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아름다운 문학

<김억(친일)> 봄은간다 / 오다가다 / 비 / 사랑의때

이름없는풀뿌리 2023. 9. 7. 07:05
봄은 간다 - 김억 / <태서문예신보>(1918) - 밤이도다 봄이도다. 밤만도 애닯은데 봄만도 생각인데 날은 빠르다 봄은 간다 깊은 생각은 아득이는데 저 바람에 새가 슬피운다 검은 내 떠돈다 종소리 빗긴다 말도 없는 밤의 설움 소리 없는 봄의 가슴 꽃은 떨어진다 님은 탄식한다. 오다가다 - 김 억 - 오다 가다 길에서 만난 이라고 그저 보고 그대로 갈 줄 아는가. 뒷산은 청청(靑靑) 풀 잎사귀 푸르고 앞바단 중중(重重) 흰 거품 밀려 든다. 산새는 죄죄 제 흥(興)을 노래하고 바다에니 흰 돛 옛 길을 찾노란다. 자다 깨다 꿈에서 만난 이라고 그만 잊고 그대로 갈 줄 아는가. 십리포구(十里浦口) 산(山) 너먼 그대 사는 곳 송이송이 살구꽃 바람과 논다. 수로천리(水路千里) 먼먼 길 왜 온 줄 아나. 예전 놀던 그대를 못 잊어 왔네. - 김 억 - 포구 십 리에 보슬보슬 쉬지 않고 내리는 비는 긴 여름날의 한나절을 모래알만 울려 놓았소. 기다려선 안 오다가도 설운 날이면 보슬보슬 만나도 못코 떠나버린 그 사람의 눈물이던가. 설운 날이면 보슬보슬 어영도(漁泳島)라 갈매기떼도 지차귀가 축축히 젖어 너흘너흘 날아를 들고. 자취 없는 물길 삼백 리 배를 타면 어디를 가노 남포 사공 이 내 낭군님 어느 곳을 지금 헤매노. 사랑의 때 - 김 억 / <해파리의 노래> (조선도서주식회사 1923) - 첫째. 어제는 자취도 없이 흘러갔습니다, 내일도 그저 왔다가 그저 갈 것입니다, 그러고, 다른 날도 그 모양으로 가겠지요, 그러면, 내 사람아, 오늘만을 생각할까요. 즐거운 때를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고운 웃음도 잠깐 동안의 꽃이지요. 때는 한동안 기쁨의 꽃을 피웠다가는 두르는 동안에 그 꽃을 가지고 갑니다, 곱고도 서러운 때의 힘을 어찌합니까, 그러면, 내 사람아, 오늘만을 생각할까요. 즐거운 때를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고운 웃음도 잠깐 동안의 꽃이지요. 둘째. 물은 밤낮으로 흘러내리고 산은 각각(刻刻)으로 무너집니다, 세상의 곱다는 온갖 것들은 나날이 달라지며 스러집니다. 그러면, 내 사람아, 우리는 사랑과 함께 춤을 출까요. 아름다운 이 세상의 사랑에 몹쓸 때가 설움의 종자를 뿌립니다, 이 종자의 움을 따서 노래 부르면 도리어 사랑을 모르던 옛날이 그립습니다. 그러면, 내 사람아, 우리는 사랑도 그만두고 말까요. 김억(金億, 1886-미상) 본명 : 김희권(金熙權), 별칭 : 안서(岸曙), 안서생(岸曙生), AS 1886년 평안북도 정주 출생 1907년 오산중학 입학 1913년 게이오 의숙 영문과 입학 1914년 동경 유학생 기관지인 『학지광(學之光)』에 「미련」, 「이별」 발표 1916년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 김소월 지도 1920년 『폐허』, 『창조』 동인 1924년 동아일보사 학예부 기자 1950년 6.25 때 납북 시집 : 『해파리의 노래』(1923), 『봄의 노래』(1925), 『안서 시집』(1929), 『안서 시초』(1941), 『먼동이 틀 제』(1947), 『민요시집』(1948) * 김억(1895~미상) : 시인, 문학평론가, 친일반민족행위자. 1895년(고종32) 평북 정주 곽산 출생. 김희권(金熙權)이라는 이름을 썼으나, 훗날 김억(金億)으로 개명. 필명으로는 안서(岸曙) 및 안서생(岸曙生), A.S., 석천(石泉), 돌샘 등을 썼다. 오산학교(五山學校)에 들어가 1913년 졸업. 1913년 일본게이오[慶應]의숙 영문과에 입학했으나 중퇴. 재일본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의(在日本東京朝鮮留學生學友會)의 기관지 『학지광(學之光)』 제3호에 시 「이별(離別)」과 이후 논문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다. 1916년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 시인. 전통 민요조 율격에 기초를 둔 민요시를 창작하였고, 시인 김소월의 민요조 서정시 창작에 영향을 주었다. 초기에는 프랑스 상징주의시와 서구 시론을 번역 소개하며, 상징적 경향의 시를 썼으나, 후기에는 근대시와 민요를 접목시키고자 노력했다. 시집으로 『해파리의 노래』(조선도서주식회사, 1923)가 있고, 『봄의 노래』(1925) 『금모래』(1925) 『안서시집』(1929) 『안서시초』(1941) 『먼동 틀 제』(1947) 『안서민요시집』(1949)이 있으며, 한시 번역시집으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번역 시집인 『오뇌(懊惱)의 무도(舞蹈)』(1921) 외에 『망우초(忘憂草)』(1934) 『동심초(同心草)』(1943) 『꽃다발』(1944) 『지나명시선(支那名詩選)』2권(1944) 『야광주(夜光珠)』 『선역애국백인일수(鮮譯愛國百人一首)』 『금잔듸』(1947) 『옥잠화(玉簪花)』(1949)가 있다. 김억의 일제강점기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3: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236~269)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계동 자신의 집에서 납북되었다. * 김억(金億)의 친일 행위 2002년 민족문제연구소등 5개 단체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문학인 42인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명단 5,207명중 친일 시인(詩人)이 있는데 그들은 곧 미당을 비롯한 12인이 있기에 우리는 꼭 기억하여야만 할 것이다. 김동환(金東煥), 김상용(金尙鎔), 김안서(金岸曙), 김종한(金鍾漢), 김해강(金海剛), 노천명(盧天命), 모윤숙(毛允淑), 서정주(徐廷柱), 이찬(李燦), 임학수(林學洙), 주요한(朱耀翰), 최남선(崔南善)이며 김억은 평북 정주 출생으로 교편을 잡으면서 동아일보 경성방송국에서 근무하며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문인보국회 등에 동참하여 친일 활동을 하였다. 매일신보(1933, 1944년)를 통해 시로는 “군가적으로 씩씩하고 우렁차야 한다”, “대동아 결전, 미국,영국을 격멸하자”, “님 따라 나서자”에서는 가미카 제 특공대로 전사한 조선인 가네하라 군조를 뒤따르자“며 징병을 격려하는 시를 집필하였다. * 안서(岸曙) 김억, 친일부역도 ‘오뇌의 무도’였나 이 풍진 세상에 /친일문학 이야기 / by 낮달2018 2021. 1. 29. 조선 최초의 번역시집과 창작시집을 낸 소월의 스승 안서 김억 이 글은 2019년 5월에 출판된 단행본『부역자들-친일 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의 초고임. [관련 기사 : 30년 문학교사가 추적한 친일문인의 민낯] ▲ 김억(1896~ ? )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리나라 신문학의 첫 장을 연 사람들이 대부분 친일파라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최초의 신체시를 쓴 최남선, 첫 번째 신소설을 쓴 이인직, 최초의 현대시 「불놀이」의 주요한, 첫 현대 소설 「무정」의 이광수가 바로 그들이다. 안서(岸曙) 김억(金億, 1896~?)도 그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1921년 1월에 프랑스 상징파의 시를 중심으로 한 조선 최초의 현대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를 번역해 펴냈고, 같은 해 6월에는 조 선 최초의 현대 창작시집 『해파리의 노래』를 출판하였다. 소월의 스승, 엇갈린 사제의 길 평안북도 정주의 부유한 종가에서 태어나 오산학교를 졸업한 김 억은,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모교의 교사로 일하면서 김소월(金素月, 1902~1934)을 가르쳤다. 소월에게 김억은 자신을 문단으로 인도한 문학의 스승이었다. 소월이 세상을 떠난 뒤, 김억은 1939년에 『소월시초(素月詩抄)』를 엮어 발간하 기도 하였다. ▲ 최초의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1921)와 최초의 개인 시집 <해파리의 노래>(1923) 1977년 소월의 시작 노트가 발견되었는데, 여기 실린 시들 가운데 김억의 작품으로 이미 발표된 것들 이 있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논란 끝에 스승이 제자의 시를 자기 작품으로 둔갑시켜 발표한 것 으로 결론이 났다. 당사자인 김억은 이미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행적을 알 수 없었으니 불행 중 다행 이었던가. 안서 김억의 문학 활동은 단순히 최초의 번역시집이나 창작시집을 펴낸 데 그치지 않았다. 초창기 현 대 문학의 전개 과정에서 그의 이름 이 곳곳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는 1918년에 주간 문예지 『태서문예신보(泰西文藝新報)』를 창간하였고, 1919년부터 문예지 『창조』, 『폐허』, 『영대(靈 臺)』 등의 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인도 시인 타고르의 시집을 여러 차례 펴내기도 하였다. 소월과 사제의 연을 맺었지만 두 사람의 길은 어긋나기 시작하였다. 초기의 여성적이고 서정적이던 시풍에서 점차 현실 참여적으로 바뀌어 간 소월의 민족주의적 성향과 달리, 김억은 친일로 기울어져 간 것이다. 그는 1937년 조선총독부의 문예를 통한 황민화 정책 실천을 목표로 발족한 조선문예회에 참여하면서부터 친일의 길로 접어든다. 조선문예회가 후원한 ‘애국가요 대회’에 발표된 김억 작사 「종군간호부의 노래」, 최남선 작사 「김 소좌를 생각함」 등의 이른바 ‘애국가요’는 1940년대 ‘국민문학 운동’의 실마리가 되었다. 김억은 야전병원에서 활약하는 종군간호부를 기리는 「종군간호부의 노래」로 일제 침략전쟁을 찬양 하고 여성의 전쟁 참여를 부추겼다. 대포는 쾅 우레로 튀고 총알은 땅 빗발로 난다 흰옷 입은 이 몸은 붉은 십자의 자애에 피가 뛰는 간호부로다 - 「종군간호부의 노래」 이후 그는 조선문인보국회,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문인협회, 조선 임전보국단 등 일제의 문화 기구 에 발기인, 간사 등으로 참여하면서 친일 활동의 수위를 높여 갔다. 문인들의 친일 행위에는 필수적 으로 징병제 찬양이 빠지지 않는데, 이는 일제의 압력이 작용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시를 통해 일제 군부와 침략전쟁 찬양 안서 김억은 유독 일제 군부를 찬양하거나 그 역할을 강조하는 형식의 글을 많이 썼다. 1942년 3월 일본 육군기념일을 맞아 발표한 시가 대표적 사례다. 그는 일제 육군이 동아시아에서 ‘수호자적 역 할’을 하고 있다고 강조하며 ‘아름다운 낙원’을 지켜 달라고 축원하였다. 동으로 동으로 밀려들면서 입을 벌리고 하늘엔 검은 구름 땅엔 바람을 들이던 험상궂은 제국(帝國) 제국(諸國)을 단번에 꺾어 버려 이 세계의 눈과 귀는 놀라지 않았던가 이 동아의 수호시여. ……이 동아의 우리는 10억, 마음과 뜻을 하나로 한곳에 모아 고이고이 드리는 정성의 이 잔을 이 동아의 수호시여, 쾌히 드시고 길이길이 정의의 날카로운 칼로 이 세계의 사악(邪惡)들을 몰아대시고 아름다운 이 낙원을 지켜 주시라 - 「육군기념일에」, 《매일신보》(1942년 3월 10일자) 1942년 5월 전사하여 일제의 군신(軍神)으로 추앙된 일본 육군비행대 가토 다테오(加藤建夫) 중좌를 노래한 시에서 그는 일제 침략전쟁의 공적을 미화하였다. 가토 다테오의 부대는, 일본 육군항공사관 학교를 나와 태평양전쟁에서 전사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최명하(崔鳴夏, 1918~1942, 일본식 이름 은 다케야마 다카시 武山隆) 대위가 복무한 부대이기도 하다. ▲ <매일신보>(1941.12.05.)에 실린 김억의 친일 전쟁시 북지나(北支那)라 중지나(中支那) 또는 남방의 길도 없는 허공을 까맣게 날며 간 데마다 사악(邪惡)을 뚜다려내고 새로운 길 뚜렷이 지으신 군신 높을세라, 그 이름 가토(加藤) 부대장 호령호령 긴 칼을 높이 빼들고 사악을 인도양서 베고 베다가 귀한 정신 그대로 다시 나타나 영구히 이 동아를 지키는 군신 높을세라, 그 이름 가토 부대장 - 「군신(軍神) 가토(加藤) 비행부대장」, 『반도의 빛』(1942.9.) 그의 일제 군부 찬양은 해군 제독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의 전사를 노래한 시에서 정점을 찍 는다. 야마모토는 1941년 진주만 공격을 입안하고 수행한 인물로, 솔로몬 제도를 시찰하다 미 육군항 공대에 격추되어 전사하였다. 제독은 가셨으나 귀한 정신은 1억의 맘 골고루 밝혀 저 미영을 뚜드려 눕히일 것을 아아 원수 원수는 돌아가셨다. 원수의 높은 정신 본을 받아서 백배 천배 다시금 새 결심으로 새 동아의 빛나는 명일을 위해 일어나자 총후의 우리 1억들 저 미영이 무어냐 사악인 것을 - 「아아 야마모토(山本) 원수- 원수의 국장일을 당하여」, 《매일신보》(1943.6.6.) 1944년 레이테 해전에서 처음 가미카제(神風) 자살공격대가 등장한 뒤 11월에 조선인 가네하라(金原) 군조(軍曺, 상사에 해당하는 일본군 계급)가 전사하자, 그는 《매일신보》에 발표한 시를 통해 조선 의 젊은이들에게 침략전쟁에 나가 희생하라고 선동하였다. 미당 서정주의 「마쓰이 오장 송가」에 비 할 만한 사례다. 역천(逆天)은 부술 것이 순천(順天)은 받들 것이 대장부 세상 났다가 그저 옐 줄 있는다 이 목숨 귀할시고 모두들 아낀다면 일월(日月)의 충의(忠義) 도고는 보잘 것이 있는고 설사(設使: 설령)에 죽더라도 충혼은 그저 남아 사악을 눕히기 전이야 가실 줄이 있과저 신풍(神風)이 부는고야 육탄이 튀는고야 풍탄(風彈)이 튀는 곳에 거칠 것이 없나니 맘들은 한데 모아 역천은 부서지고 님 따라 손 높이 들고 나설 때는 왔나니 - 「님 따라 나서자-가네하라(金原) 군조 영전에」, 《매일신보》(1944.12.7.) 문학적 공로가 큰 만큼 안타까운 친일부역 해방 후, 김억은 한국전쟁 발발 때까지 육군사관학교와 항공사관학교(공군사관학교의 전신) 강사를 지냈다. 전쟁 때 납북되어 북한 국영출판사의 교정원으로 배치되었다. 1956년 납북 인사들로 구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으로 임명되었다가, 평안북도 철산의 협동농장으로 강제 이주되었 다. 그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는 시의 본질을 인간 감정의 표출로 인식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객관적 상관물을 주로 활 용하였으며, 심미적 차원의 형상화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또한 감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음 악적 요소를 중요시하였다고 평가된다. (방인석) 『친일인명사전』과 정부가 발표한 친일 반민족 행위자 명단에 올랐지만, 그의 시와 시론이 한국 현대 시에 끼친 영향과 서구의 시와 시론을 소개하고 민요시 운동의 중심에 서서 한국적 정서와 가락을 담은 민요시 창작에 주력한 공로는 부인할 수 없다. 소월을 가르쳐 그를 시단에 소개한 공적도 적지 않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의 이바지가 크면 클수록 식민 지배에 투항 하여 민족을 등진 친일부역 행위의 엄중함도 두드러진다. 그의 대표작 「봄은 간다」를 읽으며 청산하지 못한 역사를 안타깝게 되돌아보 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2019. 5. 낮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