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자꽃잎보다도 얇은
- 나희덕 -
탱자꽃잎보다도 얇은
나는 어제보다 얇아졌다
바람이 와서 자꾸만 살을 저며 간다
누구를 밸 수도 없는 칼날이
하루 하루 자라고 있다
칼날을 베고 잠들던 날
탱자꽃 피어있던 고향집이 꿈에 보였다.
내가 칼날을 키우는 동안
탱자나무는 가시들을 무성하게 키웠다.
그러나 꽃도 함께 피워
탱자나무 울타리 아래가 환했다
꽃들을 지키려고 탱자는 가시를 가졌을까
지킬 것도 없이 얇아져가는 나는
내속의 칼날에 마음을 자꾸 베이는데
탱자꽃잎에도 제 가시에 찔린 흔적이 있다
침을 발라 탱자가시를 손에도 붙이고
코에도 붙이고 놀던 어린시절
바람이 와서 탱자가시를 가져가고 살을 가져가고
나는 어제보다 얇아졌다
나는 탱자꽃잎보다도 얇아졌다
누구를 밸지도 모르는 칼날이
하루하루 자라고 있다
마른 물고기처럼
- 나희덕 / 사라진 손바닥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08월-
어둠 속에서 너는 잠시만 함께 있자 했다
사랑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네 몸이 손에 닿는 순간
그것이 두려움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너는 다 마른 샘 바닥에 누운 물고기처럼
힘겹게 파닥거리고 있었다, 나는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몸을 비벼야 하는 것처럼
너를 적시기 위해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비늘이 어둠 속에서 잠시 빛났다
그러나 내 두려움을 네가 알았을 리 없다
밖이 조금씩 밝아오는 것이, 빛이 물처럼
흘러들어 어둠을 적셔버리는 것이 두려웠던 나는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시든 비늘 위에.
아주 오랜 뒤에 나는 낡은 밥상 위에 놓여진 마른 황어들을 보았다
황어를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지만 나는 너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 황어는 겨울밤 남대천 상류의 얼음 위에 앉아 잡은 것이라 한다.
그러나 지느러미는 꺾이고 그 빛나던 눈도 비늘도 다 시들어버렸다.
낡은 밥상 위에서 겨울 햇살을 받고 있는 마른 황어들은 말이 없다.
고여 있는, 그러나 흔들리는 우포에서
- 나 희 덕 -
후두둑, 빗방울이 늪을 지나면
풀들이 화들짝 깨어나 새끼를 치기 시작한다
녹처럼 번져가는 풀,
진흙뻘을 기어가는 푸른 등 같기도 하다
어미 몸을 먹고 자란 우렁이 새끼들도 기어간다
물과 함께 흔들리고 있는 풀들 사이로
빈 우렁이 껍데기들 떠다닌다
기어가는, 그러나 묶여있는
고여있는, 그러나 흔들리는
비가 아니었다면
늪은 수만년을 어떻게 견뎠을까
무엇으로 흔들림의 징표를 내보였을까
후두둑,
후두둑,
후둑후둑....
늪 위에 빗방울이 그려넣는 무늬들
오래 고여 있던 늪도
오늘은 몸이 들려 어디로 흘러갈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