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
- 신동집 / <누가 묻거든>(1989) -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오렌지는 여기 있는 이대로의 오렌지다.
더도 덜도 아닌 오렌지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을 벗길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찹잘한 속살을 깔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대는 순간
오렌지는 이미 오렌지가 아니고 만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다.
오렌지도 마찬가지 위험한 상태다.
시간이 똘똘
배암의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에
한없이 어진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오 누구인지 잘은 아직 몰라도.
목숨
- 신동집 / <서정의 유형>(1954) -
목숨은 때 묻었다
절반은 흙이 된 빛깔
황폐한 얼굴엔 표정(表情)이 없다.
나는 무한히 살고 싶더라.
너랑 살아보고 싶더라
살아서 죽음보다 그리운 것이 되고 싶더라.
억만광년(億萬光年)의 현암(玄暗)을 거쳐
나의 목숨 안에 와 닿는
한 개의 별빛
우리는 아직도 포연(砲煙)의 추억(追憶) 속에서
없어진 이름들을 부르고 있다.
따뜻이 체온(體溫)에 젖어 든 이름들
살은 자(者)는 죽은 자(者)를 증언(證言)하라
죽은 자(者)는 살은 자(者)를 고발(告發)하라
목숨의 조건(條件)은 고독(孤獨)하다.
바라보면 멀리도 왔다마는
나의 뒤 저 편으로
어쩌면 신명나게 바람은 불고 있다.
어느 하많은 시공(時空)이 지나
모양 없이 지워질 숨자리에
나의 백조(白鳥)는 살아서 돌아오라.
어떤 사람
- 신동집 / 《빈 콜라병》(1968) -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별을 돌아보고
늦은 밤의 창문을 나는 닫는다.
어디선가 지구의 저쪽 켠에서
말없이 문을 여는 사람이 있다.
차겁고 뜨거운 그의 얼굴은
그러나 너그러이 나를 대한다.
나즉히 나는 묵례(默禮)를 보낸다.
혹시는 나의 잠을 지켜 줄 사람인가
지향 없이 나의 밤을 헤매일 사람인가
그의 정체를 알 수가 없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창문을 열면
또 한 번 나의 눈을 대하게 된다.
어디선가 지구의 저쪽 켠에서
말없이 문을 닫는 그의 모습을.
나즉히 나는 묵례(默禮)를 보낸다.
그의 잠을 이번은 내가 지킬 차롄가.
그의 밤을 지향 없이 헤맬 차롄가.
차겁고 뜨거운 어진 사람은
언제나 이렇게 나와 만난다.
언제나 이렇게 나와 헤어진다.
* 신동집(申瞳集, 1924-2003)
데뷔 : 1948년 시집 '대낮'
수상 : 1994년 순수문학상, 1992년 제37회 대한민국예술원상, 1990년 도천문학상
경력 : 1983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82 계명대학교 외국학대학 학장
8·15 해방 전 대구시단에 이상화, 이육사가 있었다면 해방 이후에는 김춘수와 신동집이 있었다. 김
춘수에게 ‘꽃’이 있었다면, 신동집에게는 ‘빈콜라병’이 있었다. 그러나 세인들은 김춘수는 기억
하며, 신동집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시인들은 신동집을 ‘기억되지 않는 천재 시인’으로 곧잘 얘
기한다. 그가 저평가 받아왔고, 지금부터라도 재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은 편이다. 대구문인협
회(회장 문무 학)가 발행하는 ‘대구문학’ 통권 73호(겨울호)가 ‘대구가 낳은 한국문학·문학인’
으로 신 동집의 시 세계를 다룬 것도 이의 연장선이다.
신동집은 1924년 3월 5일 경북 대구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현당(玄堂), 본관은 평산 (平山)이다.
1951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했으며, 이후 1959년 미국 인디애나대학서 1년간 영문
학을 수학했다. 1985년 경북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53년 육군사관학교에서의 강의
를 시작으로 영남대학교, 계명대학교, 중앙대학교 등에서 강의했다. 2002년 한국현대시인협회 명예회
장 및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83년 고혈압으로 인해 쓰러진 뒤 고생해오다가 2003년
8월 20일 오전 9시 10분경 경북대학교 부속병원에서 숙환으로 사망하였다.
1948년 서울대학 재학 당시 시집 《대낮》을 간행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6·25전쟁의 극
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자의 존재론적 갈등을 형상화한 초기 작품 《목숨》(1954)을 비롯해 《송신》
(1973), 《오렌지》(1989) 등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한 주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계열의 시를 주로 발
표하면서 인간과 자연에 대한 근원적인 의미탐구를 집요하게 추구했다. 1954년 문단의 주목을 받은
두 번째 시집 《서정의 유형(流 刑)》을 발행했으며, 이 시집으로 아시아자유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어 《제2의 서시(序 詩)》(1958), 《모순의 물》(1963), 《빈 콜라병》(1968) 등 다수의 시집을 통해
작가만의 독특한 구술체(口述體)를 시도하는 등 시의 표현 기교에 새로운 실험을 시도함으로써 김춘
수(金春洙)·전봉건(全鳳健)·김구용(金丘庸)·김종삼(金宗三) 등과 함께 한국현대시사 에 특기할 만
한 업적을 남겼다.
어떤 사람(신동집) / 시낭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