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바다
- 김남조 / 시집 <겨울바다>(1967) -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未知)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海風)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 버리고
허무의
불
물 이랑 위에 불 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인고(忍苦)의 물이
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설일(雪日)
- 김남조 / <김남조 시집>(1967) -
겨울 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이적진 말로써 풀던 마음
말없이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
새해의 눈시울이
순수의 얼음꽃,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 위에 떨구이는
백설을 담고 온다.
정념의 기(旗)
- 김남조 / <정념의 기>(1960) -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
없는 것모양 걸려 왔더니라.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눈 오는 네거리에 나서면
눈길 위에
연기처럼 덮여 오는 편안한 그늘이여,
마음의 기(旗)
눈의 음악이나 듣고 있는가.
나에게 원이 있다면
뉘우침 없는 일몰(日沒)이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 가는
그 일이란다.
황제의 항서(降書)와도 같은 무거운 비애(悲哀)가
맑게 가라앉은
하얀 모랫벌 같은 마음씨의
벗은 없을까.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서
때로 울고
때로 기도드린다.
목숨
- 김남조 / <목숨>(1953) -
아직 목숨을 목숨이라고 할 수 있는가
꼭 눈을 뽑힌 것처럼 불쌍한
사람과 가축과 신작로와 정든 장독까지
누구 가랑잎 아닌 사람이 없고
누구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고
불붙은 서울에서
금방 오무려 연꽃처럼 죽어갈 지구를 붙잡고
살면서 배운 가장 욕심없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반만년 유구한 세월에
가슴 틀어박고 매아미처럼 목태우다 태우다
끝내 헛되이 숨져간 이건
그 모두 하늘이 낸 선천(先天)의 벌족(罰族)이더라도
돌멩이처럼 어느 산야에고 굴러
그래도 죽지만 않는
그러한 목숨을 갖고 싶었습니다.
그대 있음에
- 김남조 / 프리미엄북스 / 2007년 07월 -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
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
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
그대 있음에
내 마음에 자라거늘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손잡게 해
그대의 사랑 문을 열 때
내가 있어 그 빛에 살게 해
사는 것의 외롭고 고단함
그대 있음에
사람의 뜻을 배우니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그 빛에 살게 해
* 김남조(金南祚, 1927- )
1927년 9월 25일 경북 대구 출생. 일본 규슈(九州)에서 여학교를 마쳤고, 1951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를 졸업하였다. 마산고교, 이화여고에서 교편을 잡은 후 성균관대학교와 서울대학교 강사를 거쳐 1955년부터 1993
년까지 숙명여대 교수를 역임하였다. 한국시인협회 회장,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숙명여
자대학교 명예교수,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다. 1950년 대학재학시절 『연합신문』에 시 「성수(星宿)」, 「잔상
(殘像)」 등을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1953년 첫시집 『목숨』을 발간하면서 본격적인 시작활동에 들어갔는데, 이
후의 시 「황혼」, 「낙일」, 「만가」 등과 더불어 이 시기의 작품들은 인간성에 대한 확신과 왕성한 생명력을
통한 정열의 구현을 소화해 내고 있다. 특히 『목숨』은 가톨릭 계율의 경건성과 뜨거운 인간적 목소리가 완전하
게 조화된 시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제2시집 『나아드의 향유』로 이어지면서 종교적 신념이 한층
더 강조되고 기독교적 인간애와 윤리의식을 전면에 드러내게 된다. 이후의 시들 대부분이 지속적으로 이러한 기독
교적 정조를 짙게 깔고 있으며 후기로 갈수록 더욱 심화된 신앙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정열의 표출보다는 한껏
내면화된 기독교적 심연 가운데에서 절제와 인고를 배우며 자아를 성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집 『정념의 기』(1960), 『풍림의 음악』(1963), 『잠시, 그리고 영원히』(1965), 『김남조 시집』(1967) 등을
발간하면서 왕성한 창작력을 보여주었다. 모윤숙(毛允淑)‧노천명(盧天命)의 뒤를 이어 1960년대 여성 시인의 계보
를 마련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후에도 『평안을 위하여』(1995), 『외롭거든 나의 사랑이소서』(1997),
『희망학습』(시와시학사, 1998), 『사랑 후에 남은 사랑』(1999), 『영혼과 가슴』(2004), 『가난한 이름에게』
(2005), 『귀중한 오늘』(2007) 등의 시집을 간행한 김남조는 비교적 다작(多作)하는 시인으로 손꼽히고 있다.
『목숨』(1953), 『나아드의 향유』(1955), 『나무와 바람』(1958), 『정념의 기』(1960), 『풍림의음악』(1963),
『겨울 바다』(1967), 『설일』(1971), 『영혼과 빵』(1973), 『사랑초서』(1974), 『동행』(1976), 『빛과 고
요』(1982), 『시로 쓴 김대건 신부』(1983), 『마음의 마음』(1983), 『눈물과 땀과 향유』(1984), 『너를 위하
여』(1985), 『저무는 날에』(1985), 『말하지 않은 말』(1986), 『문 앞에 계신 손님』(1986), 『둘의 마음에 산
울림이』(1986), 『고독보다 깊은 사랑』(1986), 『겨울나무』(1987), 『새벽보다 먼저』(1988), 『바람세례』
(1988), 『깨어나소서 주여』(1988), 『겨울꽃』(1990), 『가슴을 적시는 비』(1991), 『겨울사랑』(1993), 『평
안을 위하여』(1995), 『외롭거든 나의 사랑이소서』(1997), 『희망학습』(1998), 『사랑초서와 촛불』(2003),
『영혼과 가슴』(2004), 『가난한 이름에게』(2005), 『귀중한 오늘』(2007) 등이 있다. 시선집 『김남조시집』
(1967), 『김남조 육필시선』(1975), 『김남조 시선』(1984), 『가난한 이름에 게』(1991), 『김남조 시 99선』
등이 있다. 2005년 국학자료원에서 『김남조 시전집』를 발간했다.
이밖에도 산문집으로 『잠시 그리고 영원히』(1964), 『은은한 환희』(1965), 『그래도 못다한 말』(1966), 『달
과 해 사이』(1967), 『시간의 은모래』(1968), 『여럿이서 혼자서』(1972), 『그대들 눈부신 설목같이』(1975),
『이브의 천형』(1976), 『만남을 위하여』(1977), 『그대 사랑 앞에』(1978), 『기억하라 아침의 약속을』(1979),
『그 이름에게』(1980), 『바람에게 주는 말』(1981), 『그가 네 영혼을 부르거든』(1985), 『먼데서 오는 새벽』
(1986), 『사랑을 어찌 말로 다하랴』(1986), 『가슴 안의 그 하나』(1987), 『끝나는 고통 끝이 없는 사랑』
(1990), 『마지막 편지』(1996), 『사랑 후에 남은 사랑』(1999) 등이 있다.
1992년 제33회 3·1문화상, 1996년 제41회 대한민국예술원 문학부문 예술원상, 2007년 제11회 만해대상 문학부문
상 등을 받았고, 1993년 국민훈장 모란장과 1998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1951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 국어교
육과 학사(졸업), 마산고등학교 교사,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사, 성균관대학교 강사, 서울대학교 강사, 1954년 ~
1993년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한국시인협회 회장,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 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 대한민국 예
술원 회원, 1963년 오월문예상, 1992년 제33회 3·1문화상, 1993년 국민훈장 모란장, 1996년 제41회 대한민국예술
원 문학부문 예술원상, 1998년 은관문화훈장, 2007년 제11회 만해대상 문학부문상
1967.11.4. 시인 신석정(오른쪽,61세)의 비사벌초사를 방문한 김남조(가운데, 41세), 그리고 김용호(왼쪽, 56세).
겨울바다(김남조) / 시낭송 이서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