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여행과산행길

용소막성당에서...

이름없는풀뿌리 2017. 9. 7. 10:48
용소막성당에서... (1) 용소막 험준한 산세인 강원도에서는 드물게 제법 넓게 펼쳐진 신림역 근처 들판을 거닐다가 좀 높은 지대에 고아한 자태를 내뿜고 있는 용소막 성당이 보여서 들어가 보았다. 용소막이라는 말은 용소(龍沼)라는 큰 못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런데 농지정리를 하면서 농지로 개간해 매몰되어 지금은 볼 수 없단다. 마을의 지형지세가 용의 형상을 닮아 현재의 용소막 성당 자리가 용의 발 부분에 해당되고, 그 뒷산이 용의 머리 형상을 하고 있어 용소막이라고 불린다는 설도 있단다. 바짝바짝 붙어있지 않고 텃밭들을 사이에 두고 드문드문 자리한 농가들이 이 곳에 와서 전원생활을 하고 싶게 정답게 느껴진다. (2) 용소막 성당 지금은 고속도로를 타고 쉽게 접근 하지만 100여 년 전에는 강원도 오지중의 오지인 산골짜기 이었다는데 강원도의 2번째 유서 깊은 성당이 이곳에 자리한 것은 병인박해(1866) 당시 피난 온 신자들이 용소막에 정착하여 신앙생활을 한데 있다 한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6호로 강원도에서 가장 오래된 풍수원 성당과 원주 성당에 이어 세 번째로 오래된 용소막 성당(1904)은 당시 성당 건립 방식이었던 로마네스크 방식으로 세워진 100여년 역사를 지닌 성당이다. 1898년 풍수원 성당의 르메르 신부에게 전교회장으로 임명된 최석완(崔碩完:바르바나, 1898~1931)으로 인하여 공소(公所)로 출발한 용소막 성당은 1904년 5월 4일 용소막 본당으로 승격하고 초대 주임 신부로 프와오 신부가 부임 하였다. 1910년 4월 새 양옥성당 건립을 추진 하던 중 1912년 7월 「세계1차대전」이 일어나 제2대 주임 기요 신부가 본국 프랑스 군대에 소집되어 귀국하고, 제3대 시잘레(P.Chizallet) 신부에 의해 1915년 가을에 건평 100평의 벽돌 양옥 성당을 건립하였다. 병인박해시 고종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다지기 위해 가톨릭을 탄압했다. 1866년에 시작된 박해는 병인양요,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사건, 신미양요 등을 거치면서 더욱 치열해지다가 1873년 대원군이 자리에서 물러남으로써 박해는 끝날 수 있었다. 박해를 피해 숨어 다녔던 천주인들이 정착할 곳을 찾다가 용소막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용소막과 거리가 멀지 않는 곳인 쇠골과 거무내 등지에도 이미 박해를 피해 교우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산을 이용해 화전을 일구고, 옹기가마터를 만들어 옹기를 팔아 생활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교우들과 병인박해를 겪었던 제천사람 최도철이 1898년 용소막에 원주성당 소속 공소를 개설했고, 1904년 원주본당에서 분리되면서 독립된 성당이 되었다. 처음에는 십여 칸의 초가였다가 1914년 중국인 기술자들을 고용해 신축공사를 하기 시작, 1915년 건평 100평의 벽돌 양옥성당을 준공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한국전쟁 시 일부 파손된 것을 보수했다고 한다. 발족 당시 860여명이었던 신자 수가 1910년에는 2천명, 1915년 3천명으로 증가했으나 1952년에는 300여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용소막성당 100주년을 맞은 2004년에는 870여명의 신자들이 교적에 올라있다고 하는데, 발족 당시의 신자수와 거의 같은 수준이다. 제1대 프와요 신부를 시작으로 제35대 위종우 신부가 주임신부로 재직 중이다. 용소막에 성당이 생기고 나서부터 마을은 번성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에는 훨씬 많은 사람들이 용소막으로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외국신부님이 계셨던 곳이라 일본인들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치외법권 지역이었죠. 일본인들의 핍박과 수탈을 피해 이주한 사람들은 성당을 일종의 바람막이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현재 용소막성당 주임신부인 위종우 신부의 말이다. 이후 6.25를 겪으면서 인구가 많이 줄었다가 성당 구호사업으로 다시 인구가 유입되었고 구호가 끊기면서 또다시 인구가 줄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위종우 주임신부는 "옛날보다 인구가 많이 줄었다고 들었습니다. 성당주변의 90% 이상이 신자로, 마을의 큰일이나 행사가 있으면 성당 마당에서 마을일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당 땅의 일부를 마을에 기증해서 운동시설과 놀이터를 만들어 주민들이 이용하고 있습니다."라며 마을주민들과의 친화력을 강조했다. 용소막 성당은 화려하지 않고, 수수하고 연륜이 묻어나는 품위 있는 성당이다. 6.25전쟁 때 북한군의 식량 창고로 사용되어 많이 파손 되었으나, 수복 후 복구 하였다. 1965년 춘천교구와 청주교구에서 분할 신설된 원주교구에 소속 되었고, 관할구역 분할과 주민들의 도시 이주로 교세가 크게 축소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의 용소막 성당은 시골 성당으로 대부분이 노인 신자들이시고, 넉넉지 않은 본당 재정 사정에 의하여 피정의 집 운영과 20여 연간 해오고 있는 메주 판매를 하고 있다고 한다. 한해 콩 250여 가마를 사용 할 정도로 이곳 메주로 장을 담그면 맛이 좋아 유명하다고 한다. 성당 앞의 안내판과 기사들을 읽고 나서 다시 성당을 쳐다보니 성당의 모습이 마치 불과 몇 년 전 지은 것처럼 산뜻한데 100여 년 전 중국인 기술자들이 지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3) 아쉬움 1915년 성당 앞마당에서 태어나고, 1942년에 사제가 되어 1976년까지 성직 생활한 선종완(宣鍾完:라우렌시오 1915~1976)신부의 유물관이 성당 뒤편에 있는데 성당 앞에는 그가 나고 자란 생가터가 있다. 8개국어를 하고, 오르간도 잘 친 그는 이 곳에서 나고 자란 성서학자로 유명하다고 한다. 또 한 가지 처음에는 신림역 뒤편에 지으려 했는데 어느 날 긴 수염을 가진 백발 도인이 나타나 “앞으로 30년 후에는 이곳에 철마가 지나갈 터이니 저 쪽 산 밑에 성당을 지으시오.“하여 이곳에 지었는데 30년 후 중앙선 철도가 개설되었다는 전설이 있다는데 신자들은 그 도인을 성요셉으로 생각한다 한다. 배달9214/개천5915/단기4350/서기2017/09/02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1. 성당 입구(뒷편이 선종완 신부 생가터) 1) 처음에 초가집 성당이었는데 1915년 이렇게 지었다 함. 2) 일제시대에도 거의 치외법권지대였던 흔적인 삼랑식 출입문의 부조. 3) 수령 150년 된 느티나무가 호위하고 있는 아름다운 용소곡 성당 4) 한없이 자애로운 성모마리아 5) 사제관으로 수녀님 한분이 올라가시고 계시다. 6) 한때 3천여명의 신자가 모였다는데 지금은 재정이 열악하여 메주 판매로 유지한다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