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sr]산행,여행

파키스탄 히말라야 대탐사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28. 15:40

[파키스탄 히말라야 대탐사 ⅡⅦ] 신화와 전설은 계속된다

길기트~산두르 고개(3,704m)~치트랄 지프 사파리

 

▲ 산두르 고개의 넓은 평원에 호수가 자리잡았다. 많은 짐을 싫은 지프는 밤길에서 추락사고를 당한다.

 

오른손을 왼편 심장 위에 얹고 미소지으며 인사를 건넨다. “살람 알레이꿈(평화가 당신과 함께 하기를).”

“알레이꿈 살람(당신도 또한…).”

치트랄(Chitral)의 아침은 만나는 사람 사람에게 축복을 나누며 시작한다. 사실 힌두쿠시 산맥 깊숙한 곳, 은둔의 치트랄은 카피르(Kafir)라는 단어 하나로 인해 더 오랜 기억 속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릴 적 주말 밤이면 TV에서 방영되던 영화 속으로 말이다.

왕이 되고자 했던 두 남자가 탐험을 시작한다. 주연을 맡은 드라보트(숀 코너리 역)와 카너핸(마이클 케인 역)이 인도 평원을 떠나 사막을 지나고 높은 설산을 넘어 고생 끝에 찾아들어간 곳이 바로 카피리스탄(Kafiristan)이었다. 신전에 감추어진 찬란한 금화, 금괴, 값진 보석을 발견한다. 이것은 2,000년 전 알렉산더 왕이 모아 놓은 보물인 것이다. 드라보트가 왕으로 인정받고 알렉산더의 왕관을 쓴다는 내용이다.

‘왕이 되려한 사람’들

▲ 치트랄의 전경
종교를 믿지 않는 카피르 사람들이 사는 카피르스탄은 치트랄 남쪽에 지프로 한두 시간이면 갈 수 있고, 파키스탄 페샤와르에서 아프간 카불로 가는 길에 붙어 있는 지방이다. 이 영화는 러드야드 키플링(Rudyard Kipling)의 ‘왕이 되려한 사람(The Man Who Would Be King)’이라는 짤막한 단편소설을 존 휴스턴(John Huston) 감독이 살을 덧붙여 만든 것으로, 어릴 적에 이 흥미진진한 얘기에 푹 빠지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인도 식민지에는 이러한 꿈을 꾸는 사람들이 꽤 많았던 모양이다. 그 중 베일에 싸인 인물이 찰스 매슨(Charles Masson)이다. 그는 1827년 동료인 리처드 포터와 아그라에서 출발하여 여행을 시작한다.

매슨은 불어, 이탈리아, 라틴어, 그리스어를 할 줄 알았고 상황에 따라 국적을 바꿔 위장하였고, 라자스탄을 거쳐 펀잡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조지아 할란(Josiah Harlan)이라는 미국인 의사를 만나 잠시 동행하는데, 이 때 미국인의 억양과 행동을 배워 미국인으로 행세하기도 한다.

▲ 노란 단풍잎으로 변한 소르 라스푸르 마을, 산두르 고개로 오르는 길이 산허리를 감싸 돈다.
북서쪽으로 걸음을 옮겨 페샤와르에서 그와 마찬가지로 무일푼 방랑자인 파탄(Patan)인을 사귀어 카피르스탄을 스쳐 카불에 도착했다가 다시 인도로 되돌아온다. 후에 6년간 더 아프간을 여행한다. 사실 찰스 매슨이라는 이름도 가명이었으며, 그는 영국 동인도회사 군대에서 탈영한 군인이었다는 것이 후에 밝혀진다. 그러나 그는 공로를 인정받아 사면을 받고 이후에도 정보원으로 계속 활동한다.

매슨보다 더 흥미로운 인물이 바로 조지아 할란이다. 그는 실제 정규 의학 교육을 받은 적도 없이 동인도회사에서 의사 행세를 했으며, 카불까지 여행하여 당시 도스트 무함마드 왕을 알현했으며, 나중에는 펀잡 시크 왕국의 마하라자 라지트 싱(Ranjeet Singh)의 눈에 들어 구자라트(Gujarat) 주의 태수가 된다. 빈털털이 떠돌이가 왕이 된 것이다. 할란이 키플링 소설의 실제 모델이었음이 최근에 밝혀졌다.

신화와 전설은 계속되는 모양이다. 이슬람교로 개종하지 않고 자신들의 전통생활 방식을 지키며 좁은 세 계곡에 살아가는 카피르인들을 그리스인들은 알렉산더의 후손들이라 확신하며 정부 차원에서 지원하고 있다. 다음 가야할 곳은 그곳이다.

 

에베레스트의 영웅 텐징이 잠든 곳

 

▲ 마스튜즈에서 치트랄쪽으로 바라본 계곡

 

2001년 10월11일, 숙소에서 초키다르가 며칠 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공습을 시작했으며, 그리스 기자 한 명이 가람 차시마(Garam Chashma)를 통해 아프간으로 밀입국하려다 체포되어 추방당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이것은 나도 빨리 떠나야한다는 사실을 재확인시켜 준다. 이미 경찰서에서 길기트로 가는 별도 통행허가서를 받았다. 좋게 말하면 권고이고 나쁘게 말하면 자발적 추방을 당하는 것이다.

배낭을 주섬주섬 꾸려 바자르로 나섰다. 주민들이 삼삼오오 쪼그리고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를 나누고 있다. 난전 리어카에서 헌책 두 권을 샀다. 추 브리지(Chew Bridge) 위에서 강가에 모여 있는 아프간 난민촌을 바라보았다. 불과 얼마 전에 들어갔을 때 루비를 팔려던 그 가족은 잘 있을까. 아마 바닥샨에 남겨진 가족들을 걱정하겠지.

“부니(Buni), 부니”라고 악다구니 소리를 질러 손님을 끌어 모으는 밴에 올랐다. 깨져 없어져 버린 창문 밖 멀리로 힌두쿠시의 최고봉 티리치미르(7,708m)가 희뿌옇다. 치트랄을 떠나기 전에 왕이 된, 아니 영웅이 된 한 남자를 기억해야 한다.

그 날 펨 펨이 좋아하는 감자튀김 팬케이크를 만들어 놓고 1주일에 한 번 오는 딸을 기다리는 남자가 있었다. 병을 앓은 그는 체중이 줄어 몸은 여위었고 눈빛은 흐릿했다.

딸에게 물었다.

“맛이 괜찮니?”

“아주 맛있어요.”

“내가 직접 요리했단다.”

두 사람은 점심을 함께 하며 앞으로 계획과 과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버지가 조용히 혼잣말을 하듯 한다.

“치트랄에 있는 네 엄마 묘지에 가보고 싶구나.”

“저도 함께 가겠어요.”

 

▲ 농사와 목축이 끝나는 늦가을은 결혼식의 계절이다. 무슬림들은 누구난 할것없이 여행자에게는 지극정성이다.

 

펨 펨이 대답한다. 인도 국적을 가진 시민이 파키스탄을 방문하려면 시간이 걸리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다음 날 새벽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고 펨 펨이 달려갔을 때는 벌써 텐징 노르게이(Tenzing Norgay)는 숨을 거둔 후였다.

텐징은 마칼루 뒤편 아룬 강가에서 가난한 목동의 아들로 태어나 히말라야를 오르는 등반대에 고용되어 짐을 지는 셰르파로 일했다. 그러나 2차대전이 발발하자 히말라야를 찾아오는 등반대는 끊어졌고, 텐징은 1939~1945년까지 치트랄에서 영국군 개인 연락병으로 장교 식당에서 일했다. 부인 다와 푸티와 펨 펨이 함께 했고, 곧 둘째 딸 니마가 태어났다. 이곳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앓던 첫 부인 다와 푸티는 날로 쇠약해져 44년 가을 세상을 떠났다. 텐징은 다질링으로 돌아갔다.

남·북극 탐험에서 선두자리를 빼앗긴 대영제국은 에베레스트만은 영국인이 반드시 정복해야할 이름이었다. 1953년, “이 놈을 드디어 때려 눕혔어” 라고 말하는 에드먼드 힐러리와 “대지의 여신이 자신을 받아주었다”고 감사함을 표하는 텐징이 정상에 서 있었다. 검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깃발이 달린 피켈을 높이 든 사진의 텐징은 산을 내려오자마자 세계의 영웅이 되었고, 식민지 사람들의, 민족의 희망이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영광 뒤에 더 혹독한 폭풍설이 산 밑에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텐징은 알았을까. 텐징은 이렇게 적고 있다.

 

▲ 치트랄 강가의 아프가니스탄 난민촌

‘많은 것들이 정치와 국적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다. 하지만 산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곳에서 생명은 너무 현실적이며, 죽음도 너무나 가깝다. 인간은 그저 인간일 뿐이다. 그것이 전부다. 하지만 나중에는 정치와 논쟁과 나쁜 감정이 움트기 시작한다. 내 인생의 38년 동안 내 국적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도인이건, 네팔인이건, 티베트인이건 그것이 대체 무슨 상관인가?’

그래도 죽을 때까지 텐징은 품위와 긍지를 잃지 않았지만 그도 사람이었다.

‘때때로 내게 아주 많은 군중이 모여들고 그 압박감이 아주 커지면 나는 더 이상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우울해졌다. 유일한 행복의 길은 가족과 함께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외딴 곳으로 떠나는 것뿐이다.’

외딴 곳, 그곳은 바로 사랑했던 다와 푸티가 잠들어 있는 치트랄이었을 것이다.

 

 

‘갈 테면 가라. 하지만 천천히(Go Man Go, But Very Slow)’

▲ 7월 둘째주, 3700미터 산두르 고개의 폴로경기장에서는 길기트, 기자르, 치트랄 간의 폴로매치가 벌어진다.
차는 마스튜즈 협곡 하안단구의 절벽을 휘휘 돌아 코고지(Koghozi), 레순(Reshun)을 지난다. 지금 달리는 이 길은 파키스탄 북서변경주의 치트랄과 북부준주의 길기트를 연결하는 유일한 차량도로다. 강은 투리코(Thuriko)라는 지류와 만나고 드라산(Drasan)으로 갈 주민들과 헤어진다.

곧 부니로 들어갈 다리 앞에서 내렸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포장도로라고 하기에는 무색하지만 엉덩짝은 편했다. 언제 올지 모를 지프를 기다리지 못하고 비포장길을 나선다. 햇볕이 따갑고 이내 땀이 맺힌다. 뽀얀 먼지를 날리며 쫓아온 화물 지프에 기를 쓰고 매달렸다. 많은 짐들이 실린 위에 콩나물시루 같이 올라앉은 사이로 비집고 올라가려면 체면은 접어두어야 한다.

남쪽으로 힌두라지의 제법 높은 부니좀(Buni Zom·6,552m), 아위좀(Awi Zom·6,484m) 연봉이 웅장하게 벽을 이룬 풍광을 즐기며 걷는 것도 좋지만, 옆에 차가 휙휙 지나다니는 길을 걷기는 정말 못할 짓이다. 산길보다 두어 배는 지루하여 힘들고 웬지 화가 치밀어 오르니 말이다.

▲ 맑은 기자르 강물에서 송어가 그득하다.
물리그람(Muligram)으로 바싹 올라붙는 언덕배기에서 지프는 숨 넘어가는 소리를 질러댄다. 등성이 위의 차이카나에서 밀크티를 마시며 숨을 고르고, 마스튜즈(Mastuz)까지는 혹 지프가 강물에 굴러 떨어지지나 않을까 오금이 저린다. 다행히 고철덩이는 마스튜즈를 지나 남쪽으로 라스푸르(Laspur) 강을 끼고 가야할 방향인 하르친(Harchin) 마을에 내려주었다.

오후 4시, 이제 대중교통은 없다. 이 계곡에서 소르 라스푸르(Sor Laspur·2,985m)가 마지막 마을이다. 태양이 넘어가 버린 하르친은 으슥해졌고, 찬 바람이 인다. 2시간을 걸어 주민들이 가꾼 버드나무 밑에 텐트를 치고 저녁은 만들 수 있는 최고급 메뉴인 양고기 스튜. 감자, 양파, 마늘, 카레를 넣고 먹음직스럽게 요리했는데 눈물이 찔끔찔끔 흘러나온다. 많은 시간 영양이 부족상태로 산속을 헤매고 다녀서인지 치아가 삶아 놓은 옥수수처럼 고깃점을 씹을 때마다 벌어진다. 식사를 마치는 데 2시간이 흘렀다.

차가운 공기에 입김을 날리며 들어선 작은 소르 라스푸르 마을은 아침 햇빛에 노랗게 물든 나뭇잎이 정겹다. 여기서부터 산두르 고개(Shandur pass·3,720m)까지 표고차 700m를 높여야 한다. 이 고개를 처음으로 답사한 한국인은 아마 1988년 10월 초 한국 중앙아시아 탐사대일 것이다.

▲ 마스튜즈의 코와르 족의 한 가족
“고개 입구에 오니 겁나는 공갈이 붙어 있다. ‘갈 테면 가라. 하지만 천천히(Go Man Go, But Very Slow)’. 가지 말라는 말보다 더 무섭다. 그렇지만 갈 데까지 가보는 수밖에. 공갈이 허황된 게 아니었다. 제주도 돌담 쌓듯이 불안하게 낸 길은 곳곳이 무너지고 있어 언제 굴러 떨어질지, 한 굽이 돌 때마다 조마조마했다. 더욱이 그렇게 위험스레 보이는 곳에는 대개 수백m 아래 박살난 차들이 버려져 있었다. 침이 바싹바싹 말랐다. 심심찮게 길이 막혀 있어 주민들과 차에 달린 윈치의 도움을 받아 길을 뚫으며 어렵사리 고갯마루에 도착했다.”

대원으로 참여한 윤평구의 기록이 가지 말라는 말보다 섬뜩하다. 고갯마루는 두드러진 등성이가 아니라 거대한 평원이다. 늦가을의 푸른 하늘 밑에 또 하나의 검푸른 둥근 하늘이 펼쳐진다. 산두르 호수였다. 잰걸음으로 25분을 걸었으니 수량이 줄지 않았을 시에는 폭이 2km는 족히 넘을 것이다.

호수 동쪽 끝자락에 관중석까지 마련된 폴로(Polo) 경기장이 허전하다. 매년 7월 둘째 주에 길기트, 기자르, 치트랄 사이의 폴로 매치가 여기서 사흘간 열린다. 예전에는 당일 경기였지만 지금은 파키스탄 국가 행사로 폴로경기, 더 재미난 당나귀 타고 하는 폴로경기, 흥을 돋우는 악대 등 선수, 주민, 외국인 관광객과 취재진이 매년 수천 명 이상이 참가하는 축제가 되었다. 결승전 마지막 날에는 대통령이 헬기를 타고 와서 관람함으로써 피날레를 장식한다. 폴로 자체가 워낙 격렬한데, 거기에 3,700m 고지이다 보니 가끔 말들이 죽을 때도 있다고 한다.

▲ 파키스탄에서 첫 인사말 ‘살람 알레이 쿰(평화가 당신과 함께 하기를)
길 옆 간이건물의 검문소를 제외하고는 적막하다. 길기트 시장에 팔 물건을 엄청나게 실은 소르 라스푸르에서 보았던 지프가 도착했다. 지프가 수송할 적정 무게의 두 배는 되는 듯하다. 화물칸의 포대 위에 올랐다. 지프는 내리막길인데도 버거워 속도를 내지 못한다.

1895년 조지 로버트슨(George Robertson) 일행이 정치주재관으로 치트랄 성에 머무를 때 치트랄이 반기를 들고 성을 포위하자 제임스 켈리(James Kelly) 대령이 500명의 부대를 이끌고 길기트를 출발했다. 이들은 눈이 녹지 않은 4월에 대포 2문을 끌고 밀며 이 고개를 넘어갔다. 타고 있는 지프가 당시 눈밭을 끌고 가던 대포 속도보다 빠르지 않은 것 같다.

이들은 48일간의 작전으로 재탈환에 성공한다. 그러나 아프간으로 쳐들어갔던 그들의 할아버지 세대는 그러하지 못했다. 찰스 매슨이 카불을 빠져나오기 전 바미얀 대석불 밑에 그는 이렇게 낙서를 남겼다.

▲ 암벽에 조각된 약시니 보디사티바가 길기트를 바라보고 있다.
‘어느 바보가 이 석굴에 오게 되면 찰스 매슨이 이곳에 있었음을 알라.’

그 첫 번째 바보는 동족인 영국이 되었다. 그리고 구소련, 탈레반이 그 뒤를 잇는다. 매슨이 떠난 후 도스트 무하마드는 친러시아로 기운다. 이에 불안을 느낀 영국의 인도 식민지정부는 아프간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자신들의 말을 잘 들을 샤 슈자(Shah Shuja)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 도스트 무하마드가 영국에 위협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아프간인들에게 좋은 왕이 못되고, 국민들은 샤 슈자를 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워-비슷한 명분으로 며칠 전 전쟁은 시작되었다-1838년 칸다하르를 통해 어렵지 않게 카불을 점령한다.

그리고 샤 슈자를 왕위에 올리지만 아프간인들의 반응은 냉담했고, 민심은 날로 악화되어 순식간에 봉기가 일어나 영국군 숙영지를 에워싸며 포격을 가했다. 1941년 1월6일 2만 명의 영국인들은 탈출을 시도, 카불을 떠난다. 그러나 도중에 공격을 받아 사망하고 얼어 죽고 인질에 잡히는 등 잘랄라바드 숙영지에 살아서 도착한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아프간은 사실 이 시점부터 끊이지 않는 내전과 전쟁으로 점철된다. 영국과의 2차 전쟁, 국경을 정하는 듀런드 라인(Durand Line)으로 파탄족이 사는 영토가 절반으로 나뉘어진 것에 따른 분노, 구소련의 침공, 내전, 탈레반….

 

▲ 푸른 하늘과 옥빛 기자르강 그리고 판다르 마을

 

어둠 속 오르막길에서 지프 뒤로 굴러떨어져

코쿠시 계곡(Khokush Gol) 입구를 지나 바르사트(Barsat)까지는 광활한 초지와 완만한 산으로 전형적인 파미르의 경치을 띤다. 이 두 계곡이 만난 기자르(Gizar) 강은 길기트 강의 원류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도중에 북측에서 흘러내린 야신 강과 이시코만 강을 만나 길기트 강으로 이름을 바꾸어 흘러가 인더스 강에 합류한다.

바르사트 시냇물을 건너는 콘크리트 다리가 유실되고 없다. 폭은 7m, 깊이는 허벅지 정도로 유속이 빠르고 바닥이 큰 돌이 깔려 있어 지프가 건너기에는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신발을 벗고 운전수 외에 3명은 뒤에서 밀었다. 차가 중간에 빠져 버렸다. 바퀴 밑에 잔돌을 채워 넣고 30여 분간 진을 다 빼고서 차는 물 밖으로 기어나왔다.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고, 3명은 바로 어깨에 걸친 모직 숄을 펴고 서쪽을 향해 ‘알 알라’를 외며 기도를 올린다.

테루(Teru)의 검문소에서 잡힌 그들을 뒤로하고 걸었다. 몰아치는 고원의 찬 바람으로 추워서 그냥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어느 민가에 들어가 차이를 얻어 마시면서 그들을 기다렸다. 날은 어두워진다. 1시간 반이 지나서 지프가 왔다. 경찰이 트집을 잡아 뒷돈을 주고 왔단다. 운전수 반대쪽에 내가 앉고 중간에 지프 주인이 끼여 앉았다. 한 명은 바깥 화물칸 위에 탔다. 실린 짐으로 운전석 지붕이 푹 주저 않아 자라목을 하고 앞을 바라본다. 그래도 즐겁다.

가파른 산중턱을 깎고 돌을 쌓아 만든 좁은 길은 전조등이 비친 바닥으로만 연결된다. 1시간을 더 갔을까. 바짝 선 오르막이 나타난다. 차는 멈추고 사륜구동기어로 작동하고 천천히 묵직하게 움직인다. 그렇게 20m를 매달리듯 올라가다 속도가 멈추듯이 줄고 갑자기 엔진쪽에 폭발음과 함께 연기가 터져 나왔다. 순간 차는 위이잉 소리를 내며 후진으로 엄청난 속도를 낸다.

▲ 빙하기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작은 언덕들에 샴란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무릎 위에 있던 카메라 가방을 꼭 잡고 멍하니 있다. 이제 조금 더 내려가면 길을 벗어날테고 아득한 절벽으로 밑으로 떨어질 것이다. 방법이 없다. 이렇게 끝나는구나. 머리를 숙이고 손으로 감싼다. 운전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차 뒤쪽이 언덕 방향으로 돌도록 핸들을 가슴으로 안고 돌렸다. 그러자 차는 우측으로 구르기 시작한다. 앞쪽 유리가 퍽 하며 깨지고 전조등이 꺼졌다. 암흑 속에 3명은 아래위가 바뀔 때마다 서로를 누르며 이리저리 부딪힌다. 통증은 없다. 아무도 비명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너무나 긴 시간이 지속된다.

얼마 후 구르던 차가 털컥 멈췄다. 어떻게 된 걸까. 방향감각도 없고 아무소리도 없다. 가방은 여전히 가슴팍에 있고 몸을 움직여 보았다. 괜찮다. 나의 상체와 머리가 밑에 있는 두 명을 누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발로 문을 찼다. 열리지 않는다. 깨진 창문으로 기어 나왔다. 뒤쪽에 탔던 주민은 후진하는 순간 뛰어내렸는지 멀쩡한 듯 울고 있다. 몸을 더듬자 몹시 떨고 있다. 문을 열고 안에 처박혀 있던 두 명을 끄집어냈다. 다행이었다.

차는 엉망으로 찌그러졌으나 사람은 다친 데가 없는 듯했다. 그들 3명은 죽지 않은 것에 대한 고마움인지 두 손바닥을 하늘로 하고는 알라를 외치며 울고 있다.

사고가 난 것도 너무 많이 실은 짐 때문이었고, 구르던 차가 멈춘 것도 무게로 인해 좁은 턱에서 멈췄던 것 같다. 또 운전수가 방향을 틀었던 것이 현명한 판단이었다. 이 지점에서 더 내려갔으면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었다. 한 명씩 번갈아 가며 꼭 껴안았다. 고마웠다. 너무나 고마웠다. 그러고도 세 명은 20분 동안을 하늘만 쳐다보며 울기만 한다. 이제 화가 치밀어 올랐다. 빨리 가자고 소리를 냅다 지른다. 주위에는 마을이 없었다. 1시간을 걸어 굴라물리(Gula Muli)에서 밤을 샜다.

다음날 그들은 지프로 되돌아갔고 나는 내 갈 길로 향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았고 비틀거리며 걷는 걸음이 인내심을 허무하게 만든다. 가끔 다른 차량이 올까 뒤돌아보지만 헛일이다. 그런데도 판다르(Phadar) 마을과 판다르 호수는 고독한 영혼을 쉬게 해 줄만큼 아름다웠다. 가끔 도시에서 온 강태공들이 송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판다르에서 소사트(Sosat)까지 계곡은 기암절벽으로 이어지고, 절벽에 매달려 자란 키 작은 주니퍼와 맑은 물에 깎인 암반은 설악의 백담사계곡을 걷는 듯했다.

9시간만에 강물이 자연적으로 막혀 호수를 이룬 소사트에 닿았다. 이 마을에서도 호숫가에 있는 멋진 집에 머무를 수 있었다. 선홍빛 저녁노을이 호수 면에 비칠 때 메흐모드 알람 샤(Mehmood Alam Shah·18)와 함께 루어 낚시를 던진다. 차고 깨끗한 물 속에는 송어가 그득하여 찌를 드리기 무섭게 고등어만한 크기가 올라왔다. 따뜻하게 데워준 물로 씻으려 옷을 벗자 사고 때의 상처들이 드러났다. 집을 떠나기 전에 87세의 알람 샤 부모님들께 큰절을 했다. 알라신 외에는 절대 절을 하지 않는 무슬림 율법은 상관없다. 보살핌이 너무 따사로웠다.

 

길기트에 도착, 3일간 혼수상태

또 하루가 지났고 여전히 배낭을 지고 걷는다. 원래는 구피스(Gupis)까지 걸어서 탐사하고 거기서 차량을 이용할 계획이었는데, 상황에 따라 바뀌는 것이 계획이다. 오전이 다 지나고 다히말(Dahimal)을 지나칠 때 심하게 쓸린 사타구니와 엉덩짝이 쉴 지프를 만났다. 이들은 스카르두와 훈자의 병원에 근무하는 안과 의사들로 어린이 각막 손상에 관해 조사를 나왔다고 했다.

▲ 판다르 호수

그들과 차이카나에 들러 늦은 점심을 함께 먹는데 도시가 가까워진 탓인지 음식을 집어먹는 내 오른손이 유난히 더러워 보인다. 때가 끼여 시커멓고 갈라졌다. 두 사람은 말끔하게 차려입었고 조용한 편이었다. 한 사람이 묻는다.

“차를 타지 그랬어요. 힘드실 텐데.”

“걷는 것이 좋습니다.”

남은 여행경비가 2,500루피(약 50,000원)와 되돌아갈 항공권이 전부인 여행자는 답답하기만 하다. 이슬라마바드에 내려가면 현지 친구들에게 또 신세를 져야할 판이다.

“혹시 아흐마드 샤 마수드(Ahmad Shah Massoud)를 아십니까?”

“아니요.”

“아프간 북부 동맹군 사령관 마수드 있지 않습니까! 미국 공습 전에 판지시르에서 폭탄테러에 당했다고 합니다.”

“아, 예….”

지나가듯 대답한다. 구소련이 아프간을 침공하면서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하기까지의 복잡한 정세, 배신과 동맹의 관계가 헝클어진 실타래를 푸는 것보다 더 혼란스러웠던 아프간이다. 단지 내가 아는 것은 파키스탄 군부정권이 자국의 이익에 맞게 관여하고 있고, 그 선봉에 ISI(Inter-Service Intelligence)라는 파키스탄 정보국이 아프간 내에서 활동한다는 사실뿐이다. 나도 ISI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데, 좀 과장되게 말한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한 일이 전화 한 통으로 해결된 적이 있었다.

10월14일 밤에 구피스(Gupise), 가쿠치(Gakuch)를 거쳐 길기트에 도착했다. 그리고 3일 혼수상태로 빠졌다.

 

 

트레킹 가이드

길기트~산두르 고개~치트랄 지프 사파리

길기트에서 출발해 길기트 강을 따르는 사막 같은 황무지, 설악산 계곡을 닮은 기자르 강 협곡들, 광활한 평원의 산두르 고개(3,704m), 고봉이 밀집한 힌두쿠시와 힌두라지 양대 산맥 사이를 빠져나가 치트랄에 도착하는 이 루트는 도로가 한창 포장 중이라 도보보다는 2~3일간의 지프 사파리가 좋다.

산두르 폴로 매치가 열리는 7월 둘째 주가 좋다. 12월~4월까지의 겨울시즌에는 눈으로 산두르 고개가 막힌다. 그 외 기간에는 어제든지 여행할 수 있다. 여기서는 길기트에서 출발지로 하여 설명한다.


교통

대중교통은 2003년 11월에 개통됐다. 여름시즌에는 매일 있고, 비시즌에는 매일 운행하지 않으므로 출발 전에 확인해야 한다. 하루 전에 예매해야 하며 운임은 250루피. 마스튜즈에서 치트랄까지는 소형 밴이 아침에 정해진 시간 없이 몇 번 운행한다. 운임은 60루피. 전세 지프는 길기트~치트랄 구간이 1,5000루피 정도.


운행일정

대중버스를 이용할 경우 판다르 호수에서 점심을 먹고 마스튜즈까지 10~11시간 운행하여 저녁에 도착한다. 마스튜즈에서 치트랄까지는 다음날 4~5시간 소요된다. 전세지프는 판다르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치트랄까지 운행한다.


숙박

판다르 호수  호텔, 게스트하우스 등 많은 숙박업소가 시즌에 오픈한다. 여행 경비에 맞게 찾으면 된다.

마스튜즈  바자르 100여m 전에 있는 투어리스트 가든(Tourist Garden)이 잘 꾸민 정원과 함께 외국인이 머물기 가장 편하고 깨끗하다. 도미토리 85루피. 더블 220루피 캠핑 100루피. 


지프 사파리

근래 지프 사파리 여행이 부쩍 늘고 있다. 가장 긴 루트는 북부 지방을 일주하는 코스다. 이슬라마바드~카간(Kaghan) 계곡~바부사르 고개(4,173m)~칠라스 코스는 2005년에 지진으로 도로가 끊어진 상태다. 따라서 스와트(Swat )계곡을 통해 불교 유적지와 풍경을 보고 칠라스에 도착해 아스토르~데오사이 고원~스카르두~길기트~훈자~중국과의 국경 쿤제랍 고개(4,733m)~길기트~산두르 고개~치트랄~로와리 고개(3,118m)~페샤와르~이슬라마바드로 돌아온다. 지도를 보고 자신의 일정에 맞게 둘러볼 구간을 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