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2500년 전 남극에 첨단문명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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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의 수학을 사용한 의문의 고대지도
- 숨겨진 장소의 지도
1960년 햅굿교수는 1513년에 피리레이스라는 오스만 투르크의 제독이 그린 지도가 실제로 현재 남극대륙을 그린 것이 분명하다는 미국 공군의 답신을 받는다.
지금 현재 1.6킬로미터 두께의 얼음으로 덮인 이 지역을 어떻게 16세기 사람이 정확히 그릴 수 있었을까? 행콕은 그 비밀을 찾아간다. 이 지도는 알고보면 조작이나 창작과는 관계가 멀다. 아프리카 서해안, 남아프리카 동해안, 남극대륙의 북해안을 망라한 이 지도는 이미 있던 고대지도를 베낀 것이다.
아마도 남극대륙이 얼기 전인 기원전 1만3천년에서 기원전 4천년 사이에 남극 연안을 조사할 능력이 있던 사람들이 그린 고대지도를 베낀 것이다. 이 지도를 본 햅굿은 그의 추리를 간단하게 정리했다.
① 남극대륙은 한때 얼음으로 덮여 있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② 당시 남극이 얼음이 아니었던 것은 지금보다 3200킬로미터 북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③ 대륙이 이동한 것은 지각이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지각이동은 대륙이동과는 다른 것이며 오렌지 껍질과 알멩이가 따로 놀듯 내부의 부드러운 부분은 그대로 두고 표층부가 옮겨진 현상이다.
④ 남극대륙이 이동하는 동안 얼음으로 덮여 현재상태에 다다랐다.
- 남쪽 대륙에 있는 강
워싱턴 D.C.의 의회도서관에서 햅굿이 발견한 중세 지도와 해도는 다른 도법으로 그린 그 전의 지도를 모사한 것으로 남극대륙을 선명하게 그려놓고 있다.
이 지형과 강은 지진파측정결과 나타난 얼음 아래의 대륙과 일치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런 지도가 하나 뿐이라면 우연이라고 하겠지만 그렇지도 않다. 16세기 네덜란드 사람인 메르카토르의 지도, 18세기 프랑스 사람인 부아슈의 지도, 오스만투르크 하지 메이드의 지도역시 얼음 아래의 남극을 그려놓고 있다.
보수적인 학자들은 남극이 얼음이 아니었던 적은 수백만년전이라고 말하지만 이 지도들은 햅굿의 주장을 지지하는 듯하다. 적어도 기원전 4천년전, 신석기인들이 이 지도를 그린 것일까? 이 지도들은 남아메리카의 상세한 지형과 양대륙을 연결한 베링해협의 땅을 그리고 있다. 1만년전 북구의 빙하가 녹아 해면이 높아지면서 사라진 베링해협의 육로가 여기에는 있는 셈이다.
- 사라진 과학의 지문
1569년에 작성한 메르카토르의 세계지도는 얼음이 없는 남극대륙의 지도를 상세히 그려놓고 있다. 그러나 남아메리카 해안의 정밀도는 오히려 떨어진다.
이 부분은 스페인 탐험가의 관찰에 의지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아직 경도측정장치가 없었던 것이다.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경도를 측정할 방법이 없었다. 남북의 위도는 태양과 별의 각도를 이용하면 간단히 잴 수 있지만 경도를 재는 것은 위치와 시간을 모두 측정해야 했기 때문에 더욱 정확한 시계가 필요했고 이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18세기에 이르러서이다.
그런데 이 고지도들은 정확한 경도를 나타내고 있다. 1339년의 둘체르트 포르톨라노라는 해도는 유럽과 북아프리카를 그리고 있는데 흑해와 지중해의 경도가 0.5도 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이런 결과를 미루어볼 때 이 지도들은 이미 사라진 고대의 정확한 지도를 모사한 것이다.
특히 이 지도들은 현대에 와서나 사용한 고도의 수학을 사용하고 있다. 구형 삼각법, 평사도법 등을 사용한 흔적이 보인다. 이런 지도는 중국에서도 발견되었다. 따라서 전세계적으로 동일한 유산을 인류가 계승했고 이용했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참고로 현 인류에 의해 남극대륙이 발견된 시기는 1818년이다.
*오론테우스 피나에우스의 지도 (1531년) : 얼음으로 뒤덮히지 않은 해안, 산맥, 강이 그려져 있다.
*부아슈의 지도 (1737) : 이 지도는 얼음 아래에 있는 남극대륙의 지형을확실히 묘사하고 있다.
남극의 얼음 밑이 이러한 대륙의 지형이라는 건 국제 지구 물리년이었던 1958년 실시한 정밀 지질탐사가 이루어지기
전까진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부아슈의 지도에 pole이라고 쓰여있다. pole은 극이라는 뜻이다.
*1802년의 러시아의 지도이다. 이 지도는 세상이 아직 남극대륙의 존재를 오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남극대륙은 1818년에 발견되었다.
미국 킨 주립대학의 찰스 햅굿 교수는 중세에 만들어진 지도를 연구하다 지도가 당시의 과학기술 수준에 어울리지 않게 매우 정확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신의 지문이란 책을 보면 피라미드가 보통의 사막에서 나타나는 바람에 의한 풍화작용대신 비에 의한 풍화작용의
흔적이 나타나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1만년전의 기후가 온난다습한 지역이였을때 피라미드가 지어졌음을 뜻하는
과학적인 증거자료인 것이다.
이를 볼때 피라미드는 고대인들이 지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고대인들은 과연 왜 1만년전에 살다가 어느순간 사라졌을까? 이를 알려면 동양의 역철학을 알아야 한다.
마흐메드 무힛딘 피리(Ahmed Muhiddin Pîrî;1465년~1553년) 제독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군인이자, 지리학자이다. 1499년부터 1502년까지 계속된 오스만 제국과 베네치아 공화국 간의 전쟁에 종군해 시칠리아·코르시카·샤르데냐 해역에서의 각종 작전에 종사하였으며, 1516년부터 1517년까지 오스만 제국 제9대 술탄 셀림 1세(Selim Ⅰ)가 맘루크 왕조를 정복할 당시 시리아·이집트를 병합하는 전쟁에도 참전하였다. 1522년에는 오스만 제국 제10대 술탄 쉴레이만 1세(Süleyman Ⅰ)가 추진한 로도스 원정에도 참전했고, 1538년에 벌어진 프레베자 해전에서 카톨릭 신성동맹 해군을 격파했던 바르바로사 하이레딘(Barbaros Hayreddin) 제독의 부하 장수로서 활약했다.
1547년에 노련한 해군 지휘관으로 인정받고 있던 그는 홍해에 주둔하는 인도양 방면 함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1551년에 에덴을 정복하고 호르무즈 해협과 무스카트 연안 등지에서 포르투갈 해군의 중동 진출을 견제했다. 그러나 페르시아만의 바스라 근해에 포르투갈 해군이 나타났다는 허위정보를 사실로 믿고 출동했다가 오늘날의 바레인 근해에서 갤리선 한 척을 격침시키고 공격을 중지함으로써 나중에 전선 도피의 책임을 추궁받아 체포되었으며, 쉴레이만 1세의 명령에 의해 카이로에서 처형되었다.
피리 제독은 생전에 해군 지휘관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상세한 세계 지도와 항해 안내서를 작성해 오스만 제국의 술탄에게 헌정함으로써 훌륭한 지리학자로 후세에 이름을 남겼다. 피리 제독이 작성한 지도는 오늘날과는 달리 얼음과 눈으로 뒤덮이기 전의 남극 대륙이 그려져 있다고 하여 많은 논란이 야기되고 있다. 문제의 이 지도는 1513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작성되었고, 아프리카 서해안, 남아프리카 동해안, 남극 대륙의 북해안을 망라하고 있다.
남극 대륙이 공식적으로 처음 발견된 것은 1818년 미국의 포경선에 의해서였고, 1821년 러시아의 군인 파비안 폰 벨링스하우젠(Fabian Gottlieb von Bellingshausen) 소장(少將)은 최초로 남극 대륙에 첫 발을 내디딘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피리 제독의 지도가 그려진 뒤 3백년도 더 흐르고 나서 남극 대륙의 위치가 확인된 셈이다. 즉 피리 제독은 남극 대륙의 북해안에 대해서 그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이 지도에서 특이한 점은 퀸 모드 랜드(Queen Maud Land) 지역의 해안이 얼음이나 눈에 뒤덮이지 않은 상태로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지질학적 증거에 따르면 얼음과 눈이 뒤덮이지 않은 상태에서 이 지역을 조사하는 것은 기원전 4000년 전에나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런 조사가 가능한 최초의 시기를 정확하게 밝힐 수는 없으나 퀸 모드 랜드 지역의 해안은 만년설로 뒤덮이기까지 적어도 9천년 동안은 빙결(氷結)되지 않았던 상태인 듯하다. 빙결되지 않았던 기원전 1만 3천년부터 기원전 4천년 사이에, 연안을 조사할 수 있었거나 또는 조사할 필요가 있었던 문명의 존재는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시 말해서 1818년까지 발견되지 않은 남극 대륙이 그려져 있는 것도 피리 제독의 1513년 지도의 수수께끼이지만, 누가 6천년 전에 얼지 않은 상태의 대륙 연안을 가장 먼저 그렸으며, 피리 제독은 그 자료를 어떻게 확보해서 이 지도를 작성했는가 하는 점도 진짜 수수께끼이다. 킨 주립대학의 찰스 햅굿 교수는 1960년 7월 미국 공군 제8정찰기술 비행대대에 피리 제독의 지도를 의뢰한 결과 헤롤드 올메이어 대령으로부터 남극 대륙의 북해안이 그려진 게 확실하다는 회신을 받았다고 밝혔다. 햅굿 교수는 피리 제독이 작성한 지도에 참고가 된 원본의 지도 가운데 몇 가지는, 특히 기원전 4세기 이전의 지도는 더 이전 시대의 지도를 모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피리 제독은 자신의 지도를 편집·작성할 때에 참고로 활용한 그 오래된 원본의 지도를 누가 그렸는지에 대해서는 기록해놓지 않았다. 그러나 1963년에 햅굿 교수가 이 문제에 대해서 새로우면서도 매우 시사적인 견해를 발표했다. 햅굿 교수는 피리 제독이 참고한 지도 중에서 일부, 특히 기원전 4세기 이전의 지도는 그때보다 더 오래된 지도를 모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기원전 4천년 전에 이미 기술적으로 매우 발달한 아직 알려지지 않은 초고대문명에 의해서 지구의 상세한 지도가 작성되었음은 반론의 여지가 없는 명확한 것이라고 단언했다. 햅굿 교수의 견해에 의하면, 편집된 지도와 원본 지도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콘스탄티노플을 비롯한 학술 중심지로 송부되었다. 그러다가 1204년에 베네치아인들로 구성된 제4차 십자군에 의해서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되었고 그때 지도가 유럽의 탐험대나 선원들의 손에 넘어갔다는 것이다.
“지도에 그려져 있는 것은 대개 지중해 지역과 흑해 지역인데 다른 지역의 지도도 남아 있다. 남아 있는 지도 가운데에 아메리카 대륙, 븍극해, 남극해의 지도가 있다. 이 사실에서 고대의 항해자들이 세계를 돌아다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믿기 어렵겠지만 이 사실은 고대 사람들이 얼음과 눈으로 뒤덮이기 전에 남극 대륙의 연안을 탐험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이 사실로부터 고대 사람들이 정확히 경도를 계측할 수 있는 항해도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 도구는 중세나 근대의 것보다도 더 우수한데, 이와 비슷한 수준의 도구가 만들어진 것은 18세기 후반의 일이다. 이런 사라진 기술의 존재는 먼 옛날에 사라진 문명이 있었다는 많은 가설에 신뢰성을 부여한다. 학자들은 그 증거들을 단순한 신화에 불과하다고 간단히 정리하고 만다. 그러나 여기에 중요한 증거가 있다. 이 증거가 있으므로 과거에 간단하게 정리하고 만 증거들도 다시 한번 마음을 열고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레이엄 헨콕 전〈선데이타임스〉기자는 햅굿 교수에 대해 “인류문명의 기원에 대해서 연구에 새로운 공헌을 함으로써 갈채를 받아야 마땅했지만 죽을 때까지 대부분의 동시대 학자들로부터 우둔하다는 빈정거림을 들어야 했으며, 주제와 관계 없는 사소한 요소를 거론하는 비난을 받아야 했고, 기본적인 문제와는 마주하려고 하지 않는 그들의 태도 때문에 냉대를 받았다”면서 안타까워했다.
햅굿 교수는 기원전 4천년 이전의 남극 대륙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론을 주장했다.
˝1. 남극대륙이 계속해서 얼음과 눈으로 뒤덮여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현재보다 더 따뜻한 시기가 있었다.
2. 당시의 남극대륙이 따뜻했던 이유는 현재보다 3200킬로미터 북방에 있었기 때문이다. 즉 당시의 남극대륙은 지금의 남극권 밖에 있었고 한대에 존재하지 않았다.
3. 대륙이 현재의 남극권 내의 위치로 이동한 것은 ‘지각이동(地殼移動)’이라는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 현상을 ‘판구조론(plate tectonics)’이나 ‘대륙이동설(大陸移動說)’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지각이동은 암권(岩圈)에 의해서 지구의 표층 전체가 내부의 부드러운 부분은 그대로 두고 몇 번에 걸쳐 이동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오렌지 껍질이 알맹이와 떨어져 헐거워지면 껍질 전체의 위치가 한번에 바뀔 수 있는 것과 같다.
4. 지각이동에 의해서 남극대륙이 남쪽으로 이동해가는 동안 대륙은 점점 차가워졌다. 수천년 동안 만년설이 형성되고 확대되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미국 프링스턴대학의 과학고등연구소에서 재직하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1879년~1955년) 박사는 이 지각이동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극지권(極地圈)에서는 얼음이 계속 퇴적하는데, 언제나 고르게 퇴적하는 것은 아니다. 지구는 회전하고 있기 때문에 불균등하게 퇴적된 얼음에 영향을 미치는 원심력 운동이 발생해서 그것이 지구의 딱딱한 지각에 전달된다. 계속적으로 증대되는 원심력 운동은 어느 지점에 도달하면 지구의 내부는 그대로 두고 지각만을 움직이게 된다.”
피리 제독의 지도는 “지구의 지각이 돌연 남쪽으로 미끄러졌기 때문에 그때까지 얼음이 아니었던 남극대륙의 일부가 얼음으로 뒤덮이게 되었다”라는 이론을 뒷받침하는 많은 증거를 내포하고 있다. 게다가 이 지도는 기원전 4천년 전에 그려진 원본을 참조하여 작성되었으므로 이것이 시사하는 인류문명의 역사는 매우 놀라운 것이다. 왜냐하면 기원전 4천년 전에는 문명이라는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현재의 정설로 굳혀놓고 있기 때문이다.
문명의 발달은 기원전 4천년 후에 시작되었으며, 고대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문명이 등장하여 기원전 3천년경에 전성기에 도달했고, 그로부터 1천 5백년 정도 후에 각지에서 문명이 동시에 발전했다는 것이 오늘날 고고학계의 대체적인 정설이다. 그러나 기원전 4천년 전의 남극 대륙을 그려놓은 피리 제독의 지도는 이같은 인류 문명의 최초에 대한 정설이 큰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해준다.
피리 제독이 1513년에 지도를 편집·작성하는데 베낀 원본은 콘스탄티노플의 제국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것으로 추측된다. 피리 제독은 직책과 신분상 이 도서관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그러나 피리 제독의 지도에 참조된 원본들은 현존하지 않는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피리 제독이 작성한 지도는 콘스탄티노플의 오래된 궁전 도서관에서 1929년에 재발견되었다. 양피에 그려진 이 지도는 둥글게 말린 채 먼지가 쌓인 책장에 놓여 있었다.
피리 제독의 지도는 올메이어 대령이 “1513년 당시의 지리적 연구와 한정된 지식을 생각한다면 어떻게 정보를 얻어서 이 지도를 작성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면서 1960년에 햅굿 교수에게 보낸 회신을 통해 당혹스러운 마음을 표현했듯이 얼음과 눈으로 뒤덮이기 이전의 남극대륙에 있는 퀸 모드 랜드의 지형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지역의 지형은 기원전 4천년경부터 매우 오랫동안 얼음과 눈으로 뒤덮여 그 모습이 완전히 숨겨져 있었다. 이 지역의 지형이 다시 밝혀진 것은 1949년 영국과 스웨덴의 공동조사단이 철저한 지질조사를 진행했을 때였다.
이런 희귀한 정보를 다룬 지도 작성자가 피리 제독뿐이었다면 그가 만든 지도를 크게 주목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그러나 있을 수 없다거나 혹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이 지리적 지식을 소유한 것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군인뿐만이 아니었다. 16세기 네덜란드의 지리학자인 게라르두스 메르카토르(Gerardus Mercator)가 1569년 일명 메르카토르 도법으로 작성한 지도에도 얼음과 눈으로 뒤덮이지 않은 남극 대륙이 그려져 있는데, 산맥과 강이 정확하게 표기돼 있다. 18세기 프랑스의 지리학자 필립 부아슈가 남극 대륙이 정식으로 발견되기 꽤 오래 전인 1737년에 발간한 지도에도 역시 얼음과 눈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의 남극대륙의 모습을 섬뜩할 만큼 정밀하게 보여주고 있다.
국제지구관측년(國際地球觀測年)이었던 1958년 미국·영국·스웨덴 등 세계 각국의 파견탐사대에 의해 전개된 지질조사는 부아슈의 지도에 그려진 남극대륙의 지형이 매우 정확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1737년에 발표된 부아슈의 지도는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는 고대의 원본지도를 바탕으로 얼음과 눈 아래에 있는 남극대륙의 지형을 확실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장치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중세 시기의 많은 지도 작성자들이 기원전 4천년 이전의 남극대륙을 그린 이 고대 지도의 비밀을 알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모든 지도 작성자들은 혹시 무의식 중에 사라진 초고대문명의 풍요로운 과학적 유산의 계승에 참가했었던 것은 아닐까?
1장, 세계를 뒤흔든 한 장의 지도- 천하전여총도
1. 천하전여총도
2006년 1월 중순의 어느 날. 필자는 영국과의 시차를 고려하여 늦은 오후에 이르러서야 인터넷을 통해 각종 언론매체의 외신란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틀 전 ‘세계일보’가 예고한 단신 기사에 의하면 세계역사를 새로 써야할지도 모를 놀라운 고지도 한 장이 그날 영국 런던에서 공개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세계역사를 바꿀만할 지도라?
그도 그럴 것이 ‘세계일보’는 그 날 공개될 예정인 고지도가 1418년의 지리지식이 담긴 중세 중국의 지도로, 놀랍게도 오늘날 접하는 세계지도의 지형윤곽이 거의 담겨 있음을 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1418년이라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첫 항해에 나서기보다 무려 74년이나 이른 시기가 아닌가?
필자는 처음에 쉬이 믿기지 않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문제의 지도가 중국의 지도라는 데에 있었다. 무엇보다 중국은 ‘짝퉁’과 ‘가짜’의 이미지로 세계적으로 유명한데다, 이번 지도의 공개가 한 해 전인 2005년 중국 전역에서 대대적으로 벌어진 유명한 정화鄭和 제독의 첫 항해 6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최근 세계적 관심과 논쟁을 낳고 있는 명나라 정화함대의 항해궤적에 대한 의문, 또 지난 3년간의 필자의 연구내용을 떠올리며 일말의 흥분을 숨길 수 없었다. 더욱이 문제의 지도가 다름 아닌 세계적 권위의 ‘이코노미스트(Economist)誌’에 의해 공개된다는 데에 있어 더욱 그랬다.
‘이코노미스트誌’는 서양 주류사회에 상당한 영향을 미쳐온 160여년 전통을 자랑하는 보수적 시각의 매체가 아닌가? 그런 ‘이코노미스트誌’가 합당한 분석과 검토 없이 자사의 전통과 권위를 실추시킬 행위를 간단히 할 것이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필자의 이러한 의심과 기대는 결국 지도의 공개가 답해줄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인터넷을 검색하던 필자는 ‘한국일보’와 BBC의 사이트에서 문제의 지도사진을 접하곤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충격과 경이감에 젖어야 했다.
한마디로 문제의 지도는 필자에게 있어서 놀라움 그 자체이자, 일대사건이었다.
▲ 1763년 제작된 천하전여총도(天下全與總圖), 1418년에 제작된 천하제번식공도(天下諸番識貢圖)란 원본지도를 필사했다고 한다. [자료사진 - 서현우] |
천하전여총도天下全與總圖’
류강(劉剛, LiuGang)이란 이름의 중국인 법률가가 2001년 상하이의 고서점에서 500달러에 구입했다는 천하전여총도는 위의 지도에서 알 수 있듯이, 오늘날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세계지형의 윤곽이 거의 다 드러나 있다.
지도의 여백에 씌어진 글귀엔 지도의 제작 시기가 청나라 중기인 1763년이란 것과, 그것이 1418년에 제작된 천하제번식공도天下諸番識貢圖란 원본지도를 필사한 것이란 내용이 들어있다.
지도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즉 지도가 1418년 제작의 원본지도를 필사한 것이 분명하다면 가히 세계사를 새로 써야하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것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 의해 이루어진 아메리카 대륙에로의 항해와, 그것을 단초로 전개된 지리상의 대항해가 서양사회에 부여하기 시작했던 온갖 ‘최초’란 영광의 타이틀을 반납해야 하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그에 수반하여 중세 동양에 대한 새로운 평가와 이해, 나아가 그동안 가려지고 숨겨져 온 서양사의 비밀들을 하나씩 드러내는 단초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기본적인 역사인식을 토대로 지난 역사를 반추해 본다면, 중상주의를 앞세운 절대주의 중세유럽의 확장, 그것에 기초하여 전개된 산업혁명, 나아가 근대제국주의의 등장이 낳은 저들의 오만과 독선, 폭력은 그 저변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로 상징되는 역사상 ‘최초’라는 우월주의 관념이 깊이 도사리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상 ‘최초’라는 그들의 인식은 올바른 것인가? 필자는 위 지도야말로 그것을 부정하는 하나의 강력한 증거라고 확신한다.
그런 만큼 위 지도의 출현은 필자의 예상대로 세계유수의 언론 및 대중의 관심과 호기심을 자아내고, 더하여 세계 역사학계를 긴장과 술렁거림으로 몰아넣는 데에 충분한 것이었다.
어쨌든 필자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위 천하전여총도의 가치를 단번에 깨달았다. 그것은 이 지도가 우리 역사와 놀라운 연관성을 갖고 있음을 필자가 확신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우리 역사와의 놀라운 연관성이라니?
필자는 이제부터 독자와 더불어 역사의 시공간을 넘나드는 흥미로운 여행을 떠나고자 한다. 여행의 첫걸음은 위 천하전여총도와 함께 시작될 터이니, 독자들은 여행 내내 위 지도에서 눈을 떼지 말기를 바란다.
그럼 이제부터 필자와 더불어 여행을 떠나보자.
2. 남극대륙
영국의 BBC는 천하전여총도의 공개를 보도하면서 간략한 평을 내놓았는데 중심적 내용은 이렇다.
‘1418년의 원본지도가 있었다는 것은 지도를 그린 사람의 주장일 뿐이다.’
한 마디로 위 지도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현재 원본지도가 존재하거나, 존재했다는 어떤 증거는 없다. 그러나 필자로선 그것이 천하전여총도 제작자의 주장일 뿐이라는 BBC의 시각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 필자가 보기엔 BBC의 평가는 어딘가 서툴고 서두른 것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천하전여총도는 2006년 1월의 공개 직후 뉴질랜드의 와이카토 대학에 분석이 의뢰된 상태이다. 분석결과는 후술하겠지만, 공개 당시 BBC는 천하전여총도가 1763년에 제작된 것이란 점에 대해선 부정적 입장을 보이진 않았다.
그렇다면 BBC의 시각을 전제로 하여, 1418년에 제작되었다는 원본지도(천하제번식공도)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가정 하에 천하전여총도가 제작된 1763년이란 시기와 지도상의 내용을 비교해보자.
눈 밝은 독자라면 이미 알아챘듯이, 지도상의 남극대륙의 존재가 이 지도의 진실에 중대한 의문을 던지고 있다. 1763년의 지도에 남극대륙이라니 말이다.
역사의 정설에 의하면 남극대륙은, 1820년 1월 27일 F. G. 벨링스하우젠( Fabian Gottlieb von Bellingshausen, 1778~1852)이 이끄는 러시아 해군탐험대가 최초로 대륙의 일부를, 다시 3일 뒤인 1월 30일 영국해군의 브랜스필드(Edward Bransfield 1785~1852)가 이끄는 탐험대가 오늘날의 남극반도를 목격하면서 그 존재가 알려졌다.
오늘날 남극지역의 벨링스하우젠 해海, 표트로1세 섬, 알렉산드르1세 섬은 이 때의 러시아 탐험대에 의해, 또 브랜스필드 해협과 브랜스필드 분지 등은 이 때의 영국 탐험대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때 브랜스필드 탐험대는 벨링스하우젠 탐험대와 달리 눈에 띄는 섬마다 영국령이라 선언하여 19C 영국제국주의의 일면을 알려주기도 한다.
어쨌든 1820년에야 그 존재가 드러난 남극대륙이 천하전여총도에 나타난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혹자는 이 남극대륙의 존재로 인해 천하전여총도가 1763년에 제작된 지도가 아니라, 19C 이후에서 현재까지의 어느 시기에 제작된 가짜 또는 위작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과연 그럴까?
상당수 독자들은 중세 유럽의 몇몇 지도에 남극대륙이 나타나 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피리 레이스(Piri Reis, 1465~1555, 오스만터키)의 지도(1513년), 오론테우스 피나에우스(Oronteus Finaeus, 1494~1555, 프랑스)의 지도(1532년), 하지 아메드(Hadji Ahmed, 오스만터키)의 지도(1559년), 제라더스 메르카토르(Gerardus Mercator, 1512~1594, 네덜란드)의 지도(1569년), 필립 부아슈(프랑스)의 지도(1737년) 등이 대표적인 지도인데, 현재까지 지도학상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이유는 이들 지도들이 남극대륙이 발견된 1820년 이전의 지도들이라는 점에 있다.
더하여 각 지도에 묘사된 남극대륙의 일정 영역들은 누군가의 실제 탐사를 전제하지 않곤 도저히 그와 같이 묘사할 수 없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러기에 메르카토르 도법으로 유명한 게라더스 메르카토르 외의 나머지 인물들은 그 지도로 인해 유명해지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 1532년 오론테우스 피나에우스(Oronteus Finaeus, 1494~1555, 프랑스)의 지도. [자료사진 - 서현우]
▲ 오늘날의 남극지도. [자료사진 - 서현우]
역사의 정설. 그리고 그것과 배치되는 위 지도들의 존재. 이 주제를 다뤄 유명해진 인물이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신의 지문’의 작가 그레이엄 헨콕(Graham Hancock)이다. 헨콕의 ‘신의 지문’은 남극대륙이 나타나는 이러한 지도들의 미스터리에서 시작되는데, 그가 내린 주장과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이러한 남극대륙의 지도들은 제작 당시의 문화, 기술, 수학적 능력 등의 전반적 문명 수준과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현 인류가 그런 수준의 지도를 제작할 능력에 도달한 때는 존 해리슨에 의해 경도측정 기구인 크로노미터가 발명된 18C 이후부터이다. … 또한 그 지도들이 보다 이른 시기의 다른 지도들로부터 필사 혹은 참조되었다는 지금까지의 정황증거들을 통해 볼 때 지도의 기원은 현 인류의 기억에서 단절된 오랜 과거에 존재했던 어떤 미지 문명의 산물이다.’
헨콕이 말한 미지의 문명은 놀랍게도 그가 유사 이전에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초고대문명이다. 그런데 헨콕의 초고대문명은 이 글의 주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에 대한 판단은 독자들의 몫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다만 여기서 필자가 헨콕으로부터 (비록 그의 주장이 무시할 수 없는 정황들을 담고 있긴 하지만) 확인할 수 있는 한 가지 진실은, 그가 논리의 전제로 내세운 남극대륙의 지도들이 그의 주장대로 이전의 어떤 지도들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더하여 그 점이야말로 필자와 헨콕의 유일한 일치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위에서 헨콕이 인용한 중세 유럽지도들의 기원은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서 커다란 수수께끼에 봉착한다. 그러나 여기선 일단 수수께끼로 남겨두기로 하자.
다만 뒷장에서 다룰 내용을 살짝 귀띔한다면 사실 남극대륙의 존재는 조선에서 제작된 두 종류의 지도에서도 확인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지도들은 이 장의 주제가 아니기에 여기서 다시 천하전여총도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위의 헨콕이 언급한 지도들의 예를 통해 이제 우리는, 단지 (19C 이전의) 지도상에 남극대륙이 나타난다고 해서 그 지도가 무조건 가짜 또는 위작이라 할 수 없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한마디 더 덧붙여, 천하전여총도가 후대의 위작이라면 제작자는 결코 남극대륙을 그려 넣지 않았을 것이란 게 필자의 생각이다. 오히려 불필요한 의심을 살 수 있기에 말이다.
혹시 필자의 생각에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가? 그런 독자들을 감안해 이번엔 보다 강한 근거를 들어보겠다.
자, 이번엔 천하전여총도 상上에서 눈길을 유럽지역으로 돌려보자. 독자들의 눈에 유럽의 지형이 어딘가 허전해 보일 것이다. 그렇다, 단번에 영국본토인 브리턴 섬과 아일랜드 섬이 없음을 깨달을 것이고, 나아가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가 위치한 스칸디나비아 반도마저 볼 수 없음을 알아챌 것이다.
이 점을 남극대륙의 문제와 대조하여 한번 생각해 보자. 천하전여총도가 후대의 위작이라고 하기엔 지도상의 불균형이 너무 크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우리 자신이 후대의 위작자라는 입장을 가정해 보자. 위작은 남에게 최대한 그럴듯하게, 아니, 진짜보다 더 진짜로 보이게 하려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무리할 만큼의 남극대륙을 그려 넣는 과감성에다, 그와 너무나 대조적인 유럽지형에서의 소심함은 위작이라고 생각하기엔 아무래도 어색하게 느껴진다.
필자는 지도상의 남극대륙의 존재야말로 역설적으로 천하전여총도가 1763년에 제작된 것이라는 증거의 하나로 간주한다.
물론 대부분의 독자들에겐 여러 의문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의문들은 뒤에서 하나씩 다룰 것이니, 미련 없이 다음 장으로 넘어가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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