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아름다운 문학

<나희덕> 탱자꽃잎보다도얇은 / 마른물고기처럼 / 우포에서

이름없는풀뿌리 2023. 8. 22. 18:08
탱자꽃잎보다도 얇은 - 나희덕 - 탱자꽃잎보다도 얇은 나는 어제보다 얇아졌다 바람이 와서 자꾸만 살을 저며 간다 누구를 밸 수도 없는 칼날이 하루 하루 자라고 있다 ​ 칼날을 베고 잠들던 날 탱자꽃 피어있던 고향집이 꿈에 보였다. 내가 칼날을 키우는 동안 탱자나무는 가시들을 무성하게 키웠다. 그러나 꽃도 함께 피워 탱자나무 울타리 아래가 환했다 ​ 꽃들을 지키려고 탱자는 가시를 가졌을까 지킬 것도 없이 얇아져가는 나는 내속의 칼날에 마음을 자꾸 베이는데 탱자꽃잎에도 제 가시에 찔린 흔적이 있다 ​ 침을 발라 탱자가시를 손에도 붙이고 코에도 붙이고 놀던 어린시절 바람이 와서 탱자가시를 가져가고 살을 가져가고 ​ 나는 어제보다 얇아졌다 나는 탱자꽃잎보다도 얇아졌다 누구를 밸지도 모르는 칼날이 하루하루 자라고 있다 마른 물고기처럼 - 나희덕 / 사라진 손바닥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08월- 어둠 속에서 너는 잠시만 함께 있자 했다 사랑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네 몸이 손에 닿는 순간 그것이 두려움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너는 다 마른 샘 바닥에 누운 물고기처럼 힘겹게 파닥거리고 있었다, 나는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몸을 비벼야 하는 것처럼 너를 적시기 위해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비늘이 어둠 속에서 잠시 빛났다 그러나 내 두려움을 네가 알았을 리 없다 밖이 조금씩 밝아오는 것이, 빛이 물처럼 흘러들어 어둠을 적셔버리는 것이 두려웠던 나는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시든 비늘 위에. 아주 오랜 뒤에 나는 낡은 밥상 위에 놓여진 마른 황어들을 보았다 황어를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지만 나는 너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 황어는 겨울밤 남대천 상류의 얼음 위에 앉아 잡은 것이라 한다. 그러나 지느러미는 꺾이고 그 빛나던 눈도 비늘도 다 시들어버렸다. 낡은 밥상 위에서 겨울 햇살을 받고 있는 마른 황어들은 말이 없다. 고여 있는, 그러나 흔들리는 우포에서 - 나 희 덕 - 후두둑, 빗방울이 늪을 지나면 풀들이 화들짝 깨어나 새끼를 치기 시작한다 녹처럼 번져가는 풀, 진흙뻘을 기어가는 푸른 등 같기도 하다 어미 몸을 먹고 자란 우렁이 새끼들도 기어간다 물과 함께 흔들리고 있는 풀들 사이로 빈 우렁이 껍데기들 떠다닌다 ​ 기어가는, 그러나 묶여있는 고여있는, 그러나 흔들리는 ​ 비가 아니었다면 늪은 수만년을 어떻게 견뎠을까 무엇으로 흔들림의 징표를 내보였을까 ​ 후두둑, 후두둑, 후둑후둑.... 늪 위에 빗방울이 그려넣는 무늬들 ​ 오래 고여 있던 늪도 오늘은 몸이 들려 어디로 흘러갈 것만 같다.