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길62_2(행궁2, 2024/10/05, A lover's Concerto / Kelly Chen)
이름없는풀뿌리2024. 10. 6. 23:15
요즈음 – 산성길62(행궁2) –
무너진 흔적마저 땅 속에 묻혔있고
철없는 관람객들 건들건들 지나는데
意志만 그림 그린 듯 바위 박혀 있었다
배달9221/개천5922/단기4357/서기2024/10/05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산성길62(행궁2)(1)
오늘 나선 건 자료를 보니
자주쓴풀이 나왔을 것 같아
아픈 우측 엄지발가락에 테이프를 동여매고 나서다.
집 뒤 단대공원에 오르니 죄측 발아래 재개발 현장의 항타기 소리 요란.
토요일이라 누비길에 부산한 산객들.
(2)
남옹성 10암문에서 가을 하늘을 바라보다가
개원사로 내려오니 중앙주차장에 문화행사로 쿵쿵.
앉아서 볼까 하다가
다음 주 고교동창들 산성온다기에 해설사로 자창한 마당에
행궁을 둘러보려 행궁으로 向.
한남루, 통일신라건물지, 외행전(하궐), 내행전(상궐), 좌승당, 재덕당, 이위정...
차례로 둘러보고, 그 건물들의 내력을 되새기다 보니
재덕당 옆에 반석이란 바위가 있어 내력을 보니
산성에 부임한 어느 수어사가 호란과 같은 외세의 침략에 흔들리지 않는
반석과 같은 나라가 되라는 의미로 새겼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병호란 때 산성 항쟁시 최대의 패배지였던
법화골전투의 지휘소 북문을
다시는 패배하지 말자는 의미로
전승문(全勝門)이라 한 것도 같은 의미는 아닐까?
배달9221/개천5922/단기4357/서기2024/10/05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13) 지금 산성은 UNESCO 세계문화유산 등재 10주년 기념 축재 중
14) 오늘은 다음 주 고교동창들 해설 사전 준비로 행궁을 둘러보기로 했다.(12:35)
15) 외행전(外行殿, 하궐) 앞 마당에서 발견된 통일신라 주장성(벽 두께 2M) 흔적
16) 외행전(하궐) : 임금님이 집무를 보시는 곳(광주 목사가 좌승당이 짓기 전까지 이 곳에서 집무)
17) 내행전(內行殿, 상궐) : 임금님이 주무시는 곳
18) 재덕당(在德堂, 임금님이 재를 올리거나 덕을 쌓으려 독서하던 곳)
19) 재덕당 옆 반석(盤石, 호란 당시 위기에 처한 종묘 사직을 반석처럼 튼튼히 지켜야 한다는 뜻)
20) 좌승당(坐勝堂, 광주부윤 집무실)
21) 이위정(以爲亭, 활터, 12:50)
* 남한산성 행궁(南漢山城 行宮)
남한산성 원성은 1624년(인조 2년)~1626년 (인조 4년) 사이에
개.증축 당시 축성되어 둘레 7,545m다.
원성 내부는 2,135,752㎡(2.1㎢)로서 대략 627,200평으로 측량되었다
바티칸시국이 0.44㎢이므로 바티칸시국의 4.8배 면적이다.
남한산성 원성내 행궁(行宮)은
왕이 본궁 밖으로 나아가 머무는 임시장소로서의 궁궐을 말한다.
이궁(離宮) 또는 행재소(行在所), 행궐(行闕)이라고도 했다.
행궁에는 낙생행궁, 세조가 다니던 온양행궁, 임진왜란 때 선조가 피난했던 의주행궁,
인조 때 건립한 광주행궁(남한행궁), 강화행궁, 부안행궁,
숙종 때 북한산성에 건립한 양주행궁, 정조 때 건립한 화성행궁과 전주행궁이 있었다.
명례궁이라는 별궁도 전국 각처에 있었다.
님한산성 원성은 1624년(인조 2년) ~ 1626년 (인조 4년) 사이에
개,증축 당시 축성되어 둘레 7,545m다.
원성 내부는 2,135,752m3로서 대략 627,200평으로 측량되었는데
광주 행궁, 남한산성 행궁이라 불리는
행궁은 원성 축성시기인 1624년(인조 2) 7월에 착공하여 1626년 11월에 완공된
조선시대의 별궁(別宮) 또는 이궁(離宮)으로, 후금(後金)의 침입에 대비해
백제 때의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해 축조하였다. 유사시에 임금이
임시로 머무르던 궁궐의 하나로, 병자호란 당시에는 임시 궁궐로 사용되었다.
《남한지(南漢誌)》에는 숙종·영조·정조가 영릉(寧陵)을 참배할 때 이곳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는데, 후대에는 지방관인 유수(留守)의 집무실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한산성의 행궁에 대한 발굴조사가 1999년 부터 한국토지공사 박물관에 의해서
시행되었다. 2007년까지 총 8차에 걸친 조사에서, 신라 시대 대형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통일신라 시대 대형 건물터는 동서 약 18m, 남북 53.5m 총 290평의 매우 큰 규모로,
안학궁의 외전이 정면 11칸 49m, 측면 4칸 16.3m로 약 242평이라는 것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굉장한 규모임을 알 수가 있다. 건물의 규모로 인해
궁궐로 쓰였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으나, 두꺼운 벽과 방충을 위한 시설이 갖추어진
건물의 구조를 볼 때 대체로 창고로 쓰였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같이 발견된 기와는 크기가 매우 큰데 무게가 보통의 기와의 4배가 넘어
암기와는 한 장이 약 19kg이고, 숫키와는 약 15kg이나 된다.
이것은 조선 시대의 중기와가 약 4 kg, 3.3kg인 것에 비하면 상당한 무게이다.
남한산성 행궁은 다른 행궁과 달리
종묘와 사직에 해당하는 좌전(左殿)과 우실(右室)을 갖추었다.
행궁의 규모는 상궐(上闕) 73칸, 하궐(下闕) 154칸으로 모두 227칸의 규모이다.
상궐은 행궁의 내행전으로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평면적 180.4㎡(55평)이다.
그 중 왕의 침전인 상방이 좌우 각각 2칸씩이고,
중앙의 대청이 6칸, 4면의 퇴칸이 18칸으로 모두 28칸이다.
초석(礎石)은 37개가 남아 있는데,
화강석재로서 초석 상면에 따로 주좌(柱坐)를 만들지 않았으며,
건물기둥이 있었던 흔적이 희미하게나마 둥글게 나 있는 것으로 보아
원형기둥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초석의 크기는 균일하지 않으며,
그 형태 또한 장방형, 정방형, 부정형 등으로 다양하다.
건물 중앙의 어칸대청(御間大廳)으로 사용한 공간은 초석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정면 북퇴칸 내주(內柱) 초석은 훼손되었다.
기단은 건물 정면 동편기단이 이중기단이며, 남북·서편은 단일기단이다.
기단의 높이는 약 80㎝로 가구식(架構式) 기단구조로 축조되었다.
기단토는 할석과 잡석·회덩이·와편 등을 황갈색 점토로 섞어서 다짐했다.
기단 장대석인 지대석(地帶石)·면석(面石)·갑석(甲石)은 훼손되어 없어지고
기단 하부의 적심석열만 남아 있다.
온돌은 상궐 건물지 내 남·북퇴간 옆 협간에서 각 2개소씩 모두 4개소가 발견되었다.
이 온돌시설들은 건물 기단토를 구축한 후 되파기하여 축조하였다. 상궐의 담장지는
건물을 중심으로 내곽과 외곽의 2중으로 구축되었으며, 담장 폭은 1m 내외이다.
하궐은 상궐의 외전인 외행전으로서 상궐 동편 삼문 밖에 있으며,
해발 369m로서 상궐지에 비해 약 6m 낮은 위치에 있다.
하궐은 상궐과 함께 1624년(인조 2) 총융사 이서(李曙)가
남한산성 수축과 함께 시작하여 이듬해에 준공되었다.
서쪽 담의 문으로 일장각(日長閣)과 통하였고, 동쪽의 정문이 한남루이다.
하궐지의 규모는 동서 30m, 남북 70m, 전체 면적 2,100㎡(635평)으로서
발굴조사 결과 하궐지는 상당 부분이 훼손되었음이 밝혀졌다.
상궐과 하궐을 포함하여 행궁을 구성했던 부속시설로 좌전(左殿), 우실(右室), 재덕당(在德堂),
한남루(漢南樓), 인화관(人和館) 등이 있었다.
행궁 및 부속시설은 인조 이후 건립된 것으로 19세기 초까지 계속 증축, 보수되었다.
남한산성은 한 번도 함락당하지 않은 성이다.
몽고군의 1, 2차 침입 시 몇 번의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청 태종 13만 대군의 공격도 막아냈다.
인조대왕이 47일 씩이나 버티다 삼전도에서 항복한 것은 강화도로 피신한 왕자가 붙잡혔고
성안의 식량이 바닥난 때문이지 성이 무너진 것은 아니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가장 큰 성곽이다. 중국의 (만리)장성은 그냥 성벽일 뿐이다.
성안에 사람이 살고 궁궐과 사직단, 관아의 집무소가 있는 성으로는 세계적으로 특이하다.
자연의 지세가 아름답고 천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전국 20여개의 행궁 중에서 사직단을 모신 것은 남한산성이 유일하다.
2007년 발굴 과정에서 신라시대의 대형 기왓장이 무더기로 470장 이상 발견 되었다.
큰 것은 무게가 19kg이나 되고 세계에서 가장 큰 기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