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신석정논문2) 어머니,산(山),대바람소리 ―신석정(辛夕汀)론 / 윤여탁

이름없는풀뿌리 2023. 10. 22. 08:21
■ 저항적 목가시인 신석정(辛夕汀)에 관한 논문 5편 □ 신석정논문1) 신석정 초기 시편에서 본 참여의식과 저항의식 / 하재준 □ 신석정논문2) 어머니,산(山),대바람소리 ―신석정(辛夕汀)론 / 윤여탁 □ 신석정논문3) 신석정 시에서의 근대성과 노장적 자연인식 / 송기한 □ 신석정논문4) 신석정 초기시의 근대적 자연미와 공동체 의식 / 김옥성 -‘지구’ 이미지를 중심으로 □ 신석정논문5) 1930년대 시에 나타난 ‘지도’ 표상과 세계의 상상 ― 정지용, 임화, 김기림, 신석정의 시를 중심으로 / 강호정 □ 신석정논문2) 어머니, 산(山), 대바람소리 - 신석정(辛夕汀)론 윤여탁(서울대 교수) Ⅰ. 일제 시대에 지은 붉은 벽돌로 지은 교실의 화단 옆에서 깨끼발로 서서 건물 안을 들여다보는 조무래 기 중학생이 있다. 이 까까머리 중학생은 창문 너머로 반백의 긴 머리를 날리면서 한 손에 국어 책을 들고서 시를 가르치는 한 음유시인을 바라보고 있다. 중학생이 본 노시인의 모습은 세월의 무게를 상 징하는 얼굴에 앉은 검버섯과 이마에 새겨진 깊은 주름에도 불구하고 항상 웃음을 머금고 있으며, 깡 마르고 훤칠한 키 때문인지 수수한 빛깔의 양복이 헐렁하게 걸쳐있는 듯하다. 중학생은 지금 친구와 같이 친구의 외할아버지 집에 들어서고 있다. 그 집의 굉장히 넓은 정원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많은 나무와 꽃들이 빽빽하게 있어서, 중학생은 깊은 산 속에 들어온 착각을 하고 있다. 이 정원을 지나서 중학생은 일제 시대쯤에 지었으리라고 생각되는 넓은 대청이 있는 건물로 들 어서면서, 대청 마루의 앉은뱅이 책상에 앉아 무엇인가를 읽고 있는 한복을 입은 할아버지에게 인사 를 한다. 그러다가 중학생은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에 스스로 압도되어, 희미해지는 영화의 화면처 럼 슬그머니 어디론가 사라진다. 이상의 두 영상은, 내가 눈을 감고 있으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신석정 시인의 모습이다. 때로는 아스 라한 모습으로, 때로는 선명한 모습으로 말이다. 그리고 두 영상에 나오는 중학생은 어느덧 시를 연 구하는 연구자가 되어,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 할아버지 아니 노시인에 대하여 글을 쓰고 있 다. 나는 지금 이름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옛날 친구의 외할아버지에 대하여, 항상 연구자로서 마 음속에 무거운 짐으로 남아 있던 시인에 대하여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이 글에서는 신석정의 시적 변모 과정에 나타나는 시인의 의식과 그 의미를 중점적으로 살피고자 한다. 즉 초기의 시를 수록한『촛불』(1939, 인문평론사)와『슬픈 목가(牧歌)』(1947, 낭주문 화사), 중기의 시를 수록한『빙하(氷河)』(1956, 정음사)와『산(山)의 서곡(序曲)』(1967, 가림출판 사), 후기의 시를 수록한『대바람소리』(1970, 문원사)를 대상으로 하여, 서정 정신을 일관되게 구현 하고자 했던 서정시의 세계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시인 정신의 실 체와 그 변모 과정을 설명하고자 한다. 이같은 글은 일찍이 내가 지방 대학에 근무할 때, 좀더 부지런했다면 쓸 수 있었다. 시인의 고향 부 근에 근무한 관계를 활용하여 시인의 행적을 수소문으로나마 알아볼 수 있었으며, 실제로 당시에 내 주위에는 신석정을 기억하는 지인(知人)들도 많았다. 시인을 좋아하여 일찍이부터 사숙(私塾)한 사람 들, 시인의 잘 알고 있는 친인척들도 많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잇점을 활용하여 글을 썼다면, 보다 충실한 시인론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나는 이 때 이 짐을 덜지 못하고 말았다. 그 후로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신석정론을 쓸 준비가 제대로 돼있지 못하다는 부끄러 운 고백과 변명을 앞세울 수밖에 없다. 시인의 삶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도 두 영상에 나온 정도로 단편적이고, 시 세계를 체계적으로 읽거나 분석하지도 않았다. 다만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부담감 과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보자는 소박한 마음뿐이다. 그러니 글의 시작이 이처럼 사적인 글쓰기, 아니 개인적인 감회를 토로하는 방식이 된 것이다. 논문도, 평론도, 수필도 아닌 애매한 글로……. Ⅱ. 내 책상 주위에는 시인의 시집 5권이 복사본 또는 원본으로 놓여 있다. 그동안 여러 권의 신석정 시 선집이 간행되었지만, 시 전집은 내 눈에는 띄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지금 시 선집을 읽고 있다. 시 선집을 다 읽고는 다시 가만히 눈을 감고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나를 생각한다. 정말로 시인이 애타 게 그리고 싶었던 것은 ‘촛불’인가, ‘난이’인가, 아니면 ‘아내’인가? 좀더 크게 생각한다면, 자연인가, 사람인가? 아마도 시인은 무엇보다 ‘어머니’, ‘산’, ‘대나무’를 평생토록 그려내고 싶었을 것이라는 생각 이 들었다. 그리고 그의 시는 집요하리만큼 이 세 단어에 매달리고 있지만, 이 세 단어의 내포적 의 미 관계는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지 않았다. 다만 어머니를 그리워하다가 산에 오르고, 이 과정에 대나무(보기에 따라서는 여러 가지 사물의 하나일 수 있다.)가 자주 등장한다. 그렇다면 시인에게 이 세 대상, 즉 시적 대상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전달하는 것일까? 그동안 쓰여진 많은 신석정론은 이 의미를 여러 가지로 설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나는 다른 사람들의 신석정론을 더 이상 읽지 않기로 했다. 내 방식대로 시를 읽고, 내가 읽 은 대로 설명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서 먼저 그의 시를 읽어보자.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지대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野薔薇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놓고 뛰어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산비탈 넌즈시 타고 나려오면 양지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뜯고 길 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소리 구슬피 들려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 그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나리면 꿩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 서리가마귀 높이 날아 산국화 더욱 곱고 노란 은행잎이 한들한들 푸른 하늘에 날리는 가을이면 어머니! 그 나라에서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 함께 고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으렵니까? -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의 전문 시인에게 ‘먼 나라’는 어디일까? 이 시를 읽으면서 예이츠(W. B. Yeats)의 「이니스프리의 호도(湖 島)」라는 시가 문뜩 떠올랐다. 예이츠가 가고 싶었던 고향과 신석정이 가고 싶은 나라가 다르지 않다 는 생각이다. 다만 신석정은 ‘어머니’와 같이 가자고 하고 있을 뿐이다. 그곳은 호수와 숲이 주변 에 있으며, 벌이 잉잉거리는 풍요의 땅이다. 온갖 동식물들이 같이 평화스럽게 사는 곳이기에 자신의 몸과 마음도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곳이다. 시인이 예이츠의 시를 읽었을까? 이 문제는 지금 나에게 중요하지 않다. 예이츠의 시에 나오는 자연 과 신석정의 시에 나오는 자연이 다른 점도 중요하지 않다. 즉 시인이 예이츠의 영향을 받았는지 여 부(與否)나 그 이상향(理想鄕)의 이동(異同)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두 사람 모두가 이상향을 그리고 있다는 점과 신석정의 시에는 어머니가 등장한다는 점이 이 시를 읽는 나에게는 의미 있게 다가온다. 먼저 이들의 시에 그려지고 있는 이상향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실제로 시인들은 이 이상향에 가지 못하고 있다. 신석정은 서울이라는 도시에 있고, 예이츠는 런던에 있다. 지금 가지 못하고, 당 장 갈 수 없기에 가고 싶은 마음만 간절하다. 아마도 몸소 갈 수 있는 곳이라면, 이렇듯이 아름답게 만 묘사되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곳이기에 마음속에만 아름답게 그려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같은 시 세계는 1930년대 우리 서정 시인들의 시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고향 상실이라고 정의되는 시적 상황과 정서를 이 시 역시 보여주고 있다. 고향을 떠났거 나 고향을 빼앗겨서 다시는 고향에 갈 수 없는 사람들. 좀더 확대 해석하여 조국을 떠났거나 조국을 빼앗겨서 고국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이 방식으로 읽을 때, 해방 후의 작품인 「꽃덤풀」의 의미가 바 르게 이해될 수 있다. 「꽃덤풀」에 대해서는『문학과 교육』1999년 겨울호의 「해방 정국 및 전후 문학 작품의 교육 - 시를 중심으로」 참조.) 이 사람들이 자신들의 고향과 조국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간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다음으로 ‘어머니’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 예이츠의 시에는 다른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에 비 하여 신석정의 시에는 어머니가 등장한다. 유아(幼兒) 취미인가. 아니면 정신분석학에서 읽듯이 원형 (原型) 추구인가. 일면 타당성이 있는 해석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 가 장 편한 사람이 어머니라는 사실을 상기하고 싶다. 언제나 돌아가면 따뜻한 마음과 품으로 반겨줄 사 람, 푸근한 안식처인 고향과 같은 사람이 어머니라는 사실이다. 예이츠는 “일어나 지금 가리, 이니스프리로 가리.”에서처럼 혼자 가겠다고 한다. 이에 비하여 신석 정은 어머니를 부르면서 같이 살자고 권유하고 있다. 그리고 시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어머니는 이 후 다른 사람으로 바뀌게 된다. 중기 무렵에는 ‘난이’로, 후기에는 ‘아내’로 얼굴을 내민다. 이 사람들은 자신이 같이 살고 싶은 사람들이고,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우리 인간들에게 이처럼 같 이 살고 싶은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 사람들은 다름 아닌 가족이다. 가족이 모여 가정을 이루고 사 는, 혼자가 아니라 같이 사는 동양적 삶을 반영하고 있다. 다음의 시는 이렇게 모여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합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새끼들이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그 새새끼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다 합니다 언덕에서는 우리의 어린 양들이 낡은 녹색침대에 누워서 남은 햇볕을 즐기느라고 돌아오지 않고 조용한 호수 우에는 인제야 저녁안개가 자욱히 나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늙은 산의 고요히 명상하는 얼굴이 멀어가지 않고 머언 숲에서는 밤이 끌고 오는 그 검은 치맛자락이 발길에 스치는 발자욱소리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멀리 있는 기인 뚝을 거쳐서 들려오던 물결소리도 차츰차츰 멀어갑니다 그것은 늦은 가을부터 우리 田園을 방문하는 가마귀들이 바람을 데리고 멀리 가버린 까닭이겠습니다 시방 어머니의 등에서는 어머니의 콧노래 섞인 자장가를 듣고 싶어하는 얘기의 잠덧이 있습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인제야 저 숲너머 하늘에 작은 별이 하나 나오지 않았습니까? -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의 전문 이 시는 어머니에게 조용조용하게 말하는 아들의 목소리 형식을 취한 서정시로서, 이상향의 여러 표 상들과 생명의 요람인 어머니의 이미지가 결합되어 평화로운 세계에 대한 시인의 희구(希求)가 표현 된 작품이다. 또한 이 시의 전체적인 구조는 단순하지만, 긴 호흡의 리듬을 통하여 자연의 색채가 빚 어내는 친밀감과 환상과 동화적 낭만의 세계를 느끼게 하며, 동양적인 노장 철학의 무위자연(無爲自 然)의 사상과 루소(J. J. Rousseau)류의 자연설까지도 함축하고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은 어머니와 같이 자신이 가고 싶었던 이상향에 와 있어서, 그 이상향의 저녁 무렵부 터 밤까지를 시간적 흐름에 따라 그려내고 있다. 그 곳은 평화의 땅이며, 아이들의 세상이다. 어머니 가 있고, 새새끼가 있고, 꿈이 있는 곳이다. 꼭 어떤 세계라고만 한정하기 어려운 원초적인 모습을 간직한 세계이다. 따라서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 역시 꿈을 먹고사는 사람들로, 어머니와 아이들 이다. 이처럼 신석정의 시는 고향이나 어머니를 노래함으로써, 우리 인간의 가장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읽어내고 있다. 이것은 서정시의 정신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민족의 현실 문제 (「꽃덤풀」)나 개인적인 생활 문제(「빙하(氷河)」, 「전아사(餞迓詞)」)를 다룬 중기 시를 제외한 모든 시기의 시에서 일관되어 나타난다. Ⅲ. 신석정 시인은 어머니와 더불어 ‘산’을 자주 노래하고 있다. 주로 중기 시에 나타나는 경향이지만, 시인은 산에서 많은 보고 느끼고 있다. 각박해지기만 하는 사회를 떠나 그는 산에 오르고 있으며, 이 산에서 자연이 주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있다. 같이 ‘먼 나라’를 가자고 권유했던 것처럼, 시인은 이제 산에 같이 오를 것을 권유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 스스로 그 존재를 깨우치자고 한다. 그리고 산은 고대 희랍의 신화나 우리의 신화(神話)에서처럼 신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이다. 시인은 신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로 산정(山頂)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시인에게 산은 단순한 등산의 대상 이 아니라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탐구의 대상이다. ‘먼 나라’로 표현되기도 했던 또다른 이상향이 다. 따라서 시인에게 산은 신앙과 같은 대상이며, 신화의 주인공들이 살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다 음의 시는 이를 잘 보여준다. 崇古한 山의 Esprit는 모두 이 山頂에 集約되어 있고 象徵되어 있다. - 하여 神은 거기에 내려오고 사람은 거기 오른다. 1 六月에 꽃이 한창이었다는 「진달래」 「石南」 떼지어 사는 골짝. 그 간드라진 가지 바람에 구길 때마다 새포름한 물결 사운대는 숲바달 헤쳐나오면, 「물푸레」 「가래」 「전나무」 아름드리 벅차도록 밋밋한 능 선에 담상담상 서 있는 「자작나무」 그 하이얀 「자작나무」 초록빛 그늘에, 「射干」 「나리」 모두들 철그 른 꽃을 달고 갸웃 고갤 들었다. 2 씩씩거리며 올라채는 가파른 斷崖. 다리가 휘청휘청 떨리도록 아슬한 산골에 산나비 나는 싸늘한 그 늘 「桔梗」이 서럽도록 푸르고 선뜻 돌 타고 굴러오는 돌돌 굴러오는 물소리 새소리 갓 나온 매미소리 온 산을 뒤덮어 우람한 바닷속에 잠긴 듯하여라. 3 「더덕」 「으름」 「칡」 서리고 얽힌 넌출 휘휘 감긴 바위서리, 그저 얼씬만 스쳐도 물씬 풍기는 향기, 키보담 높게 솟은 「고사리」 「고비」 「관중」 群落에 「마타리」 끼워 어깰 겨누는 덤불, 짐승들 쉬어간 폭싹한 자릴 지날 때마다 무심코 나도 뒹굴고 싶은 산골엔 헐벗고 굶주린 자취가 없다. 4 발 아래 구름이 구름을 데불고 우뢸 몰고 간 골짝엔 어느덧 빗발이 선하게 누비는데, 「전나무」 앙상 한 가지에 유난히도 눈자위가 하이얀 「동박새」 외롭게 우는 소릴 구름 위에 위치하고 듣는 斜陽도 향 그러운 길섶, 늙어 쓰러진 나무를 나무가 한가히 베고 누워 산바람 속에 숨이 가쁘다. 5 길 넘는 「억새」 「시나대」 번질한 속을 짐승인 양 갈고 나가면 山頂 가까이 「들국화」 산드랗게 트인 꽃벌판 눈부신 언저리에, 「山木蓮」도 꽃진 자죽에 붉은 열맬 숱하게 달고, 「층층나무」랑 나란히 섰다. 예서부턴 짤달막한 나무들이 얼굴만 뾰주름 내밀고, 남쪽으로 다정한 손을 흔들며 산다. 6 해가 설핏하기 앞서 재빠른 귀또리, 산귀또리 서로 부르는 소리, 어느 골짜구니에선 벌써 자즈러지게 「소쩍새」 울어예고, 자주 구름이 쓰다듬고 가는 山頂에 산을 베고 누우면, 하이얀 구름이 하이얀 커 튼 사이사이 손에 잡힐 듯 촉촉 고갤 들고 솟아나는 별. 뻗어간 산맥의 검푸른 물결도 높아, 으스스 한여름밤이 차라리 겨울다이 칩다. 7 불피워 닦은 자리 아랫목보담 정겨운 山頂. 텐트 자락 살포시 젖히고 고갤 내밀면, 부딪칠 듯 떨어지 는 잦은 유성도 골짝을 찾아 묻히는 밤. 어서 보내야 할 얼룩진 오늘과, 탄생하는 내일의 생명을 구가할 꿈을 의논하는 꽃보라처럼 난만한 露 宿. 벌써 쌔근쌔근 산새처럼 잠이 든 벗도 있다. - 「智異山」의 전문 이 시에는 신석정 시인의 시에 흔치 않은 프롤로그(prologue)가 있고, 이 프롤로그의 내용은 시인이 산을 어떻게 보고 있나를 집약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프롤로그 내용보다는 시에 표현 된 내용의 구체성에 압도되고 말았다. 생물도감(生物圖鑑)이 있어야 읽을 수 있는 시. 비교적 등산을 좋아하는 나 자신이 느낄 수 없었던 등산의 요모조모. 어느 정도는 익숙한 전라도 사투리로 구사된 표현들. 나는 이 시를 읽는 순간, 숨이 막혀 옮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민족의 생명력을 상징하는 산으로 알려진 지리산, 그 지리산에서 우리들이 느꼈던 감회, 나와 같은 범인(凡人)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감회를 이 시는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다. 이효석의 소설 에서나 나옴직한 산의 여러 모습, 훼손되지 않은 자연의 아름다움, 그 자연에 거스르지 않는 인간의 마음. 이것은 이 시인이 표현하고 싶은 것이었다. 궁극적으로 시인은 ‘얼룩진 오늘을’ 어서 보내 고, ‘탄생하는 내일의 생명’을 맞고자 한다고 말하고 있다. 보잘 것 없는 인간을 자신들의 품에 안 고 있는 우주와 자연의 섭리를 깨닫고 있는 것이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시인의 뒤를 따라 등산을 하고 있었다. 눈을 감고 시인의 뒤를 따라 걷고 있 다. 어느 골짜기를 지나 등선을 오르고 있으며, 산정 어름에 친 텐트에 피곤한 몸을 뉘이고 잠을 청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시는 조선시대 정철이 쓴 기행가사(紀行歌辭)이거나 이은상의 수필이었으 며, 산을 좋아하는 내가 한 번도 쓴 적이 없기에 마음에 부담을 가지고 있던 산행 보고서였다. 적어 도 나에게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실감으로 다가오는 한 편의 기행문이었다. 아울러 이 시는 인간과 자연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상태 보고서로도 읽혔다. 최근 일부 시인들이 쓰고 있는 생명시(生命詩), 생태시(生態詩)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 이다. 이들의 시에는 우리 인류의 역사를 자연의 흐름에 거스름의 역사로 규정하고 있으며,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삶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노래하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시인의 초기 시, 즉 ‘어머니’를 노래한 시도 해석될 수 있다. 특히 「슬픈 구도(構圖)」라는 시는 이같은 생명의 시학, 생태의 시학을 일찍이부터 노래하고 있다. 나와 하늘과 하늘 아래 푸른 산뿐이로다 꽃 한 송이 피워줄 지구도 없고 새 한 마리 울어줄 지구도 없고 노루새끼 한 마리 뛰어다닐 지구도 없다 나와 밤과 무수한 별뿐이로다 밀리고 흐르는 게 밤뿐이요 흘러도 흘러도 검은 밤뿐이로다 내 마음 둘 곳은 어느 밤하늘 별이드뇨 - 「슬픈 構圖」의 전문 시인은 이처럼 산을 노래했고, 자연을 그려내고자 했다. 인간이 같이 살 수 있는 자연을 아름다운 언 어로 그렸다. 그러나 ‘난초’(「난초(蘭草)」, ‘수선화’(「수선화(水仙花) - 눈 속에 「사슴」을 보내 주신 白石님께 드리는 수선화 한 폭」), ‘목련’(「서정소곡(抒情小曲)」), ‘동백꽃’(「빙하(氷河)」, 「바다에게 주는 시」 「오동도(梧桐島)엘 가서」), ‘매화’(「호조일성(好鳥一聲)」, 「추야장 고조(秋夜 長 古調)」, ‘파초(「파초(芭蕉)잎을 밟고가는」, 「파초와 이웃하고」)’ 등으로 형상화되고 있는 이 자 연 대상은 항상 혼자가 아니었다. 그 곁에는 인간이 있었으며, 그것은 인간의 본성을 나타내는 상징 물이었다. 우리 인간의 정서를 형상화한 객관적 상관물이었다. Ⅳ.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삶을 추구했던 시에서 읽을 수 있는 시인의 정신은 무엇일까? 정말로 시인이 나에게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어머니의 품과 같은 이상향을 꿈꾸었던 시인, 지리산 또는 한라산의 품에 안기어서 인생살이의 진리를 터득했던 시인, 자연의 조화로운 삶을 알고 있었던 시인, 신석정은 지금 무엇을 나에게 말하고 있는가? 이 단서를 나는 ‘대나무’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왜 시인은 그토록 여러 번(「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로」, 「대숲에 서서」, 「황(篁)」, 「대바람소리」, 「눈맞춤」) 대나무를 노래하고 있을까? 도대체 대나무가 무엇이기에……. 아마도 그것은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이 ‘사군자(四君子)’의 하나로 선택하면서, 자신들의 정신을 대변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정 신과도 맞닿아 있는 것 같다. 즉 전통적으로 옛사람들이 그렸던 대나무, 옛시인들이 노래했던 대나무 를 통하여, 신석정 역시 선비 정신을 노래하고자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시 세계는 우리 고전 시가의 선비 정신을 반영했던 전통과도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이제 대나무를 노래한 시를 한 편 읽어보자. 대숲으로 간다 대숲으로 간다 한사코 성근 대숲으로 간다 자욱한 밤안개에 벌레소리 젖어흐르고 벌레소리에 푸른 달빛이 배어흐르고 대숲은 좋더라 성글어 좋더라 한사코 서러워 대숲은 좋더라 꽃가루 날리듯 흥근히 드는 달빛에 기척 없이 서서 나도 대같이 살꺼나 - 「대숲에 서서」의 전문 시인은 대나무같이 살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대나무는 ‘성글’기 때문에 좋다고 말하고 있 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다. 시인이 좋다고 한 이유인 ‘성글어 좋더 라’를 내 수준에서는 알 수가 없다. 더구나 ‘기척 없이 서서’ 살아야겠다는 깨달음에 이르기에는 족탈불급(足脫不及)이라고나 할까? 여러 자리에서 여러 형태로 숱한 인간들과 부대끼면서 살아야 하 는 우리들에게는 무슨 신선(神仙)의 잠꼬대냐 하고 동경(?)내지는 존경(?)의 염(念)을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다시 시인이 옮기는 발걸음을 따라서 대숲으로 더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 때 시인은 좀 더 직설적으로 대나무의 의미를 나에게 설명하고 있다. 그의 정원에서 기르는 여러 나무 중에서 왜 그가 대나무를 좋아하는가를 설명하고 있으며, 그것은 내가 옛날 노시인의 집에 들어섰을 때 느낀 분위기와도 상통하는 것이었다. 대바람소리 들리더니 소소한 대바람소리 小雪 지낸 하늘을 눈 머금은 구름이 가고오는지 미닫이에 가끔 그늘이 진다. 국화 향기 흔들리는 좁은 書室을 무료히 거닐다 앉았다, 누웠다 잠들다 깨어보면 그저 그런 날을 눈에 들어오는 병풍의 「樂志論」을 읽어도 보고…… 그렇다! 아무리 쪼들리고 웅숭거릴지언정 - 「어찌 제왕의 문에 듦을 부러워하랴」 대바람 타고 들려오는 머언 거문고소리…… - 「대바람소리」의 전문 시인은 자신이 집요하리만큼 그려내고 있었던 대나무를 처음에는 그저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 렇기에 겨울의 문턱에서 들은 대바람소리에서 계절의 변화를 먼저 읽어내고 있다. 시인은 ‘그저 그 런 날을’ 보내다가, 문뜩 들어온 병풍의 글을 보고서야 새로운 깨달음에 이르고 있다. 그것은 지조 를 지키면서 살아가는 삶의 즐거움이었다. 가난하지만 지조를 지키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 이 점은 후배시인으로 ‘지조론’을 펼쳤던 조지훈을 유난히 좋아했다는 사실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가족들에 대한 사랑을 읽을 수 있는 「파초와 이웃하고」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난한 시인으로 살았던 삶, 가난한 선비로 살았던 삶. 이런 말들이 내가 그의 제자 문인들에게 들었 던 전부다. 해방 후의 행적을 의심받아서 일시적으로 고초를 겪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같은 단상들과 이 시를 연관시킬 때, 시인이 말년에 왜 이렇게 노래했나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던 전부는 아니지만, 조금은 그 심정을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신석정 시인은 선비이고자 했다. 그리고 서정 시인이고자 했다. 한 때 현실이나 생활 문제에 관심을 표명한 적도 있지만,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서정 시인이고자 했다. 별로 유명한 학자나 선비가 배출 된 곳이 아닌 부안이라는 지방에서 태어난, 그래도 선비로 대우받고 살 수 있었던 시골 양반의 후예 였다. 적어도 시인은 이 점을 항상 기억하며 살았고, 그의 시는 그의 이런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Ⅴ. 평생을 깨끗하고 고결한 마음을 간직한 사람을 우리는 보통 ‘난초’로 비유한다. 그리고 우리는 신 석정을 난초와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별 무리는 없는 것 같다. 또 우리는 순박하고 순수한 마음의 소 유자를 아이와 같은 사람이라고 한다. 이 점에서도 역시 우리는 시인이 아이와 같은 마음을 평생토록 간직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선비였으며, 선비로서의 지조를 지키면서 살았던 탓이 기도 하다. 그렇기에 시인은 자연의 이치와 순리에 어울리면서 살 수 있었고, 어머니나 고향과 같은 푸근한 마음 을 간직할 수 있었다. 아울러 대나무와 같은 올곧은 지조를 지키면서 살았다. 나에게 할아버지로 기 억되는 시인이었지만, 그의 시는 빛깔로 표현하면 ‘하이얀’ 색이거나 무채색에 가까웠다. 아이들이 뛰어 놀고 있는 연초록의 들판과 같은 꿈을 간직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우리에게 장중(莊重)한 무게와 너그러움으로 산처럼 다가서고 있다. - 모란 순이 새끼손가락만치 자랐습데다. - 너는 그렇게도 봄을 기두렸고나. - 山茱萸꽃이 벌써 시나브로 지던데요. - 글쎄 봄은 오자 또 떠나는 게지…… 그러기에 우린 아직도 驚蟄이 먼 지역의 주민인가 봅니다. 山 같은 沈黙이 흐른다. - 「對話」의 전문 어른과 아이가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방식을 취하고 이 시는, 신석정이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삶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다. 즉 신석정의 시 세계와 그의 시 정신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것은 서정시의 정신으로,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룬 세계에 대한 깨달음이다. 아울러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으며, 그렇게 될 수도 없는 세계이다. 우리들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않고, 말을 아껴서 표현하는 시의 세계이다. 이제 다시 옛날의 기억으로 다시 돌아가서 그 정원에 들어서고 싶다. 아무 말도 못하고 사라졌던 중 학생처럼, 말로 다 할 수 없는 형상들을 중학생 때의 기억 속에 그냥 그대로 묻고 싶다. 시인이 그랬 던 것처럼 나도 순수함의 세계로 같이 갈 사람을 찾고 싶다. 신석정이 다음의 시에서처럼 홀연히 그 ‘맑은’ 세계로 떠났듯이 말이다. 먼 나라로, 자연으로, 산 속으로……. 그러나 나 같은 범인들은 불가능하겠지. 나는 그때 외롭게 산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 나뭇가지를 옮아앉으며 「동박새」가 울고 있었다. 어쩜 혼자 우는 「동박새」는 나도곤 더 외로웠는지 모른다. 숲길에선 은방울꽃 내음이 솔곳이 바람결에 풍겨오고 있었다. 너희들의 그 맑은 눈망울을 은방울꽃 속에서 난 역력히 보았다. 그것은 나의 꿈이었는지 모른다. 너희 가슴속에 핀 꽃이었는지도 모른다. - 「은방울꽃」의 전문 <참고문헌> 신석정,『촛불』, 인문평론사, 1939. 신석정,『슬픈 목가(牧歌)』, 낭주문화사, 1947. 신석정,『빙하(氷河)』, 정음사, 1956. 신석정,『산(山)의 서곡(序曲)』, 가림출판사, 1967. 신석정,『대바람소리』, 문원사, 1970. 신석정,『난초(蘭草)잎에 어둠이 내리면』, 지식산업사, 1974. 신석정,『슬픈 목가(牧歌)』, 삼중당, 1975. 신석정,『아직은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미래사,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