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성길3(법화골 전투, 22/04/07, 행궁-봉암성-법화골-북문-서문-행궁, Kiss and say goodbye / The Manhattan)
이름없는풀뿌리2022. 4. 9. 23:47
요즈음 – 외성길3(법화골 전투) –
겹겹이 포위되어 항전한 47일 내내
날랜 오랑캐도 한 발짝 넘지 못한
山城을 지키는 것만도 이기는 것일 텐데
공명에 눈 뒤집힌 무능한 체찰사는
용맹한 장졸들을 어거지 닦달하여
北門을 열어젖히고 몰아넣은 死地에서
불타는 松柵에 갇혀 우짖는 아비규환
계곡을 진동하는 화약을 달란 절규 속
삼백의 어영군사 산화하던 그날인 듯
붉은 피 뿜어 흘러 진달래는 피어나고
목 베어 떠도는 넋 봄꽃으로 흐드러진
법화골 전설 들으며 어느 봄날 지난다.
배달9219/개천5920/단기4355/서기2022/04/07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외성길3(법화골 전투)(1) 계획
산성 관련 어느 까페에서
고골(古邑)에 『300어영병사 순군지』란
표지석이 있다는 글을 보고
표지석도 찾아 보고
현절사, 봉암성, 법화골 봄꽃들을 보려고
몇 년 전 가을 답사한 길을 다시 찾아보기로 함.
(2) 벌봉
현절사 뒤편의 멸가치 군락을 보고
동장대를 향하니 개별꽃은 아직 봉우리 단계
황혜한 봉암성을 휘돌아 벌봉 뒷면
벌집같은 벌봉에 붙은 여왕벌 바위를 살펴보니
어쩌면 저리 여왕벌 같을까
홍타이지가 벌봉의 정기를 끊기 위해
벌봉을 내리쳐 깼다는데 살펴보니 과연 깨진 형상이다.
봉암성을 휘돌아 벌객샘 능선으로 내려섬.
- 벌봉 -
하늘이 내려주신 기운이 서린 바위
괘씸한 홍타이지 天意를 깨트린 罪
지금은 나라는 물론 흔적조차 없더라
배달9217/개천5918/단기4353/서기2020/10/10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3) 법화사지
벌객샘능선 아래 법화사 주변은
온통 현호색 으로 뒤덮여 있다.
사찰과 승려는 간데없고
봄날의 따뜻한 햇볕과 봄꽃들이 주인인 듯하다.
2년 전 여길 지나면서 기와조각을 주워
쌓은 표식은 사라지고 없다.
어떤 공식사료에도 양고리가 법화골에서
죽었다는 자료는 없는데
어떠한 근거로 안내판에 소개되고 있는지 궁금했는데
최근 그 근거는 구한말 발행된
『남한비사』란 서책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 법화사지 -
광교산 전투에서 죽었다는 양고리가
벌봉의 산자락에 넋을 둔 미스터리
浮屠는 봉인된 채로 기울어져 있었다.
배달9217/개천5918/단기4353/서기2020/10/10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4) 법화골
법화사지에서 발원한 법화골에도
끝없이 봄꽃의 향연이다.
줄이은 현호색,
주근깨 낀 계집애 같은 개별꽃,
남단사의 것보다 선명한 산괭이눈,
난생 처음 보는 꿩의바람꽃등으로 범벅되어 현란.
(5)어영병사 순국지
교산 신도시 개발로 어수선한 상사창동.
주민들은 의외로 아직 텃밭을 일구고
봄날의 벌통도 손보며 평온한 일상.
연자방아 근처 40년 살았다는 주민도
경로당의 토박이 노인들도
휴대폰의 표지석 그림을 보여주었는데 모른다는 답변.
다만 이 연자방아 근처에서 호란 때
큰 전쟁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았다고 함.
『광주향토사료 Ⅲ집』에 소개되었다고 하여
생각 끝에 하남시청 문화재과에 전화해 보았는데 자료 없다는 답변.
- 연자방아 -
胡亂後 삼백년 만에 방앗간 지었다는
上樑文 살펴보니 깊은 뜻 알겠다만
開發의 광풍노도 속 살아남아 있을지
배달9217/개천5918/단기4353/서기2020/11/07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6) 북문(全勝門)
혹시 표지석을 발견할까 하여
상사창동 아랫말에서 성문사까지 갔다가
다시 마을 여기저기 휘돌아다녔다.
실망감을 안고 북문으로 오르는 稅米길.
덕풍천 발원 계곡에
그 날 흘린 어영병사들의 붉은 피 같은 진달래는 피었고
무능한 사령관의 誤判으로 숨져간
그들의 넋이 봄꽃으로 피어난 그 길을
그들의 절규를 들으며
아직 복원공사 중인 北門을 우회
연주봉을 지나 서문을 경유 행궁으로 하산.
- 북문(全勝門) -
胡亂의 첫 勝捷地 며칠 만에 大慘敗地
그 날을 잊지 말자 正祖께서 내린 현판
아직도 메아리치는 법화골의 비명소리
배달9217/개천5918/단기4353/서기2020/11/07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7) 종료
봄꽃들의 향연을 보며,
다만 그 표지석은 찾을 수 없었고...
북문에서 내려온 평지가 시작되는 덕풍천의 발원지 즈음
그 곳이 그날의 비극의 현장이었슴을 상정해 보다.
(행궁-현절사-동장대지-벌봉후면-법화사지-연자방아-어영병사순국지-북문-서문-행궁)
약10km, 천천히, 5시간여...
배달9219/개천5920/단기4355/서기2022/04/07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1) 숙연한 현절사(09:30)
2) 현절사 뒤편 숲의 멸가치, 개별꽃, 잔털제비꽃
3) 동장대지에서 바라본 가야할 길(10:00)
4) 동장대지의 서어나무, 서쪽나무, 근육나무(mustle tree)
5) 봉암성 내의 예쁜 오랑캐꽃
6) 남한산 정산(10:20, 552m)
7) 봉암성 신축 비문 오르는 길
8) 벌봉 후면 벌집에 붙어있는 여왕벌(10:30)
9) 직진(객산), 좌측(법화골)
10) 법화골 주변은 온통 현호색 천국
11) 법화사 천연당간지주(10:45)
12) 양고리 설화의 출전은 뭘까? 벌봉에 청군이 진주했으므로 여기에 시신 안치?
13) 연자방아 1.5km(10:50)
14) 법화사 부도전(10:50)
14) 법화골에 가득한 무릇, 개별꽃
15) 법화골에 가득한 현호색
16) 법화골에 가득한 산괭이눈
17) 법화골에 가득한 꿩의바람꽃
18) 법화골 하단(11:40)
19) 연자방아(11:50)
20) 稅米길을 열어준 덕풍천
21) 세미길 경사가 끝난 덕풍천 발원지 즈음 평지가 『300어영병사 순군지』가 아닌가 한다.
22) 귀룽나무에 연녹색 새잎이 돋는 북문까지의 오름길
23) 반딧불이가 서식하는 고골계곡에도 산괭이눈, 현호색, 개별꽃이 깔림
24) 서문 전망대 直下의 호랑버들
25) 서문(14:20)
26) 행궁(14:40)
27) 행궁-현절사-동장대지-벌봉후면-법화사지-연자방아-어영병사순국지-북문-서문-행궁
* 관련자료
솔향기자유게시판은 특별회원만 글쓰기가 되어서
여기에 제가 아는 한도내의 답글을 올립니다(참고 바랍니다.)
남한산성 입성 최초의 전투는
입성 3일 후인
1636/12/18일 이었으며
6명의 청군을 살해한 소규모였지만 최초의 전투였다는 의미로 중요성이 있는데
북문 담당 이서 장군의 병환으로 그의 후임으로 맡게 된
원두표 장군의 지휘로 북문에서 이루어졌으며
관련기록은 연려실기술, 병자록, 중정남한지에 있습니다.
12월 16일 (실록)
원두표를 어영 부사로 삼다
원두표(元斗杓)를 어영 부사(御營副使)로 삼았는데,
대장 이서(李曙)의 병이 심하기 때문이었다.
12월 16일 (병자록)
이서(李曙)가 병으로 성을 잘 지키지 못하자,
원두표(元斗杓)로 대신 그 무리를 거느리게 하고,
황즙(黃緝)을 중군으로 삼았다.
12월 18일 (중정남한지)
날씨가 다소 온화했다.
북문 대장 원두표가 처음으로 장사들을 모집하여
성을 나가 출전하여 오랑캐 순찰군을 쳐서 여섯 사람을 죽이니,
죽인 숫자는 비록 적었지만
군사들이 적을 공격하려는 마음을 비로소 지니게 되었다.
다음으로 북문에서 300여명의
장졸이 몰사하는 북문 전투가 있었는데
이는 병자호란 남한산성 전투에서 최대의 패전이었습니다.
입성 2주 후인
1636/12/29의 사건이었습니다.
이는 총사령관(체찰사) 김류의 고집으로 이루어 졌는데
12/29 이전 조선군은 원두표 장군의 승전 이후
여러 번 소규모나마 승전이 있었습니다.
이에 김류도 공명심에서 인조에 출전을 건의하여 승락을 받고
무모하게 대규모 출전을 하게 되는데 청군의 함정에 빠져 대패하게 됩니다.
이러한 패배를 하고도 김류는 아무런 문책을 받지 않고 계속 직위를 유지합니다.
그는 원래 척화파였는데 정묘호란이후 최명길과 야합 주화파로 변신하며
그의 아들 김경징은 강화로 피신한 왕족 보호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직권 남용과 잘못된 판단으로 청군에게 패퇴하게 됩니다.
그러고도 인조는 왜 김류 부자를 끝까지 옹호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인조의 한계였던 것 같습니다.
12월 29일 (실록)
김류의 지휘로 북문 밖에 진을 친 군대가 크게 패하다
이날 북문 밖으로 출병하여 평지에 진을 쳤는데
적이 상대하여 싸우려 하지 않았다.
날이 저물 무렵 체찰사 김류가 성 위에서 군사를 거두어 성으로 올라 오라고 전령하였다.
그 때 갑자기 적이 뒤에서 엄습하여
별장 신성립(申誠立) 등 8명이 모두 죽고 사졸도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김류가 군사를 전복시키고 일을 그르친 것으로 대죄(待罪)하니,
상이 위유(慰諭)하였다.
12월 29일 (병자록, 연려실기술)
날씨가 잠깐 화창하니 군사들의 얼굴에 생기가 났다.
김류가 동서남북 네 성의 장수를 불러 명하기를,
“남성(南城) 아래에 적의 진영이 매우 엉성하니,
각각 정예군을 내어 무찌르도록 하라.” 하니,
네 장수가 모두 그 계책이 잘못된 것을 역설하였는데
김류가 듣지 않고 친히 장졸을 거느리고
북문에 앉아 대장의 깃발과 북을 세우고 병기를 휘두르면서 싸움을 독려하였다.
성 아래에는 개울이 굽이져 있었는데 오랑캐의 기병이 곳곳에 매복한 채
겉으로는 고군(古郡) 남쪽 4, 5백 보 거리로 물러가서
군사와 소ㆍ말을 약간 머물려 주둔시켜 놓고 유인하였다.
김류가 깃발을 휘두르며 진군할 것을 명령하니 우리 군사가 서로 버티면서
산에서 내려가려 하지 않자, 김류가 비장(裨將) 유호(柳瑚)를 시켜
나가지 않는 자를 목베게 하였다. 이에 유호가 만나는 사람마다 함부로 찍어 죽이니,
온 군사가 내려가면 반드시 죽을 것을 알면서도 내려가는데,
별장(別將) 신성립(申誠立)은 사람들과 영결(永訣)하고서 가기에 이르렀다.
우리 군사들이 그들의 남겨둔 소와 말을 취하는데도 적들은 못 본 체하고 있다가,
우리 군사가 송책(松柵) 밖으로 다 나온 뒤에야 비로소 적이 말을 채찍질하여
나는 듯이 돌격해 들어오고 복병이 사방에서 일어나 곧장 우리 군사의 앞뒤를 끊었다.
이에 우리 군사는 총 한 방, 화살 한 번도 쏘지 못한 채
순식간에 짓밟혀 죽은 자가 거의 2백 명이고
신성립(申誠立)과 지여해(池如海)와 이원길(李元吉) 등도 모두 죽었는데,
오랑캐 군사로 죽은 자는 다만 두 사람뿐이었다. 처음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송책을 불사르면 군사가 진격하는 데 거칠 것이 없을 것이다.” 하니,
김류가 불사르도록 명하여 송책을 이미 불살라 버렸으므로
오랑캐가 우리 군사를 공격하는 데 더욱 거칠 것이 없었다. 또 처음 접전할 때에
군사들에게 화약을 많이 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약을 청하는 소리가 시끄럽더니, 접전이 벌어진 다음에야
어느 겨를에 화약을 청하겠는가. 다만 화약통을 서로 두들길 뿐이었다.
산 언덕이 험준하여 이미 갑자기 올라가기 어려웠고 깃발을 휘두르면서 퇴군하였으나
성이 막혀 있어 보지 못해 마침내 모두 섬멸되기에 이르렀다.
유호가 또 초관(哨官)에게 죄를 돌려 퇴군하지 못했다 하여 베어 죽이니,
사람들이 모두 원통하게 여겼다. 김류가 허물을 돌릴 곳이 없자
원두표가 구원하지 못한 탓이라 변명하여 장차 사형에 처하려 하자, 홍서봉이 말하기를,
“수장(首將)이 군율을 어기고서 부장에게 죄를 돌려서야 되겠는가.” 하자,
김류가 마지못해 대궐에 엎드려 대죄하고, 원두표의 중군을 매 때려 거의 죽게 하였다.
처음에 정예 군사를 모두 체찰부에 예속하였는데,
사상자가 적어도 3백 명에서 내려가지 않았는데도
사실대로 보고하기를 싫어하여 40명이라 아뢰니, 이로부터 사기가 떨어지고
묘당에서도 또한 화친하는 것에 전념하게 되었다.
12월 29일 (중정남한지)
術士가 말하기를, “오늘은 화친과 싸움이 모두 길하다.”하니
김류가 이 말을 믿고 한편으로는 화친을 청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접전을 벌이고자 하였다.
이에 羅萬甲이 朴滉에게 말하기를
“싸움을 하려거든 싸움을 하고 화친을 하려거든 화친을 할 것이지
하루 동안에 어떻게 화친과 싸움을 함께 할 수 있겠는가?
이는 진실로 노래를 부르고 곡하는 일을 한꺼번에 할 수 없는 것과 같다.“하였다.
이날 날씨가 다소 화창하여 군사들의 얼굴에 생기가 났다.
김류가 동서남북 네 성의 장수를 불러 명하기를,
“南城 아래에 적의 진영이 매우 엉성하니, 각각 정예군을 내어 무찌르도록 하라.” 하였다.
네 城의 장수들이 좋지 않은 계책이라고 극구 말렸지만
김류는 듣지 않고 친히 장졸을 거느리고 북문에 앉은 채
대장의 깃발과 북을 세우고 병기를 휘두르면서 싸움을 독려하였다.
銃手 300여명이 北門에서 산기슭을 따라 내려가니
성 아래 계곡이 굽어 돌은 곳에 오랑캐의 기병들이 곳곳에 매복하고 있었다.
오랑캐는 다섯 군데(소나무 송책 밖에 머물러 주둔해 있던 곳)에서 出軍하여
100여 騎는 고군(古郡)의 남쪽 4, 5백 步 정도 되는 거리로 물러가 주둔하는 한편,
약간의 주둔한 군사와 소ㆍ말을 머물러 놓고 우리 군사를 유인하였다.
김류가 깃발을 휘두르며 진군할 것을 명령하였지만
우리 군사들이 산을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김류가 비장(裨將) 유호(柳瑚)를 시켜 진군하지 않는 자들를 목베게 하자
이에 유호가 만나는 사람마다 함부로 찍어 죽였다.
이에 어영군 300여명이 비로소 산을 내려가서
미끼로 머물러 놓은 군사와 牛馬를 취하였는데 오랑캐는 못 본 척하였다.
우리 군사가 松柵 밖으로 다 나와서는 인솔하는 장수가 없어
隊伍가 헝클어지면서 陣을 이루지 못한 채 사람들이 제각각 오랑캐와 싸웠다.
김류가 또한 火藥과 鉛丸을 절약하기 위해 쏘는 대로 지급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한 번 총알을 쏠 때마다 화약을 청하는 소리가 골짜기를 흔들었다.
오랑캐가 비로소 말을 채찍질하여 돌입하였는데 나는 것처럼 빨랐고
伏兵이 사방에서 일어나서 곧장 우리 군사와 충돌하였다.
이에 우리 군사는 총 한 방, 화살 한 번 쏠 겨를 없이
순식간에 300여명의 군사가 마침내 적에게 섬멸되어 살아 돌아온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별장 신성립(申誠立), 지여해(池如海), 이원길(李元吉) 등이 모두 죽었는데,
오랑캐 군사는 죽운 자가 겨우 두 사람뿐이었다.
처음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송책을 불사르면 우리 군사가 진격하는 데 거칠 것이 없을 것이다.” 하니,
김류가 命하여 불사르게 하였다.
그런데 송책을 이미 타버린 뒤에는
오랑캐가 우리 군사를 공격하는 데 더욱 거칠 것이 없게 되었다.
산비탈이 험준하여 이미 갑자기 올라가기는 어렵고
깃발을 휘두르며 군사를 퇴각시키기는 했지만 城과의 거리가 멀어 보이지 않아서
마침내 모조리 섬멸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유호가 또한 초관(哨官)에게 죄를 돌려
제대로 퇴군하지 못했다 하여 베어 죽이니 사람들이 모두 원통하게 여겼다.
김류가 스스로 싸우다가 스스로 패배하고는 허물을 돌릴 곳이 없게 되자
北城長 원두표가 구원하지 않은 탓이라는 핑계를 대어 장차 極罪에 처하려 하자,
左相 洪瑞鳳이 말하기를,
“수장(首將)이 군율을 어기고서 副將에게 죄를 돌려서야 되겠는가.” 하자,
김류가 마지못해 대궐에 엎드려 待罪하였고, 원두표의 중군을 杖을 쳐서 거의 죽게 하였다.
이로부터 사기가 저하되어 더 이상 출전하려는 뜻이 없어졌고
廟堂에서도 또한 화친하는 것에 전념하게 되었다.
두산세계대백과사전, 남한비사, 하남시사, 광주향토사료 제3집
상사창2동은 인동장씨(仁同張氏)의 집성촌이며
남한산성 북문 밖 아래 높은 지대에 위치한 마을로 법화골이라고 불린다.
사창이라는 마을은 덕풍천을 따라 올라가면서 좌측 남한산 줄기에
마을들이 형성되어 있는데 즉 샘재 지금의 천현동과 교산동 그리고 하사창동(골말)
또한 중촌말, 샘골, 법화골 등이 조선시대 당시 사창리이다.
수운시대에 세미의 곡물을 쌓아 놓는 창고가 마을이었기 때문에 생긴 지명이라 할 수 있다.
즉 사창리의 위쪽 마을을 상사창이라 이름지어진 것이라 한다.
또한 이 마을에는 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82호로 지정된 연자방아가 있으며
병자호란(조선인조14년) 당시 격전지로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자
청군과 용감히 맞서 싸우다가 우리 병사 300명이 장렬하게 전사(戰死)한 곳으로
300인 어영병사 순국비가 있기도 하다.
Kiss and say goodbye / The Manhatt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