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여행과산행길

장수의 논개 생가터에서(07/06/02)

이름없는풀뿌리 2015. 7. 15. 14:27
장수의 논개 생가터에서 (1) 지난 07/6/2(토) [영취산-백운산]산행 후 대곡호 저수지 옆 논개생가터 방문. (2) 원래의 논개생가터는 지금은 저수지가 된 대곡호에 있었는데 대곡호 조성으로 수몰되고 1986년 전두환대통령의 지시로 지금의 자리에 논개 생가터및 기념관을 건립했다 한다. (3) 이곳 장수지방에 구전되는 논개의 전설을 요약하자면 1. 논개는 기생이 아니며 천민이 아닌 반가의 여식이다. 2. 일찍이 아버지를 잃어 숙부(주달문)에 의지하여 성장하던 중 3. 숙부의 흉계로 14세에 토호인 늙은 김풍헌에게 팔리어졌으나 그 흉계를 알고 4. 도망하다 잡혀 장수관아에 고발당하였으나 5. 당시 장수현감 최경회에 의해 누명이 벗겨졌으나 갈 곳이 없어 현감의 집에 머물렀다. 6. 그러던 중 최경회의 부인이 죽으며 그녀의 유언으로 7. 18세에 최경회의 부실이 되었다. 8. 임란이 일어나자 최경회는 그의 부임처였던 전북지방에서 9. 의병을 모집하여 진주성으로 들어가니 이것이 2차 진주성혈전인데 10. 이 때 논개도 따라 들어가 전쟁을 도왔으나 남편이 죽자 11. 포로된 기녀들과 함께 기녀로 가장하여 승전연회에 참석 중 12. 왜장의 목을 끌어안고 의암에서 남강으로 투신하여 숨을 거두니 19세였다. 13. 의병 중 장수지방 출신들이 최경회와 논개의 시신을 수습 서상면에 묻었다. 14. 유교사회의 관념상 깨끗이 자살하는 것이 과부의 윤리였던 관계로 15. 기생으로 가장하여 연회에 참석했다는 자체를 부끄럽게 여겨 16. 불과 400여 년 전의 일이지만 철저히 기록에서 외면당하여 17. 그녀의 고향인 장수지방에서 구전되어 오는 내용을 추적하여 18. 그녀의 사당을 세우고 기념관을 건립하여 기녀가 아닌 의암부인으로 알리고 있다. (4) 그 때, 연회에 참석한 의암부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요즈음의 나의 심정처럼 처절한 심정이었을까? 기껏 나와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는 한갓 범부인 나에 감히 비견할까? (5) 논 개(論介) -변영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 맞추었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배달9204/개천5905/단기4340/서기2007/6/2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관련자료1) 논개의 성은 주(朱)씨이며 관향은 신안(新安)이고 의암(義巖)은 예문관에서 내려진 사호(賜號)이다. 논개는 1574년(선조7년) 9월 3일 전북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부(父) 주달문(朱達文)씨와 모(母)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논개의 조부인 현(縣)이 경상도 안의현 서상면 방지리에서 전라도 장수현 임내면 주촌 마을에 이사와 학당을 차리고 아동들을 훈육하는 훈장이 되었다. 아버지 주달문은 부친의 대를 이어 훈장으로 가업을 삼고 생계를 유지하였으며 장성하여 밀양박씨 가문의 규수에게 장가들어 단란한 가정을 꾸려 오던 중 남아를 출산하여 대룡(大龍)이라 이름지어 귀하게 길렀으나 나이 15세에 괴질에 걸려 요절하고 말았다. 후자가 없는 주달문 부부는 명산 장안산(長安山)에 들어가 기도를 드리고 주씨 가문에 대를 이어갈 자손을 점지해 줄 것을 천지신명에게 빌었으며 그 보람이 있어 박씨부인의 나이 40중년(甲戌年9월 3일)에 산기를 느껴 분만을 하였고 술시(戌時)에 여아를 낳았으나 아이의 사주가 아주 기이하게도 갑술(甲戌)년, 갑술(甲戌)월, 갑수(甲戌)일, 갑술(甲戌)시에 태어나 사갑술(四甲戌)의 특이한 사주를 타고나서 장차 큰일을 성취할 것이 라며 위로 하였다. 아버지 주달문은 딸에게 사갑술(개해, 개달, 개날, 개시)의 뜻을 개를 낳는다는 것으로 해석하여 경상도 방언(方言)으로 "개를 낳다"라는 뜻이 담긴 논개(論介)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자라면서 아동교육의 여가를 틈타 한문과 예도를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나이 어린 논개는 하나를 가르치면 열가지를 이해하는 비범한 지혜가 있어 아버지 주달문을 기쁘게 하고 놀라게 하였다. 논개 나이 10여세가 되니 천성이 아름다움과 고상한 기풍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겨우내 병석에 누워있던 아버지 주달문은 병세가 악화되어 위독한 상태에 이르렀다. 이때 효성이 지극한 논개는 약손가락을 깨물어 선혈을 아버지 위에 흘렸으나 소생하지 못한 채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이 때부터 주씨 가문의 불행이 시작되었다. 주색잡기와 행패를 일삼고 다니던 논개의 숙부 주달무는 당시 지방의 토호 김풍헌(金風憲)을 찾아가 형 유족의 생계를 걱정하는 체하며 논개를 백치불구인 김풍헌 자식의 민며느리로 삼을 것을 계획하였다. 김풍헌은 황도길일을 택하여 혼례일을 정하고 박씨부인에게 전달하자 박씨부인과 논개소녀는 혼비백산, 청천벽력같은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모녀간은 우선 발등에 떨어진 불을 피하기 위하여 박씨부인의 친정인 경상도 안의현 서하면 봉정마을로 피신하였다. 김풍헌은 시종들을 논개의 생가인 주촌마을에 보내서 논개소녀를 데리러 갔으나 허탕치고 돌아오자 김풍헌은 노발대발하여 소장(訴狀)을 만들어 장수현감에게 제출하고 엄벌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최경회(崔慶會) 당시 현감은 조사를 하여 김풍헌에게 무고한 사람을 무고(誣告)해서 괴롭히는 처사는 다시는 있어서는 안된다는 엄명을 내리고서 박씨부인과 논개소녀를 무죄방면의 영을 내렸다. 현감부인 나주김씨는 그 억울한 사정을 듣고서 의지할 곳도 없고 갈곳 없는 모녀를 병약하여 자리에만 누워있는 자신의 시중을 들어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고 최경회 현감의 승낙을 얻어 내아에 머물면서 병시중을 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노년에 숙질로 고생하던 모친 박씨부인은 서하의 친정에서 사망하고, 논개의 재색에 감탄한 현감 부인이 최경회에게 논개를 소실로 맞이할 것을 권유한 뒤 논개의 정성어린 간호의 보람도 없이 현감부인 나주김씨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해서 논개가 18세 되던 해 1591년 봄, 최경회와 부부의 인연을 맺고 무장현감으로 부임하는 최경회를 따라 장수를 떠났다. 선조 24년 논개는 최현감의 척실이 되어 비로소 부부의 정으로 맺어지는 운명이 되었다. 그 러나 선조 25년 신혼의 단꿈도 깨이기전 임진왜란이 발생했고 최경회 현감은 소수의 관군을 이끌고 전라감사 이광이 영도하는 전라도 구원군에 편성되었고 장수, 진안, 무주등지에서 약 5000명의 장정을 초모(招募)하여 막강한 군대를 조련하였다. 선조 26년 6월 최경회 현감은 병마 절도사로 임명되어 진주로 부임하면서 부인 논개와 함께 2차 진주성 싸움에 참전했다. 성이 함락되고 패하자 최경회는 국토를 지키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일본군 왜장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矗石樓)에서 주연을 벌이는데 논개는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위해 기생으로 위장하여 참석하게 된다. 이 자리에 있던 그녀는 계획대로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반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 벽류(碧流) 속에 있는 바위에 올라 껴안고 남강(南江)에 떨어져 적장과 함께 죽었다. 훗날 이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불렀으며, 사당(祠堂)을 세워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 1846년(헌종 12) 당시의 현감 정주석(鄭胄錫)이 장수군 장수면(長水面) 장수리에 논개가 자라난 고장임을 기념하기 위하여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를 건립하였다. 그가 비문을 짓고 그의 아들이 글씨를 썼다. 1956년 '논개사당(論介祠堂)'을 건립할 때 땅 속에 파묻혀 있던 것을 현 위치에 옮겨놓았다. 비문에는 "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라고 씌어 있다. 장수군에서는 매년 9월 9일에 논개를 추모하기 위해 논개제전(論介祭典)을 열고 있다. 논개사당은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두산리 산3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1981년 4월 1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46호로 지정되었고,면적은 28,274㎡이다. 논개는 기생이 아닌 엄연한 양가집 규수였던 주논개(朱論介)이다. 일부 기생이라고 기록된 것은 일제의 역사 왜곡과 식민사관에 의해 빚어진 것이라는 사실이 각종 문헌 및 고증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진주에서 해전(海戰)하고 살아남은 장수의병들이 최경회 현감 시신과 주논개 부인의 시신을 거두어 운구하여 신안주씨(新安朱氏)선조들이 묻혀 있는 주씨의 집성촌인 경상도 안의현 서상면 방지마을 당산 뒤쪽 골짜기에 묻었다한다. 그리고 두 분의 산소는 현재 사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조정에서는 그녀의 순절을 높이 찬양하며, 예문관으로부터 의암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진주 촉석루 곁에 사액 정문을 지어 그 넋을 위로, 추모하게 하였고 투신한 바위를 의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논개의 순국사실은 입으로만 전해 오다가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수록되면서 글로도 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중에 충신·효자·열녀를 수록한 『동국신속삼강행』에는 기생의 정열을 표창할 수 없다는 이유로 누락되었다. 이런 사실과는 관계없이 진주 고을민들은 강변에 제단을 마련하여 논개의 넋을 위로하고 국가적인 추모제전이 거행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 마침내 영조 16년(1739)부터 국가의 지원을 받아 의암 부근에서 제를 올릴 수 있게 되었다. 고종 5년(1868)부터 가무와 함께 3일간의 대규모 추모행사를 마련하였다. 일제시대 때 중단되었다가 1954년 당대 일류화가인 김은호가 고증을 통해 논개의 초상화를 그리고 부통령인 함태영 선생이 직접 현판을 쓰면서 1955년 남산 공원에 사당을 지어 "의암사"라 명하고, 논개의 영정을 모셨으며, 1973년에는 성역화 작업이 승인되어 장수읍에 2만여 평의 대지를 마련, 사당을 이전하고 담장과 삼문을 세우고 단청까지 말끔하게 단장하였다. 의암사는 장수 현감 정주석이 주(朱)논개의 충절을 찬양하며 장수 탄생일을 기리기 위하여 1846년 논개생장향수명비를 세운 후 1955년에 군민들의 성금으로 남산에 사당을 건립하였으며, 1974년에 현 위치로 옮겨왔다. 경내에는 "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촉석의기논개생장향수명비)" 가 있고, "의암사"라는 현판이 걸린 사당에는 논개의 영정(김은호 화백 작)이 있으며 외삼문과 내삼문, 충의문이 차례로 있다. 기념관에는 약간의 논개의 유품과 남편 최경회 장군의 유품이 진열되어 있다. 장수읍 남산기슭에 위치한 논개사당은 지방 문화재 46호로 지정하여 주논개의 순절을 높이 찬양하는 뜻에서 의암사라 칭했다. 또한 주촌마을의 원래 생가는 1986년 대곡저수지 축조로 수몰되었으며 이곳은 논개 할아버지가 서당을 차렸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2만평에 이르는 생가지를 복원하였다. 주논개의 탄생일인 음력 9월 3일을 군민의 날로 조례제정하여 의암 주(朱)논개 대축제를 개최하며, 각종 문화행사가 치뤄진다. 관련자료2) 성은 주씨(朱氏)이고, 본관은 신안(新安:중국)이며, 전북 장수(長水)에서 태어났다. 원래 양반가의 딸이었으나 아버지가 사망하고 집안에 어려움이 겹쳐 가산을 탕진하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의 후처가 되었다고 전한다. 그 밖의 자세한 성장과정은 알 수가 없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5월 4일에 이미 서울을 빼앗기고 진주성만이 남았을 때 왜병을 맞아 싸우던 수많은 군관민이 전사 또는 자결하고 마침내 성이 함락되고 최경회는 일본군에 의해 전사한다(제2차 진주성 싸움). 일본군 왜장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矗石樓)에서 주연을 벌이는데 논개는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위해 기생으로 위장하여 참석하게 된다. 이 자리에 있던 그녀는 계획대로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반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 벽류(碧流) 속에 있는 바위에 올라 껴안고 남강(南江)에 떨어져 적장과 함께 죽었다. 훗날 이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불렀으며, 사당(祠堂)을 세워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 1846년(헌종 12) 당시의 현감 정주석(鄭胄錫)이 장수군 장수면(長水面) 장수리에 논개가 자라난 고장임을 기념하기 위하여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를 건립하였다. 그가 비문을 짓고 그의 아들이 글씨를 썼다. 1956년 '논개사당(論介祠堂)'을 건립할 때 땅 속에 파묻혀 있던 것을 현 위치에 옮겨놓았다. 비문에는 "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라고 씌어 있다. 장수군에서는 매년 9월 9일에 논개를 추모하기 위해 논개제전(論介祭典)을 열고 있다. 진주성이 왜적에게 짓밟힐 때 기녀로서 적장을 유인하여 남강(南江)에 빠져 산화한 사실은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널리 유포되었다. 구전되어오던 그녀의 순국사실이 문헌이나 금석문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1620년경부터라고 추정된다. 사회의 멸시를 받던 기녀의 몸으로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친 충성심에 감동한 유몽인(柳夢寅)이 《어우야담 於于野談》에 채록함으로써 문자화되었던 것이다. 한편 진주 사람들이 그녀의 애국적 행위를 기리고 전하기 위하여, 그녀가 순국한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새겨넣은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그러나 그녀를 추모하는 지역민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중의 충신·효자·열녀를 뽑아 편찬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는 그녀의 순국사실이 누락되었다. 이는 유교윤리에 젖어 있던 일부 편집자들이 관기를 정렬(貞烈)로 표창함이 불가하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보수적인 집권사대부들의 편견 때문에 그녀의 애국충정은 정당하게 평가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일부 사대부들의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진주성민들은 성이 함락된 날이면 강변에 제단을 차려 그녀의 의혼(義魂)을 위로하는 한편, 국가적인 추모제전이 거행될 수 있도록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진주성민들의 오랜 노력이 결실을 맺기 시작한 것은 경종 이후의 일이었다. 진주성민들은 절의(節義)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바친 그녀의 의로운 행위는 마땅히 정부가 표창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같은 진주성민들의 요청을 받은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은 1721년(경종 1)에 기녀의 신분으로 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그녀의 의열에 대한 국가의 포상을 비변사에 건의하였다. 이때 거론된 구체적인 포상방법은 봉작(封爵)을 내려주고 사당(祠堂)을 건립하여주는 것이었다. 최진한의 건의를 받은 비변사는 보다 확실한 인증자료의 제시를 요구하였다. 이에 최진한은 관민합동으로 〈의암사적비 義巖事蹟碑〉를 건립하고 난 다음 그 인본을 제출하여 자손의 급복(給復)에 대한 특전을 허락받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는 비록 진주지역민들의 숙원이었던 논개에 대한 봉작과 건사사액(建祠賜額)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그녀의 순국사실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 되었으며, 의기가 논개를 지칭하는 공식호칭이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녀의 자손에 대한 급복의 특전이 베풀어진 20여년 뒤에 의혼을 봉안하는 사당이 건립되었다. 1739년(영조 16)경에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의 노력으로 의기사(義妓祠)가 의암부근에 세워지고, 논개에 대한 추모제가 매년 국고의 지원을 받아 성대히 치루어짐으로써 국가의 공식적인 포상절차가 마무리되었던 것이다. 의기사는 그뒤 홍화보(洪和輔)·홍백순(洪百淳)·이지연(李止淵) 등이 여러 차례 보수하여 지금까지 촉석루(矗石樓)옆에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1868년(고종 5)에 진주목사 정현석(鄭顯奭)의 노력으로 매년 6월에 300여명의 여기가 가무를 곁들여 3일간 치제하는 대규모 추모행사인 ‘의암별제(義巖別祭)’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이 의암별제는 일제의 방해로 중단되고 의식절차만이 《교방가요 敎坊歌謠》에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논개의 출생이나 성장과정에 대한 다양한 이설이 제시되었다. 논개는 전라도 장수출신이며, 양반가문출신이고, 성은 주씨(朱氏)이며, 최경회(崔慶會) 혹은 황진(黃進)의 애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문헌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논개의 출신성분에 대한 지나친 미화는 신중을 기하여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 忠烈實錄, 湖南三綱錄, 晉州城의 義妓論介考(柳承宙, 韓國史學論叢, 崔永禧先生華甲紀念論叢刊行委員會, 1987) 晉州義巖別祭誌(成季玉編, 진주민속예술보존회, 1987). 〈柳承宙〉

 

 

 

 

 

한국의 美 신분이 어떠하였든 논개의 충절은 길이 빛 날 것입니다. 2007/06/07 18:41:46  
풀뿌리 주논개 의암부인이 강물에 몸을 던진 순간의 처연한 마음은 기린다거나, 짐작해볼 대상은 아니고 그저 상상해 볼 뿐이지요. 감사합니다. 배달9204/개천5905/단기4340/서기2007/6/11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2007/06/11
삼파수선인 이런 정신이 우리나라를 지탱해온 근간이라 생각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가나나 고위층은 한심한데 이런 남녀 백성이 나라를 구하고있슴니다. 일본장수들도 풍신수길이도 민병이 일어날줄은 예상하지 못했다는군요, 남자로서 그냥 시끄러운세상 보는것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2007/06/12 14:17:50  
풀뿌리 그렇지요? 누가 알아주던, 알아주지 않던 이름없이 大意를 위해 죽어간 民草들이 이 나라와 배달 겨레를 지켜왔지요. 동감입니다. 배달9204/개천5905/단기4340/서기2007/6/13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2007/06/13  
박원 풀뿌리님 여전하신 모습 돌아보고 갑니다. 한번 찾아뵙겠다고 한 약속은 기억나는데 여유가 없어 늘 아쉽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2007/07/11 16:07:39  
풀뿌리 박원 화백님! 찾아 주셨군요. 언젠가 산행 한번 같이 하지고 제안드렸는데 기억하시는군요. 저에게 그동안 큰 변화가 있었답니다. 물론 문학과 역사와 산하에의 열정에 변화가 아니고 13년간 저의 정열과 땀이 배인 정든 한밭의 직장을 떠나 한양의 직장으로 옮기고 집도 이사하게 되었답니다. 감사드리며... 제안은 아직 유효합니다. 건강하세요. 배달9204/개천5905/단기4340/서기2007/8/2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2007/08/02 09:21:20  
청아 풀뿌리님, 오랫만입니다.. 논개 유적지가 의외로 크게 느껴지는군요..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마음>으로 기억되는 논개의 존재를
새롭게 조명해 봅니다.. 2007/08/02 16:48:45  
풀뿌리 청아님의 방문 감사드립니다. 수주 변영로는 주논개 부인을 기생 논개로 전제하고 강난콩보다 더 붉은 마음으로 노래했기에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배달9204/개천5905/단기4340/서기2007/8/2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2007/08/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