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가는 먼 집
- 허수경 / 시집 『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지성사, 1992) -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
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
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
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
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이 나에게 기대
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
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
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
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잎새라는 이름
- 허수경 / 시집 『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지성사, 1992) -
잎새라는 이름을 가진 새가 있다면
아주 조금 먹고 길게 우는 새
잎새라는 이름을 가진 바람이 있다면
그 바람 속에서 날려가는 우산은 가볍겠지
잎새라는 이름을 가진 눈이 있다면
따뜻하고 보드라운 깃털일 거야
잎새라는 이름을 가진 폭풍이 있다면
잎새라는 이름을 가진 사막이 있다면
잎새라는 이름을 가진 심해가 있다면
잎새라는 이름의 탱크가 있다면
잎새라는 이름의 테러리스트가 있다면
잎새라는 이름의 전쟁이 있다면
잎새라는 이름을 가진 군인이 있다면
내가 기다리는 곳까지 와서
맑은 차를 마시다가 잠이 들 거야
잎새라는 이름을 가진 잘 차려진 저녁
잎새라는 이름을 가진 잘 저문 저녁
잎새라는 이름을 가진 잘 여문 밤
별이 새처럼 지저귀는 언덕에서
잠드는 해도 잎새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면
잠든 해 별의 먼지 아래
잎새라는 이름을 가진 당신이 있다면
얼마나 순한 눈썹을 당신은 가지고 있을까
잎새라는 이름을 가진
이미 뭉개진 꽃의 세월이 있다면
잎새라는 이름의 자전거를 타고
우주를 달리면서 세월은
잎새, 잎새라고 속삭이지 않을까
너의 눈 속에 나는 있다
- 허수경 / 시집 『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지성사, 1992) -
나는 그렇게 있다 너의 눈 속에
꽃이여, 네가 이 지상을 떠날 때 너를 바라보던 내 눈 속에
너는 있다
다람쥐여, 연인이여 네가 바삐 겨울 양식을 위하여 도심의 찻길을 건너다 차에 치일 때
바라보던 내 눈 안에 경악하던 내 눈 안에
너는 있다
저녁 퇴근길 밀려오던 차 안에서 고래고래 혼자 고함을 치던 너의 입안에서
피던 꽃들이 고개를 낮추고 죽어갈 때
고속도로를 달려가다 달려가다 싣고 가던
얼어붙은 명태들을 다 쏟아내고 나자빠져 있던 대형 화물차의
하늘로 향한 바퀴 속에 명태의 눈 안에
나는 있다
나는 그렇게 있다 미친 듯 타들어가던 도시 주변의 산림 속에
오래된 과거의 마을을 살아가던 내일이면 도살될 돼지의 검은 털 속에
바다를 건너오던 열대과일과 바다 저편에 아직도 푸르고도 너른 잎을 가진
과일의 어미들 그 흔들거리던 혈관 속에
나는 있다 오래된 노래를 흥얼거리며 뻘게를 찾는 바닷가
작은 남자와 그 아이들의 눈 속에 나는 있다 해마다
오는 해일과 홍수 속에 뻘밭과 파괴 속에
검은 물소가 건너가는 수렁 속에
과거에도 내 눈은 그곳에 있었고
과거에도 너의 눈은 내 눈 속에 있어서
우리의 여관인 자연은 우리들의 눈으로
땅 밑에 물 밑에 어두운 등불을 켜두었다
컴컴한 곳에서 아주 작은 빛이 나올 때
너의 눈빛 그 속에 나는 있다
미약한 약속의 생이었다
실핏줄처럼 가는 약속의 등불이었다
봄날은 간다
- 허수경 / 시집 『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지성사, 1992) -
사카린 같이 스며들던 상처야
박분의 햇살아
연분홍 졸음 같은 낮술
마음 졸이던 소풍아
안타까움 보다 더 광포한 세월아
순교의 순정아
나 이제 시시껄렁으로 가려고 하네
시시껄렁이 나를 먹여살릴 때까지.
<詩評> : '그대'는 어떻게 '당신'이 되는가. 허수경(44) 시인은 "그대라는 자연의 달이 나에게 기대
와 저를 부빌 때"라고 한다. '사내'가 아름다울 때, 그 아름다움에 기댈 수 있을 때 '당신'이 되기도
다. 부빈다는 것, 기댄다는 것, 그것은 다정(多情)이고 병(病)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병자처럼 당신
묻은 마음의 무덤에 벌초하러 간다. 사실은 슬픔으로 이어진 '살아옴의 상처'와,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을 추억하며 한 병의 맨 술을 마시는 중이리라. 백수광부처럼 돌아올 수 없는 강을
훌쩍 건너가 버린 당신! 당신이 먼저 당도해버린 그곳은 나 또한 혼자서 가야 할 먼 집이다. 그러니
남겨진 나는 참혹할밖에.
참혹은 '당신'으로 상징되는 모든 것들이 불러일으키는 총체적 참혹이다. 사랑을 떠나 보낸 실연의
참혹, 아버지를 여읜 망부의 참혹, 신념을 잃은 한 시대의 참혹.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고
무를 수도 없는, 죄다 마음에 묻어야 하는 당신들이다. 그런 당신을 웃으면서 울면서 혹은 취해서 부
르는 이 시의 언어는 언어 이전이거나 언어 이후다. 단속적인 말줄임표와 쉼표, 어쩔 수 없이 새어
나오는 '킥킥'이라는 의성어에는, 참혹인 줄 알면서도 참혹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자의 내면풍경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나와 당신, 사랑의 마음과 마음의 무덤, 환후와 치병이 '각각 따로'이기에, 당신과 함께했던 세월과
사랑과 상처와 그 상처의 몸이 모두 적요이고 울음이다. 그런 울음을 짊어지고 가는 시인, 세간의 혼
몽을 잘 먹고 잘 노래하는 시인이야말로 자신의 불우함을 다해 노래하는 시인의 지복(至福)일 터, 이
시는 그 지복의 한 자락을 걸쳐 입고 있다.
허수경 시인은 울음 같은, 비명 같은, 취생몽사 같은 시집 '혼자 가는 먼 집'을 낸 직후 독일로 휘리
릭 날아가버렸다. 1990년대 초반이었고, 시인의 생부가 돌아가시고 난 직후였다. 동안(童顔)에, 대책
없는 맨몸이었다. 고고학을 공부한다 했다. 잘살고 있다고 했다. 독일로 날아간 지 벌써 16년째다.
당신… 당신이라는 말은 언제 불러도 참 좋다, 그리고 참 참혹하다, 킥킥 당신….
(정끝별·시인, 조선일보 2008.02.11)
* 허수경(1964-2018)
1964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자라고 대학(경상대 국문학과) 역시 그곳에서 다녔다. 오
래된 도시, 그 진주가 도시에 대한 원체험이었다. 낮은 한옥들, 골목들, 그 사이사이에 있던 오래된
식당들과 주점들. 그 인간의 도시에서 새어나오던 불빛들이 내 정서의 근간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밥을 벌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고 그 무렵에 시인이 되었다. 처음에는 봉천동에서 살다가 방송국 스크
립터 생활을 하면서 이태원, 원당, 광화문 근처에서 셋방을 얻어 살기도 했다. 1992년 늦가을 독일로
왔다. 나에게는 집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셋방 아니면 기숙사 방이 내 삶의 거처였다. 작은 방 하나
만을 지상에 얻어놓고 유랑을 하는 것처럼 독일에서 살면서 공부했고, 여름방학이면 그 방마저 독일
에 두고 오리엔트로 발굴을 하러 가기도 했다. 발굴장의 숙소는 텐트이거나 여러 명이 함께 지내는
임시로 지어진 방이었다. 발굴을 하면서, 폐허가 된 옛 도시를 경험하면서, 인간의 도시들은 영원하
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았다. 도시뿐 아니라 우리 모두 이 지상에서 영원히 거처하지 못할 거라
는 것도 사무치게 알았다. (뮌스터 대학교 대학원 고대근동고고학 박사)
서울에서 살 때 두 권의 시집『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혼자 가는 먼 집』을 발표했다.
두번째 시집인『혼자 가는 먼 집』의 제목을 정할 때 그것이 어쩌면 나라는 자아의 미래가 될 것이라
는 예감이 들었다. 독일에서 살면서 세번째 시집『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를 내었을 때 이미 나는
참 많은 폐허 도시를 보고 난 뒤였다. 나는 사라지는 모든 것들이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짐작
했다. 물질이든 생명이든 유한한 주기를 살다가 사라져갈 때 그들의 영혼은 어디인가에 남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뮌스터 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학교라는 제도 속에서 공부하기를 멈추고
글쓰기로 돌아왔다. 그뒤로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산문집 『모래도시를 찾아서』 『너 없이 걸었다』, 장편소설 『박하』
『아틀란티스야, 잘 가』 『모래도시』, 동화책『가로미와 늘메 이야기』 『마루호리의 비밀』, 번역
서 『슬픈 란돌린』 『끝없는 이야기』 『사랑하기 위한 일곱 번의 시도』 『그림 형제 동화집』 등
을 펴냈다. 동서문학상, 전숙희문학상, 이육사문학상을 수상했다. 2018년 10월 3일 타계했다.
시인 허수경은? / 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