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만 사랑 노래
- 황동규 /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1978 -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 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환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 앉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기항지 1
- 황동규 / <현대문학>, 1967 -
걸어서 항구(港口)에 도착했다.
길게 부는 한지(寒地)의 바람
바다 앞의 집들을 흔들고
긴 눈 내릴 듯
낮게 낮게 비치는 불빛
지전(紙錢)에 그려진 반듯한 그림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반쯤 탄 담배를 그림자처럼 꺼 버리고
조용한 마음으로
배 있는 데로 내려간다.
정박중의 어두운 용골(龍骨)들이
모두 고개를 들고
항구의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에는 수삼개(數三個)의 눈송이
하늘의 새들이 따르고 있었다.
풍장 1
- 황동규 / <악어를 조심하라고>, 1986 -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白金)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다오
바람을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다오.
즐거운 편지
- 황동규 / <현대문학>, 1958 / <삼남에 내리는 눈> 민음사, 2002 -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
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
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 황동규(黃東奎), 1938~ )
황동규 : 시인, 명예교수
출생 : 1938. 평안남도 숙천
소속 : 서울대학교(명예교수)
가족 : 딸 황시내, 아버지 황순원
학력 : 에든버러대학교 영어영문학 박사
데뷔 : 1958년 현대문학 '시월' 등단
수상 : 2016년 제26회 호암상 예술상
관련정보 : 네이버[지식백과] - 서정의 세계를 노래하는 시인
1938년 4월 9일 평안남도 숙천 출생. 서울대 영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서울대 영문과 교수
를 역임하였다. 1958년 『현대문학』에서 시 「시월」, 「즐거운 편지」 등으로 추천받아 문단에 등
단하였다. 시집으로 『어떤 개인 날』(1961), 『비가』(1965),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
다』(1978), 『악어를 조심하라고』(1986), 『몰운대행』(1991), 『미시령 큰바람』(1993), 『외계
인』(1997), 『버클리풍의 사랑노래』(2000)등이 있으며, 『사랑의 뿌리』(1976), 『겨울의 노래』
(1979), 『나의 시의 빛과 그늘』(1994), 『젖은 손으로 돌아보라』(2001), 『삶의 향기 몇점』
(2008) 등의 산문집이 있다.
1998년 『황동규 시 전집』이 간행되었다. 그의 시 세계는 초기 서정시편에서 출발하여 「비가」 연
작시를 거치면서 심화되고, 1970년대의 현실을 반영하는 「겨울의 빛」을 거치며 극서정시로 나아가
고, 여기서 다시 선시풍의 연작시 「풍장」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초기 시인 「시월」이나
「즐거운 편지」 등은 그리움과 기다림이 담긴 적막하고 쓸쓸한 내면풍경을 담은 시이면서 시인의 남
다른 개성이 엿보이는 시이다. 그는 「비가」를 통해 우울한 내면세계의 묘사에서 현실의 고뇌를 껴
안으려는 정열을 드러낸다. 「비가」는 방황하는 자, 혹은 내몰린 자의 언어를 통해 자아와 현실 사
이의 갈등을 드러내고 있는 작품으로, 시인이 구체적인 현실세계로 진입하는 계기라고 볼 수 있다.
이후 그의 시에는 자아와 현실 사이의 갈등이 도사리고 있으며, 꿈과 이상을 억압하는 현실에 대한
부정이 시적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그는 현실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 채 고통스러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비극적 아름다움을 시적 주제로 삼는다. 「태평가」를 비롯해 「삼남에 내리는 눈」,
「열하일기」는 이러한 주제를 담고 있으면서도 감정을 통어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반어적 울림으로
드러난 경우이다.
시적 대상에 대한 거리 유지는 그가 현실에 함몰되지 않도록 하는 방어기제이자 시적 긴장을 유지시
키는 근원적 힘이라고 여겨진다. 일그러졌거나 위악적인 자아의 모습은 사회구조에 대한 시적 거부의
의미를 지니며, 파편화되고 공포에 질린 모습은 부조리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시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읽히기 때문이다. 고통스런 시대를 살아가는 아픔이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의 전편을
휘감고 있다면 「겨울의 빛」은 그의 시가 합치되고 또한 분기되는 갈림길이다. 초기 시의 눈과 겨울
의 이미지들이 시인 혼자만의 것이었다면 「겨울의 빛」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풍장 연작시에서는 삶과 죽음을 하나로 감싸안으며 허무주의를 초극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죽음에 대한 반추로써 삶의 무게를 덜고, 나아가 죽음조차 길들이겠다는 의지의 자유분방한 표현이
「풍장」 연작인 것이다. 황동규의 시적 어법은 「견딜 수 없이 가벼운 존재들」에 이르러 더욱 유연
함을 얻는데, 이 시가 드러내는 일상적이고 자유분방한 시적 짜임새는 주체적 삶에 대한 새로운 자각
을 담고 있다. 그 존재의 발견은 크고 위대한 것들에게서가 아니라 한없이 작고 가벼운 것에서 얻어
진다. 가볍다는 것에서 자유로움을 얻고, 그 자유로움으로써 속박을 벗어나는 시적 깨달음은 초기 시
의 현실과 자아 사이의 내적 갈등을 담은 비극적 아름다움의 세계를 거쳐 다져진 원숙함이다.
조그만 사랑 노래(황동규) / 시낭송(이서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