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 23

<김종길> 설날아침에 / 성탄제

설날 아침에 - 김종길 / 시집 (1969) -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 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 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성탄제 - 김종길 / 시집 (1969) - 어두운 방안엔 빠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러이 잦아드는 어린 ..

<조병화> 해마다봄이되면 / 낙엽끼리모여산다 / 외로운사람에게

해마다 봄이 되면 - 조병화 / (1973) -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 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땅 속에서, 땅 위에서 공중에서 생명을 만드는 쉬임없는 작업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 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 봄은 피어나는 가슴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오,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 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나뭇가지에서 물 위에서 뚝에서 솟는 대지의 눈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낙엽끼리 모여 산다 - 조병화 / (1950) - 낙엽에 누워 산다. 낙엽끼리 모..

<전봉건> 피아노 / 사랑

피아노 - 전봉건 / (1980) - 피아노에 앉은 여자의 두 손에서는 끊임없이 열 마리씩 스무 마리씩 신선한 물고기가 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 쏟아진다. 나는 바다로 가서 가장 신나게 시퍼런 파도의 칼날 하나를 집어 들었다. 사랑 - 전봉건 / (1985) - 사랑한다는 것은 열매가 맺지 않는 과목은 뿌리째 뽑고 그 뿌리를 썩힌 흙 속의 해충은 모조리 잡고 그리고 새 묘목을 심기 위해서 깊이 파헤쳐 내 두 손의 땀을 섞은 흙 그 흙을 깨끗하게 실하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 아무리 모진 비바람이 삼킨 어둠이어도 바위 속보다도 어두운 밤이어도 그 어둠 그 밤을 새워서 지키는 일이다. 훤한 새벽 햇살이 퍼질 때까지 그 햇살을 뚫고 마침내 새 과목이 샘물 같은 그런 빛 뿌리면서 솟을 때까지 지키는 일이다. 지켜보..

<이수복> 봄비 / 꽃씨

봄비 - 이수복 / (1955) -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외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香煙)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꽃씨 - 이수복 / (2009) - 가장 귀한 걸로 한 가지만 간직하겠소 그러고는 죄다 잊어버리겠소. ​ 꽃샘에 노을질, 그 황홀될 한 시간만 새김질하며 시방은 눈에 숨어 기다리겠소. ​ 손금 골진 데 꽃씨를 놓으니 문득 닝닝거리며 날아드는 꿀벌들... ​ 따순 해 나래를 접고 향내 번져 꿈처럼 윤 흐르는 밤.... 이수복(李壽福, 1924 ~ 1986) 출신지 : 전라남도 함평 전라남도문화상(1955..

<이승훈> 홍가시나무 / 호랑이 / 암호 / 피안 / A와나 / 모든사람이 / 위독

홍가시나무 - 이승훈 / 2022 여름호 - 입안에 가시 돋친 그런 날이 있었다 거꿀반응이라던 역류성 식도염증 맥 짚어 당신이 내린 어혈은 내 우울증 벌판으로 뛰쳐나가 속을 다 게워내도 언제쯤 불살라질까 너를 보낸 붉은 죄 평생을 꼬박 태워도 목 깊숙이 걸렸다 여기서 거기까지 몇 년이나 걸릴지 더듬더듬 짚어가는 네 맘속 그 먼 길 온몸이 불에 데인듯 한발 한발 뜨겁다 단원 김홍도,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 조선 18세기 후반, 비단에 채색, 90.4×43.8㎝, 삼성미술관 리움 호랑이 - 이승훈 / 『이승훈시전집』 - 그는 벽에 호랑이를 그리고 벽 속으로 들어갔지 나도 이 시를 쓰고 시 속으로 들어가면 얼마나 좋을까? 가능한 적게 먹고 적게 공부하자 그는 웃고 나는 시를 쓰네 암호 - 이승훈 / 시집 『시가..

<신동집> 오렌지 / 목숨 / 어떤사람

오렌지 - 신동집 / (1989) -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오렌지는 여기 있는 이대로의 오렌지다. 더도 덜도 아닌 오렌지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을 벗길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찹잘한 속살을 깔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대는 순간 오렌지는 이미 오렌지가 아니고 만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다. 오렌지도 마찬가지 위험한 상태다. 시간이 똘똘 배암의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에 한없이 어진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오 누구인지 잘은 아직 몰라도...

<신동엽> 껍대기는가라/산에언덕에/봄은/진달래산천/누가하늘을...

껍데기는 가라 - 신동엽 / (1967) -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漢拏)에서 백두(白頭)까지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산에 언덕에 - 신동엽 / (1963) -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 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

<한하운> 파랑새 / 보리피리

파랑새 - 한하운 / (1955) -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보리 피리 - 한하운 / (1955) - 보리 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 ― ㄹ 닐니리 * 한하운(韓何雲, 1919-1975) 출신지 : 함경남도 함주 저서(작품) : 전라도길, 한하운시초, 보리피리, 나의 슬픈 반생기, 황톳길 대표관직(경력) : 대한한센연맹위원회장 본명은 태영(泰永). 함경남도 함주 출신. 종규(鍾奎)의 아들이다. 1..

<김용호> 주막에서 / 눈오는밤에 / 낙동강

보물 527호/ 단원풍속도첩 25폭檀園風俗圖帖二十五幅중 『주막』, 국립중앙박물관 주막에서 - 김용호 / (1956) - 어디든 멀찌감치 통한다는 길 옆 주막 그 수없이 입술이 닿은 이 빠진 낡은 사발에 나도 입술을 댄다. 흡사 정처럼 옮아 오는 막걸리 맛 여기 대대로 슬픈 노정(路程)이 집산하고 알맞은 자리, 저만치 위의(威儀) 있는 송덕비(頌德碑) 위로 맵고도 쓴 시간이 흘러가고 … 세월이여! 소금보다도 짜다는 인생을 안주하여 주막을 나서면, 노을 비낀 길은 가없이 길고 가늘더라만 내 입술이 닿은 그런 사발에 누가 또한 닿으랴. 이런 무렵에 눈 오는 밤에 - 김용호 / 시집 『시원 산책』, 1964) - 오누이들의 정다운 얘기에 어느 집 질화로엔 밤알이 토실토실 익겠다. 콩기름 불 실고추처럼 가늘게 피..

<설정식> 종 / 해바라기3

에밀레종의 이동(일제시대) 종(鐘) - 설정식 / 창간호(1946. 7.) - 만(萬) 생령(生靈) 신음을 어드메 간직하였기 너는 항상 돌아앉아 밤을 지키고 새우느냐. 무거히 드리운 침묵이여 네 존엄을 뉘 깨트리드뇨 어느 권력이 네 등을 두드려 목메인 오열(嗚咽)을 자아내드뇨. 권력이어든 차라리 살을 앗으라 영어(囹圄)에 물러진 살이어든 아 권력이어든 아깝지도 않을 살을 저미라. 자유는 그림자보다는 크드뇨. 그것은 영원히 역사의 유실물(遺失物)이드뇨. 한아름 공허(空虛)여 아 우리는 무엇을 어루만지느뇨. 그러나 무거히 드리운 인종(忍從)이여 동혈(洞穴)보다 깊은 네 의지 속에 민족의 감내(堪耐)를 살게 하라 그리고 모든 요란한 법을 거부하라. 내 간 뒤에도 민족은 있으리니 스스로 울리는 자유를 기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