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여행과산행길

외성길7(의안대군, 22/05/03, 남문-남장대-동림사지-16암문-엄미리-의안대군묘소-봉암성-현절사, Sad Lisa / Chyi Yu)

이름없는풀뿌리 2022. 5. 7. 05:52
요즈음 – 외성길7(의안대군) – 평생을 전장(戰場) 에서 쌓은 업(業) 잊고 싶은 아버지 눈에 넣은 이 막내 예쁘셨다면 절대로 세자란 굴레 씌우지는 말았어야죠 누구는 목숨 걸고 혁명을 했다지만 왕세자 되려고도 면류관 쓰려고도 한 번도 원해보지도 생각지도 않았소. 벗으라면 벗어주고 떠나라면 宮을 나와 아내와 단 둘이서 벽수골 터를 잡아 땅 파며 아이들 낳고 그랬으면 좋았을걸! 배달9219/개천5920/단기4355/서기2022/05/03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 위 時調는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엄미리 벽수골에 소재한 애기능이라고 일컫는 의안대군 방석의 묘에서 태조 이성계의 8째 막내로 태어나 태조의 사랑과 신덕왕후 강씨의 노력으로 조 선 최초의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제1차 왕자의난으로 이복형 정안대군 이방원에 의해 사사된 의안대군을 생각하며 읊은 시조로 의안대군은 세조에 의해 역시 사사된 단종과 같은 나이인 16 세에 절명하였으나 단종은 충절과 의리의 상징으로 문학과 예술에 작품으로 승화되어 많이 알려 져 있으나 의안대군(宜安大君) 방석(芳碩)은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아 애석함을 더 한다. 덧붙임) 외성길7(의안대군) (1) 여정 산성 주변을 검색하다 의안대군묘 발견. [남문-남옹성-동장대-봉암성-한봉성-은고개계곡-의안대군묘]로 계획. 남문에서 남옹성 비밀의공원에 들르니 할미꽃은 백발. 남성 성밖길로 시구문으로 내려가 노루귀 잎사귀, 이제 막 꽃을 맺는 풀솜대, 천남성등을 살펴보고 망월사, 장경사 갈림길 능선에서 동장대로 올라 다시 봉암성으로 내려가 벌봉 아래에서 지난 번 미진했던 동림사지 탐방. 마르지 않는 우물, 안내판을 살펴보고 봉암성을 휘돌아 벌봉을 지나치고 남한산에서 한봉길로 내려가 16암문에서 희미한 오솔길을 따라 은고개 계곡으로 向. 능선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니 민가가 나타나기 시작. 낡은 등산 안내판 앞에서 마을로 끝없이 내려가다 보니 묘소를 지나쳤다는 생각에 텃밭을 가꾸는 분에게 여짜오니 역시 지나치고 말았다. 선법사 찾아갔을 때 썼던 구글 길찾기라도 가동했더라면 범하지 않았을 실수. 다시 마을길로 올라가다 보니 아까 지나친 낡은 등산 안내판이 바로 묘소 입구. 600년은 족히 되었을 비문은 알아 볼 수 없도록 마모되었고 폐세자로 사사되어서인지 조선 최초의 세자묘로서는 너무나 좁고 단출한 묘소. 그래서 일명 『애기능』이라 한 걸까? 18세의 어린 나이로 이복형에 의하여 사사된 어린 왕자의 비운을 생각하다 내려옴. 당초 계획은 은고개로 내려가 버스로 귀가 예정이었지만 번거롭겠다는 생각에 묘소에서 능선으로 올라가 [벌봉-봉암성-동장대-현절사-종로]로 변경. 그러니까 원점회귀 산행이었던 셈. 오름길은 경사가 심하지 않아 잘 선택했다는 생각. (2) 의안대군 아버지 이성계의 개국 1달 만에 11세의 어린 나이에 조선최초의 왕세자로 책봉되어 6년여간 거추장스러운 세자 생활을 하다가 17세의 나이로 절명. 10세에 왕세자가 되었다가 12세에 군왕이 되었고 17세로 절명한 단종의 생애와 비슷하지만 단종만큼 추앙 사업이 이뤄지지도 못하고 잊혀져 절손되다 시피한 애통. 강력한 후원자 어머니 신덕왕후 강씨는 그의 나이 15세에 사망하고 한없이 귀여워 해주던 아버지 이성계가 살아 있었어도 그의 죽음을 막아주지는 못한 무자비한 혁명의 시대를 잠깐 왔다 간 비운의 어린 왕자. (3) 만약에 역사에 “만약에”는 없다지만, 만약에 만약에 삼봉이 나이 어린 방석과 야망가 방원을 잘 조율하여 방석과 방원이 순차적으로 왕위를 잇게 하고 하륜과 알력하지 않고 협조하여 조선을 왕권 중심의 6조 직계제가 아닌 오늘날 독일, 일본의 수상 중심인 재상 정치 체제를 발전시켜 갔다면 민주주의 본산 서구보다도 훨씬 앞서서 세계 중심국가가 되지는 않았을까? 삼봉의 뜻대로 요동정벌을 잘 추진했더라면 무주공산(無主空山)이었던 간도 지방, 연해주 지방이 우리 영토가 되어 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 36년, 남북 분단도 없는 세계 중심국가로 우뚝 서 있지는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지도를 보니 근처에 회안대로가 있어서 혹시 宜安大君(芳碩)의 4째 이복형 懷安大君(芳幹)과 관련 있는지 알아보니 무관. 둘 다 靖安大君(芳遠)의 피해자들이기에 모여 있을 수도 있다 생각했는데 회안대군묘는 전주에 소재하고 있는 듯... 회안대로(淮安大路)는 삼한시대에 이곳에 존재했던 회안국(淮安國)에서 유래된 듯... 배달9219/개천5920/단기4355/서기2022/05/03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1) 남문(09:37) 2) 비밀의공원에서(10:00) 3) 남옹성의 비짜루(10:05) 4) 병꽃 잔치(10:15) 5) 각시붓꽃은 끝물 6) 시구문 노루귀(10:35) 7) 애기나리, 풀솜대, 천남성 8) 동장대지에서 본 망월봉(남한산 벌봉, 11:05) 9) 동림사지(11:30) 10) 봉암성 각시붓꽃은 끝물 11) 망월봉(남한산 벌봉, 11:50) 12) 15암문 근처 덩굴봄맞이(11:55) 13) 16암문(한봉성암문, 12:10) 14) 가물가물한 오솔길 끝 발견한 퇴락한 안내판, 여기가 묘소입구(12:40) 15) 30여분 내려온 은고계 계곡(벽수골) 마을은 전원단지(13:10) 16) 내려올 땐 눈에 띄지 않은 안내판이 몇 군데 보였다.(13:20) 17) 지나쳤던 퇴락한 등산안내도를 지난 소로의 끝에 드디어 나타난 방석묘(13:30) 왼쪽으로 벌봉가는 등산로가 보여 은고개를 버리고 걸어서 산성으로 돌아가기로 함. 18) 묘역 정면 19) 600년 된 문인석 20) 전면이 세자빈 심씨, 중간이 의안대군 방석, 후면이 산신제단 21) 의안대군 방석지묘 22) 묘역으로 올라가는 천연석계단도 단아하다.(13:50) 23) 방석지묘에서 5분여 오르니 보이는 이정목(벌봉1.3k, 은고개3k, 엄미리0.7k) 24) 다시 돌아온 봉암성, 벌봉0.4k, 동장대지0.9k, 엄미리3.9k(14:30) 25) 귀룽나무가 반겨주는 본성 제3암문(14:40) 26) 현절사 후면(15:00) ◇ 당초여정(남문->남옹성->시구문->장경사->동장대->동림사지->벌봉->15암문-> 16암문(한봉성암문)->의안대군묘소->엄미리계곡->은고개 ◇ 변경여정(남문->남옹성->시구문->장경사->동장대->동림사지->벌봉->15암문-> 16암문(한봉성암문)->엄미리->의안대군묘소->봉암성->3암문->현절사->종로 회안국(淮安國) 삼한시대의 나라. 지금의 경기도 광주 경안(京安)지역에 도읍하였다고 전해지는 소국(小國)이다. 광주의 별칭인 회안은 한(韓)의 연장음(延長音, 反切音)으로서, 경안은 곧 고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서기전 194년∼서기전 180년 사이에 위만(衛滿)에게 패하여 뱃길로 남쪽 한으로 가서 한왕(韓王)이 되었다고 하는 고조선준왕(準王)이 남래(南來)한 곳이며, 전설상의 회안국왕은 준왕이라는 학설이 있다. 광주의 옛이름에 한산(漢山)·한성(漢城)한수(漢水)·한주(漢州)와 같이 ‘한’자가 계속 붙어온 것 역시 이 지역과 한의 밀접한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의안대군(宜安大君, 李芳碩, 昭悼君) 개요 왕세자(최초) 재위 : 1392년 8월 20일 ~ 1398년 8월 26일 (음력) 부친 : 태조, 모친 : 신덕왕후 강씨, 배우자 : 폐세자빈 유씨, 현빈 심씨, 자녀 : 1남 (조졸) 의안대군(宜安大君)은 태조 이성계의 여덟째 아들이자 막내아들이며 조선의 첫 왕세자이다. 이름은 방석(芳碩)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시호는 소도(昭悼)이고, 별칭은 폐세자 이방석(廢世子 李芳碩)이고, 소도군(昭悼君)이라는 시호 작위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태조의 왕비(제2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이다. 조선 최초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하여 폐위되고 향년 17세로 암살되었다. 초기 생애​ 고려의 장군인 이성계(뒷날의 조선 태조)와 그의 경처이자 훗날의 왕비(제2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이며 무안대군의 동생이다. 고려 말에는 경처와 향처 두 부인이 있었고 모두 정실 부인이었다. 1392년 7월 아버지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고 초대 군주가 되었다. 세자 책봉 태조 1년(1392) 9월 7일(음력 8월 20일)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는 형 무안대군 방번과 이복 형들을 제치고 선택되었다. 후일 태종 이방원 등은 정도전 등이 그를 세자로 선택했다고 적극 주장하였지만, 아직까지 정도전이 이방석을 세자로 선택했다는 근거는 없다. 짧은 세자 기간 중 부인 현빈 류씨(賢嬪 柳氏)와 내시 이만(李萬)의 간통 사건이 있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류씨와 이만은 처벌받고, 세자는 현빈 심씨(賢嬪 沈氏)를 새 부인으로 맞게 되었다. 태조 5년(1396) 9월 15일(음력 8월 13일)에 세자 어머니 현비 강씨(顯妃 康氏·신덕왕후)가 사망하였다. 제1차 왕자의 난​ 태조 7년(1398) 10월 6일(음력 8월 26일), 정안대군 이방원(靖安君 李芳遠)의 주도로 제1차 왕자의 난이 벌어지게 된다. 세자는 광화문 앞에 주둔하고 있던 정안군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친히 군사를 이끌었으나, "광화문으로부터 남산에 이르기까지 정예 기병이 꽉 찼다"는 봉원량(奉元良)의 보고에 군사 대응을 포기하고 만다. 정도전, 남은, 심효생, 박위 등 정안대군의 시점에서 부정적인 세력이 제거되고 난 뒤, 정안대군 세력은 세자를 방석에서 영안대군 이방과(永安君 李芳果·후일의 정종)로 교체했다. 유배되기로 한 폐세자 방석은 잠시 후 영추문을 통해 경복궁에서 나왔고, 이거이(李居易) 등 정안군 세력은 도평의사사와 합의하여 자객을 보내 방석을 죽였다. 사후 사후 시신은 경기도 광주에 안장되고 오원공(五原公)에 추봉되었다. 태종 6년(1406) 9월 14일(음력 8월 3일), 태종은 방석에게 소도군(昭悼君·또는 소도공), 방번에게 공순군(恭順君·또는 공순공)의 시호를 추시했다. 숙종 6년(1680) 8월 21일(음력 7월 27일), 숙종은 신원정치의 일환으로 방석을 의안대군(宜安大君)으로, 방번을 무안대군(撫安大君)으로 추증하였다. 묘소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엄미리 산152 '의안대군방석묘역' 내에 위치해 있다. 1998년 4월 13일에 경기도기념물 제166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Sad Lisa / Chyi Y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