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가시나무
- 이승훈 / <시조문학>2022 여름호 -
입안에 가시 돋친
그런 날이 있었다
거꿀반응이라던 역류성 식도염증
맥 짚어 당신이 내린
어혈은 내 우울증
벌판으로 뛰쳐나가
속을 다 게워내도
언제쯤 불살라질까 너를 보낸 붉은 죄
평생을 꼬박 태워도
목 깊숙이 걸렸다
여기서 거기까지
몇 년이나 걸릴지
더듬더듬 짚어가는 네 맘속 그 먼 길
온몸이 불에 데인듯
한발 한발 뜨겁다
단원 김홍도,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 조선 18세기 후반, 비단에 채색, 90.4×43.8㎝, 삼성미술관 리움
호랑이
- 이승훈 / 『이승훈시전집』 <황금알, 2012> -
그는 벽에 호랑이를 그리고
벽 속으로 들어갔지
나도 이 시를 쓰고 시 속으로
들어가면 얼마나 좋을까?
가능한 적게 먹고
적게 공부하자
그는 웃고 나는 시를 쓰네
암호
- 이승훈 / 시집 『시가 내게로 왔다2』 <마음산책, 2004> -
환상이란 이름의 역은 동해안에 있습니다. 눈 내리는 겨울 바다-- 거기 하나의 암호처럼 서
있습니다. 아무도 가본 사람은 없습니다. 당신이 거기 닿을 때, 그 역은 총에 맞아 경련합
니다. 경련 오오 존재. 커다란 하나의 돌이 파묻힐 때, 물들은 몸부림칩니다. 물들의 연소
속에서 당신도 당신의 몸부림을 봅니다. 존재는 끝끝내 몸부림 속에 있습니다. 아무도 가본
사람은 없습니다. 푸른 파편처럼, 바람 부는 밤에 환상이란 이름의 역이 보입니다.
피안
- 이승훈 / 시집 『시가 내게로 왔다2』 <마음산책, 2004> -
머리를 빡빡 깎고 싶은 밤이 있지 어제도 거실에서 술 마시다 말고 스님처럼 머리 빡빡 밀고
싶어 화장실 들어가 거울보고 그래 빙판을 머리에 얹고 다니는 거야 검은 머리칼이 아귀다 중
얼대고 나 왔지 어느 날 머리 빡빡 깎고 집에 오면 아내는 내가 이젠 완전히 미쳤다고 하겠지
A와 나
- 이승훈 / 시집 『시가 내게로 왔다2』 <마음산책, 2004> -
A는 고통이다. A가 증대하면서 지상을 가득히 채운다. A는 고통, 나는 고통의 남편. A는 내
몸을 파고들기 시작한다. 밤이다. A와 나는 관계로부터 탈출을 시도한다. A는 고통, 나는
고통의 남편, 어떻게 이혼할 것인가 새벽에. A와 나는 어떻게 결혼을 취소할 것인가 대낮
에. 나는 A를 없애려 권총을 만든다. 물론 나의 권총에는 총구가 없다. 죽여야 할 놈은 이
미 시체이기 때문이다. 죽여야 할 놈은 바로 나 아아 시체여 시체여 시체여. 밤에도 낮에도
지상을 가득 채우는 아름다운 A는 결코 죽을 가능성이라곤 없다. A는 고통, 나는 고통의 남
편, 어떻게 이혼할 것인가.
모든 사람이 쓰고 싶은 시에 대해
- 이승훈 -
요즘엔 모두가 시를 쓰고 싶어한다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래도 모두가 시를 쓰고 있
다 돈을 위해서 쓰는 사람도 있고 명예를 위해서 쓰는 사람도 있고 심심풀이로 쓰는 사람도
있고 (이승훈 씨 같은 사람) 재미로 쓰는 사람도 있고 직업으로 쓰는 사람도 있고 그냥 쓰
는 사람도 있고 자기를 위해 쓰는 사람도 있고 아무도 자기가 쓴 시를 안 읽어도 전혀 관심
이 없는 사람도 있고 전혀 안 쓰는 사람도 있고 쓰려고 벼르고는 있지만 아직 한번도 안 쓴
사람도 있고 한때는 시를 쓰려고 했지만 지금은 전혀 관심이 없어진 사람도 있고 언젠가는
시를 쓰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시쓰기를 포기한 사람도 있고 오래 전에 포기했던 시쓰
기를 새로 다시 시작하는 사람도 있다 시 대신 소설을 쓰는 사람도 있고 에세이나 수표나
저속한 농담이나 화장실에서 낙서만 쓰며 사는 사람도 있고 물론 시를 쓰려는 생각을 한번
도 해보지 않고 사는 사람도 있고 (이승훈 씨 아내 같은 사람) 시쓰기를 시작하기 전에 역
겨워져 포기한 사람도 있고 쓰던 중간에 중단한 사람도 있고 - 물론 자기는 결코 시를 쓸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시도하는 사람도 있고 자기는 시 쓸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면
서도 어쨌든 쓰는 사람도 있고 자신은 시를 쓸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시도를 해보지
않은 사람도 있고 절망감에서 시쓰기를 포기한 사람도 있고 영원히 끝낼 수 없는 빌어먹을
시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쓰는 사람도 있고 (다시 이승훈 씨 같은 사람) 중간에 그만
두었다가 다시 시작하는 사람도 있다 시쓰기에 비참하게 실패하는 사람도 있고 처음엔 실패
하지만 곧 성공했다가 나중에 다시 실패하는 사람도 있고 자기가 쓴 시를 불태우는 사람도 있
고 불태운 다음에 다시 새로운 시를 쓰는 사람도 있고 시를 써서 쓰레기통에 넣는 사람도 있고
그럴 가치도 없는 시를 계속 쓰레기통에서 꺼내 출판사에 보내면 출판사에서는 또 다른 쓰레
기통에 그걸 던져넣는 사람도 있고 - 좋은 시를 못 썼다고 생각해서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못
하는 사람도 있고 스스로 걸레 같은 시를 썼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등등 -
위독
- 이승훈 / <현대시 13집>(1967) -
램프가 꺼진다. 소멸의 그 깊은 난간으로 나를 데려가 다오. 장송(葬送)의 바다에는 흔들리
는 달빛, 흔들리는 달빛의 망또가 펄럭이고, 나의 얼굴은 무수한 어둠의 칼에 찔리우며 사
라지는 불빛 따라 달린다.
오 집념의 머리칼을 뜯고 보라. 저 침착했던 의의(意義)가 가늘게 전율하면서 신뢰(信賴)의
차건 손을 잡는다. 그리고 시방 당신이 펴는 식탁(食卓) 위의 흰 보자기엔 아마 파헤쳐진
새가 한 마리 날아와 쓰러질 것이다.
* 램프가 꺼진다 → 어떤 상황으로 이끄는 환기 작용, 밝음에서 어둠으로 변화되는 상황, 내면세계의
어둠이 표출되는 상태
* 장송의 바다 → 음산하고 적막한 분위기
* 흔들리는 달빛 → 적막한 분위기
* 오, 집념의 머리칼을 뜯고 보라 → 내면적 감정의 급격한 용솟음
* 당신 → '나'의 객관화된 상황
* 파헤쳐진 새 → 처절하고 참담한 내면상황
* 작품 해설 : 이 시는 제 1호에서 제 9호까지의 연작시로 이루어져 있는 것 중 제 1호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들 각 편이 의미의 맥락을 갖는 것이 아니고, 다만 '위독'이라는 말의 '심상'을
공통적 모티프로 삼고 있을 뿐이다. 이 시는 내면 세계의 처절하고 참담한 감정적 분위기를 순간순간
떠오르는 언어들의 상호 충돌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를 통해 우리가 체험해야 하는 것
은 이들 언어들이 상호 충돌을 통해 이룩해 내는 내면적 분위기 속에 함께 빨려들어가 그 상황 속에
서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시는 현실의 실제적 상황에 부딪혀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한 실존의 내면의 무의식적 환상를 심상으로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의 그 처절하
고 참담한 정서적 상황은 곧 현실의 참담한 상황의 무의식적 반응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에 보이는 시어(램프, 난간, 장송의 바다, 달빛, 망또, 어둠의 칼, 불빛, 집념의 머리칼, 차건
손, 식탁, 흰 보자기 등등)는 어떤 의미 질서의 맥락 위에 놓이는 것이 아니고 무의식적 내면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자의식의 어두움, 또는 깊숙이 배어 있는 절망이나 고독의 감정을 제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단편적 사물들이다. 따라서, 이러한 시어들은 무의식적 내면 공간 속에 떠도는 것들이고, 그 떠
도는 것들은 시인의 개인적 내면인 어두움, 고독, 절망 등에 의해 발생된 것들이다. 따라서, 이 시는
어떤 의미 있는 한 덩어리의 말을 하고 잇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비유적 표현 기법을 가지지 않
고, 다만 서술적 기법에 의해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시를 비대상(非對象)의 시라고 한다.
* 이승훈(李昇薰, 1942-2018)
*1942년 강원도 춘천 출생.(2018년 타계)
*연세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현대시 동인.
*1962년 《현대문학》에 시 '낮' 외 2편이 추천되어 등단 .
*1983년 제29회 현대문학상 수상.
*2013년 현대불교문학상, 2016년 만해 대상 문예부문 수상
춘천교육대학 국어과에 재직했으며, 한양대 국문과 교수.
현대문학상, 한국시협상 등을 수상하였다. 1962년 『현대문학』에 작품 「낮」, 「바다」 등이
추천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으며, 『현대시』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시집 『사물 A』(1969), 『환상의 다리』(1976), 『당신의 초상』(1981), 『사물들』(1983),
『당신의 방』(1986), 『너라는 환상』(1989), 『길은 없어도 행복하다』(1991),
『밤이면 삐노가 그립다』(1993), 『밝은 방』(1995), 『첫사랑』(덕수출판사) 등을 간행하였다.
또한 『시론』(1979), 『문학과 시간』(1983), 『비대상』(1983), 『이상시 연구』(1987),
『한국현대시론사』(1993), 『모더니즘 시론』(1995), 『해체시론』(1998) 등의 평론집을 간행하였다.
이승훈의 시 세계는 그가 춘천생활을 하던 초기시에서 주로 ‘나’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로 나타났으며,
그 이후로는 ‘너’ 와 ‘그’ 그리고 ‘나와 너와 그’에 대한 대화적 탐구를 하는 데로 나아갔다.
특히 이승훈의 시는 자유연상기법, 자동기술법 등을 통하여 자신의 시에는 씨니피앙의 유희만이
있을 뿐이라고 스스로가 말할 정도로 새로운 방법을 구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춘천고등학교, 한양대학교 – 섬유공학, 국어국문학 석사, 연세대학교 대학원 - 국어국문학 박사
춘천교육대학 국어과 교수,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현대시 동인 활동
현대문학상, 한국시협상
이승훈 시인 / 김유정문학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