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기쁨 - 봄 숲에서
- 정현종 / 시집 <거지와 광인>, 1985 -
해는 출렁거리는 빛으로
내려오며
제 빛에 겨워 흘러 넘친다.
모든 초록, 모든 꽃들이
왕관이 되어
자기의 왕관인 초록과 꽃들에게
웃는다. 비유의 아버지답게
초록의 샘답게
하늘의 푸른 넓이를 다해 웃는다.
하늘 전체가 그냥 기쁨이며 신전이다.
해여, 푸른 하늘이여.
그 빛에, 그 공기에
취해 찰랑대는 자기의 즙에 겨운,
공중에 뜬 물인
나뭇가지들의 초록 기쁨이여.
흙은 그리고 깊은 데서
큰 향기로운 눈동자를 굴리며
넌지시 주고받으며
싱글거린다.
오, 이 향기
싱글거리는 흙의 향기
내 코에 댄 깔대기와도 같은
하늘의, 향기
나물들의 향기
나는 별아저씨
- 정현종 / 시집 <고통의 축제>, 1974 -
나는 별아저씨
별아 나를 삼촌이라 불러다오
별아 나는 너의 삼촌
나는 별아저씨.
나는 바람남편
바람아 나를 서방이라고 불러다오
너와 나는 마음이 아주 잘 맞아
나는 바람남편이지.
나는 그리고 침묵의 아들
어머니이신 침묵
언어의 하느님이신 침묵의
돔(Dome) 아래서
나는 예배한다
우리의 생(生)은 침묵
우리의 죽음은 말의 시작
이 천하(天下) 못된 사랑을 보아라
나는 별아저씨
바람남편이지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 정현종 / 시집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1989 -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 작품해설 : 황금광맥, 일확천금, 인생역전, 일장춘몽이 우후죽순 딸려 나와서일까. 노다지라는 말
은 우리를 울렁이게 한다. 근대 조선에 금광 개발이 시작되던 시절, 금덩이가 발견되면 미국인들이
다급히 외쳤던 "노터치(no touch)"를 노다지라 들었던 데서 노다지가 유래했다는 설(說)이 있다. 경
상도 말로 '노다지'는 '언제나'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노다지, 노다지, 되뇌노라면 '노다
지 캐러 가자'고 말 건네고 싶어지고 '이다지 노다지 꽃다지 캐러 가자' '그다지 마구다지 도라지 캐
러 가자'가 노래처럼 입에 따라 붙곤 한다. "모든 순간이 다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
다. 그 꽃봉오리들 다아- 노다지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으니"('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모든
순간을 꽃 본 듯이 해야 하고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니 세상에서 제일 부자는
모든 순간마다 노다지를 캐는 사람이고,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늘 지금의 꽃봉오리를 따는 사
람일 게다. "마악 피어나려고 하는/ 꽃송이,/ 그 위에 앉아 있는 지금,"('이게 무슨 시간입니까'),
바로 지금, "지층의 금과도 같은/ (아, 노다지를 찾았다!)"('몸을 꿰뚫는 쓰라림과도 같은')고 외칠
수 있기를. < 정끝별 | 시인·문학평론가 >
* 정현종(鄭玄宗, 1939~ )
출생 : 1939. 12. 17. 서울특별시
학력 : 연세대학교 철학과 학사
수상 : 2015년 은관문화훈장, 2015년 제19회 만해문예대상
경력 : 2012~ 대한민국예술원 문학분과 회원
2002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앤젤레스캠퍼스 방문교수
1939년 12월 17일 서울 출생.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서울신문사 문화부 기자, 서울예전 문예
창작과 교수를 거쳐 연세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1965년 『현대문학』에 시 「여름과 겨울의
노래」 등으로 추천 완료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이후 『60년대 사화집』(1965), 『사계(四季)』(1966)
등의 동인으로 참가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했고, 1972년 첫 시집 『사물의 꿈』으로 문단의 주
목을 받았다. 그의 초기시는 전후의 허무주의, 토착적 서정시를 극복하고, 시인의 꿈과 사물의 꿈의
긴장관계 속에서, 현실의 고통을 넘어설 수 있는 초월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그의 시는 고통/축제, 물/불, 무거움/가벼움, 슬픔/기쁨 등과 같이 상반되는 정서의 갈등과 불화를
노래하면서도 현실을 꿈으로, 고통을 기쁨으로 변형시키고자 하는 정신의 역동적 긴장을 탐구하였는
데, 이러한 시적 탐구는 제2시집 『나는 별 아저씨』(1978), 제3시집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1984)까지 지속된다. 「고통의 축제」, 「공중에 떠 있는 것들 3」, 「술잔을 들며」 등이 이 시기
의 대표작이다. 그러나 제3시집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1989)를 고비로 하여, 그는 현실과 꿈
의 갈등보다는 생명현상과의 내적 교감, 자연의 경이감, 생명의 황홀감을 노래하면서 갈등보다는 화
해의 세계를 지향하는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시적 관심의 변화는 제5시집 『한 꽃송이』(1992)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문명과 인
공(人工)은 인간을 억압하는 반면, 자연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척도라는 내용의 시 「자
(尺)」는 그의 시적 관심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그의 시는 서정시의 전통을 혁신하고
새로운 현대시의 가능성을 개척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이 밖에 『세상의 나무들』(1995), 『이
슬』(1996), 『갈증이며 샘물인』(1999), 『견딜 수 없어』(2003), 『광휘의 속삭임』(2008) 등의 시
집을 발간하였다. 시집 외에도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1974), 『숨과 꿈』(1982), 『프로스트 시
선』(1973) 등을 비롯한 여러 산문집‧시론집‧번역서를 냈으며, 『고통의 축제』(1974)를 위시한 여러
권의 시선집이 있다.
학력사항 : 연세대학교 - 철학 학사
경력사항 : 1965년 ~ 60년대 사화집 동인 활동, 1966년 ~ 사계 동인 활동,
서울신문사 문화부 기자,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 교수
작품목록 : 사물의 꿈, 고통의 축제,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숨과 꿈, 관심과 시각, 시의 이해, 떨어
져도 튀는 공처럼, 거지와 광인, 나는 별 아저씨,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생명의 황홀, 한 꽃송이,
세상의 나무들, 이슬갈증이며 샘물인, 환합니다, 견딜 수 없네, 교감, 천둥을 기리는 노래, 초록기
쁨, 고통의축제2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정현종) / 시낭송(무지개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