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아름다운 문학

<김영랑> 모란이피기까지는/돌담에/끝없는강물/오월/내마음을/누이의/북/독

이름없는풀뿌리 2023. 9. 23. 06:13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 <문학>(1934) -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작품해설 : 이 시는 영랑이 남달리 좋아하던 모란을 소재로 하여 한시적(限時的)인 아름다움의 소 멸을 바라보는 시적 자아의 비애감을 표현한 작품으로, ‘모란’은 실재히는 자연의 꽃인 동시에 지 상에 존재하는 모든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대유적 기능의 꽃이다. 연 구분이 없는 이 시는 작품 속에 전개되는 시간의 추이로 보아 네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현재인 첫째 단락은 1~2행이며, 미래인 둘 째 단락은 3~4행, 과거인 셋째 단락은 5~10행, 현재의 넷째 단락은 11~12행으로 첫째 단락의 반복이다. 첫째 단락에서 시적 화자는 모란이 필 그의 봄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둘째 단락에 이르면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모란이 떨어져 다시 슬픔에 잠기게 될 것을 예견하고 있으며, 셋째 단락은 그가 설움 에 잠기게 될 맬의 상황을 증명해 줄 뿐 아니라, 그가 갖고 있는 삶의 구도를 명확하게 보여 준다. 오직 모란이 피어있는 순간에만 삶의 보람을 느끼는 시적 화자에게 있어서 모란은 봄과 등가적(等價 的)가치로 그의 소망을 표상한다. 그가 추구하는 소망의 세계가 무엇인지 확실치는 않으나 그것이 모란으로 대유된 어떤 절대적 가치의 미(美)라고 한다면 시적 화자는 모란이 피어 있을 때는 자신의 소망이 성취된 것으로 생각하여 보람 을 느끼다가, 모란이 지고 말았을 때는 ‘봄을 여윈’-보람을 상실한 허탈감에 빠져 마치 한 해가 다 지나버린 것으로 생각하는 감성적 유미주의자임을 알 수 있다. 화자의 한 해는 ‘모란이 피어 있는 날’과 ‘모란이 피기를 기다리는 날’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9.10행에서 볼 수 있듯이 모란이 피 어 있는 날을 제외한 그의 나날은 ‘하냥 섭섭해 우는’ 서러움의 연속이다. 그러므로 넷째 단락에 이르러 화자는 모란이 피는 날을 계속 기다리고 있겠다는 심경을 토로하면서 자신이 기다리는 봄이 다만 ‘슬픔의 봄’이 아닌, ‘찬란한 슬픔의 봄’임을 인식한다. ‘찬란한 슬픔의 봄’이 ‘찬란한 봄’이라는 의미보다 ‘슬픔의 봄’이 강조된 표현이라면, 표면적으로는 화자가 모란이 피기를 기다 리는 기대와 희망의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모란을 잃은 설움의 시간 속에 존 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란에 자신의 모든 희망을 걸고 살아가는 비실재적 세계관의 소유자인 화자가 한 해를 온통 설움 속에서 살아갈지라도 그의 봄은 결코 절망뿐인 ‘슬픔의 봄’이 아니다. 왜냐하면 계절의 순환 원리에 따라 봄은 또 올 것이고, 봄이 오면 모란은 또 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슬픔은 다 만 모순 형용의 ‘찬란한 슬픔’으로 언제까지 난 그를 기다리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줄 뿐이다. 모 란이 피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리며 설움에 잠겨 있는 화자의 태도는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와 ‘내 마음을 아실 이’에서 보여 준 바 있는 ‘내 마음’의 세계를 한층 더 내밀화 시키는 것으로, 영랑으 로 하여금 외부 사물과 역동적인 상호 작용을 취하지 못한 시 세계만을 펼쳐 보이게 하였으며, 결국 그의 시를 현실에서 멀어지게 한 주요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 김영랑 / 『시문학』 2호, 1930.6 -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詩)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 김영랑 / <시문학 창간호>(1930) -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쳐 오르는 아침 날빛이 빤질한 은결을 돋우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 은결 : 은물결 오월 - 김영랑 / <문장>(1937) - 들길은 마을에 들자 붉어지고 마을 골목은 들로 내려서자 푸르러졌다. 바람은 넘실 천(千) 이랑 만(萬) 이랑 이랑 이랑 햇빛이 갈라지고 보리도 허리통이 부끄럽게 드러났다. 꾀꼬리는 엽태 혼자 날아 볼 줄 모르나니 암컷이라 쫓길 뿐 수놈이라 쫓을 뿐 황금빛 난 길이 어지럴 뿐 얇은 단장하고 아양 가득 차 있는 산봉우리야 오늘밤 너 어디로 가 버리련? * 이랑 : 갈아 놓은 밭의 한 두둑과 한 고랑을 아울러 이르는 말 * 엽태 : 여태 지금까지 내 마음을 아실 이 - 김영랑 / <시문학>(1931) -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날 같이 아실 이 그래도 어데나 계실 것이면 내 마음에 때때로 어리우는 티끌과 속임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 밤 고이 맺는 이슬 같은 보람을 보밴 듯 감추었다 내어드리지. 아! 그립다. 내 혼자 마음 날 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맑은 옥돌에 불이 달어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 김영랑 / <시문학>(1930) - '오매 단풍 들 것네' 장광에 골불은 감닙 날러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 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 것네' * 오매 : 어머나(전라 방언) * 장광 : 장독대 * 자지어서 : 잦아서, 빠르고 빈번하여(전라 방언) 金弘道筆 風俗圖 畵帖, 보물(1970),《단원풍속도첩》무동, 《檀園風俗圖帖》舞童 세로 26.8cm, 가로 22.7cm 이 화첩은 김홍도의 풍속도를 엮은 화첩이다. 1918년 조한준(趙漢俊)에게 서 구입했고 모두 27점이었으나 1957년 원 화첩의 수미에 위치한 〈군선도〉2점은 별도의 족자로 만 들고 풍속도 25점만 새롭게 화첩으로 꾸미고 《단원풍속도첩》이란 명칭을 붙였다. 이 화첩에 속한 그림 중 4점이 1934년 간행된 『조선고적도보』에 게재되었다. 이 화첩은 1)서당, 2) 논갈이, 3) 활 쏘기 4) 씨름, 5) 행상, 6) 무동, 7) 기와이기, 8) 대장간, 9) 노상과안, 10) 점괘, 11) 나룻배, 12) 주막, 13) 고누놀이, 14) 빨래터, 15) 우물가, 16) 담배썰기, 17) 자리짜기, 18) 벼타작, 19) 그림감 상, 20) 길쌈, 21) 편자박기, 22) 고기잡이, 23) 산행, 24) 점심, 25) 장터길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작품명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각 계층의 생업장면과 놀이 등 생활의 이모저모가 잘 나타나 있 다. 예외도 없지 않으나 대체로 배경을 생략하고 등장인물들이 취하는 자세와 동작만으로 적절한 화 면구성을 이루고 있다. 평범한 일상사이나 화가의 따뜻한 시선과 예리한 시각에 의한 순간의 포착은 이를 볼거리로 부각시켜 그림이 그려진 사회분위기를 잘 전한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김영랑 / <영랑시선>(1949) - 자네 소리하게 내 북을 잡지 진양조 중머리 중중머리 엇머리 자진머리 휘몰아 보아 이렇게 숨결이 꼭 맞어사만 이룬 일이란 인생에 흔치 않아 어려운 일 시원한 일 소리를 떠나서야 북은 오직 가죽일 뿐 헛 때리면 만갑(萬甲)이도 숨을 고쳐 쉴밖에 장단을 친다는 말이 모자라오 연창(演唱)을 살리는 반주쯤은 지나고 북은 오히려 컨덕터―요 떠받는 명고(名鼓)인데 잔가락을 온통 잊으오 떡 궁! 동중정(動中靜)이요 소란 속에 고요 있어 인생이 가을같이 익어가오 자네 소리하게 내 북을 치지. * 진양조~ 휘모리 : 산조 또는 판소리 장단의 명칭, 진양조, 중모리, 자진모리가 기본이며 진양조에 서 휘모리의 순서로 빨라진다. * 만갑 : 조선시대의 이름난 명창 송만갑을 뜻함 * 컨덕터 : 지휘자(CONDUCTER). 독(毒)을 차고 - 김영랑 / <문장>(1939) - 내 가슴에 독(毒)을 찬 지 오래다. 아직 아무도 해(害)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 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아도 머지 않아 너 나 마주 가 버리면 억만 세대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한디!' 독은 차서 무엇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 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디!',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魂) 건지기 위하여. * 모지라져 : 물건의 끝이 달아 없어져서 * 막음 날 : 죽는 날 * 처음 발표시는 ‘마간 날 내 깨끗한 마음 건지기 위하여’임 여기에서는 『영랑시선』 의 표기를 따름. 김영랑 (1949년 서울 경회루) * 김영랑(金永郞, 1903-1950) 본명 : 김윤식(金允植) 1903년 전라남도 강진 출생 1915년 강진보통학교 졸업 1917년 휘문의숙 입학 1919년 3.1운동 직후 6개월간 옥고 1920년 일본 아오야마(靑山) 학원 중학부 입학 1922년 아오야마학원 영문과 진학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귀국 1930년 문학 동인지 『시문학』 동인 1949년 공부처 출판국장 1950년 사망 시집 : 『영랑시집』(1935), 『영랑시선』(1949), 『영랑시선』(1956) 본관은 김해(金海). 본명은 김윤식(金允植). 영랑은 아호인데 『시문학(詩文學)』에 작품을 발표하면 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전라남도 강진 출신. 아버지 김종호(金鍾湖)와 어머니 김경무(金敬武) 의 5남매 중 장남이다.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혼인하였으나 1년반 만에 부인과 사별하였다. 그뒤 조선중앙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난 다음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 이 때부터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이때 휘문의숙에는 홍사용(洪思容)·안석주(安碩柱)·박종화(朴鍾和) 등 의 선배와 정지용(鄭芝溶)·이태준(李泰俊) 등의 후배, 그리고 동급반에 화백 이승만(李承萬)이 있어 서 문학적 안목을 키우는 데 직접·간접으로 도움을 받았다. 휘문의숙 3학년 때인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강진에서 거사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 개월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를 거쳐 같은 학원 영문학과에 진학하였다. 이무렵 독립투사 박렬(朴烈), 시인 박용철(朴龍喆)과도 친교 를 맺었다.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향리에 머물면서 1925년에는 개성출신 김귀련(金貴蓮)과 재혼하였다. 광복 후 은거생활에서 벗어나 사회에 적극 참여하여 강진에 서 우익운동을 주도하였고, 대한독립촉성회에 관여하여 강진대한청년회 단장을 지냈으며, 1948년 제 헌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여 낙선하기도 하였다. 1949년에는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평소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어 국악이나 서양명곡을 즐겨 들었고, 축구·테니스 등 운동에도 능하여 비교적 여유있는 삶을 영위하다가, 9·28수복 당시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시작활동은 박용철·정지용·이하윤(異河潤) 등과 시문학동인을 결성하여 1930년 3월에 창간된 『시 문학』에 시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언덕에 바로 누워」 등 6편과 「사행소곡칠수(四行小曲七 首)」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후 『문학』,『여성』,『문장』,『조광(朝光)』,『인문평론(人文評論)』,『백민(白民)』, 『조선일보』 등에 80여편의 시와 역시(譯詩) 및 수필·평문(評文) 등을 발표하였다. 그의 시세계는 전기와 후기로 크게 구분된다. 초기시는 1935년 박용철에 의하여 발간된 『영랑시집』 초판의 수록시편들이 해당되는데, 여기서는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이나 인생태도에 있어서의 역정(逆情)·회의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슬픔’이나 ‘눈물’의 용어가 수없이 반복되면서 그 비애의식은 영탄이나 감상에 기울지 않고, ‘마음’의 내부로 향해져 정감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요컨대, 그의 초기시는 같은 시문학동인인 정 지용 시의 감각적 기교와 더불어 그 시대 한국 순수시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1940년을 전후하여 민족항일기 말기에 발표된 「거문고」,「독(毒)을 차고」,「망각(忘却 )」,「묘비명(墓碑銘)」 등 일련의 후기시에서는 그 형태적인 변모와 함께 인생에 대한 깊은 회의와 ‘죽음’의 의식이 나타나 있다. 광복 이후에 발표된 「바다로 가자」,「천리를 올라온다」 등에서는 적극적인 사회참여의 의욕을 보 여주고 있는데, 민족항일기에서의 제한된 공간의식과 강박관념에서 나온 자학적 충동인 회의와 죽음 의식을 떨쳐버리고, 새나라 건설의 대열에 참여하려는 의욕으로 충만된 것이 광복 후의 시편들에 나 타난 주제의식이다. 주요저서로는 『영랑시집』 외에, 1949년 자선(自選)으로 중앙문화사에서 간행된 『영랑시선』이 있 고, 1981년 문학세계사에서 그의 시와 산문을 모은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있다. 묘지는 서울 망우 리에 있고, 시비는 광주광역시 광주공원에 박용철의 시비와 함께 있으며, 고향 강진에도 세워졌다. [참고문헌] 『모란이 피기까지는』(김학동 편, 문학세계사, 1981) 『전형기의 한국문예비평』(김용직, 열화당, 1979) 『한국현대시인연구』(김학동, 민음사, 1977) 『한국현대문학사탐방』(김용성, 국민서관, 1973) 「조밀한 서정의 탄주: 김영랑론」(정한모, 『문학춘추』, 1964.2.) 「시와 감상: 영랑과 그의 시」(정지용, 『여성』, 1938.9·10.) 모란이 피기까지는 / 시낭송 윤숙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