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아름다운 문학

<김선우> 헤모글로빈, 알코올, 머리칼 / 낙화, 첫사랑

이름없는풀뿌리 2023. 8. 21. 18:39
헤모글로빈, 알코올, 머리칼 - 김선우 - 『머리가 깨진 날 기뻤어요 내상보다 외상이 덜 위험하거던요』 ​ 보도블록을 깨다 손목 베이자 불타는 머리칼. 그 격렬한 외상의 날들 자고 일어나면 새살이 돋아 있곤 했지요 추억의 쓴 물에 어금니를 담그거나 이적성 표현은 아닙니다 ​ 구십년대는 우울한 내상의 날들이어서 걸핏하면 넘어지고 발목을 삐는데 피 한방울 흐르지 않고 멍만 듭니다 세계 인구의 열배도 넘는 세포가 모여 이룬, 육체의 나날은 출혈 없이 평화롭습니다 ​ 그런데 어제 머리를 깼지요 만취해 돌아오다 길에 누워버렸습니다 두개골은 멀쩡하고 상처도 크지 않은데 폭포처럼, 피 흘리는 머리칼 친구의 웃옷을 벌겋게, 치마를 물들이고 길바닥에 누워 헤실헤실 웃더랍니다 "아아 상쾌해" 하면서 말예요 ​ 빨간 다알리아 꽃들이(기억나요?) 뭉텅뭉텅 꿈 밖으로 걸어나갑니다 편지를 썼다가 구겨버렸어요 - 내 몸은 나를 보호할 의지가 없나봐 방금 당신께 전보를 쳤습니다 - 안 보이는 상처가 나를 시들게 해 나는 갑자기 무서워져 다알리아 꽃모갱이를 꺾으며 울었습니다 낙화, 첫사랑 - 김선우 /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 문학과 지성사 / 2007년 07월 -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 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 그대를 부르지 않겠습니다 옷깃 부둥키며 수선스럽지 않겠습니다 그대에게 무슨 연유가 있겠거니 내 사랑의 몫으로 그대의 뒷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겠습니다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가지겠습니다 아주 조금만 먼저 바닥에 닿겠습니다 가장 낮게 엎드린 처마를 끌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