 디디고 사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냐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거니― <촛불, 인문사, 1939> 이 시는 일제 강점기의 어려운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화자의 현 실 극복 의지를 노래하고 있다. 이 시의 화자는 현실 극복의 굳은 의지를 드러내기 위해 자신을 산에 비유하고 있 다. 푸른 하늘이 머리 위에 있고 그것을 향해 있는 산과 나무, 그리고 힘찬 산맥으로 버티고 선 산의 모습에서, 화자는 힘차고 굳센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있다. 그리고 날이 저문 들길에서 하늘의 푸른 별을 바라보며 살아가 는 일과를 거룩하고 기쁜 삶으로 인식한다. 왜냐 하면 어두운 하늘에 높이 떠서 세상을 밝게 비추는 푸른 별은 미 래에 대한 희망찬 삶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저문 들길과 같은 고난의 현실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으면서, 미래에 대한 강한 희망을 품고 살아가고자 하는 화자의 의지적인 삶의 노래로 요약할 수 있는 이 시는, 전원적이 고 목가적(牧歌的)인 경향에서 벗어나 현실 의식을 드러낸 신석정의 또 다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임께서 부르시면> -신석정 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호수에 안개 끼어 자욱한 밤에 말없이 재 넘는 초승달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포근히 풀린 봄 하늘 아래 굽이굽이 하늘가에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파아란 하늘에 백로(白鷺)가 노래하고 이른 봄 잔디밭에 스며드는 햇볕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이 작품은 자연적 질서에 순응하는 삶의 자세를 목가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특히 사랑하는 대상인 임이 부르는 형 태를 취함으로써 대상을 따르려는 순종적 자세를 강조하고, 전체적으로 연가풍의 친근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작품의 구조는 '~처럼 가오리다 ~ 임께서 부르시면'의 형태로 단순하다. 그리고 임에게 달려가는 화자의 자세를 '은행잎, 초승달, 물, 햇볕' 등의 자연적 사물을 통해 드러냄으로써 자연 친화적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이 작품 에 드러난 임은 자연을 상징하면서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세계를 표상한다. 또한 화자에게는 거역할 수 없는 절대 적 존재로 드러나 있다. 결국 임을 따르겠다는 것은 곧 자연적 질서에 순응하는 시인의 태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대숲에 서서> -신석정 대숲으로 간다 대숲으로 간다 한사코 성근 대숲으로 간다 자욱한 밤안개에 버레소리 젖어 흐르고 버레소리에 푸른 달빛이 배어 흐르고 대숲은 좋드라 성글어 좋드라 한사코 서러워 대숲은 좋드라 꽃가루 날리듯 흥건히 드는 달빛에 기척 없이 서서 나도 대같이 살거나 신석정( 시인의 1934년 작품이다. 대나무는 전통적으로 절개를 상징한다. ‘대숲이 좋더라’ ‘대같이 살거나’ 등의 표현은 대나무처럼 곧게 살고 싶은 시적 화자의 심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곧게 자라며 겨울에도 푸른빛을 잃 지 않는 대나무의 속성에서 곧게 살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이 작품은 나름의 아름다움과 생존 원리를 지니고 있는 자연으로부터, 인간 정신이나 도덕적 원리를 끌어내 온 한국 문학의 전통을 계승하는 한 사례로 볼 수 있다. 이 밤이 너무 길지 않습니까? / <촛불>1939 나는 어둠을 껴안는다 서울 1969년 –1969년 6월 5일 어느날 1960년대 일본 중학교 2학년 교과서에 실린 신석정 시인의 작품 '登高'(석정문학관 1층 전시) □ 부록9-4) 석정(夕汀)의 지조와 사랑 그리고 미당의 처신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시를 주로 썼다고 평가되는 시인 신석정(왼쪽)은 1943년 서정주(徐廷柱, 1915~2000) 에게 〈흑석고개로 보내는 시〉를 '정주에게'라는 부제를 달아 보낸다. 이때 신석정은 전북 부안에 살고 있 었고, 부안 바로 옆 고창이 고향이었던 서정주는 1942년 아버지 장례를 치른 후 가산을 정리해 한강변 흑 석정의 기와집으로 이사와 살고 있었다. 서정주는 흑석동으로 이사한 직후부터 일제의 대동아공영권 논리를 수용하고 전파하는 친일문학에 이미 빠져들기 시작했다. 신석정이 이 시를 쓴 이유도 고향 후배 서정주의 이런 변화를 감지하고 염려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이 시는 해방 이후 펴낸 시집 《슬픈 목가》(오른쪽)에 실렸다. 흑석(黑石)고개로 보내는 시 신석정 / - 정주(廷柱)에게 흑석고개는 어늬 드메 산골인가 서울서도 한강 한강 건너 산을 넘어가야 한다드고 좀착한 키에 얼굴이 까무잡잡하여 유달리 희게 들어나는 네 이빨이 오늘은 선연히 보이는구나 눈 오는 겨울밤 피비린내 나는 네 시를 읽으며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는 청년 그 청년이 바로 우리 고을에 있다 정주여 나 또한 흰 복사꽃 지듯 곱게 죽어갈 수도 없거늘 이 어둔 하늘을 무릅쓴 채 너와 같이 살으리라 나 또한 징글징글하게 살아보리라 - 1943 짓고, 1947년 대지사(大志社)에서 펴낸 시집 《슬픈 목가》에 실음. 未堂과 夕汀의 고향인 고창과 부안은 지근거리였으며 간혹 교류하는 사이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志操와 사랑을 신념으로하는 석정과 時流에 편승했던 미당은 밟아간 길이 확연히 달라지게 된다. 비사벌초사 정원에서 파이프를 만지작거리는 우뚝한 코의 서구적 외모를 가진 신석정 시인. [특집다큐]시인의 시대,신석정 / JTV전주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