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아름다운 문학

<오장환> 고향 앞에서 / 병든 서울 / The Last Train

이름없는풀뿌리 2023. 9. 21. 07:46
고향 앞에서 - 오장환 / <인문평론>(1940) - 흙이 풀리는 내음새 강바람은 산짐승의 우는 소릴 불러 다 녹지 않은 얼음장 울멍울멍 떠내려간다. 진종일 나룻가에 서성거리다 행인의 손을 쥐면 따뜻하리라. 고향 가까운 주막에 들러 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 양귀비 끓여다 놓고 주인집 늙은이는 공연히 눈물지운다. 간간이 잔나비 우는 산기슭에는 아직도 무덤 속에 조상이 잠자고 설레는 바람이 가랑잎을 휩쓸어 간다. 예제로 떠도는 장꾼들이여! 상고(商賈)하며 오가는 길에 혹여나 보셨나이까. 전나무 우거진 마을 집집마다 누룩을 디디는 소리, 누룩이 뜨는 내음새……. * 상고 : 장수 * 작품해설 : 이 시는 <향토 망경시(鄕土望景詩)>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다가 <고향 앞에서>로 개제 (改題)한 작품이다. 고향이 있어도 그 품에 안길 수 없는 사람은 고향을 잃은 자나 다름없다. 이 상 실감은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비극적인 것이다. 고향에 대해 가지는 그리움의 정서는 모든 인 간에게 가장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정서로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고향은 모든 사람 들에게 삶의 안식처요, 인간 존재의 근원이며 포근한 어머니의 품이다. 따라서, 고향을 눈앞에 두고 서도 갈 수 없는 화자의 처지는 깊은 회한과 자책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화자는 고향 근처의 주막에 서 자신이 떠난 동안의 슬픈 고향 소식을 전해 들으며 집집마다 누룩을 띄워 술을 빚는, 전나무 우거 진 고향 마을은 이미 이 지상에서 사라지고 없음을 실감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조상의 무덤밖에 없 다. 고향은 고향이로되 그리던 고향은 아닌 것이다. 완전한 고향을 찾지 못하고 고향을 바라보며 떠 돌이 장꾼들에게 고향의 정취만이라도 확인하려는 화자의 모습이 눈물겹기만 하다. 독특한 감각적 표 현을 바탕으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를 잘 형상화한 시다. 고향을 버리고 살아왔기에 고향이 있어도 갈 수 없는 화자의 쓸쓸한 모습이 선연하게 떠오른다. 고향 을 버린 자가 느끼는 정신적 상실감이 당시의 시대적 현실과 결부되어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오장환 의 시에는 '귀향 회귀(歸鄕回歸)의 모티프를 가진 작품이 많은데 이 작품도 그 가운데 하나다. 1940 년대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버리고 만주와 중국 등지로 떠돌던 우리 민족의 시대적 아픔과 그로 인한 그리움의 정서를 독특한 감각적 표현과 현재법을 사용하여 형상화한 작품이다. 병든 서울 - 오장환 / 『상아탑』 창간호, 1945. 12 - 8월 15일 밤에 나는 병원에서 울었다. 너희들은 다 같은 기쁨에 내가 운 줄 알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일본 천황의 방송도 기쁨에 넘치는 소문도 내게는 곧이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저 병든 탕아(蕩兒)로 홀어머니 앞에서 죽는 것이 부끄럽고 원통하였다. 그러나 하루아침 자고 깨니 이것은 너무나 가슴을 터치는 사실이었다. 기쁘다는 말, 에이 소용도 없는 말이다. 그저 울면서 두 주먹을 부르쥐고 나는 병원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어째서 날마다 뛰쳐나간 것이냐. 큰 거리에는 네거리에는, 누가 있느냐 싱싱한 사람 굳건한 청년, 씩씩한 웃음이 있는 줄 알았다. 아, 저마다 손에 손에 깃발을 날리며 노래조차 없는 군중이 만세로 노래를 부르며 이것도 하루아침의 가벼운 흥분이라면...... 병든 서울아, 나는 보았다. 언제나 눈물 없이 지날 수 없는 너의 거리마다 오늘은 더욱 짐승보다 더러운 심사에 눈깔에 불을 켜들고 날뛰는 장사치와 나다니는 사람에게 호기 있는 먼지를 씌워 주는 무슨 본부, 무슨 본부 무슨 당, 무슨 당의 자동차 그렇다. 병든 서울아 지난날에 네가. 이 잡놈 저 잡놈 모두 다 술 취한 놈들과 밤늦도록 어깨동무를 하다시피 아 더정한 서울아 나도 밑천을 털고 보면 그런 놈 중의 하나이다. 나라 없는 원통함에 에이, 나라 없는 우리들 청춘의 반항은 이러한 것이었다. 반항이여! 반항이여! 이 얼마나 눈물나게 신명나는 일이냐 아름다운 서울, 사랑하는 그리고 정들은 나의 서울아 나는 조급히 병원 문에서 뛰어 나온다 포장친 음식점, 다 썩은 구루마에 차려 놓은 술장수 사뭇 돼지 구융같이 늘어선 끝끝내 더러운 거릴지라도 아, 나의 뼈와 살은 이곳에서 굵어졌다. 병든 서울아, 아름다운, 그리고 미칠 것 같은 나의 서울아 네 품에 아무리 춤추즌 바보와 술 취한 망종이 다시 끓어도 나는 또 보았다. 우리들 인민의 이름으로 씩씩한 새 나라를 세우려 힘쓰는 이들을...... 그리고 나는 외친다 우리 모든 인민의 이름으로 우리네 인민의 공통된 행복을 위하여 우리들은 얼마나 이것을 바라는 것이냐 아, 인민의 힘으로 되는 새 나라 8월 15일, 9월 15일 아니, 삼백 예순 날 나는 죽기가 싫다고 몸부림치면서 울겠다. 너희들은 모두 다 새가 시골구석에서 자식 땜에 아주 상해 버린 홀어머니만을 위하여 우는 줄 아느냐 아니다, 아니다. 나는 보고 싶으다. 큰물이 지나간 서울의 하늘아 그때는 맑게 개인 하늘에 젊은이의 그리는 씩씩한 꿈들이 흰 구름처럼 떠도는 것을...... 아름다운 서울, 사무치는, 그리고, 자랑스런 나의 서울아 나라 없이 자라난 서른 해 나는 고향까지 없었다. 그리고, 내가 길거리에서 자빠져 죽는 날 ‘그곳은 넓은 하늘과 푸른 솔밭이나 잔디 한 뼘도 없는’ 너의 가장 번화한 거리 종로의 뒷골목 썩은 냄새나는 선술집 문턱으로 알았다. 그러나 나는 이처럼 살았다. 그리고 나의 반항은 잠시 끝났다. 아 그 동안 슬픔에 울기만 하여 이냥 질척거리는 내 눈 아 그 동안 독한 술과 끝없는 비굴과 절망에 문드러진 내 쓸개 내 눈깔을 뽑아 버리랴, 내 쓸개를 잡아떼어 길거리에 팽개치랴. * 구루마 : 짐수레, 달구지 * 구융 : ‘구유’의 사투리로 마소의 먹이를 담아 주는 나무 그릇 * 작품해설 : 오장환은 일제 말기에 붓을 꺾지 않으면서도 친일의 길을 걷지 않은 몇 안 되는 시인 중의 한 사람이다. 그가 초기 시에서 보여 주었던 유교적 인습에 대한 부정과 반항의 세계가, 해방 이후에는 이 시에서 보듯, 새 시대에 대한 전망과 기대의 이미지로 발전되어 나타나게 된다. 신장병 으로 인해 8.15 해방을 병상에서 맞은 오장환은, 광복의 감격과 어수선한 해방 정국에서의 울분과 좌 절을 이 시를 통해 ‘병든 서울’이라는 상징어로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시적 화자인 ‘나’러 대치된 시인이 8월 15일 병원에서 운 것은 단순히 기쁨 때문이 아니라, ‘탕아 로 / 홀어머니 앞에서 죽는 것이 부끄럽고 원통’해서였다고 믿었지만, 하루가 지난 뒤 정신이 들고 보니 이는 시로 ‘너무나 가슴을 터치틑 사실’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날마다 병원을 뛰쳐나간 다. 그러나 ‘싱싱한 사람 굳건한 청년, 씩씩한 웃음이 있는 줄’ 알았던 네거리의 ‘병든 서울’은 단지 ‘눈깔에 불을 켜들고 날뛰는 장사치’와 ‘무슨 본부, 무슨 본부 / 무슨 당, 무슨 당의 자동 차’만 가득할 뿐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렇다 병든 서울아 / 지난날에 네가, 이 잡놈 저 잡놈 / 모두 다 술 취한 놈들과 밤늦도록 어깨동무를 하다시피 / 아 다정한 서울아 / 나도 밑천을 털고 보면 그런 놈 중의 하나이 다’라며 울부짖는다. 식민지 치하에서 ‘나’가 반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그저 술 먹고 돌아치 는 것이었고, 여기에는 너도 나도 잡놈일 뿐이어서 서울은 오히려 다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친일파들이 다시 고개를 들고, 어제까지 황군(皇軍) 위문 공연을 다니던 문학인들이 오늘은 너도 나도 민족 문학을 부르짖고,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여서 정당을 구성하는 데에 혈 안이 되어 버린 해방 정국은 이미 그가 꾼에 그리던 마음 속 고향이 아니었다. 그의 이상은 ‘아, 인민의 이름으로 되는 새 나라’의 건설이건만,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병원에서 뛰쳐나와 ‘인민의 이름으로 씩씩한 새 나라를 세우려 힘쓰는 이들’과 함께 ‘인민의 공통된 행복’ 을 위하여 노력하지만, 어느새 서울엔 다시금 ‘술 취한 망종’이 다시 들끓고 있을 뿐이다. 잠시 동 안 해방의 감격에 취해 있었던 그는 이제 ‘큰물이 지나간 서울의 하늘’과 ‘젊은이의 씩씩한 꿈 들’을 보고 싶어서, ‘길거리에 자빠져 죽는 날’까지 다시금 반항할 것을 마음먹는다. 그리하여 그 는 ‘그 동안 슬픔에 울기만 하여 이냥 질척거리는’ 눈을 뽑아 버리고, ‘그 동안 독한 술과 끝없는 비굴과 절망에 문드러진’ 쓸개를 내팽개치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해방 정국의 감격과 울분을 노래하는 이 시는 이러한 격정이 호흡을 적절히 가다듬게 하는 선동적인 리듬감과 조화를 이루어, 거칠면서도 절제된 시인의 내면의 심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데 성공한 작품이다. 다음과 같은 부분이 그 좋은 예가 된다. ‘아름다운 서울, 사무치는, 그리고, 자랑스런 나의 서울아 / 나라 없이 자라난 서른 해 / 나는 고향 까지 없었다.’ The Last Train - 오장환 / 1938. - 저무는 역두(驛頭)에서 너를 보냈다. 비애야! ​ 개찰구에는 못 쓰는 차표와 함께 찍힌 청춘의 조각이 흩어져 있고 병든 역사(歷史)가 화물차에 실리어 간다. ​ 대합실에 남은 사람은 아즉도 누굴 기둘러 ​ 나는 이곳에서 카인을 만나면 목 놓아 울리라. ​ 거북이여! 느릿느릿 추억을 싣고 가거라. 슬픔으로 통하는 모든 노선이 너의 등에는 지도처럼 펼쳐 있다. * 오장환(吳相淳, 1918-1951) 1918 (1세): 5/15 충북 보은군 회북면 중앙리에서 태어남 1924(7세): 회인공립보통학교 입학. 1927(10세): 경기도 안성군으로 이사. 안성공립보통학교로 전학. 1930(13세): 안성공립보통학교 졸업, 중동학교 속성과에 입학. 1931(14세): 중동학교 수료 후 4월 휘문고등보통학교 입학. 정지용으로부터 시를 배움. 1933(16세): 2월 학교 문예지<휘문>에 '아침'과 '화염' 수록. 11월 <조선문학>에 '목욕간'을 발표하 며 등단. 1934(17세): 4월 일본으로 건너가 지산智山중학교에 전입 1936(19세): 지산중학교 수료, <낭만> <시인부락> 동인 활동. 1937(20세): 4월 명치대학 전문부에 입학, <자오선>동인활동. 7월 첫 시집 '성벽'/풍림사 간행. 1938(21세): 3월 명치대학을 중퇴하고 귀국, 7월 아버지 오학근 사망. 서울 종로 관훈동에 남만서점 책방을 냄. 1939(22세): 두 번째 시집 "헌사"/남만서방 간행. 1945(28세): 신장병으로 입원 중. 8.15 해방을 맞음. 1946(29세): 조선문학가동맹 서울시지부 사업부 위원 및 동 문학대중화운동위원회 위원. 7월 세 번째 시집[병든 서울](정음사)간행. 1947(30세): 2월 장정인과 결혼.6월 네 번째 시집 [나 사는 곳]/현문사 간행. 중학교 5.6학년용 국어 교과서에 시 "석탑의 노래" 실림.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테러를 피해 월북하여 남포병원에 입원함. 1948(31세): 7월 산문집 '남조선의 문학예술' 간행. 12월 병 치료차 모스크바로 가 볼킨병원에 입원함. 1949(32세): 7월 모스크바에서 귀국함. 1950(33세): 다섯 번째 시집이며 소련 기행 시집인 [붉은기] 간행. 1951(34세): 지병인 신장병으로 사망. 충청북도 보은 출생. 본관은 해주(海州).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전문 부를 중퇴하였다. 1933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조선문학(朝鮮文學)』에 「목욕간」을 발표함 으로써 시작 활동을 시작하였지만, 1936년 서정주(徐廷柱)·김동리(金東里)·여상현(呂尙玄)·함형수 (咸亨洙) 등과 『시인부락(詩人部落)』 동인으로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시작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뒤 월북하기까지 10년 남짓 동안에 『성벽(城壁)』(1937)·『헌사(獻辭)』(1939)·『병(病)든 서울』 (1946)·『나 사는 곳』(1947) 등 네 권의 시집과 번역시집 『에세닌 시집(詩集)』(動向社, 1946)을 남겼다. 월북한 뒤의 시작 활동은 거의 밝혀져 있지 않으나, 다만 시집 『붉은 깃발』이 있다는 사실 만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오장환의 시적 편력은 대체로 네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비록 습작품이기는 하나 초기 작품 「목욕간」·「캐메라 룸」·「전쟁」에서 보여주듯이, 새로운 세계를 동경한 나머지 전통과 낡은 인 습을 부정하는 세계이며, 둘째는 시집 『성벽』·『헌사』의 시편과 같이 낡은 전통과 인습에서 벗어 나 새로운 세계 해항지대(海港地帶)를 방랑하고 관능과 퇴폐를 바탕으로 하는 탈향지향(脫鄕志向)의 세계이다. 셋째는 시집 『헌사』의 시편 일부와 『나 사는 곳』의 시편이 보여주는 탈향지향에서 귀 환하는 귀향의지의 세계이며, 넷째는 시집 『나 사는 곳』의 시편 일부와 『병든 서울』의 시편들이 보여주듯이 오장환이 광복 후에 좌경 단체에 가담하여 좌경적 이념과 사회주의를 노래한 프롤레타리 아 지향의 세계이다. 오장환의 시적 변모는 과거의 전통과 풍습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데서 출발하 여 그 반명제로 탈향지향의 세계를 도모하다가 다시 고향으로 귀의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성 벽』·『헌사』에서 보여준 도시적인 이미지와 보헤미안적 기질은 『나 사는 곳』에 와서 전원적인 이미지와 향토애로 바뀐다. 하지만, 광복 후 좌우 이념의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면서 그는 현실에 참 여하여 당시 상황을 웅변적으로 토로하게 한다. 이밖에 평론으로 「백석론(白石論)」(1937)·「자아 (自我)의 형벌(刑罰)」(1948) 등이 있다. The Last Train / 낭송 오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