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여행과산행길

가을 덕유(德裕)의 품에 안기다. (05/10/15)

이름없는풀뿌리 2015. 7. 13. 13:36

 

 

 

가을 덕유(德裕)의 품에 안기다.

 

(1) 종주 계획

지난여름 [백련사-향적봉-중봉]을 다녀와 느낀 덕유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가을에는 [향적봉-남덕유-육십령]을 꼭 종주해보리라고 다짐했었다. 여름 덕유는 야생화가 이룬 천상(天上)의 풍광(風光)과 더불어 피어나는 운무(雲霧) 속의 푸르른 평전의 수해(樹海)가 압권(壓卷)이었는데 가을 덕유의 붉은 단풍에 덮인 아름다움은 어떠한 모습일까?라는 그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던 차에 어느 날 정효근 지점장님이 나의 사무실에 방문하셔서 지난 여름덕유의 풍광과 가을 종주계획에 대하여 말씀드리니 그도 산행이라면 너무 좋아 하는지라 선뜻 동행하자고 하신다. 이미 달포 전에 약속해 둔 터였는데 준비물(이동, 귀가, 음식등)은 지점장님께서 책임 짓겠다고까지 하셨다. 산맥의 반대편으로 넘어가야하는 종주라면 이동(移動)이 문제인데 이동문제 뿐 아니고 먹거리까지 알아서 해결하겠다고 말씀하시니 이제 오로지 종주도중 포기하지 않을 의지(意志)와 자료조사만이 남은 셈이었다.

 

(2) 이동과 준비

그의 계획인즉 전날 무주리조트에서 지점 직원들의 단합대회를 행하고, 그들 중 일부는 동엽령까지만 갔다가 설천봉으로 돌아가 곤돌라로 하산하여 차량(車輛)으로 육십령에서 종주자들을 기다릴 예정이라는 것이었데, 며칠 전 정지점장님은 준비물과 상세지도까지 복사해 오셔서 그러한 내용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그리하여 우리 회사 이원복 상무와 정효근지점장 그리고 나, 이렇게 우리 셋은 덕유 종주를 감행하기로 결의하고 05/10/15 07:00에 대전에서 차량으로 1시간 만에 무주 땅을 밟았다.


덕유산은 고도(高度)가 높은 산간이어서 그런지 차에서 내리니 쌀쌀하다. 바람막이 외투를 뒤집어쓰고서야 한기(寒氣)를 피할 수 있었다. 거기에 도착하니 신한은행 직원들이 나와 있었고 그들과 수인사를 나눈 후 곤돌라 탑승장으로 갔다. 편도 6천원, 왕복 1만원이었는데 곤돌라 운행시간은 09:30-16:30까지란다. 공중에 덜렁 매달린 곤돌라에서 덕유의 풍광(風光)을 바라보니 몇 년 전 이태리 여행 중 까프리섬에 가 곤돌라를 탔던 생각이 났다. 그 때 여행기에 “까마득한 발아래 지중해로 물새들이 추락하여 갔다.”라고 썼던 것 같다. 까프리의 곤돌라는 이곳처럼 유개식(有蓋式)이 아니고 무개식(無蓋式)이어서 파르란 지중해를 보며 현기증을 느꼈는데 1000m이상의 고도에 다다르니 무주 리조트 스키장의 황량한 주변 수목들이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들어가고 있어 여기서도 역시 현기증이 일어 온다. 10여분 만에 설천봉(1232m)에 도착하니 한기(寒氣)가 더더욱 느껴진다.

 

(3) 설천봉-향적봉(1614m)  [09:40-09:50, 10분, 0.6km]

설천봉에서 스키장을 바라보니 인간들의 상혼(商魂)이 파헤친 덕유의 허리가 안쓰럽다. 덕유의 허리는 어쩌면 그러한 막무가내식의 난도질에 말 한마디 못하고 통증을 감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말을 하는 나도 사실 그러한 인간들이 설치한 곤돌라를 타고 왔으므로 이율배반적이 될 것이다. 자연을 사랑하는 척하면서, 또한 인간의 무지(無知)를 탓하면서 그러한 무지몽매한 인간들의 장단에 춤추는 나의 모순이여! 그러나 어찌하랴!


덕유종주를 계획하면서 대부분 산행기를 읽어보니 이렇게 하지 않으면 30여km를 단 하루에 주파할 자신이 없었다. 대부분 종주자들은 향적봉 대피소나 삿갓재 대피소에서 일박(一泊)을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싫지만 눈을 질끈 감고 곤돌라를 탔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난도질 당한 덕유의 허리를 내려다 보니 곤돌라로 이동하는 나 자신이 싫었다. “발아래 산이 있다.”고 정지점장님이 시적(詩的)인 감회에 젖으신다. 설천봉에서 향적봉 가는 길은 등산로 정비로 어수선하다. 그러한 어수선함은 주목군락과 관목이 어우러진 풍광을 감상할 여유를 주지 않고 그저 앞만 보고 가게 만들었는데 조금 가니 지난여름 기대었던 향적봉에 닿았다.


(4) 향적봉-중봉(1525m)  [09:50-10:30, +40분=50분, +1.1=1.7km]

정상의 바람이 의외로 세차다. 향적봉은 평지보다 5-6도 낮고 무주 지방은 타방(他邦)보다 2-3도 낮다 했으니 우리가 느끼는 체감기온이 7-9도 낮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 모르겠다. 모자들이 바람에 날아가고 비명소리가 들린다. 덕유는 그렇게 곤돌라로 단박에 그의 정수리를 범한 우리를 질책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계(視界)는 너무 좋았다. 덕유는 또한 그렇게 너그러운 모습으로 우리를 환영하여 주었다.


푸른 호수 같이 맑은 하늘은 한반도 전체가 눈에 들어 올듯 하였는데 東으로는 합천 가야산, 구미 금오산, 대구 팔공산까지 가물가물 보였고, 西으로는 마이산, 모악산, 대둔산, 계룡산등이 서로 팔을 잡고 늘어서 있었고, 南으로는 남덕유는 물론이고 지리산 천왕봉에서 반야봉에 이르는 능선이 병풍 같았고, 北으로는 적상산은 손에 잡힐 것 같고 속리산에서 내려온 대간(大幹)의 허리가 웅장하였다. 그러한 경치를 감상하며 산정에서 20여분 머물렀다. 정상 아래에는 그러한 주위 파노라마 사진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거기에 표시된 山들을 대부분 조망(眺望)할 수 있었으니 오늘 산행은 하늘이 도우시는 것 같았다. 덕유 종주의 백미는 경상, 전라의 양계를 이루는 능선에서 바라보는 조망(眺望)이라 했으니 그러한 조망을 충분히 만끽할 우리들은 행운아들이었던 것이다.


정상에서 사방을 조망한 후 산장으로 내려오며 보니 지난여름 덕유의 허리를 아름답게 수놓았던 야생화들은 그 현란한 모습을 대지에 파묻고 다만 바짝 말라버린 형체만 겨우 유지하고 있었다. 인생사가 다 그런 걸까? 왔다가 가고, 갔다가 오고 그런 중에 세월은 흐르고...  봄덕유는 철쭉꽃밭에서 해가 떠서 철쭉꽃밭으로 해가 지는 풍광을 연출하고, 여름덕유는 녹음과 원추리 꽃으로 천상의 화원을 만들며. 가을덕유는 붉은 단풍의 바다가 푸른 하늘과 조화롭고, 그리고 겨울덕유는 주목과 구상나무 군락에 백설의 세계를 연출하여 고산 특유의 설경(雪景)을 자아낸다고 한다. 이제 여름덕유와 가을덕유를 보았으니 봄덕유와 겨울덕유가 남은 셈인데 언젠가는 결행하리라. 향적봉 아래 산장에 많은 등산객이 쉬어가고 있었다. 우리도 여기서 다시 10여분 쉬어갔다.


중봉으로 가는 길에 서 있는 주목(朱木)들이 반겨준다. 이파리 한 장 걸치고 있지 않아 생명이 끊어진 것은 확실하지만 고고한 형상으로 그러한 죽음이 차라리 자랑인 세월이 걸려있는 고사주목, 주변의 쭈그러진 풀잎들을 아우르며 울울창창한 푸르름으로 고고히 서있는 생주목, 한 방울의 자양분도 없을 것 같은 바위 위에 또아리를 틀고 앉은 특이주목등등... 어느 하나 바쁜 발길을 잡아두지 않는 것이 없었다.

 

(5) 중봉-송계삼거리(1420m)  [10:30-10:45, +15분=1시간5분, +1.0=2.7km]

그렇게 주목과 구상나무 군락들에 눈 맞춤하며 중봉에 도착하니 중봉아래 동엽령으로 가는 능선에는 또 다른 놀라움이 펼쳐졌다. 그 능선의 수해(樹海)는 어느덧 핏빛 단풍으로 또 하나의 비경(秘境)을 펼쳐보였다. 그 단풍의 바다너머로 무룡산, 삿갓봉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고, 남덕유, 장수덕유(서봉)가 희미하게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중봉을 내려오며 바라보는 북축 산릉(山陵)엔 구상나무 군락이 단풍의 바다 속에 고고한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었고 남측 산릉엔 역시 불타오르는 관목의 바다가 아스라했는데 그들은 5부 능선 쯤에서 더 전진하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었다. 5부 능선 아래로는 녹색의 바다였다. 송계 삼거리에 다다르니 동측으로는 황경재를 거쳐 거창 송계사, 송계매표소로 하산하는 6.5km의 길이요, 우리가 걷는 이 능선이 바로 백두대간의 주능선으로 경남과 전북의 경계란다.


(6) 송계삼거리-동엽령(1320m)  [10:45-11:30, +45분=1시간50분, +2.2=4.9km]

완만한 능선에 관목 숲이 깔려있고 그 아래 야생화들이 말라 붙어있는 모습을 보니 이렇게 완만한 능선일지라도 해발 1000m이상의 고지대임을 실감하겠다. 경남 쪽을 바라보니 거창들녘에 황금물결이 넘실대고 있었고, 전북쪽을 바라보니 대진고속국도가 덕유가 거느린 군소봉의 능선을 쭉 가르며 남녘으로 뻗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다리를 놓고 길을 놓음에 있어 산하(山河)의 배를 가르고 팔 다리를 서슴없이 자른다. 수억 년을 지켜온 그들에겐 한마디 묻지도 않고 인간들끼리 몇 마디 수군거리고는 해부(解剖)하고 철추(鐵錘)를 박고 가슴을 절개한다. 그런 행위는 언젠가는 자연의 보복을 받으리라. 최근의 기후온난화, 지진 등이 그 전주곡이라면 기우일까?


그렇게 경남과 전북의 경계선을 밟으며 사념(思念)에 젖어 가노라니 동엽령에 다다랐다. 여기서 잠시 휴식하며 나와 이상무, 정지점장, 김부지점장 이렇게 네 명만 남덕유로 향하기로 하고 다른 사람들은 향적봉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서측으로 용추폭포가 있고 안성매표소가 4.4km거리에 있다는데 동엽령은 예전부터 오른쪽의 안성과 왼쪽의 거창을 넘다들던 고개였으며, 현재에는 안성의 칠연계곡에서 이곳 동엽령으로 오르는 길이 덕유산을 찾는 등산객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등산로 중의 하나란다.


(7) 동엽령-무룡산(1491.9m) [11:30-13:45, +2시간15분=4시간5분, +4.1=9.0km]

무룡산 가는 길도 역시 고산지대 풍광이다. 다만 주목과 구상나무 군락은 [향적봉-중봉] 구간에만 나타나고 이곳에는 나타나지 읺았다. 그래도 관목 숲은 전설 속을 걷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무룡산에 도착하여 앞을 보니 서봉에서 남덕유산, 삿갓봉을 거쳐 무룡산에 이르는 능선이 마치 한 마리의 거대한 용이 꿈틀거리듯 치달려 간다. 뒤돌아보면 그렇게 치달려 온 용이 백암봉, 중봉을 지나 향적봉을 향해 휘몰아치듯이 달려가고 있었다. 우리가 돌아 온 중봉이며 향적봉이 손에 잡힐 듯 앞에 있다. “용이 춤추는 듯한 산”에서 유래 했다는 무룡산 정상에서 30분간 중식을 하기로 했다. 거창에서 올라오신 초로(初老)의 등산객 한 분이 주변 산세를 자세히 설명해주신다. 우리가 남덕유, 서봉을 거쳐 육십령까지 가려 한다 하니 무리가 아니냐고 하신다. 그 분과 함께 중식을 하려니 서로들 각자의 배낭에서 꺼내 권한다. 속셈인즉 배낭 무게를 줄이려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알고는 서로 웃었다. 나는 4리터 물 4병을 준비했는데 아직 한통도 소비하지 못했다. 가을철이라 물소비량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물은 아끼기로 했다.


(8) 무룡산-삿갓재대피소-삿갓봉(1418.6m) [13:45-15:10, +1시간25분=5시간30분, +2.1=11.1km]

14:30 삿갓재 대피소 근처에 도착하여 조망하여보니 앞으로의 산세는 이제까지의 능선 길과는 달리 제법 오르막이 심하다. 각오를 단단히 하기 위하여 볼일을 보고 후일을 위하여 대피소를 살펴보았다. 호텔방이 따로 없다. 깨끗했다. 언젠가 아내와 함께 1박2일로 오고 싶은 충동이 일어온다. 동측으로는 거창 황점매표소가 3.4km요, 서측으로는 장수 땅의 원통사, 명천계곡, 명천리송이 나온다한다. 본격적인 산행을 하리라 다짐하며 오르막을 오르니 삿갓봉으로 오르는 길과 허리를 돌아 월성재로 가는 삼거리가 나왔는데 두 말 할 것 없이 모두들 경사가 급한 삿갓봉으로 향했다.


봉우리 하나라도 지나치기엔 고단함보다도 산(山)사랑이 훨씬 앞서 있다는 방증일까? 형상이 삿갓을 닮아 삿갓봉이라 했다는데 김삿갓(김병연)과 무슨 인연이라도 있는 걸까? 조부의 홍경래난 연루로 출세 길에 나서지 못한 그는 팔도 구석구석 안 가본 데가 없다는데 혹시 이곳에라도 올라와보지는 않았을까? 그의 시는 파격시(破格詩)가 많은데 한 수를 감상하고 가지 않을 수 없다.

                                           

天長去無執   花老蝶不來  (천장거무집   화로접불래)

菊樹寒沙發   枝影半從池  (국수한사발   지영반종지)

江亭貧士過   大醉伏松下  (강정빈사과   대취복송하)

月移山影改   通市求利來  (월이산영개   통시구이래)


[글자 그대로의 해석]  

하늘은 높아 잡을 수 없고 꽃은 시들어 나비 오지 않네.

국화는 찬 모래밭에 피어나고 나무 그림자 연못에 반 드리웠네.

강가 정자에 가난한 선비 지나다 크게 취해 소나무 아래 엎드렸네.

달 기우니 산 그림자 바뀌고 시장에서 이문 얻네.


[한글과 연관지은 파격적인 해석]  

천장에 거미(무)집 화로에 겻(접)불 내

국수 한 사발 지렁(간장) 반 종지

강정 빈사과 대추 복숭아

월리(워리) 사냥개 통시(변소) 구린내


한문적인 해석과 한글적인 해석의 조화와 세태에 대한 해학. 가히 조선의 천재라 할 만하다 할 것이다. 그는 조부의 홍경래란 연루로 출세 못함을 원망했다는데 오히려 그러한 불출세로 인하여 병연은 산하를 유람하고 자연과 함께 살다 간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김삿갓이 탄생된 것은 아니었는지? 그렇게 돌아다니다 빈한한 시절에 병연은 엔간히도 구박을 받았나보다. 그의 시를 보면 똥바가지를 뒤집어 쓰는 등 봉변당하는 구절이 자주 나오는데 그 당시의 민초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하겠다. 삿갓봉에서 내려다보니 거창 땅의 산하가 한눈에 들어온다. 남덕유 쪽에서 올라오신 두 분의 종주자들을 정상에서 조우했다. 그들은 삿갓재 대피소에서 하루 묵어갈 것이라며 우리의 당일 종주 계획을 듣고는 무리라고 하신다. 남덕유 쪽은 산세가 험하고 밤이면 기온이 급강하되므로 종주를 중단하고 영각사 방향으로 하산하라고 권유하시기까지 하신다.

 

(9) 삿갓재-월성재(1240m)  [15:10-16:15, +1시간5분=6시간35분, +2.9=14.0km]

삿갓봉에서 월성재까지는 내리막의 연속이었고 역시 산릉이어서 조망이 좋았다. 억새와 단풍의 조화가 좋아 사진을 찍으며 내려왔다. 그렇게 자연은 사시사철 조화를 부리며 그의 살아있슴을 말하고 있는데 정녕 우리는 모른다. 그의 뜨거운 피와 정열이 느껴지지만 대자연 속에 단지 머무름만 인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갑자기 정지점장님이 한시 한 구절을 말씀하신다.


雲去雲往天本靜 花開花落樹常閑

운거운왕천본정 화개화락수상한


구름은 일어나고 스러져도 하늘은 본디 그대로이고 꽃은 피고 져도 나무는 개의치 않는 것일까? 그렇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우리는 구름처럼 울다가는 금세 웃고 꽃처럼 영욕(榮辱)을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 자연도 변하고 우리도 변하고 어디로 흘러갈까? 그러건 말건 생장렴장의 순환은 계속된다. 


문득 바람이 불어온다. 급사면을 따라 산 아래에서 휘몰아오는데 낙엽이 날리고 으스스하게 한기를 느끼게 한다. 농경 사회였던 우리 조상들은 바람에도 온갖 이름을 붙여 주었다. 불어오는 방향에 따라서는 갈바람(서남풍), 높바람(북북동풍), 높새바람(북동풍), 높하늬바람(서북풍), 늦하늬바람(서남풍), 마파람(남풍), 된마파람(동남풍), 된바람(북풍), 샛바람(동풍), 하늬바람(서풍)으로 불러 주었다.


바람의 세기나 느낌 혹은 꼴에 따라서는 건들바람, 고추바람, 남실바람, 노대바람, 돌개바람, 명주바람, 산들바람, 살바람, 서늘바람, 서릿바람, 선들바람, 소소리바람, 소슬바람, 손돌바람, 솔바람, 실바람, 싹쓸바람, 왜바람, 용숫바람, 피죽바람, 황소바람, 회오리바람, 흔들바람 등으로 불러 주었다. 이밖에도 장소나 때에 따라 부르는 이름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런 이름을 거의 잊고 산다. 오늘날 우리 고유의 바람 이름이 사라진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 이름들은 대부분 농업과 어업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농경 사회에서 천하태평은 ‘비바람이 조화로운 것(雨順風調)’에서 시작된다. 당연히 농부는 바람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뱃사람들은 바람에 더 예민하다. 뒤집히면 저승이다. 그들은 세 치(배의 판자 두께) 아래에 저승을 두고 삶을 경영했다. ‘바람은 대기의 숨결’이라는 신화적 상상력이 농부와 어부들에겐 지극히 현실적인 감각이었던 것이다. 물질문명은 신화만 앗아간 것이 아니라 자연과 교감하는 인간의 감각도 가져가 버렸다.


16:00에 월성재에 도착하였는데 거창 월성지구의 황점매표소 3.8km란다. 여기서 삿갓봉에서 만난 등산객의 권유도 있고하여 넷이서 논의를 하였다. 논의 결과 나와 정지점장은 예정대로 남덕유를 거쳐 종주를 감행하고 이상무와 김부지점장은 황점 방향으로 하산하기로 했다.

 

(10) 월성재-남덕유산(1507.4m) [16:15-17:10, +55분=7시간30분, +1.4=15.4km]

남덕유로 향하는 길은 급경사였다. 흡사 암릉(巖陵)인 계룡산을 연상케 한다. 과연 덕유는 큰 산이었다. 덕유는 지리의 풍만함과 속리의 절경과 계룡의 날카로움 등을 고루 갖추고 있어 사람들은 종주를 계획하나보다. 남덕유에 다가갈수록 그러한 덕유의 풍만함을 느끼겠다. 남덕유 8부 능선에 올라서니 역시 서봉으로 향하는 길, 남덕유로 오르는 길로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왔다. 지점장님이 나를 돌아보며 싱긋 웃는 표정이 의사를 묻는 것 같았는데 그의 발길은 그대로 남덕유의 정상으로 오르는 계단을 밟고 있었다.


그러면서 4전5기 홍수환의 이야기를 하시며 산에 오를 때 절대 멀리 보지 않고 한 계단만, 한 발짝만 생각하며 오르신단다. 홍수환이 권투 연습할 때 그의 매니저가 남산 계단 길을 오르내리는 훈련을 시켰을 때의 일화를 어디선 들으셨단다. 홍선수는 힘든 훈련을 한 계단만 생각하며 올랐다고 한다. 처음엔 천개도 넘는 계단을 어찌 오르나 생각하며 힘들게 올랐는데 한 계단만 생각하며 오르니 쉽게 오를 수 있었다고 한다.


지점장님도 홍선수처럼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너무 멀리보지 않고 한 가지씩 해결하다보니 매사 잘되더라는 이야기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한 계단씩 오르는 남덕유 북사면의 계곡풍이 드세었다. 낮과 밤이 바뀌는 즈음이어서 인지 산 아래에서 계곡풍이 심하게 몰아쳐왔다. 흡사 초겨울 같았는데 한기가 으스스하게 스며들 정도였다. 과연 삿갓봉에서 만난 두 분의 말씀이 맞는 것 같았다. 정상에 올라섰을 때는 이미 서봉에서부터 붉은 석양이 남덕유의 서사면에 깔린 단풍에 붉은 물감을 덧칠하여 한층 현란한 빛을 발하게 한다. 그러나 남측으로 영각사가 손에 잡힐 듯하고 그늘진 서봉이 눈앞에 있으니 덕유 종주에의 의지를 더욱 불타게 한다.



(11) 남덕유산-서봉(1500m)  [17:10-18:00, +50분=8시간20분, +1.2=16.6km]

남덕유의 정상에서 덕유산을 생각해 보았다. 덕유산(1,614m)은 태백산맥에서 갈라진 소백산맥이 서남쪽으로 뻗으면서 소백산, 속리산 등을 솟게 한 후 다시 지리산으로 가는 도중 그 중심부에 빚어놓은 또 하나의 명산이라는데 여기에 올라 살펴보니 아스라하게 실루엣만 보이는 주봉인 향적봉을 중심으로 1,300m안팎의 장중한 능선이 남서쪽으로 장장 30여킬로미터를 휘달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 덕유산 주봉을 비롯해서 동쪽에는 지봉, 북쪽에는 칠봉이 자리하고 있는데 덕유산은 덕이 많은 너그러운 모산(母山)이라 해서 덕유산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옛 기록에 의하면 기골이 장대한 남덕유가 덕유의 주봉으로 나오는데 일제 강점기 측량 결과 펑퍼짐한 향적봉이 있는 북덕유가 주봉임이 판명되면서 덕유의 종주권을 북덕유에 앗기었지만 지금도 덕유를 말하면 남덕유를 보지 않고는 말하지 말라 한다는데 덕유산의 연봉들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고 해서 덕유(德裕)산에 남녁 남(南)자를 앞머리에 붙여진 이름이란다. 덕유산의 한 봉우리는 무주에서 시작되고, 또 한 봉우리는 장수에서 일어나는데, 장수의 봉우리를 남덕유산 이라하며 해발 1,507m이고, 무주의 봉우리를 북덕유산이라 하는데 해발이 1,615m로서 남덕유산보다 북덕유산의 향적봉이 108m가 더 높단다.


장수군 지역에서는 장수덕유산을 5대 명산의 하나로 꼽고 있다고 한다. 덕유산하면 북쪽의 북덕유산과 주봉인 향적봉, 그리고 무주구천동의 33경만 생각하기 쉬우나 장수덕유와 이곳 남덕유산까지 덕유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남한에서는 지리산국립공원 다음으로 웅장하고 넉넉한 산이다. 덕유산하면 글자 그대로 산이 크고 덕이 있는 산이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때 일본인들이 이 산하에 와서 산을 보고는 크고 덕이 있는 산에서 싸울 수 없다하여 퇴군했다고 전해진다.


덕유의 급사면을 내려오니 갈증이 난다. 붉은 석양이 불타는 사면에 앉아 차가운 김밥으로 허기를 달래면 서봉을 바라보니 남덕유가 밑으로 푸욱 꺼지면서 다시 서봉(장수덕유)가 우뚝 솟았는데 그러한 높낮이는 이미 우리의 종주 의지를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우뚝 속은 암릉을 머리에 인 서봉이 보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서봉의 급사면에 달라붙었을 때 발걸음은 한없이 무뎌졌다. 더구나 산 그림자는 이미 남덕유에서 서봉 일원을 검게 덮쳐오고 붉은 석양은 한줌조차 남기지 않고 모조리 거두어 가고 동녘 남덕유 위로 하얀 상현달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러한 급사면에 수직에 가까운 철계(鐵階)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철계 옆에 누렇게 말라버린 원추리와 산오이풀들 사이로 구절초와 개미취들이 군락을 이루어 해맑게 웃으며 우리를 반겨주었다. 암릉으로 된 서봉에 오르니 영각사며, 육십령이 훤히 보인다. 더구나 북덕유의 산릉도 가물가물 보인다. 문득 월성재에서 황점으로 하산한 분들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서봉에 올라선 우리가 보인다며 손을 흔들어 보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어두컴컴하여 보일 리가 없는데... 하면서도 손을 흔들었는데 나중에 안일이지만 이는 이상무의 농담이었다. 서봉에 있는 길 안내판에 의하면 육십령까지 7.4km인데 4시간 거리는 족히 되리라.



(12) 서봉 -할미봉(1013m)-육십령(734m) [18:00-19:00 +1시간=9시간20분, +7.4=24km]

그렇다면 밤 10시에나 육십령에 도착하겠지? 생각하면서 서봉 아래로 내려 왔는데 남측으로 “참샘”이라는 표지판이 있었다. 산행기에서 “남덕유산의 산상에는 참샘이 있는데, 겨울에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온수이고, 여름에는 손을 담글 수 없을 정도로 찬물이 솟아난다.“는 구절을 보았다. 나는 당연히 ”참샘“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지점장님이 서측 헬기장 방향으로 이동하였다. 나는 속으로 아닌데... “참샘”쪽으로 가야 되는데... 하면서 지점장을 따라갔다.


그런데 18:20 헬기장에 도착했을 때 이변이 일어났다. 별들이 총총하고 상현달이 훤한 하늘에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안개가 몰아치고 검은 구름이 서봉일대를 휘감는 것이었다. 우리는 헬기장에서 신속히 랜턴을 꺼내고, 물을 마시고, 양말을 갈아 신고 야간산행 준비를 끝내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우리는 육십령으로 제대로 가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13)서봉-덕유교육원삼거리-계북면 문성마을  [18:00-21:00 +2시간=11시간20분, +5.3=24km]

그러나 가도 가도 서봉 표지판에서 보았던 교육원 삼거리는 안 나오고 대간 종주의 길치고는 너무 좁고 인적이 드물었다. 더구나 잡목에 뒤덮여 있어 헤드랜턴조차 무색할 지경이었다. 드디어 그 오솔길마저 싸리나무 숲에 막혔다. 거기서 우리는 능선을 버리고 좌측 계곡으로 접어들었는데 그 길은 제법 사람이 많이 다닌 듯 산행 리본도 중간 중간 매달려 있었다. 우리는 거기를 교육원 삼거리로 착각하였다. 19:30분 쯤 5부 능선으로 추측되는 지점에 이르렀는데 “작은 참샘”이란 표지판이 보이고 바가지도 보였다. 우리는 거기서 여장을 풀고 요기를 하였다.


헤드랜턴을 끄니 주변이 칠흑의 밤이다. 어디쯤인지도 모르고 일말의 불안이 있지만 휴대폰으로 알아보니 육십령으로 가는 중간 지점인 것 같았는데 아직은 모르겠다. 황점으로 내려간 두 분은 육십령휴게소로 가 찌개를 끓여 놓고 우리를 기다리신단다. 그 말을 들으니 목안에 침이 꿀꺽 넘어간다. “작은 참샘”을 뒤로 하고 내려가는 계곡 길은 고난의 길이었다. 오솔길은 나타났는가하면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런가 하면 수천 년을 두고 굴러다니는 집채만 한 바위들이 앞을 가로 막기도 하고 여름의 폭우에 오솔길마저 유실되어 끊어져 잇기도 하고 우거진 삼림은 어둠의 농도를 더욱 짙게 하여 으스스하기조차 하다.


그렇게 1시간여 고실고실하게 내려오니 어둡던 하늘은 말짱하게 개어 상현달이 휘황하다. 달빛이 이렇게 밝게 느껴지기는 전깃불이 들어오기 전 유년의 고향에서 시골 밤길을 걸었을 때 이후 처음인 것 같다. 달빛에 산판 마을이 보였다. 이곳도 인삼재배열풍이 몰아닥쳤는지 삼판이 즐비하다. 농로는 깨끗이 포장되어 있었다. 마치 우리를 위하여 닦아 놓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고 어쨌든 그렇게 생각하니 고단한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그 달빛은 마을에 다가갈수록 현대문명의 이기인 전깃불에 의하여 고고한 빛깔을 상실하여 가고 있었고 초롱초롱하던 별빛들도 몇몇 개만 남기고 어두운 하늘 속으로 숨고 있었다.


시골 마을에 들어서니 우리들의 낯선 발자국소리에 “컹! 컹!”하는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다. 불이 켜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곳도 살지 않는 집이 많은 모양이다. 포장 된 2차선 아스팔트길로 내려오니 차 한대가 지나간다. 사정을 이야기하니 흔쾌히 타라신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니 우리는 전북 장수, 경남 함양 땅의 경계인 육십령(734m) 산릉으로 내려온 것이 아니고 전북측 산맥을 타고 내려온 것 같았다. 정확히 장수군 계북면 문성마을 이란다. 그런데 거리는 육십령까지의 거리와 비슷한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서봉에서부터 잘못 들어섰다는 판단이다.


유명한 암릉인 할미봉이 아닌 합미봉(合米峯, 1026.4m, 옛날 한 도승이 이 산속에 우리나라 군사가 수년 먹을 쌀이 쌓여 있는 격이라 했다 하여 합미봉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함.)도 밟지 못했으니 서운하긴 하였지만 어찌 되었건 향적봉에서 남덕유, 서봉까지 종단했으니 덕유종주라 할 만하되 그래도 왠지 찜찜했다. 육십 명이 떼 지어 넘어야지만 도적을 피할 수 있었다는 대간의 분기점인 육십령을 밟지 못했으니 말이다. 다음에 [육십령-서봉-남덕유-영각사]를 다시 계획하기로 하고 우리는 대전으로 돌아왔다. 여름덕유, 가을덕유를 경험했으니 봄이나 겨울에 해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배달9202/개천5903/단기4338/서기2005/10/15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1) 산행에 참가한분 : [계룡건설 : 나강하상무, 이원복상무], [신한은행 : 정효근지점장, 김승진부지점장, 이해창과장, 장종석과장, 윤재원과장, 이은주대리, 김완태행원, 최종화사원]

2) 최종 종주자 : 정효근, 나강하

3) 덕유산의 진면목을 알기 위해서는 무리하게 당일로 하지말고 1박 2일로 계획하자.

4) 가을일지라도 옷가지를 충분히 준비하고 먹거리는 적정하게 준비하자. 너무 많아 짊어지기가 불편했고 준비물의 반도 못 먹었다.

5) 상세 지도를 준비하자. 상세지도만 있었어도 서봉에서 제대로 길을 찾았을 것이다.

6) 이번 산행을 지원한 신한은행 지점장님이히 직원들게 감사드린다. 그분들 아니었으면 종주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1) 무주리조트에서 설천봉 가는 곤돌라에서

 

 

 

2) 설천봉 전경

 

 

 

3) 설천봉에서 향적봉 가는 길에 구천동 방향을 바라 보다.

 

 

 

4) 향적봉에서 일행과 함께

 

 

 

5) 향적봉 산장으로 내려 가는 길

 

 

 

6) 중봉에서 북사면을 조망

 

 

 

7) 중봉 평전

 

 

 

8) 동엽령 가는 길

 

 

 

9) 동엽령 가는 길

 

 

 

10) 동엽령 가는 길

 

 

 

11) 백암봉

 

 

 

12) 무룡산

 

 

 

13) 무룡산

 

 

 

14) 무룡산

 

 

 

15) 삿갓재 가는 길

 

 

 

16) 삿갓재 가는 길

 

 

 

17)삿갓재 가는 길

 

 

 

18) 삿갓재 가는 길

 

 

 

19) 삿갓재 안내판

 

 

20) 삿갓봉에 서다.

 

 

21) 월성재 가는 길 옆에서

 

 

 

22) 월성재 가는 길

 

 

 

23) 월성재 근처 억새밭

 

 

 

24) 중앙이 삿갓봉, 왼쪽 남덕유, 오른쪽 서봉

 

 

 

25) 남덕유에 그림자는 드리워지고(여기서 디카 건전지가 다 되어 휴대폰으로 찍다.)

 

 

 

26) 그러한 석양의 길을 가다.

 

 

 

27) 남덕유의 정상에서

 

 

 

28) 서봉 가는 길에 본 남덕유의 위용

 

 

 

29) 상현달이 오른 서봉(장수 덕유)에 서다.

 

 

30) 서봉의 표지판

 

 

 

 

 

 

 

김기춘

나는 집에 가만히 앉아서 풀뿌리님 덕분에계룡산 구경도 하고 덕유산 구경도 잘 하였습니다
 2005/11/03 14:54:42  
풀뿌리 예리한 비평 감사합니다. 항상 따가운 지적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천재 김병연이 실수했을리는 없고 여과없이 감상이랍시고하는 제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2005/11/04 10:39: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