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여행과산행길

물봉선이 만발한 청계산(07/09/02)

이름없는풀뿌리 2015. 7. 15. 14:39

물봉선이 만발한 청계산 (1) 2007/9/8(토), 경부고속국도 서울초입의 청계산, 야트막하면서도 결코 만만치 않다는 그를 아내와 찾아보다. (2) 12:50 옛골 먹거리 골목을 지나 오르는 길 내내 물봉선이 만발하여 계곡을 장식. 시냇가의 봉선화 같다하여 물봉선이라는데 청계산의 물봉선은 유난히 큰 꽃받침을 자랑. 벌개미취, 칡, 마타리, 어수리등도 꽃을 피우고 등산객은 역시 인구밀도가 높아 넘쳐나고 번잡한 발길에 登路는 반질반질하다. (3) 한시간만에 오른 안부에 기타반주에 트로트를 애잔하게 부르는 무명가수가 가을을 알리다. 사람들은 그 앞에 앉아 그의 노래에 哀想에 젖어 있다. (4) 정여창의 說話가 있는 이수봉에 오르니 수많은 사람들이 앉아 오늘의 피로를 삭이고 있다. 국사봉, 매봉, 그리고 무슨무슨 고개... 흡사 대전의 수통골같다. (5) 하산길은 같은 길을 피하고 금토동능선이 완만하다하여 그리로 방향을 잡다. 그저 부드러운 여인네의 허리 같은 포물선을 지닌 등로의 주변으로 누리장꽃이며, 애기며느리밥풀꽃이 피어있다. [옛골-이수봉-금토동능선-옛골] 3시간 소요.(천천히) 디카가 고장 나 이번에도 핸드폰카로 찍었는데 기술의 발달로 그런대로 볼만하다. 배달9204/개천5905/단기4340/서기2007/9/2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1. 들머리를 지키는 아주 잘 생긴 장승

 

 

 

 

2. 유난히 큰 꽃받침을 자랑하는 청계산 물봉선

3. 수호초

4. 정상부에 오르는 급경사의 오름계단

5. 안부에서 등산객들에 무료로 음악을 선사하는 무명가수

 

 

 

 

7. 정여립과 이수봉, 그리고 정상부의 이정표들

 

 

 

8. 봉오재에 억새꽃도 패어나고 있었다.

9. 옛골 날머리에 해맑은 코스모스가 배웅하고...

 

 

 

 
 

 

 

풀뿌리

정여창(鄭汝昌) 1450(세종 32)∼1504(연산군 10).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홸), 호는 일두(一亘)로 판전농시사 정복주(鄭復周)의 손자며, 함길도병마 우후(咸吉道兵馬虞候) 증 한성부 좌윤(贈漢城府左尹) 정육을(鄭六乙)의 아들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 · 학자로 중구 회현동 1가에 거주하였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공부하다가,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김굉필(金宏弼) 등과 함께 학문을 배웠다. 성종 11년(1480) 성종대왕(成宗大王)이 성균관에 유서를 내려 자신의 수양에 힘쓰고 경학에 밝은 사 람을 구하자 성균관에서 그를 제일로 천거하였다. 지관사 서거정(徐居正)이 그를 경연에서 진강 하게 하려 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1483년 성균관 상사(上舍)의 동렬(同列)에서 그를 이학(理學) 으로 추천하였다. 1486년 어머니가 죽자 3년 동안 시묘하였다. 그 뒤 지리산 진양의 악양동(岳陽 洞) 섬진(蟾津)나루에 집을 짓고 대나무와 매화를 심으며 이곳에서 평생 은거하려 하였다. 1490년 참의 윤취(尹就)에 의해 효행과 학식으로 천거되어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이 되었으나 사양하니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 해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을 거쳐 세자시강원 설서 (世子侍講院說書)가 되어 동궁(연산군(燕山君))을 보도하였으나 동궁(연산군(燕山君))이 좋아하지 않았다. 연산군 1년 (1495) 안음 현감(安陰縣監)에 임명되었다. 이 때 백성들의 질고가 부렴(賦斂) 에 있음을 알고 편의수십조(便宜數十條)를 지어 시행한 지 1년 만에 정치가 맑아지니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 당시 감사는 해결하기 어려운 옥사가 있으면 그에게 물어 시행하였는데 원근에서도 판결에 의문나는 것이 있으면 그를 찾아 물었다. 민사(民事)의 여가에는 고을의 자제를 가려 뽑아 친히 교육하였고, 춘추로 양로례(養老禮)를 행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종성(鍾城)으로 유배되었다. 죽은 뒤 1504년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되었다. 그는 논어에 밝았고, 당시 성리학의 대가 로서 성리학의 근원을 탐구하여 체용(體用)의 학(學)을 깊이 연구하였다. 중종대왕(中宗大王) 때 우 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광해군 2년(1610) 문묘에 배향되었고, 나주(羅州)의 경현서원(景賢書院), 상주 (尙州)의 도남서원(道南書院), 함양(咸陽)의 남계서원(藍溪書院), 합천(陜川)의 이연서원(伊淵書院), 거창(居昌)의 도산서원(道山書院), 종성의 종산서원(鍾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헌(文獻) 이며, 저서로 《용학주소(庸學註疏)》 · 《주객문답설(主客問答說)》 · 《진수잡저(進修雜著)》 등 이 있었으나 무오사화 때 부인이 모두 소각하였고, 지금은 정구(鄭逑)의 《문헌공실기(文獻公實記)》 속에 그 유집(遺集)이 전한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燃藜室記述, 新增東國輿 地勝覽, 韓國儒學史(李丙燾, 아세아문화사, 1987)  2007/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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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 [鄭汝立, 1546~1589]

조선 중기 문신 겸 사상가.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는 천하공물설과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 하사비군론 등 왕권 체제하에서 용납될 수 없는 혁신적인 사상을 품은 사상가이기도 하였다.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자는 인백(仁伯)이다. 전라북도 전주에서 첨정(僉正)을 지낸 희증 (希曾)의 아들로 태어났다. 통솔력이 있고 명석하였으며,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에 통달하였다. 1570년 (선조 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1583년(선조 16) 예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수찬(修撰)이 되었다. 처음에는 이이와 성혼의 문하에 있으면서 서인(西人)에 속하였으나, 이이가 죽은 뒤 동인(東人)에 가담 하여 이이를 비롯하여 서인의 영수인 박순·성혼을 비판하였다. 이로 인하여 왕의 미움을 사자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인망이 높아 낙향한 뒤에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이후 진안군의 죽도(竹島)에 서실(書室) 을 세워 활쏘기 모임[射會]을 여는 등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동계를 조직하고 무력을 길렀다. 이때 죽도와 의 인연으로 죽도선생이라고도 불렀다. 1587년(선조 20)에는 전주부윤 남언경의 요청으로 대동계를 이끌고 손죽도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다. 이후 황해도 안악(安岳)의 변숭복, 해주(海州)의 지함두(池涵斗), 운봉 의 승려 의연(義衍) 등의 세력을 끌어모아 대동계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였다. 1589년(선조 22) 황해 도 관찰사 한준과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등이 연명하여 정여립 일당이 한강이 얼 때를 틈타 한양 으로 진격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고발하였다.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혀가자 정여립은 아들 옥남(玉男) 과 함께 죽도로 도망하였다가 관군에 포위되자 자살하였다. 이 사건의 처리를 주도한 것은 정철 등의 서인 이었으며, 동인인 이발(李潑) ·이호(李浩) ·백유양 등이 정여립과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되는 등 동인 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를 기축옥사라고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라도는 반역향(叛逆鄕)이라 불리 게 되었고, 이후 호남인들의 등용이 제한되었다. 정여립에 대하여는 어릴 때부터 잔인하고 포악하였으며, '이씨는 망하고 정씨는 흥한다[木子亡尊邑興]'는 《정감록》류의 설을 퍼뜨려 왕조를 전복시키려 한 인물로 보기도 한다. 반면에 평소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는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누구라도 임금 으로 섬길 수 있다'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 등 왕권체제하에서 용납될 수 없는 혁신적인 사상을 품은 사 상가이기도 하였다. 또 그가 대동계를 조직하여 무력을 기른 것은 이이의 십만양병설에 호응하였기 때문이라 는 견해도 있다. 이런 이유로 정여립은 서인과 동인 사이에 벌어진 당쟁의 희생자로서 그가 주도했다는 역모 (逆謀)는 조작되었다는 설도 있다.  2007/09/09 09:44:13  

풀뿌리 16세기 조선은 훈구세력의 장기 집권이 끝나고, 사림이 새로운 정국의 주도세력으로 떠오르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그 시기는 또한 사림의 내부에서도 분열의 조짐이 서서히 움트던 시간이기도 했죠. 사림은 성리학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로 구분되더니, 이내 이조전랑의 문제를 두고 동인(東人)과 서인 (西人)으로 갈라서게 됩니다. 하지만 비록 양당으로 분리되었다 하더라도, 이 시기의 붕당정치는 상대 당의 학풍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그런 못난 정치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정국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상대 당보다 더 좋은 정책을 내놓아야 했었죠. 오늘로 말하자면 정권획득을 위해 대선후보들이 정책을 내놓듯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조선 중기의 조정은 공론과 상대당을 인정하는 분위기 속에서, 건전한 붕당정치가 행해지는 시기였 던 것입니다. 조선의 대표적인 사상가, 인백(仁伯) 정여립(鄭汝立)은 바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사상 을 형성해 나간 인물이었습니다. 1546년, 그는 전라북도 전주에서 첨정(僉正)을 지낸 정희증(鄭希曾)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그런데 어린시절 여립에 대한 일화로 아주 재미있는 것이 있는데, 여기에 소개해 보겠습니다. 정 여립이 장성하게 되자 체구가 장중하고 얼굴빛이 청적색(靑赤色)이었다. 나이 겨우 7∼8세에 여러 아이들과 장 난하고 놀면서 칼로 까치 새끼를 부리에서 발톱까지 도막내었다. 희증이 누가 한 짓이냐고 꾸짖으며 묻자 그의 집 어린 여종이 여립을 가리켜 말하였는데, 그날 밤 여립이 그 아이의 부모가 이웃 집에 방아찧으러 나간 틈을 타서, 칼을 가지고 몰래 들어가 그 아이를 찔러 죽여 피가 자리에 흥건히 흘렀다. 그 부모가 그것을 보고 울부 짖으면서 몸부림쳤으나 그 이유를 알지 못하였다. 온 마을 사람이 모여 구경하고 있는데 여립이 서서히 나와 말하기를, “이 아이가 나를 일러 바쳤으므로 내가 죽였다”고 하는데, 말씨가 태연하였다. 이 말을 들은 사람 들은 크게 놀랐고 어떤 사람은 악한 장군이 태어났다고 하였다. -《선조 수정실록》22년 10월 (서기 1589년)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명석하였고 통솔력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하지만 겨우 8세의 아이가 까치를 칼로 도막낸 것이나, 자신을 고발한 아이를 칼로 베었던 것은 정상적인 생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대목인데요, 이 기록만을 믿고 따르면 그는 잔인하고, 매우 비정한 면모도 지녔던 것으로 느껴집니다. 하지만 훗날 정여립이 왕조를 부정 하는 '불손한' 사상을 품었던 것과 모반사건을 일으켜 처형되었던 일들을 생각해 본다면, 역도를 비하시키려는 의도가 없진 않았나 하는 조심스런 추측이 들기도 합니다. 그는 1570년에 치러진 식년문과에 응시하여 당당히 합 격하고, 곧 이이·성혼의 문하에 들어가 서인(西人)의 당적을 갖습니다. 이이와 성혼의 밑에서 이내 그는 두각을 나타내는데요, 율곡 이이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우계 성혼 역시 그에게 거는 기대가 남달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서인의 사상적 체계를 갖춘 두 사람의 각별한 후원에 힘입어, 그는 명실상부한 서인의 핵심인사로서 급부상하게 됩니다.  2007/09/09 09:47:41  
풀뿌리 그 와중인 1584년에 율곡 이이가 죽자, 정여립은 자신을 지지해주던 서인을 저버리고 집권당인 동인(東人)으로 당 적을 바꾸게 됩니다. 그러나 신의를 저버린 그의 행동은 서인으로부터 집중 탄핵을 받았고, 이 사건으로 염증을 느낀 그는 벼슬을 내던지고 낙향하여 다시는 출사하지 않을 것을 결심합니다. 그 때부터였을 것입니다. 그래도 워 낙 인망이 높았던 그 였던지라 그의 밑으로 수많은 인재들이 모여들었는데요, 그는 그들을 규합하여 대동계(大同契) 를 조직하고 학문과 무예를 연마 시킵니다. 그러면서 그는 평소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을 내세워 '천하는 모두의 것이므로 주인이 따로 없다'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고 매우 급진적인 사상을 설파하기도 하고, '백성에게 해가 되는 임금은 죽여도 된다'고 하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주장해 공화정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좀더 행동적인 지침 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그가 조직한 대동계의 무사들 역시 그의 명령 하나에 죽고 사는 충성스런 심복들이었습니다. 1587년 정해왜변이 일어나자 전주부윤 남언경이 그에게 지원을 요청하는데, 그는 대동계 무사들을 이끌고 나아가 왜 구를 물리치고 승리를 거둡니다. 이후 그는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邊崇福), 해주의 지함두(池涵斗), 운봉의 승려 의 연(義衍)의 세력까지도 흡수하며 전국적으로 크게 세력을 떨치게 되죠. 이처럼 정여립이 각지에서 인망을 얻을 수 있 었던 것은, 그들에게 있어 그는 인민주권설을 주장하여 민중들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지도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연려실기술》을 보거나, 훗날 역도로 몰려 죽은 뒤의 기록이지만 《선조 수정실록》의 기록을 보면 그의 인기가 참으로 어떠하였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명망이 일찍부터 드러나 세상을 뒤덮었다. 사람들은 한 번이라도 그를 만나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연려실기술》권14 역적이 참주되었는데도 백성들 사이에서는 정여립이 죽지 않았다느니, 그 죽음이 아깝다느니 하는 유언비어가 생겨나 떠들썩하다. -《선조 수정실록》 23년 (서기 1590년) 그렇 습니다. 정여립이 조선의 왕조를 부정하는 발언을 일삼았던 것은 단순히 '이씨는 망하고 정씨는 흥한다(木子亡尊邑興)'고 하는 미륵사상에 기대어 정씨왕조(鄭氏王朝)를 구축하고자 하던, 그런 일순간적인 탐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진정으로 인민주권을 주장하고 공화주의를 제창한 선각자인 동시에, 또한 시대를 앞서간 사상가였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붕당정치가 행해졌다고 하는 선조의 치세에 정여립과 같은 인물이 나왔던 사실은, 이후 50여년이 지나 의회주의가 꽃핀 영국에서 등장한 공화주의자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을 연상케 하여 미묘한 감정을 불러일으 키기도 합니다. 다만 크롬웰이 성공한 공화주의자였다면, 정여립은 실패한 공화주의자였다고나 할까요?  2007/09/09 09:50:32  
풀뿌리 한 사내가 있었다. 사내는 아들과 몇몇 사람을 거느리고 진안의 오지, 죽도의 바위산을 바라다보았다. 높지는 않지만 우뚝 솟은 천반산. 한가할 때는 바둑을 두면서 천지운행을 도모하던 산이다. 사내는 먼저 아들과 일행을 칼로 찔렀다. 그러고는 칼자루를 땅에 꽂아놓고 스스로 칼날에 목을 대고 황소울음 소리를 내면서 쓰러졌다. 중앙정부에서 급파한 선전관이 도착했을 때, 사내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고 젊은이들은 아직 목숨이 붙어 있었다. -《우리 문화 기행》 주강현 1589년 10월, 조정으로 하나의 비밀장계가 도착합니다. 그것은 황해감사 한준이 보낸 것이었는데 바로 정여립의 역모를 고발하는 내용을 담고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한 통의 장계로 조정은 발칵 뒤집힙니다. 선조는 황해도와 전라도에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급파하고 정여립을 붙잡아들일 것을 명했습니다. 이에 진안현감 민인백이 군졸을 이끌고 정여립의 근거지인 죽도를 습격하자, 사태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음을 직시한 그는 결국 참모 변숭복을 죽이고, 이어 아들 정옥남과 박춘령을 벤 뒤에 자신마저 자결하며 최후를 맞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정여립 한 사람에만 국한되 어 종결되지 않았습니다. 전라도는 반역향으로 규정되어 이후 호남인들의 정계진출이 막힌 데다가, 서인의 정철(鄭澈)이 진상을 규명하는 조사를 맡으며 사건은 정치적으로 악용됩니다. 이발(李潑) ·이호(李浩) ·백유양(白惟讓) ·유몽정(柳夢井) · 최영경(崔永慶) 등 동인의 명사들이 정여립과 친했다는 이유만으로 붙잡혀 참수되었으며, 정언신(鄭彦信) ·정언지(鄭彦智) · 정개청(鄭介淸) 등은 유배의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동인의 인사 중 무려 1,000여명이 화를 입었다고 하니, 사건이 어떤 정도로 확대되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이후 서인에 대한 처우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동인은 북인과 남인으로 갈라지니, 동인의 분당에도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끼쳤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그렇다 하더라도 정여립을 정치적으로 어떠어떠한 사건을 초래한 장본인으로만 기억하는 것은 아주 슬픈 일입니다. 그는 서양의 올리버 크롬웰보다 50여년 앞서 출현한 최초의 공화주의자였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받아들이기에 그의 사상은 너무도 급진적인 것이었지요. 시대를 앞서간 대사상가 정여립, 그의 못 다 이룬 꿈은 그래서 그처럼 우리의 마음을 아리게 하는가 봅니다.  2007/09/09 09:51:20  
풀뿌리 정여립(鄭汝立)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는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 하사비 군론(何事非君論) 아마도 조선왕조에서 최초의 공화주의자(共和主義者)로 불릴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천하는 공물(公物) 이라는 지금의 인민주권설에 해당되는 사상을 주창 하였고 누구든 능력에 따라 임금도 될수 있다는 혁신적 사상의 소유자 였기 때문입니다. 어찌보면 당시로서는 너무도 앞서간 사상가 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참고로 전 건국대 정외과 교수이신 신복룡님은 정여립을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 보다도 50여년 앞선 공화주의자 라고 평가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정여립과 이 른바 기축옥사는 땔래야 땔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인데 결국 정여립은 기축옥사로 인해 사망하게 되는 것이지요. 1589년 10 월2일, 정여립이 모반했다는 황해감사(종2품) 한준의 고변으로 기축옥사는 시작 됩니다. 지금도 학계에서는 여전히 이 기축 옥사에 대해 진위 논쟁이 치열한데 이제는 기축옥사가 소위 조작이라는 데에 더 무게중심을 두고 있는 상황 입니다. 어쨋든 한때는 율곡 이이도 칭찬해 마지 않을 정도로 당대의 천재라 불리웠던 정여립, 당시 임금이던 선조 앞에서도 두 눈을 부릅뜨 고 선조를 쳐다 보았다고 할 정도로 기개가 당당했다고 하는 정여립, 그는 정말 모반을 했을까요? 그러나 분명한건 기축옥사 로 인해 정여립뿐만이 아닌 최영경,이발, 정언신 등과 같은 진보적이고 유능한 인사들이 대부분 죽거나 유배를 갔다는 것 입 니다. 이들은 바로 동인(東人) 이었습니다. 일각에서는 이때에 죽거나 다친 자가 무려 1천여명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 그래서 흔히 기축옥사를 조선조의 광주사태 라고도 합니다. 이때에 호남 인사들이 많이 포함되었기 때문입니다.  2007/09/09 09:58:08  
풀뿌리 바로 이 정여립에 대해 일종의 평전식으로 나온 책이 있어 추천하고자 합니다. 재야사학자인 신정일님이 저술한 책인데 바로 [지워진 이름 정여립] 이라는 제하의 책입니다(가람기획 발간) 이 책은 정여립의 출생부터 성장과정 그리고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사사한
시절,서인에서 동인으로 전향한 모습,정해왜변때 관군을 도와 일본군을 격퇴한 정여립과
대동계, 기축옥사 등등이 여러 사료와 함께 상세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정여립에 대한 왜곡된 시각도 날카롭게 지적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기축옥사의 허와 실을 예리하게 짚어내고 있습니다. 아마도 질문자님이 정여립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추가로 권하고 싶은 정여립에 관한 책은 서두에 언급한 신복룡 교수님이 저술한 [한국의 정치사상가] 라는 책이 있습니다. 집문당에서 발간 되었는데 정여립을 비롯하여 전봉준,서재필,신채호,김구,등 조선시대의 정치가들을 정치학 적인 차원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역시 정여립을 공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소 구하기 힘들것이라 예상 되는데 또 하나의 자료가 있습니다. 지금은 폐간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중앙일보사에서 발간한 월간지 윈(WIN) 이라고 있습니다. 이책에 서는 매월호마다 역사인물 탐구라는 코너를 따로두어 한 인물에 대해 심층분석하는 기사가 실리게 됩니다. 바로 이 월간지 윈의 1997년 4월호에 보면 역시 정여립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공동으로 엮은 형식의 글인데 역시 정여립을 아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 혹 헌책방에 가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저는 현재 소장하고 있습니다) 2007/09/09 09:5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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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 1546∼1589(명종 1∼선조 22)

정여립은 문과에 급제한 뒤 이이의 총애를 받아 서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이이를 배반하고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동인으로 옮겼습니다. 당을 옮긴 것 때문에 서인의 미움도 사고, 선조의 눈 밖에 나서 벼슬을 버리고 낙향을 합니다. (정여립이 동인에 동조한 이유로 정여립이 이조전랑에 올랐을 때 이이가 반대했던 것 때문이라는 말도 있고 정여립의 직선적이고 적극적인 성격 이 동인의 성향과 일치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어요. 후자가 더 납득이 되는 이유랍니다;) 어쨋든 낙향한 정여립이 동인들 사이 에서는 영향력이 컸답니다. 진안 죽도에 정여립이 대동계를 조직하여 신분에 관계없이 사람들을 모아 정기적으로 활쏘기 대회도 하고, 전라도 사람 뿐아니라 황해도 사람도 참여했죠. 이 대동계가 1587년에는 전라도 손죽도에 침입한 왜구들을 물리치기도 하 구요. 점점 세력을 확장해나가다 보니 자연스레 주목을 받게되고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황해도 관찰사의 고변이 임금에게까지 전 해졌답니다. (고변의 내용인 즉, 정여립의 대동계 인물들이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해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동시에 봉기하여 입경하 고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 하기로 했다 이 때문에 정여립은 아들과 죽도로 피신하였다가 자살했습니다. 서 인의 정철이 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동인의 인사들이 제거되었습니다. 거의 1000여명 가까이가 처벌을 받았답니다. 이 사건이 '기축 옥사' 입니다. (이 사건으로 서인이 주도권을 잡았지만 후에 건저의 문제로 다시 동인이 득세했습니다)평소 정여립이 질문하신문이 말하신 '천하가 공물이니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리오. ……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다는 것은 …… 성현의 통론은 아니다. ……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는가' 는 등 과격한 주장을 한 점, '이씨가 망하고 정씨가 흥한다'는 도참 신앙을 퍼뜨린 점, 선조를 비판하고 조선의 운수가 다했음을 주장하는 문서가 나왔다는 점에서 반역기도를 확실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조작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정말 정여립이 반역을 시도한 것이라면 집에 각종 문서를 남겨놓고 별장으로 도망가 잡히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았을 거라는 것이죠.  2007/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