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만에 아이들과 다시 가 본 제주의 풍광 6, 7 –사려니, 천제연, 아내 생일, 이중섭-
(10) 사려니 숲길
산굼부리로 가는 길,
편백나무가 울창한 길,
그러나 산굼부리 입장료가 너무 비싸(6천원/인)
그 앞에서 짬뽕과 탕수육으로 점심.
맛은 일품.
사려니의 어원은
오름의 정상 분화구가 북동쪽으로 비스듬하게
트여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제주도 방언으로 “신성하다”라는 뜻도 있다하며
옛 지도의 표기는 사련악이란다.
역시 큰 얘의 계획으로 간 건데
개방된 지 얼마 안 된 난대림으로 우거진 숲에
누워 아이들과 도란도란 얘기하는 이 추억은 잊지 못할 것이다.
사려니 숲길 오는 내내
좁은 중산간의 좁은 2차선 도로를 달리니
새삼 이 작은 경차를 렌트하길 잘 했다는 생각.
사려니를 내려와 중산간의 좁은 길을 따라
승마장을 가려다가 다들 피곤하다하여
제2박지인 서귀포 Poong Gyung Hotel로 일단 向.
짐을 풀고 아이들이 서귀포 올레 시장 가자하여
찾아가니 유커와 젊은이들로 인산인해.
아이들이 원하던 경성통닭집은 문을 닫았다.
오다가 천제연 폭포의 야경보기위해
입장종료시간을 아슬아슬 넘겨 입장.
입구의 시원한 바람이 땀을 씻어준다.
도란거리는 아이들 따라 도착하니 폭포 앞은 받디딜 틈이 없다.
역시 두 번 와보는
(11) 남성마을
풍경호텔에서 일어나니 아이들은 꿈나라.
아내와 둘이서 호텔 뒷산이라도 가보려고 올라가니
귤밭, 대나무밭으로 정상으로 가는 길이 막혀
서귀포 도서관 벤치에서 쉬다가 내려와
호텔에 억새 우거진 공원을 한 바퀴 도는데
어디서 폭포 소리가 들린다.
그러고 보니 우리 호텔이 바로 폭포 위에 있었다.
숲에 가려 보이지 않아 몰랐는데 폭포 위가 바로 공원이었다.
제법 큰 공원을 한 바퀴 돌아 나오니 남성마을이다.
마을 초입 커다란 팽나무 아래 범죄 없는 마을이란 간판이 보이고,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자그마한 시골집들이 드문드문 보이고
귤밭, 채전들이 보여 여기로 이사와 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오늘은 아내의 생일이다(음6.16)
장모님과 같은 날이니
장모님 생신에 묻혀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항상 별도로 생일을 차려 준 적이 없으니
속으로는 많이 서운했을게다.
산책에서 돌아와 아이들과
어제 저녁 천제연 폭포 앞 제과점에서 산
케익으로 생일축하 노래를 불렀다.
(12) 이중섭 거리
아이들과 다시 올레시장에 가
감귤, 쵸코렛등 시골 노모, 장모, 상윤 여친에게 부치고
경성통닭을 주문하고 빈 시간을 이용
이중섭 거리 탐방.
서울의 인사동 같은 느낌.
그 좁은 방에서 아이들과 아내와 뒹굴었던 중섭이 보였다.
배달9213/개천5914/단기4349/서기2016/07/19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못 들어간 산굼부리 입구>
<사려니 숲속에서 발견한 고삼>
<야간의 천제연에 선 하늘 사람들.
<7/19 아침 남성마을 산책 중 발견한 하늘타리 꽃>
< 범죄없는 마을 남성마을 입구의 당당한 팽나무 한그루>
천제연 폭포
옥황상제를 모시는 칠선녀가 별빛 속삭이는 한밤중이면
영롱한 자줏빛 구름다리를 타고 옥피리 불며 내려와
맑은 물에 미역 감고 노닐다 올라간다고 하여
천제연(天帝淵) 곧 하느님의 못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유래가 있단다.
울창한 난대림지대 사이로 3단 폭포가 떨어지는 모습은 실로 장관인데
제1폭포에서 떨어져 수심 21m의 못을 이루고,
다시 제2폭포, 제3폭포를 거쳐 바다로 흘러 들어간단다.
천제연 주변의 난대림 안에는
제주도에서도 가장 희귀한 식물의 일종인 솔잎난이 자생하며
담팔수, 구실잣밤나무, 조록나무,
참식나무, 가시나무류, 빗죽이나무, 감탕나무 등의 상록수와
푸조나무, 팽나무 등이 혼효림을 이루고 있단다.
덩굴식물로는 바람등칡, 마삭풀, 남오미자, 왕모람 등이 많이 자라고
관목류로는 자금우돈나무, 백량금,
양치식물로는 석위, 세뿔석위, 일엽, 바위손 등이 울창하게 어우러져 있단다.
제1폭포 서쪽 암벽에 있는 담팔수는
식물 지리학적 측면에서 학술가치가 높아 지방 기념물 제14호로 별도 지정돼 있는데,
한라산 천연보호구역의 하나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천제연계곡에는
20여 그루의 담팔수가 자생하고 있단다.
이중섭(李仲燮, 1916∼1956)
호는 대향(大鄕).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이희주(李熙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오산고등보통학교(五山高等普通學校)에 들어가
당시 미술 교사였던 임용련(任用璉)의 지도를 받으면서 화가로서의 꿈을 키웠다.
한국 근대서양화의 대표 화가.
주요 작품으로는 〈서귀포의 환상〉(1951),
〈물고기와 노는 세 어린이〉(1953),〈황소〉(1954~1954),
〈달과 까마귀〉(1954) 등이 있다.
1937년 일본으로 건너가 분카학원[文化學院] 미술과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독립전(獨立展)과 자유전(自由展)에 출품하여 신인으로서의 각광을 받았다.
분카학원을 졸업하던 1940년에는
미술창작가협회전(자유전의 개칭)에 출품하여 협회상을 수상하였다.
1943년에도 역시 같은 협회전에서는 태양상(太陽賞)을 수상하였다.
이 무렵 일본인 여성 야마모토[山本方子]와 1945년원산에서 결혼하여
이 사이에 2남을 두었다.
1946년원산사범학교에 미술 교사로 봉직하기도 하였다.
북한 땅이 공산 치하가 되자 자유로운 창작 활동에 많은 제한을 받았다.
친구인 시인 구상(具常)의 시집 『응향(凝香)』의 표지화를 그려
두 사람이 같이 공산주의 당국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6·25전쟁이 일어나고, 유엔군이 북진하면서 그는 자유를 찾아 원산을 탈출,
제주도를 거쳐 부산에 도착하였다.
이 무렵 부인과 두 아들은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으며,
이중섭은 홀로 남아 부산·통영 등지로 전전하였다.
1953년 일본에 가서 가족들을 만났으나 며칠 만에 다시 귀국하였다.
이후 줄곧 가족과의 재회를 염원하다
1956년 정신이상과 영양실조로 그의 나이 40세에 적십자병원에서 죽었다.
화단 활동은 부산 피난 시절
박고석(朴古石)·한묵(韓默)·이봉상(李鳳商) 등과 같이 만든 기조전(其潮展)과
신사실파에 일시 참여한 것 외에 통영·서울·대구에서의 개인전이 기록되고 있다.
살아있는 동안에 많은 인간적인 에피소드와 강한 개성적 작품으로
1970년대에 이르러 갖가지 회고전과 재평가 작업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1972년 현대화랑에서의 유작전과 화집 발간을 위시하여, 평전(評傳)의 간행,
일대기를 다룬 영화·연극 등이 상연되었으며, 많은 작가론이 발표되었다.
그가 추구하였던 작품의 소재는 소·닭·어린이[童子]·가족 등이 가장 많다.
불상·풍경 등도 몇 점 전하고 있다.
소재상 특징은 향토성을 강하게 띠는 요소와 동화적이며 자전적(自傳的)인 요소이다.
「싸우는 소」·「흰소」(이상 홍익대학교박물관 소장)·
「움직이는 흰소」·「소와 어린이」·「황소」(이상 개인 소장)·
「투계」(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등은 전자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닭과 가족」·「사내와 아이들」·「길 떠나는 가족」(이상 개인 소장)과
그밖에 수많은 은지화(담뱃갑 속의 은지에다 송곳으로 눌러 그린 일종의 선각화)들은
후자를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제주오름기행 ⑤ 사려니오름 이름만큼 아름다운 숲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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