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여행과산행길

산성길19(수어장대, 청량당, 매바위, 21/06/05, A Wondeful Day / Sweet People)

이름없는풀뿌리 2021. 6. 15. 13:49
요즈음 – 산성길19(수어장대, 청량당, 매바위) – – 수어장대(守禦將臺) – 한 나라 줄여 모아 山城을 만들었고 山城을 또 오므려 西將臺 세웠으니 그 앞에 서기만 해도 고개절로 숙여져 – 청량당(淸凉堂) – 누명에 잘린 목숨 이승을 떠돌다가 당집에 들려오는 冤魂祭 굿거리에 이제야 모든 걸 잊고 구천으로 가련다 – 매바위 – 튼튼히 쌓은 南城 보고서도 못 미더워 기어이 목을 뽑아 큰칼을 내리치면 매발톱 바위를 찍어 억울함을 알리리 배달9218/개천5919/단기4354/서기2021/06/05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산성길 산책(청량산) (1) 6/5 지인 내외와 산성길 지인이 늦게 와 홀로 남옹성, 행궁지 돌다가 합류하여 (북문-서문- 남문) 산책 도중 청량당, 수어장대 들러 傳說을 생각하며 이회장군, 매바위, 무망루, 송수대, 수어장대 알현 (2) 6/7 홀로 성밖길 나섬 불망비 근처 노루발 완전 개화 그 아름다움에 한동안 발목이 붙잡혔다. 남옹성은 금계국 세상, 그리고 산골무꽃, 으아리도... (3) 6/13 지인부부와 다시 남성 산책 이회장군이 쌓은 남성은 역시 우람. 북성보다 높이, 견고. 예술면에서 단연 압권. 그러니 이회의 억울한 전설 생길 법도... 금계국, 으아리 절정, 아침 안개에 몽환적 분위기의 산여울. 산에는 딱총나무 열매도 빨갛게 익어가고 집에는 큰 애가 첫 방문에 가져온 만천홍 開花 배달9218/개천5919/단기4354/서기2021/06/05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1) 남장대 쪽은 금계국 세상(21/06/07) 2) 한 달여만에 만개한 불망비 근처 언덕의 노루발(21/06/07) 3) 남장대 근처 산골무꽃(21/06/07) 3-1) 남장대지 근처 안개, 딱총나무, 까치수영(21/06/13) 4) 행궁지 느티나무가 있는 대형신라기와 발굴지(21/06/05) 5) 누명 쓴 이회장군 넋을 기리는 청량당(21/06/05) 6) 그리고 이회장군 전설이 깃든 매바위의 守禦西臺 각인명 7) 무망루(無妄樓) 기원 8) 수어장대(守禦將臺) □ 수어장대(守禦將臺) 수어장대는 남한산성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장대로서 1972년 경기고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으며 남한산성에 세워졌던 5개의 장대중 현존하는 유일한 건물이다. 인조2년(1624) 융사 이서(李曙)에 명하여 옛 땅에 관련하여 남한산성에 개축했는데 이때 산성개축과 함께 서장대도 다른 장대들과 함께 건립되었다. 그렇지만 당시는 단층건물이었다. 영조27년(1751) 유수 이기진이 왕명을 받아 2층 누각으로 증축하였으며 고종33년(1896) 유수 박기수가 재건 하였다. 현재 우리가 보는 모습은 2층 누각식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영조27년(1751) 유수 이기진(李箕鎭)이 기존 장대 윗층에 누각을 더 세워서 상루하대(上樓下臺)를 이루게 하고, 루 외부에는 수어장대(守禦將臺), 내부에는 무망루(無忘樓)라는 편액을 달았다. 無忘樓란 명칭에는 병자호란 때의 치욕을 잊지 말자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이 수어장대를 1896년 유수 박기수가 고쳐 세운 것인데 현재 모습의 건물이 된다. 또한 정조12년(1788)에는 남장 대도 부윤 이태영(李泰永)에 의해서 서장대를 본떠 2층의 누각이 세워졌는데, 이렇게 두 장 대만을 2층 누각식으로 개조한 사실은 성내의 여러 장대 가운데 특히 두 장대가 중시되었 음을 의미한다.(2009년 수어장대 실측조사보고서/경기문화재단) □ 청량당(淸凉堂)과 매바위 수어장대 입구에 있는 이회(李晦)와 그의 처첩을 모신 사당. 1972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 호로 지정. 본당은 목조 단층기와 한식건물로 구조는 전면 3칸, 측면 2칸이며 면적은 108평. 본당의 전면에는 이회의 초상화가 있고 좌, 우편에는 벽암대사(碧巖大師) 각성과 이회의 처 첩 초상화가 각각 봉안되어 있다. 원래의 것은 625전쟁 때 분실ㅚ었고 지금 있는 것은 그 뒤 새로 만든 것이다. 이회는 인조2년(1624) 남한산성을 축성할 때 성의 동남 쪽을 맡았던 功役의 책임자였다. 그러나 축성 경비를 탕진하고 공사에 힘쓰지 않아 기일 안에 마치지 못 하였다는 무고한 모략을 받고 사형을 당하였다. 그의 처첩도 남편의 성 쌓는 일을 도와 삼 남지방에 가서 축성자금을 마련하여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강물 에 투신하여 자살하였다고 한다. 이회가 서장대 앞뜰에서 참수를 당하기 직전에 "내가 죽은 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죄가 있는 것이다" 라는 말은 남겼다고 하는데 실제로 이 회 장군의 목을 베자, 그의 목에서 한 마리의 매가 날아 나와 근처 바위에서 슬피 울다가 사람들이 다가오자 멀리 날아가 버렸고 사람들이 그 매가 앉았던 바위를 보니 매 발톱 자국 이 선명히 남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가 이룬 공사를 재조사해보니 그가 맡았던 부분이 견고 하고 충실하게 축조되어 있어 無罪가 밝혀졌고 서장대 옆에 사당을 지어 이회와 그의 처첩 의 넋을 달래게 하였다고 한다. 현재 해마다 한 차례씩 지방 무속인들이 제사를 지내며 당 시 매가 앉았던 바위는 매바위라 부르는데 원래 이 매바위에는 실제로 매 발자국이 선명하 게 남아 있었다고 하는데 일제강점기에 어떤 일본인 관리가 매 발자국이 찍힌 부분을 도려 내어 떼어 갔다고 한다. (2009년 수어장대 실측조사보고서/경기문화재단) □ 청량당(淸凉堂)과 매바위 전설 남한산성 수어장대 앞 마당 한쪽 모퉁이에는 '매바위' 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매바위로 불리어지게 된 데에는 남한산성의 축성 책임을 맡았던 이회 장군의 억울한 죽음과 한이 깃들어 있다. 이회 장군은 남한산성을 쌓을 때 산성 동남쪽 지역의 공사에 완벽을 기하기 위하여 하나하나 철저하게 점검을 하며 공사를 진행하다 보니 그만 정해진 날짜를 넘기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공사비용 역시 턱없이 모자라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공사비용이 부족하게 된 이유가 이회 장군이 주색잡기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청량당(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은 남한산성을 쌓을 때 공을 세운 이회(李晦)와 그의 처첩 및 벽암선사를 모신 사당이다. 본당의 정면에는 이회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고 좌·우편에는 각각 벽암선사(碧岩禪師1575∼1660)와 이회의 부인 송씨, 소실인 유씨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 원래 있었던 초상화는 6·25전쟁 때 없어졌고 지금 있는 것은 그 뒤 새로 그려서 모신 것이다. 그리고 무속신으로 백마신장, 오방신장, 군웅장군, 마부도 및 매바위 전설과 관련된 매그림 등이 모셔져 있다. 참수당한 이회, 한강에 몸을 던진 부인 송씨 ​1624년(인조 2)부터 2년 여에 걸쳐 산성을 쌓을 때 총책임자는 이서(李曙1580~1637)였고, 그를 중심으로 이회와 각성선사가 공사구역을 나누어 맡았는데, 이회는 동남쪽 구간의 공사를 맡았던 책임자였다. 그런데 이회가 맡은 구간은 기일 내에 완공하지 못했고, 벽암대사의 서북쪽 구간은 기일 내에 완성했을 뿐 아니라 성을 쌓고 남은 비용을 반납하는 등 두 책임자의 국가적인 과업의 성과가 서로 비교됐다. 그래서 이회는 경비를 탕진하고 공사에 힘쓰지 않아 기일 안에 마치지 못했다는 모략을 받아 참수형을 당하게 됐다. 그의 부인 송씨와 소실인 유씨 또한 성 쌓는 일을 돕기 위해 삼남지방에 가서 축성자금을 마련해 돌아오던 길에 막상 한강을 거슬러 삼전도에 이르렀을 때, 천만 뜻밖에도 남편이 억울하게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기가 막힌 송씨 부인은 상심해 통곡하다가 끝내 싣고 온 쌀을 모두 강물에 집어던지고 자신도 강물에 몸을 던져 남편의 뒤를 따랐다. 이 때 송씨 부인이 자살하면서 한강에 쌀을 버린 곳이라 해 그곳을 ‘쌀섬여울’이라고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송씨가 죽은 뒤로 안개가 자욱한 날 이나, 해가 질 무렵 날이 어둑어둑할 때 쌀섬여울을 지나는 뱃사공들은 여인의 곡소리가 들리거나, 머리를 푼 여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사공들은 이 환영(幻影)에 이끌려 배를 몰다 한강변에 어린애 같이 생긴 무동도(舞童島) 바위섬에 배가 부딪혀 파선되곤 하므로, 송씨 부인의 원혼 때문인 것으로 생각해 쌀섬여울(일명 米石灘) 가까운 강변에(잠실동 313-1번지) 부군당(府君堂)을 세우고 송씨 부인의 제사를 지냈다.​ 이 부군당은 1971년까지도 있었는데 한강 개발사업으로 인해 한강의 지형이 크게 바뀌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쌀섬여울에 전해오는 슬픈 이야기는 독일 라인강의 ‘로렐라이 전설’ 못지않은 슬픈 감회를 오늘까지 전해오고 있다.​ ​한편, 이 지역에는 백제 ‘온조왕 17년에 사당을 세워 국모(소서노)를 제사 지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나, 1686년에 김창흡(金昌翕)이 지은 <부인사(夫人祠)>라는 시에서 백제시대부터 있었던 사당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 지역에는 백제의 국모를 제사하는 사당이 17세기까지도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억울한 넋 매가 되어 날았나 이회가 참수당할 때 그의 목에서 한 마리의 매가 날아 나와 부근의 바위에 앉아 사람들을 응시하다가 날아갔다고 하는데, 이를 기이하게 여겨 재조사해 보니 그가 맡았던 부분이 견고하고 충실하게 축조돼 있어 무죄임이 밝혀졌다.​ 그가 쌓은 구간은 산세가 워낙 험해 성벽 기초공사가 어려웠기에 기일이 지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에 서장대 옆에 사당을 지어 억울하게 죽은 이회와 그의 처첩의 넋을 달래게 했다고 한다. 그 당시 매가 앉았던 바위를 ‘매바위’라 부른다. 이 바위에는 매가 앉았던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고 다만 수어장대의 다른 이름인 ‘수어서대(守禦西臺)’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을 뿐이다.​ 청량산 이름 따온 사당 지어 사당의 이름을 ‘청량당(淸凉堂)’이라 부르게 된 것은 수어장대가 있는 곳이 청량산의 정상이기에 산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남한산은 또 다른 이름으로 청량산, 주장산, 일장산 등의 이름을 갖고 있다.​ 청량산이라는 이름은 조선 중엽부터 사용됐는데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하나는 조선의 선비들이 좋아하는 ‘맑고 서늘한 기운’이 서린 산이라는 뜻이고, 또 하나는 정조대왕이 기해년(1779)에 4박 5일 동안 남한산성에 머물렀을 당시 “남한(南漢)은 본래 이름이 일장산(日長山)이었으나 국조(國朝) 중엽 이후에 비로소 청량산(淸凉山)이라 칭하니 사람들이 청(淸) 나라 군병이 침범할 징조라고 하였다는데, 이러한 말이 과연 있었는가?” 하니, 서명응이 아뢰기를, “이것은 나이 많은 노인들이 서로 전하는 말입니다.”라고 대답하였던 것처럼, 청량산이라는 이름이 ‘청나라의 서늘한 침공’을 예고하는 것이었다고 하는 설이 있다.​ 한편, 청량당에 벽암대사를 함께 모시게 된 까닭은 그가 이회와 함께 남한산성을 축조했고, 또 병자호란이 터지자 승군을 이끌고 참전했기 때문이다. 백헌 이경석 선생이 지은 <화엄사 벽암대사 부도비>의 문장을 보면, 벽암은 김해 김씨이고, 호는 벽암(碧巖), 각성(覺性)은 법명이다. 충북 보은에서 그의 어머니가 북두칠성께 기도해 백발노인에게서 거울을 받아 지니는 태몽을 꾸고서 낳았다고 한다. 풍채는 서릿발 같았고 눈빛은 전기처럼 빛났으며, 어버이에 대한 효도가 돈독했는데, 9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므로 상을 마치고 출가했다.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와 함께 해전에 참여했으며, 남한산성을 쌓을 때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 임명돼 승군을 이끌고 3년 만에 성을 완성시켰다.​ ​이에 나라에서는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의 직함과 함께 의발(衣鉢)을 하사해 그 공로를 치하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지리산에 있던 벽암은 전국 사찰에 격문을 보내 의승군 3천 명을 모집해 항마군(降魔軍)이라 이름짓고, 호남의 관군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향했으나 도중에 전쟁이 끝났으므로 항마군을 해산하고 다시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이회의 내력 입으로만 전해져 한편, 억울하게 죽은 당사자인 이회에 대해서는 관련된 기록을 찾기가 어렵다. 그가 태어난 해를 비롯해 가문에 관한 내력, 관직생활에 관한 사항 및 그가 처형당한 해가 어느 해인지, 그리고 처형당하게 된 사연과 관련한 역사기록을 살펴볼 수가 없고 단지 전해오는 설화와 실존하는 청량당 사당을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장유(張維)가 지은 <남한산성기>에는 산성을 쌓을 때 처음에는 심기원에게 이 일을 맡겼는데, 노는 사람들을 불러 일을 시키고, 도첩(度帖)을 가지고 승도(僧徒)들을 부리다가 마침 상(喪)을 당해 총융사(摠戎使)의 직을 떠나게 되므로, 이서가 그 임무를 대신해 널리 이름 있는 중을 부르니 각성(覺性)과 응성(應性) 등이 각기 그 무리를 거느리고 구역을 나누어 공사를 했다고 했다. 이때 목사 문희성, 별장 이일원, 비장 이광춘 등이 감독했다고 기록하고 있을 뿐 이회는 그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 <비변사등록>에 이회(李晦)라는 인물이 보이는데 1634년(인조 12)에 부사과(副司果), 형조좌랑 등의 벼슬을 했고, 1654년(효종 5) 11월 16일 “경상좌병사 이회(李晦)가 경안역에 이르러 뜻밖에 죽었다.”고 기록돼 이 인물이 남한산성을 쌓는 책임을 맡았다가 처형당한 인물과는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 다른 전설에는 처형당한 인물이 이인고, 홍대감 등으로 전해오기도 하는데, 이들 인물 역시 사건과 관련된 문헌기록을 찾을 수는 없다. ​어쨌거나 1611년(광해군 3)에 이서(李曙)가 남포 현감으로 부임하면서 『처음부터 형벌을 씀이 지나치게 가혹하여 온 지경의 백성이 모두 놀라 뿔뿔이 흩어질 지경』이었다고 한 기록은 무과 출신의 이서가 남한산성을 쌓을 때에도 군율을 매우 엄격하게 적용했을 것으로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민간인으로서는 산성을 쌓는 일이 매우 힘들고 위험한 일이라서 다른 부역에 비해 회피하고 싶은 것이었을 수도 있고, 이런 와중에 군율에 의해 처형당한 억울한 원혼도 있었을 것이다. ​ 청량당에는 해마다 정월 초이틀이면 인근의 만신(부당)들이 며칠 전부터 목욕재계하고 이곳에 와서 치성을 올린다고 한다.​ 그것은 충직한 이회와 그의 부인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한 것으로, 이 날은 송씨 부인이 한강에 투신한 날이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남한산성 도당굿의 유래는 바로 청량당에 모신 영혼들을 달래기 것으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당굿은 일제 강점기와 이승만 대통령 시절 당지기 집이 철거되면서 맥이 끊어진 듯 했는데, ‘남한산성 대동굿 보존회’가 결성되면서 1991년 8월 28일 그 명맥을 되살리게 됐다. ​ <중정남한지>와 <남한가람지>에는 관에서 공식적으로 기우제를 지내던 제단이 수어장대 옆에 있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청량당이 자리 잡은 곳은 기우제단의 옛터가 아닌가 짐작되고, 이회가 실존인물인지의 여부를 떠나서 청량당은 억울한 원혼들을 위로해 주는 문화유산으로 그 의미가 있다. 400년 된 향나무 의미있는 비틀림 청량당 앞에 오랜 풍상을 이겨내고 서 있는 향나무는 4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뒤틀리면서 기묘하게 자란 모양이 눈길을 끈다. 그 뒤틀린 모습은 마치 억울하게 형장에 끌려나와 처형당한 이회의 억울한 심사를 대신 웅변해주고 있는 듯 하다.​ 담장을 뚫고 밖으로 뻗어 나온 가지의 모습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회의 억울함을 말해 주는 동시에 몇 백년의 세월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모습에서는 역시 그의 충직한 삶의 자세를 엿보게 하여 가슴을 숙연하게 한다. (2009/05/07 기호일보 한춘섭 광주문화권협의회장 겸 성남문화원장) o o o A Wondeful Day / Sweet People o o 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