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아름다운 문학

<변영로> 논개(論介) / 봄비

이름없는풀뿌리 2023. 10. 1. 09:57
논개 - 변영로 / 『신생활』 3호, 1923. 4 -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 논개(論介, ?~1593) 성은 주씨(朱氏)이고, 본관은 신안(新安:중국)이며, 전북 장수(長水)에서 태어났다. 원래 양반가의 딸이었으나 아버지가 사망하고 집안에 어려움이 겹쳐 가산을 탕진하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 (崔慶會)의 후처가 되었다고 전한다. 그 밖의 자세한 성장과정은 알 수가 없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5월 4일에 이미 서울을 빼앗기고 진주성만이 남았을 때 왜병을 맞아 싸우 던 수많은 군관민이 전사 또는 자결하고 마침내 성이 함락되고 최경회는 일본군에 의해 전사한다. (제2차 진주성 싸움). 일본군 왜장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矗石樓)에서 주연을 벌이는데 논개는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생으로 위장하여 참석하게 된다. 이 자리에 있던 그녀는 계획대 로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반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 벽류(碧 流) 속에 있는 바위에 올라 껴안고 남강(南江)에 떨어져 적장과 함께 죽었다. 훗날 이 바위를 의암 (義岩)이라 불렀으며, 사당(祠堂)을 세워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 1846년(헌종 12) 당시의 현감 정주석(鄭胄錫)이 장수군 장수면(長水面) 장수리에 논개가 자라난 고장 임을 기념하기 위하여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를 건립하였다. 그가 비문을 짓고 그의 아들이 글씨를 썼다. 1956년 '논개사당(論介祠堂)'을 건립할 때 땅 속에 파묻혀 있던 것을 현 위치에 옮겨놓았다. 비문에는 "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라고 씌어 있다. 장수군에서는 매년 9월 9일에 논개를 추모하기 위해 논개제전(論介祭典)을 열고 있다. 진주성이 왜적에게 짓밟힐 때 기녀로서 적장을 유인하여 남강(南江)에 빠져 산화한 사실은 많은 사람 들의 입을 통하여 널리 유포되었다. 구전되어오던 그녀의 순국사실이 문헌이나 금석문에 기록되기 시 작한 것은 1620년경부터라고 추정된다. 사회의 멸시를 받던 기녀의 몸으로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목 숨을 바친 충성심에 감동한 유몽인(柳夢寅)이 《어우야담 於于野談》에 채록함으로써 문자화되었던 것이다. 한편 진주사람들이 그녀의 애국적 행위를 기리고 전하기 위하여, 그녀가 순국한 바위에 의암(義巖)이 라는 글자를 새겨넣은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그러나 그녀를 추모하는 지역민들의 노력에도 불구하 고 임진왜란중의 충신·효자·열녀를 뽑아 편찬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는 그녀의 순국사실이 누락되었다. 이는 유교윤리에 젖어 있던 일부 편집자들이 관기를 정렬(貞烈)로 표 창함이 불가하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보수적인 집권사대부들의 편견 때문에 그녀의 애국충정은 정당 하게 평가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일부 사대부들의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진주성민들은 성이 함락된 날이면 강변에 제단을 차려 그녀의 의혼(義魂)을 위로하는 한편, 국가적인 추모제전이 거행될 수 있도록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진주성민 들의 오랜 노력이 결실을 맺기 시작한 것은 경종 이후의 일이었다. 진주성민들은 절의(節義)를 위하 여 자신의 몸을 바친 그녀의 의로운 행위는 마땅히 정부가 표창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같은 진 주성민들의 요청을 받은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은 1721년(경종 1)에 기녀의 신분으로 의를 위하 여 목숨을 바친 그녀의 의열에 대한 국가의 포상을 비변사에 건의하였다. 이때 거론된 구체적인 포상 방법은 봉작(封爵)을 내려주고 사당(祠堂)을 건립하여주는 것이었다. 최진한의 건의를 받은 비변사는 보다 확실한 인증자료의 제시를 요구하였다. 이에 최진한은 관민합동으로 〈의암사적비 義巖事蹟碑〉 를 건립하고 난 다음 그 인본을 제출하여 자손의 급복(給復)에 대한 특전을 허락받기에 이르렀던 것 이다. 이는 비록 진주지역민들의 숙원이었던 논개에 대한 봉작과 건사사액(建祠賜額)에는 미치지 못 하였으나, 그녀의 순국사실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 되었으며, 의기가 논개를 지칭하는 공 식호칭이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녀의 자손에 대한 급복의 특전이 베풀어진 20여년 뒤에 의혼을 봉안하는 사당이 건립되었다. 1739 년(영조 16)경에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의 노력으로 의기사(義妓祠)가 의암부근에 세워지고, 논 개에 대한 추모제가 매년 국고의 지원을 받아 성대히 치루어짐으로써 국가의 공식적인 포상절차가 마 무리되었던 것이다. 의기사는 그뒤 홍화보(洪和輔)·홍백순(洪百淳)·이지연(李止淵) 등이 여러 차례 보수하여 지금까지 촉석루(矗石樓)옆에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1868년(고종 5)에 진주목사 정현석(鄭顯奭)의 노력으로 매년 6월에 300여명의 여기가 가무를 곁 들여 3일간 치제하는 대규모 추모행사인 ‘의암별제(義巖別祭)’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이 의암별제 는 일제의 방해로 중단되고 의식절차만이 《교방가요 敎坊歌謠》에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논개의 출생이나 성장과정에 대한 다양한 이설이 제시되었다. 논개는 전라도 장 수출신이며, 양반가문출신이고, 성은 주씨(朱氏)이며, 최경회(崔慶會) 혹은 황진(黃進)의 애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문헌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논개의 출신성분에 대한 지나친 미화는 신중 을 기하여야 할 것이다. 봄비 - 변영로 / <신생활>(1922) -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 졸음 잔뜩 실은 듯한 젖빛 구름만이 무척이나 가쁜 듯이, 한없이 게으르게 푸른 하늘 위를 거닌다. 아, 잃은 것 없이 서운한 나의 마음!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 아려…ㅁ풋이 나는, 지난날의 회상같이 떨리는, 뵈지 않는 꽃의 입김만이 그의 향기로운 자랑 안에 자지러지노나! 아, 찔림없는 아픈 나의 가슴 !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 이제는 젖빛 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 없고 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실 같은 봄비만이 노래도 없이 근심같이 내리노나! 아, 안 올 사람 기다리는 나의 마음! * 작품 해설 : 이 시는 서정시로서 은실같이 내리는 봄비를 보면서 오지 않을 어떤 사람을 기다리는 시인의 마음을 형상화하고 있다. 따라서 봄비가 묘사 대상이 되어 있지만, 정작 작품의 주제는 봄비 라기 보다는 시인의 어떤 상실감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시인은 봄비를 푸른 하늘의 구름이나 연 약한 숨결을 느끼게 하는 꽃, 은실같은 것에 견주어서 묘사한다. 봄비와 이런 부드럽고 약한 것들이 서로 다른 것처럼 이야기하면서도 그것들이 서로 연과되는 것임을 암시한다. 시인이 이와 같은 가냘 픈 존재를 인식하는 것은 그 자신의 심정의 움직임에 따른 것이다. 시인은 안 올 사람을 기다리는데, 그것은 부재하기 때문에 시인의 마음에 강력하게 존재하는 대상이다. 서정시는 이처럼 주체의 심정이 나 정감을 표현하는 데 중심을 두고 있다. 여성 편향적 어조와 함께 시인의 감각적인 통찰로 빚어진 이 작품의 아름다운 정감과 선율은 그윽하고 부드럽기만 하다. *변영로(卞榮魯, 1898-1961) 별칭 : 변영복(卞榮福), 수주(樹州) 1898년 사울 출생 1909년 중앙학교 입학 1918년 중앙고보 영어 교사 1920년 문학 동인지 『폐허』 동인 활동 1931년 도미(渡美), 캘리포니아주 산호세대학에서 수학 1935년 『신가정』지 주간 1946년 성균관대학교 영문과 교수 1949년 서울시 문화상 수상 1953년 서울신문사 이사,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초대 위원장 1961년 사망 시집 : 『조선의 마음』(1924),『수주시문선』(1959),『차라리 달 없는 밤이드면』(1983),『논개』(1987) 서울 재동·계동 보통학교를 거쳐 1910년 사립 중앙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2년 체육교사와 마찰이 일어 자퇴하고 만주 안동현을 유람하다가 같은 해 평창 이씨(平昌李氏) 이흥순(李興順)과 결혼하였 다. 1915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영어반에 입학하여 3년 과정을 6개월 만에 마쳤다. 그 뒤 1931 년 미국 캘리포니아주립 산호세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및 중앙고등보통학교 에서 영어교사를 지내기도 하였으며, 1919년에는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한 일도 있다. 1920년에 ‘폐허(廢墟)’, 1921년에는 ‘장미촌(薔薇村)’ 동인으로 참가하였으며, 『신민공론(新民公論)』 주 필을 지내기도 하였다. 1923년에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로 부임하였다. 1933년 동아일보기자, 1934년 『신가정(新家庭)』 주간을 지내다 광복 뒤 1946년에 성균관대학교 영문과 교수, 1950년에 해군사관 학교 영어교관으로 부임하였다. 1953년에 대한공론사(大韓公論社) 이사장에 취임, 1955년에는 제27차 비엔나국제펜클럽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한 바 있다. 그의 시작 활동은 1918년 『청춘(靑春)』에 영시 「코스모스(Cosmos)」를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는 데 당시에는 천재시인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활동은 1921년 『폐허』 제2호 에 평문 「메텔링크와 예이츠의 신비사상」, 『신천지(新天地)』에 논문 「종교의 오의(奧義)」, 시 「꿈많은 나에게」·「나의 꿈은」 등 5편을 발표하면서부터 전개되었다. 1922년에는 『신생활(新生 活)』에 대표작 「논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는 창작 활동 초기부터 과작(寡作 : 작품을 적게 제작함.)의 시인이었다.『신생활』·『동명』·『개벽(開闢)』 등을 통하여 한 해에 5, 6편 정도를 발표하였을 뿐이다. 1924년에는 첫 시집 『조선의 마음』이 평문관(平文館)에서 간행되었는데 거기에 는 「버러지도 싫다하올 이몸이」를 비롯한 28편의 시와 수상 8편이 수록되었다. 그러나 이 시화집은 내용이 불온하다 하여 발행과 동시에 곧 총독부에 의하여 압수되어 폐기처분된 바 있다. 그의 시작품 들은 가락이 부드럽고 말씨가 정서적이어서 한때 시단의 주목을 받았으며, 작품 기저에는 민족혼을 일깨우고자 한 의도도 깔려 있었다. 그의 시세계는 크게 3기로 구분된다. 1기는 시집 『조선의 마 음』이 발간되기까지인데, 민족시인으로서의 의식이 표출된 시기이다. 이 무렵의 대표작으로「논개」 를 들 수 있다. 2기는 그 뒤부터 광복까지의 시기로, 자신을 둘러싼 상황인식에서 오는 절망감 속에서도 선비적 절개 와 지조를 고수하려는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 「실제(失題)」·「사벽송(四壁 頌)」 등을 들 수 있다. 3기는 광복부터 죽기까지의 시기로 「돐은 되었건만」과 같이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는 우국적 시를 주로 썼다. 시작 활동 이외에도 우리 문단에 영미문학(英美文學)을 소개하고 우리 작품을 영역하였으며, 남궁 벽(南宮璧)의 유고 일문시(日文詩)를 『신생활』에 소개하여 별로 알려지지 않은 시인의 위치를 확고하게 하는 등 시사(詩史)에 공헌한 바가 크다. 1948년에는 서울시 문화상(문학부분)을 수상한 바 있다. 저서로 수필집 『명정사십년(酩酊四十年)』(1953)·『수주시문 선(樹州詩文選)』(1959)·영문시집 『진달래동산(Grove of Azalea)』(1948) 및 1981년 유족들이 간행 한 『수주변영로문선집(樹州卞榮魯文選集)』 등이 있다. 논개(論介) / 시낭송 이서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