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아름다운 문학

<한용운> 님의침묵 / 알수없어요 / 나룻배와행인 / 꿈과근심 / 복종

이름없는풀뿌리 2023. 8. 21. 06:29
님의 침묵 - 만해 한용운 / <님의 침묵> (1926) -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 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배기에 들어 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알 수 없어요 - 만해 한용운 / <님의 침묵> (1926) -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예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나룻배와 행인 - 만해 한용운 / <님의 침묵> (1926) -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어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어갑니다. ​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을 보았습니다 - 만해 한용운 / <님의 침묵> (1926) -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秋收)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 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이 없는 자는 인권(人權)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貞操)냐"하고 능욕하려는 장군(將軍)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激憤)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는 찰나(刹那)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정천한해(情天恨海) - 만해 한용운 / <님의 침묵> (1926) - 가을 하늘이 높다기로 정(情) 하늘을 따를소냐. 봄 바다가 깊다기로 한(恨) 바다만 못하리라. 높고 높은 정(情) 하늘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손이 낮아서 오르지 못하고 깊고 깊은 한(恨) 바다가 병될 것은 없지마는 다리가 짧아서 건너지 못한다. 손이 자라서 오를 수만 있으면 정(情) 하늘은 높을 수록 아름답고 다리가 길어서 건널 수만 있다면 한(恨) 바다는 깊을수록 묘하니라. 만일 정(情) 하늘이 무너지고 한(恨) 바다가 마른다면 차라리 정천에 떨어지고 한해에 빠지리라. 아아 정(情) 하늘이 높은 줄만 았았더니 님의 이마보다는 낮다. 아아 한(恨) 바다가 깊은 줄만 알았더니 님의 무릎보다는 얕다. 손이야 낮든지 다리야 짧든지 정(情) 하늘에 오르고 한(恨) 바다를 건너려면 님에게만 안기리라. 꿈과 근심 - 만해 한용운 - 밤 근심이 하 길기에 꿈도 길 줄 알았더니 님을 보러 가는 길에 반도 못 가서 깨었고나. ​ 새벽 꿈이 하 짧기에 근심도 짧을 줄 알았더니 근심에서 근심으로 끝간 데를 모르겄다. ​ 만일 님에게도 꿈과 근심이 있거든 차라리 근심이 꿈 되고 꿈이 근심 되어라. 복 종 - 만해 한용운 -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 하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해요 자유를 모르는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나는 잊고저 - 만해 한용운 - 남들은 님을 생각한다지만 나는 님을 잊고저 하여요 잊고저 할수록 생각하기로 행여 잊힐까 하고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 잊으려면 생각하고 생각하면 잊히지 아니하니 잊도 말고 생각도 말아볼까요 잊든지 생각든지 내버려 두어볼까요. 그러나 그리도 아니 되고 끊임없는 생각 생각에 님뿐인데 어찌하여요. ​ 구태여 잊으려면 잊을 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잠과 죽음뿐이기로 님 두고는 못하여요. 아아 잊히지 않는 생각보다 잊고저 하는 그것이 더욱 괴롭습니다. 사랑하는 까닭 - 만해 한용운 -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인 연 설 - 만해 한용운 - 세상 사람들은 참 어리석습니다 그리고 눈이 너무 어둡습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 스스로 우스워집니다 세상사람들은 먼먼 더 멀게만 느껴집니다 그러나 가까운 것은 벌써 가까운 것이 아니며 멀다는 것 또한 먼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가까운 것은 먼 곳에만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먼 곳도 가까운 것도 아닌 영원한 가까움인 줄 세상 사람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말이 없다는 것은 더 많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말이 많다는 것은 정작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사를 한다는 것은 벌써 인사가 아닙니다 참으로 인사를 하고 싶을 땐 인사를 못합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더 큰 인사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사랑하고 있는 사람 앞에선 사랑하고 있다는 말을 안합니다 안한다는 것이 아니라 못한다는 것이 사랑의 진리입니다 잊어버려야 하겟다는 말은 잊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는 말입니다 정말 잊고 싶을 땐 잊는다는 말이 없습니다 헤어질 때 뒤돌아 보지않는 것은 너무도 헤어지기 싫은 때문입니다 그것은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함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끝판 - 만해 한용운 - 네 네 가요, 지금 곧 가요. 에그, 등불을 켜랴다가 초를 거꾸로 꽂았습니다그려. 저를 어쩌나, 저 사람들이 흉보겠네. 님이여, 나는 이렇게 바쁩니다.님은 나를 게으르다고 꾸짖습니다. 에그 저것 좀 보아.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하시네. 내가 님의 꾸지람을 듣기로 무엇이 싫겠습니까. 다만 님의 거문고 줄이 완급을 잃을까 저어합니다. ​ 님이여, 하늘도 없는 바다를 거쳐서 느릅나무 그늘을 지워 버리는 것은 달빛이 아니라 새는 빛입니다. 홰를 탄 닭은 날개를 움직입니다. 마구에 매인 말은 굽을 칩니다. 네 네 가요, 이제 곧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