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해외여행산행

베트남 북부여행 - 8) 호안키엠 호수와 바딘광장 그리고 胡志明 -

이름없는풀뿌리 2017. 8. 27. 08:15
베트남 북부여행 - 8) 호안키엠 호수와 바딘광장 그리고 胡志明 - (8_1) 다시 하노이로 이동 오던 길 되돌아 다시 하노이로 가는길, 고속도로는 그대로인데 맑던 하늘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진다. 이른바 스콜현상이다. 점심은 분짜정식이었다. 운무 낀 들판 너머로 산이 보였는데 도로 옆 표지판을 보니 "옌뜨"라 되어 있는 것을 보니 바로 우리가 못 간 "옌뜨사원"이 있는 산인가 보다. (8_2) 호안키엠(還劍湖) 호수 주변 다시 홍강을 건너는 철교를 지나 하노이 시내를 한없이 달리다 보니 호안키엠('되찾은 劍의 호수'라는 뜻)인데 여기가 스트리트카 관광 출발점으로 "36거리"를 돌아다닐거라 한다. "36거리"는 36개의 상공인 조직이 36개의 거리 별로 정해진 상품을 만들어 팔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하며 비슷하게 생긴 골목들이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고, 100년 넘은 건물들이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스트리트카에 올라 인파가 넘실대는 골목을 여기저기 정신없이 다니다 보니 공자묘가 나타나고 "성요셉성당"이라는 형태만 로만틱한 우중충한 콘크리트 성당이 나타난다. 그나마 스트리트 카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바라만 보았는데 수많은 오토바이들 사이를 40여분간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와 아무런 사고없이 다시 호안끼엠 호수로 돌아와 비로소 주위를 둘러보았다. 의자에 누워 망중한을 즐기는 노인, 서로 스킨십을 한는 청춘남녀들... 모두 자유롭다. (8_3) 바딘광장, 호치민묘, 생가, 한기둥사원, 박물관 이어서 하노이에서 절대 빼 놓을 수 없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창조주는 우리에게 불가침의 권리들과 생명·자유·행복을 주었다……!"라며 호치민이 독립 선언한 현장 바딘광장, 호치민 묘소, 호치민 생가, 그리고 베트남 국보1호라는 "모트코트(Mot Cot, 한기둥사원, 一柱寺)" 마지막으로 “호 아저씨”라 불리우며 베트남 국민의 사랑을 받는 걸출한 지도자, 월남과 월맹의 첨예한 대결시절,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진정한 민족주의자로 북베트남은 물론 남베트남 사람들도 존경했다는 호치민의 유품이 진열된 호치민 박물관까지 1시간여 관람. 이 모든 아이템이 하노이의 중심 바딘관장, 베트남 정부청사 근처의 넓지 않은 공간에 모여있어 천천히 1시간 정도면 충분히 관람 가능 배달9214/개천5915/단기4350/서기2017/06/27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1. 베트남 전통 쌀국수-분짜(Bun cha) 베트남을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인 분짜(bun cha)는 잘 익힌 숯불돼지불고기를 야채 및 상추에 싸서 쌀국수 면과 함께 느억맘(nuoc mam)이라는 베트남 전통 멸치젓갈로 만든 특유의 소스에 담궜다 먹는 하노이지역 고유의 음식. 숯불돼지갈비라는 음식 때문에 한국인의 입맛에 가장 맞는 베트남 음식이기도 함. 2. 호안끼엠(還劍湖) 호수('되찾은 劍의 호수'라는 뜻) 주변 하노이 시내 한가운데의 공원과 함께 자리 잡아 하노이 시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휴식처 역할을 톡톡히 한다던 호안 키엠 호수는 검을 돌려준다(還劍)는 뜻. 레 로이(LE LOI)라는 어부가 명나라 침략 시 명나라 군을 물리쳐 주기를 간절히 빌면서 고기를 잡던 중 신비로운 칼이 올라왔다고 한다. 이를 주민들에게 알리고, 지지를 얻어 호수의 신인 거북이로부터 받은 검으로 명나라 군사를 물리치고, 베트남을 승리로. 이에 15세기 여 왕조를 세운 왕이 되었고, 그 호수에서 제례를 올리며 승전 보고를 하던 중 호수 속에서 황금거북이 올라와 그 검을 물고 들어갔다는 전설이 있다. 지금도 베트남인들은 나라에 큰일이 일어날 때마다 거대한 거북이가 모습을 드러낸다고 해서 성스러운 동물로 여긴다고 한다. 3. 응옥선 사당 호안끼엠 호수 가운데는 응옥선 사당이 있어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응옥선 사당은 13세기 때 몽골군을 무찌른 베트남의 영웅 쩐흥다오(Tran Hung Dao)를 비롯해 문(文)·무(武)·의(醫)의 세 성인을 기리는 사당이다. 4. 스트리트카로 돌아본 100년 넘은 건물이 즐비한 하노이 재래시장 36거리 들여다보기 5. 바딘광장 직전 청부청사(위:외무성 건물, 아래:의사당 건물) 6. 주석궁 7. 방부처리하여 영구보존한 호치민 묘소(1890-1969, 80세, 1954남북분단, 1974통일) 8. 호치민 겨울 집무실(호치민이1958년부터 1969년 사망시까지 11년 거주) 9. 그가 타던 차량 10. 여름 집무실 11. 호치민이 이따금 물고기밥을 주던 곳 12. 지금 그는 가 버리고 수목들과 연못 속의 물고기들 만이 그를 기억하고 있다. 13. 낙우송 한그루 14. 작지만 968년 된 국보1호 한기둥 사원. 대리석 기둥 위에 올려져 있는 조그만 한기둥 사원, 한자로는 일주사. 그러나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철수할 때 대리석을 다 잘라 갔다고 한다. 李太祖(Ly Thai Tong)왕이 1049년에 만든 작은 사원이다. 이 사원은 한개의 기둥위에 불당이 있는 휘귀한 모양이기 때문에 한기둥 사원 (일주사)이라 함. 과거 Ly Thai Tong 왕이 연꽃 위에 아이를 안고있는 관세음보살의 꿈을 꾼 후 아이를 얻게되어, 꿈속에 나타난 관세음 보살에 대한 보답의 의미로 물위에 떠 있는데 이곳에서 소원을 빌고 왼쪽으로 세 번 돌면 딸을 낳고 오른쪽으로 세번 돌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이 있다. 그 이후로 이 사원은 아이를 갖게 해준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일주사는 굉장히 작습니다만, 베트남을 대표하는 베트남의 보물 1호의 사원이다. 현재 베트남의 지폐 5,000동에도 쓰이고 있다. 15. 음양탑 16. 호치민 박물관 입구
한 그릇에 담긴 슬픈 역사 - 베트남 쌀국수 2000년대 초 국내에 첫 선을 보인 베트남 쌀국수는 건강한 음식을 찾는 한국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며 굳건히 그 위치를 지키고 있다. ‘웰빙’ 열풍을 타고 낮은 칼로리와 담백한 맛, 여기에 쌀로 만든 국수라는 점이 쌀 문화권인 한국에서 쌀국수가 성공한 배경이 된 듯하다. 하지만 이렇게 맛있는 베트남 쌀국수 ‘포(Pho)'가 전쟁과 분단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전 세계로 퍼져나가 세계화에 성공한 쌀국수이지만 그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베트남인들의 슬픈 역사를 들여다 볼 수 있다. 베트남은 대표적인 농업국가로서 그 중에서도 쌀이 농업생산량 중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쌀을 가공한 음식이 발달한 나라이다. 베트남은 전 국민의 7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대표적인 농업 국가이다. 그중에서도 쌀을 경작하기 위한 최적의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어 연간 최대 3모작도 가능하다. 이러한 자연환경 때문에 베트남의 한해 쌀 생산량은 베트남 전체 농업 생산량의 절반에 육박한다. 이처럼 풍부한 쌀을 가공하여 만든 음식이 바로 쌀국수이다. ‘포(Pho)'라고 불리는 쌀국수는 베트남 사람들이 분주한 아침의 간편한 식사 혹은 출출할 때 가볍게 먹을 수 있는 대중적인 음식이다. 쌀국수는 쫄깃하게 삶아낸 면발에 쇠고기나 닭육수를 넣고 신선한 야채를 듬뿍 곁들여 먹는 건강식이다. 쌀국수의 유래 지금은 베트남의 대표 음식이 된 쌀국수의 역사는 의외로 짧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19세기말 방직공업이 번성했던 남딘(Nam Dinh)의 공장에서 하루 일과를 마친 노동자들이 고기국물에 국수를 말아 먹던 것이 쌀국수의 시초이다. 쌀국수의 유래에 대한 또 다른 강력한 설은 프랑스의 야채스프인 ‘뽀오페(Pot au feu’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19세기 초 베트남에 소개된 프랑스의 요리 ‘뽀오페’가 베트남의 식재료에 맞게끔 변형되었다는 설로서 포의 국물을 만들 때 사용되는 구운 양파와 생강이 뽀오페를 만들 때 사용되는 것과 동일하며, 베트남 이외의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 이러한 조리방법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도 이 설을 지지한다. 또한, 예부터 베트남 농경사회에서는 노동력을 중요하게 생각해 소를 신성시하였기 때문에 식용하는 일이 드물었다. 이 같은 사실은 베트남에서 프랑스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포가 만들어 졌다는 설을 뒷받침 한다. 쌀국수는 하노이 유역에서 서민들에게 사랑받는 대중 음식으로 자리 잡은 후, 1950년대에 이르러 남부지방과의 교류가 급속하게 이루어지는 과정을 통해 베트남의 대표음식으로 한 단계 더 올라서게 된다. 1954년 제네바 협약으로 북부지역은 월맹 공산 정권이 수립되고 프랑스군은 북위 17도선 이남으로 철군하게 된다. 이 당시 남하한 사람들 중 상당수는 정치적 신념이나 종규적인 문제 때문에 사이공 등의 대도시 주변이나 해외로 망명을 신청하게 되고 이들이 생계를 위해 음식점을 차리거나 포를 등에 매고 다니면서 음식을 팔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쌀국수는 짧은 시간에 급속도로 남쪽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것은 물론 전 세계인들의 입맛까지 사로잡게 된다. 쌀국수의 종류 베트남의 쌀국수는 들어가는 재료에 따라서, 혹은 육수의 종류에 따라 수십 가지 맛으로 나눌 수 있고, 각 지역마다 독특한 특색을 가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쌀국수는 쇠고기 육수에 숙주나물과 고수를 얹은 뒤 새콤한 라임즙을 짜 넣어 함께 먹는다. 쌀국수의 맛을 내는 중요한 요소는 바로 육수에 있다. 쌀국수는 소꼬리와 갈비, 사태에 계피, 향료 등을 함께 넣어 오랫동안 우려낸 달콤한 육수에 소고기 편육을 얹어 먹는 소고기 쌀국수인 ‘포보(Pho bo)’, 그리고 닭의 고기와 뼈를 푹 고아서 만든 담백한 닭 국물에 닭살을 찢어 올린 닭고기 쌀국수인 ‘포가(Pho ga)’등 두 가지 종류로 나눠진다. 달고 기름진 음식을 선호하는 베트남 남부 사람들은 ‘포보’를 즐겨 먹는 반면, 담백한 맛을 즐기는 북부 사람들은 ‘포가’를 선호하는 등 쌀국수를 통해 베트남의 지역 간 입맛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 쌀국수의 종류에 따른 조리 방법 차이 베트남 남부지방의 쌀국수는 삶은 쌀국수를 대접에 넣고 쪽파, 파슬리, 숙주나물, 육계피 등을 얹은 다음 위에 얇게 썬 쇠고기나 닭고기를 얹어 고기 뼈로 만든 육수를 부어 먹는다. (호치민 지방 : 국수가 약간 가늘고 질기며 중국 국수와 비슷한데 맛이 독특하다.) 반면에 북부지방의 쌀국수는 숙주나 계피를 넣지 않고 육수도 담백하며, 여기에 쇠고기나 닭고기를 동그랗게 만든 것이나 유부를 넣기도 한다. (하노이 지방 : 국수 위에 날 쇠고기를 얹기도 한다.) 베트남 쌀국수와 태국 쌀국수와의 차이점 베트남과 경계를 마주하고 있는 국가인 태국도 쌀국수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나라이다. 주식으로 밥을 먹고 있는 태국은 쌀가루로 만든 쿠이티오, 셈미, 카놈친 등의 면이 존재할 정도로 쌀국수를 즐겨 먹는 국가이다. 베트남 쌀국수와 태국의 쌀국수의 차이는 육수에 있다. 태국 음식은 중국, 인도, 유럽의 음식문화가 융합되어 다양한 향신료가 독특한 향을 낸다. 태국 쌀국수에는 마늘, 고추는 물론 생선으로 만든 장류(類)인 남플라와 새우, 보리새우를 발효시켜서 만든 된장 같은 가피, 고수, 라임, 코코넛 밀크 등도 들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베트남 쌀국수에 비해 태국 쌀국수는 자극적이면서 맛이 더 진하고 양념이 강하다. 쌀국수 더 맛있게 먹는 방법 1. 생 숙주는 국수를 받자마자 면 아래로 넣어 숨을 죽인다. 2. 레몬은 국수 위에서 충분히 즙을 낸다. 3. 칠리소스와 해선장을 3:1 비율로 뿌려서 먹으면 더욱 얼큰한 맛을 느낄 수 있다. 4. 고기는 칠리소스와 해선장을 3:1 비율로 종지에 담아 찍어 먹으면 맛있다. 5. 절인 양파에 칠리소스를 적당량 넣어 버무려 먹으면 쌀국수와 조화롭게 먹을 수 있다. 바딘광장 베트남 독립선언이 이루어졌던 바딘광장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이라는 두 가지 위대한 업적을 남긴 호치민의 묘소가 있는 곳입니다. 이 광장에서 1945년 호치민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고 한다. 평소에도 호치민 묘소를 보기 위하여 이 곳을 찾는 현지인과 관광객들이 많습니다. 특히 호치민 묘소 안에는 미이라로 보관된 호치민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데, 이를 보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도 합니다. 놀라운 것은 외국인 관광객이 아닌 베트남인들이 호치민 시신을 보기 위해 모여든다는 점인데 그만큼 호치민이 전 국민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임을 알게 해주는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호치민 관저 호치민이 살았던 고상식 거주와 관저 호치민이 1958년부터 11년 동안 거주한 2층 구조의 집과 관저입니다. 소박하고 아담한 집에서 그의 성품을 엿볼 수 있습니다. 1층은 위층까지 천장이 뚫려 있으며, 2층에는 호치민이 평소 사용한 시계, 라디오, 자동차 같은 물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므로 유리창을 통해 바깥에서 관람이 가능합니다. 집 앞에 큰 연못이 있는데 호치민은 살아생전 이곳에서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고, 물고기가 노는 모습을 보는 것을 큰 낙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한기둥사원 베트남의 국보 제1호로 지정된 사찰, 일주사 베트남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서, 베트남 국보 1호입니다. 기둥이 하나라고 하여 일주사라고도 불리는 사찰입니다. 이름에 걸맞게 기둥 하나가 사찰을 받치고 있는 형태를 띠고 있는데, 그 주변은 물로 차 있고 네 귀퉁이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습니다. 또 이곳을 찾는 많은 이유 중 하나가 아이를 점지해준다는 이야기 때문입니다. 사원을 두 바퀴를 돌고 관음보살에게 기도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또 한기둥사원 왼쪽으로 불교를 모시는 사당이 있습니다.. 호치민 박물관 베트남의 혁명가 호치민을 기리다. '90년 5월 19일' 호치민 탄생 100년이 되는 날에 개관했습니다. 호치민의 묘 옆에 있는 하얗고 멋있는 건물로 내부장식은 참신하면서 예술적입니다. 구소련의 원조를 받아 레닌 박물관의 전문가가 설계와 내부장식을 담당했다고 합니다. 호치민 생가의 모형, 애용품, 편지, 혁명과 관련되는 것이 전시되고 있으며, 민족의 독립과 통일에 관련된 것들과 세계의 움직임을 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도 상영되고 있습니다. 영어, 불어, 러시아어 가이드가 있으므로 부탁하면 안내해 줍니다. 1945(56세)년 모습 호치민 (Ho Chi Minh , 胡志明) 출생 1890. 5. 19,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 베트남 호앙트루 사망 1969. 9. 2, 하노이 요약 호치민은 30여 년 간 베트남 민족운동의 지도자로서 아시아의 반식민지운동을 이끌었다. 가장 영향력 있는 20세기 공산주의 지도자이기도 하였다. 1919년에 베르사유 회의에 8개 조항의 탄원서를 보내 인도차이나 식민지 국민들에게 통치자들과 동등한 권리를 줄 것을 요구했다. 1930년 2월 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했고, 10월에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 당명을 바꾸었다. 1941년 귀국해 독립동맹 베트민을 구성했고, 1945년 프랑스와 일본이 무너지자 9월 2일에 베트남의 독립을 공표했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지 않은 프랑스가 베트남 남부를 장악하면서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됐다. 8년간의 전쟁 끝에 베트남은 1954년 제네바 협정을 통해 남북으로 분할되었고, 이에 북베트남에 공산 정권을 수립하며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초기생애 호치민은 지방의 가난한 학자인 구엔 신 후이의 아들로 태어나 킴리엔이라는 마을에서 자랐다. 어린시절을 비참하게 보냈지만 14~18세에 휴에 있는 문법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그뒤에 판티에트에서 교사로 지냈고 이어 사이공에 있는 기술훈련원 견습생이 되었다. 외국 여행과 공산주의 신조의 성숙 1911년 그는 바(Ba)라는 가명으로 프랑스 증기선의 요리사 자리를 얻어 3년 이상을 선원으로 지내면서 아프리카의 여러 항구와 보스턴이나 뉴욕 등 미국의 도시를 여행했다. 1915~17년 런던에서 생활한 다음 제1차 세계대전 중반에 프랑스로 옮겨 그곳에서 정원사, 청소부, 웨이터, 사진 수정자, 화부(火夫)로 일했다. 1917~23년 프랑스에서 지내는 6년 동안 그는 구엔 아이 쿡('애국자 구엔')이라는 이름으로 적극적인 사회주의 활동을 폈다. 그곳에 사는 베트남인들을 조직화했고, 1919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베르사유 평화회의에 모인 강대국 대표들 앞으로 8개 조항의 탄원서를 보냈다. 탄원서에서 호치민은 프랑스 식민정권이 인도차이나와 식민지 국민들에게 통치자들과 동등한 권리를 줄 것을 요구했다. 평화회의 중재자들로부터 아무런 반응도 얻어내지 못했지만 이 일로 인해 그는 정치의식이 있는 많은 베트남인들에게 영웅 대접을 받았다. 다음해 러시아 공산혁명의 성공과 레닌의 반제국주의 정책에 자극을 받아 1920년 12월에 사회당을 탈당하고 프랑스 공산당에 가담했다. 그후 자신이 발간하는 잡지 〈파리아 Le Paria〉('추방자')에서 프랑스와 영국의 식민주의 정책의 해악을 고발했다. 호치민은 프랑스에서 노동자 계층의 많은 지도자들과 사귀었는데, 그곳에서 수년 간 투쟁활동을 벌이고나서 1923년말 모스크바로 갔다. 1921년(32세) 파리 시절 모습 1924년 1월 레닌이 죽은 뒤 그는 〈프라우다 Pravda〉지에 레닌에 대한 감동적인 고별사를 실었다. 그뒤 그해 6월 17일부터 7월 8일까지 열린 제5차 공산당 인터내셔널 대회에 적극 참여했다. 이때 그는 프랑스 공산당이 식민주의 정책을 좀더 맹렬히 반대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대회에 제출한 그의 성명서 본문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데, 그 이유는 압박받는 농민들(산업 노동자들과 대치되는 계층)의 혁명적 역할의 중요성에 대한 그의 신념이 최초로 공식 표명되었기 때문이다. 1924년 12월 호치민은 리 투이(Ly Thuy)라는 가명으로 공산주의의 요새인 광저우[廣州]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베트남 민족주의운동의 첫 간부 요원들을 모집하여 베트남 혁명청년협회를 조직했다. 이 협회는 탄 니엔(Thanh Nien)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 협회의 회원들 거의 모두가 정치적 신념 때문에 인도차이나에서 추방되었던 사람들로서 조국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에 대항하는 투쟁에 참여하기 위해 함께 모인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광저우가 인도차이나 민족주의의 첫 본거지가 되었다. 중국 군대 총사령관이었던 장제스[蔣介石]가 1927년 4월 광저우에서 중국 공산주의자들을 추방하자 호치민은 다시 소련으로 피신했다가 1928년 브뤼셀과 파리를 거쳐 시암(지금의 태국)으로 갔다. 그곳에서 동남아시아 공산당 인터내셔널 대표로 2년 동안 지냈다. 그러나 그의 추종자들은 중국 남부에 남아 있었다. 인도차이나 공산당 창당 베트남 혁명청년협회의 단원들은 1929년 5월 홍콩에 모여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하노이나 휴, 사이공 같은 베트남 시에 있는 사람들은 적극적인 조직활동을 펴기 시작했으나 호치민의 부관들 가운데 몇 사람은 지도자의 부재 속에 소극적으로 임했다. 이때 호치민은 모스크바로부터 신임을 받고 있었다. 1930년 2월 3일 호치민은 시암에서 돌아온 후 공산당 창당을 주관했다. 처음에는 베트남 공산당이라고 이름을 붙였으나 1930년 10월 이후 호치민은 소련의 충고를 받아들여 인도차이나 공산당(PCI)이라는 이름을 수용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국제적으로 더 폭넓게 인정받았고 베트남 공산당이라는 이전 이름에 내포된 소시민계급 민족주의의 인상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국면에서 볼 때 호치민은 주도적인 역할보다는 오히려 혁명활동의 조직을 생각하면서 여러 파당간에 벌어지는 갈등을 중재하는 일을 더 많이 한 사람이다. 이런 활동들을 통해 그의 신중함, 성취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분별력, 모스크바를 멀리하지 않으려는 배려, 그리고 베트남 공산주의자들 가운데서 이미 이룩한 그의 영향력 등을 엿볼 수 있다. PCI는 베트남의 폭력적인 반란운동과 동시에 발족되었다. 프랑스의 탄압은 잔인했다. 호치민 자신도 부재중에 혁명분자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을 정도였다. 그는 처음에는 홍콩으로 피신했다가 그곳 프랑스 경찰이 도망범 인도에 대한 승인을 영국 정부로부터 받자 친구들의 도움으로 그곳을 빠져나와 상하이[上海]를 거쳐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193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7차 공산당 인터내셔널 대회에 호치민은 PCI의 수석대표로 참석했다. 이 대회는 호치민이 오랫동안 주장했던 정책인 인민전선(Popular Front:파시즘에 대항하는 비공산당 좌파와의 동맹)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1936년 인도차이나의 공산당원들은 이 전략에 맞추어 자신들의 반식민주의 입장을 누그러뜨리고 '반파시즘 식민주의자들'과의 협력을 고려했다. 같은 해에 프랑스 총리인 레옹 블룸(Léon Blum)의 인민전선 정부는 인도차이나에 있는 좌파 세력들이 좀더 자유롭고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는 것을 허용했다. 그러나 호치민은 1930년에 받은 사형선고 때문에 망명생활을 끝내고 돌아갈 수 없었다. 1937년 블룸의 인민전선 정부가 무너지자 인도차이나에 대한 탄압이 되살아났다. 1938년에 이르러 인민전선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 국가의 탄생 1938년에 호치민은 중국으로 돌아가 옌안[延安]에서 마오쩌둥[毛澤東]과 2개월 정도 같이 지냈다.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게 패했을 때 호치민과 그의 부하인 보 구엔 지아프, 팜 반 동은 이 절호의 기회를 이용해 자신들의 이상을 진척시킬 계획을 꾸몄다. 이무렵부터 그는 호치민('깨우치는 자')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3인조·5인조 동지들이 1941년 1월 국경을 넘어 베트남으로 들어가 5월에 베트민이라는 조직을 구성했다. 이 단체의 결성으로 베트남 고유의 민족주의가 다시 강조되었다. 이 새 기구는 중국에서 장제스 정부의 도움을 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장제스는 공산주의자인 호치민을 믿지 않았고 그를 체포해버렸다. 따라서 호치민은 중국에서 18개월 동안 구금을 당했다. 이 기간에 그는 〈감옥으로부터의 비망록 Notebook from Prison〉이라는 유명한 책을 집필했는데, 이것은 전통적인 한문 단시 모음으로 우울한 단상, 금욕적인 사고, 혁명을 주창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동료들이 중국 남부의 최고 사령관인 장 파쿠에이와의 타협을 통해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에 반대하고 장 파쿠에이의 권익을 지지하겠다는 조건에 동의해 그의 석방을 얻어냈다. 1945년에 베트남 혁명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길을 연 2가지 사건이 발생했다. 첫째, 일본군이 인도차이나를 완전히 점령한 뒤 모든 프랑스 관리들을 투옥하거나 처형했다. 둘째, 6개월 후에 미국이 히로시마[廣島]에 원자폭탄을 투하해 일본은 이로 인해 철저히 패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써 베트남 독립동맹과 호치민의 가장 강력한 두 적이 무너진 것이다. 호치민은 자신에게 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2개월이 못 되어 그는 미국 군대와 접촉하여 일본에 대항하는 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OSS:미국의 첩보기관)과 협력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의 베트남 독립동맹의 게릴라들이 중국 남부 산지에서 적과 싸웠다. 그와 동시에 보 구엔 지아프의 요원들로 구성된 특별 기습부대가 호치민의 지휘를 받으며 1945년 봄에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한 후인 8월 19일에 그들은 하노이에 들어갔다. 마침내 9월 2일 바딘 광장에 구름같이 모여든 수많은 군중 앞에서 호치민은 묘하게도 미국의 독립선언을 연상시키는 말을 사용하여 베트남이 독립되었음을 공표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창조주는 우리에게 불가침의 권리들과 생명·자유·행복을 주었다……!" 그러나 베트남 독립동맹의 장애물이 모두 제거된 것은 아니었다. 연합군의 협정조항에 따르면 중국의 장제스 군대가 일본군을 대신하여 16°선 북쪽을 장악하도록 되어 있었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당시 드골 장군의 영도하에 해방된 프랑스가 독립 베트남이라는 기정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베트남의 지배권을 다시 주장하려 든 점이다. 10월 6일 자크 르클레르 장군이 사이공에 내린 뒤 2~3일이 지나자 중무장한 기갑사단이 도착했다. 3개월도 안 되어 그는 남베트남을 장악했다. 호치민은 계속 싸워야 할지 협상을 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했다. 결국 협상하기로 결정했으나 언젠가는 싸워야 할 것에 대한 대비는 철저히 했다. 호치민의 전략은 프랑스 군대로 하여금 북쪽에 있는 중국 군대를 퇴각시키게 하고 나서 독립의 승인, 르클레르 군대의 철수, 베트남의 재통일을 보증할 프랑스와의 협약을 맺는 데 주력하자는 것이었다. 1945년 10월말에 협상이 시작되었으나 프랑스 군대가 독립에 대한 대화를 거절하자 호치민과 프랑스 군대 양측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었다. 3월이 되어서야 교착상태가 풀렸다. 호치민 편에서는 프랑스군에 제시한 요구에 대해 보다 폭넓은 지지기반을 얻으려는 생각에서 베트남 독립동맹 이외의 당들도 새로운 정부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와 동시에 프랑스 쪽에서는 중국 군대의 철수를 얻어내기 위해 외교사절단을 중국에 보냈다. 이런 조처가 취해지고 나서 르클레르 군대 일부도 북쪽 하이퐁에서 물러났다. 중국 군대의 철수가 확정된 뒤 호치민은 3월 6일에 프랑스군과의 협정에 조인했다. 협정조항에 따르면 베트남은 '자치정부·군대·재원(財源)을 가진 자유국'으로 인정되었으나 계속해서 파리가 주도적인 역할을 행사하는 프랑스 연방에 통합되어 있었다. 12일 후 르클레르가 얼마 안 되는 군대를 이끌고 하노이로 들어갔고 군대는 제한구역에서만 활동하게 되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양측의 극단주의자들은 그 협정에 대해 불만스럽게 생각했다. 그래서 호치민은 일련의 회의(1946. 6~9)에 참석하기 위해 프랑스로 갔고 프랑스 정부와 2차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 평화는 하이퐁에서 발생한 우발적인 사고(1946. 11. 20~23)로 깨지고 말았다. 이때 프랑스 군대와 베트남 군대 사이에 충돌이 있은 후 프랑스 순양함이 하이퐁에 포격을 가했다. 거의 6,000명에 가까운 베트남인이 죽는 바람에 우호적인 화해에 대한 기대도 무너졌다. 병든 몸에 환멸을 느낀 호치민으로서도 좀더 호전적으로 보복하자고 나서는 추종자들의 요구를 물리치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12월 19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되었다. 몇 개월 후 북베트남의 한쪽 구석에 피신해 있던 호치민은 다시 파리와 접촉해보려고 했으나 파리에서 제시한 조건은 그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1948년 프랑스군은 1945년 8월에 혁명을 지지하여 사임했던 전(前) 안남인(베트남인) 황제 바오 다이를 다시 제자리에 앉혀주겠다고 제안했다. 이 조건은 2년 전 호치민에게 제안했던 것보다는 유리했다. 이때 프랑스가 이런 조건을 낸 것은 베트남의 전통 지배계층을 지지하여 베트민을 약화시키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정책은 성공하지 못했다. 지압의 지휘를 받는 베트민 군대가 게릴라 전법과 테러 행위를 동원해 프랑스군과 바오 다이의 군대를 봉쇄해버렸기 때문이다. 1953년말 대부분의 베트남 지방이 베트민에게 장악되었고 좀더 큰 도시들도 사실상 포위상태에 있었다. 프랑스군은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에서 결정적으로 패하게 되자 협상하는 수밖에 없었다(디엔비엔푸 전투). 제네바 협정과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1954년 5월부터 7월 21일까지 8개국 대표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베트남 대표들과 함께 제네바에 모였다. 이때 베트남 대표는 2개 대표단, 즉 호치민 지지자들로 구성된 대표단과 바오 다이 지지자들로 구성된 대표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8개국 대표들은 베트남이 따르기로 되어 있는 1가지 협정을 체결하고서 회의를 끝냈다. 그 협정의 내용은 1956년에 실시하기로 예정된 선거 전까지는 베트남을 17°선의 경계로 나누었다가 선거 후에는 베트남인들이 통일된 정부를 세우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제네바 협상에서 호치민이 행사한 역할을 평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를 대신하여 충실한 친구인 팜 반 동이 대표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국토의 분할이라는 조건과 자기들이 전쟁중에 정복했던 것보다 작은 영토를 통치해야 한다는 조건을 받아들임으로써 베트남 독립동맹이 보여준 온건함은 일찍이 1946년 프랑스와의 협정에 조인했던 호치민이 세운 모범을 따르는 것이었다. 융통성 있는 이런 태도는 실상은 소련과 중국의 압력을 의식한 데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태도를 보였다고 베트남 독립동맹이 모든 면에서 성과를 올린 것은 아니다. 베트남의 재통일을 보장할 수 있었던 선거가 미국과, 그 당시 실제적인 기반 위에 세워진 남베트남에 의해 무기한 연기되자 하노이 쪽이 실패하고 만 것이다. 호치민과 그의 동료들이 장악한 북베트남은 남쪽의 광대한 농업지역과는 단절된, 자원이 빈약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북베트남의 지도자들은 영토가 더 넓은 동맹국들인 중국과 소련에게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불리한 상황에서 호치민의 통치는 탄압적이고 철저히 전체주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1955~56년 농업개혁은 무지에서 나온 만행·탄압과 함께 시행되었다. 북베트남인들에게 '호 아저씨'로 알려졌듯이 호치민은 마음만 먹으면 대단한 인기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1945~46년에 행한 트로츠키주의자들과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전의 혁명활동들을 돋보이게 했던 자신의 인간성을 포기했다. 이 늙은 정치가는 외교분야에서는 그래도 나은 행운을 누렸다. 그는 강대한 공산주의 두 동맹국 사이에서 능숙하게 균형을 유지하면서 모스크바와 베이징[北京](1955), 뉴델리와 자카르타(1958)를 오갔다. 심지어 1960년 모스크바를 여행할 때는 동맹국 사이에 중재자 역할까지 했다. 호치민은 경력으로나 선호도로나 소련과의 관계가 긴밀했지만 아시아 혁명 당시 중국이 맡았던 초기 역할을 잊지 않았다. 한편 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모스크바와의 관계를 활용하는 일에 몰두하며 무엇보다도 베트남인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였다. 이런 태도를 취함으로써 그는 두 공산주의 강대국 사이에서 노련하게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을 때 그는 양쪽으로부터 똑같은 양의 원조를 받았다. 1959년경부터 북베트남은 다시 전쟁에 개입했고 남 베트남에서도 고 딘 디엠 정권에 대한 게릴라(베트콩으로 알려짐) 활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1959년, 북베트남의 사회주의 건설이 통일운동과 무관하지 않다는 라오동(노동자의 당)의 입장표명이 있었으며, 그후 호치민은 정계의 제1선에서는 물러났지만 계속 막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66년 7월 17일 호치민은 북베트남인의 표어가 된, 다음의 메시지를 보냈다. "베트남 국민의 가슴에 독립과 해방만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또한 1967년 2월 15일 미국의 존슨 대통령의 친서에 대해 그는 "우리는 폭격의 위협 아래서는 절대로 협상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고 선언했다. 그는 긴 협상의 초반에 죽었고 그럼으로써 신속한 타협의 기회는 분명 감소되었다. 1969년 9월 2일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찌민이 사망하였다. 호찌민은 유언으로 당의 단결과 전쟁 후 국토 재건을 당부하였다. 일생을 프랑스, 일본, 미국과 상대로 싸웠던 호찌민은 베트남 사람들에게 공산주의자이기 이전에 민족주의자로 알려져 있었다. 남베트남 정부의 지도자였으며 호찌민을 상대로 싸웠고 한때 남베트남의 부통령을 지낸 응우옌까오끼는 전쟁 후 “그는 베트남 인민들에게 존경 그 자체였다. 그는 프랑스는 물론 다른 외침에 대항하는 투쟁에 언제나 앞장섰다. 내가 어려서 철이 없었을 때, 대부분의 베트남 사람들은 호찌민을 대단한 애국자로 생각했다. 나도 그를 대단히 칭송했었다.” 고 말했다. 미국의 CBS는 광고없이 7분간 호찌민의 사망을 해드라인 뉴스로 보도하였다. 1969년 9월 8일 하노이 바딘 광장에서 10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호찌민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호치민 [胡志明, 1890.5.19 ~ 1969.9.3] 평전 호치민이 1930.2.3. 홍콩에서 베트남 공산당을 결성하다 마땅히 시야는 넓게, 생각은 치밀하게, 때때로 공격은 단호해야 한다. 길 잘못 들면 쌍차(雙車)도 무용지물이나, 때를 만나면 졸(卒) 하나로도 성공한다. -호치민의 옥중시 <장기를 배우며 2> (안경환 역) 조국을 떠난 지 20년 만인 나이 마흔에 홍콩 땅에서 베트남공산당 결성 1930년 2월 3일 홍콩의 주룽. 노동자 마을의 작은 집에 베트남의 공산주의 운동가들이 모였다. 국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베트남의 혁명세력은 세 분파로 나뉘어 갑론을박 하고 있었다. 이에 베트남 혁명세력의 실질적 지도자인 호치민(호찌민, 당시 이름은 응우옌 아이 쿠옥)이 회의를 소집한 것이다. 먼저 자신을 소개한 호치민은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분열해 있는 혁명세력이 하나의 당으로 뭉쳐야 합니다. 그래야 프랑스 제국주의와 싸울 수 있습니다.” 호치민의 말에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실려 있었다. 혁명가들은 통합정당의 이름에서부터 하나하나 의견을 좁혀나갔다. 그리하여 베트남 공산혁명 세력의 공식적인 통합정당인 ‘베트남공산당’이 탄생하였다. 보안을 위해 장소를 옮겨가며 회의를 하는 동안 호치민은 지나온 세월을 반추하면서 감회에 젖곤 했다. 그의 나이 이제 40이 넘었으니, 고국을 떠난 지 20년이 다 되었다. 오직 조국 베트남의 백성들에게 행복을 되찾아주리라 결심하고 떠난 길이었다. 경찰에 쫓기면서 하루도 편안하게 눈을 붙일 수 없었던 세월, 아직도 갈 길은 멀었지만, 이제 초석을 놓았다는 마음에 호치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엄밀히 말해 호치민의 베트남공산당은 레닌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약칭 코민테른)이나 마오 쩌둥의 중국공산당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호치민에게는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조국의 현실을 타개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였다. 호치민은 프랑스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베트남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지식인, 중농, 프티 부르주아지만이 아니라 의식 있는 부르주아 민족주의 그룹도 혁명세력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공산주의자 이전에 민족주의자임을 말해주는 호치민의 이러한 생각은 새 통합정당의 강령에 반영되었다. 그러나 베트남공산당의 2월 강령에 대해 코민테른은 부분적으로 문제점을 지적했다. 강령의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문제였다. 10월에 소집된 회의에서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제거한 새로운 강령이 채택되었고, 그에 따라 당명도 ‘인도차이나공산당’으로 바뀌었다. 이는 베트남뿐만 아니라 캄보디아나 라오스 등 인도차이나를 형성하는 세 나라의 혁명을 함께 추구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었다. 민족 독립을 우선시하고 이를 위해 중간 계급의 협조를 구하고자 했던 호치민의 전략은 은근히 묵살되었지만, 호치민은 새로운 강령을 선선히 받아들였다. 받아들일 것은 군말 없이 받아들이고, 확신이 서면 단호하게 실천에 옮기는 것, 그것이 호치민의 크나큰 장점이었다. 온화하면서도 단호하고, 단호하면서도 넓은 그의 성품이야말로 성공의 일등 공신이었다. 학문을 익혀 성공하기보다 남을 이롭게 하라고 가르친 아버지 호치민을 영웅으로 만든 것은 8할이 시대상황이었다. 19세기 중반 프랑스인들은 베트남의 가톨릭교도들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베트남을 침공하여 식민지 인도차이나를 건설했다. 베트남에 들어온 프랑스인들은 자본주의 방식에 따라 대규모 고무농장 등에 자본을 투입하여, 베트남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바꾸고자 했다. 불교와 유교를 근간으로 하는 공동체적인 생산양식을 존중하는 베트남 사람들에게 자본주의는 야만적인 것이었다. 호치민의 아버지 응우옌 신 삭은 의식 있는 유학자였다. 일찍 부모를 여읜 그는 어렵게공부하여 베트남어로 ‘포 방’이라고 하는 2급박사학위를 땄다. 그럼에도 그는 식민지 관료체제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아내의 죽음을 핑계로 조정의 관직 임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버지의 이러한 성격이 아들 호치민에게도 그대로 이어졌음은 물론이었다. 호치민의 이름은 여럿이었다. 어린 시절의 이름은 응우옌 신 쿵이었고, 11살 이후의 이름은 응우옌 탓 타인(성공할 사람이라는 뜻)이었으며, 외국에서 활동할 때는 여러 가지 가명을 썼는데 가장 자주 사용한 이름은 응우옌 아이 쿠옥(애국자라는 뜻)이었다. 지금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호치민(胡志明)이라는 이름은 1940년 중국 기자로 행세하면서 쓴 것이다. 어린 시절 이름을 바꾸는 것은 베트남의 전통이었지만, 호치민은 늘 경찰에 쫓기는 몸이었기 때문에 신분을 감추기 위한 가명을 썼다. 이 여러 가지 이름 속에 성공한 애국자 호치민의 생애가 상징적으로 들어 있다. 유교 경전보다는 <삼국지>나<서유기>가 더 재미있었던 소년 11살의 호치민, 당시 이름으로 응우옌 탓 타인은 아버지 밑에서 고전 공부를 하다가 아버지의 친구 부옹 툭 쿠이가 가르치는 지역 학교로 가게 되었다. 쿠이는 학생들에게 고전을 달달달 외게 하지 않고 유교 경전의 인본주의적인 핵심을 전달하려고 애썼다. 아울러 학생들에게 베트남의 독립을 옹호하는 정신을 불어넣었다. 호치민은 새로운 스승 밑에서 너무도 즐거웠다. 그러나 나라를 잃은 슬픔에 피가 끓어오른 스승은 결국 독립운동에 합류하기 위해 학교 문을 닫고 떠났다. 소년 호치민은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아와 고전 공부를 계속했다. 아버지는 한문을 공부하여 무작정 공직에 나가려 하지 말고, 고전의 속뜻을 이해하고 사람들을 이롭게 할 방법을 찾도록 하라고 가르쳤다. 호치민은 이 무렵 유학경전보다는 <삼국지>와 <서유기> 같은 옛날이야기가 더 재미있었다. 호치민은 또 마을의 대장장이 지엔을 좋아했는데, 그에게서 용광로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기도 하고, 그를 따라 새 사냥을 가기도 했다. 저녁이면 지엔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지엔은 독립운동가들이 오랑캐를 몰아내려다 실패한 이야기를 실감나게 해주었다. 호치민은 민족주의자 부옹 툭 마우가 자살한 이야기와 판 딘 풍이 병사들을 잃고피신했다가 이질로 죽었다는 이야기를들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호치민은 동네에서 구할 수 있는 책이 대부분 베트남 역사가 아니라 중국 역사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조국의 역사를 알기 위해 성도인 빈까지 걸어가기도 했다. 그는 서점에서 베트남 역사서를 탐독하고는 중요한 구절들을 암기해 와서 친구들에게 들려주었다. 호치민은 이렇게 어린 시절의 환경에 의해 또는 스스로 역사적 소명의식을 키워나갔다. 이웃 마을에는 유명한 학자이자 애국자인 판 보이 차우가 살고 있었다. 차우는 호치민에게 근대화된 일본을 배우고자 하는 동유 (동쪽에 있는 일본으로 유학 간다는 의미) 운동에 합세할 것을 권유했다. 호치민은 일본인에게 기대는 것은 “앞문으로 호랑이를 몰아내고 뒷문으로 이리를 불러들이는 것과 한가지”라고 생각하며 거절했다. 만약 이 제안을 수락했다면, 호치민은 공산주의 혁명가가 아닌 우익 독립운동가가 되었을 수도 있다. 민족자결주의 선언한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베트남 독립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내다 사실 호치민을 영웅으로 만든 것은 8할이 용기였다고 해야 옳다. 그는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데 신중하기는 했지만, 확신이 서면 항상 과감했다. 어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납세 거부 시위에 참여하여 국학에서 퇴학당한 후에도 결코 낙담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새로운 세계에 눈을 돌리는 계기로 삼았다. 1911년 6월, 그는 드디어 프랑스 기선 아미랄 라투셰 - 트레빌 호에 주방보조로 취직하여 베트남을 떠난다. 이제 호치민에게 본격적인 떠돌이 생활이 시작되었다. 프랑스와 미국과 영국과 러시아와 중국이 보이지 않는 주연 호치민이 연기하는 무대였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하자, 호치민은 베트남 독립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들고 연합국 지도자들을 직접 찾아갔고, 윌슨에게는 편지를 썼다. 호치민의 무모할 정도의 추진력과 과감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세계를 돌아다니는 동안 호치민은 프랑스에도 영국에도 피폐한 삶을 사는 노동자가 존재하고, 또 양심적인 지식인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것이 그를 차츰 사회주의 운동에 몸담게 하는 당위성을 제공했다. 1924년 6월 호치민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5차 코민테른 대회에 프랑스공산당 대표로 참석하여 세 차례에 걸쳐 연설을 했다. 그는 아시아의 식민지 문제와 농민의 역할에 대해 힘주어 강조했다. 이 인상적인 연설은 화제가 되었지만, 농민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 이단적이라는 이유로 나중에 제재를 당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새로운 공산주의 지도자의 탄생을 예고하는 사건임에 틀림없었다. 1945년 9월 2일, 만인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다 무엇보다도 호치민을 성공으로 이끈 에너지는 열정이었다. 그는 베트남 민족 해방의 열망 하나로 평생 꿈 속에서도 꿈을 꾸었다. 그 꿈은 1945년 정말 꿈처럼 찾아왔다. 일본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후, 인도차이나공산당은 전국인민대회를 소집하여 하노이를 점령했다. 민족해방위원회를 소집하여 호치민을 주석으로 내각을 구성한 혁명세력은 9월 2일 바딘 광장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그들은 조물주로부터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 받았다. 생존, 자유, 행복의 추구 등이 바로 그 권리이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호치민의 목소리가 온 세상에 울려 퍼졌다. 이 인용구절은 미국의 독립선언서(1776)의 한 대목과 같다. 또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다”라고 천명한 프랑스 인권선언(1789)과도 맥락을 같이한다.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선언이 묘하게도 이후 첨예하게 대립할 프랑스와 미국이 애초에 세웠던 근대 혁명정신과 동일한 것이었으니, 생각하면 쓴웃음을 짓게 하는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꿈 같은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베트남 독립은 사실상 반 토막이 되고 말았다. 1954년 제네바 협정에 의해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갈라지게 된 것이다. 이제 호치민의 열정은 독립이 아니라 통일 쪽으로 향했지만, 통일 또한 미국이나 프랑스 등의 열강으로부터 진정으로 독립하는 것이었다. 이해관계가 대립된 이상 전쟁은 필연이었는지 모른다. 1964년 8월 이른바 ‘통킹 만 사건’으로 시작된 베트남 전쟁은 1975년까지 베트남을 온통 피로 물들인 현대사 최고의 비극이었다. 현대사 최고의 비극이 진행되는 동안 폐결핵이 호치민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었다. 호치민은 죽음에 대비하여 유언장을 작성했다. 1965년에 처음 작성하고 이어 1968년과 1969년에 손으로 고쳐 쓴 유언장은 베트남 인민의 생활 수준을 높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함께 추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었다. 1969년 9월 2일 호치민은 그토록 열망했던 조국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누구보다 힘찼던 숨을 멈추었다. 권력을 통해 어떠한 부귀영화도 누리지 않은 지도자 실로 호치민의 일생은 조국의 운명과 함께한 것이었다. 조국이 노예 상태였기에 그는 외국을 돌아다니며 온갖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참고 때를 기다렸으니, 그의 일생이야말로 성공의 교과서와도 같은 것이다. 마른 몸매에 약간 겁먹은 것 같은 베트남인 특유의 큰 눈, 한없이 인자하고도 부드러운 표정 속에 호치민의 에너지가 들어 있었다. 호치민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전 세계의 언론이 그에 관한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듀이커가 평전에서 인용한 우루과이의 한 신문은 “그는 우주만큼 넓은 심장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아이들에 대한 가없는 사랑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분야에서 소박함의 모범이다”라고 극찬했다. 분명히 그는 권력을 통해 어떠한 부귀영화도 누리지 않았고, 조금의 안락도 추구하지 않았으며, 끝내 친근한 ‘호 아저씨’의 이미지를 안고 떠났다. 호치민이 유언장에서 “내가 죽은 후에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내 시신은 화장해달라”라고 주문한 것은 그의 인품을 그대로 말해준다. 권력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한결같았던 인품 속에서 그의 탁월한 정치력과 추진력이 솟아나왔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에게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 개인의 안위에 대한 걱정이 있었음을 짐작한다. 1930년 2월 3일 이국 땅 홍콩에서 베트남공산당을 결성하던 이들의 떨리는 손길이 아직도 우리 가슴 속을 스산하게 흔드는 이유다. 우리의 독립투사들도 외국에서 독립군을 조직할 때, 임시정부를 수립할 때 그들과 똑같은 심정이었으리라. 오늘 따라 호치민의 옥중 시 한 편이 가슴을 울린다. 엄동설한의 초라함이 없다면, 따스한 봄날의 찬란함도 결코 없으리. 불운은 나를 단련시키고, 내 마음을 더욱 굳세게 한다.- <스스로 권면하며> 호치민시티 (Ho Chi Minh City) 위치 베트남 남부 인구 8,224,400명 (2015 추계) 면적 2,095.5㎢ 요약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가장 큰 도시. 옛 이름은 사이공[西貢]. 1862~1954년에 프랑스 보호령 코친차이나의 수도였고, 1954~75년에는 남베트남의 수도였다. 메콩 강 삼각주 북쪽 사이공 강 연안, 남중국해에서 약 80㎞ 떨어진 곳에 있다. 오늘날 호치민시티가 차지하고 있는 지역은 오랫동안 캄보디아 왕국의 일부였으며, 17세기에 처음으로 베트남인들이 들어왔다. 18세기부터 프랑스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고, 프랑스 상인들과 선교사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1859년 프랑스에 점령되었고, 1862년에 베트남 황제 투 두크[嗣德]가 맺은 조약으로 공식적으로 프랑스에 넘어갔다. 코친차이나의 수도가 된 사이공은 주요항구도시로 변모하여 아름다운 대저택, 인상적인 공공건물, 가로수와 잘 닦인 대로를 갖춘 대도시로 성장했다. 시의 북쪽과 남쪽을 연결하는 철도도 건설되었다. 1940년 일본에 점령되었으나 프랑스 식민정부가 1945년 일본군에 억류될 때까지 프랑스 관할하에 있었다. 이 도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았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한 뒤 호치민을 주축으로 하는 하노이의 베트남 독립동맹이 베트남의 독립을 선포했지만, 이곳에서 열린 축하행사는 폭동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 결과 프랑스 군대가 시를 장악했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1954년 제네바 회의로 종식되었으며, 베트남은 북부와 남부로 나누어졌다. 베트남이 분단되자 이곳은 남베트남의 수도가 되었으며, 북베트남에서 피난민들이 몰려오면서 정치와 문화가 풍부하고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초에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즉 베트남 전쟁 동안에는 미국의 군사작전 본부였다. 1968년 전투로 도시 곳곳이 파괴되었다.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군에 의해 함락되었고, 1976년 남북 베트남이 통일되면서 호치민시티로 개명되었다. 공산주의의 지배를 받으면서 호치민시티는 행정기능을 잃어버렸다. 공산 정부는 인구를 감소시키고 외국 수입품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며, 민간기업들을 국영화시키기 위해 막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1975년 이후 많은 회사들이 문을 닫거나 가동을 중지한 반면, 자급자족을 강조하는 새로운 투자사업들이 시도되었다. 오늘날 영화사들은 지역 영화를 만들어 수입에 대체하고 있으며, 국영 수공업체에서는 그 지방에서 생산되는 재료들로 다양한 제품을 만들어 수출한다. 수출품으로는 가구, 양탄자, 옻칠 그림 및 그밖의 예술품 등이 있다. 한때 주점과 음식점이 번성했으나 대부분이 문을 닫았다. 1912년에 세워져 서양 사람들의 사교 중심지가 되었던 케르클 스포르티프 건물은 오늘날 시민을 위한 박물관이 되었다. 20년 동안 국회 건물로 쓰였던 오페라 하우스는 국립극장으로 바뀌었으며, 사이공대학교와 반한불교대학교가 합쳐져 국립호치민대학교가 되었다. 번화했던 탄손나트 항공은 1975년에 사실상 문을 닫았고, 지금은 베트남 항공이 국내 다른 도시들로 정기운항하며, 에르프랑스가 파리로 정기운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