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 23

<이형기> 낙화 / 폭포

낙화 - 이형기 / (1963) -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 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아롱아롱 꽃잎이 지는 어느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폭포 - 이형기 / (1963) -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을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 시퍼런 칼자욱을 아는가. 질주하는 전율과 전율 끝에 단말마(斷末魔)를 꿈꾸는 벼랑의 직립(直立) 그 위에 다시 벼랑은 솟는다. 그대 아는가 석탄기(石炭紀)의 종말을 그때 하늘 높..

<박용래> 저녁눈 / 월훈 / 점묘 / 연시

저녁 눈 - 박용래 / (1966) -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월훈(月暈) - 박용래 / (1976) - 첩첩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습니다. 잎 진 사잇길, 저 모래 둑, 그 너머 강기슭에서 도 보이진 않습니다. 허방다리 들어내면 보이는 마을. 갱(坑) 속 같은 마을. 꼴깍, 해가, 노루꼬리 해가 지면 집집마다 봉당에 불을 켜지요. 콩깍 지, 꽁깍지처럼 후미진 외딴 집, 외딴 집에도 불빛은 앉아 이슥토록 창문은 모과(木瓜)빛입니다. 기인 밤입니다. 외딴 집 노인은 홀로 잠이 깨어 출출한 나머지 무를 깎기도 ..

<정한모> 가을에 / 어머니 / 갈대 / 나비의여행

가을에 - 정한모 / (1959) -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으며 가볍게 가을을 날으고 있는 나뭇잎, 그렇게 주고받는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십시오. 흔들리는 종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 엄마의 치마 곁에 무릎을 꿇고 모아 쥔 아가의 작은 손아귀 안에 당신을 찾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어제 오늘이 마침낸 전설 속에 묻혀 버리는 해저(海底) 같은 그날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달에는 은도끼로 찍어 낼 계수나무가 박혀 있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영원히 아름다운 진리임을 오늘도 믿으며 살고 싶습니다. 어렸을 적에 불같이 끓던 병석에서 한없이 밑으로만 떨어져 가던 그토록 아득한 추락과 그 속력으로 몇 번이고 까무러쳤던 그런 공포의 기억..

<유치환> 울릉도 / 생명의서 / 바위 / 깃발 / 뜨거운노래 / 일월

울릉도 - 유치환 / (1948) - 동쪽 먼 심해선(深海線) 밖의 한 점 섬 울릉도(鬱陵島)로 갈거나. 금수(錦繡)로 굽이쳐 내리던 장백(長白)의 멧부리 방울 뛰어, 애달픈 국토(國土)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창망(蒼茫)한 물굽이에 금시에 지워질 듯 근심스레 떠 있기에 동해(東海) 쪽빛 바람에 항시(恒時) 사념(思念)의 머리 곱게 씻기우고, 지나 새나 뭍으로 뭍으로만 향하는 그리운 마음에, 쉴 새 없이 출렁이는 풍랑(風浪) 따라 밀리어 오는 듯도 하건만 멀리 조국(朝國)의 사직(社稷)의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 올 적마다 어린 마음 미칠 수 없음이 아아, 이렇게도 간절(懇切)함이여!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생명의 서(書) - 유치환 / (1938) - 나의 지식이..

<박두진> 도봉 / 꽃 / 향현 / 해 / 묘지송 / 청산도 / 어서너는오너라

도봉(道峰) - 박두진 / (1946) - 산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 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人跡) 끊인 곳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 울림은 헛되이 빈 골 골을 되돌아올 뿐. 산그늘 길게 늘이며 붉게 해는 넘어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꽃 - 박두진 / 시집 (1962) -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한 번만의 어느 날의 아픈 피 흘림. 먼 별에서 별에로의 길섶 위에 떨궈진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 꺼질 듯 보드라운 황홀한 한 떨..

<박목월> 나그네/윤사월/청노루/산이 날/한탄조/가정/이별가/하관/산도화

​나그네 - 술 익은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芝薰에게 / 朴木月 / (1946) -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길은 외줄기 남도(南道) 삼백 리 ​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 ​윤사월(閏四月) - 박목월(朴木月) / (1946) - 송화(松花) 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 산지기 외딴 집 눈 먼 처녀사 ​ 문설주에 귀 대고 엿듣고 있다 ​청노루 - 박목월(朴木月) / (1946. 6.) - 머언 산 청운사(靑雲寺) 낡은 기와집 ​ 산은 자하산(紫霞山) 봄눈 녹으면 ​ 느릅나무 속잎 피어가는 열두 굽이를 ​ 청노루 맑은 눈에 ​ 도는 구름 ​ ​산이 날 에워싸고 - 박목월(朴木月) - 산이 날 에..

<조지훈> 승무 / 낙화 / 완화삼 / 봉황수 / 석문 / 고풍의상

장우성, , 1937, 비단에 채색, 198×161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승무(僧舞) - 조지훈 / (1939) -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 없이 녹는 밤에 오동(梧桐)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

<윤동주> 자화상 / 또다른고향 / 참회록 / 십자가 / 길 / 간(肝)

자화상 - 윤동주 / (1948) -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 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 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며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또 다른 고향 - 윤동주 / (1948) -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

<윤동주> 별헤는밤 / 서시 / 쉽게씌여진시 / 병원 / 아우의인상화

별 헤는 밤 - 윤동주 / (1948) -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 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별 하나에 시(詩)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소녀(異國少女)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은행식물원 ⑤가을 수목원 풍경(23/10/31, 언제까지나 / Edgar Tuniyants)

요즈음 – 은행식물원 ⑤가을 수목원 풍경 – 하늘 볕 구르는 숲 아이들 졸레졸레 어슬렁 들어가서 記憶을 뒤적이다 머리에 서리가 내려 돌아서고 말았다. 배달9220/개천5921/단기4356/서기2023/10/31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은행식물원 ⑤가을 수목원 풍경 (1) 산성을 가지 못하는 心事 달래려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며 찾아간 인근 식물원. 조막막한 아이들이 졸레졸레 선생님을 따른다. 그 그림 바라보며 기억을 뒤적거리니 분명 나에게도 있었지만 머리에 허연 서리 내려 돌아서고 말았다 (2) 조그마한 식물원을 한바퀴 돌아 나오니 답답한 마음 툭 터지는 느낌. 하지만 아직도 물러가지 앉고 떡 버티고 선 巨惡. 그 앞에 조아리고 있는 뭇 중생. 자고로 그보다 더한 역사도 있었나니 이 미물은 그저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