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아름다운 문학 206

<오상순> 허무혼(虛無魂)의 선언(宣言)

허무혼(虛無魂)의 선언(宣言) - 오상순 / 공초오상순시선(空超吳相淳詩選), 자유문화사, 1963 - 물아 쉬임 없이 끝없이 흘러가는 물아 너는 무슨 뜻이 있어 그와 같이 흐르는가 이상스레 나의 애를 태운다 끝 모르는 지경(地境)으로 나의 혼(魂)을 꾀어 간다 나의 사상(思想)의 무애(無碍)와 감정(感情)의 자유(自由)는 실로 네가 낳아준 선물이다 오―그러나 너는 갑갑다 너무도 갑갑해서 못 견디겠다. 구름아 하늘에 헤매이는 구름아 허공(虛空)에 떠서 흘러가는 구름아 형형(形形)으로 색색(色色)으로 나타났다가는 슬어지고 슬어졌다가는 나타나고 슬어지는 것이 너의 미(美)요―생명(生命)이요 멸(滅)하는 순간(瞬間)이 너의 향락(享樂)이다 오―나도 너와 같이 죽고 싶다 나는 애타는 가슴을 안고 얼마나 울었던고 ..

<오상순> 방랑의 마음 / 힘의 동경 / 새 하늘이 열리는 소리 / 첫날 밤

방랑의 마음 - 오상순 / (1923) -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오 ---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나의 혼(魂). 바다 없는 곳에서 바다를 연모(戀慕)하는 나머지에 눈을 감고 마음 속에 바다를 그려 보다 가만히 앉아서 때를 잃고. 옛 성 위에 발돋움하고 들 너머 산 너머 보이는 듯 마는 듯 어릿거리는 바다를 바라보다 해 지는 줄도 모르고 ……. 바다를 마음에 불러일으켜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면 깊은 바닷소리 나의 피의 조류(潮流)를 통하여 오도다. 망망(茫茫)한 푸른 해원(海原) ……. 마음 눈에 펴서 열리는 때에 안개 같은 바다와 향기 코에 서리도다. * 작품해설 : 이 시는 두 편으로 된 연작시로서, 1923년 18호에 실린 작품이다. 하루 200개피 의 줄담배를 피우며 일생을 독신으로 외롭게 살다 ..

<이장희> 봄은 고양이로다

봄은 고양이로다 - 이장희 / (1924) -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香氣)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生氣)가 뛰놀아라. * 작품 해설 : 이 작품은 봄과 고양이의 유사점이 시인의 감각에 의해 한군데 묶여진 작품이다. 고양 이의 털, 눈, 입술, 수염에 각각 봄의 향기, 불길, 졸음, 생기가 연결되어 있다. 완전히 별개의 것으 로 여겨지던 봄과 고양이가 결합되어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미처 발견하 지 못했던 신선한 감각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심오한 의미보다는 그러한 신선한 감각에 주..

<박인환> 목마와 숙녀 / 살아있는 것이 있다면 / 검은 강

목마와 숙녀 - 박인환 / (1955) - [1]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2]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 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나의 침실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 (1926) -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

<김동환(친일)> 눈이 내리느니 / 북청 물장수 / 산 너머 남촌에는

눈이 내리느니 - 김동환 - 북국에는 날마다 밤마다 눈이 내리느니 회색 하늘 속으로 흰 눈이 퍼부을 때마다 눈 속에 파묻히는 하아얀 조선이 보이느니 가끔 가다가 당나귀 울리는 눈보라가 막북강(漠北江) 건너로 굵은 모래를 쥐어다가 추위에 얼어 떠는 백의인(白衣人)의 귓불을 때리느니 춥길래 멀리서 오신 손님을 부득이 만류도 못 하느니 봄이라고 개나리꽃 보러 온 손님을 눈 발귀에 실어 곱게 남국에 돌려 보내느니 백웅(白熊)이 울고 북랑성(北狼星)이 눈 깜박일 때마다 제비 가는 곳 그리워하는 우리네는 서로 부둥켜안고 적성(赤星)을 손가락질하며 얼음벌에서 춤추느니 모닥불에 비치는 이방인의 새파란 눈알을 보면서 북국은 추워라, 이 추운 밤에도 강녘에는 밀수입 마차의 지나는 소리 들리느니 얼음짱 트는 소리에 쇠방울 ..

<김동환(친일)> 국경의 밤 1부, 2부, 3부(전문)

국경의 밤 - 김동환 / (1925) - 第一部 1 "아하, 無事(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밤에 男便(남편)은 豆滿江(두만강)을 탈없이 건넜을까? 저리 國境江岸(국경강안)을 警備(경비)하는 外套(외투) 쓴 검문 巡査(순사)가 왔다--- 갔다--- 오르명 내리명 분주(奔走)히 하는데 發覺(발각)도 안 되고 無事(무사)히 건넜을까?" 소금실이 密輸出馬車(밀수출마차)를 띄워 놓고 밤 새 가며 속태이는 젊은 아낙네 물레 젓던 손도 脈(맥)이 풀려져 파! 하고 붓는 魚油(어유) 등잔만 바라본다. 北國(북국)의 겨울밤은 차차 깊어 가는데. 2 어디서 불시에 땅 밑으로 울려나오는 듯 '어-이' 하는 날카로운 소리 들린다. 저 서쪽으로 무엇이 오는 군호라고 村民(촌민)들이 넋을 잃고 우두두 떨 적에 妻女(처녀)만은 잡..

<주요한(친일)> 불놀이 / 샘물이 혼자서 / 빗소리

불놀이 - 주요한 / (1919) - 아아, 날이 저믄다. 서편(西便) 하늘에, 외로운 강물 우에, 스러져 가는 분홍빗놀 . 아아 해가 저믈면 해가 저믈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 사 월이라 파일날 큰길을 물밀어가는 사람 소리만 듯기만 하여도 흥셩시러운 거슬 웨 나만 혼 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업는고 ? 아 춤을 춘다, 춤을 춘다, 싯별건 불덩이가, 춤을 춘다. 잠잠한 성문(城門) 우에서 나려다 보니, 물 냄새 모랫 냄새, 밤을 깨물고 하늘을 깨무는 횃불이 그래도 무어시 부족하야 제 몸까지 물고 뜯을 때, 혼자서 어두운 가슴 품은 절믄 사람은 과거(過去)의 퍼런 꿈을 찬 강 물 우에 내여던지나, 무정한 물결이 그 기름자를 멈출리가 이스랴? ---- 아아 꺽어서 시..

<홍사용> 통발 / 나는 왕이로소이다

통 발 - 홍사용 / 1호, 1922년 1월 - 뒷동산의 왕대싸리 한 짐 베어서 달 든 봉당에 일서 잘하시는 어머님 옛이야기 속에서 뒷집 노마와 어울려 한 개의 통발을 만들었더니 자리에 누우면서 밤새도록 한 가지 꿈으로 돌모루[石隅] 냇가에서 통발을 털어 손잎 같은 붕어를 너 가지리 나 가지리 노마 몫 내 몫을 한창 시새워 나누다가 어머니 졸음에 단잠을 투정해 깨니 햇살은 화안하고 때는 벌써 늦었어 재재바른 노마는 벌써 오면서 통발 친 돌성(城)은 다­무너트리고 통발은 떼어서 장포밭에 던지고 밤새도록 든 고기를 다­털어 갔더라고 비죽비죽 우는 눈물을, 주먹으로 씻으며 나를 본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 홍사용 / (1923) -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님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

<정지용> 향수 / 고향 / 유리창 / 비 / 말

향수(鄕愁) - 정지용 / (1927) - 넓은 들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게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든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러치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