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 24

<이홍섭> 서귀포 / 터미널1

서귀포(西歸浦) - 이홍섭 / , 세계사 / 2005년 08월 - 울지 마세요 돌아갈 곳이 있겠지요 당신이라고 돌아갈 곳이 없겠어요 구멍 숭숭 뚫린 담벼락을 더듬으며 몰래 울고 있는 당신, 머리채 잡힌 야자수처럼 엉엉 울고 있는 당신 섬 속에 숨은 당신 섬 밖으로 떠도는 당신 울지 마세요 가도 가도 서쪽인 당신 당신이라고 돌아갈 곳이 없겠어요 터미널 1 - 이홍섭 / , 세계사 / 2005년 08월 - 젊은 아버지는 어린 자식을 버스 앞에 세워놓고는 어디론가 사라지시곤 했다 강원도하고도 벽지로 가는 버스는 하루 한 번뿐인데 아버지는 늘 버스가 시동을 걸 때쯤 나타나시곤 했다 늙으신 아버지를 모시고 서울대병원으로 검진받으러 가는 길 버스 앞에 아버지를 세워놓고는 어디 가시지 말라고, 꼭 이 자리에 서 계시..

<안도현> 우리가눈발이라면/너에게묻는다/연탄한장/그대에게가고싶다

우리가 눈발이라면 - 안도현 / (1991) -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 너에게 묻는다 - 안도현 / 시집 (2004) -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시인의 후기 : 단 세 줄로 된 짧은 시 는 1990년대 초반 전교조 해직교사 시절에 쓴 시입니다. 제 스스로 뜨거운 사람이 되고 싶은 꿈을 가슴 깊숙이 넣어 두고 살 때이지요. 첫 줄의 명령형과 끝 줄의 의문형 어미가 참 당돌해 보이지요? 밥줄을 끊긴 자의..

<박형준> 사랑 / 장롱이야기

사랑 - 박형준 / , 창비 / 2002년 04월 - 오리떼가 헤엄치고 있다. 그녀의 맨발을 어루만져 주고 싶다. 홍조가 도는 그녀의 맨발, 실뱀이 호수를 건너듯 간질여 주고 싶다. 날개를 접고 호수위에 떠 있는 오리떼. 맷돌보다 무겁게 가라앉는 저녁해. 우리는 풀밭에 앉아있다. 산 너머로 뒤늦게 날아온 한 떼의 오리들이 붉게 물든 날개를 호수에 처박았다. 들풀보다 낮게 흔들리는 그녀의 맨발, 두 다리를 맞부딪히면 새처럼 날아갈 것 같기만 한. 해가 지는 속도보다 빨리 어둠이 깔리는 풀밭. 벗은 맨발을 하늘에 띄우고 흔들리는 흰 풀꽃들, 나는 가만히 어둠속에서 날개를 퍼득여 오리처럼 한번 날아보고 싶다. 뒤뚱거리며 쫓아가는 못난 오리, 오래 전에 나는 그녀의 눈 속에 힘겹게 떠 있었으나. 장롱 이야기 -..

<박라연> 서울에사는평강공주 / 몬테그로토에밤이오면 / 무창포에서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 박라연 /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05월 - 동지달에도 치자꽃이 피는 신방에서 신혼일기를 쓴다 없는 것이 많이 더욱 따뜻한 아랫목은 평강공주의 꽃밭 색색의 꽃씨를 모으던 흰 봉투 한 무더기 산동네의 맵찬 바람에 떨며 흩날 리지만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밤이면 비에 젖어 울지만 이제 나는 산동네의 인정에 곱게 물든 한 그루 대추나무 밤마다 서로의 허물을 해진 사랑을 꿰맨다 ......가끔...... 전기가...... 나가도...... 좋았다...... 우리는...... 새볔녘 우리 낮은 창문가엔 달빛이 언 채로 걸려 있거나 별 두서넛이 다투어 빛나고 있었다 전등의 촉수를 더 낮추어도 좋았을 우리의 사랑방에서 꽃씨 봉지랑 청색 도포랑 한땀 한땀 땀흘려 깁..

고고학에서 노벨상이 나오다...데니소바의 '구석기 동굴' 이야기 [배기동의 고고학 기행]

고고학에서 노벨상이 나오다...데니소바의 '구석기 동굴' 이야기 [배기동의 고고학 기행] 한국일보 입력 2023. 12. 24. 11:00 편집자주 우리 역사를 바꾸고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 발견들을 유적여행과 시간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음미한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에 담겨진 흥분과 아쉬움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함께 즐겨보자. 알타이 산맥, 데니소바 동굴 아누이 강에서 바라본 데니소바 동굴 입구 모습. 20여m 위 절벽에 위치해 있다. 러시아 남중부 시베리아의 데니소바(Denisova) 동굴.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그리고 몽골 국경이 만나는 알타이 산맥 북쪽 사면에 위치한 데니소바 동굴은 전 세계 고고학 유적 중 유일하게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곳이다. 그만큼 이 동굴의 발견은 고대 인류사 연구에..

20[sr]인류진화 2023.12.24

17개 행성에 지하 바다 가능성…그곳엔 ‘외계 문어’ 헤엄칠까

17개 행성에 지하 바다 가능성…그곳엔 ‘외계 문어’ 헤엄칠까 경향신문 이정호 기자입력 2023. 12. 24. 08:00 NASA 연구진, 원거리 외계행성 분석 발표 ‘얼음 천체’이지만 내부에서 열 자체 발생 동위원소 붕괴·조석력이 ‘자연 난로’ 역할 외계 생명체 탐색용 망원경 개발 때 고려돼야 지구에서 4.2광년 떨어진 외계행성인 ‘프록시마 센타우리 b’ 표면 상상도. 최근 미국 항공우주국(NASA) 연구진은 프록시마 센타우리 b 등 17개 행성에 지하 바다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유럽남방천문대(ESO) 제공 #가까운 미래, 인류는 목성 위성 ‘유로파’를 향해 우주비행사 6명으로 구성된 탐사대를 파견한다. 지구를 떠난 직후부터 우주선 안은 ‘설렘’으로 가득하다. 지구 밖 천체..

19[sr]우주,지구 2023.12.24

<고재종> 날랜사랑 / 그리운죄 / 세한도

날랜 사랑 - 고재종 / 날랜 사랑 / 창비 / 2000년 12월 - 얼음 풀린 냇가 세찬 여울물 차고 오르는 은피라미떼 보아라 산란기 맞아 얼마나 좋으면 혼인색으로 몸단장까지 하고서 좀더 맑고 푸른 상류로 발딱발딱 배 뒤집어 차고 오르는 저 날씬한 은백의 유탄에 봄햇발 튀는구나 오호, 흐린 세월의 늪 헤쳐 깨끗한 사랑 하나 닦아 세울 날랜 연인아 연인들아 그리운 죄 - 고재종 - 산아래 사는 내가 산 속에 사는 너를 만나러 숫눈 수북이 덮힌 산길을 오르니 산수유 고 열매 빨간 것들이 아직도 옹송옹송 싸리울을 밝히고 서 있는 네 토담집 아궁이엔 장작불 이글거리고 너는 토끼 거두러 가고 없고 곰 같은 네 아내만 지게문을 빼꼼이 열고 들어와 몸 녹이슈! 한다면 내 생의 생생한 뿌리가 불끈 일어선들 그 어찌 ..

<정끝별> 디폴트값 / 모래는뭐래 / 세세세 / 과일의일과 / 깁스한시급

디폴트값 - 정끝별 - 얼마나 오래 혼자인가요? 얼마나 오래 말을 해본 적이 없나요? 얼마나 오래 날짜와 날씨와 요일과 요즘을 잊나요? 얼마나 오래 거울에서 얼굴을 보지 않나요? 얼마나 오래 여기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르나요? 얼마나 자주 자기를 웃어넘기나요? 얼마나 자주 누군가의 말과 눈빛에 베이나요? 얼마나 자주 이가 상할 정도로 이를 악무나요? 얼마나 자주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얼마나 자주 칼날에 혀를 대보나요? 얼마나의 해저를 산 채로 파고들어 저를 묻고 적을 묻다 두 눈이 불거지고 온몸이 투명해져 스스로 빛을 낼 때면 눈물에 부력이 생기고 가슴에 부레가 차올라 마침내 심해의 바닥을 치고 솟아오른다 언제나 너는 모래는 뭐래 - 정끝별 - 모래는 어쩌다 얼굴을 잃었을까? 모래는 무얼 포기하고..

<정끝별> 춘장대동백숲/기나긴그믐/가지가담을넘을때/가지에가지가걸릴때

춘장대 동백숲 - 정끝별 - 오백 년 동안 축축 늘어진 동백나무 가지가 바닥에 철렁 내려놓으며 들여놓은 동백나무 방들 ​ 미처 널어 말리지 못한 채 몇 철이나 쌓인 낙엽에 진 꽃에 어룽 햇살을 금침으로 깔아놓고 ​ 시간 없어 나 한 번 밖에 못했다며 젊은 아줌마를 앞세워 동백그늘을 나오는 아저씨라든가 그 나이에 한 번 허면 됐다며 추임새 좋게 동백 그늘에 드는 늙은 아줌마라든가 ​ 동백의 몸통은 쌍춘년 동백처럼 불끈불끈 동백의 팔다리는 춘삼월 정맥처럼 구불구불 ​ 봄이 길다는 춘장대 옆 마량리 화력발전소 뒤 그렇게 한 오백 년 동안 춘정의 봄군불을 때다 그만 벌겋게 데기도 하는 ​ 오백 년 된 동백숲의 온 몸 동력 내연(內燃)의 한 천년은 들고나겠네 기나긴 그믐 - 정끝별 - 소크라테스였던가 플라톤이었던..

<정끝별> 세상의등뼈/사랑의병법/은는이가/가스밸브/불선여정/강그라가르추

세상의 등뼈 - 정끝별 / 제22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 문학사상사 / 2007년 05월 - 누군가는 내게 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입술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어깨를 대주고 대준다는 것, 그것은 무작정 내 전부를 들이밀며 무주공산 떨고 있는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져 더 높은 곳으로 너를 올려 준다는 것 혈혈단신 땅에 묻힌 너의 뿌리 끝을 일깨우며 배를 대고 내려앉아 너를 기다려 준다는 것 논에 물을 대주듯 상처에 눈물을 대주듯 끝 모를 바닥에 밑을 대주듯 한 생을 뿌리고 거두어 벌린 입에 거룩한 밥이 되어 준다는 것, 그것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 사랑의 병법 - 정끝별 - 네가 나를 베려는 순간 내가 너를 베는 궁극의 타이밍을 일격(一擊)이라 하고 뿌리가 같고 가지 잎새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