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정치적 삶과 죽음 걸린
정치권력, 검찰권력의 결투 구도
거짓과 위선 벗겨진 조국 사태에
어정쩡한 타협, 분노만 초래할 것
9일 취임 이후 국가 조직인 법무부를 조국 가족 사수를 위해 총동원된 사조직처럼 장악했다. 장관직을 무기로 삼아 수사 외압과 직권남용의 위험한 곡예를 하고 있다. 윤석열의 수사라인 배제, 피의 사실 공표 금지, 전국 검사와의 대화 등을 쏟아내고 ‘되돌릴 수 없는 개혁’
을 다짐하며 힘을 과시한다. 사실 ‘검찰 개혁’이란 구호는 ‘민변’ 등 우호 세력을 심어 검찰을 점령하려는 포장술이자
‘개혁 대 저항’ 구도를 위한 장치로 써먹고 있다는 의심이 든다.
조국에 맞선 윤석열, 그의 심사는 복잡하다. 조국과의 싸움에서 죽을 수도 있고, 살아남아도 고난의 행군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우리 윤 총장”은 조국 사태에서 범죄의 냄새를 맡았고, 수사 개시로 청와대에 신호를 보냈다. 9월 6일 국회 인사청문회 종료 직전 단행한 조국의 부인 기소는 장관 임명을 막아달라는 ‘호소’였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개혁성이 강한 인사”라며 강행했다. 반(反)개혁 세력에 서지 말라고 윤석열에게 내린 묵시적 명령인 셈이다.
조국으로선 질 수 없는 한판이다. 망상에 가까운 자기확신의 갑옷으로 스스로를 무장했다. 도덕 불감증이나 진보의 이중성 따위는 큰 선(善)을 위한 사소한 악(惡)이라고 치부한다. 게다가 그는 ‘문(文)의 남자’다. 문 대통령을 비롯해 ‘조국 쇼’에 들러리 서기로 작정한 친정부 언론, 어용 시민단체, 얼치기 진보 전위대가 광적으로 밀고 있다. 셀프 기자간담회와 청문회에서 늘어놓은 변명이 거짓말로 속속 드러나지만 까딱도 안 한다. 나치의 프로파간다를 지휘했던 괴벨스가 명언을 남겼다.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하고 그 다음에는 의심되지만 되풀이되면 결국 믿게 된다. 거짓과 진실의 적절한 배합이 100%의 거짓보다 더 큰 효과를 낸다”고.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3000명 넘는 대학교수들이 시국선언으로 호소하고, 대학생들이 촛불집회로 좌절과 분노를 표출하고, 부정적 여론이 압도적이어도 ‘내 갈 길을 가련다’는 배짱이다. 아내가 기소되고, 5촌 조카가 구속돼도 그의 질주는 멈추지 않을 기세다. 윤석열만 물리치면 ‘아무도 흔들 수 없는 조국의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환상에 젖어 있는 걸까. 괴벨스는 이런 말도 했다. "위기를 성공으로 이끄는 선동이야말로 진정한 정치 예술이다.”
윤석열은 현 정권의 보복성 적폐청산에 올라탄 덕에 떴다. 신세 진 게 있다는 얘기다. "사람한테 충성하지 않는다”는 윤석열이 헌정 사상 처음으로 법무장관을 기소하는 검찰총장이 되거나, 권력의 협박과 회유에 굴복해 조국에게 면죄부를 주고 굴욕을 감수하는 갈림길에 섰다. 조국을 쓰러뜨린다면 대통령에 대한 ‘항명’이다. 윤석열 검찰의 칼끝은 조국을 겨냥했지만 ‘살아 있는 권력’에 치명상을 낼 수 있다. 윤석열의 딜레마다.
조국 사태는 가짜 진보주의자들의 번드르르한 언어유희 속에 추악한 반칙과 특권, 위선과 탐욕이 숨겨져 있음을 폭로했다. 언론의 합리적 의심과 의혹 제기를 가짜뉴스니 모함이니 하며 진영논리로 호도하는 뻔뻔한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같은 나라에 살고 있지만 너무도 낯선 두 개의 집단으로 찢어져 있다.
참과 거짓, 옳음과 그름이 실종된 사회에선 ‘정의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한다. 홍콩의 정치철학자 짜우포충 교수가 저서 『국가의 품격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에 썼다. "정의를 요구할 권리는 구걸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으로서 누려야 할 도덕적 권리다. 우리에게는 이를 바꿔야 할, 심지어 타도해야 할 권리가 있다.” 정의를 떠받치는 평등과 공정이 부정되면 국가 권력에 복종할 의무가 없고, 통치의 정당성에 저항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조국의 중도 사퇴와 봐주기 수사로 대중 덮자는 얘기가 흘러다닌다. 조국과 윤석열의 체면을 함께 살리는 그럴싸한 타협안이다. 그래선 안 된다. 조국은 부인과 친척의 죄를 "나는 몰랐다”로 뭉개지 말고 자신의 무죄를 싸워 증명하라. 윤석열은 이 거짓의 탈을 벗길 때까지 맞서야 한다. 이도 저도 아닐 때 국민은 정의를 요구할 권리를 행동으로 옮길지 모른다. 검투사의 결기로 끝장을 봐야 하는 이유다. 고대훈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