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 23

<김규동> 나비와광장 / 보일러사건의진상 / 고향 / 무등산

나비와 광장 - 김규동 / (1952) - 현기증 나는 활주로의 최후의 절정에서 흰나비는 돌진의 방향을 잊어 버리고 피 묻은 육체의 파편들을 굽어본다. 기계처럼 작열한 작은 심장을 축일 한 모금 샘물도 없는 허망한 광장에서 어린 나비의 안막을 차단하는 건 투명한 광선의 바다뿐이었기에 진공의 해안에서처럼 과묵(寡默)한 묘지 사이사이 숨가쁜 Z기의 백선과 이동하는 계절 속 불길처럼 일어나는 인광(燐光)의 조수에 밀려 이제 흰나비는 말없이 이지러진 날개를 파닥거린다. 하얀 미래의 어느 지점에 아름다운 영토는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푸르른 활주로의 어느 지표에 화려한 희망은 피고 있는 것일까. 신도 기적도 이미 승천하여 버린 지 오랜 유역 그 어느 마지막 종점을 향하여 흰나비는 또 한 번 스스로의 신화와 더불어 ..

<이용악> 오랑캐꽃 / 낡은 집

오랑캐꽃 - 이용악 / (1947) - 오랑캐꽃 - 긴 세월을 오랑캐와의 싸움에 살았다는 우리의 머언 조상들이 너를 불러 '오랑캐꽃'이라 했으니 어찌 보면 너의 뒷모양이 머리 태를 드리인 오랑캐의 뒷머리와도 같은 까닭이라 전한다 -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도 띳집도 버리고 강 건너로 쫓겨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졸짝을 구름이 흘러 백 년이 몇 백 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 줄게 울어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 오랑캐꽃 : 제비꽃을 다른 말로 일컫는 말 * 도래샘 : 도랑가에 저절로 샘이 솟아 빙 돌아서 흘러..

<김남조> 겨울바다 / 설일 / 정념의기 / 목숨 / 그대있음에

겨울 바다 - 김남조 / 시집 (1967) -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未知)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海風)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 버리고 허무의 불 물 이랑 위에 불 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인고(忍苦)의 물이 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설일(雪日) - 김남조 / (1967) - 겨울 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