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랑캐꽃
- 이용악 / <오랑캐꽃>(1947) -
오랑캐꽃
- 긴 세월을 오랑캐와의 싸움에 살았다는 우리의 머언 조상들이 너를 불러 '오랑캐꽃'이라
했으니 어찌 보면 너의 뒷모양이 머리 태를 드리인 오랑캐의 뒷머리와도 같은 까닭이라 전한다 -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도 띳집도 버리고 강 건너로 쫓겨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졸짝을 구름이 흘러
백 년이 몇 백 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 줄게
울어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 오랑캐꽃 : 제비꽃을 다른 말로 일컫는 말
* 도래샘 : 도랑가에 저절로 샘이 솟아 빙 돌아서 흘러 나가는 샘물, '도래'는 '도랑'의 함북 방언
* 띠집 : 지붕을 띠로 얹어 만든 집. 모옥(茅屋)
* 돌가마 : 백탄(白炭)가마
* 털메투리 : 털로 만든 미투리. 미투리는 삼 껍질로 짚신처럼 삼은 신.
* 작품해설 : 일제의 수탈로 말미암아 소위 오랑캐 땅으로 쫓겨난 유이민들의 비극적 삶을 고도의 상징적 수법으
로 그려낸 이 작품은 서정주로부터 “망국민의 절망과 비애를 잘도 표했다.” 는 절찬을 받은 바 있다. 이 시는
‘오랑캐꽃’이라는 자연물을 통해 민족이 처한 비통한 현실에 대한 연민과 비애를 노래한 작품이다. 복잡한 비유
구조를 지니고 있어서 그 의미를 쉬사리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연약하고 가냘픈 오랑캐꽃의 이미지와
그에 대한 연민을 통해 이민족의 지배 하에서 노예적인 삶을 살아가는 민족의 삶과 운명을 그린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이 시는 오랑캐꽃의 이미지와 고통 받는 민족의 현실을 등치(等値)시킴으로써 개인적인 서정을 그 시
대의 보편적인 서정의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꽃의 형태가 오랑캐의 머리 모양을 닮았다는 외형적인 유사성
때문에 오랑캐꽃이라 불리는 것이나,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인해 그 옛날의 오랑캐나 다를 바 없는 비참한 신세
로 전락해 버린 민족의 처지가 동일하다는 현실 인식이 이 시의 주요 모티프를 이루고 있으며, 그에 기초하여 오
랑캐꽃이라는 구체적인 사물에 대한 연민의 정을 민족이 처한 객간적 현실에로 확대시키고 있는 것이 이 시의 기
본적 구조가 된다.
이 시는 첫머리에서 ‘오랑캐꽃’의 명명(命名)에 대한 유래를 밝히고 있다. 그것은 오랑캐와의 싸움에 시달렸던
우리 조상들이 ‘오랑캐’의 뒷모습과 ‘오랑캐꽃’의 뒷모습이 서로 닮아 그 꽃을 ‘오랑캐꽃’이라 했다는 설명
이다. 즉 그 명명은 과거의 전쟁 체험 및 모습의 유사성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오랑캐꽃’의 명명에 대한 객관
적 인식을 앞머리에 제시해 놓고 전개되는 작품 내용은 이와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먼저 1연은 오랑캐와 고려와
의 싸움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며, 이어 2연에서는 그러한 역사적 사실이 상당 기간 지났음을 묘
사적 표현으로 제시한다. 3연은 화자의 주관적 인식과 그로부터 촉발되는 화자의 감정을 표출한다.
화자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고 또 ‘(추운 지방에서의 생활상인)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
랑캐꽃에 대해 극도의 비애감을 느끼고 있다. 즉 오랑캐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면서도 ‘오랑캐꽃’이라 불리게
된 데 대해 화자는 극도의 슬픔을 느끼고 있다. 그러한 화자의 감정은 마침내 ‘울어 보렴 목 놓아 울어나 보렴’
이라는 마지막 구절에 이르러 폭발되고 만다. ‘오랑캐꽃’이라는 잘못된 명명이 일종의 억울함이라면 화자의 슬
픔은 이러한 억울함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일제에 의해 오랑캐라고 천대받던 유이민들이자,
더 나아가 전 조선 민중의 억울함과 비통함을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낡은 집
- 이용악 / 『낡은 집』, 1938 -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손손에 물려줄
은 동곳도 산호 관자도 갖지 못했니라.
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실이에 늙은 둥글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랜
외양간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무도 모른다.
찻길이 놓이기 전
노루 멧돼지 쪽제비 이런 것들이
앞뒤 산을 마음놓고 뛰어다니던 시절
털보의 셋째 아들은
나의 싸리말 동무는
이 집 안방 짓두광주리 옆에서
첫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털보내는 또 아들을 봤다우
송아지래두 불었으면 팔아나 먹지
마울 아낙네들은 무심코
차가운 이야기를 가을 냇물에 실어보냈다는
그날 밤
저릎등이 시름시름 타들어가고
소주에 취한 털보의 눈도 일층 붉더란다.
갓주지 이야기와
무서운 전설 가운데서 가난 속에서
나의 동무는 늘 마음 졸이며 자랐다.
당나귀 몰고 간 애비 돌아오지 않는 밤
노랑 고양이 울어울어
종서 잠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어미 분주히 일하는 방앗간 한구석에서
나의 동무는
도토리의 꿈을 키웠다.
그가 아홉 살 되던 채
사냥개 꿩을 쫓아다니는 겨울
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
어데론지 사라지고 이튿날 아침
북쪽을 향한 발자욱만 눈 위에 떨고 있었다.
더러는 오랑캐령 쪽으로 갔으리라고
더러는 아라사로 갔으리라고
이웃 늙은이들은
모두 무서운 곳을 짚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제철마다 먹음직한 열매
탐스럽게 열던 살구
살구나무도 글거리만 남았길래
꽃 피는 철이 와도 가도 뒤울 안에
꿀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다.
* 은 동곳 : 銀으로 만든 동곳. 동곳은 상투를 맨 후에 상투가 풀어지지 않도록 다는 장식임. 금.은.동이 재료.
* 산호 관자(珊瑚貫子) ; 산호로 만든 관자. 관자는 망건의 당줄에 꿰는 작은 구슬, 재료와 문양으로 신분 표시.
* 무곡 : 장사하려고 많은 곡식을 사들임.
* 콩실이 : 콩 시루, 시리(실기)는 시루의 함경도 사투리, 시루는 떡이나 쌀을 찌는 그릇.
* 동글소 : 황소
* 싸리말 : 싸리비. 함경도에선 아이들이 이것을 말 삼아 타고 놂.
* 짓두광주리 : 바느질고리의 함경도 방언
* 저릎등 : 겨릅등의 함경도 방언. 긴 삼대를 태워 불을 밝히는 장치.
* 갓주지 : 갓쓴 주지승(住持僧), 옛적 아이들을 달래거나 울음을 그치게할 때, 이 갓주지 이야기를 했다 함.
* 글거리 : 그루터기, 풀이나 나무를 베고 남은 밑둥
* 뒤울 : 집 뒤의 울타리.
* 작품해설 : 1930년 후반 서정주, 오장환과 함께 시 삼재(詩三才)로 손꼽혔던 이용악은, 일제의 압제를 피하려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고향 땅을 버리고 생존을 위하여 만주나 시베리아 등지로 떠나야만 했던 숱한 유이민들의 비
극적 정서를 형상화한 민족주의 시인이다. 이 작품은 그의 첫 시집 『낡은 집』의 표제시로, 일제의 탄압을 피해
어디론가 떠나버린 ‘털보네’ 집의 퇴락해 가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 줌으로써 당시의 처절했던 유랑민들의
슬픔을 극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사냥개 꿩을 쫓아다니는 겨울’, ‘털보네’ 일곱 식솔이 사라진 이튿날 아침,
북쪽을 향해 나 있는 발자국을 발견하고 동네 노인들은 그들이 아마 무서운 오랑캐 땅이나 러시아로 갔을 것으로
추정한다. ‘털보네’가 떠난 후, ‘거미줄’만 늘어나는 그 집은 이제 더 이상 퇴락(頹落)할 여지조차 없는 ‘흉
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이 되어 ‘꽃 피는 철이 와도 / 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다’‘대대손손에 물려줄’ 물건
하나 가지지 못한 전형적 조선 빈농(貧農)인 ‘털보네’가 야반도주(夜半逃走)를 한 것은 아마도 일제의 심한 감
의 눈길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이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사정은 개화기이래 일제가 파
행적으로 행한 허구적인 근대화 과정에서 손바닥만한 농토마저 ‘찻길’로 빼앗긴 탓이요, 그나마 힘들게 소출(所
出)한 ‘콩’마저도 ‘늙은 둥글소’에 의해 ‘항구’로 운반되어 일제에 수탈당했기 때문이다. 일제의 식민지 수
탈을 가장 명징(明澄)하게 보여 주는 공간 지표인 ‘항구’를 쉴 새 없이 드나든 탓으로 일찍 노쇠해 버린 ‘둥글
소’와 꺼질 듯 위태롭게 ‘시름시름 타들어 가는 저릎등’과 ‘소주에 취한 털보의 눈’은 ‘낡은 집’과 조화를
이루어 일제 치하 무기력한 백성들의 곤궁한 삶을 표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장차 ‘털보네’가 겪어야 할 암담한
미래를 예견하게 해 준다. 또한 9년 전, 시적 자아의 ‘싸리말 동무’인 ‘털보의 셋째 아들’의 출생에 대해,
‘팔아먹을 수 있는 송아지’보다도 못한 것이라 하는 ‘마을 아낙네’들이 ‘무심코’주고받는 ‘차가운 이야
기’ 속에서 당시 농민들의 비극적 삶은 절정을 이룬다.
이용악(李庸岳, 1914-1971)
1914년 함경북도 경성 출생
1935년 『신인문학』 3월호에 시 「패배자의 소원」을 발표하여 등단
1939년 일본 상지(上智)대학 신문학과 졸업
김종한과 함께 동인지 『이인(二人)』 발간
1939년 귀국하여 『인문평론』 기자로 근무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
1950년 6.25 때 월북
1971년 사망
시집 : 『분수령』(1937), 『낡은 집』(1938), 『오랑캐꽃』(1947), 『이용악』(현대시인전집 1, 1949),
『이용악시선집』(1988), 『북쪽은 고향』(1989),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1989)
오랑캐꽃(이용악) / 시낭송 김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