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여행과산행길

명성황후와 大雪 속의 금병산 (06/12/17 조수미 나가거든)

이름없는풀뿌리 2015. 7. 15. 09:59

 

 

 

 

 

명성황후와 大雪 속의 금병산

 

 

(1)

06/12/16(토)

국립극장에서 뮤지컬 "명성황후"관람.

요즘 送年 모임이란게

먹고, 마시고가 아니고

공연을 보고, 담소하고, 먹고 헤어지는 풍속도임을

국립극장을 꽉 메운 사람들의

소곤거림 속에서 알겠더라.

 

(2)

구한말의 격랑 속에서

16세의 어린 나이로 王妃가 되어

시아버지(대원군)와

外勢(친러, 친청, 친일, 친미)와 파벌과 싸우면서

王權을 지키고

조선을 지키고자 했던 민비.

 

(3)

끝내는 삼도(일본)의 정부가

사주한 낭인들에 의하여

난자되고 불태워지기 까지

그녀의 곁에는 항상 지키던 무사

홍계훈이 있었다.

 

(4)

저승의 민비가

시녀들과 하얀 소복으로

일어서서

"무궁한 조선"을 외치며

"백성이여 일어나라"라고

점점 관객에게 다가오는

피날레에 이르러서는

울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5)

06/12/17(일)

간밤에 大雪이 내려

계룡산 산행을 금병산 산행으로 바꾸었더라.

 

(6)

산행 들머리부터

하얀 눈꽃 세상이었더라.

한 사람도 먼저 올라간 이는 없었더라.

 

(7)

정상에 올라 능선을 따라가니

명성황후가

하얀 소복을 입고

저 앞에서 인도 하더라.

그 뒤를 아내와 나 뿐이 아니고

일제와 항거하며 태극기를 든

수운교도들도 따르더라.

 

(8)

그리고 하산하여 수운교 봉령각에 이르니

병풍을 갖추고 치성드리는

이성계가 보이더라.

도솔천궁에 이르니

도솔천궁을 건축한 최원식 대목수가 앞으로 나서며

경복궁을 지을 때

먼 발치에서 본 민비의 모습을 전하더라.

 

(9)

"이등박문을 척살하고

32세란 꽃다운 나이로 순국한 

안중근 義士의 이등척살 15가지 理由 중 第一의 이유가 바로

國母 명성황후를 시해했다는 것이었으니

당시 우리 국민들이 황후를 崇仰했슴을

그로써 알 수 있거니와

내가 본 명성황후는

고아한 자태에 위엄을 갖추신 분으로

항상 外風에 흔들리는 조선을 걱정하셨는데

한가지 아쉬운 점은

유능한 시아버지 흥선군과 융합하여

대한제국 황제을 보필하지 못한 점인데

그녀가 그리했던들

조선의 운명이 달라졌으리라."

 

(10)

최목수의 말이

소나무 가지에서 떨어지는

눈덩이처럼

나의 가슴속으로 떨어지더라.

 

 

배달9203개천5904/단기4339/서기2006/12/17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1. 들머리

 

 

 

 

 

 

 

 

 

 

 

 2. 능선에서

 

 

 

 

 

 

 3. 수운교도들이 태극기를 흔든 정상에서

 

 

 4. 하산하면서

 

 

 

 

5. 수운교 봉령각

 

 

 

 

 6. 이최출룡자가 수도하고 계신 도솔천궁

 

 

 

 

 

 7. 수운교 입구의 설경

 

 

 

 

 

  

 

 

 

 

나가거든(명성왕후ost)-조수미


쓸쓸한 달빛 아래 내 그림자 하나 생기거든
그땐 말해볼까요 이 마음 들어나 주라고

문득 새벽을 알리는 그 바람 하나가 지나거든
그저 한숨 쉬듯 물어 볼까요 난 왜 살고 있는지

나 슬퍼도 살아야 하네
나 슬퍼서 살아야 하네

이 삶이 다하고 나야 알텐데
내가 이 세상을 다녀간 그 이유
나 가고 기억하는 이
내 슬픔까지도 사랑했다 말해주길

흩어진 노을처럼 내 아픈 기억도 바래지면
그땐 웃어질까요 이 마음 그리운 옛 일로

저기 홀로 선 별 하나 나의 외로움을 아는건지
차마 날 두고는 떠나지 못해 밤새 그 자리에만

나 슬퍼도 살아야 하네
나 슬퍼서 살아야 하네

이 삶이 다하고 나야 알텐데
내가 이 세상을 다녀간 그 이유
나 가고 기억하는 이
내 슬픔까지도 사랑하길

부디 먼 훗날 나 가고 슬퍼하는 이
내 슬픔 속에도 행복했다 믿게

 

 

 

 

 

 

 

 

 

 

 

 

 

 

풀뿌리 1995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비운의 국모 명성황후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으로 명성황후 시해 백주기를 맞이하며 제작, 기획된 초대형 창작 뮤지컬이다. 명성황후는 조선의 마지막 황후이며 16세의 나이로 고종과 결혼하여 국사에 큰 역할을 하다가 일본인들에게 정책적으로 시해 당하는 인물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정국이 어수선하여 각종 난과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나던 시절이었고 그 가운데 일본의 한반도 지배 정책에 반하는 의사를 강경하게 펼치다가 비극적 사건은 일어난다. 아무리 국가적으로 적대적 감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한 국가의 국모를 살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건만 이를 무마시키기 위해 일본인들은 모든 역사적인 증거자료를 인멸해 버린다. 뮤지컬 <명성황후>는 한일 간의 아픈 역사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한 나라의 국모였지만 한 남편의 아내이자 어머니로써 그녀가 겪었던 죽음과 만국공통의 정서인 애국심이 결합하여 국제적인 문화상품으로 거듭난 것이다. 이문열 원작, 윤호진 연출로 1995년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올리면서 큰 성공을 거둔 후, 약 십여 년간 수차례의 업그레이드를 거쳐 오늘 날, TV드라마와 뮤직비디오, 출판, 음반, 광고 그리고 코미디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한국 대중문화 전반에 걸친 핵심코드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국내 공연문화 활성화와 해외 진출에 대한 초석 마련 <명성황후>는 1997년 최초로 뉴욕 브로드웨이 무대에 도전함으로써 한국 뮤지컬의 활성화와 해외진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당시 뉴욕 링컨센터 진출로 전회 기립박수와 「뉴욕타임즈」리뷰를 받으면서 좌석매진, 입석발매 기록을 세웠고 「뉴욕타임즈」로부터 ‘어떤 국적의 관객이건 감동받기에 충분하다’라는 평을 얻은 바 있다. 2002년 뮤지컬 <명성황후>는 런던 웨스트엔드에 진출하여 '용감한 도전'-「The Times」, '세계 수준' -「The Stage」 등의 평가를 얻어냈다. 현재까지 국내 각종 뮤지컬의 수출에 자신감을 불러일으켜 주면서 한국 뮤지컬 발전에 견인차 역할을 해내고 있다. 2006년 10월까지 총 670회 공연이 올랐으며, 국내외에서 뮤지컬 <명성황후>를 관람한 사람들은 모두 92만 명이 봤다. 놓치고 싶지 않은 명장면! <명성황후>는 십여 년 동안 쉬지 않고 보완되어 온 작품이다. 98년 뉴욕 LA 투어 공연 때 새로 삽입된 무과시험 장면과 무당굿 장면 등은 가는 곳마다 찬사가 끊이지 않는 명장면이다. 런던의 인디펜던트로부터 한국의 아름다움을 흠씬 전한 의상이라는 칭찬을 받았던 무대의상. LA 오베이션 어워드에 노미네이션 되었었으며 「뉴욕타임즈」로부터 신이 내린 빛과도 같다는 찬사를 받았던 조명. 이중 턴테이블로 마술과도 같은 무대를 창조했다는 런던의 이브닝 스탠다드의 극찬을 받은 무대. 명성황후가 결혼하는 초기장면부터 마지막 혼의 이름으로 부르짖는 피날레 곡 <백성이여 일어나라>에 이르기까지 <명성황후>는 오랜 시간 갈고 닦여진 빛나는 명장면들로 가득하다. 2006/12/18 11:56:25  
풀뿌리 명성황후
는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황후로 본관은 여흥이며, 증영의정 민치록의 외동딸. 고종은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였으나 국정을 치르기엔 나이가 어려서 고종의 생부인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게 되고 정치 실권을 잡게 되었다. 1866년(고종 3년) 16세에 왕비로 간택되었는데 이때 고종은 15세였다. 1882년 (고종 17년) 임오군란으로 신변이 위험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청의 힘을 빌어 대원군을 밀어내고 민씨정권을 수립하였으나 1894년 대원군이 재등장하면서 갑오경장이 시작되어 친일파가 정권을 잡게 되자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세력의 추방을 기도하였다. 이듬해인 1895년 일본공사 미우라가 부임했으나 계속 이들을 견제하며 친러정책을 강화하자 일본인 낭인들이 8월 20일 궁궐을 침범하였고, 그 가운데 아다찌가 거느린 선봉부대의 흉인들에게 건청궁에서 난자당해 죽은 후 운반되어 소각되었다. 죽은 뒤 폐위되어 서인이 되었다가 10월 복호되고 1897년 (광무 1년) 명성이란 시호가 내려졌으며,이 해 11월국장이 거행되었다. 능은 양주의 홍릉이다. 명성황후는 1874년 (고종 11년)에 왕자를 낳아 2년 후에 태자로 책봉되었는데 그가 바로 순종이다.  2006/12/18 11:59:31  
풀뿌리 을미사변
1895년 (고종 32)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주동이 되어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고 일본세력 강화를 획책한 정변. 갑오개혁을 통하여 깊숙이 조선 내정에 간여하게 된 일본은 청일전쟁에 승리한 뒤 박영효(朴泳孝)김홍집(金弘集)을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을 만들어 세력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이때 프랑스러시아독일 등 3국은 일본의 대륙침략 저지를 위해,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이 차지한 랴오둥반도[遼東半島]를 청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한, 이른바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세력확장에 제동을 걸었다. 그동안 일본의 강압하에 내정개혁을 추진한 조선정부는, 러시아공사 K.베베르와 제휴하고 친일세력의 완전 제거를 위하여, 1895년 9월 6일 왕비시해 음모혐의로 전 내무대신 박영효에 대해 체포령을 내려 정계에서 축출하였다.이미 8월에 민영환(閔泳煥)을 주미전권공사(駐美全權公使)로 등용한 동시에, 친일계인 어윤중(魚允中);김가진(金嘉鎭) 등을 면직시키고 이범진(李範晋)이완용(李完用) 등의 친러파를 기용하여, 제3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어, 친미친러세력이 우세하였다. 더구나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조선정부에 약속한 증여금 300만 원을 일본정부가 제공하지 않자, 조선정계에서는 배일세력이 증가하였다. 이에 일본측은 이노우에 대신 무인 출신 미우라를 주한일본공사로 파견하였다. 조선정부는 일본의 강압에 따라 제정한 신제도를 구제도로 복구하려고, 일본인 교관이 훈련시킨 2개 대대의 훈련대도 해산하고자 하였다.  2006/12/18 12:01:28  
풀뿌리 이에 대하여 미우라는 명성황후시해계획을 세우고, 1895년 10월 2일 하수인으로서 한성신보사(韓城新報社)에 있는 낭인(浪人)을 이용하고자 사장 아다치[安達]를 공사관으로 불러 6,000원의 거사자금을 주고 왕비시해의 전위대로 삼아, 공덕리(孔德里) 아소정(我笑亭)에 있는 흥선대원군을 궁중으로 호위하는 일을 담당시켰다. 그 외 일본군수비대와 일본인 거류지 담당경찰관 및 친일조선인까지 동원할 계획을 세우고, 훈련대의 우범선(禹範善)·이두황(李斗璜)·이진호(李軫鎬) 등 3대대장과 전 군부협판(軍部協辦) 이주회(李周會)를 포섭하였다. 한편 정부에서는 군부대신 안경수(安멎壽)를 일본공사관에 보내어 훈련대해산과무장해제, 민영준(閔泳駿)의 궁내부대신 임명을 통고하였다. 일본은 상황이 급변함을 직감하고 명성황후 시해계획을 10월 8일 새벽으로 결행하였다. 흥선대원군을 앞세운 일본인 자객들은, 서대문을 거쳐 우범선·이두황이 지휘한 조선 훈련대와 합류하여 광화문을 통과하였다.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洪啓薰)과 군부대신 안경수가 1개 중대의 시위대 병력으로, 이들의 대궐 침범을 제지하려다 충돌이 일어났다. 흉도(兇徒)들은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과 홍계훈을 살해한 다음, 이어서 왕비의 침실인 옥호루(玉壺樓)에 난입하여 왕비를 살해하고, 시체에 석유를 뿌려 불사른 뒤 뒷산에 묻었다. 곧 새로 유길준(兪吉濬)·서광범(徐光範)·정병하(鄭秉夏)·김종한·권형진(權瀅鎭) 등 친일파를 중심으로, 제4차 김홍집내각을 수립하였다. 명성황후시해 현장에는 고종·황태자 및 미국인 교관 다이, 러시아인 기사 사바틴, 그외 많은 조선인이 있어 진상을 낱낱이 목격하여 사건은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자세히 알려졌다. 이에 구미열강이 강경한 태도로 일본인의 사건 관여사실을 주장하고 나서자, 일본은 이의 처리방안으로서 미우라를 해임, 고무라[小村]를 판리공사(辦理公使)로 임명하였다. 한편 미우라 등 관계자 48명을 히로시마[廣島] 감옥에 구치하고, 형식적으로 관련혐의자에 대한 취조를 하였으며, 결국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전원석방시켰다. 결국 을미사변은 항일의병활동의 원인과 아관파천(俄館播遷)의 계기가 되어, 한국은 러시아의 보호국과 같은 지위로 떨어졌고, 일본의 식민지화계획에 차질을 가져왔다. 2006/12/18 12:01:32  
풀뿌리 미우라 - 일본의 군인 ·정치가.
국적 : 일본 활동분야 : 군사, 정치 출생지 : 일본 조슈한[長州藩] 조슈한[長州藩] 출생. 막부(幕府)타도운동에 참여하고,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후 신정부의 군인이 되었다. 1878년 육군중장, 1888년 예편 후 1890년에 귀족원 의원, 1895년 주한공사로서 한국에 부임한 그는 10월 8일 새벽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기 위하여 일본군과 경찰 및 낭인(浪人)들을 동원하여 명성황후 (明成皇后)를 시해하고 그 시신(屍身)을 불태우는 국제적 범죄를 저지른 범인이다. 그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시해된 황후가 궁궐을 탈출한 것처럼 위장하여 폐서인조칙(廢庶人詔勅)을 내리도록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궁궐에 있던 미국인 다이(M.W.Dye:쒀伊)와 러시아인 기사사바틴(H.N.Sabatin)이 현장을 목격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다. 때문에 소환되어, 일시 투옥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1910년 추밀고문관(樞密顧問官)이 되었다. 이후 계속하여 정계의 배후조종자로서 활약, 1924년 이른바 호헌삼파(護憲三派:憲政 ·政友 ·革新俱樂部) 성립에 진력하였다.  2006/12/18 12:02:22  
풀뿌리 흥선대원군 - 조선 후기의 왕족 ·정치가.
호 : 석파(石坡) 본명 : 이하응(李昰應) 별칭 : 자 시백(時伯), 시호 헌의(獻懿) 활동분야 : 정치 이름 이하응(李昰應). 자 시백(時伯). 호 석파(石坡). 시호 헌의(獻懿). 영조의 5대손(五代孫)이며 고종의 아버지이다. 1843년(헌종 9)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지고, 1846년 수릉천장도감(緩陵遷葬都監)의 대존관(代尊官)이 된 후 종친부 유사당상(宗親府有司堂上) ·도총관(都摠管) 등 한직(閑職)을 지내면서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세도정치(勢道政治) 밑에서 불우한 생활을 하였다. 왕족에 대한 안동김씨의 감시가 심하자 보신책(保身策)으로 불량배와 어울려, 파락호(破落戶)로서 궁도령(宮道令)이라는 비칭(卑稱)으로까지 불리며 안동김씨의 감시를 피하는 한편, 철종이 후사(後嗣)가 없이 병약해지자 조대비(趙大妃)에 접근하여 둘째 아들 명복(命福:고종의 兒名)을 후계자로 삼을 것을 허락받았다. 1863년(철종 14) 철종이 죽고 조대비(趙大妃)에 의해 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에 봉해지고 어린 고종의 섭정이 되었다. 대권을 잡자 안동김씨의 주류(主流)를 숙청하고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부패관리를 적발하여 파직시켰다. 1847개 서원(書院)을 제외한 모든 서원을 철폐하고, 국가재정의 낭비와 당쟁의 요인을 없앴으며, 《육전조례(六典條例)》 《대전회통(大典會通)》 등을 간행하여 법률제도를 확립함으로써 중앙집권적인 정치 기강을 수립하였다.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고 의정부(議政府)와 삼군부(三軍府)를 두어 행정권과 군사권을 분리시켰으며, 관복(官服)과 서민들의 의복제도를 개량하고 사치와 낭비를 억제하는 한편, 세제(稅制)를 개혁하여 귀족과 상민(常民)의 차별 없이 세금을 징수했으며, 조세(租稅)의 운반과정에서 조작되는 지방관들의 부정을 뿌리뽑기 위해 사창(社倉)을 세움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국민들의 생활이 다소 안정되고 국고(國庫)도 충실해졌다. 반면, 경복궁(景福宮)을 중건(重建)하면서 원납전(願納錢)을 발행하여 백성의 생활고가 가중되었으며, 1866년(고종 3) 병인양요에 이어 1871년 신미양요를 일으키고 천주교도에 대한 무자비한 박해를 가하는 등 쇄국정치를 고집함으로써, 국제관계가 악화되고 외래문명의 흡수가 늦어지게 되었다. 또한, 섭정 10년 동안 반대세력이 형성되어, 며느리인 명성황후가 반대파를 포섭하고 고종이 친정(親政)을 계획하게 되자, 1873년 그의 실정(失政)에 대한 최익현(崔益鉉)의 탄핵을 받았다. 이에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자 운현궁(雲峴宮)으로 은퇴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다시 정권을 잡고 난의 뒷수습에 힘썼으나, 명성황후의 책동으로 청(淸)나라 군사가 출동하고 톈진[天津]에 연행되어 바오딩부[保定府]에 4년간 유폐되었다.  2006/12/18 12:04:21  
풀뿌리 1885년 귀국하여 운현궁에 칩거하면서 재기의 기회를 노리던 중 1887년 청나라의 위안스카이[袁世凱]와 결탁하여 고종을 폐위시키고 장남 재황(載晃)을 옹립하여 재집권하려다가 실패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청일전쟁(淸日戰爭)이 일어나자 일본에 의해 영립되어 친청파(親淸派)인 사대당(事大黨)을 축출하고 갑오개혁이 시작되었으나, 집정(執政)이 어렵게 되자 청나라와 통모(通謀)하다가 쫓겨났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세력이 강성해졌으나, 3국(독일 ·프랑스 ·러시아)의 간섭으로 친러파가 등장하여 민씨 일파가 득세하자, 1895년 일본의 책략으로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때 명성황후가 일본인에게 시해되어 일본 공사 미우라고로[三浦梧樓]가 본국으로 소환된 후 정권을 내놓고 은퇴하였다. 1907년(광무 11) 대원왕(大院王)에 추봉(追封)되었다. 2006/12/18 12:04:26  
풀뿌리 고종 - 조선 제26대 왕(재위 1863∼1907).
본관 : 전주 호 : 주연 본명 : 재황 별칭 : 아명 명복. 초자 명부. 자 성림 활동분야 : 정치
주요저서 : 《주연집》 초휘(初諱) 재황(載晃). 아명(兒名) 명복(命福). 초자(初字) 명부(明夫). 자 성림(聖臨). 호 주연(珠淵). 영조의 현손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 비(妃)는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치록(致祿)의 딸 민씨(閔氏). 1863년(철종 14) 12월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조대비(趙大妃)의 전교(傳敎)로 12세에 즉위하였다. 새 왕의 나이가 어리므로 예에 따라 조대비가 수렴청정하였으나, 대정(大政)을 협찬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정권은 대원군에게 넘어가 이로부터 대원군의 10년 집정시대가 열렸다. 척신(戚臣) 세도정치의 배제, 붕당문벌(朋黨門閥)의 폐해 타파, 당파를 초월한 인재의 등용, 의정부의 권한 부활에 따른 비변사(備邊司)의 폐지 및 삼군부(三軍府)의 설치, 한강 양화진(楊花津)의 포대(砲臺) 구축에 따른 경도수비(京都守備) 강화, 양반으로부터의 신포징수(身布徵收), 양반 유생의 발호 엄단 등은 고종 초기 10년 동안 대원군이 이룩한 치적이다. 그러나 경복궁 중수(重修)에 따른 국가재정의 파탄, 악화(惡貨)인 당백전(當百錢)의 주조(鑄造)와 민생의 피폐, 과중한 노역(勞役)으로 인한 민심의 이반과 소요, 가톨릭교 탄압에 따른 8,000여 명의 교도 학살, 쇄국정책, 병인양요(丙寅洋擾), 신미양요(辛未洋擾) 등 어두운 정치적 자취를 남기고 1873년(고종 10) 11월, 대원군이 섭정에서 물러나게 되고 고종이 친정(親政)을 선포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정권은 민비와 그 일족인 민승호(閔升鎬) ·민겸호(閔謙鎬) ·민태호(閔台鎬)로 대표되는 민씨 일문의 세도정치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 때부터 고종은 민비와 대원군의 세력다툼 속에서 국난을 헤쳐나가야 했다.  2006/12/18 12:06:05  
풀뿌리 1875년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을 계기로 쇄국정책을 버리고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을 체결, 근대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개국과 함께 새로운 문물에 접하게 되자, 개화당이 대두, 조정은 개화 ·사대당(事大黨)의 격심한 알력 속에 빠졌다. 1881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일본에 파견하여 새로운 문물을 시찰하게 하고, 군사제도를 개혁, 신식 훈련을 받은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였으나 신제도에 대한 반동으로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 개화 ·수구(守舊) 양파는 피비린내나는 싸움을 벌이게 되어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겪고 고종은 개화당에 의해 경우궁(景祐宮) ·계동궁(桂洞宮) 등으로 이어(移御)하였다. 이런 중에도 한 ·미, 한 ·영수호조약을 체결하여 서방국가와 외교의 길을 텄지만, 1885년에는 조선에서 청나라의 우월권을 배제하고, 일본도 동등한 세력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청 ·일 간의 톈진조약[天津條約]이 체결되어 일본이 한반도에 발판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이 청 ·일 전쟁을 유발하고, 일본이 승리하자 친일파는 대원군을 영입, 김홍집(金弘集) 등의 개화파가 혁신내각을 조직하여 개국 이래의 제도를 바꾸는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로부터 한국 지배기반을 굳힌 일본은 본격적으로 내정을 간섭하여 한국 최초의 헌법이라고도 할 <홍범 14조(洪範十四條)>가 선포되고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독립국으로 행세하는 듯하였으나, 일본의 내정간섭은 더욱 심하여져 관제를 일본에 준하여 개혁하고, 8도를 13도로 개편하였다. 그러나 3국간섭으로 일본이 랴오둥 영유[遼東領有]를 포기, 국제적 위신이 떨어지자 민씨 일파는 친러로 기울어 친일내각을 무너뜨리고 이범진(李範晋) ·이완용(李完用) 등을 등용하여 제3차 김홍집 내각을 구성하였다.  2006/12/18 12:07:12  
풀뿌리 이에 맞서 일본공사 미우라고로[三浦梧樓]는 1895년 8월 대원군을 받들고 일본인 자객(刺客)들을 앞세워 경복궁으로 들어가 민비(閔妃)를 시해, 고종에게 강압하여 친러파 내각을 물러나게 하고 유길준(兪吉濬) 등을 중심으로 제4차 김홍집 내각을 수립하였다. 종두(種痘) ·우체사무 ·단발령 ·양력사용 ·도형폐지(徒刑廢止) 등은 이 해의 제4차 김홍집 내각에 의해 이루어졌다. 1896년 2월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계략으로 고종과 세자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있자 김홍집 ·정병하(鄭秉夏) ·어윤중(魚允中) 등 개화파 인사가 살해되고 다시 친러내각이 성립되었다. 이로부터 한동안 한국은 러시아의 보호를 받았지만, 고종은 1897년 2월 25일 러시아와 일본의 협상에 따라 경운궁(慶運宮: 후의 덕수궁)으로 환궁, 8월에는 연호를 광무(光武)라 고치고, 10월에는 국호를 대한, 왕을 황제라 하여 고종은 황제즉위식을 가졌다. 1904년(광무 8) 러 ·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요구로 고문정치(顧問政治)를 위한 제1차 한 ·일 협약을 체결, 이듬해 한성의 경찰치안권을 일본헌병대가 장악하였으며, 이해 11월에는 제2차 한 ·일 협약인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김으로써 병자호란 이래 국가존망의 위기를 맞았다. 이에 우국지사 민영환(閔泳煥) ·조병세(趙秉世) ·홍만식(洪萬植) 등은 자결로써 항의하였지만 일본은 1906년 2월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여 본격적인 대행정치(代行政治) 체체를 갖추었다. 1907년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자 고종은 밀사 이준(李儁) 등을 파견하여 국권회복을 기도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 오히려 이 밀사사건 때문에 일본의 협박으로 황태자(순종)에게 양위(讓位)한 후 퇴위, 순종황제로부터 태황제(太皇帝)의 칭호를 받고 덕수궁에서 만년을 보내다가 1919년 1월 21일 일본인에게 독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고종의 재위 44년은 민족의 격동기로서 실질적으로 국운(國運)과 명운을 함께 하여, 양위 3년 후에는 나라를 빼앗기는 비운을 맞았다. 능은 금곡(金谷)의 홍릉(洪陵)이고, 저서에 《주연집(珠淵集)》이 있다.  2006/12/18 12:07:40  
풀뿌리 작품배경
일찍이 바깥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은자의 나라로 알려졌던 조선은 19세기 중반에 이르자 밀려오는 제국주의의 파도에 정처 없이 휩쓸리게 된다. 게다가 전통봉건체제의 붕괴에 따른 정치. 사회적인 갈등이 나라 온 구석에 팽배하여 조선은 더 이상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남아 있을 수 없게 되었다. 1864년 선왕 철종의 13살짜리 조카가 부친 대원군의 섭정하에 고종으로 등극하였다. 이년후 외척의 발호를 미연에 방치하고자 대원군은 부인의 6촌 민자영을 왕비로 간택하였으나, 먼 훗날 통한의 계기가 되고 말았다. 열렬한 국수주의자였던 대원군은 철저한 쇄국정책을 고수하여 밀려오는 서양 오랑캐를 물리쳤으나, 1873년 고종이 성년에 이르자 민비의 막후 조정에 의해 섭정의 자리에서 물러난다.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함으로서 조선은 오랜 은둔을 마감하고, 눈앞의 이익을 노리고 몰려드는 외국사절과 통상인들에게 문호를 개방하였다. 넘쳐드는 새로운 사상과 문물로 조선은 새시대의 문턱에 서게 되어 수구파의 끊임없는 반발속에서도 여러 가지 개혁을 시행하며, 1882년 미국과의 통상조약 체결을 필두로 여러 서양제국과의 협정이 잇따르게 되었다. 한편 수구파의 개혁에 대한 저항은 수그러들지 않았고, 민비는 모든 용납할수 없는 변혁을 초래한 장본인으로서 백성들의 원성을 사게 되며 일본상인들의 간교한 농간에 자극되어 온 나라에 극심한 반일감정이 쌓여 가고 있었다. 1882년 임오년에 별기군 특별대우에 반발하여 구식군 병사들 이 난을 일으켜 일본인들을 살해하고 민비의 처형을 요구한다.  2006/12/18 12:09:48  
풀뿌리 대원군은 다시 권좌에 오르고 민비는 변장한 채 피신하여 가까스로 죽음의 위기를 벗어난다. 청나라가 반란군 진압을 위해 파병 하자, 민비는 다른 방책이 없게 되어 부득이 원세개 장군과 내통하여 대원군을 청나라로 추방시키고 궁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후 십년간 조선을 무대로 펼쳐진 일본과 청나라의 각축전은 1894년 청일전쟁으로 절정에 이르나, 노쇄한 청나라는 떠오르는 일본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고, 다음해 시모노세끼 평화협정의 체결로 일본의 조선지배는 더 이상 피할수 없는 현실로 간주되기에 이르른다. 청일전쟁 중에도 일본은 갑오경장을 강요하여 고종은 군림을 하나 통치할 수 없는 처지에 있게 되었다. 1895년 정월, 고종은 종묘사직에 주권회복을 엄숙히 선선하고, 민비와 더불어 러시아,불란서, 독일을 회유하여 일본의 기득권 탈취를 골자로 하는삼국간섭을 성사 시킨다. 이에 따라 일본은 그들의 대동아 공영권 구축을 위한 중요교두보인 조선을 다시 잃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일본의 신임전권공사 미우라 고호로는 일거에 대세를 뒤집어 업기 위해 여우사냥이라는 작전명 아래 민비의 암살계획을 수립하고, 결국 1895년 10월 8일 새벽에 궁중수비대와 상궁들의 목숨을 건 저항에도 불구하고, 민비는 사무라이 다카하시 겐지의 칼에 의해 파란많았던 일생을 마감하게 된다. 민비의 서거소식이 알려지자, 백성들은 그들의 국모가 진정 어떤분이었으며, 무엇을 이루기 위해 애썼는지 깨닿게 되고 비통에 잠긴다. 미우라와 그의 일당은 일본으로 소환되어 형식적인 재판을 거친 후 모두 무죄로 방면되었다. 이후 구년간 조선땅에서는 러시아와 일본의 줄다리기가 이어졌으며, 1904년 러일전쟁으로 비화되었으나, 대마도 해협 해전에서의 결정적인 패배로 러시아는 무릎을 꿇게 되고, 1905년 조선은 일본의 보조국이 되었다. 이후 1910년 조선은 일본에 합병되고, 1945년 연합국의 승리에 이르기까지 36년간 일본의 통치를 받기에 이르른다. 민비는 1897년 국호가 대한제국으로 바뀜에 따라 명성황후로서 추서되었다. 이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의 마지막 항거의 몸짓이었다. 2006/12/18 12:09:52  
풀뿌리 홍계훈 [洪啓薰, ?~1895]
본관 남양(南陽). 초명 재희(在羲). 자 성남(聖南). 호 규산(圭珊). 시호 충의(忠毅). 1894년(고종 31) 장위영(壯衛營)의 영관(領官)으로 있을 때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급파되어 전주(全州) ·태인(泰仁) ·정읍(井邑) ·고창(高敞) ·영광(靈光) 등지에서 동학군을 무찌르고 전주를 탈환, 그 예봉(銳鋒)을 꺾었다. 그 공으로 훈련대장에 승진하였고, 유길준(兪吉濬) 등과 협력하여 친일파 박영효(朴泳孝) 타도에 나섰으나 이듬해 을미사변에 광화문을 지키다가 피살되었다. 군부대신에 추증되고 장충단(奬忠壇)에 배향되었다.
 2006/12/18 12:15:49  
풀뿌리 안중근 [安重根, 1879~1910.3.26]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아명은 안응칠(安應七)이다.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출생했다. 한학(漢學)을 수학했으나 오히려 무술에 더 열중했다. 1895년 아버지를 따라 가톨릭교에 입교하여 신식 학문에 접하고 가톨릭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웠다. 1904년 홀로 평양에 나와 석탄상을 경영하고 이듬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는 것을 보자 상점을 팔아 1906년 그 돈으로 삼흥(三興)학교(후에 오학교(五學校)로 개칭)를 세우고, 이어 남포(南浦)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 인재양성에 힘쓰다가 국운(國運)이 극도로 기울자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수 없다고 판단, 1907년 연해주(沿海州)로 망명하여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듬해 전제덕(全齊德)의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 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嚴仁變)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 일군(日軍)과 격전을 벌였으나 실패, 노에프스키[烟秋]에서 망명투사들이 발간하는 《대동공보(大同公報)》의 탐방원(探訪員)으로 활약하는 한편 동료들에게 충군애국(忠君愛國) 사상을 고취하는 데 진력했다. 1909년 동지 11명과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손가락을 끊어 맹세, 그 해 10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러시아 재무상(財務相)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사살하기로 결심하고, 동지 우덕순(禹德淳)과 상의하여 승낙을 얻고 동지 조도선(曺道先)과 통역 유동하(柳東河)와 함께 이강(李岡)의 후원을 받아 행동에 나섰다. 1909년 10월 26일 일본인으로 가장, 하얼빈역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를 사살하고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森泰二郞], 만철이사(滿鐵理事) 다나카 세이타로[田中淸太郞]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곧 일본 관헌에게 넘겨져 뤼순[旅順]의 일본 감옥에 수감되었고 이듬해 2월,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며, 3월 26일 형이 집행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나 많은 유필(遺筆)이 있으며 옥중에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2006/12/20 08:42:39  
풀뿌리 이등박문을 죽인 이유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는 이러하다.
1. 한국의 민황후를 시해한 죄요.
2. 한국의 황제를 폐위시킨 죄요.
3. 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요.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5. 정권을 강제로 뺏은 죄요.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뺏은 죄요.
7. 군대를 해산시킨 죄요.
8. 교육을 방해한 죄요.
9.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요.
10.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요.
11.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퍼뜨린 죄요.
12.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엔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요.
13.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요.
14. 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아..장부가 비록 죽을 지라도 마음은 쇠와 같고 의사는 위태로움에 이를지라도 기운은 구름과 같도다." 2006/12/20 08:47:55  
풀뿌리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이등박문), 1841.10.14~1909.10.26]
본명 하야시 도시스케[林利助]. 야마구치현[山口縣]에서 출생하였다. 농민의 집안에서 태어나 하급무사의 집안인 이토가[伊藤家]에 양자로 들어갔다.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수학, 존왕양이(尊王攘夷)운동에 참가하였다. 메이지[明治] 신정부 성립 후 정계에 투신하여, 외국사무국 판사 등을 역임하고, 1870년에는 화폐제도·은행제도 조사를 위하여 미국에 파견되었다. 1881년 국회개설문제로 정부 내에 대립이 생기자 기성세력을 몰아내고 메이지정권의 최고지도자로 군림하였다. 1885년 초대 내각 총리대신이 되고, 1888년 추밀원(樞密院) 의장에 취임하였으며, 국회의 개설과 동시에 귀족원 의장이 되었다. 러일전쟁 후인 1906년 조선에 통감부(統監部)가 설치되자 초대 통감으로 부임, 한국 병탄(倂呑)의 기초공작을 수행하였다. 1909년 통감을 사임하고 추밀원 의장이 되어 만주시찰을 겸하여 러시아 재무대신과 회담차 중국 하얼빈에 도착하였는데, 안중근(安重根)에게 총탄을 맞고 죽었다. 현대 일본의 기초를 쌓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되며, 특히 메이지헌법의 초안작성(1889)과 양원제(兩院制) 의회의 확립(1890)에 크게 기여하였다.  2006/12/20 08:59:43  
풀뿌리 명성황후 [ 明成皇后 1851∼1895(철종 2∼고종 32) ]
조선 고종의 비. 성은 민씨(閔氏). 본관은 여흥(驪興). 경기도 여주 출생.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치록(致祿)의 딸이다. 1866년(고종 3)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의 추천으로 왕비가 되었다. 몇 년 뒤부터 왕실정치에 관여하여 궁녀 이씨의 몸에서 태어난 왕자 완화군(完和君)에 대한 흥선대원군의 편애와 세자책봉 문제로 대원군과 정치적 대립이 시작되었다. 1873년(고종 10) 대원군의 반대파와 결탁하여 최익현(崔益鉉)의 탄핵 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을 하야시키고, 고종의 친정(親政)을 선포하였다. 대원군 실각 후 민씨척족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 고종을 움직여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고 개화정책을 시행했다. 1882년(고종 19) 위정척사파와 대원군 세력이 민씨척족의 군제개편 및 홀대에 불만을 품은 구식 군대와 결탁하여 임오군란을 일으키자, 장호원에 있는 민응식(閔應植)의 집에 피신하여 고종과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며,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하고 대원군을 납치하게 하였다. 이 때부터 친청사대(親淸事大)로 흐르게 되어 개화파가 불만을 품고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곧 청나라의 도움으로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다. 1885년 거문도사건이 일어나자 묄렌도르프를 통해 영국과 협상하면서 한편으로 러시아와도 접촉하였다. 이에 일본과 청나라는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대원군을 입국시켜 명성황후 세력과 정권싸움을 벌이도록 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 정계에 압력을 가해오자 명성황후는 친러시아적인 태도를 보이며 일본에 대항했다. 1895년(고종 32) 10월 8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일본의 한반도침략에 저항하는 명성황후와 그 세력을 없애고자 일부 친일정치인과 결탁, 일본의 군대와 정치낭인(깡패)으로 하여금 궁궐을 습격해 명성황후를 시해하게 한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명성황후는 일본 낭인들에 의해 살해되고 궁궐 밖에서 시체가 불살라지는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 곧이어 친일정권이 폐비시켰으나 곧 복위되었고, 1897년 대한제국으로 국호가 바뀌자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895년에 지금의 경기도 구리시 숙릉(肅陵)에 묻혔다가, 1897년 청량리 홍릉(洪陵)으로 이장되었다. 1919년 고종이 죽은 뒤 다시 지금의 남양주시 금곡동 홍릉으로 이장되었다. 2006/12/20 15:23:19  
인어공주 훌륭한글에 멋진 사진이 있으니 錦上添花 이군요^^ 2007/01/06 14:06:03  
풀뿌리 방문 감사드립니다. 뮤지컬의 여운이 다음날 산행 까지도 남아 불행했던 시절의 민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감사합니다. 배달9204/개천5905/단기4340/서기2007/1/7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2007/0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