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신석정논문3) 신석정 시에서의 근대성과 노장적 자연인식 / 송기한

이름없는풀뿌리 2023. 10. 22. 08:27
■ 저항적 목가시인 신석정(辛夕汀)에 관한 논문 5편 □ 신석정논문1) 신석정 초기 시편에서 본 참여의식과 저항의식 / 하재준 □ 신석정논문2) 어머니,산(山),대바람소리 ―신석정(辛夕汀)론 / 윤여탁 □ 신석정논문3) 신석정 시에서의 근대성과 노장적 자연인식 / 송기한 □ 신석정논문4) 신석정 초기시의 근대적 자연미와 공동체 의식 / 김옥성 -‘지구’ 이미지를 중심으로 □ 신석정논문5) 1930년대 시에 나타난 ‘지도’ 표상과 세계의 상상 ― 정지용, 임화, 김기림, 신석정의 시를 중심으로 / 강호정 □ 신석정논문3) 신석정 시에서의 근대성과 노장적 자연인식 송기한(대전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차 례∥ 1. 근대성과 자연미 2. ‘촛불’의 인위적 세계와 ‘밤’의 통합적 세계 3. 절대적 관점의 상실과 현실로의 침윤 4. 신석정 시에서의 ‘자연’의 시사적 의미 【국문초록】 이 논문은 시문학파의 일원이었던 신석정의 자연시를 연구한 것이다. 그는 한국 시사에서 자연을 탐 색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의미화하는 작업을 보여준 시인이다. 그의 시에서 보이는 이런 특성에 기왕 의 연구자들 역시 그의 작품 세계를 전원시라든가 목가시의 범주로 묶어내어 전원시의 가능성을 펼쳐 보인 시인으로 평가했다. 자연의 현대적 의미를 천착해 들어간 신석정의 열정을 고려하면, 이런 해석 들은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신석정의 시들을 이런 틀에만 묶어 해석하는 것은 그의 탐색해 들어간 자연의 폭깊은 의미들을 단선화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무엇보다 그의 시들을 근대 성의 맥락으로부터 제외시키게 된다. 신석정의 작품을 두고 현대인의 피안을 읊은 시라고 평가한 김기림의 언급이 없었다고해도 그의 시들 을 근대성의 사유구조와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 신석정은 일상의 사물을 참신하게 읽어내는 이미 지즘 계통의 시를 썼고, 엘리어트의 고전정신을 받아들였다. 신석정의 시에서 자연은 노장적 의미가 짙게 풍겨난다. 그 스스로가 언급했던 것처럼, 신석정은 󰡔촛불󰡕을 간행할 무렵 노장사상에 심취해 있 었고, 그런 사유의 깊이가 자신의 작품에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그것이 현대 문명을 초월하는 자연의 궁극적 함의와 접맥하게 된 것이다. 신석정에게 자연은 현대 물질문명의 열악성을 대신할 꿈이었고 유토피아였다. 자연은 나와 너를 구분시키는 상대적 분포 의 세계가 아니라 상호간을 연결시키는 절대적 입장을 대변하는 매개체, 곧 노장의 인식론적 틀에서 사유되는 개념이었다. 범우주론적인 동일체 속에 서정적 자아를 기투시키는 인식적 완결성에 대한 꿈 이 신석정 시에서 갖는 자연의 궁극적 의미였다. 주제어 : 신석정, 근대성, 자연, 모더니즘, 유토피아, 노장사상, 이미지즘 1. 근대성과 자연미 시문학파의 일원인 신석정이 문단활동을 시작한 때는 1920년대 중반이었다. 그가 처음 작품을 쓰게 된 것은 1924년 ≪조선일보≫에 발표한 「기우는 해」를 기점으로 해서이다. 이후 ≪시문학≫ 3호에 「선물」을 발표함으로써 시문학파의 정식 구성원이 된다. 신석정이 시문학파에 참여했다는 것은 그가 이들 동인이 지향했던 문학적 이념에 대해 어느 정도 동조했다는 뜻이 된다. 잘 알려진 것처럼, 시문 학파가 표방하고 나섰던 문학이념은 순수문학이었다. 이들은 문학이 내용에 경도되거나 형식에 치우 는 것에 대해서 철저하게 경계했다. 시문학파의 구성원들이 카프문학이나 모더니즘이 보여주었던 문 학적 극단들에 대해서 거리를 두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합의에도 불구하고 시문학파의 구성원들이 모두 한 목소리를 내고 동일한 문학적 성향을 보인 것은 아니었다. 가령, 김영랑과 박용철은 우리말의 독특한 어감을 살리면서 시의 가락을 추구했 던 반면, 시의 이미지 구사에서는 매우 소홀했다. 정지용의 경우는 이미지의 조형적 구사에 있어 다 른 동인들과는 많은 대비점을 보여주었다. 반면, 신석정은 이 두 그룹이 가졌던 문학적 지향들을 모 두 자신의 작품 속에 담아내었다. 그는 김영랑의 가락도 받아들이면서 정지용의 이미지 구사 수법도 훌륭하게 소화해내었다. 신석정은 시의 방법적 의장에 가락과 심상을 모두 직조해냄으로써 자신만의 고유한 시세계를 만들어내었던 것이다.1) 지금까지 신석정에 대한 연구는 자연의 궁극적 의미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특히 그의 시를 두고 “목신이 조으는 듯한 세계를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노래”2)했다는 김기림의 평가 이후 목가시 라든가 전원시의 의미 혹은 그것의 한국적 가능성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받쳐졌다.3) 그리고 접근 방 식은 다르지만 신석정 시에서 드러나는 자연을 유토피아 의식으로 파악하여 분석한 경우도 있었고,4) 신석정이 도연명의 문학이나 도가에 심취해 있었다는 사실에 착목하여 그의 작품을 도가와의 관련양 상으로 해석한 경우도 있었다.5) 1)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김용직의 「목신의 세계-신석정론」을 참조할 것. 『한국현대시사』, 한국문연, 1996. 2) 김기림, 「1933년 시단의 회고」,『시론』, 백양당, 1947. 3) 이건청, 「한국전원시연구」, 단국대 대학원, 1985. 윤여탁, 『신석정』, 건국대출판부, 2000. 4) 김경복, 「신석정 시의 유토피아의식 연구」,『한국현대시인론1』(오세영외 편), 새미, 2003. 5) 박호영, 「신석정의 문학사상」, 『한국시문학의 비평적 탐구』, 삼지원, 1985. 이런 분석과 평가들은 자연의 현대적 의미를 염두에 둘 때, 어느 정도 의의가 있는 것이다. 현대 사 회에서 사회적인 동기에 의한 것이든, 혹은 자연의 기술적 지배라는 근대적 동기에 의한 것이든 유토 피아 의식이 내재되지 않은 자연의 가치란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석정이 활동하던 시 기가 일제 강점기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자연의 그러한 의미화는 더욱 의미깊은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이들 연구에는 몇 가지 한계점이 있다. 하나는 신석정 시에 대한 연구가 시대적 맥락 및 문 예학적 맥락과 무관하게 해석되었다는 점이다. 김기림의 언급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신석정의 시가 모 더니즘의 흐름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특히 그의 시에서 방법적 의장으 로 구사되고 있는 이미지즘의 수법들은 당대 최고의 이미지스트 가운데 하나인 정지용과 비견된다. 그럼에도 신석정의 시를 근대성의 흐름과 이 사유 속에서 직조된 경우로 이해하지 못했다. 왜 그러한 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모더니즘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가 그 원인 중의 하나가 아 닌가 한다. 모더니즘 하면 으레 떠올리는 화두가 도시적 감수성이나 의식의 분열, 혹은 형태 파괴와 같은 극렬한 자의식 등등이다. 이런 자의식들이 없다면 모더니즘의 영역 속에 편입시켜 논의하지 않 는 것이 그간의 연구관행이었다. 그런데 신석정의 작품들은 어떠한가. 그의 시들은 지극히 온전한 의식의 흐름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 는 극렬한 자의식으로 자아를 훼손하거나 문명의 아픈 곳을 힘주어 고발하지 않았다. 그는 문명의 뒤 안길에서 이에 비견할 만한 대상을 조용히 물색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에게는 자연이었던 것인데, 자 연의 그러한 의미를 문명의 맥락에서 이해하지 않은 것이다. 두 번째는 신석정이 심취했던 노장사상과 그의 작품과의 관련양상이다. 몇몇 연구자들이 지적한 것처 럼 신석정의 시들은 노장사상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작품도 작품이려니와 첫시집 󰡔촛불󰡕이 나올 무렵, 신석정은 노장철학과 도연명, 그리고 타고르 등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스스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6) 자연 속에서 생의 기를 모으면서 이와 더불어 살아가는 노장사상 의 문학적 전통은 한국문학사에서 오랜 역사적 기원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신석정의 시에서 노장사 상의 흐름을 읽어내는 일은 그의 시세계나 시사적으로 새로운 의미역을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뻔한 도식적 귀결에도 불구하고 신석정의 시세계에서 보이는 노장사상은 매우 중요한 시사 적 의미를 갖고 있다. 특히 그의 노장적 사유가 근대성의 맥락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인 것이라는 점을 전제할 경우, 그 사상적 흐름은 더욱 뜻 깊은 것이 된다. 해체된 자의식을 치유하는 인식적 완결성의 세계가 노장적 자연 인식임을 감안하면, 이를 철학적 체계로서 작품화한 경우는 신석정이 거의 첫머 리에 놓이기 때문이다. 신석정의 작품세계를 모더니즘의 맥락과 노장적 자연인식이라는 두 흐름으로 연관시킬 경우, 첫 시집 『촛불』과 두 번째 시집 『슬픈 목가』에서 보이는 자연의 간극과 현실인식의 차를 설명할 수 있는 실마 리를 얻게 된다. 신석정은 1930년대 후반으로 내려갈수록 『촛불』의 세계에서 보여주었던 낭만적 전원 의 감각을 상실하고 현실에 대한 비애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다. 이런 문학적 변모를 현실과 꿈의 괴리나, 객관적 상황의 열악함에서 오는 한계로 파악한 사례도 있 다.7) 즉 신석정이 귀농생활에서 맛본 것은 신산하기 짝이 없는 현실적 상황이었고, 그 낭패스런 상 황이 평소 지녔던 전원생활의 낭만적 세계와 모순, 충돌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상황논리 에서 오는 단순한 비교의 결과일 뿐, 근대의 제반 사유속에서 일으키는 정신적 흐름과는 무관한 해석 이다. 신석정의 시에서 드러나는 모더니즘적 흐름과 노장사장, 그리고 이 두 사유들 사이의 상호 연관성을 밝히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이럴 경우 󰡔촛불󰡕의 모더니즘적 의장과 노장적 사유와의 길항관계, 그리고 󰡔슬픈 목가󰡕에서 탐색되었던 현실에 대한 부정적 감수성과 현실비관의 그림자들에 대한 이해 의 잣대가 만들어질 것으로 보인다. 2. ‘촛불’의 인위적 세계와 ‘밤’의 통합적 세계 신석정이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하던 30년대는 모더니즘이 정착된 시기이면서 활발히 꽃을 피우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때는 다른 어떤 집단보다 모더니즘을 지향한 동인들이 훨씬 많았는데,‘구인회’ 그룹뿐만 아니라‘3․4문학’동인도 있었고, 평양 중심의‘단층’ 파도 있었다. 마치 모더니즘이 문학 의 대세인양 문단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석정 역시 이런 문단적 조류로부터 비껴서 있 지 않았다. 신석정의 시가 모더니즘의 영향 하에 씌어진 것을 가장 먼저 언표한 사람은 김기림이었다. 그런데 그 자신도 김기림의 그러한 평가에 대해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편석촌도 ‘소음 난조에 찬 현대 문명의 매연을 모르는 다비테의 행복한 고향에, 피폐한 현대인의 영혼을 위하여 한 개의 안식처를 준비하고 있는 그의 목가는 그 자체가 견지에 따라서는 훌륭하게 현대 문명에 대한 간접 비판이기도 하다’고 그의 시론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부정보다는 긍정이라는 편이어서 망국의 민족으로 태어났 으되 쓰러지기에 앞서 󰡔촛불󰡕에 담은 작품정신을 내 영원한 인간 수업의 지주로 삼았던 것이다.8) 신석정은 자신의 시가 현대 문명에 대한 간접 비판을 담고 있다는 김기림에 평가에 대해 긍정하는 편 이라고 했다. 자연미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문명화된 단계를 말해주는 증거임을 감안하면,9) 신석정 이 발견한 목가적 자연은 근대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이는 것이다. 6) 신석정, 「문학적자전」, 『신석정전집5』, 국학자료원, 2009, p.400. 7) 김용직, 앞의 글, p.189. 8) 신석정, 「자작시해설」, 『전집5』, 국학자료원, 2009, pp.277-378. 9) Adorno, 홍승용 역, 『미학이론』, 문학과 지성사, 1993, p.111. 김기림이나 신석정 자신의 언급이 없다고 하더라도 신석정의 시들은 모더니즘의 경계 안에 포섭되는 양식적 특성을 갖고 있다. 그의 시들은 모더니즘 가운데, 특히 이미지즘 계통의 시에 가깝다. 흄 (T.E.Hulme)에 의해 제기된 이 사조는 일상의 사물을 새롭게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는데, 이는 낭만주 의의 몽환적 상상력과 대비되는 방법적 의장이다. 순수 직관을 바탕으로 사물을 괴기적으로 사유하는 낭만주의와는 달리 이미지즘은 대상을 정확하게 인식한다. 즉 몽환성을 벗어나기 위해서 시는 일상의 구체적 사물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사물을 그대로 모사하는, 기존의 고전주의 가 보여주었던 단순 인식이어서는 곤란하다고 본다. 따라서 사물은 기존의 인식과 달리 새롭게 묘사 되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시가 이미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논리였다. 흄이 주창한 초기의 이미지즘은 비연속성의 세계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현대 세계가 분열과 자의식 적 혼돈에 뿌리를 둔 자율적 인간형이라는 관점에 서면, 흄의 비연속적 세계관은 현대를 해석하기 위 한 그 나름의 좋은 객관적 근거를 갖게 된다. 그러나 비유의 참신성이 사유의 깊이라든가 현대세계를 구휼할 수 있는 내적 근거가 되지 않기에 그의 불연속적 세계관은 근본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 다. 그리하여 흄의 그런 한계를 딛고 나온 것이 엘리어트의 고전론이다. 그는 비연속인 세계 저편의 깊이 에서 다시 결합하는 세계를 탐색했다. 그 모색의 결과 그가 찾아낸 것이 영국 정교였다.10) 그것은 해체와 파편의 세계가 아니라 통합과 구축의 세계였다. 따뜻한 햇볕 물 위에 미끄러지고 흰 물새 동당동당 물에 뜨듯 놀고 싶은 날이네 언덕에는 누런 잔디 헤치는 바람이 있고 흰 염소 그림자 물속에 어지러워 묵은 밭에 까마귀 그 소리 한가하고 오늘도 춤이 잦았다---하늘에 해오리--- 이렇게 나른한 봄날 언덕에 누워/나는 푸른 하늘 바라보는 행복이 있다 「푸른 하늘 바라보는 행복이 있다」 전문 인용시는 󰡔촛불󰡕에 실린 신석정의 초기작 가운데 하나이다. 이미지의 선명한 구사가 돋보이는 작품이 기에 이 계통의 시에 편입시켜 논의해도 무방한 작품이다. 따라서 김기림의 언급과는 무관하게 신석 정의 시들을 현대문명에 바탕을 둔 모더니즘계로 분류해도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특히 신석정의 시들은 초기 이미지즘보다는 엘리어트 류의 후기 이미지즘적 특성을 보인다. 신석정 시의 보증수표격 인 자연미는 통합의 상상력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시들은 주부와 술부가 완벽하게 갖추어진 모양새를 갖고 있다. 물론 이런 서술형의 문장이나 시작법이 이미지즘에서 표방하 는 농축미와 압축미에 위배되는 것은 사실이다.11) 10) 황동규 편, 『T.S. Eliot』, 문학과 지성사, 1989, p.26. 11) 김용직, 앞의 글, p.176. 그러나 구축의 세계, 통합의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 이미지즘의 또 다른 속성을 감안하게 되면, 신석 정의 이러한 시적 의장들은 일견 의미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신석정의 시들은 형식의 참신함이라든 가 언어의 조건이나 배열과 같은 방법적 의장에 주안점이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김기림의 언급처럼 “현대 문명의 매연을 모르는 다비테의 행복한 고향에, 피폐한 현대인의 영혼을 위하여 한 개의 안식처”에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모더니즘 시에서 흔히 발견되는 감정의 절제에 관한 것이다. 이 문제는 모더니 즘, 특히 이미지즘 계통의 시에서 금기시 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이다. 사물을 객관적으로 응시하기 위해서는 감정과 같은 정서의 과잉은 금물이다. 한국 근대 모더니즘 시사에서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 는 것이 이미지즘이다. 그런데 이 계통의 시를 창작한 시인들이 범했던 일반적 오류 가운데 하나가 감상의 과잉이었다. 도회적 우울이나 근대의 역능을 감안하면, 센티멘탈은 피할 수 없는 걸림돌이긴 하지만, 그 필연적 이유에도 불구하고 이 감수성이 이미지즘의 본령은 아니다. 그런데 흔히 범해졌던 이미지즘의 이런 오류들이 신석정의 시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런 면들이 모더니즘의 수준을 한 단계 올린 것은 아닌가, 또 그것이 신석정 시의 이미지즘의 의의가 아닌가 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대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야장미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놓고 뛰어 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나려오면 양지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뜯고 길 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바다 물소리 구슬피 들려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 그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함께 고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않으렵니까?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부분 잘 알려진 신석정의 명시,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이다. 여기서 ‘먼나라’란 두말할 필요없이 유 토피아이다. 이를 서양적 의미에서 전원적 이상향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또 동양적 의미로는 무릉도 원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리고 문명과 대척점에 서 있는 반문명적인 낙원으로 인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가 근대 이전의 세계, 곧 자연이 기술적으로 지배되기 이전의 세계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감안하면, 신석정 시에서는 후자의 경우에 좀 더 가까워 보인다. 그러므로 ‘먼 나라’는 인 간에 의해 변형되지 않은 인간 이외의 모든 현상을 지칭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신석정의 초기 시세계가 노장사상에 근거를 둔 것이라는 해석은 여기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촛불』 이 간행될 무렵, 신석정은 노장 사상을 비롯한 동양사상에 대해 깊은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학청년기를 회상한 다음의 글이 이를 잘 말해준다. 한문 공부를 하는 한편 노장철학을 섭렵해 보려고 무진 애도 써보고 도연 명의 소박한 시를 애독하는가 하면 타고르의 세계에 파묻히던 때도 바로 그때였다.12) 창작에 열중하면서 노장사상에 대해 알려고 무진 애를 썼다는 사실은 이 사상이 그에게 단지 취미 차 원 이상의 것이었음을 알게 해 준다. 신석정에게 노장사상은 단순한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시의 본질 에 속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노장사상이란 자연스러움의 도(道)와 무위를 양축으로 하는 사유체계이 다. 도란 자연 혹은 자연과 같은 인식체계이다. 무위 역시 인위를 거부하는 자연스러움을 뜻한다.13) 따라서 자연의 시원적 의미를 밝히고 그 아우라 속에서 안주하는 것이 노장사상의 요체이다.14) 자연의 질서 속에 편입된다는 것은 인위적인 것의 상실 없이는 불가능하다. 나와 너를 구분하는 상대 적 분포와 구분이야말로 반노장적 사유인 반면, 너와 나는 둘이 아니고 만물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 절대적 입장은 노장 사상의 핵심이 된다. 즉 자연으로의 절대적 관계회복, 그러한 회복을 가능 케 하는 ‘되돌아감의 행위’, 그리고 모든 것이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관계론적 사유가 노장적 자연 인식의 궁극인 것이다.15) 12) 『전집5』, p.396. 13) 박이문,『노장사상』, 문학과지성사, 1992, p.33. 14) 전동진,『창조적 존재와 초연한 인간』, 서광사, 2003, p.274. 15) 위의 책, pp.297-299. 이런 맥락에서 보면 ‘먼 나라’는 노장적 자연인식이 도달할 수 있는 절대극점이라 할 수 있다. 이 곳은 모든 관계론적 연결고리가 갖춰진 곳이다. 이미 ‘먼 나라’라는 말 속에는 ‘지금 여기’의 상 황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먼 나라’로 표상되는 자연의 시원적 의미가 ‘지금 여기’ 에는 없다는 뜻이 된다. 이런 상대적인 구분에의 지양이 ‘먼 나라’이고 그곳은 관계론적 질서가 회 복되는 곳이다.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노장적 사유의 역동성인 ‘도의 되돌아감’이라는 운동이 생기 해야 한다. 그것이 곧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행위인데, 인용시에 보이는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 디 잊지마셔요/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라는 구절은 ‘그 나라’로 되돌아가 관계적 세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염원의 표백에 해당된다. 한편 앞서 언급대로 신석정의 시들은 주부와 술부가 갖추어진 독특한 방법적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경우이다. 이런 특성이 이미지즘 계통의 시들에서 꼭 필요한 농축의 미라든가 압축의 미를 감소시키 는 요소로 지적되었다. 그러나 노장적 자연관을 구현하는 데 있어서 이 역동성은 신석정의 시에서 매 우 기능적인 역할을 한다. “그렇게 가오리다 / 임께서 부르시면”(「임께서 부르시면」), “아스라한 산너머 그 나라에 나를 담쑥 안고 가시겠습니까?”(「나의 꿈을 엿보시겠습니까」) “저 밤나무 숲으로 나아가지 않으렵니까?”(「秋果三題」) 몇몇 작품을 무작위로 가려 뽑은 것이긴 하지만, 신석정의 시에서 자연으로 ‘나아감’, 긍극적으로 는 절대적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담론들은 매우 많이 산견된다. 이런 역동적 행위들이 지향하는 곳은 인간의 참된 삶의 양식이 실현되는 곳이다. 신석정에게는 그곳이 ‘먼 나라’로 구현됨은 이미 지적한 바 있거니와 이곳은 깊은 산림대와 고요한 호수가 있고, 야장미가 피어 있으며 노루새끼가 마 음껏 뛰어다니며, 아무도 살지 않는 나라로 표상된다. 이를테면 문명으로 대표되는 그 어떤 것도 물 들어 있지 않은, 자연의 시원적 의미가 되살아나는 곳이다. 이 공간 속에 합일되기 위해서는 ‘어린 양’과 더불어 와야 하는데, 이때 동물과 인간, 자연과 문명의 평화로운 공존은 상대적 구분을 뛰어 넘는 절대적 통일의 세계에 해당된다. 문명적 요소를 상실한 순수 자연의 상태, 곧 상대적 분포나 구 분이 없는 순일한 자연인이 되어야만 곧 나와 너의 대립자의식이 무화되어야만16) 그 ‘먼 나라’에 입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계론적 질서와 완벽한 동일화의 세계야말로 근대 모더니즘이 추구한 비파편화된 세계, 엘리어 트가 갈망한 연속의 세계가 아닐까 한다. 이렇듯 자연과의 동일화는 신석정의 시세계에서 은유 이상 의 의미를 갖는다. 자연과의 절대적 관계항의 회복은 근대적 삶의 좌절에 대한 영원한 보상의 심리와 맞물리는 것이다. 신석정은 근대적 우울과 좌절을 자아의 내면 속에 파편화시킨 것이 아니라 자연이 라는 거대 질서 속에서 이를 일체화시켰다. 그것이 노장적 자연 인식이었음은 이미 언급한 바 있거니 와 이런 사유적 흐름과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것이 ‘촛불’과 ‘밤’의 이미지이다. 신석정의 시에 서 촛불은 낭만적 속성과 구도자의 기원을 매개하는 장식품 그 이상을 넘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 촛불은 구도자의 기원을 상승시키는 수직의 의미도 아니고 낭만적 기원의 센티멘탈한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석정의 시에서 근대적 파고를 일으키는 거대한 파도이자 인식적 완결성을 와해하는 교란자에 해당된다.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 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 합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 새끼들이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그 새 새끼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다 합니다 언덕에서는 우리의 어린 양들이 낡은 녹색 침대에 누워서 남은 햇볕을 즐기느라고 돌아오지 않고 조용한 호수 위에는 인제야 저녁안개가 자욱이 나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부분 일림(一林)아 촛불을 꺼라 소박한 정원에 강물처럼 흐르는 푸른 달빛을 어서 우리 침실로 맞아 와야지--- 유리창 하나도 없는 단조한 나의 방--- 침실아-/그러나 푸른 달빛이 풍요히 흘러오면/너는 갑자기 바다가 될 수도 있겠지--- 「푸른 침실」 부분 촛불은 램프처럼 개별화된 빛을 의미한다. 그런 까닭에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생명에 대립되는 개인의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17) 이런 의미역은 촛불이 지극히 작은 것이면서 구도자의 기원 을 보족하는 수단정도로 인식하는 데서 빚어진 것이다. 그런데 촛불의 이런 일반화된 의미는 신석정 의 시 세계에서 약간의 변형을 겪는다. 신석정의 시에서 촛불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바, 하나는 보편적인 것에 대립되는, 개인적인 것의 상징으로 이해된다. 16) F. Capra,『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 범양출판사, 1995, p.131. 17) 이승훈 편저,『문학상징사전』, 고려원, 1996, p.461.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에서 촛불은 자연의 일체화된 감각을 훼손하는 것의 비유로 쓰이고 있다. 황혼이 밀려올 무렵 온갖 생명체들은 그 어둠과 더불어 조화로운 저녁 준비를 한다. 그런데 촛 불이 켜짐으로써 그런 자연의 조화로운 관계는 파괴된다. 서정적 자아가 어머니로 하여금 아직 촛불 을 켤 때가 아니라고 항변하는 것은 그런 동일화된 세계의 일탈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런 비동 일성을 매개하는 촛불의 파괴적 감각은 「푸른 침실」에 오면, 좀 더 심화된 의미로 나타난다. 시적 화 자는 일림이라는 자연을 매개로 촛불의 인위성을 제거하려 드는데, 이는 촛불이 “소박한 정원에 강 물처럼 흐르는 푸른 달빛”이 우리침실로 들어오는 것을 방해하는 데 따른 것이다. 촛불의 두 번째 의미는 그것이 상대적 구분의 잣대라든가 문명적인 것의 비유라는 사실이다. 빛은 밝 음을 그 기본 속성으로 하는 것이지만, 신석정의 시에서는 그러한 빛의 세계가 이곳과 저곳을 구분시 키는 상대적 분포의 잣대로 기능한다. 이는 거의 반노장적인 인위와 가까워 보인다. 밝음이란 오성의 영역에 닿아 있는 상대적 구분의 세계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무화시켜 하나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구분짓고 사물의 분별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한다. 우주가 하나라든가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든 가 하는 형이상학적 초월의 세계는 밝음이라는 냉철한 이성에 의해 산산이 부서진다. 즉 그것은 사리 판단의 마지막 단계인 이성의 전능과 동일한 국면에 놓이는 것이다. 신석정의 시에서 촛불이 상대적 구분과 인위적 감각의 잣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경우, 또 하나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이 어둠의 이미지이다. 어둠은 시대적 암울이나 개인적 우울과 같은 부정적인 이미저리로 쓰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신석정의 시에서는 그런 관습화된 의미와는 전연 반대의 경우로 나타난다. 잔인한 촛불에게 추방을 당하면서도 나의 침실을 잊지 않은 충실한 어둠이여 오늘밤 나는 너를 위하여 촛불을 끄고 내 작은 침실의 전면적(全面積)을 제공하노니 「새벽을 기다리는 마음」 부분 해저와 같이 깊은 밤-- 침실은 더욱 조용허이-- 어두운 영창에는 별빛어리고 아라사 원시림을 거쳐 온 밤바람 침실에는 삼림의 그윽한 내음새가 돈다 성당처럼 조용한 침실에 앉아 깨어진 살림의 내일을 또 생각하노니 밤이여-- 그것은 단조한 비극이 아니다 「밤이여 그것은 단조한 비극이 아니다」 전문 「새벽을 기다리는 마음」에서 밤은 촛불과 상대적 관계에 놓인다. 여기서도 촛불은 상대적 구분이나 인위적 질서를 표상한다. 반면 밤은 그런 인위적 질서를 거부하고 나의 침실과 상호보족하는 관계론 적 질서를 매개해주는 수단으로 표상된다. 밤의 그러한 비유는 「밤이여 그것은 단조한 비극이 아니다」에 오면, 좀더 구체화된 의미역을 보인다. 이 작품에서 밤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먼저 자연과 동일 한 것으로의 밤의 의미이다. 그것은 아라사 원시림과 함께 하는 존재이고 인간의 침실에 삼림의 그윽 한 냄새를 가져오게 하는 매개이다. 이렇듯 신석정의 시에서 밤은 인간과 자연의 구분과 같은 상대적 관계가 아니라 절대적 관계로 변환 시켜주는 이미지로 나타난다. 신석정의 시에서 촛불은 인위라든가 상대적 구분의 세계를 표상하며, 이곳과 저곳을 나누고, 인간적인 영역과 자연의 영역을 구별시킨다. 따라서 촛불은 자연과 동화하고 관계론적 질서를 회복시키는 것과는 무관한 인위적인 것의 비유가 된다. 반면 밤은 절대적 관점에 서 게 해 주는 매개이다. 그것은 구분이 아니라 만물을 상호 연관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밤은 근원을 회 복시켜 자연이 갖는 시원적 의미를 되살리는 기제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3. 절대적 관점의 상실과 현실로의 침윤 1939년『촛불』을 상재한 이후, 신석정은 1947년 두 번째 시집『슬픈 목가』를 펴낸다. 시집은 해방이 후에 나왔지만, 여기에 담겨진 시들은 대부분 해방이전에 씌어진 것들이다. 일제강점기의 칼날을 피 해 간행된 것이기에 시대적 국면에 맞춰 약간의 수정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긴 하지만, 여기에 실린 대부분의 작품들은『촛불』의 연장선에 놓이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런 유사성에도 불구하고『슬픈 목가』 의 시들은『촛불』의 경우보다 상이한 시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가장 큰 변화는 현실 인식이 보다 심화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이러한 시의식의 변화를 시대상황과 관련시켜 설명하기도 하고, 시인 자신이 막연히 가졌던 농촌생활 에 대한 꿈과 실제 현실과의 괴리에서 찾기도 한다. 신석정은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도시 생활을 포 기하기로 작정하고 입산과 귀농의 갈림길에서 방황한다. 그러다가 입산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기로 마음먹었다. 고향으로 돌아가 청구원을 만들고, 농사를 짓고 서구식 전원생활을 꿈꾸 었다. 그러나 그의 귀농은 성공하지 못했고,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그는 대단히 괴로워했다.18) 이런 좌절과 실패가 그의 시의식의 변화로 연결되었음은 자명한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전기적 사실만으로 신석정의 시정신을 모두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보다 근본적 으로는 그의 세계관의 변화나 자신이 모색했던 사유의 깊이에서 찾아야『촛불』과『슬픈 목가』사이에 내재된 자연의 간극을 명쾌하게 설명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신석정이 추구했던 것은 모더니즘이었고 그 가운데에서도 이미지즘 계통의 시세계를 선호했다. 특히 그는 흄의 비연속적 세계관보다는 엘리어트의 통합적 세계관을 자신의 시적 인식으로 받아들였다. 그 것이『촛불』에서 보여주었던 노장적 자연 인식이었다. 분열보다는 통합에, 불연속보다는 연속적 세계 관에 주목하여 범우주적 질서와 전일적 자연의 생명의식을 받아 들였던 것이다. 상대론적 구분보다는 절대적 입장에 서서 우주와 사물이 하나라는 관계론적 세계에 보다 큰 매력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 런 세계관적 흐름들은『슬픈 목가』에 이르러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자연을 하나의 동일한 실체 로 받아들이는 노장적 자연인식이 󰡔슬픈 목가󰡕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을 층 위적 질서가 아니라 수평적 질서로 받아들이는 인식의 틀은 이 시집에서도 얼마든지 발견된다. 난(蘭)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바다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난이와 내가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놓아 가는 붉은 산호와 흰 대리석 층층계를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 빛 섬을 어루만질 때 떨리는 심장같이 자지러지게 흩어지는 느티나무 잎새가 난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난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에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말 없는 작은 짐승이었다 「작은 짐승」 부분 신석정은 이 작품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노자의 무위자연설에 미루어볼 때, 인간 역시 한 마리의 짐 승으로 보아 무방하다고 보는 도교적 사상”과 관련되어 있음을 말한 적이 있다.19) 18)『전집5』, p.398. 19)『전집5』, p.380. 신석정의 이런 언급과는 무관하게 이 작품을 노장적 자연인식과 분리시켜 논의하는 것은 어렵다. 이 작품은 자연을 상대적 구분에서가 아니라 관계론의 입장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노장적 자연 인식은 두 가지 시적 의장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데, 우선 의인법과 비유법이 그 하나이다. 이 작품 에서 시적 주체는 난을 의인화 시켜 난과 나는 수평적 존재가 되고, 궁극적으로는 작은 짐승으로 비 유된다. 자연 속에 편입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속성을 잃어버리거나 아니면 그에 걸맞게 작아져야 한다. 자연의 영역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그 범주 안에서 수평화될 때, 범우주적인 자연의 일부가 되 기 때문이다. 󰡔슬픈 목가󰡕에서 보이는 신석정의 이런 노장적 자연인식은 󰡔촛불󰡕의 그것과 비교할 때,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그럼에도 󰡔슬픈 목가󰡕의 시세계는 초기시집과는 많은 차질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먼 저, 󰡔촛불󰡕에서 볼 수 없었던 우울과 같은 센티멘탈한 요소가 짙게 풍겨나온다. 이는 신석정이 초기 에 지향했던 이미지즘적 시의 특색과도 상반되는 것이며, 또 이들 시세계가 지향했던 노장적 자연인 식의 세계와도 거리가 먼 것이다. 신석정의 시들은 󰡔슬픈 목가󰡕에 이르게 되면, 자신이 끝없이 갈구 했던 ‘먼 나라’로 항해하려 들지 않는다. 그의 시들은 그 낙원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리고 지금 여기의 현실 속에서 헤매이게 된다. 낙원의식을 상실하고 방황의 십자로에 서 있는 그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상대적 구분의 세계였다. 󰡔슬픈 목가󰡕에 서 그러한 시 정신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지도」이다. 지도에서는 푸른 것을 바다라 하였고 얼룩덜룩한 것을 육지라 부르는 습관을 길러 왔단다 이제까지 국경이 있어본 일이 없다는 저 하늘을 닮아서 바다는 한결로 푸르고 육지가 석류껍질처럼 울긋불긋한 것은 오로지 색채를 즐긴다는 단조한 이유가 아니란다 오늘 펴보는 이 지도에는 조선과 인도가 왜 이리 많으냐? 시방 나는 똥그란 지구가 유성처럼 화려히 떨어져 갈 날을 생각하는 ‘외로움’이 있다 도시 지구는 푸른 석류였거니--- 「지도」 전문 이 작품을 심훈의 「그날이 오면」에 견줄 수도 있고, 이육사의 「광야」와 비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만큼 정치적인 색채가 다분히 풍겨나는 시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의도 여부를 떠나서 이 시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촛불󰡕의 시세계와 구분되는 몇몇 특징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절대적 입장의 상 실이다. 울긋불긋한 석류껍질과 푸른 바다의 차질, 그 속에서 확산되는 비동일성의 세계가 그러하다. 󰡔슬픈 목가󰡕의 시들은 󰡔촛불󰡕의 ‘먼나라’에서 ‘지금 여기’로 되돌아왔고, 서정적 자아는 현실의 미묘한 흐름 속에 놓이게 된다. 이제 󰡔촛불󰡕에서 갈망한 절대적 입장이나 관계론적 사유태도는 사라 지고 배타적 분별의 세계만이 넘실대고 있다. 현실의 어두운 그림자만이 󰡔슬픈 목가󰡕의 곳곳에 드리 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슬픈 목가󰡕에서 보이는 이런 차질은 현실생활의 실패와 일제라는 거대담론의 압박에 의한 결과일 수 도 있다. 그러나 시인과 그를 둘러싼 환경의 결과로만 해석하면 문학의 자율성은 심하게 훼손받을 수 있고, 세계관의 정신사적 준거점을 잃어버릴 가능성도 있다. 중요한 것은 외부 결정론이 아니라 내적 필연성의 관점을 어떻게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시각을 받아들이게 되면, 신석 정이 노장적 자연인식을 어떻게 수용했고, 이를 육화했느냐 하는 본질적인 물음에 이르게 된다. 󰡔촛불󰡕에서 이해할 수 있었던 것처럼, 신석정이 자연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우주론적 일체화였다. 특 히 상호간의 구분이 없는 절대적 입장의 방식을 취하면서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관계론 적 사유를 펼쳐보였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신석정의 사유태도는 다소 거리화된 것처럼 보인다. 기질 적으로는 노장적 자연인식에 가깝긴 했지만 이를 생리적 차원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아닐까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한 사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작품 「난초」이다. 난초는 얌전하게 뽑아 올린 듯 갸륵한 잎새가 어여쁘다 난초는 건드러지게 처진 청수한 잎새가 더 어여쁘다 난초는 바위틈에서 자랐는지 그윽한 돌냄새가 난다 난초는 산에서 살던 놈이라 아모래도 산 냄새가 난다 난초는 아운림보다도 고결한 성품을 지니었다 난초는 도연명보다도 청담한 풍모를 갖추었다 그러기에 사철 난초를 보고 살고 싶다 그러기에 사철 난초와 같이 살고 싶다 「난초」 전문 난을 소재로 시를 쓴 사람의 대표적인 경우로 가람 이병기를 들 수 있다. 가람은 󰡔문장󰡕의 상고정신 (尙古情神)을 이끌었던 인물이고 난을 예도(藝道)와 오도(悟道)의 국면, 곧 생리적 차원으로 받아들 였다.20) 난의 향기에 취해서 근대를 초월하고자 한 것이 가람의 궁극적이 의도였던 것이다.21) 20) 김윤식, 「신석정론」, 󰡔(속)한국근대작가논고󰡕, 일지사, 1990. 21) 송기한, 「난초 향기의 마취력과 근대적 대응」, 󰡔한국 현대시와 근대성비판󰡕, 제이앤씨, 2009 참조. 가람에게 난이 생리적인 것이었다면, 신석정의 그것은 관조적인 것이었다는 데서 차이가 있다. 신석 정은 가람의 경우처럼 난을 예도라든가 오도의 차원에서 받아들이지 않고 멀리서 응시했다. 난초의 냄새를 자연의 냄새로 호흡했을 뿐 자신의 정신 속으로 빨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난초는 “아 운림보다도 고결한 성품을 지닌 존재”, “도연명보다도 청담한 풍모를 갖춘 존재” 정도로만 미화했 을 뿐 자신 속에 육화시키지 못했다. 이렇게 거리화된 것이기에 서정적 자아는 “사철 난초를 보고 살고 싶”다거나 “사철 난초와 같이 살고 싶”다는 정도의 소망 차원에 머무르고 있을 뿐이다. 난초와 더불어 상호연계되는 관계론적 입장에 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고 있는 것이다. 이는 난초를 생리적 차원으로 받아들인 가람의 경우와는 매우 다르다. 오도(悟道)가 되지 못한 난초의 거리화가 신석정의 노장적 자연인식의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만물의 근원이자 모태인 자연은 신석정에 게 이렇듯 육화되지 못하고 생리화되지 못한 채 거리화되어 있었다. 이런 간극이 󰡔촛불󰡕에서 보여주 었던 목가적 빛을 잃게 하고 현실부정과 비관의 그림자를 낳게 한 것으로 보인다. 신석정은 자연과 동화하고자 했지만, 완벽한 인식의 통일성을 이루어내지 못했다. 그런 심적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 회한과 그리움의 정서다. 이감각은 상대적 구분의 세계에서 촉발되는 감정이다. 이는 중심과 주변이 하나로 통일된 관계론적 질서의 사유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자연과의 동일화를 꿈꾼 󰡔촛불󰡕의 세계에서는 이 정서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우주의 중심, 자연이라는 거대 질서 속에 기꺼이 가려는 서정적 자아의 역동성만이 넘실거렸을 뿐이 다. 생리적 차원으로 승화되지 않은 상태의 자연이란 거리화된 것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에 서정적 자아는 그곳에 가지 못하는 회한에 젖거나 혹은 그곳에 도달하고자 하는 꿈을 피력할 뿐이다. 꽃 한송이 피어낼 지구도 없고 새 한 마리 울어 줄 지구도 없고 노루새끼 한 마리 뛰어다닐 지구도 없다 나와 밤과 무수한 별뿐이로다 밀리고 흐르는 게 밤 뿐이오 흘러도 흘러도 검은 밤 뿐이로다 내 마음 둘 곳은 어느 밤하늘 별이드뇨 「슬픈 구도」 부분 강물 아래로 강물 아래로 못 견디게 어두운 이 강물 아래로 빛나는 태양이 다다를 무렵 이 강물 어느 지류에 조각처럼 서서 나는 다시 푸른 하늘을 우러러 보리--- 인용 시들은 󰡔슬픈 목가󰡕에서 실린 작품들이다. 우선 이 작품들의 특색은 서정적 자아인 ‘나’가 표 나게 강조되어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는 ‘나’가 외부적 환경과 철저히 고립되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서정적 자아의 이런 모양새는 자연의 일부분이라는 관계론적 입장에서 벗어나 상대적 구분의 세계에 서 있다는 뜻이 된다. 중심에서 떨어져 나온 곳, 즉 내가 서 있는 곳은 어둠과 암흑으로 뒤덮여 있다. 그런데 어둠이 짙어지면 짙어질수록 이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 또한 강렬히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곳으로부터의 초월의지가 그리움의 정서이다. 인용시에서 그러한 정서들은 “밤하늘 가운데의 별”과 “어두운 강물 위에 비치는 푸른 하늘”로 표현된다. 󰡔슬픈 목가󰡕에서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밤’의 이미지이다. ‘밤’은 시대적 상황과 결부되 어 어두운 현실을 상징한다. 그러나 󰡔촛불󰡕에서의 밤은 노장적 자연인식을 확인시켜주는 매개였다. 이 시집에서 밤은 사물들과의 관계를 결속시켜주는 매개 역할을 했는데, 그것은 원시림과 함께 하는 존재이기도 했고 인간의 침실에 삼림의 그윽한 냄새를 가져오게 하는 매개이기도 했다. 인간과 자연 의 구분과 같은 상대적 관계가 아니라 절대적 관계로 변환시켜준 것이 밤의 이미지였다. 그리고 이 밤과 대척점에 선 것이 촛불이었다. 그의 시에서 촛불은 인위라든가 상대적 구분의 세계를 표상했다. 그것은 이곳과 저곳을 나누고, 인간적인 영역과 자연의 영역을 구별시키는 매개였다. 그러 한 까닭에 촛불은 자연과 동화하고 관계론적 질서를 회복시키는 것과는 무관한 인위적인 것의 비유였 다. 밤은 촛불과 상대적인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런데 󰡔슬픈 목가󰡕에 오면 밤은 그 고유의 의 미역을 회복하기에 이른다. 새해가 흘러와도 새해가 밀려가도 마음은 밤이란다 언제나 밤이란다 때가 이루는 이 작은 분수령을 넘어도 밤이어니 흘러도 밤이어니 막막한 이 밤이 막막한 이 한밤이 천 년을 간다 해도 만 년을 간다 해도 밤에서 살으련다 새벽이 올 때까지 심장처럼 지니고 검은 밤을 지니고--- 「밤을 지니고」 전문 인용시에서 보듯 밤은 절대적 입장이나 관계론의 맥락으로 이끌어주는 매개가 아니다. 통상적인 밤의 이미지로 되돌아오는바, 그것은 만물을 상호 연관시켜주는 아우라가 아니라 상대적 구분의 세계를 일 러주는 매개이고 시대적 상황의 인유가 된다. 이렇듯 󰡔슬픈 목가󰡕에서 밤은 근원을 회복시켜 자연이 갖는 시원적 의미를 되살리는 기제로서의 노장적 의미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4. 신석정 시에서의 ‘자연’의 시사적 의미 시문학파의 일원이었던 신석정은 한국 시사에서 드물게 자연을 탐색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의미화하는 작업을 보여준 시인이다. 석정의 시에서 드러나는 이런 특성에 주목한 연구자들 역시 그의 작품 세계 를 전원시라든가 목가시의 범주로 묶어내어 전원시의 가능성을 열어 보인 시인으로 평가했다. 자연이 주된 소재가 되고, 그것의 현대적 의미를 천착해 들어간 신석정의 열정을 고려하면, 이런 해석들은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신석정의 시들을 이런 틀에만 묶어 해석하는 것은 그의 탐색해 들어간 자연의 폭깊은 의미들 을 단선화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무엇보다 그의 시들을 근대성의 맥락으로부터 제외시키는 한계를 빚어내는 것이다. 신석정의 작품을 두고 현대인의 피안을 읊은 시라고 평가한 김기림의 언급이 없었 다고 해도 그의 시들을 근대성의 사유구조와 분리시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신석정은 일상의 사물을 참신하게 읽어내는 이미지즘 계통의 시를 썼고, 엘리어트의 고전정신을 받아들였다. 신석정의 시에서 자연은 노장적 의미를 갖는다. 그 스스로가 언급했던 것처럼, 신석정은 󰡔촛불󰡕을 간 행할 무렵 노장사상에 심취해 있었다. 그런 사유의 깊이가 자신의 작품에 영향을 끼쳤음은 당연한 일 이거니와 그것이 현대 문명을 초월하는 자연의 궁극적 함의와 접맥하게 된 것이다. 신석정에게 자연 은 현대 물질문명의 열악성을 대신할 꿈이었고 유토피아였다. 자연은 나와 너를 구분시키는 상대적 분포의 세계가 아니라 상호간을 연결시키는 절대적 입장을 대변하는 매개체이다. 범우주론적인 동일 체 속에 서정적 자아를 기투시키는 인식적 완결성에 대한 꿈이 자연의 궁극적 의미였던 것이다. 그러나 자연을 자기화하려는 신석정의 꿈은 󰡔슬픈 목가󰡕에 이르면 󰡔촛불󰡕에서 보여주었던 목가적 이 상과 빛을 잃어버리고 만다. 두 시집 사이에 서 보이는 이러한 간극은 매우 큰 것이어서 그 원인을 여러 방면에서 찾아진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요인은 자연을 받아들이고 이를 체화하는 서정적 자아 의 인식 문제가 아닐까 한다. 시 「난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신석정은 자연과 서정적 자아의 완 벽한 동일성을 확보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가람처럼, 난초로 표상되는 자연의 세계를 예 도라든가 오도와 같은 생리적 차원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연을 도의 경지까지 끌어올리지 못한 인식의 불구적 사유구조가 자연을 피상적으로 받아들이게 한 것이다. 이런 사유의 한계는 󰡔슬픈 목가󰡕에 이르면 보다 분명한 한계를 갖고 나타나게 된다. 여기에 이르면 신석정은 현실에 대해 매우 비관하는 자의식을 보이게 된다. 󰡔촛불󰡕의 목가적 이상과 자신을 추동해 온 유토피아적인 빛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리하여 노장적 자연인식은 사라지게 되고, 어두운 현실을 표상하는 ‘밤’의 이미지가 등장하는가 하면, ‘별’과 ‘하늘’과 같은 낭만적 꿈의 세계를 그리워하게 된다. 이는 우주적 동일체라는 절대적 입장의 상실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신석정의 작품세계는 모더니즘의 통합적 사유를 받아들이고 이를 자연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의의가 큰 것이었다. 또한 그러한 자연의 세계를 노장적 사유체계와 결부시켜 절대적 관점으로 이해하고 이 를 한국 근대시사에 처음으로 작품화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는 것이었다. 다만, 그러한 이해의 수 준이 생리적인 것이 되지 못하고 장식적 수준에 그친 것이 아쉬운 일이다. 그 결과 󰡔슬픈 목가󰡕의 세 계에 이르러 󰡔촛불󰡕에서 가열차게 탐색되던 근대 초월의 통합적 사유구조가 해체된 것은 시사적 한계 라 할 수있다. 【참고문헌】 김경복, 「신석정 시의 유토피아의식 연구」, 오세영외 편, 󰡔한국현대시인론1󰡕, 새미, 2003. 김기림, 「1933년 시단의 회고」, 󰡔시론󰡕, 백양당, 1947. 김용직, 󰡔한국현대시사󰡕, 한국문연, 1996. 김윤식, 「신석정론」, 󰡔(속)한국근대작가논고󰡕, 일지사, 1990. 박이문, 󰡔노장사상󰡕, 문학과지성사, 1992, 박호영, 「신석정의 문학사상」, 󰡔한국시문학의 비평적 탐구󰡕, 삼지원, 1985. 송기한, 「난초 향기의 마취력과 근대적 대응」, 󰡔한국 현대시와 근대성비판󰡕, 제이앤씨, 2009. 신석정, 「문학적자전」, 󰡔신석정전집5󰡕, 국학자료원, 2009, p.400. 윤여탁, 󰡔신석정󰡕, 건국대출판부, 2000. 이건청, 「한국전원시연구」, 단국대 대학원, 1985. 이승훈 편저, 󰡔문학상징사전󰡕, 고려원,1996, 전동진, 󰡔창조적 존재와 초연한 인간󰡕, 서광사, 2003 황동규 편, 󰡔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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